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6년 시국선언문 사건 때 77세 노령에 굳이 법정 출두
“법은 지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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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hoto 윤상구 |
“그의 93년 생애의 전반은 비교적 순탄했다. 그러나 1961년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에 의해 대통령 자리를 물러나 하야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1979년 박 대통령이 심복의 저격으로 숨을 거둘 때까지 그는 탈권자와의 싸움을 멈추지 않았다. 나이도 공명도 성패까지도 돌보지 않고, 질기게 그를 미워하면서 권좌에서 끌어내리려 하였다.”(‘한국을 바꾼 100인’ 월간중앙 1995년 신년호 별책부록)
해위는 1897년 8월 26일 충남 아산군 둔포면 신항리에서 윤치소(尹致昭)와 이범숙(李範淑) 사이의 6남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벼슬을 해온 집안이어서 부러운 것을 모르고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는 조부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집에 한문 선생을 따로 두고 학문을 익혔으며 어떤 때는 조부가 직접 불러 가르치기도 했다.
해평(海平) 윤씨 집안은 조선조 이래 구한말을 거쳐 지금까지 걸출한 인물을 많이 배출한 명문가로 꼽힌다. 선조 때의 영의정 윤두수(尹斗壽)가 해위의 10대조이며, 큰할아버지가 구한말 군부·법부대신을 지낸 윤웅열(尹雄烈), 조부가 안성군수·육군참장을 지낸 윤영열(尹英烈)이다. 구한말 개화파의 선구자인 치호(致昊), 터키 대사를 역임한 치창(致昌), 내무장관·서울시장·공화당의장서리를 역임한 치영(致映), 농림장관을 지낸 영선(永善), 서울대 총장을 지낸 일선(日善) 등 많은 인물을 배출했다.
해위의 부친은 중동학교 교장을 지내다 50만원을 자본금으로 경성직뉴회사를 설립하였다. 이 회사는 인촌 김성수가 맡아서 운영한 경성방직의 전신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직물회사였다.
“내가 여덟 살 때 우리 집안은 모두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에 온 나는 집 근처에 있던 교동보통학교에 입학하여 처음으로 신학문을 공부하게 되었다. 보통학교 시절 공부를 잘했는지는 기억에 없지만 장난은 꽤 심했었다. 장가를 들어 초립을 쓰고 오는 어른 학생들을 놀리기도 했고, 우리 집에 찾아오는 대신들 앞에서 장난을 치다 종아리를 맞기도 했다.”(‘외로운 선택의 나날’ 윤보선 회고록)
한·일병합이 조인된 1910년 해위는 4년제이던 교동보통학교를 마치고 일본인 학교인 일출소학교에 5학년으로 편입한다. 이곳에서 2년간 일본 학생들과 갈등을 빚으면서 배일 사상을 키웠다고 회고했다. 이어서 도쿄로 가 경응의숙(慶應義塾)에 입학한다. 두 학기를 마치고 예비학교인 정칙(正則)학교로 옮기지만 2년을 못다 배우고 서울로 돌아온다. 그는 당시 중국의 신해혁명에 관심을 두어 중국으로 가서 독립운동에 가담하기로 마음을 잡은 것이다. 해위는 스무 살 때 여운형을 따라 상하이로 떠난다.
“상하이에 도착해서 며칠이 지난 뒤에 나는 항주에서 병으로 요양하고 계신 신규식 선생을 찾아갔다. 신규식 선생은 상하이로 망명하기 전에 서울에서 만나뵌 적이 있는 분으로 학문이 도좌(到座)한 지사였고 후에 임시정부가 수립되고는 법무·외무장관을 거쳐 총리직을 맡은 분이었다. 거기에서는 신석우·박찬익 선생 등과 베이징 또는 만주에서 활동하다가 상하이로 오신 이시영·이동녕 선생도 만났다.… 많은 독립투사들을 만나고 보니 이제야 내가 보람된 일을 할 수 있겠구나 하는 기대감으로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외로운 선택의 나날’)
예관 신규식은 한국인으로는 유일하게 신해혁명의 주도자였다. 예관은 그에게 해위라는 호를 지어주고 그의 인생의 사상적 스승이 되었다. ‘바닷가에 선 갈대처럼 억센 파도에도 꺾일 줄 모르는 지조를 갖고 살라’는 뜻이었다.
3·1독립만세운동 후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자 해위는 1920년 의정원의원(국회의원에 해당)으로 선출됐다. 이승만 박사의 부탁으로 독립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국내 잠입을 시도하며 도쿄에서 공부하던 아우를 시켜 3000원을 가져오게 한다. 당시 집을 서너 채 사고도 남을 거액이었다.
“상하이에 간 지 4년 남짓 되었을 무렵, 신규식·이시영 선생과 신익희씨는 나에게 국가와 민족을 위해 좀 더 보람된 일을 하려면 공부를 더 해야 한다고 충고하며 구라파에 가서 수학하기를 권했다. … 1921년 6월경이라고 기억된다. 일본 관헌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중국인 여행권을 가지고 중국 유학생 틈에 끼어 프랑스행 배로 떠났다. 그때에는 임시정부 총리를 지낸 이동휘씨도 타고 있었다. … 그러나 배가 싱가포르를 거쳐 스리랑카의 콜롬보에 닿았을 때 정체가 탄로나 이동휘씨는 일본 관헌에 의해 강제 하선당하고 말았다. 중국 학생들 틈에 끼어 갑판 위에서 하선당하는 이동휘씨를 내려다보며 나는 분하고 억울한 마음에 한없이 눈물을 쏟았다. 간장을 베어내는 슬픔은 바로 나라를 잃은 민족의 비애였다.”(‘외로운 선택의 나날’)
해위는 1924년 영국 에든버러대학에 입학하여 고고학 학사·석사 학위를 취득한다. 그가 고고학을 전공하게 된 것은 오직 한 인간으로서 그 내용을 충실히 하고 인간의 도리를 깨우쳐 주는 학문이라고 믿었던 연유에서였다.
“두 번째 공부했던 버밍엄의 퀘이커 교단 설립 학교 때의 일이다. 거기에는 일본인 가와이 에이지로라는 교수가 와 있었는데, 그는 도쿄제대 교수로 일본인에게도 널리 알려진 사람이었다. … 어느날 가와이 교수가 한국 문제를 일방적으로 일본에 유리한 논리로 전개해 나갔다. 특히 일본이 한국을 위해서 일을 많이 해왔는데, 자기네 호의를 무시하고 배신 행위를 저질렀다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더 참을 수가 없었다. 헤이그 밀사까지 보내게 한 것도 일본인데, 호의를 무시당했다는 말도 했다. 일본 입장에서는 부패한 이웃(한국)을 두어 대단히 걱정된다는 말투였다. 나는 연설 기회를 얻어 가와이의 논조를 사사건건 배격하고 나섰다. 헤이그 밀사를 보내게 된 우리의 억울했던 사정을 밝히며 일본의 식민지 통치를 규탄하고 3·1운동 때의 비인도적인 갖은 만행을 구체적으로 지적했다. … 이렇게 사실적인 근거를 열거하면서 일본을 통박하자 장내에 있는 학생들로부터 박수가 터져나왔다. 당황한 가와이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어쩔 줄 몰라했다.”(‘외로운 선택의 나날’)
해위는 부친의 독촉으로 독립운동을 위해 미국에 가려던 뜻을 접고 1932년 귀국하여 서울 안국동 집에서 칩거하며 은둔생활을 한다. 광복이 되자 해위는 백남훈·김도연·허정·장덕수·유옥겸·윤치영 등과 한국국민당 창당 작업에 착수한다. 그후 이들은 조선민주당을 결성하려던 원세훈·김병로·조병옥·백관수 등과 합당하기로 합의하여 한국민주당을 결성한다. 해위는 미군정청의 농상공국 고문과 경기도지사 고문도 맡는다.
해위는 이듬해 민중일보 사장이 되었다. 이헌구가 부사장, 오종식이 주필, 김광섭이 편집국장이었으며 김동리·조연현이 함께 일했다. 이승만 박사의 직계 신문이라고 해서 하지 중장과 자주 마찰을 빚었다고 한다. 그는 1948년 이승만 국회의장의 비서실장이 되며 초대 서울시장에 취임한다.
여흥 민씨와 초혼했던 해위는 1949년 함태영 목사 주례로 공도빈의 차녀 공덕귀(孔德貴)와 재혼하며 상공부 장관에 취임한다. 상공부 장관 시절 해위는 이승만 대통령과 사이가 멀어지게 된다. 생고무 배정을 둘러싼 불화와 당시 경성전기 사장 이태환의 경질 문제에 대한 의견 대립 때문이었다. 그러나 6·25전쟁이 일어난 후 그는 적십자사 총재로 발탁되기도 한다.
부산 정치파동 후 해위는 야당 생활을 시작하여 1954년 5월 20일에 실시된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서울 종로 갑구에 출마하여 압승한다. 해위는 1958년에 4대 민의원에 당선되며 이듬해 민주당 최고위원에 선출된다. 1960년 4·19혁명 후 내각제 정부의 대통령에 취임하며 데모 만능사태로 시국이 혼미의 극에 달하자 시위 현장을 변장하고 탐색하기까지 한다.
“1961년에 접어들어 ‘2월 위기설’이니 ‘3월 위기설’이니 해서 불안감이 날로 고조되던 3월 22일 밤, 시청 앞에 수많은 데모 군중들이 운집해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 심상치 않은 생각에 시청 앞에 가보니 데모대들은 손에 횃불을 들고 격렬한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소위 데모 방지를 위한 2대 악법을 철폐하라는 요구와 함께 ‘장 정권 물러가라’는 구호도 함께 나왔다. 데모대들이 가두행진에 들어가자 나는 변장을 하고 횃불 행진 대열을 따라가며 지프를 몰게 했다. 시청 앞에서 시작하여 시가행진을 한 대모 대열은 국무총리 사택이 있는 명륜동으로 향했다.”(‘외로운 선택의 나날’)
해위의 생애에서 1961년 5월 16일은 가장 극적인 순간이었다. 쿠데타 소식에 잠을 설친 그는 오전 9시 조금 지나 현석호 국방장관,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을 접견했다. 작달막한 키에 검정 안경을 낀 소장 한 사람과 몇 번 청와대를 찾아온 적이 있는 대령 한 사람이 동석했다. 쿠데타를 지휘한 박정희와 참모 유원식이었다. 그들은 공손하게 두 손을 모아 부동 자세를 취했다. 권총은 현관에 맡겨졌다.
그들은 그들이 발표한 비상계엄을 추인하기 위해 장면 총리를 찾아달라고 요구했다. 해위는 방송을 통해 ‘장 총리는 하루 속히 나와 시국을 수습하라’고 권했다. 5월 18일 쿠데타 세력에 끌려 중앙청에 나온 총리는 그들이 시키는 대로 계엄을 추인하고 총사퇴했다. 미국 대사와 미8군 사령관은 해위에게 쿠데타 진압을 요청했으나 그는 군끼리의 충돌이 휴전선의 불안을 가져올 수 있다는 이유로 이를 거절했다. 이어 하야 성명을 발표했으나 국가의 유일한 헌법기관으로 일단 국가의 명맥은 이어야 한다는 주위의 권고로 다음날(5월 20일) 번복한다. 해위는 이듬해 3월 22일 쿠데타 세력이 구 정치인들을 송두리째 묶어 정치 활동을 금지시킨 이른바 정치정화법에 서명한 다음 대통령직을 사임한다. 이어 정치 활동이 허용되자 그는 반군정 투쟁에 앞장선다.
“정치 활동이 재개되자 그는 맨 먼저 군정 타도를 외치고 나섰다. 대통령 선거전은 날이 갈수록 치열해졌다. 그는 현직 대통령인 박정희를 ‘군부 좌익 프락치이며 여순반란 관련자’로 몰면서 사상 논쟁을 벌였다.”(‘한국을 바꾼 100인’)
해위는 1963년 대선에서 15만6000여표 차로 석패한다. 그는 ‘선거에는 이기고 개표에는 졌다’ ‘나는 정신적 대통령’이라고 할 만큼 고무되기도 했다. 특히 서울에서의 압승은 야당을 크게 고무시켰다.
- ▲ 서울 안국동 자택에서 선친 이야기를 하는 장남 상구씨.
해위는 국회가 열리자 굴욕적인 한·일협정에 반대하는 여론이 들끓고 시국이 혼미해지고 있는 상황을 지적하면서 이 같은 사태가 ‘혁명을 정당화할 만한 사태인가 아닌가’ 하고 정부를 통박했다. 그는 당내 온건파를 ‘사쿠라’로 매도하면서 당 노선을 선명하게 이끌어갔다. 한·일협정 비준반대 투쟁 중에 그는 7명의 강경파 의원들과 함께 의원직을 사임하기도 했다. 해위는 1967년의 대선에서 다시 박정희와 대결한다. 이후 유신체제하에서 투쟁가로서의 진가를 더욱 발휘한다.
독재체제하에서 해위는 재야의 핵심이 되어 선두에 서서 긴급조치를 철폐하고 민주주의를 회복시키는 운동에 앞장선다.
“1976년에 명동성당 시국선언문 발표사건이 있었다. 함석헌씨 등 십수명의 피고인들과 함께 법정에 서는 몸이 되었다. 그 삼복더위에도 단추 셋 달린 양복을 입고 젊은 판검사 앞에 부동자세로 서서 깍듯한 존댓말로 응했다. 77세 노령에 전 대통령으로서 구태여 법정에 나가지 않아도 끌어갈 사람은 없었고 더구나 박정희 대통령과는 적대관계에 있었다. 그러나 ‘정권은 반대하지만 법은 지켜야 한다’고 고집하면서 법정에 출두한 것이다.”(‘비록 한국의 대통령’ 월간조선 1993년 신년호 별책부록)
해위의 조카딸인 소설가 윤남경은 “그분은 투쟁을 위한 투쟁을 한 분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박 정권의 독재도 미워했지만 인간적인 결례에도 참을 수가 없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전(두환) 대통령이나 노(태우) 대통령이 깍듯이 전직 대통령과 어른 대우를 해주었을 때는 그 호의를 고맙게 받아들였다. 흑백논리만 알고 있는 일부 인사들이 ‘군정에 반대하려면 끝까지 반대하고 투쟁해야 하지 않느냐’고 말했을 때 그분은 잘해보려고 애쓰는 사람에게 돌을 던져서는 안 된다고 여긴 것 같다.”(‘비록 한국의 대통령’)
해위의 부인 공덕귀도 해위가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실형 선고를 받자 구속자가족협의회장을 맡는 등 민주화투쟁의 전면에 나선다. 그 이후 양심범 가족협의회 회장, 한국교회여성연합회 회장 등을 맡아 활약한다.
해위는 1990년 7월 18일 서울 안국동 자택에서 별세하며 충남 아산군 둔포면 선영에 안장된다.
해위는 4남매를 뒀다. 장남 상구(66·시라큐스대 건축학과 졸업)씨는 동서코포레이션 대표로 국제로터리 총재를 역임했으며 양은선(61·연세대 사회학과 졸업)씨와 결혼하여 일영(29·딜로이트컨설팅 근무)·영란(27) 남매를 두었다. 영란씨의 남편 문윤회씨는 프랑스 인시아드 MBA과정을 밟고 있다. 해위의 차남 동구(59·미국 로드 아일랜드 디자인 인스티튜트 졸업)씨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조형예술과 교수이다. 해위의 장녀 완구(작고·이화여대 음대 졸업)씨는 형법학자로 고려대 법대학장과 학술원회원을 지낸 남흥우씨와 결혼하여 2남2녀를 두었다. 장남 기방(67)씨는 린나이코리아에 근무했으며 최영진(서울대 농대 졸업)씨와 결혼했다. 차남 기윤(62·하이델베르크대 법학박사)씨는 광운대 교수로 임영수(이화여대 졸업)씨와 결혼했다. 맏딸 혜경(70·이화여대 졸업)씨는 고려대 불문과 교수를 역임한 강성욱(작고·일본 구주대 졸업)씨와 결혼했으며 차녀 혜정씨는 전봉수(전우구조사무소장)씨와 결혼했다. 해위의 차녀 완희(93·이화여대 미대 졸업)씨는 화가로, 신준호(작고·일본 메이지대 졸업)씨와 결혼하여 2남2녀를 두었다. 준호씨는 임시정부 총리와 외무·법무총장을 지낸 신규식의 아들이다. 장남 중수(67)씨는 이의균(65)씨와 결혼하여 독일 베를린에 살고 있다. 차남 흥수(65)씨는 해태유업 직판부장을 지냈으며 양향숙(58)씨와 결혼했다. 맏딸 경수(69)씨는 이동환(70)씨와 결혼하여 미국 뉴저지에 살고 있으며 밑으로 차녀 문수(64)씨가 있다.
“안국동 8번지 바로 이 집이 광복 후 한민당 창당의 산실이었고 그 후 많은 정치 모임이 있었지요. 방 안에는 양쪽으로 보료가 쭉 깔려 있어 위쪽부터 서열 순으로 앉곤 하였는데… 맨 아래에서 맨 위쪽까지 가는 데는 몇십 년 걸린다고들 하더군요. 바로 이웃의 안동교회도 식구들이 다녀 우리 집처럼 느껴지고요. 선친께서는 우리를 엄히 키우셔서 저도 잘못하면 회초리를 맞곤 했습니다.”(장남 상구씨)
내가 본 해위 윤보선 김준하 전 청와대 대변인 나는 해위 선생이 1954년 처음 등원했을 때 만난 이래 죽 인연을 갖게 됐다. 특히 그분이 1960년 제2공화정 대통령으로 선출되면서 대변인을 맡게 되어 5·16군사정변을 함께 맞게 되고 그 이후 반독재 투쟁에도 뒤따르게 됐다. 그분은 영국신사라는 별명에 걸맞게 성격이 온화하고 따뜻하셨다. “관습법 국가인 영국에서는 상식이 곧 헌법”이라면서 매사를 보고 결정하는 기준으로 상식을 내세웠다. 또 무슨 일이든지 한번 결정하실 때는 오래 심사숙고하신 후에 결정을 내리시고 일단 한번 결정하면 요지부동으로 강직하게 밀고 나가셨다. 이러한 해위의 인품에 ‘목숨을 걸고 쿠데타를 했다’고 극한 표현을 앞세워 다그치는 행태가 수용될 리 만무했을 것이다. 더구나 해위가 청와대를 떠나자 입성한 쿠데타군들의 제일성이 “이봐, 위스키 있어?”였으며 곧이어 잔디 들판에 멍석을 깔게 하고 술판을 벌였으니, 해위가 분노할 만도 하지 않았을까? 그분은 효심이 지극했다. 아침 저녁으로 노모에게 꼭 문안을 드리고 노모의 건강을 체크했다. 5·16 아침 비서들이 대통령에게 청와대를 피하도록 권유했을 때 그것을 거부한 이유 중의 하나도 자기 혼자만 피신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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