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던 옷까지 노숙자에 벗어주며 평생 가난한 목자의 삶 실천
템플턴상 수상 극구 사양 시상식날 입을 양복 한 벌 없어 출국날 부랴부랴 백화점 달려가
평생 통장 하나도 없어
‘평생 몸바쳐 복음 위해 살아라’ 대학생 때 영적체험 후 신학공부
신앙 생활만큼 나라 사랑도 십자가 옆에 태극기 나란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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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hoto 한경직목사기념사업회 |
추양은 “예수를 가장 닮은 사람”(이철신 영락교회 담임목사)으로 이해되는가 하면, “이 나라 민중을 사랑과 자비의 정신으로 돌보신 목자”(송월주 전 불교조계종 총무원장)로 기억되기도 한다. 김수환 추기경은 “사랑과 용서의 사도, 한민족의 정신적 지주”라고 했으며, 김용기 가나안농군학교 설립자는 “영락교회만의 목사님이 아니라 한국 교회의 목자상이요, 아시아의 목자상, 세계의 목자상”이라고 평하고 있다. 나라 밖에서도 역시 큰 인물로 부각되고 있다. 세계적인 기독교부흥사 빌리 그레이엄은 “세계의 가장 위대한 크리스천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했으며, 이안 토렌스 프린스턴신학대학원 총장은 “현대의 성자이며, 우리 모두의 본보기”라고 했다. 이런 사실들을 뒷받침하는 실화 또한 적지 않다.
“1992년 한경직 목사님이 템플턴상을 받을 때 일이었어요. 그럴 자격이 없다고 사양하시는 한 목사님을 간신히 설득하여 수상식에 가게 됐지요. 출국날 사람들이 기다리는데 목사님이 나오시지 않는 거예요. 방문을 열고 들어가니 와이셔츠 차림으로 쩔쩔매고 계셨어요. 열린 옷장을 보니 마땅한 웃도리가 눈에 띄지 않았어요. 결국 백화점에 들러 급하게 한 벌 사서 공항으로 달려갔지요.”(나옥주 보성학원 이사)
“한번은 오리털 점퍼를 선물로 해 드렸어요. 그런데 얼마 후 백병원 앞에서 구걸하는 시각장애인이 그 옷을 입고 있더라고요.”(조정희 영락교회 은퇴권사)
“누가 봉투를 놓고 가면 열어보지도 않고 모았다가 필요한 곳에 보내셨지요.”(강병훈 이화학원 이사장)
“아무것도 없으면서 다 가진 목자”
추양은 ‘모든 것을 다 가지고도 없으신 가난한 목자, 아무것도 없으면서도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랑의 목자’로 살았다. 남한산성의 작은 집(교회 소유)에서 생활하면서, 평생 자신의 이름으로 된 집이나 저금통장 하나 갖지 않았다.
추양은 1903년 1월 27일 평남 평원군 공덕면 간리에서 가난한 농부 한도풍(韓道豊)과 청주 이(李)씨 사이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위로는 누나가, 밑으로는 남동생 둘이 있었다. 이곳은 자작마을이라고도 불리는 작은 벽촌이었다. 평양에서 북으로 100리를 들어가 산속에 파묻혀 있었다.
그의 가문은 조상 대대로 넉넉한 집안이었으나, 부친이 12살 되던 해에 조부가 갑자기 별세하고 나서, 백부께서 그 많던 가산을 모두 탕진해 집안은 완전히 빈털터리가 되었다.
그러나 부친은 잠시도 쉬지 않고 일을 해 작은 농토를 마련할 수 있었다. 모친은 조용하고 부지런한 성품의 여인이었다. 그가 일하는 모친의 무릎을 베고 놀다가 잠이 들면, 잠자리에 옮겨 재우고, 모친은 밤늦게까지 일을 했다. 그러나 그가 만 일곱 살 되던 해에 과로로 병이 나서 작고했다.
모친을 일찍 잃은 까닭에 다른 아이들 같으면 한창 응석 부릴 나이였으나, 이미 속은 꽉 찬 철든 소년이었다. 그의 성격은 한편으론 명랑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여성적이라고 할 만큼 섬세하고 감성적이었다.
추양은 1912년 미션계 진광소학교에 입학한다. 부친은 그를 기독교 정신과 민족 정신을 심어 주는 기독교 학교에 보내 신학문을 공부하도록 했다. 그의 나이 12살 때 부친은 그를 장가보냈다. 색시는 3살 연상인 이웃 마을 김씨댁의 김찬빈이었다. 소꿉장난 같은 결혼생활이 시작되었다.
어느 겨울날, 동네 아이들과 눈 지치기를 하며 놀다가 얼음판에 빠져 신발을 잃어버리고 맨발로 돌아온 적이 있었다. 새색시가 시뻘겋게 언 발을 닦아 주고, 버선을 신겨 주며, 언 발을 녹이려고 아랫목 이불에 발을 파묻게 하는 정성스러운 모습은 그의 일생에 가장 아름다운 추억이었다. 그는 아내의 사랑이 얼마나 위대하고 희생적인가를 깨닫게 되었다.추양은 이런 아내의 보살핌 덕분에 오직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
고당 조만식을 멘토로
추양은 진광소학교에서 한 학년 월반하여 1년 빨리 졸업하고 1916년 정주의 오산중학교에 입학한다. 이곳에서 그가 영향을 받은 첫 번째 사람은 남강 이승훈. 남강은 이 학교의 설립자로 굳건한 감화력으로 민족 사상을 고취한 인물이다. 그의 아호 추양(秋陽)도 ‘가을에 비치는 태양처럼 밝게 살라’고 남강이 지어준 것이라고 아들 혜원씨가 전했다.
“어느날 저녁에 졸업반 학생을 네댓 명 불렀어요. 가보니 선생이 자리에 누워 있었어요. 우리가 가니 겨우 일어나면서 하시는 말씀이 ‘내가 전에 105인 사건으로 끌려가 일본 사람에게 매를 너무 많이 맞아서 언제나 연중 그때가 되면 맞은 자리가 아프다. 오늘이 바로 그날이다’ 그래요. 아프단 이야기를 하면서 매 맞은 그 푸릇푸릇한 자리를 보여요. 그때가 3·1운동이 일어나기 전 해인데 그 선생의 말씀을 잊지 못하는 건, 이런 말을 해요. ‘지금은 일본 사람들이 모든 세력을 다 가지고 모든 걸 다 주장하니까 일이 우리 마음대로 되지를 않아. 그렇게 되니까 애국지사라는 사람들의 마음이 점점 변한다’고 탄식하시면서 마지막 말씀은 ‘다만 너희들은 분명히 알아라. 다른 사람이 어떻게 하든지 나 이승훈이는 조선 사람으로 살다가 조선 사람으로 죽는다.’… 그러니깐 이제 그런 이야기는 도저히 잊을 수가 없단 말이야요.”(‘한경직 목사’ 김병희 편저)
오산 시절 그에게 깊은 영향을 미친 또 한 사람은 고당 조만식이다. 고당은 항상 ‘난 한국 사람으로 살겠다’고 외쳤다. 그는 이런 조선인 의식을 ‘말총으로 갓을 쓰고 검은 두루마기를 입고 다니는 것’으로 표현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오산학교에 큰 호수가 하나 있었는데 그는 저녁마다 그 호숫가를 학생들과 함께 구보하면서 애국가를 불렀다.
“나는 지금까지 여러 선생들에게 가르침을 받아왔지만, 고당 선생처럼 학생을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하며, 실지로 모범을 보여 주며, 그 전 생애를 희생한 교육가는 오직 고당 한 분이라고 기억돼요. 그래서 특별히 그분을 존경하게 돼요.”(‘한경직 목사’)
추양은 오산에서도 입학 당시 1년 월반하여 1919년에 졸업한다. 하지만 3·1운동이 일어난 직후 일제는 민족주의 사상이 강한 오산에 불을 질러 ‘졸업식 없는 졸업’을 하게 된다. 졸업 후 평양 근교 영성학교 교사 일을 할 때 평양경찰서에 폭탄투척사건이 일어났다. 일제는 민족학교 교사나 목사들을 용의자로 점찍었고, 추양도 경찰서로 연행되었다. 추양은 온갖 고문을 당했고 그 고통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다. 독립군이 간리 마을 쪽으로 숨었다는 소문이 나돌자 헌병들은 이 잡듯이 샅샅이 뒤졌다.
“한경직은 몹시 걱정이 되었다. 왜냐하면 얼마 전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발행하는 독립신문을 몰래 입수해 읽고는 접어서 벼루함에 숨겨 벽장 구석에 넣어둔 것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의 걱정은 실로 태산 같았다. 걱정과 두려움에 입이 바싹바싹 말라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그들은 이것을 발견하지 못하고 그냥 지나가 버렸다.”(‘한경직 목사를 만남’ 이만열)
“받은 것은 다른 사람에게 갚아라”
추양은 애국애족을 위해서는 공부를 더 해야 하겠다는 결심으로 평양 숭실대학에 입학한다. 오산에서 받은 민족 교육의 영향으로 나라와 백성을 구하는 유일한 길은 과학을 일으키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이과를 택했다. 그는 매학기 최우수 성적을 올리면서도, 기독청년회장으로 일하는가 하면 전국대학생웅변대회에서 우승하기도 했다.
1924년 여름 대학 3년 때 추양은 황해도 구미포 해변으로 피서갔다가 그곳에서 복음을 위해 살라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는다.
“어느날 저녁, 혼자 산책하며 묵상하던 중 평생에 잊을 수 없는 영적 체험을 하게 되었다. 잔잔한 물이 맨발을 간질이고 밤하늘엔 달이 휘영청 밝은데 문득 기도가 하고 싶어져 모래밭에 꿇어 앉아 기도했다. 그때 하나님께서 나의 장래를 지시하였다. ‘너는 장래에 이런저런 것도 할 수 있겠지만, 너는 나에게 온전히 몸을 바쳐서 복음을 위해 살아라.’ 분명히 하나님의 음성이 내 귀에 똑똑히 들렸다.”(‘나의 감사’ 한경직 구술자서전)
그는 신학 공부를 위해 미국 유학을 가기로 결심하였다. 숭실대학을 1925년에 졸업한 추양은 방위량 선교사의 도움으로 엠포리아대학으로 가기로 했다. 신원조사에 걸려 애먹다가 여권은 겨우 받았으나 여비 마련이 큰일이었다.
“하는 수 없이 은사이신 남강 이승훈 선생을 찾아갔다. 정주까지 가서 사정을 말하자 백발이 된 선생은 ‘그런가?’ 하시더니 편지 두 장을 써주셨다. 그중 한 통은 윤치호 선생께 쓰셨고… 나는 편지를 들고 종로 견지동으로 윤치호 선생을 찾아갔다. 부잣집이어서인지 대문 앞에 지키는 사람까지 있었다.… 문지기는 편지를 들고 들어가더니 조금 후 들어오라고 했다. 수염을 점잖게 기르고 한복을 입으신 윤치호 선생은 방에서 아이들과 장난하고 계셨다. ‘앉아라. 편지를 보았다. 그럼 언제쯤 떠나느냐?’ ‘여름에 들어가서 9월에는 입학하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물으시더니 아무 말씀 없이 100원을 주셨다. 100원이면 당시로선 대단히 큰돈이었다. 나는 너무 감사해 어떻게든 인사를 드리고 싶었다. ‘제가 앞으로 이것을 갚으려 합니다.’ 그러자 윤치호 선생은 내가 평생에 잊지 못할 말을 해 주셨다. ‘아니, 나한테 갚을 것 없다. 이 다음에 다른 사람들한테 갚아라.’ 나는 이후 목회를 할 때나 교육이나 복지를 위한 사업을 할 때 이 말씀에 따라 내가 받은 은혜를 다른 사람에게 갚는다는 생각으로 임했다.”(‘나의 감사’)
동남아 선교 때는 1000여명 기립박수
추양은 엠포리아대학을 거쳐 프린스턴신학대학원을 마친 후 박사과정에 진학하여 교회사를 전공할 생각이었으나, 폐병 3기라는 의사의 진단을 받아 요양하면서 기도했다. ‘한국에 가면 3년만 일하다 죽어도 감사합니다’라는 봉사의 기회를 간구하는 애절한 기도였다.
1932년 귀국하면서 그의 ‘덤으로 사는 인생’은 세계적 목자로 가는 고난과 역경의 디딤돌로 이어졌다. 조만식이 세운 평양 숭인상업학교와 숭실대학에서 잠시 가르치다 이듬해 신의주 제2교회에 목사로 부임하여 본격적인 목회를 시작한다. 추양은 비좁은 예배당을 번듯한 새로운 교회당으로 짓기 위한 모금과 공사를 앞장서서 지휘하며, 400명이던 신도 수를 불과 몇 년 안에 3000명으로 늘렸다. 그러나 1941년 신사참배 거부로 투옥되어, 교회에서 추방된다. 그 뒤 그가 설립한 남신의주 보린원(保隣院)에서 몸소 분뇨통을 메면서 고아들을 보살피다 광복을 맞는다.
이때 평안북도 도지사의 요청으로 자치회를 조직하여 치안을 담당하기도 한다. 위원장은 연로한 이유필(3·1운동 33인)을 추대하고, 윤하영(신의주 제1교회 목사)과 함께 부위원장을 맡는다.
“1945년 9월 윤하영과 기독교사회 민주당을 조직하는데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민주주의 정부 수립과 사회개혁’을 정강으로 하였다. 그러나 소련군이 들어오고 공산당이 조직되어 탄압을 가해 한경직은 10월 초에 월남한다.”(‘대한민국을 세운 사람들’ 일조각)
추양은 월남하는 교인들을 위해 1945년 12월 2일 서울 저동 일본 천리교 경성분소 자리에 베다니전도교회를 설립한다. 첫 예배에 27명이 참석하였다. 이듬해 1000명 이상으로 교인이 늘어나면서 동네 이름(당시 영락동)을 따 영락교회로 바꿨다.
이후 영락교회는 한국을 대표하는 교회로 자리잡았고, 1960년대 들어서는 단일교회로는 세계 최대 교회를 기록했다. 추양은 고아원과 양로원 등을 운영하는 교회의 사회봉사활동도 선도해 나갔다. 특히 6·25전쟁 중에는 미국에 직접 달려가 구조를 이끌어내는 등 구호활동에 앞장섰다.
6·25전쟁 중에 정부파견 유엔사절로 미국에 간 추양은 설교와 전도 집회를 통해 국제적 명성을 얻기 시작했고, 1966년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세계전도대회에서는 세계적 설교가로 떠올랐다. 추양의 국제활동은 영락교회 당회장에서 은퇴한 1973년부터 더욱 활발해졌다. 1월에 영락교회 원로목사로 추대된 후, 2월에는 1개월간 싱가포르와 태국에서 열린 국제선교협의회를 주재했다. 이어 6월에는 일본 오사카와 도쿄에서 연합전도대회를 이끌었다. 1974년 1년간은 ‘엑스플로74’행사를 주도했고, 이듬해 10월에는 빌리 그레이엄과 함께 대만과 홍콩에서 전도대회, 그리고 11월에는 이란에서 기독교교역자 주강사로 활동했다.
“김준곤 목사는 1979년 싱가포르에서 열린 동남아선교대회 때 한 목사의 ‘성령’을 주제로 한 설교가 1000여명의 참가자들을 사로잡아 5분간이나 기립박수가 터지는 대사건을 낳았다고 회상한 바 있다.”(‘한국을 바꾼 100인’ 월간중앙 1995년 신년호 별책부록)
“20세기가 낳은 한국의 가장 뛰어난 목사”
- ▲ 미국에서 귀국한 아들 혜원씨가 영락교회에서 생전의 부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세기의 성녀 테레사 여사가 첫 수상자였던 템플턴상이 1992년 추양에게 돌아왔다.
“한경직 목사는 아마도 20세기가 낳은 한국의 가장 뛰어난 목사일 것이다. 그는 한국에서 전례가 없는 많은 수의 장로교회를 성장시켰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 그리고 미주 지역에 이르는 해외 선교사역도 펼쳐 나간 선교의 한 상징적 인물이다.”(‘수상자 1992:한경직 박사’ 1992년 템플턴상 시상식 순서책자)
상금으로 주어진 100만달러의 거금도 전액 교회에 희사하여 자선사업에 쓰도록 했다. 추양은 한때 ‘보수주의자’ 혹은 ‘친정부적’이란 오해를 사기도 했지만, 이처럼 큰 역사적 흐름을 읽어온 그의 진면목을 세계가 분명히 밝혀준 셈이다.
추양은 2000년 4월 19일 서울 저동 영락교회 사택에서 별세해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사능리 영락동산에 안장된다. 추양은 김찬빈과 사이에 남매를 낳았다. 아들 혜원(73·미 엠포리아대 졸업)씨는 재미목사로, 미국인 다나(70·피츠버그신학교 졸업)씨와 결혼하여 영선(41·오하이오대학 박사, 어번대 식물학 교수), 영애(39·맥칼스터대 졸업, 블루크로스 보험회사 근무) 자매를 낳았다.
추양의 딸 순희(작고)씨는 이영헌 목사(작고, 장신대 교수 역임)와 결혼하여 5남매를 낳았다. 장남 이신익(63·외식업)씨는 이정화(58)씨와 결혼했으며, 차남 이신형(54·프린스턴대 신학과 졸업)씨는 전주대 대학원장으로 박경희(54·중앙대 졸업)씨와 결혼했다. 장녀 이순겸(68·숭실대 사학과 졸업)씨는 박제수(69·연세대대학원 졸업, 엠엔코 고문) 영락교회 장로와 결혼했으며, 차녀 이순화(66·숭실대 경제과 졸업)씨는 최문창(66·서울대 공대 전자공학과 졸업) 캐나다 밴쿠버 염광교회 장로와 결혼했으며, 삼녀 이순영(53·서울여대 졸업)씨는 선동규(55·플로리다 인터내셔널대학원 호텔경영학과 졸업) 동아대 교수와 결혼했다.
“부친께서 은퇴하셨을 때, 어떤 장로님은 부친의 뒤를 이으라고 저에게 권유하기도 했지만 영락교회는 하나님의 강단인데 제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겠느냐고 했지요. 부친도 같은 생각이셨지요. 부친께서는 평생 자기를 낮추셨고, 저도 그렇게 살려고 애씁니다.”
추양의 11주기 추모식에 참석하기 위해 귀국한 혜원씨의 얘기다.
내가 본 추양 한경직 김은섭 영락교회 연구목사 나는 1993년 장로교신학대학원 졸업예배 때 한경직 목사님을 처음 뵙게 됐다. 그분이 은퇴한 후 25년간 기거하던 남한산성의 ‘한경직 우거처’에 가면 은색으로 빛나는 커다란 십자가와 ‘나라 사랑’이 새겨진 돌덩이가 반긴다. 거처 안으로 들어서면 내면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깊은 감동을 느끼게 된다. 한국 최초의 대형 교회이자 세계에서 가장 큰 장로교회였던 영락교회 원로목사의 사택이 초라한 작은 집인 데다, 가구들도 너무나 낡고 볼품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10㎡(약 3평)쯤 되는 침실의 벽에 있는 조그만 십자가 앞에는 태극기가 있다. 바로 이 십자가와 태극기는 한경직의 삶을 설명하는 대표적인 두 상징이다. 그분은 예수사랑과 나라사랑의 정신으로 평생을 사셨다. 전국복음화운동을 주도하는 한편, 교육사업에도 힘써 대광학교를 세우고 보성학원, 숭실대학을 재건하였다. 그리고 6·25전쟁 때는 기독교청년지원군을 모집하여 낙동강 전선에 투입하기도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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