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의 금문도(金門島)

금문도는 거대 중국의 턱밑에 도사리고 지금껏 버티고 있다.

금문도는대만의 부속 섬이지만 중국 본토와의 거리가 불과 2㎞이다. 동서 20㎞, 남북 길이5~10㎞로 섬 전체가 땅속으로 그물망
처럼 연결해 요새화 되어있다. 1958년 모택동의 인민해방군이 44일간 포탄 47만발을 퍼부었으나 완강하게 버텨냈고 지금까지도
세계 2대 초강대국으로 발전한 거대 중국과도 잘 버티고 있다.
지하 3층으로 건설된 지하 도시와 같으며 4만여명의 주민 전체가 대피해 생활할 수 있는 모든 기반시설이 갖추어져 있고 자동차로 섬 어디든 갈 수 있게 돼 있다고 한다.
연평도·백령도와 지리학적으로 아주 닮은 곳이 금문도(金門島)다. 대만의 부속 섬이지만 오히려 중국 본토에 가까이 있다. 본토와의 거리가 불과 2㎞다. 헤엄쳐서 건널 수 있는 거리다. 그래서 우리 영토이긴 하지만 위치상 북측에 더 가깝다는 점에서 서해 5도와 자주 비교되곤 한다. 박정희 대통령이 남한의 최북단 섬 백령도에 군 시설을 세우며 전진 기지화할 때 금문도를 벤치마킹했다고 한다.
금문도는 대만 역사의 상징이다. 1949년 장제스(蔣介石)의 국민당 정부가 본토에서 대만으로 쫓겨날 때 최후의 보루로 삼은 게 금문도였다. 4만 명의 국민당 패전병들은 “죽음으로 금문도를 사수하라”는 명령을 말 그대로 죽음으로써 지켜냈다. 당시 중국군은 국민당 군대의 절반에 달하는 2만 명을 투입, 금문도 상륙까지 시도했지만 살아남은 자가 거의 없었다. 승전은 국민당의 사기를 높였다. 전투는 역사적 상징이 됐다.
중국은 이후에도 호시탐탐 금문도를 노렸다. 급기야 58년 8월 23일엔 대규모 군사도발을 감행한다. 10월 5일까지 44일간 계속된 전투에서 중국군은 무려 47만 발의 포탄을 쏘아댔다. 기록에 따르면 교전 첫날인 23일 하루에만 5만7000발의 포탄이 발사됐다고 한다. 군인뿐 아니라 민간인 사상자가 속출했다.
하지만 대만군은 도망가지 않았다. 오히려 중국군 포병진지에 대한 반격에 나섰다. 미국 정부로부터 항공모함과 전투기를 지원받아 육·해·공군의 입체적 반격전을 폈다. 대만은 또 섬 전체를 땅속으로 그물망처럼 연결해 요새화했다. 이 지하 요새를 시찰한 적이 있다는 이동복 전 자민련 의원(북한민주화포럼 상임대표)은 “땅굴은 지하 3층으로 돼있으며 자동차로 섬 어디든 갈 수 있게 돼 있다. 난공불락의 요새였다”고 기억했다.
목숨을 건 대만군의 처절하고 끈질긴 저항과 반격에 중국은 결국 손을 들고 만다. 인구와 물자·전투력에서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거대한 대륙 중국이 코앞의 왜소한 작은 섬, 금문도(동서 20㎞, 남북 길이 5~10㎞)를 집어삼키지 못한 건 왜일까. 그건 죽어서라도 영토를 지키겠다는 대만군의 의지 때문이다. 화력에선 중국군이 앞설지 모르나 심리전에선 단연 대만군이 우세했던 거다. 전쟁에서 심리전이 중요한 이유다.
북한의 포격으로 쑥대밭이 된 연평도가 지금 유령의 섬으로 변해가고 있다고 한다. 주민들은 가재도구를 챙겨 정든 집과 학교·교회·마을을 뒤로한 채 뭍으로 빠져나갔다. 820가구, 1400여 명의 주민 중 섬에 남은 사람은 이제 20여 명에 불과하다고 한다. 떠난 주민들을 비난할 순 없다. 그들이라고 정든 삶의 터전을 두고 낯선 뭍으로 떠나고 싶진 않았을 테다. 하지만 이 대목에서 생각해봐야 할 것이 있다.
만약 북한의 도발이 이번 한 번에 그치지 않는다면? 제2, 제3의 포탄 공격이 감행된다면 그땐 어떡할 것인가? 그럴 때마다 짐보따리를 짊어지고 배에 몸을 실을 것인가. 북한의 추가 도발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는 상황에서 피란에 지친 사람들은 하나 둘 섬을 아주 등지게 될지 모른다. 집값, 땅값이 떨어지고 생계를 이어갈 수단마저 막막해진 주민들이 섬을 떠나면 연평도는 정말 말 그대로 유령의 섬이 될지 모른다. 연평도가 이렇게 되면 그보다 위도상으로 더 북쪽에 있는 백령도는 어찌될 것인가. 대청도·소청도·우도 등 서해 5도가 우리의 영토로서 기능할 수 있을까.
이런 상상이 지나친 비약이고 헛된 망상으로 그치길 간절히 바란다. 정부는 강경한 대응과 응징을 다짐하지만 행동이 뒤따르지 못하니 이런 상상이 엄습하는 것이다. 연평도가 유령의 섬이 되게 내버려둬선 안된다. 그게 북한이 노리는바다. 진정 우리의 영토를 지킬 의사가 있다면 행동해야 한다.
연평도에서 외교안보대책회의를 왜 하지 못하나. 중화력으로 무장한 최신 첨예 무기를 앞세운 군 수뇌부들의 작전회의가 이곳에서 열렸어도 과연 연평도가 유령의 섬으로 변했을까. 부산으로, 광주로, 대전으로 옮겨 다니며 지도부 회의를 하던 정치권은 왜 안보회의를 연평도에서 열지 못하나. 안보상 위험하기 때문이라고? 그렇기 때문에 군 수뇌부들이, 정치 지도자들의 용맹한 행동이 필요한 건 아닐까. 대만이 중국의 위협으로부터 금문도를 지킨 게 심리전에서 이겼기 때문이듯 말이다. 연평도를 지키는 건 한국인의 심리적 마지노선을 지키는 일이다.
진먼섬 [金門島(금문도)]의 면적은 131.7㎢이고, 인구는 약 4만 명(1993)이다. 다진먼섬[大金門島], 우저우섬[吾洲島]이라고도 한다. 중국
푸젠성[福建省] 남동부 샤먼항[夏門港] 동쪽, 타이완해협[臺灣海峽] 중에 위치한다. 동서길이는 약 20km이고, 남북길이는 5∼10km이다.
서쪽에는 샤오진먼섬[小金門島]이 있다. 타이완[大灣]에 있는 섬으로 아모이섬과의 사이에 있는 섬들을 샤오진먼섬[小金門島]이라고 부르는 데 대하여 다진먼섬[大金門島]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또 샤오진먼섬 등 10여 개의 섬을 포함하여 ‘진먼섬’이라 총칭하기도 한다.
원래 해적 및 밀무역의 근거지로 명(明) 때에 해적에 대비하여 성을 쌓은 적이 있고, 그후 정성공(鄭成功)이 이곳을 근거지로 하여 명의 회복을 꾀하다가 실패하여 타이완으로 건너간 일도 있다. 그동안 타이완의 대륙 반공(反共) 기지로 요새화되었으나 1992년 11월부터 계엄통치를 해제하고 군사위원회를 폐지, 민간정부가 들어섰다.
● 금문도 전투
http://sunday.joins.com/article/list.asp?page=2&cat_code=0602&start_ye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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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10월 24일 금문도에 상륙한 해방군은 3일 만인 26일 오후 5시30분쯤 거의 전사하거나 투항했다. 대만 측에서는 2만
명이 금문도에 상륙했다고 하지만 전투병은 9000명을 조금 넘었다. 나머지는 뱃사공들이었다. 1만 명 정도 전사하거나 주민
들에게 맞아죽고 4000여 명의 포로들은 이틀 후 대만으로 압송했다. 금문도를 떠나기 직전의 해방군 포로들 (1949. 10. 28).
1948년 가을, 린뱌오가 동북을 장악하자 장제스는 패배를 예견했다. 극비리에 최측근들과 머리를 맞댔다. 핵심은 “중공군의 압박을 피하려면 정부를 어디로 이동하느냐”였다. 항일전쟁을 지휘했던 서남쪽으로 가자는 의견이 많았다.
지리학자 장지쥔(張其均)이 대만 천도(遷都)를 건의했다. “중공은 해군과 공군이 없다. 대만으로 가면 한동안 저들의 추격을 저지할 수 있다. 물산이 풍부하고 일본인들이 건립한 공업시설이 그대로 남아있다. 교통망도 쓸 만하다. 공산당이 뿌리를 내리지 못한 지역이라 저항이 발생해도 진압하기 수월하다.” 지도를 볼 때마다 떠올랐던 대만의 생김새가 고구마에서 항공모함으로 바뀌기에 충분한 발언이었다.
장제스는 300여 대의 전투기와 4개의 해군기지를 통째로 실어 날랐고 중앙군 30여만 명을 대만과 동남 연해의 섬에 배치했다. 그사이 대륙의 국민당 군은 거의 괴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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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10월 17일 샤먼(廈門)을 점령한 화동야전군 10병단은 금문도 상륙을 서둘렀다. 병단사령관 예페이(葉飛)는 항일전쟁과 국·공전쟁을 거치며 단 한번도 패한 적이 없었던 청년 전략가였다. “눈앞에 보이는 금문도는 단순한 섬이 아니다. 대만의 교두보다. 저 병풍을 걷어치우지 않으면 우리가 봉쇄당할 날이 온다”며 지휘관들을 독려했다.
중국인민해방군은 승리에 도취해 있었다. 교만이라는 고약한 세균이 머리 한구석에 침투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총명하고 냉정한 예페이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럴 만도 했다. 신중국 선포 3주 후였다.
금문도에는 대만 원주민으로 구성된 국민당 신군(新軍) 2만 명이 주둔하고 있었다. 장제스가 대만에서 훈련시킨, 향토의식이 유난히 강한 부대였다. 예페이는 이들을 단순한 패잔병 정도로 생각했다.
당시 바다에는 대륙에서 철수한 병력을 실은 배들이 떠다니고 있었다. 운명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상실한 부대들이었다. 항일명장 후롄(胡璉)이 지휘하는 18군도 그 안에 있었다. 저장(浙江)성 주산(舟山)반도로 향하던 중 금문도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후롄은 국민당군이 대패한 화이하이(淮海) 전역(戰役)의 부사령관이었다. 중상으로 입원해 있을 때 “중공 측에는 린뱌오와 천이(陳毅) 등 몇 명 외에는 신통한 지휘관이 없다. 우리가 계속 지기만 하는 이유는 지휘관들의 자질이나 군의 사기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 세상 없는 지휘관과 제 아무리 용감한 군인들이라도 정치와 외교가 뒤를 받쳐주지 않으면 전쟁에서 패할 수밖에 없다”며 면회 온 장제스를 면전에서 들이 받은 적이 있었다. 장이 “그래, 네 말이 맞다. 내가 제자 하나는 잘 뒀다”며 웃는 바람에 괜한 말을 했다고 후회한 게 8개월 전이었다.
10월 24일 밤, 한 척에 금 한 냥과 아편 한 덩어리를 주고 임대한 목선들이 금문도 상륙부대를 태우고 샤먼을 출발했다. 배 안에는 금방 찍어 낸 인민폐와 승전잔치에 쓸 돼지들이 병사들과 뒤섞여 있었다. 병사들은 돼지들이 꿱꿱거릴 때마다 입맛을 다시며 싱글벙글했다. 그날 따라 약한 동북풍이 불었다. 기분이 더할 나위 없었다. 대만이라면 몰라도 패잔병이 우글거리는 쥐방울만 한 섬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양식도 하루치면 족했다.
배가 금문의 구닝터우(古寧頭)에 도착할 즈음 샤먼의 포대가 금문도를 향해 불을 뿜었다. 1979년 1월 1일 미·중 간의 수교로 막을 내리는 포격전의 시작이었다. 뱃사공들은 연안에 도착하기도 전 바다에 몸을 던져 상륙부대를 불안케 했다. 해상을 떠돌던 후롄의 18군이 금문도에 와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인민 해방군은 초장부터 움직이는 곳마다 지뢰에 몸이 날라갔고, 부상병들은 주민들 몽둥이에 숨이 끊어졌다. 해군과 공군력의 지원이 따라야 하는 상륙전의 기본을 무시한 결과는 처참했다. 퇴로를 차단당한 채 3일 만에 죽거나 포로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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