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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의 향기.조규상

굴어당 2010. 4. 16. 21:32

고전의 향기

고전은 역사의 진실을 밝히는 것이다.
거짓과 위선으로 미화해서 치장하는 것은 역사를 더럽히는 것이다.

고전은 역사의 향기다.
모든 과거사는 현실의 발판이요 디딤돌이다.
그리고, 미래의 등불이다.

고전은 역사의 진실에다 향수를 뿌리는 것이다.
만인의 심금을 울리는 진실의 소리가 지선(至善)함의 향기가 되어 사회전체가 진동하도록 뿌려지는 것이다.
만인의 가슴속 양심의 소리가 지선(至善)함의 향기가 되어 사회의 어두운 구석에서도 울려퍼지도록 뿌려지는 것이다.


☆사서(四書)의 하나인 대학(大學)을 배우고 나서, 큰 안목의 시각으로 인간의 길을 살피면 모든 인간은 사회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고 사회생활을 제대로 하려면 반드시 만인이 상부상조하며 합심협력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만인이 상부상조하며 합심협력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밝은 덕행을 밝혀서 사심없이 남에게 득이 되는 행동을 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과 모든 사람들을 그 상대로 할 때는 인간을 그 근본으로 생각할 줄 아는 친(親)함에 할 줄도 알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밝은 덕행을 밝히고자 하고, 친(親)함에 하고자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선(至善)함에 하고자 해야 한다는 것을 터득하게 된다.
사서(四書)의 하나인 대학(大學)을 제대로 배웠다고 하려면 지선(至善)이란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말인가에 대해서 제대로 알아야 한다.
지선(至善)에 대해서 제대로 알려면 선(善)이란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말인가? 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선(善)이란 말함이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인가에 대해서 제대로 알게 되면 인자함이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말인가를 알 수가 있고, 인자함이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말인가를 제대로 알게 되면 공자사상의 진수 역시 알 수가 있다.
그럼, 선(善)과 인(仁)이 어떠한 내용과 의미를 지니고 있는 말인가에 대해서 알아보자.
지금부터 언급되는 저의 견해를 조금이라도 인정할 수가 없는 측면이 있다면 어떠한 비판의 질책을 하신다 해도 달게 받아드리고자 하니 서슴없이 해주시길 바랍니다.
관리자의 고견을 듣고자 하며 아울러, 지난 번 게재된. 등록번호 1145 - 21세기 인류의 미래를 위해서는 의식혁명의 불꽃을 지펴라. 조규상 2010-02-17에 대한 고견 역시 함께 해주신다면 더욱 고맙겠습니다.
다만, 미리 언급해야 할 것은 저의 모든 견해는 새로운 학설을 근거로 한 독창적 견해라고 하는 점 감안하시길 바랍니다.


【 善- 착할 선 】
인자함이란 착한 마음씨를 가지고 말하는 것이므로 인자함을 제대로 알려면 착함이 무엇인지부터 제대로 알아야 하기에 착함이 무엇인지부터 말하고자 한다.
善이란 착할 선 즉, 착하다는 의미로, 착하다는 것은 남에게 인정을 베픈다고 느끼거나, 사심없이 남을 위하여 마음쓰거나 행동한다고 생각될 때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착함을 보면 누구나 좋은 마음씨요 좋은 행동함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나 그것은 자신만을 위하면서 살기도 힘든 세상사리를 하면서 사심없이 남을 위하여 그 힘을 쏟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착하다고 느끼면 누구나 좋은 마음씨나 좋은 행동함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물런 아름다운 마음씨요 아름다운 행동함이란 생각함을 대체로 곁들이게 마련이다.
반대로, 악(惡) 즉 악하다는 의미는 남을 해롭게 하는 나쁜 마음씀이나 나쁜 행동을 할 때 말하며 善과 惡이 서로 반대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면 그 이해가 쉬워진다.
착함이란 대체로 위와 같이 생각하면 되나 문제는, 남에게 인정을 베픈다거나, 사심없이 남을 위하여 마음쓰거나 행동한다는 의미는 누구나 알고 있는 내용으로서 그와같은 의미에 무슨 특별한 내용이 있겠느냐? 생각할지 모르나 착함에는 의외로 많은 내용의 깊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어서 충분한 살핌이 없이는 그 참된 진의를 제대로 안다고 말할 수가 없으며 지대한 이용가치 역시 제대로 활용하고자 할 수가 없다.
따라서 착함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자 하고 그 가치를 제대로 활용하고자 하려면 먼저 남에게 인정을 베플거나, 사심없이 남을 위하고자 하는 마음씨와 행동함에 어떠한 내용과 의미가 담겨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생활이나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어떠한 것인지 또 어떠한 근거로 그렇게 말하는지 구체적으로 정확히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고 하겠다.

그럼 먼저 착함의 발생근원에서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인간이란 누구나 자신의 생존을 그 바탕으로 해서 삶을 영위해 나가고 있는 한, 생존유지를 위한 보호본능을 가지고 있게 마련이며 그와같은 본능은 자신을 보호하고 유지하기 위한 수단과 방편으로 자신의 신체적인 모든 기능을 자기중심적이며 자기위주적인 방향으로 집중시켜 자신의 생존을 가능하게 하는 동시에 자신의 인격을 구축하고 그 인품을 구사하는데 있어서도 주도적 역할을 하게 한다.
따라서, 모든 인간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어떠한 생각이나 행동을 할 때는 일단은 자기본위중심의 생각과 행동을 하는 동시에 모든 생각과 행동을 자신을 위한 방향으로 유도하거나 조절하는 것을 선결조건으로 삼고 있으며 그와같은 태도는 어떠한 경우나 처지에도 자기우선의 자세부터 취하고 나서 여타 순서를 취하게 한다고 말할 수가 있다.
모든 인간은 언제 어떠한 상황과 형편에서도 위와 같은 방식으로 자신을 위한 적절한 선택과 거부의 생각과 행동을 할 수 있도록 하므로 자신의 생존유지를 가능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인간이 자신을 우선시하고 절대시하는 태도는 본능적인 행동으로서 어떠한 가르침이나 배움이 없이도 자연스럽게 취해지므로 이 점에 대해 사람들은 특별한 이해가 필요없는 당연스런 내용인 양 무심히 흘려버리나 그와같은 인간성에는 자신을 보호하고 유지하고자 진력하는 좋은(또는 고은) 마음씨와 행동함을 선천적으로 부여받았다고 하는 것이 되며 그것은 곧 모든 인간에게는 사심없이 자기 자신을 위하고자 하는 아름다운 성품 즉 착한 성품을 본래부터 가지고 태어났다고 하는 충분한 자료가 된다.
그러나 위와같은 자료의 제시만으로는 그 누구도 성선설(性善說)을 타당한 것으로 인정하려 아니한다.
무슨 연유에서일까?
그것은 인간의 본능적 성품의 생리가 비록, 자기중심적이요 모든 사고방식과 행동양식을 자기위함의 방향으로 풀어나가고 있고 아울러 자신을 위한 모든 사고방식과 행동양식을 일관성있게 처리할 수 있도록 도와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자기 자신을 위한 최선의 생각과 행동에도 할 수 있도록 해준다고는 말할 수가 있겠으나 그와같은 사실만으로 그것은 좋은 것이요 잘하는 것이라고 하는 발언은 자신의 입장에서나 할 수 있는 것이지 타인의 입장에서도 그와같이 말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자기본위중심으로 모든 것을 생각하고 행동한다는 것 자체가 타인의 입장에서 볼 때는, 나쁘다거나 해롭다고 생각되는 점이 더 많다고도 생각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자기본위위주로 생각하고 행동한다는 것은 곧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어떠한 생각과 행동도 할 수가 있다고 하는 것이 되므로 오로지 자기본위위주로 생각하고 행동한다는 것만을 놓고서 생각할 때는 그 자체가 남에게는 그만큼 많은 피해를 안겨줄 수가 있는 것이 된다는 의미가 되기도 하므로 자신의 성품을 보고 착한 것이라고 하듯이 남도 착한 것이라고는 말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즉, 인간의 인간성은 타인의 입장에서 볼 때는 태어날 때부터 선천적으로 남을 해하기에 충분한 악함을 지니고 태어났다고 하는 정반대의 생각을 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순자는 위와 같은 논리적 가설을 내세워 성악설(性惡說)을 주장하였으며 나 역시, 인간의 성품은 분명 자기본위중심의 자기위주적인 사고방식을 본래부터 가지고 태어났으며 그것은 동시에 남에게 어떠한 피해도 안겨줄 수가 있는 소지가 있는 것이라 인정하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을 전제로 할 때 취해지는 행동의 일환으로 자신을 오로지 하는 마음에 의해 생겨난 것이므로 그와같은 인간의 성품에 나는 지금 이 순간부터 《절대선》이란 명칭을 붙이고자 한다.
善· 惡의 논리를 제대로 살피려면 반드시 절대선에 대한 이해부터 명확히 짚고 넘어가야 한다.
절대선이란 모든 인간이 자신이란 유일하고 고유한 입장과 처지를 절대화시켜서 자신과 관계된 모든 사실들을 그 상대로 할 때 자기본위중심의 가치행위로 전개시켜 진정 자신만을 위한 사고방식의 생각과 행동에 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더 나아가 모든 생각함과 행동함 역시 일관성있게 처리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많은 지식과 지혜를 습득하고 활용함에 있어서도 분명한 인식의 명확한 생각과 행동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도 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와같은 인식을 발판으로 자기 자신에 대한 깊은 애정과 신뢰의 원동력이 되도록 하기도 하고 진정한 자기 발전과 그 유지에 최선을 다하도록 하기도 한다.
그러나, 절대선의 가치추구행위는 그 정도로서 그 끝을 맺지 아니하고 자신을 위한 순수한 이해를 남을 위한 이해로다 발전시켜 모든 인간들이 상호 간에 사심없이 애끼고 신뢰하는 동류애적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줄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하고자 할 때는 아무런 이해타산이나 요구조건없이 아낌없는 희생과 봉사의 정신과 행동에 하듯이 남을 위해서도 아무런 이해타산이나 요구조건없이 아낌없는 희생과 봉사의 정신과 행동에 할 수가 있도록 만들어서 가정과 국가는 물론 인류가 하나의 사회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일체감을 맛볼 수 있도록 해준다.
사랑이나 연민이 그 나름의 애착심과 자기만족을 위해 선행을 베푸는 것과는 달리 착함은 동류애의식을 그 기반으로 자신의 대한 모든 이해와 사랑의 일체를 사심없이 타인에게도 전달되도록 한다는 것이다.
《절대선》은 자기본위위주의 선행인 동시에 남을 그 상대로 해서도 대등한 방식의 선행을 제공할 수 있도록 해주는 선악의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양면성을 보고 맹자는, 인간의 성품은 악행의 소지보다 선행의 소지로 작용하는 측면이 더 크다며 그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서 강조하고는 성선설(性善說)을 주장하였다.
즉, 인간의 성품에서 측은지심(惻隱之心)이니, 수오지심(羞惡之心)이니, 시비지심(是非之心)이니, 사양지심(辭讓之心)이니 하는 선행의 소지를 취해 인간성이 선의적인 방향으로 작용할 수 있는 측면을 심화시켜 놓고는, 인간성 속에는 자신과 아무런 이해관계도 없이 남에게 호의를 베플 수가 있는 여지가 충만하므로 성선설은 당연히 그리고 마땅히 주장되어야 한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맹자나 순자의 학설은 다 같이 충분치 못한 이해 속에서 나온 주장들로서 맹자의 성선설은, 모든 善함이 절대선에다 그 바탕을 두고 있는 한, 자신의 모든 생각과 행동은 언제든지 자기본위중심의 생각과 행동 속으로 빠져들 수가 있다고 하는 약점에 대해서도 충분한 해명을 하고 넘어가야 마땅하나 그러하지 못하고 단순히 인간성적인 측면 속에서 선행으로 부각될 수 있는 측면만을 골라 놓고는 인간본래의 성품인 양 강조하므로 후세의 순자로부터 그 약점을 지적당하고 학설자체가 부정당하는 수모를 껵어야 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순자는 인간의 모든 선행은 다 절대선에다 그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이니 언제라도 자신의 강한 요구가 있게 되면 그 요구에 부응하게 마련이며, 또 절대선은 궁극적으로 자신의 요구를 거절하는 어떠한 의미의 생각과 행동도 배척하는 성향을 지니고 있어서 그것이 비록 자신이 아주 마땅하다 생각하고 자발적으로 호응한 착한 행동함이었다고 해도 그것은 한 때의 일시적인 행동이요 순간적인 모습으로 결국은 자신의 요구에 부응하는 인간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가게 마련이라는 근본적인 이해를 내세워서 맹자의 학설을 부정하였던 것이다.
인간이 살아가고 있는 사회란 자의든 타의든 많은 사람들이 많은 형태의 선행을 시도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어떠한 형태의 선행이든 어떠한 모습의 선행이든 그것은 절대선에다 그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이므로 모든 선행들은 언제라도 자신의 절대적인 요구가 있게 되면 그 본래모습으로 되돌아가지 않을 수가 없다고 하는 것이다.
인간의 모든 선행은 변함없이 꾸준하게 지켜질 수 있는 선행이 아니라, 일시적이요 거짓된 의미의 선행이라고 하는 주장을 순자가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순자의 성악설(性惡說) 역시, 절대선의 의미를 너무 일방적으로 소화해서 주장한 학설이다.
왜냐하면, 절대가치행위란 언제나 보다 나은 가치를 위하여 보다 못한 가치를 제어하며 자기발전에 최선을 다하게 마련인데 순자는 절대선의 특수한 성격적 측면을 너무 소홀히 생각하는 일방적인 주장을 하였기 때문이다.
일례로, 살신성인(殺身成仁)을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가 있는데 그것은, 인간이란 누구나 자기능력의 한도 내에서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최선의 행동에 언제나 할 수 있도록 그 마음의 문을 열고 있다는 의미로서 그와같은 마음가짐의 정신자세는 감성적 차원에 머믈러 있지 아니하고 이성적 차원의 수준으로 자신의 생각함과 판단함을 끌어올려 보다 가치있고 바람직한 인간상 속으로 자신을 승복시켜 결과적으로는 자기희생도 가능하게 하고, 살신성인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착함이란 그 생각함이나 행동함을 어떻게 하였느냐? 로 이루어지는 것이지 인간본래의 성품만을 놓고 미리 단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따라서, 인간의 본래의 성품만을 놓고 性善說과 性惡說중에 어떤 것이 옳다고 미리 단정해서 주장한다는 것은 잘못되어도 크게 잘못된 것이다.
인간을 위한 모든 행동은 그때그때 상황과 형편에 따라야 마땅하고 그 상황과 형편 속에서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는가? 로 그 가치가 결정되는 것이므로, 착하다. 아니다. 고 하는 의미는 미리 단정해서 말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다.
착함이란 인간성적인 측면 즉, 자신의 내적인 요인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외적인 여건과 함께 어우러져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모든 선함이 이루어질 때는 그 바탕을 절대선에다 두고는 있으나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판단과 선택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다.
그래,『논어- 안연편 1장』에서 「인자함이란 몸에서 말미암아 사람됨에서 말미암느니라. -爲仁由己 而由人乎- 由- 말미암을 유. 己-몸 기. 人-사람됨이 인.」 고 공자께서 말씀하신 것이다.
선행의 길이란 자신에 그 바탕을 두고는 있으나, 스스로 선행을 하고자 하는 의지와 분발함이 없이는 그 뜻함을 이룰 수가 없다고 하는 암시를 해 주었던 것이다.
선행의 길이란 인간본래의 마음가짐도 중요하지만 인간본래의 마음가짐이 아무리 훌륭하다고 해도 그 실천을 위해서는 많은 지식과 능력이 필요하며 아울러 많은 노력과 수고가 없이는 무의미하다는 것 역시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룸을 위해서는 반드시 사회적이나 교육적 측면의 배려가 뒤따르게 되므 그와같은 측면의 고려가 없이는 선악의 의미를 놓고 논쟁하고자 하는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사회적 의미의 善함이란 자신을 그 상대로 해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남을 그 상대로 해서 이루어지고 있는 사회적 필요와 요구에 의해 생긴 이념이기 때문이다.
만약, 모든 인간이 혼자서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면 그 생각이나 행동의 좋고 나쁨에 대한 어떠한 구애도 받을 필요가 없으며 아울러 어떠한 통제나 제약도 받을 필요가 없는 것이며 오로지 자신만을 위한 최선의 생각과 행동에 한다고 해도 무방하다는 의미다.

善惡에 관한 의미를 제대로 논하고자 하려면 善과 惡은 사회적인 필요와 요구에 의해 생겨난 이념이라고 하는 점부터 제대로 알고자 해야 하며 그 의미는 사회제도나 생활관습에 많은 영향을 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필요와 요구에 따라서 여러가지 형태의 다양한 모습으로 변하기도 하고, 개인의 가치기준에 따라서 각양각색의 신축성있는 자세를 취하기도 한다.
그리고 인류모두가 한 마음 한 뜻이 되어서 상부상조하며 하나의 사회가 되도록 도운다고 하는 측면에 대해서도 충분하게 납득하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의미에서 선악의 의미파악은 인간본래의 성품속에서만 살피려고 들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측면이나 교육적인 측면과 같은 인간외적인 측면으로도 함께 살펴야 만이 그 참된 진상을 밝힐 수 있다고 하겠다.
한마디로 선과 악의 문제는 사회적인 필요와 요구의 문제로서 모든 인간의 권리를 대등하게 생각하고 배려하려는 동류애의식 속에서 생겨난 이념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이제까지 말한 것을 대충 간추려 보면 善함이란 자기 자신을 위해 베푸는 마음과 행동을 남에게도 똑같이 베푸는 아름다운 마음이요 행동이라 말할 수가 있으며 그 뿌리는 자기 자신이므로 자신에 대한 이해와 사랑이 크면 동시에 선행의 여지도 따라서 커지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또한 착함이란 내가 나를 생각하듯 상대방을 생각하는 것이므로 그 생각함이 상대방의 마음속에다 그 뿌리를 내려서 진정한 의미의 동류애의식을 인류전체에 구축하게 한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도 안 된다.
善함은 인류모두에게 공동체의식을 심어주고 그 공감대를 바탕으로 이질감없는 하나의 사회를 구축하도록 해서 사회발전과 번영에 초석이 되어 줄뿐만 아니라 건강하고 활력있게 사회로 만들어서 이끌어주는 원동력이요 그 모든 의미의 기폭제 역할을 하는 큰 뜻함을 가진 것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참고문장
『도덕경49』
착한 자는 나에게도 착하나 착하지 못한 자라고 해도 나에게는 다 착하니라. 착함을 얻음이니라.
*원문과 원문어의
- 善者吾善之 不善者吾亦不善之 得善. - 善-착할 선. 吾-나 오. 亦-다 역. 得-얻을 득.
『문장풀이』
남에게 착한 자는 자신에게도 착하나, 남에게 착하지 못한 자라 해도 자신에게는 착한 법이니라.
인간이란 누구나 자기 자신에 대해서만은 착하게 행동한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노자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한 것이다. - 성인이라 해도 사람됨에 의지하고 있으면서 천하에서 숨쉬고 있는 한, 천하를 흐리는 마음에 하게 된다. 그 눈과 귀로서 살피고 자신의 감정에 의지하고 판단을 하는 한 그 잘못을 범함에 있어서는 성인도 범인과 다를 것이 없다. 그러므로 성인도 때로는 어린아이처럼 행동한다. -고
인간이란 누구나 자기 자신에 의지하고 사는 한 인간적인 잘못됨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도덕경54』
착함으로 세우면 빼질 못하고, 착함으로 안으면 벗어나지 못한다. 자손이 제사를 걷우지 못함이다.
*원문과 원문어의
- 善建者不拔 善抱者不脫 子孫以祭祀不輟 - 善-착할 선. 建-세울 건. 拔-뺄 발. 抱-안을 포. 脫-벗어날 탈. 子-자식 자. 孫-손자 손. 祭-제사 제. 祀-제사 사. 輟-걷을 철.
『문장풀이』
착함이란 그 마음속으로부터 우러러나서 자발적으로 하고자 하는 것이므로 한번 하고자 하는 마음먹으면 그 누구도(자기 자신마저도) 그 뜻함을 빼버릴 수가 없다.
자신이 직접 공감하고 호응해서 자발적으로 하고자 하는 것이므로 일단 하고자 하는 마음을 먹게 되면 그 누구도 부정하거나 거부하도록 할 수가 없다는 의미다.
착함은 자신을 생각하듯 남을 생각하는 것이므로 착함으로 안으면 그 누구도 그 품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같은 인간의 심정으로 헤아려서 행동하는 것이므로 그 배려가 베플어지면 그 배려를 마땅히 거절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착함이란 남을 위하고자 할 때 같은 인간의 마음을 가지고 위하고자 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언제나 상대방의 입장과 처지에서 생각하며 위하고자 하는 것이기도 하므로 상대방이 거절하려고 해도 마땅히 거절할 수가 없다고 하는 의미로서 그와같은 생각함은 상대방의 마음속에다 그 뿌리를 내리고 있어서 벗어나고자 해도 벗어날 도리 역시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모의 자식사랑에 자식들은 그 부모를 영원히 잊지 못해하고, 조상들이 자손을 생각하는 것에 자손들은 조상을 언제까지나 잊지 못해하며 그 보답의 답례로서 제사지냄을 거두지 못한다고 하는 것이다.
부모의 자식사랑은 착함으로서 하는 것이요, 조상들이 자손을 생각하는 것 역시 착함으로서 하는 것이기에 그 뜻함을 맛본 후손들은 그 고마움을 가슴속 깊이 간직하고서 언제까지나 잊지를 못해한다는 것이다.
그래 『중용』에서도 - 효도함이란 착한 사람됨에 뜻함을 이음이요, 착한 사람됨에 섬김을 좇는 것이다.-고 한 것이다. *원문과 원문어의 -夫孝者 善繼人之志 善述人之事者也.- 孝-효도할 효. 繼-이을 계. 人-사람됨이 인. 志-뜻할 지. 述-좇을 술. 事-섬길 사.

『도덕경27』
착함으로 다닌 자국에는 자취가 없고, 착함으로 말함에는 흠이 되어 죄를 짐이 없고, 착함으로 셈하는 데는 숫가지를 쓰지 아니하고, 착함으로 닫으면 문빗장으로 닫음이 없어도 가히 열지를 못한다. 착함으로 맺으면 줄로 묶지 아니해도 가히 풀지를 못한다.
이로서, 성인은 항상 착함으로 사람을 구원한다. 그러므로 사람을 버림이 없다. 항상 착함은 헤아려 구원한다. 그러므로 헤아림을 버림이 없다. 이런 것을 밝힘에 인한다고 하느니라. 그러므로 착한 사람인 자는 착하지 못한 사람처럼 본받고 착하지 못한 사람인 자는 착한 사람처럼 취한다. 그 본받음은 귀함에 못하고 그 취함은 사랑에 못함이다. 비록 지혜로움에 미혹함이 커도 이를 가지고 묘함을 구한다.
*원문과 원문어의
- 善行無轍迹 善言無瑕 善數不用籌策 善閑無關楗而不可開 善結無繩約而不可解 是以聖人 常善救人 故無棄人 常善救物 故無棄物 是謂襲明 故善人者 不善人之師 不善人者 善人之資 不貴其師 不愛其資 雖智大迷 是謂要妙. - 善-착할 선. 行-다닐 행. 無-없을 무. 轍-차바퀴자국 철. 迹-자취 적. 言-말할 언. 瑕-옥티 하. -죄질 적. 數-셀 수. 用-쓸 용. 籌-숫가지 주. 策-꾀 책. 점칠 책. 閉-닫을 폐. 關-닫을 관. 楗-문빗장 건. 可-가히 가. 開-열 개. 結-맺을 결. 繩-줄 승. 約-맺을 약. 解-풀 해. 是-이 시. 常-항상 상. 救-구원할 구. 人-사람 인. 棄-버릴 기. 物-헤아릴 물. 襲-인할 습. 明-밝힐 명. 故-고로 고. 師-본받을 사. 資-취할 자. 貴-귀할 귀. 愛-사랑 애. 雖-비록 수. 智-지혜 지. 大-큰 대. 迷-미혹할 미. 要-구할 요. 妙-묘할 묘.
『문장풀이』
착함이란 자신을 위해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해서 행동하는 것이므로 내가 다니고도 내가 다녔다고 하는 자취가 남아 있지 아니하다. 다니기는 다녔으나 남을 위해서 다녔기 때문이다.
착함으로 말하는 자는 선의의 각도로 그 뜻함을 취할 뿐이기에 그 말함에 비록 그릇됨이 있다고 해도 그 말한 것이 죄가 되지는 않는다. 죄란 남을 해롭게 하는 속에서 빗어지는 것이지 남을 위하고자 하는 마음으로는 빗어질 수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나를 위하고자 할 때는 어떠한 노고와 희생이 있어도 달게 감수하고 용납하듯이 진정 착함으로 남을 위하고자 하는 행동은 계산적이지 아니하다. 모든 것을 넓은 이해와 관용으로서 구하고자 할 뿐이기 때문이다.
착함으로 결심한 선택은 어떠한 수단과 방법으로도 그 문을 열도록 할 수가 없다. 그 마음속에서 우러나 선택한 결정은 그 선택을 어떤 식으로도 부정하거나 거부하도록 권유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착함으로 맺은 언약은 마음과 마음이 통하여 맺어진 것이라 어떠한 맹서나 서약이 없다고 해도 그 언약을 풀도록 할 수 없다. 상호 간에 직접 공감하고 호응해서 지키고자 하는 것이므로 그 마음이 자발적으로 부정하지 아니하고는 그 관계를 풀려고 해도 풀 수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인은 항상 착함으로서 사람들을 구원하기에 어떠한 경우에도 사람들을 버리지 아니한다. 그러나, 아무리 착하다고 해도 남을 제대로 위하고자 하려면 반드시 헤아려서 뜻해야 한다.
이를, 밝힘에 인한다는 것이다.
또, 진정으로 착함에 하려면 남의 행동을 그대로 흉내를 내거나 모방하려고 해서도 안 된다.
상대방을 진실로 위하고자 하려면 항상 상대방의 입장과 처지에 맞게 뜻해야 하는 것이므로 다른 사람의 생각과 행동을 그대로 흉내내거나 모방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에게는 다 존중되어야 할 그 나름의 입장과 처지를 가지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진정 나를 위하고자 하려면 나의 입장과 처지에 맞게 생각하고 행동해야 하듯이 다른 사람을 위해서 행동하려면 반드시 그 사람의 입장과 처지에 맞게 생각하고 행동해야 하는 것이므로 남의 행동을 그대로 본받는 자는 착하지 못한 것이요, 남의 행동을 그대로 본받지 아니하는 자를 착하다고 말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 본받음은 진정 귀함이 아니요, 그 취함은 진정 사랑함이 아니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지혜로움에 비록 많은 부족함이 있다고는 해도 착함은 인생사리의 온갖 세파를 헤쳐나갈 수 있도록 해주는 묘함을 인간에게 제공해 준다고 하는 것이다.

『논어- 선진편 19장』
자장이 착한 사람됨의 도를 묻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자취를 밟지 아니하면 다 방으로 들지 못하니라.”
*원문과 원문어의
- 子張問善人之道 子曰 不踐迹 亦不入於室. - 問-물을 문. 善-착할 선. 人-사람됨이 인. 道-도 도. 踐-밟을 천. 迹-자취 적. 亦-다 역. 入-들 입. 室-방 실.
『문장풀이』
“착한 사람됨에 하며 인간의 길을 가고자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자장이 묻자, 공자께서 응답하신 것이다. “사회인으로서의 인간의 길을 착하게 살면서 가고자 하려면 무엇보다도 밝게 생각하고 행동할 줄 알아야 하는 만큼, 보다 많은 지식과 능력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매사에 많은 수고로움과 노력이 뒤따라야 한다. 따라서 착함에 하려면 보다 많은 배움이 있어야 하고 그와같은 배움에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선현선배의 도움이 필요한 것이다. 다시 말해 착함에 하려면 남을, 자신과 마찬가지로 생각하면서 도와야 하는 만큼 그 사고영역이나 행동반경이 그만큼 넓고 커야 할 뿐만 아니라 보다 많은 지식과 능력이 필요하며 그와같은 지식과 능력을 얻기 위해서는 혼자만의 노력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일면이 있으므로 반드시 선현선배의 도움을 받고자 해야 한다.” 고

『논어-옹야편 7장』
계씨가 민자건을 비읍의 책임자로 삼으려 하자, 민자건이 말했다. “착함에 하려는 제가 어찌 사양하겠습니까? 사양함을 아니하면 나로 인한 결과가, 나 반드시 위로 욕되게 함이 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원문과 원문어의
- 季氏使閔子騫爲費宰 閔子騫曰 善爲我辭焉 如有復我者 則吾必在汶上矣.- 閔子騫-공자의 제자. 효성이 지극했다. 費-계씨 영역의 읍명으로 요충지였다고 함. 宰-맡을 재. 善-착할 선. 爲-하 위. 我-나 아. 辭-사양할 사. 復-돌아올 복. 吾-나 오. 必-반드시 필. 在-있을 재. 汶-욕될 문. 上-윗 상.
『문장풀이』
계씨가, 민자건을 요충지인 비읍의 책임자로 삼으려고 하자, 민자건이 사양하며 그 이유를 밝힌 문장이다. “착하게 살고자 하는 자로서 어찌 남의 호의를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냥 거절할 수가 있겠습니까? 제가 사양하는 것은 오로지, 비읍의 책임자로서 그 능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제가 자신의 분수는 생각지도 아니하고 어르신내의 호의만을 고맙게 생각하며 허락한다면 오히려 어르신내에게 욕된 결과만을 보여드리게 될 것입니다.” 고
착함이란 베플고자 하는 상대방에 선처가 될 때 그 의미가 있는 것이므로 자신의 마음가짐에 잘못됨이 없다고 하는 것만으로는 착함으로서 인정받을 수가 없다고 하는 것이다.
그 의도가 아무리 좋은 것이라고 해도 자신의 의도만을 내세워서 일방적 자세로 행동하려고 든다거나 고집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다.
상대방을 진심으로 위하고자 한다면 제대로 알고서 행동해야 하듯이 착하려면 반드시 상대방의 입장과 처지에 적합한 생각과 행동을 취해서 좋은 결과를 안겨줄 수가 있을 때 비로소 착함으로서 인정받을 수가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의도의 행동도 지혜롭게 처리하지 못하면 오히려 역효과를 자초하기 십상이라는 것이다.

【 仁- 인자할 인 】
인자함이란 착한 마음씨와 착한 행동 중에서 착한 마음만을 가리켜서 말하는 것이다.
다만, 인자함과 착함에 차이점이 있다고 하면 인자함은 그 상대를 인간으로 한정하고 있는 반면, 착함은 그 상대에 구애받음이 없다고 하는 점이다. 즉, 인간을 그 상대로 해서 착한 마음을 쓸 때는 인자하다고 말할 수가 있으나, 인간이 아닌 동물이나 그 밖에 다른 대상들을 그 상대로 해서 착한 마음을 쓸 때는 인자하다고 말하면 잘못이라는 것이다.
인자함은 착한 마음 즉 남에게 인정을 베프는 마음이나, 사심없이 남을 위하여 그 마음을 쓸 때 말하는 것으로서, 자기 자신을 위해서 마음쓰거나 행동할 때는 어떠한 노고와 희생이 있어도 아무런 댓가없이 달게 감수하듯이 다른 사람을 위해서도 똑같은 마음으로 사심없이 그 마음을 쓸 때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자함은 인간이 다른 사람에게 베플 수가 있는 최대의 관용과 호의를 베프는 것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논어-술이편 29장』에서「인자함이란 멀리하는 것일까? 내가 인자하고자 하면 이에 인자함이 이르게 되는 것이다. -仁遠乎哉 我欲仁 斯仁至矣-」고 하였듯이, 인자함이란 자신이 인자함에 하고자 하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할 수가 있는 것이다.
남을 위하고자 하는 마음이란 어떠한 지시나 가르침이 없이도 자신이 하고자 하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할 수가 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자함이란 하기는 쉬워도 인자함에 제대로 하려면 많은 어려움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인생이란 파고는 자신만을 위하면서 살기도 힘든데 남을 자신과 마찬가지로 생각하며 마음쓰려면 아무리 작은 것이라 해도 실천하기 쉽지 아니한 경우가 너무나도 많이 있기 때문이다.
또, 자신을 위하고자 할 때는 자신의 입장과 처지만을 생각하면 되나 남을 자신과 마찬가지로 생각하며 위하고자 할 때는 상대방의 입장과 처지를 제대로 알아야 할 뿐만 아니라 사회도리를 중시하되 객관적 관점으로 살피고 판단해서 처리해야 하는 만큼 처리하기가 아주 복잡하고 힘들 때가 있으며 때로는 자신이 감당하기 힘든 많은 것들이 요구되기도 하므로 실천하기 역시 쉽지가 아니한 것이다.
특히, 위정자로서 인자하고자 할 때는 백성들을 자신을 생각하듯 생각해야 할 뿐만 아니라 매사에 사회도리를 존중하고 준수하는 자세로 그 마음을 베플고자 해야 하므로 일반인보다 훨씬 많은 이해와 노력이 요구되며 따라서 감당하기 역시 쉽지가 아니하다.
위정자로서 인자함을 베플고자 할 때는 경우에 따라서는 아주 많은 지식과 지혜가 필요로 함은 물론 보다 많은 노력과 수고의 희생정신이 요구되며 아울러 굳은 결의와 의지가 있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남을 진심으로 위하고자 한다는 것은 자신의 마음가짐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열과 성의를 다해서 진심으로 위하고자 한다 해도 제대로 모르면서 위하고자 하면 무의미할 수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며 또한, 자기희생의 감수자세가 없이는 좋은 결실 역시 맺기가 힘들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래, 『논어-양화편 8장』에서 「인자함을 좋아하나 배움을 좋아하지 아니하면 그 가림으로 어리석어진다.-好仁不好學 其蔽也愚-」고 한 것이다.
아무리 가치가 있고 유익한 행동이라 해도 제대로 알고 바르게 행동할 줄 모르면 오히려 역효과를 자초할 수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인간이란 그 누구나 그때그때 상황과 형편에 맞춰서 처신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므로 인자함 역시, 그때그때 상황과 형편을 외면하는 선입견이나 고정관념으로는 제대로 뜻할 수가 없다고 하는 것도 알아야 하며 아울러, 모든 인간의 능력과 기량에는 언제나 한계가 있어서 굳은 신념과 의지가 없이는 제대로 처신하기가 힘들다고 하는 점도 명심해야 한다.
그래 『논어-옹야편 5장』에서 「안연은 그 마음이 석 달은 인자하기에 어김을 못한다. 그 남어지는 하루나 한 달이면 그친다. - 回也, 其心三月不違仁 其餘 則日月至焉而已矣. -」고 한 것이다.
인간의 처지란 시시때때로 변화하고 그 모습이 바뀌는 현실에 응해서 한번 마음먹은 바 뜻함을 고수하기란 결코 쉽지 아니하다는 것으로서 항상 변화하고 있는 인간의 생활환경속에서 한번 마음먹은 바 뜻함을 변함없는 자세로 고수하기란 그 인품이 아무리 뛰어나고 굳은 신념과 의지를 지니고 있다 해도 감당하기가 쉽지 아니하다는 것이다.
또, 인자함이란 법이나 윤리·도덕을 지키고자 하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위하고자 하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므로 인자한 자는 매사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살펴서 해결하고자 하게 마련이기에 밝고 건강한 사회를 위해서는 누구에게나 절대로 필요한 마음가짐의 정신자세라고 말할 수가 있다.
또, 인자함은 모든 인간관계에 상호 인식의 고리를 같이 할 수 있도록 만들어서 사회적인 관계의 결속을 굳게 다져주고 실수와 허물이 있어도 관용과 이해로서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하며 정성을 다하도록 하므로, 공자께서는 혼란한 당시 세태를 법이나 윤리·도덕과 같은 사회규범으로 극복하려 들지 아니하고 인자함으로 해결하려고 들었던 것이다.
공자께서, 인자함을 특별히 강조하셨던 것은 인자함이 난세를 극복하는데 가장 효과가 있다고 보았기 때문으로 사회적인 모든 문제는 인간의 문제이며 모든 문제의 근본적 해결은 인간의 마음가짐과 정신자세에 달려 있는 것이므로 그 해결의 열쇠로 착함보다는 인자함에다 더 비중을 두셨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유의해야 할 것은 공자께서 인자함에 아무리 많은 비중을 두고 자신의 사상을 전개시켜 나갔다고 해도 공자사상을 인자함을 위한 사상인 것처럼 생각해서는 곤란하다는 것이다.
공자사상의 궁극적 목적은 인자함이다. 덕행이다. 도다. 예도다. 하는 것을 얻고자 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위하고자 하는데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공자께서 인자함을 논하고, 덕행을 논하고, 도를 논하고, 예도를 논하셨던 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을 위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과 방편으로서 취하신 것이라고 하는 의미다.

『논어- 리인편 1장』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마을의 인자함은 아름답기는 하나, 가려서 인자할 곳에 못하거늘 어찌 지혜롭다고 하랴.”
*원문과 원문어의
- 子曰 里仁爲美 擇不處仁 焉得知. - 里-마을 리. 仁-인자할 인. 착한 마음씨. 擇-가릴 택. 處-곳 처. 知-지혜 지.
『문장풀이』
시골마을에서 사는 사람들이 생활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이웃 간에 정(情)을 두텁게 나누면서 지내는 착한 마음씨들을 지니고 있어서 그 마음씀씀이가 아름답다고는 하겠으나, 제대로 가려서 뜻할 줄 모르는 바 있으니 비록, 인자하다고는 해도 지혜로운 것이라고는 말할 수가 없다고 하겠다.
착함이 지나치면 어리석은 것이 되고 말듯이 인자함 역시, 그 의도가 아무리 좋다고 한다 해도, 제대로 알고서 행동해야지 엉뚱하게 알고서 행동한다면 오히려 역효과를 자초해 피해를 안겨주게 될 뿐이다.
시골마을에서 사는 사람들은 대체로 제대로 배우지를 못한 연고로 인해 사리판단을 할 때는 부족함을 느끼게 하는 경우가 제법 있다는 것으로서 그런 연고로 그들은 인자함과 같은 좋은 마음씨의 행동에 하면서도 그 효과를 제대로 맛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인자함이란 그 몸에서부터 비롯되는 본능적인 행동이라고도 말할 수가 있는 것이기에 그 누구나 할 수가 있는 것이기는 하나 그 효능을 제대로 맛보려면 반드시 지혜로움으로 갈고 닦아서 가치가 있게 꾸미고자 할 줄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 의도가 아무리 좋다고 한다 해도 가치가 없게 행동하면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말듯이 모든 행동은 지혜로움으로 갈고 닦아 꾸밀 줄을 모른다면 진정한 의미의 가치있는 행동이 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논어- 안연편 1장』
안연이 인자함에 대해 물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몸을 이기고 예도에 돌아오는 것은 인자함에 하는 것이요, 단 하루라도 몸을 이기고 예도에 돌아오는 것은 천하에 인자함을 허락하는 것이다. 인자함에 하는 것은 몸에서 말미암아 사람됨에서 말미암느니라.” 안연이 말했다. “조목을 말씀해 주십시요.)”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예도를 성심으로 사랑함에 보는 것이 아니요, 예도를 성심으로 사랑함에 듣는 것이 아니요, 예도를 성심으로 사랑함에 말하는 것이 아니요, 예도를 성심으로 사랑함에 움직이는 것이 아니니라.” 안연이 말했다. “제가 비록 불민하오나 이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원문과 원문어의
- 顔淵問仁 子曰 克己復禮爲仁 一日克己復禮 天下歸仁焉 爲仁由己 而由人乎哉 顔嚥曰 請問其曰 子曰 非禮勿視 非禮勿廳 非禮勿言 非禮勿動 顔淵曰 回雖不敏 請事斯語矣. - 顔淵-공자의 수제자. 이름은 回. 問-물을 문. 仁-인자할 인. 克-이길 극. 己-몸 기. 復-돌아올 복. 禮-예도 예. 爲-할 위. 歸-허락할 귀. 由-말미암을 유. 人-사람됨이 인. 請-청할 청. 目-조목 목. 非-아닐 비. 勿-성심으로사랑할 물. 視-볼 시. 聽-들을 청. 言-말할 언. 動-움직일 동. 雖-비록 수. 敏-민첩할 민. 事-섬길 사. 斯-이 사. 語-말씀 어.
『문장풀이』
그 몸을 이기고 예도에 한다는 것은 자신을 절제할 수가 있어야 만이 예도에 할 수가 있다는 것이요, 자신을 절제함이란 상대방을 존중하고 배려하기 위한 행동이니 예도에 한다는 것을 곧, 남을 위해서 그 마음을 쓴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도에 하는 것을 인자함이라고 하는 것이다.
또, 예도란 모든 사람들에게 통하는 행동양식이기도 하므로 단 하루라도 자신을 이기고 예도에 한다는 것은 곧 천하에다 그 행동함이 용납되도록 하는 행위요 그것은 곧, 천하를 존중하고 천하를 위해서 자신이 절제를 한다는 것이니 천하에다 인자함을 허락함인 것이다.
『논어-옹야편 28장』에 보면 「인자함이란 몸에서 세우고자 하는 것을 사람됨에서도 세우고, 몸에서 사무쳐 하고자 하는 것을 사람됨에서도 사무쳐하는 능히 가까운 취함을 비유하여 가히 인자함에 했다고 하는 것이다. -夫仁者 己欲立而立人 己欲達而達人 能近取譬 可謂仁之方也已. -」고 하였듯이, 인자함은 그 몸에서 비롯되나, 그 이룸은 인간을 위하고자 하는 인간됨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인자함이란 진심으로 인간을 위하고자 마음이요, 예도란 인자함을 실천하는 수단이요 방법인 것이다.
그러므로, 공자께서는 “인자함이란 예도를 성심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성심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보는 것이요, 예도를 성심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듣는 것 아니라 인간을 성심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듣는 것이요, 예도를 성심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말하는 것 아니라 인간을 성심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말하는 것이요, 예도를 성심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움직이는 것 아니라 인간을 성심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움직이는 것이니라.” 고 하신 것이다.
인간이 예도에 하는 것은 인간을 위한 하나의 수단과 방법으로 취하는 것이니 예도에 할 때는 언제나 예도를 위한 예도에 하지 말고 인간을 위한 예도에 하라는 것이다.
진심으로 인간을 위하고자 하는 착한 마음이 없이는 진정한 의미의 예도에 할 수가 없다고 하는 뜻이기도 하다.

『논어- 옹야편 24장』
재아가 물었다. “인자한자에게 비록 고한들 우물에니 어찌 인자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도 따라야 합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어찌, 그렇다고 하는 것만으로 하겠느냐. 군자는 가히 갈 것이나 가히 빠지게는 못하고, 가히 속일지라도 가히 흐리게는 못하니라.”
*원문과 원문어의
- 宰我問曰 仁者雖告之曰 井有仁焉 其從之也 子曰 何爲其然也 君子可逝也 不可陷也 可欺也 不可罔也. - 宰我-공자의 제자. 雖-비록 수. 告-고할 고. 井-우물 정. 有-있을 유. 仁-인자할 인. 焉-어찌 언. 從-따를 종. 何-어찌 하. 爲-할 위. 然-그렇다할 연. 可-가히 가. 逝-갈 서. 陷-빠잘 함. 欺-속일 기. 罔-흐릴 망.
『문장풀이』
공자의 제자로 언변은 뛰어났으나 어질지가 못했던 재아가 말한 의도는 - 아무리 인자하고 싶다 해도 상황이나 형편이 여의치 못하면 어쩔 수가 없는 것 아닙니까? 가령, 어린아이가 깊은 우물에 빠져있다고 한다면 아무리 구하고 싶다고 해도 아이를 구하려고 뛰어들 수는 없는 것이 아닙니까? 상황이야 어떻든 결과야 어찌되든 그래도 인자하고자 뛰어들어야 합니까? 하면서 매사에 인자하기를 강조하는 공자에게 그 누가 뭐라고 해도 위와 같은 상황이나 형편에서, 인자하고자 우물로 뛰어들고자 하는 것이 무리요 잘못된 것이 아닙니까? 마찬가지로, 인자함이 사회생활의 모든 방면에서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 역시 지나친 것 아닙니까? 道가 없는 어지러운 사회에서는 자신만을 살피면서 살아가기도 쉽지가 않은 법인데 매사에 남의 처지까지 신경써가며 처신하라고 하는 것은 한마디로 비현실적 처사가 아닙니까? 하고, 공자의 사고방식을 은근히 공박하는 동시에 자신의 현실참여태도가 비록 불인하다고는 말할 수가 있을지 몰라도 그것이 꼭 잘못된 것이라고 하는 말만은 할 수가 없는 것 아닙니까? 하는 일종의 자기변명내지 자기비호의 발언을 한 것이다.
이에, 공자께서 “아무리 평범한 인간이라고 해도, 남이 하란다고 덮어놓고 하고, 하지 말란다고 해서 무조건 안하지 아니하는 법이다. 인간이란 누구나 착하게 행동하란다고 해서 덮어놓고 착하게 행동하려 들지는 아니한다는 것이다. 범인들도 그러하거늘 어찌, 학문을 닦은 선비요 군자로서 선비답고 군자답게 행동함을 보임은 없이 상황만을 늘어놓고 그 상황의 탓만을 하는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느냐. 선비요, 군자라면 매사에 임해 슬기롭게 처신하므로 비록 속았다고 해도 어리석은 자로 빠져들지 아니하고 결국에는 바른 길로 가게 마련이다. 어찌, 선비요 군자다운 처신함을 보여줌은 없이 자신의 궁색한 행동이, 상황이 그러해 어쩔 수가 없었던 것이라고 하는 구차한 변명만을 늘어놓느냐. 그리고 또, 자신에게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하느냐.” 고 응답하시며 재아의 경박함을 나무라신 것이다.
다시 말해,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것은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답게 행동하므로 얻어지는 것이거늘 어찌, 자신이 지니고 있는 지식과 지혜를 활용해서 선비답고 군자답게 행동하려고 하지는 아니하고 자신의 비인간적 행동이 상황 때문이라며 상황의 탓만으로 돌리려고 드느냐는 것이다.
지혜로운 자는 상황을 탓하지 아니하는 법이다.

『논어- 리인편 6장』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인자함을 좋아하나 보이지 아니하는 자이고 악함에는 인자하지 못한 자이다. 인자함을 좋아하는 자에게는 숭상함이 없고, 악함에 인자하지 못한 자로 인자함에 한다는 것은 그 몸을 더 이상 인자하지 못함에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능히 단 하루는 인자함에 그 힘을 쓸 수가 있어도 나의 힘이 부족한자는 보이지 아니하니라. 가리움이 있어도 나에게서 보이지 아니하니라.”
*원문과 원문어의
- 子曰 我未見好仁者 惡不仁者 好仁者 無以尙之 惡不仁者 其爲仁矣 不使不仁者加乎其身 有能一日用其力於仁矣乎 我未見力不足者 蓋有之矣 我未之見也. - 我-나 아. 未-아니 미. 見-볼 견. 尙-숭상할 상. 爲-할 위. 使-하여금 사.加-더할 가. 有-있을 유. 能-능할 능. 力-힘쓸 력. 用-쓸 용. 足-넉넉할 족. 蓋-가릴 개.
『문장풀이』
나는 인자함을 좋아하나 마음으로 좋아하는 것이기에 그 좋아함이 겉으로는 드러나 보이지 아니하고, 악함에는 인자하지 못하면서 인자함에 한다는 것은 악함에는 엄함을 보여 악함이 더 이상 이 사회에 뿌리를 박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니 외관상으로 볼 때는 인자하지 못한 것 같아도 그 마음은 인자함에 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모든 선행이 다 그러하듯 인자함 역시, 그때그때 인간의 입장과 처지를 살펴가며 자발적으로 하고자 해야 한다. 그러므로, 남을 위하고자 한다는 것은 자신이 하려고 들어야 만이 언제든지 할 수가 있는 것이다. 누가 하란다고 해서 하고, 하지 말란다고 해서 안할 수 있는 성격의 행동이 아닌 것이다.
그래, 인자함을 좋아함에는 숭상함이 없다, 고 한 것이다.
인자함이란 자신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할 수가 있는 것이기는 하나, 사회생활을 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위하고자 하려면 때로는 아주 많은 경험과 지식이 필요하기도 해서 인자하기가 쉽지 아니한 경우도 많다. 그러므로 인자함에 하였다고 해도 그 능력이 없다면 인자함에 한 것처럼 보이지 아니하는 경우도 있다. 착함에 하였다고 해도 지나치면 어리석은 것이라고 해야 하듯이, 그 능력이 부족하면 인자함에 하였다고 해도 인자함에 하였다고 말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또, 인자함에 제대로 하였다고 해도 그것을 보고 이해하는 사람들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이 역시 인자함에 하고도 인자함에 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인자함을 보고도 인자함인 줄 모르기 때문이다.
인자함이란 인자하고자 하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할 수 있는 것이기는 하나 다른 사람을 위하고자 할 때는 반드시 혼자서 생각하고 결정만 내리면 되는 것처럼 간단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논어- 위영공편 8장』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선비로서 인자한 사람됨에 뜻하게 되면 인자함을 버리고 삶을 구함은 없으나 인자함을 이루고자 몸을 죽임은 있느니라.”
*원문과 원문어의
- 子曰 志士仁人 無求生以害仁 有殺身以成仁. - 志-뜻할 지. 士-선비 사. 仁-인자할 인. 人-사람됨이 인. 無-없을 무. 求-구할 구. 生-살 생. 害-죽일 해. 有-있을 유. 殺-죽일 살. 身-몸 신. 成-이룰 성.
『문장풀이』
선비된 자로서 인자한 사람됨에 한다면 자신을 위해 사회도리를 저버리는 짓은 못해도 사회도리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행동에는 한다.
학문을 갈고 닦아 큰 뜻을 얻은 선비가 인자함에 하면 사회도리 역시 자신과 마찬가지로 소중하게 생각하므로 자신을 위해 사회도리를 무시하거나 외면하는 얄팍한 생각이나 행동에는 아니해도 사회도리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행동에는 한다는 것이다.
선비된 자가 자신과 마찬가지로 남을 생각하며 위하고자 하는 인자함에 하게 되면 사회가 자신과 마찬가지로 소중한 것이라고 생각할 뿐만 아니라 사회도리를 지킨다는 것은 자신을 위한 행동인 동시에 모든 사람들을 위한 행동이기도 하므로 사회도리를 저버리는 짓은 못해도 사회도리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행동에는 한다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사회생활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기에 사회인답게 행동하려면 남을 자신처럼 생각할 줄 아는 인자함이 필요하다는 것이요 인자함에 할 줄 알면 사회도리를 저버린다는 것은 인간답지 못한 행동을 하는 것이 된다고 하는 것을 알기에 그와 같은 행동에는 하지를 아니한다는 것이다.
진정한 의미의 선비라고 한다면 사회를 내 몸과 같이 소중하게 생각할 줄 알아야 하며, 사회도리를 지키는 것이야 말로 선비답게 처신하는 길이라고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선비란 학문을 닦은 자를 말하는 것이요, 학문을 닦은 자라면 학문을 닦은 자답게 매사에 지혜롭게 생각하며 의롭게 처신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