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보시의 ‘행간의 말’과 ‘말 옮기기’
이 글은〈端午日賜衣〉라는 두보의 시 감상을 통하여 두보가 행간에 하고 있는 말을 이해하고저 하며,두보시를 우리말로 바르게 옮겨 감상하고저 하는 두가지 과제를 염두에 두고 쓴 글이다.
《두시상주》에 乾元元年五月 拾遺로 있을때 지은것이라고 소개하며 五月은 12간지 중에서 말을 상징하는 ‘午’에 해당하는 달이므로 ‘端午’라 하는데 ‘端’란 ‘正也’라고 설명 하고 있으니 ‘端午’란 ‘정확히 말날’ 이라는 뜻이다. 음력으로 5월 5일로써 가장 양기가 센 날로 ‘수릿날’이라고도 하는데 ‘수리’란 말이 1년 중 최고의 날이란 뜻도 되는걸 보면 중국과 한국에서 중요시되는 날이다.
이날은 약초·창포·쑥 등의 강한 향기와 약성(藥性)으로 재액을 쫓고 임금은 신하들에게 부채를 선물하기도 하였다. 이날을 맞아 두보는 왕으로부터 궁녀가 지은 옷을 선물 받고 그 감격을 시로 지었다. 宮衣亦有名 궁녀지은 옷 하사자 명단에 이름이 올라 端午被恩榮 단오날에 입는 성은을 내 누리노라 細葛含風軟 가는 베는 바람 머금어도 부드럽고 香羅疊雪輕 향기 비단은 쌓인 눈에도 가벼워라 自天題處濕 천연으로 생긴 건 촉촉하거늘 當暑著來淸 더운 날 입으면 시원 하구려 意內稱長短 마음속 어림으로 길이를 가늠하니 終身荷聖情 평생의 성은을 짊어졌도다.
宮衣를 하사받는 명단에 이름이 올라 端午의 성은 입는 영광을 내가 누리노라
이 首聯은 임금의 하사 명단에 자신이 오르게 됨을 자랑스러이 여기는 마음이 담뿍 담겨있다. 이에 대해 다음 두시에 관한 두 주석서를 참고하여 고찰 해 본다. 《杜詩祥注》1)에는 ‘有名’을 ‘見出於望外 時公將謝官矣’라 하였으니 이는 당시에 두보가 관직을 그만 두려던 시기 이므로 명단에 오르기를 바라기 힘든 때라는 설명이다. 그러나, 《補注杜詩》2)에서는 ‘공이 건원 원년 단오에 간성에 있었고 아직 화주사공이 되어 나가지 않았으니, 궁의를 하사 받는 게 마땅하다.’3)고 전한다. 이 두 주석서에서 확실한 것은 두보가 左拾遺라는 관직4)에 있었던 시기에 지은 시라는 것이다. 하사품을 내리는 품계는 때마다 다르기 때문에 지금 정확히 알 수 는 없지만, 두 주석서를 참고하면 명단에 시인의 이름이 있음이 마땅하다고 본 《보주두시》의 의견을 자연스럽게 수용하게된다. 그렇다면 옷을 하사받을 당연한 자격임에도 시의 첫째 귀에서 ‘궁의 하사자 명단에 내 이름이 올라 있었노라’라고 구지 언급하고 있는건 이 사실에 대한 강조 혹은 자랑이다. 시인은 이어지는 둘째 귀에서도 거듭 ‘단오날 내가 왕의 성은을 입는 광영을 누리었노라’라며 거듭 자랑을 늘어놓고 있다. 이에서 독자는 두보가 성은 입은 사실에 대하여 얼마나 영광스럽고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 두보의 자랑은 이어진다. 그 하사품이 얼마나 특별한가에 대한 설명으로. 그러나 이 싯귀 ‘細葛含風軟’ 은 우리나라에는 ‘가는 베옷은 바람을 머금은 듯 부드럽고’라고 대부분 그대로 직역하여 소개되고 있다5). 비단은 동물성 천으로 찰랑임이 속성이다. 작은 바람의 흔들림에도 찰랑대며 그 부드러움을 드러낸다. 그러나, 베는 식물성인지라 부드러움에 한계가 있다. 세모시가 너무나 가늘어 비단결처럼 부드러울 지라도 바람을 머금으면 그 뻣뻣함을 감추지 못한다. 그 장점은 몸에 밀착되지 않는 여름옷으로 제격이다. 따라서 ‘바람을 머금은 듯 부드러운’이라는 표현은 베옷의 경우에는 맞지 않는 표현이 된다. 마땅히 ‘바람을 머금을 지라도 부드러운 베옷’이라는 뜻이 담긴 표현으로 ‘바람 머금어도 부드러운’으로 새겨야 옳을 것이다. 뛰어난 시인 두보는 바람을 머금으면 머금을수록 뻣뻣해지는 베옷을 그 바람과 대치시켜서 하사받은 옷의 특별함을 오히려 드러내고 있다. 예사로운 일인 듯 싶지만 예사롭지 않은 시인 두보의 예리함이 살아나는 대목이다. 이렇듯 보일듯 말듯 보여주는 두보시의 날카로운 관찰력은 ‘~에도’라는 하나의 조사로 인해 말의 속뜻이 제대로 성립되지 않던 시에서 두보만의 특별함을 살려주는 싯귀로 살아나게 된다. 참고로《두시상주》에서는 ‘含風’은 ‘形其軟’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어지는 넷째귀도 마찬가지이다. ‘香羅疊雪輕’을 일반적으로 ‘향기로운 비단은 눈이 쌓인 듯 가볍다’라고 우리나라에 번역하여 소개되고 있다. 이는 비단의 가벼움을 눈의 가벼움으로 비유삼은 뜻으로 새긴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 있어서 눈은 무겁다. 약간의 눈이라면 모를까 시인이 얘기하는 ‘疊雪’즉 두껍게 쌓인 눈은 지붕도 주저앉히는 무게다. 이 시를 짓기 전 이미 중국의 광활한 대륙을 떠돌았던 두보가 눈의 무게를 몰랐을 리는 없다. 따라서 ‘쌓인 눈처럼 가볍다’라는 말은 그 뜻이 성립되지 않는 말이다. 두보는 굶주림과 고달픔의 대변자이다. 이 시를 지을 당시는 두보의 생애 두번째로 45세에 얻은 벼슬을 하던 시기이다. 24세에 진사시험에 낙방한 이후로 근 20년을 처자식과 더불어 長安을 중심으로 전국을 헤매고 다녔다. 그랬던 시인이 쌓인 눈 속에서 한걸음 한걸음 내걷기가 얼마나 힘이 드는지를 몰랐을 리가 없다. 그러기에 두보는 고급 비단이 갖고 있는 가벼운 장점이 가장 잘 발휘되는 상황을 쌓인 눈 속에 기가 막히게 잘 적용시킬 수 있는 것이다. 더 이상 가벼운 비단의 장점을 잘 드러낼 방법은 얻기 힘들것이다. 마땅히 ‘쌓인 눈속에서도 오히려 가볍게 느껴질 만큼 뛰어난 기능을 가진 비단’의 의미를 살려 ‘香羅疊雪輕’의 싯귀는 ‘향기 비단은 쌓인 눈에도 가벼워라‘ 로 새김이 옳다고 본다. 이렇듯 중요 하고도 절묘한 비유를 이끌어 낼 수 있는 시인의 예리한 관찰력은 ‘~에도’라는 하나의 조사 때문에 뜻도 성립되지 않는 시에서 두보만의 특별함을 살려주는 싯귀로 살아나게도 한다. 이에서도《두시상주》에서 ‘疊雪’은 ‘形其輕’이라는 설명을 하고 있다.
首聯에서 임금의 하사품을 받는 그 영광스러움을 말했다면, 하사품의 품질이 특별히 뛰어나다는 말로 시인의 자랑스러움을 구체적으로 꾸미고 있는 頷聯이다. 이러한 속내를 담고 우리말로 옮기면 ‘하사품 옷은 가는 베가 하도 가늘어 부드럽기가 바람을 머금어도 부드럽고, 향기로운 비단은 또 어찌나 가벼운지 쌓인 눈 속에서도 오히려 가볍다.’라고 정리가 될 것이다. 아울러 《독두시설》에서 ‘含風’은 質을, ‘疊雪’은 色을 아울러 일컫는다6)고 하니 이는 속뜻을 좀 더 궁구한 소득이라고 하겠다.
自天題處濕 천연으로 생긴건 촉촉하거늘 當暑著來淸 더운 날 입으면 시원하구려
이번에는 하사품의 쓰임을 들어 빼어남을 말하고 있다. 위 頷聯에서는 하사품 자체의 품질 즉 ‘體’를 말했다면, 이에서는 ‘用’을 들어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베는 본래 생긴 자질이 촉촉한 곳에 보관해야 찢어지지 않는다. 습기는 더위를 더 덥게 하건만, 무더위 속에서 오히려 상쾌감을 주는 베옷의 특징적 효용성은 이미 신묘한 쓰임이요 妙用이다. 신묘한 쓰임, 함련에서는 베와 비단을 들어 말했건만, 이 경련에서 비단은 빼고 서민적 베의 특징만을 말한다. 습한 음지에 숨겨져 있던 베옷이 무더운 여름에 오히려 시원해지는 그 묘용. 비단처럼 귀하게 쓰이지는 않아도 어렵고 힘든 시절에 훌륭히 제 몫을 해 내는 베의 신묘한 쓰임새. 시인은 비단이 아니다. 다만 음지에 있는 베일뿐이다. 음지에 있는 시인 두보가 여름날 베옷이 되기 위해서는 베의 효용을 잘 알아서 그 쓰임에 맞게 이용할 줄 아는 묘용의 주관자가 필요하다. 평생 벼슬을 찿아 헤맨 시인 두보에게 있어서 妙用을 부리는 실체는 당연히 임금이다. 시인은 베의 묘용을 들어 말하고 있지만, 행간에는 임금의 권력에 대한 묘용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어지는 시를 살핌으로 그 상관 관계를 알아보자.
意內稱長短 마음속 어림으로 길이를 가늠하니 終身荷聖情 평생의 성은을 짊어졌도다.
이 다섯째 귀에서 시인은 자신의 의중으로 왕의 하사품에 길고 짧음을 가늠하고 있다. 언뜻 보기에는 임금이 내려주신 하사품에 대한 수용의사를 내 보이는 듯 싶으나, 그것만으로는 어딘지 석연치 않다. ‘시성’으로 불리우는 두보가 이토록 맥 빠지게 하사품에 대한 마무리를 하고 있다는 말인가? 평범한 사람들도 얼마든지 할 만 한 말로? 게다가 ‘평생의 은혜를 짊어졌다’는 단순 의식과 단순 서술로 마감까지 하고 있다면 이토록 맥 빠지게 뒷마무리 되어진 시를 우리는 과연 ‘위대한 시’라고 볼 수 있는가? 아무리 하사품에 대한 특별함을 기가 막히게 읊었다 한들 마무리가 영글지 않은 시를 두고 후세의 평자들은 ‘싯귀를 다듬는 법에는 오로지 두소릉이 그 묘수를 다 했다7).’라고 평하였을까? 길고 짧음을 意中으로 가늠하는 왕의 하사품을 대하는 시인의 수용적 행위의 중심에는 ‘聖恩’이 있다. 첫째 귀부터 성은을 입었음을 말했고, 그 성은의 體와 用을 말했고, 마지막까지 다시금 평생토록 짊어지는 성은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 말을 맺기 직전에 하사한 옷의 길이에 대해 맘속으로 가늠하고 있다. 시인이 말 하지 않고 하는 말은 이 ‘하사품 옷’속에 숨겨져 있다. 이 시에서 ‘성은’에 대한 구체적인 상징 언어가 ‘하사품 옷’인 만큼 ‘하사품 옷’을 보고 마음속으로 가늠하고 있는 구체적 실상 역시 ‘성은’이다. 이는 다음과 같이 정리되어진다.
하사한 옷 〓 聖恩 〓 妙用 하사한 옷을 의중으로 가늠함 〓 聖恩을 意中으로 가늠함 〓 妙用을 意中으로 가늠함 ‘?’
이에서 ‘?’로 제시되고 있는 ‘묘용’에 대해 시인은 직설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다만 임금의 妙用 - 평생 짊어지고 싶은 성은 - 이 쓰이기를 바라는 행간의 말이 있을 뿐이다. 하사품 옷은 평생 간직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위대한 시인은 평생 짊어지고자 원하는 성은을 말로 말하지 않고 말한다. 앞에서 소개한 《보주두시》에 그 답이 있을 가능성이 있다. 이 하사품 옷을 받던 시기가 ‘공이 건원 원년 단오에 간성에 있었고, 아직 화주사공이 되어 나가지는 않았던 시기’8)이었다는 주석을 토대로 살펴보면 시인이 말하지 않고 하는 말의 실체는 드러난다. 관직의 이동시기에 평생 벼슬을 원했던 두보가 임금에게 바랄만 한 것은 다름 아닌 ‘벼슬’이다. 이러한 시인의 희망사항에도 불구하고 두보는 華州의 司功參軍이란 지방관으로 좌천되는 쓰라림을 겪고 말았다.
겉으로는 ‘성은’의 감격과 ‘평생의 은혜’를 말하는 듯싶지만, 속뜻으로는 ‘임금의 묘용이 자신의 벼슬에 평생 함께하기를 기원하는 二重의 含意를 지닌 두보의 대표적 시가 위에 소개된 시이다. ‘意內稱長短’이라는 한귀절 속에 담긴 寸鐵殺人의 묘수로 시 전체의 의미를 변환시키는 능력을 여지없이 보여주고 있는 시가 이 〈端午日賜衣〉이다. 이 시 하나만으로도 왜 두보에게 ‘詩聖’의 칭호가 붙는지를 알기에 충분하다. 이러한 작시의 빼어난 능력은 수없는 문인들로 하여금 두보를 칭찬케 하였으니 중국 淸의 黃士龍은 ‘한유 유종원의 문장과 도잠과 두보의 시는 다듬지 않은 구절이 없으나 조금도 도끼나 끌을 댄 흔적이 없는 것은 氣를 능히 다스려서 그렇다. 氣가 다스려지면 싯귀는 저절로 다스려지는 것이니, 싯귀를 다듬는 것은 흔적이 있지만 氣를 다스린 것은 흔적이 없다’9)라고 한 말들이 이 시를 통해서 그 한 과극을 볼 수 있다. 두보는 712년에서 770년 사이에 살았던 인물로 자는 자미(子美)이며 지금의 하남성 공현태생이다. 장안성 남쪽 소릉에 살면서 스스로를 소릉야로(少陵野老)라 칭하였다. 20대에 洛陽에서 진사시험에 두 번이나 실패하고 산동, 산서, 하남, 하북을 돌아다니며 시를 지었으나 이시기의 시는 전해지지않고 있다. 744년 동쪽으로 여행하며 李白․高適․岑參등과 어울리며 낭만주의적 시를 읊었다. 이후 근10년 매우 궁핍한 시절을 지내면서 나라와 백성을 걱정하는 사회적 색채를 띄게 되었다. 당현종의 아들 숙종이 鳳翔에서 등극했다는 소식을 듣고 봉상에 가서 左拾遺라는 간관으로 임명되었으나 상소가 숙종의 노여움을 사게 되어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윗 시는 좌습유의 관직을 하고 있을 때로 ‘의중에 길고 짧음을 가늠하며, 임금의 평생 성은을 바라던 바’는 시기상으로 보건대 결국 숙종에게 노여움을 산 상소문과의 연관성에서 찿아 볼 수 있을 것이다. 왕의 하사품에 대한 두보의 생각을 잘 살펴 볼 수 있는 시가 〈自京赴奉先縣詠懷3〉이다. 하사품에 관한 언급 부분만 번역으로 옮기며 원문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蚩尤10)塞寒空/蹴踏崖谷滑//瑤池氣鬱律/羽林相摩戞//君臣留歡娛/樂動殷膠葛// 賜浴皆長纓 성은목욕을 누리는 이는 모두가 고관대작 與宴非短褐 잔치에 참여한 이들은 뭇 백성이 아니로다 彤庭所分帛 임금께서 비단을 하사 하건만 本自寒女出 본래는 가난한 아낙이 만든 것 鞭撻其夫家 그 남편 그 가족 매질하여서 聚斂貢城闕 모질게 거두어 궐에 바친 것. 聖人筐匪恩 임금께서 은혜를 널리 베품은 實願邦國活 실제는 나라를 구하려 함이나 臣如忽至理 신하는 지극한 뜻 소홀히 여겨 君豈棄此物 임금의 하사의 뜻 어찌 버리나. 多士盈朝廷/仁者宜戰慄//況聞內金盤/盡在衛藿室//……
두보는 생활고에 처자를 奉先縣 농가에 맡겨 놨다가 755년 43세에 처음으로 冑曹參軍(正8品下;가장낮은 관리)이란 벼슬을 얻게 되었다. 기뻐서 처자를 데리러 長安에서 봉선현으로 가던 중 麗山에서 현종이 양귀비와 문무백관과 함께 온천욕을 즐기며 환락의 나날을 보내는 것을 목도한다. 집에 도착하였을 때는 굶어죽은 아들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위에 소개한 名詩를 남겼다. 가장 불운한 시기의 시작이기도 하지만 온천욕을 하는 권신들에게는 백성들과 함께하지 않음을 고발하고, 하사품으로 내려주는 비단도 어느 가난한 여인의 가족을 매질하여 수탈한 것으로 꼬집는 등 매우 부정적 시각으로 보고 있다. 그에 비해 두보 자신이 하사 받은 옷은 구지 ‘궁녀가 짠 옷’임을 밝힌다. 가난한집 여인이 짰을 경우에 대한 마음의 부담 때문 이었을까? 과연 다른 고관들의 하사받음에 대하여 보냈던 시인의 곱지 않던 시선은 두보 자신이 고관이 되어서 하사받는 경우에 고운 시선으로 비켜 갈 수 있었을까? 이미 하사품을 받을 지위에 있었다는 것은 그 자신도 고관임에 틀림없었던 것은 아닐까? 아무리 잠깐 이었다 해도.
1) 仇兆鰲가 지은 두보에 관한 집대성 자료집 2) 宋 黃鶴著 두시에 관한 주석서. 3) 公乾元元年端午見諫省, 未出爲華州司功, 宜與宮衣之賜, 4) 唐의 左拾遺는 측천무후시기에 補闕의 위치에 拾遺2官을 두어 進諫과 薦擧를 맡겼다. 當代門下省은 左省으로 稱해서 門下省에 屬한일은 左補闕이라 稱하여 左拾遺 中書省에 屬한일은 右補闕이라 稱하여 右拾遺라고 하였다. ≪文獻通考職官 拾遺補闕≫. 중국의 직제를 따른 고려의 직제에 의하면 좌습유는 뒤에 正言으로 정6품으로 조선시대에는 사간원으로 독립한 직책이다. 5) 윗시 해석의 一例 ; 宮衣亦有名 궁전 옷에 또한 이름이 있으니/端午被恩榮 단옷날에 은총을 입었음이라//細葛含風軟 가는 베옷은 바람을 머금은 듯 부드럽고/香羅疊雪輕 향기로운 비단은 눈이 쌓인 듯 가볍다//自天題處濕 하늘로부터 題書제서한 곳 젖어 있고/當暑著來淸 더운 날 입어 보니 서늘하구나//意內稱長短 마음속으로 어림하여 길이가 맞으니/終身荷聖情 평생 성인의 은정을 지게 되었구나
6) 細葛含風軟二句 注 含風形其軟 疊雪形其輕 今按 含風兼言質 疊雪亦兼言色 7) 李仁老, ‘琢句之法 唯 少陵獨盡其妙~ 古之人 雖有逸才 不敢妄下手 必加鍊琢之工 然後 足以垂光 虹蜺輝映千古’ 『破閑集』 8) 公乾元元年端午見諫省, 未出爲華州司功, 宜與宮衣之賜, 9) 韓柳之文 陶잠之詩 無句不琢 卻無纖毫斧鑿痕者 能鍊氣也 氣鍊則句自鍊矣 雕句者有跡 鍊氣者無形 『野鴻詩的』 10) 군신(軍神)·병주(兵主) 등 전쟁의 신. 치우천왕·慈烏支天王·慈烏支桓雄등으로 불린다. 탁록의 싸움에서 황제(黃帝)와 싸우다 응룡(應龍)에게 죽었다고 《산해경(山海經)》은 전한다. 한국기록; 1675년(숙종 1) 북애노인(北崖老人)작으로 추정되는 《규원사화(揆園史話)》(상권)와 계연수(桂延壽) 1911년 편집의 《환단고기〉. 치우는 배달국(倍達國)의 제14대 천왕(천황)인 자오지환웅. B.C. 2707년 즉위. 109년간 통치. 6개의 팔과 4개의 눈, 소의 뿔과 발굽, 구리로 된 머리와 쇠로 된 이마를 하고, 큰 안개를 일으킬 수 있음. 81명의 형제에, 병기 제작 능력이 뛰어나 활·화살·창·갑옷·투구 등 각종 무기를 만들어 신농(神農)을 무찌름. 또 12개의 제후국을 합병하는등, 70여 회의 전쟁에서 한번도 패하지 않고, 헌원(軒轅)을 황제로 임명하기도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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