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서깊은 강경의 덕유정(德游亭)에 가면 다섯 칸짜리 팔작지붕이 있고, 그 기둥마다 주련이 걸려있다. 다음이 그것이다.
글씨도 힘차고, 글귀 또한 좋아서 몇 번이고 돌아보게 한다. 더욱이 과녁 맞추기 일색으로 변한 요즘의 활쏘기만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구절도 있어서 선배 무사들이 어떤 경지에서 활을 쏘았는가 하는 것을 돌아보며 옷깃을 여미지 않을 수 없다. 다음은 문구를 풀어본 것이다.
至爭也君子觀德
此樂爲先人遺風
游於藝常思屛翰
養以氣長作干城
正其心可透接革
求諸己不在征鵠
다툴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러서도 군자는 덕을 보니,
이러한 즐거움은 선인들이 남겨주신 풍속일세.
사예에 노닐되 늘 임금을 지킬 울타리가 될 것을 생각하고
기운을 길러서 오래도록 나라를 지키는 간성이 되어야 한다.
그 마음을 바르게 함은 화살이 과녁에 맞는 것으로 알 수 있으나
자신에게서 구함은 과녁 맞추는 것과 상관이 없는, 쏜 사람의 일이다.
첫구절은 공자가 예기의 구절을 이용하여 한 말이다. 屛翰은 임금을 지키는 군사인 번병(藩兵)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래서 울타리라고 번역했다. 간성(干城)은 국토를 지키는 방패와 성이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병한과 간성은 같은 말을 다르게 표현한 것이다. 이것은 두 문장이 대구이기 때문에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같은 말을 될수록 피하는 한시의 특징이다. 接革과 征鵠은 모두 활을 쏘아서 과녁을 잘 맞춘다는 뜻이다. 댓구이기 때문에 같은 뜻을 다르게 쓴 것이다. 마지막 두 구절의 해석이 직역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데, 정심은 화살이 과녁에 맞느냐 안 맞느냐에 따라서 확인할 수 있는데, 반구제기는 과녁에 맞는 것과는 상관없는 자신의 일이라는 것이다. 이런 구절을 만날 때마다 해석의 어려움을 느낀다. 활쏘기의 즐거움을 공자의 말에서 찾았고, 그것을 임금과 국가에 대한 충성으로 연결하였다가 다시 자신의 수양으로 표현하였다. 조선 후기 지배층의 사고방식과 의식구조를 아주 잘 보여주는 구절이다. 따라서 이것은 최소한 무과가 실시되던 시절에 쓰여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무과는 1894년 갑오경장 때 폐지되었으니, 이 글이 쓰여진 시점은 최소한 이 이전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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