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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가가 정말 중요하다면

굴어당 2011. 4. 17. 09:25

어수웅 문화부 차장

소설가이자 번역가인 배수아는 언젠가 인터뷰에서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궁극적으로는 소설가보다 번역가로 살고 싶다. 번역가는 훨씬 더 고요하게 살 수 있으니까. 100권을 번역하더라도 번역가에게는 관심을 갖지 않을 테니까."

그런 배수아의 시니컬한 반어법(反語法)을 뒤집는 일이 최근에 발생했다. 신경숙의 베스트셀러 소설 '엄마를 부탁해'를 번역한 재미교포 번역가 김지영(30)씨 스토리다. 한국문학 미국 진출의 숨은 공로자인 그녀와의 인터뷰가 본지에 소개되자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여러 방송과 신문이 잇달아 대서특필했다. 심지어는 총체적 오류로 문제가 된 한국·EU(유럽연합) FTA 협정문 번역을 그녀에게 맡기자는 주장까지 이어졌다. 말 그대로 스타탄생이었다. 그런데 우리 한번 솔직해져 보자. 우리는 번역가에게 제대로 된 대접을 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일까.

동인문학상을 받은 소설가 김연수가 동시에 빼어난 번역가라는 사실은 그리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미국 단편문학의 대가 레이몬드 카버(Carver)의 '대성당'이나 중국 출신 미국작가 하진의 '기다림' 등 15년 가까운 동안 20여 권을 번역한 그의 번역료는 지금 200자 원고지 한 장에 4000원선이다. 원고지 1000장짜리 장편 소설 한 권을 번역해야 겨우 400만원이 돌아온다. 그런데 그것이 문학 번역업계의 최고 수준이다.

이러니 번역가는 책임있는 가장으로서 함부로 선택할 직업이 아닌 것이다. 예전엔 더 심했다. 작고한 소설가 이문구의 '관촌수필'에는 1970년대 번역에 대한 대접이 얼마나 박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 있다. "온종일 오금 한 번 못 펴고 쭈그려 앉은 값 하느라고 관절염을 얻을 정도로 번역을 했는데, 하루에 백 장 이상 하지 않으면 담뱃값도 못 댈 원고지 한 장에 고작 30원"이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이중잣대다. 말로는 번역에 대한 중요성을 소리높여 외치면서도, 정작 대접은 그에 걸맞게 제대로 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FTA 협정문 부실 번역 문제도 그렇다. 번역료를 깎고 아끼는 게 능사가 아니라, 정당한 대가를 지불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선배가 하는 가난한 출판사에서 최근 벌어진 일이다. 외국 경제이론서였는데, 이 분야 번역료는 A급이 원고지 한 장에 4500원이다. 그런데 그 번역가가 아주 미안해하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고 한다. "검토해 보니 다른 책보다 훨씬 어려운데 200원씩 더 줄 수 없나요?"

정부가 설립한 한국문학번역원이 언어권별로 한두 명 지정하는 '지정번역가'의 프로젝트당 번역료는 3000만원이다. 이 프로젝트들은 제대로 하려면 꼬박 1년도 걸린다. 국내 최고 번역가에게 지불하는 번역료가 이 수준이다. 그나마도 최근에 두 배 오른 액수이다. 반면 엊그제 발표된 우리나라 100대 기업 평직원의 평균 연봉은 6280만원이다.

언제까지 번역가는 자신이 좋아하는 일이라는 이유로 '자발적 착취' 수준의 대가를 감수해야 하는 것일까. 우리 사회는 과연 지식에 대한 비용을 제대로 지불하고 있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