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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세개(袁世凱)를 잊지 말자

굴어당 2010. 12. 31. 22:54

중국 하남성 출신의 스물세 살 젊은 군인 원세개(袁世凱·1859~1916)는 1882년 임오군란을 진압하러 파견된 청나라 군대 지휘자 오장경(吳長慶)의 막료로 조선에 왔다. 그는 흥선대원군을 청나라로 압송하는 데 앞장서고, 반란 조선군을 가혹하게 진압하면서 당시 청나라 실력자였던 이홍장(李鴻章)의 눈에 들었다. 1884년 갑신정변 때도 미리 대비하고 있다가 재빨리 청나라 군대를 동원하여 정변을 실패하게 만들었다.

중국으로 돌아갔던 원세개는 1885년 8월 조선으로 돌아와 조선 정국을 좌지우지했다. 그는 1886년 고종의 폐위를 이홍장에게 건의했고, 1887년에는 조선 정부가 박정양을 주미공사, 심상학을 주유럽공사로 임명하자 청나라와 미리 상의하지 않았다며 부임을 중지시켰다. 그는 조선에서 청나라 상인의 상권을 확대하고, 조선이 다른 나라들로부터 차관을 얻지 못하도록 막아 조선을 청에 경제적으로 예속시켰다. 조선 정부는 10년 가까이 원세개에게 사사건건 방해를 받으면서 자주적 근대화의 동력을 잃고 말았다.

우리 민족이 중국의 정치적 간섭을 받은 것은 이때가 처음은 아니다. BC 4세기 연(燕)나라 장군 진개(秦開)가 고조선을 공격하면서 중국과 처음 맞닥뜨린 우리 민족은 BC 108년 한무제(漢武帝)가 고조선을 멸망시킨 뒤 중국문명권에 편입됐고, 청일전쟁에서 패배한 중국이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포기할 때까지 2000년 넘게 중국의 영향권 아래 있었다.

하지만 이 시기는 정치적 영향력을 감수하는 대가로 문명을 전수받는 관계였다. 중국문명은 동아시아에서 가장 선진적이었고, 우리 고유문명보다 고급이었다. 통일신라의 최치원부터 고려의 김부식, 조선후기의 북학파까지 우리 선조들은 중국의 제도와 문물을 한국에 옮겨심는 데 부심했다. 역사학자인 김용섭 연세대 명예교수는 이를 '한민족의 제1차 문명전환'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원세개가 조선을 주무르던 19세기 말은 이미 시대가 달라졌다. 중국은 더 이상 선진국이나 배워야 할 모델이 아니었다. 새로운 문명 표준으로 부상한 서구 근대문명을 받아들이는 '한민족의 제2차 문명전환'이 시작됐고, 그 통로는 일본미국이었다. 아무것도 도와주지 않으면서 근대화의 바쁜 길을 가로막는 중국은 증오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다. 20세기 들어서도 중국의 공산화와 동·서 냉전이 겹치면서 우리는 중국을 잊고 지냈다.

멀게만 느껴지던 중국이 다시 우리 곁으로 다가온 것은 1992년 한·중 수교 이후였다. 특히 미국을 싫어하는 진보좌파가 집권하면서 중국을 경제협력의 파트너를 넘어 정치적·문명적 동반자로 생각하는 경향이 대두됐다. 노무현 정권 때의 '동북아 균형자론(論)' '동북아시대위원회'가 그런 발상에서 나왔고, 일부 지식인은 한국이 서구문명 추종에서 벗어나 동아시아 문명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탈구입아(脫歐入亞)'론을 제기했다. 최근 우리는 이런 주장들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를 뼈저리게 깨닫고 있다.

우리 민족의 제2차 문명전환 초기에 발목을 잡았던 중국은 이제 제2차 문명전환의 완성을 위해 필수적인 남·북한 관계의 정상화와 통일을 또다시 가로막고 있다. 경제를 제외한 모든 면에서 아직 근대적인 문명 표준에 훨씬 못 미치는 중국이 명실상부한 근대국가가 될 때까지 우리는 20대 후반의 나이에 남의 나라에서 온갖 전횡(專橫)을 일삼았던 원세개를 잊지 말아야 한다.

[천자토론] 우리에게 중국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