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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대통령 이승만을 생각하다 .송희복(문학평론가)

굴어당 2011. 6. 8. 18:47

시인 대통령 이승만을 생각하다


                                                                                                                                             송희복(문학평론가)


 

 전통적인 문사 선비형의 건국대통령 


 대한민국의 건국대통령인 이승만은 가장 역사적으로 화해할 수 없는 인물로 남겨져 있다. 유신 시대의 정적인 박정희와 김대중도 박근혜라는 정치적인 현존 인물과 근대화와 민주화의 접점을 열망하는 국민들의 중지(衆智)에 의해 화해가 이루어지고 있는 듯하고, 최근에 조봉암의 사건도 사법부의 잘못을 62년 만에 솔직하게 인정함으로써 역사적인 화해가 극적으로 이루어졌는데, 이승만 얘기가 나오면 국론 분열의 양상은 요지부동인 것처럼 보인다.

이 글은 건국대통령 이승만의 정치적인 공과를 얘기하는 자리가 아니다. 우리가 잊고 있었던 시인으로서의 이승만에 대한 문학적인 담론을 이끌어내기 위한 하나의 계기를 마련하기 위한 자리이다. 문인적인 면모로서의 이승만, 시인으로서의 이승만에 관한 단편적인 논의들이 그동안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가 유명 시인의 작품에 비추어 손색이 없는 200여 편의 우수한 한시(漢詩)를 남겼다는 얘기1) 하며, 시인 고은이 2007년 6월에 ������나는 역대 대통령의 언어들을 모두 기억하고 있다. (……) 이 전(前)대통령은 늘 문장화된 문자언어를 썼으며 비서가 써 주는 문장이 아닌 자신만의 문체가 있었다.������2)라고 말하면서 노무현 대통령의 직설 화법에 대해 쓴 소리를 했다, 라는 얘기 하며 말이다. 아닌 게 아니라, 대통령 이승만의 문식성과 교양의 정도는 익히 잘 알려져 있다.

 해방직후의 일이었다. 이승만의 돌연한 귀국은 해방정국에 열풍을 몰고 왔다. 연일 이승만에 관한 얘깃거리는 최고의 보도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온갖 찬사의 수식어가 난무하던 시절이었다.  한 신문에선 언제 지은 건지 알 수 없는 그의 한시 「실제(失題)」가 지상에 발표되고 있었다.


  늙어가는 것조차 잊고 나라만 생각했네

  무궁화땅 삼천리여

  비록 가난해도 굶는다 말하지 않고

  뉘라서 태평의 터전의 열리오


  忘老唯思國

  槿域三千里

  雖貧不議飢

  誰開太平基


 이 시를 보면 전통적인 제왕시를 느끼게 하기에 충분하다. 그 당시의 이승만 현상을 두고 요즘 말로 표현하자면, 대중들도, 본인 자신도 ������왕의 귀환������을 인정하는 하나의 사회적인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해방기의 정치지도자 중에서 중도좌파로서 대중적인 인기를 가지고 있었던 몽양 여운형마저도 이승만을 가리켜 ������동양화를 잘하시고 한시에도 조예가 깊으며……동양의 역사와 사상을 잘 알고 계신다.������라고 말을 했을 정도였다.3)

 여운형의 말대로라면 이승만은 시서화(詩書畵)에 능하고, 문사철(文史哲)에 밝다는 얘기가 된다. 전통 사회에서 선비들의 교양의 덕목은 시서화와, 문사철에 있었다. 그렇다면 그는 전통적인 문사 선비형의 정치 지도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4. 19때 스무 살 나이의 한 열혈청년이 역사의 현장에 있었다.

 고려대학교에 재학하고 있던 그 청년은 광화문 국회의사당 농성장에서 귀교를 권유하는 유진오 총장의 연설을 들었고, 귀교하던 중에 청계천 4가에서 임화수 깡패들의 습격을 받았고, 그 다음날 4월20일에는 이승만 물러가라, 자유당을 타도하자, 라며 목청껏 외쳤다. 그 후 청년은 오랫동안 출판인으로 살아왔다. 동서문화 발행인 고정일이다. 이즈음은 소설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그는 근래에 한 신문 지면을 통해,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시인 대통령 이승만의 빼어난 문학적인 감성과, 탁월한 정치 예견 능력을 되돌아보게 한다, 라고.4)


 시인 대통령의 청년 시절과, 두 편의 시


 이승만의 청년 시절은 고난과 열정으로 가득 찬 시절이었다. 다소 급진적인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언변과 논설로써 대중의 입장에 서서 고종황제와 왕당파에 맞서 싸우면서 정치적인 꿈이 좌절되고, 엄혹한 수형 생활을 감내하면서도 결국 고종황제의 밀사로 미국에 파견되고, 망국 이후에는 망명객으로 유랑하면서 타국에서 외교적인 활동으로 점철하는 삶을 살아갔던 것이다.

 청년 이승만의 정치인으로서의 데뷔는 1897년 6월8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에게는 이 날이 배재학당을 졸업하는 날이었다. 그는 졸업생 대표로서  졸업식사 연설을 하게 되는데 그의 비교적 유창한 영어 연설은 국내외인 참석자들을 놀라게 했다는 것이다. 이 날 외무대신, 미국 공사, 서재필 등이 참석했다고 한다. 22세의 청년 이승만의 이름을 정계에 각인시키는 순간이었다. 그러면, 그가 청년 시절에 썼다는 유명한 시 두 편을 살펴보자.


  슬프다 저 나무 다 늙었네

  병 들고 썩어서 반만 섰네

  심악한 비바람 이리저리 급히 쳐

  몇 백년 큰 남기 오늘 위태(롭도다)


  원수의 땃짝새 밑을 쪼네

  미욱한 저 새야 쪼지 마라

  쪼고 쪼다가 고목이 부러지면

  네 처자 네 몸은 어디 의지(하려나)


  버티세, 버티세 저 고목을

  뿌리만 굳혀 盤根 되면

  새 가지 새잎이 다시 榮華 봄 되면

  强根이 자란 뒤 풍우 不畏(하리라)


  쏘아라, 저 포수 땃짝새를

  원수의 저 미물, 남글 쪼아

  비바람을 도와 危亡을 재촉하여

  넘어지게 하니 어찌할까?


 이 시의 제목은 「고목가(古木歌)」이다. 1898년 『협성회보』에 발표된 자유시풍의 한글시가이다. 전통적인 시가 형식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신체시라고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 그렇다면  1908년에 발표된 최남선의 신체시 「해(海)에게서 소년에게」보다 10년 앞선 시기에 발표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사에서 아직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정도이다. 미국 펜실베니아대학교 명예교수인 이정식에 의해 영문으로 기술된 『이승만의 청년 시절』이란 저서에서 이승만이 이 시를 통해,  조선 왕국을 반 밖에 남지 않은 늙은 나무로 비유했고, 또 무지몽매하게 나라를 좀먹고 있는 탐관오리들을 늙은 나무를 쪼아 먹는 땃짝새(딱따구리-인용자)로 비유했으며, 자신들 개혁주의자들을 이를 쫓는 포수로 비유했음을 밝히고 있다. 이런 점에서 이 시는 청년 이승만과 젊은 개혁주의자들의 기개를 여실히 나타낸 것이라고 하겠다.5) 어쨌든 이 시가는 문학사적으로 재평가되어야 한다.

  1896년 7월에 출범한 독립협회는 서재필을 중심을 조직된 자주독립과 민주정치를 표방한 근대적인 의미의 정치단체였다. 이상재ㆍ이승만ㆍ윤치호ㆍ안창호 등의 개화 식자층이 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본격적인 혁신운동을 일으켜, 하나의 큰 세력단체를 이루었다. 서재필을 중심으로 시작된 독립신문을 기관지로 만들어 계몽과 여론의 환기를 꾀했다. 1898년 10월 종로 네거리에서 집회를 열고 시국에 관한 6개 조의 개혁 안을 황제에게 건의하는 등 적극적인 혁신운동을 전개하여 마침내 보수적인 집권층과 반목하게 되었다. 고종황제도 독립협회가 나랏일에 간섭하지 말라고 하며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협회의 회원들도 강한 어조로 반발하면서 상소문을 황제에게 올리게 된다. 대결 투쟁이 시작된 것이다. 홍종우를 중심으로 한 왕당파의 황국협회와 독립협회의 가두 충돌 사건이 일어나 독립협회 회원 한 명이 소위 정치 깡패인 보부상들에 의해 맞아죽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 후 황국협회의 무고로 이상재, 남궁억 등 독립협회의 간부 17명이 검거 투옥되었고, 황국협회의 수족인 천여 명의 보부상들이 독립협회를 습격한다. 황제는 칙령으로 양회의 해산을 명령했으나 독립협회는 만민공동회의 이름으로 1년 간 더 존속하였다. 1899년에 이승만은 박영효와 공모하여 공화 정부를 세우려 했다는 죄목으로 체포된다. 근대적인 의미의 역모 사건인 셈이다. 이승만은 재판장 홍종우에 의해 태형 1백대와 종신형을 선고 받는다.

 그는 23세부터 29세에 이르기까지 5년 7개월간에 걸쳐 한성감옥에서 영어의 몸으로 살았다. 이 기간에 그는 스스로 많은 것을 변화시켰다. 기독교의 수용, 끊임없는 독서, 『영한사전』과 『만국공법』 등의 집필 저술 활동, 민중선동가로부터 옥중논설가로의 변신, 옥중 서당을 여는 등의 교육에 대한 신념 등이었다. 그는 옥중 생활을 하는 동안에 짧은 한시를 썼는데 이것이 신문에 발표되어 유명해졌다.


  쇠사슬 얽매인 사람들끼리

  새로운 정 도타워지고

  사립을 쓴 사람을 만나니

  낯익은 것처럼 트이네

  

  鐵鎖結人新情密

  紗笠逢人舊面疎


 이승만이 출옥했을 때의 일이다. 은밀히 궁녀가 찾아와 황제께서 뵙자는 말을 전한다. 그는 그 순간 증오감이 치밀어 올라 일언지하에 거절한다. 무엇보다도 정부의 실세였던 민영환과 한규설을 믿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정부에서도 영어에 능통하고 유능한 이승만을 외교적으로 활용하고 싶었던 것이다.

 결국 그는 고종의 밀사가 되어 도미하게 된다.

 감옥에 가두고 감옥에 가두어진 두 사람. 즉 망국을 지켜볼 늙은 황제와, 먼 훗날 건국대통령이 될 젊은이가 비밀리에 만났다는 얘기가 있다. 역사의 아이러니가 교차하는 극적인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모종의 거래도 있었다. 자신의 아버지를 정부 차원에서 극진히 보살펴 준다는 조건에서였다. 이 대목에선 한 편의 멜로드라마를 보는 것 같다고나 할까.


  『우남시선』 속에 담긴 인간적인 마음의 자취들


 이승만 대통령의 한시 작품의 수는 200편이 넘는다고 한다. 1959년 공보실에서 이승만의 한시를 가려 뽑은 『우남시선(雩南詩選)』을 펴낸다. 이 시집에 31편의 한시가 실려 있는데 한 편을 제외하고는 모두 1945년에 귀국한 이후에 쓴 작품들이다. 공보실에서는 아직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지 않은 작품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대표작 엄선이라기보다는 홍보용으로 제작된 것인 듯싶다. 이 시선집의 31편을 번역한 이는 노산 이은상이다. 귀국한 이듬해인 1946년에 어릴 때 살던 옛집을 찾아 쓴 감회의 시가 「옛집을 찾아(訪舊居)」인데 그 원문은 다음과 같다.


  桃園故舊散如烟

  奔走風塵五十年

  白首歸來桑海變

  東風揮淚古祠前


 이 시를 처음으로 번역한 이는 시인 서정주였다. 서정주는 공보비서관 김광섭(시인)의 소개로 이승만 전기를 집필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는 1947년에 경무대에 일주일에 두 차례 들러 이승만의 구술을 메모했다. 이 년 후 『이승만박사전』이 삼팔사에서 나왔을 때 이승만은 매우 불쾌해했다고 한다. 소설의 형식으로 씌어졌기 때문에 사실과 부합되지 않는 점이 많았고, 무엇보다 자신의 선친에 대한 경칭이 생략되어 언짢은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이승만이 서정주가 어느 정도 되는 시인인가, 하고 물었을 때, 김광섭은 좋은 시인입니다, 라고 대답한다. 그러자 그는 ������그 사람 저의 집 어른도 못 모시어 봤나?������하고 되물었다고 한다. 어쨌든 위의 시 두 역본을 나란히 인용해본다.


  복삿골의 옛 벗들 연기처럼 흩어져

  어수선히 지나온 오십년이여

  모두 변한 터전에 흰머리로 돌아와

  옛 사당 앞 비낀 해에 눈물을 뿌리다니


                                                        ―서정주 역본6)


  도원(桃園) 옛 친구들 서로 흩어져

  오십년 풍진 속을 돌아다니다

  흰머리로 돌아오매 모두 변하고

  사당 앞 봄바람에 눈물만 짓소


                                                         ―이은상 역본7)


 서정주의 역본이 10년 전에 발표되었는데 도리어 현대적인 감각을 띠고 있으며, 이은상의 역본은 7. 5조 변형의 정형률을 지향하고 있음이 특징적이라고 하겠다. 이승만은 황해도 평산에서 태어났으나 세 살 때 서울 남대문 밖 도동(挑洞)으로 이주했기 때문에 서울이 고향과 다를 바가 없다.


  전당강(錢塘江) 경승이 좋다는 말 하 많이 듣고

  오늘에야 와서 보게 되는 나그네의 마음

  옛 탑 서남쪽으로 뻗어 있는 평평한 들녘 빛이여

  높은 누각 아래엔 밤낮으로 흐르는 강물소리로다

  산 주변 남으로 월나라 천년의 옛 땅이요

  다리 보이는 동으로는 만리 먼 길 내 나라일세

  해 기울기 쪽으로 나 홀로 서서 바라보나니

  저물녘 안개 속으로 배만 둥실 떠 가네


  錢塘形勝飽聞名

  此日登臨暢客情

  古塔西南平野色

  高樓日夜大江聲

  山圍南越千年地

  橋出東韓萬里程

  獨立斜陽聊極目

  征帆落處暮烟生 


 이승만은 1947년에 중국 장개석 총통을 만나기 위해 중국으로 건너갔다. 무슨 정치적인 회담이 있었던 것 같다. 그의 중국행 가운데 몇 편의 시가 그의 시선집에 눈에 뜨인다. 위의 시는 제목이 「전당강을 지나며(過錢塘)」이다. 시 속의 그는 지금 항주에 있다. 육화탑에 올라 드넓은 평야를 바라보고, 전당강 대교 지나면서 동쪽의 우리나라를 생각한다. 마지막 7 ․ 8행은 서호의 아름다운 풍광을 묘사한 것 같다. 이 시는 전형적인 선경후정의 시라고 할 수 있겠는데, 행간에 그의 우국의 상념이 배어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그의 시는 두보(杜甫)의 품격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두보적인 우국연민의 시풍이라면 1951년 부산에서 지은 「전시의 봄(戰時春)」이 아닐까 생각된다.


  강산 바라보니 진영(陣營)의 연기 자욱하고

  중공군 깃발 서양 돛대 봄 하늘을 가리었네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는 집 잃은 나그네들

  누구나 할 것 없이 생쌀 씹고 다니네

  거리에 남아 있는 옛 벽만 우뚝하고

  산마을엔 새로운 화전(火田) 일구고 있네

  전쟁이야 그치건 말건 봄바람 불어대고

  피 흘려 싸우던 들판, 초록 새잎 돋아나네


  半島山河漲陣烟

  胡旗洋帆翳春天

  彷徨盡是無家客

  漂泊誰非辟穀仙

  成市遺墟如古壁

  山川燒地起新田

  東風不待干戈息

  細草遍生敗壘邊


 이 「전시의 봄」은 내가 생각하기로는 내가 본 그의 시 중에서도 가장 두보적인 시가 아닌가 한다. 국파산하재(國破山河在), 산천초목심(山川草木深)……으로 시작하는 두보의 명시 「춘망(春望)」을 연상케 하는 시이다. 6. 25 전시 상황을 이렇게 사실적으로 전해주는 시는 자유시에서도 그렇게 흔하지 않다. 인간 이승만의 우국연민의 감정이 잘 담겨 있는 회심의 명편이 아닌가 한다.

 특기할 사실은 『우남시선』에 「불국사」와 「해인사」와 「석불」 같은 불교적인 내용의 시가 있다. 그는 5년 7개월간 수형 생활을 하면서 기독교를 수용하고 ������예수를 믿어야 조국이 산다.������라는 신념을 갖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어릴 대 불심이 매우 깊은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의 어머니는 어릴 때 그에게 불교를 가르쳤다.8) 그의 시를 보아도, 그가 대통령이 된 이후에도 불교의 참뜻을 이해했는지 알 수 없지만 불교에 심취해 있었을 것이다. 대처승과 비구승간의 문제와 갈등을 적극적으로 정리한 것만 보아도 그렇다.


  높은 수준을 가리키는 단 한 편의 시


 이승만의 시적, 인문적 교양의 수준은 익히 잘 알려진 바 있다. 그가 남겨놓은 산문도 앞으로 재조명되어야 한다고 본다. 서정주의 『이승만박사전』(1949)은 대통령의 노여움을 사게 되어 금서가 되었다. 이것이 유족과 저자의 동의하에 복간되는데 1995년 화산문화기획에서 발간된 『우남 이승만전』이 바로 그것이다. 이 책의 앞부분에 이승만의 서예를 찍어놓은 사진들이 여럿 있는데, 거기에서 내 눈빛을 반짝이게 한 시 한편이 있었다. 고졸한 서체의 어느 봄날에 쓴 제목 없는 즉흥시였다. 흘림체여서 뚜렷이 알 수 없었으나, 시의 말미의 메모는 춘일희제(春日戲題)인 듯했다. 앞으로 이를 제목으로 삼아도 될 성 싶었다.


  焉敎花與月

  無晦又無新

  花月長春國

  人無白髮愁 


 이 시는 서예 작품으로만 전해왔기 때문에 어느 책에도 있지 않을 것이다. 물론 『우남시선』에도 없다. 어쨌든 매우 함축적인 내용의 시이다. 제2행에서의 어둠(晦)과 새로움(新)은 곧이곧대로 풀이하기를 스스로 거부한다. 어둠이란 달에게 있어서 그믐이 아닌가? 또 새로움은 꽃에 있어서 새로운 계절을 가리키거나 뜻하는 것이니 여기에는 시인이 가진 무상(無常)의 관념이 반영되어 있다고 하겠다. 자연의 무상은 인간사의 무상으로까지 이어진다. 이승만의 시적 교양의 수준, 시적 성취를 가늠케 하는 주옥의 명편이 아닌가 한다. 대통령이 남긴 이 절묘한 시음(詩吟)을 아래와 같이, 나는 마음 깊이 새기고자 한다.


  꽃과 달에게서

  계절과 그믐을

  정녕 지울 수만 있다면,

  꽃과 달은 늘 봄의 나라요

  아, 사람의 백발도

  시름이 없으리니.



  



1) 오영섭, 「이승만 대통령의 문인적 면모」, 유영익 편, 『이승만대통령 재평가』(연세대 출판부, 2006), p. 440, 참고.


 

2) 연합뉴스, 2007, 6. 13 입력기사.


 

3) 이승만의 작품 「실제」(자유신문, 1945, 10,17)의 한시 내용과, 이승만에 대한 여운형의 평가 인용문은 손세일의 글 「이승만과 김구」(월간조선, 2010, 10)에서 재인용하였다.


 

4) 고정일, 「시인 대통령 우남」, 문화일보, 2008, 3. 29.


 

5) 이정식 지음, 권기붕 옮김, 『이승만의 청년 시절』(동아일보사, 2002), pp. 56~7, 참고.


 

6)서정주, 『우남 이승만전』(화산문화기획, 1995), p. 28.


 

7) 이승만, 이은상 역, 『우남시선』(공보실, 1959), p. 7.


 

8) 이정식, 앞의 책, p. 38,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