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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詩案-이상하

굴어당 2009. 12. 17. 09:37

詩      案
필자 : 이상하 (조선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호수 : 제82호

  다른 언어 문자도 그렇겠지만 오늘날 한문 전적은 옛날의 글이기 때문에 역자는 문법 외에도 옛날의 문화나 관습을 알아야 뜻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다. 더구나 한시는 숨은 용사(用事)도 많거니와 행간(行間)에 드러나지 않은 뜻까지 파악해야 하므로 작자가 그 시를 지을 당시의 상황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10년 전 내가 민족문화추진회 국역실에 근무할 때이다. 《아계유고(鵝溪遺稿)》를 번역하였는데 ‘답호수견기(答湖叟見寄)’란 시에 “對月應思我 吟詩却怕人”이란 구절이 있었다. 나는 이것을 이렇게 번역하였다.

      달을 보면 응당 나를 생각할 터이지만 / 對月應思我
      시를 읊을 때는 도리어 사람을 두려워하리 / 吟詩却怕人

  그런데 한 분이 뒤의 구절을 “시를 읊을 때는 도리어 사람을 두렵게 하리.”로 고쳤기에 내가 그렇게 해석하는 까닭을 물었다. 그랬더니 그 분은 ‘사람을 두렵게 한다.’는 것을 ‘사람을 놀라게 하는 시구(詩句), 즉 경인구(驚人句)를 짓는다.’는 뜻으로 본다는 것이었다. 경인구란 두보(杜甫)가 그의 시 ‘강상치수여해세료단술(江上値水如海勢聊短述)’에서

      나의 성격이 좋은 시구를 몹시 좋아하여 / 爲人性癖耽佳句
      시어(詩語)가 사람을 놀라게 하지 않으면 죽어도 그만두지 않노라 / 語不驚人死不休

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그러나 위의 구절을 이렇게 번역하면 무엇보다도 ‘應’ 자와 ‘却’ 자가 서로 호응하지 못하여 두 구절의 연결이 어색해진다. 그런데도 왜 이렇게 해석하는 것일까 의아하여 ‘怕’ 자의 용례를 찾아보았더니 《한어대사전(漢語大辭典)》에 ‘怕人’이란 단어가 수록되어 있었으며, ‘사람을 놀라게 하다’는 뜻이 있었다. 그러니까 ‘怕人’이 《한어대사전》에 나오니, 그것을 근거로 ‘사람을 두렵게 하다’로 해석하고, ‘사람을 놀라게 한다’는 뜻으로 이해한 것이었다. 그러나 《한어대사전》의 ‘怕人’은 중국의 백화문으로 된 고전 소설 《수호지(水滸志)》와 《경화연(鏡花緣)》에 나오는 말이라, 그 용례를 한시에 그대로 적용해도 되는지는 알 수 없다.
위 두 구절을 다시 해석해 보자. ‘對月應思我’는 《고문진보전집(古文眞寶前集)》에 실려 있는 이백(李白)의 ‘강동으로 가는 장 사인을 보내며[送張舍人之江東]’에서

      오주에서 달을 보시거든 / 吳洲如見月
      천리 밖에 나를 생각해 주시게 / 千里幸相憶

라고 한 것을 차용하여, 멀리 있는 벗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형용한 것이다. 그리고 뒷 구절 ‘吟詩却怕人’은 당시 시국이 위태하여 자칫하면 죄안(罪案)에 걸려들 수 있기 때문에 시를 읊을 때 남들이 시구를 보지 않게 조심하는 것이다.
시가 빌미가 되어 죄를 받는 것을 시안(詩案)이라 한다. 송(宋)나라 원풍(元豊) 연간에 어사(御史)인 이정(李定)·서단(舒亶)·하정신(何正臣)이 소동파(蘇東坡)가 희령(熙寧) 이후로 지은 시들을 가지고 무함하여 옥사(獄事)를 일으킨 사건이 있었다. 어사대(御史臺)의 별칭이 오대(烏臺)이므로 이 사건을 ‘오대시안’이라 부른다. 그리고 이와 비슷하게 소동파에 관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또 《고문진보대전(古文眞寶大全)》 1권 황정견(黃庭堅)의 ‘자첨적해남(子瞻謫海南)’의 주(註)에 보인다. 소성(紹聖) 갑술년에 소동파가 좌천되어 영원군절도부사(寧遠軍節度副使)가 되어 혜주(惠州)에 안치되었다. 당시 소동파가 나부산(羅浮山)에 거처하면서 시를 짓기를,

      이르노니 선생이 봄잠을 달게 자고 있으니 / 報道先生春睡美
      도인은 오경 종을 치지 말라 / 道人休打五更鐘

라고 하였다. 선생은 동파 자신을 가리킨다. 당시의 집정(執政)이었던 장돈(章惇)이 이 시를 보고는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고 여겨 소동파를 다시 좌천시켜 담주(儋州)로 보냈다고 한다. 시안에 걸릴까 두려워하는 마음을 표현한 시구는 많다. 멀리 찾을 것도 없이 내가 번역한 책 중에서도 홍유손(洪裕孫)의 《소총유고(篠叢遺稿)》 ‘강루(江樓)’에서는

      어찌 좋은 시구가 없으랴만 기둥에 적지 않노니 / 豈無佳句休題柱
      노니는 사람이 취한 눈으로 볼까 두렵다 / 恐有遊人醉眼看

라고 하였고, 이정귀(李廷龜)의 《월사집(月沙集)》 16권 ‘송목우경부청풍(送睦禹卿赴淸風)’에서는

      외로운 거리에 칩거하며 손님이 올까 걱정이요 / 窮巷閉來愁客到
      이별의 시 다 지었으나 남이 전할까 두려워라 / 別詩題罷怕人傳

라고 하였다. 이 시들을 지을 당시 홍유손은 무오사화(戊午士禍)에 국문을 받고 제주도로 유배되었으며, 이정귀는 이미 계축옥사(癸丑獄事) 때 모함을 받고 사직한 터였다. 뿐만 아니라 홍언충(洪彦忠)의 《우암고(寓庵稿)》 2권 ‘진안도중음(眞安途中吟)’에서는

      남을 두려워하여 한가히 시구를 적지 않거늘 / 怕人不敢閑題句
      속절없이 푸른 벼랑만 열 길 높이로 가로놓였어라 / 謾有靑岸十丈橫

라고 하였고, 김의정(金義貞)의 《잠암선생일고(潛庵先生逸稿)》 3권 ‘무제(無題)’에서는

      슬픔을 풀 곳 없어 감히 시를 짓지만 / 無處宣哀敢作詩
      시를 지을 때는 도리어 남이 알까 두려워한다 / 題詩還復怕人知

라고 하였다. 이렇게 작자가 적소(謫所)에 있거나 시국이 혼란하여 처신을 조심하는 내용이 담긴 시의 예(例)는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 다른 본(本)에는 모두 ‘休打’가 ‘輕打’로 되어 있다.

출처 : 굴어당의 漢詩(唐詩.宋詩.漢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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