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세종대왕
- 세종실록을 중심으로 –
이광종(李匡鍾)
2011년 8월 24일
세종실록의 구성
세종실록은 162권 143책으로 편찬되었으며 총서, 연대기 그리고 다른 실록에서는 보기 힘든 ‘지(志)’와 부록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志)에는 오례(五禮), 아악(雅樂), 지리(地理), 칠정산(七政算) 내외편(內外便)이 있으며 부록에는 행장(行狀), 시책문(諡冊文), 애책문(哀冊文) 등이 있어 당시의 다양한 분야의 연구 업적이 얼마나 방대한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세종이 승하한지 2년 1개월이 지난 문종 2년(1452) 3월에 편찬이 시작되었으며 2년 1개월만인 단종 2년(1454) 3월에 완성되었다. 위대한 학자인 성삼문(成三問) 같은 신하가 있어서 편찬을 속히 마칠 수 있었다고 한다.
총서에 기록된 세종대왕
세종실록 총서의 첫 면은 세종의 이력서와 같다. 총서는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世宗 莊憲大王 實錄 卷第一
세종 장헌대왕 실록 권제일
실록을 처음 보기에는 매우 낯설게 느껴지는데 이 한문은 세종실록의 정식명칭이다. 첫 문장의 첫 마디는
世宗 莊憲 英文 睿武 仁聖 明孝 大王
세종 장헌 영문 예무 인성 명효 대왕
인데 이 문장에는 매우 중요한 정보가 담겨있다. 첫 두자 ‘세종’은 묘호이며 그 다음은 모두가 세종의 시호, 즉 그의 행적을 기리고 일생을 평가하기 위해 올린 이름인데 그 중 처음 두자인 ‘장헌’은 명나라에서 내린 시호이다. 세종실록 32년 2월 22일(음력) 기록에 묘호를 세종이라고 올렸고, 문종실록 즉위년 8월 18일 명나라로부터 장헌이란 시호를 받은 기록이 있다. 세종대왕은 1397년 4월 8일에 탄생하였고 1450년 2월 17일에 53세로 승하하였다. 재위 기간은 33년 이었다. 능은 여주에 있는 영릉(英陵)인데 처음에는 현재 국정원이 위치한 서울 강남구 내곡동에 있다가 세조때 천장(遷葬)을 논의하다 예종 1년 윤 2월에 여주로 옮겼다. 영릉의 원찰(願刹)은 여주 남한강변에 있는 신륵사(神勒寺)였다. 총서는 이어 세종대왕의 “휘는 도요(祹: 복 도), 자는 원정(元正) 이니…”라고 이어지며 세종의 가족이 소개된다.
정안대군 이방원, 태종 공정 대왕(太宗恭定大王)의 세째 아들이요, 어머니는 원경왕후(元敬王后) 민씨이다. 태조 6년 정축 4월 임진에 한양 준수방(俊秀坊) 잠저(潛邸)에서 탄생하였으니, 명나라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 홍무(洪武) 30년이다.
잠저란 임금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집을 말한다. 흔히 세종은 궁에서 태어나신 것으로 아는데 실은 태종이 왕자 시절 궁궐 밖에서 태어 나셨다. 결혼한 왕자는 궁궐에서 생활을 하지 못하게 되어있었기 때문이다. 태종은 1400년에 등극한 관계로 1397년에 태어난 세종대왕은 경복궁 서쪽에 있는 현재 통인동 119-1번지로 추정되는 당시 동내 이름인 준수방에서 태어나셨다. 지금 통인동 길가에는 표석이 남아있다.
태종실록 기록을 보면 태종 8년(1408) 2월 11일에 세종을 충녕군(忠寧君)으로 삼고 태종 8년 2월 16일 기록에는 우부대언(右副代言) 심온(沈溫)의 딸과 결혼하고 다음해 태종 9년 윤4월 13일에 충녕을 대군으로 봉했다.
세종의 여성과 자녀
총서에는 없지만 후궁은 8명으로 실록에 기록되었고 조선 왕족의 족보인 선원보략(璿源譜略)에는 5명으로 기록되어 있어 기록을 중요시 한 조선왕조에도 착오가 있었던 것 같다. 자녀 기록 역시 실록에는 18남 4녀로, 선원보략에는 18남 9녀로 되어있으며 자녀를 낳지 못한 후궁의 기록은 선원보략에서 누락되었다고 본다. 유별나게 소헌왕후와의 금슬이 좋았던 세종의 후궁에 관한 태도가 실록에 적혀 있다. 세종 12년 12월 20일 기록에는 세종이 “나의 후궁에 대해서는 다시는 말하지 말라.”고 거절하는 기록을 볼 수가 있다. “지금 계비를 들이면 후대 왕들이 힘들어 할 것”이라고 하며 반대했다. 이러한 세종의 태도는 조선 후기에 영조가 66세 때 15살의 정순왕후를 계비로 들여서 사도세자의 죽음 및 정조의 개혁정치에 장애가 되게 했던 것과 대조가 된다. 이렇게 후궁에 대해 소극적이었던 것은 소헌왕후에 대한 애정과 배려 때문이었다. 소헌왕후의 가문이 부왕 태종에 의해 풍비박산된 후 더욱 애틋한 마음으로 왕비를 가까이 했다. 세종은 왕비가 “덕이 있고 아름다우며 마음이 깊고 고요하고 공손하고 부지런하며 스스로 경계하여 조심한다.”고 평했다. (세종 14년 5월 11일) ‘석보상절(釋譜詳節)’은 1447년(세종 29년)에 소헌왕후가 승하하시자 왕후의 명복을 기원하기 위하여 수양대군에게 명하여 석가모니의 일대를 담은 책인데 처음에는 한문으로 편찬하였다가 훈민정음으로 다시 편집한 책이다.
* 세종의 여인과 자녀들
세종이 특별히 총애한 후궁은 신빈 김씨(愼嬪金氏)였다. 신빈 김씨는 원래 궁궐 내 사용 비품의 출납을 관장하는 내자시라는 관청의 여종이었는데 세종 즉위년 원경왕후 민씨가 13살인 김씨를 뽑아 소헌왕후에게 보냈다. 김씨는 “천성이 부드럽고 아름다워 양궁을 섬기는데 오직 근신하였다”고 한다. 원경왕후와 소헌왕후 두 분을 잘 섬겼던 김씨는 성품이 신중하고 부지런해서 왕비의 심부름을 도맡아 했을 뿐만 아니라, 왕비의 침실을 섬기는 지밀나인(至密內人)까지 되었다. 1426년(세종 8년)에는 마침내 세종의 성은을 입어 그 후 12년간 무려 6남 2녀를 낳았다. 정2품 소의에서 종1품 벼슬인 귀인으로(세종 21년) 나중에는 정1품 신빈으로 승격하였다. 놀라운 것은 소헌왕후의 시녀가 세종의 총애를 받았지만 소헌왕후는 김씨를 시기하거나 미워하기는커녕 막내아들 영응대군(永膺大君)을 세종 16년에 김씨에게 양육을 맡겼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왕비가 후궁에 대한 절대적 신뢰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라고 본다. 세종 역시 신빈 김씨에게 왕후를 칭찬하면서 왕후를 질투하지 말고 존경하라고 가르쳤다. 그리하여 왕후와 신빈 김씨는 서로 미워하지 않고 다복하게 살았다.
신빈 김씨가 8명의 자녀를 두었던 이유가 있다고 신빈 김씨의 막내이자 세종의 18번째 아들이신 담양군(潭陽郡)의 후손 한 분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훈민정음 창제가 극비밀리에 진행되었는데 왕이 궁궐에서 비밀리에 회의하기에 마땅한 장소가 없어서 세종은 신빈 김씨 거처에서 비밀 프로젝트인 훈민정음을 준비하게 되었고 자연히 신빈 김씨 거처에서 주무시는 날이 많아서 8명이란 후손을 두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신빈 소생의 자손들이 번성한 이유에 대해서는, 등극 과정에서 반대한 동생들을 희생시킨 세조가 신빈 김씨에게서 난 이복동생들은 보살펴 주었는데, 비밀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훈민정음 창제에 활약한 세조는 신빈 김씨와 자연히 우호 관계를 갖게 되었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세종의 성격
다시 총서로 돌아가서, 세종의 성격에 관한 기록이 있다.
英明剛果, 沈毅重厚, 寬裕仁慈, 恭儉孝友, 出於天性
영명강과, 침의중후, 관유인자, 공검효우, 출어천성
정식 번역은 “영명(英明) 강과(剛果)하고, 침의(沈毅) 중후(重厚)하며, 관유(寬柔) 인자(仁慈) 공검(恭儉)하고, 또 효도하고 우애함은 천성이 그러하였다”이다. 한문 번역이 되어있어도 어려우며, 한문을 쓰지 않은 북한의 번역은 “영특하고 문명하면서도 과단성이 있으며 강의하고 신중하면서도 너그러우며 인자하고 공손하고 효성스럽다”로 되어 있다. 번역문도 어려워 제대로 이해를 못했으나 세종은 빈틈없는 분이었던 것 같다. 승하하신 후 또 신하들이 明나라에 보낸 부고에는
天資英睿, 深沈重厚, 好學不倦
천자영예, 심침중후, 호학부권, (세종 32/2/22)
즉, “천품의 자질이 영예(英睿)하고 심중하고 후하며, 배우기를 즐겨하고 게으르지 않으셨다”고 하여, 총서에 빠진 “배우기를 즐겨했다”란 구절이 추가 되어있다.
자식을 아는 데는 아버지만한 사람이 없다는 말이 있듯이 부왕의 평가가 더 정확할 수가 있다. 더욱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나온 부왕 태종의 평가는 아버지로서 아들의 성품을 있는 그대로 말했을 가능성이 있다.
天性聰敏 頗好學
천성총민 파호학
태종실록 18년 6월 3일에는 “충녕 대군(忠寧大君)은 천성(天性)이 총명하고 민첩하고 자못 학문을 좋아하여, 비록 몹시 추운 때나 몹시 더운 때를 당하더라도 밤이 새도록 글을 읽으므로, 나는 그가 병이 날까 봐 두려워하여 항상 밤에 글 읽는 것을 금지하였다. 그러나 나의 큰 책(冊)은 모두 청하여 가져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들을 종합해 보면 세종께서는 총명하고 배우기를 좋아하여 취미가 공부이며 생각하는 속도, 두뇌 회전이 빠른 사람이라고 하겠다.
세종의 화법
화법을 통해 그 사람의 성격을 파악할 수 있듯이 세종의 화법에서 그의 성격이 나타난다. 세종의 화법이 “그래 네 말이 옳다, 그러나…”인 반면에 정조는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고 한다. 두 임금은 참으로 대조적이다. 세종의 화법은 다섯 가지로 분리된다.
1) 신하들의 말을 일단 수긍하되 곧이어 자신의 말을 주장한다. 고약해(高若海), 한 신하의 이름이다. 재미있는 이름이 아닌가? 고약해 졸기에는 “사소한 절개에 거리끼지 않고 임금에 충간하는 일을 자기의 임무로 삼아 간혹 직위를 초월하여 감히 말하기도 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졸기에서 말하듯 세종에게 거침없이 말하였고 흥분하여 자리에서 일어나기도 하여 세종으로서는 다루기 힘든 개성유수(開成留守)까지 지낸 고약해이다. 개인적으로는 그 당시 ‘고약하다’라는 말이 없었는데 고약해 이후 생긴 단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고약해 같이 심하게 왕을 비판하고 반대하는 말을 해도 “네 말이 아름답다”거나, “그 뜻이 좋다”라는 식으로 수긍을 하였다.
2) 세종은 좀처럼 화를 내지 않는 성격이었다. 실록에 기록된 총 19번 화를 내셨는데 그 중 上大怒가 3회, 上怒가 16회가 된다. 이것은 재위기간이 길다 하더라도 태종이 월등 많은 것으로 대조가 된다. 또 후기의 영조와도 표에 있는 것과 같이 대조적이다.
* 한중연의 박현모 실장이 수집한 조선 왕들의 분노한 통계
이 표를 보면 다섯 왕 중에 정조가 화를 제일 적게 냈고 태종이 제일 많이 냈다.
3) 자신의 주장이 옳다고 생각 될 때는 상대방의 허점을 정확하게 찔러 대응할 수 없게 만들었다. 세종의 이러한 날카로운 논변은 왕자시절부터 길러진 듯하다. 태종 16년 1월 9일에 “이날 세자(世子)가 성(盛)한 복장을 하고, 모시는 자를 돌아보며, “신채(身彩)가 어떠한가?” 하니, 충녕 대군(忠寧大君) 이, “먼저 마음을 바로 잡은 뒤에 용모를 닦으시기 바랍니다.”라고 말해 세자가 매우 부끄러워했다고 기록되어있다.
4) 논쟁을 위한 논쟁이 아니라 회의의 최종 목적에 도달하는 토론을 이끌어 가는 능력이 있었다. 세종 14년 12월 22일 기록에는, 경연에 나아가 의심되는 어려운 문제가 있어서 임금이 경연관(經筵官)에게 물으니 모두 대답하지 못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이 말은 의심할 만하나 강론을 하지 아니하는 것이 옳다. 대개 그 의심할 만한 것을 알고 더욱 연구하면 깨달음이 있을 것이다. 무릇 배우는 자들이 스스로 모른다고 하는 자는 옳다 하겠지만, 스스로 알지 못하는 것이 없다고 하는 자는 이른바 ‘용류(庸流)’1)인 것이니, 그대들은 그 알지 못하는 것을 혐의쩍게 여기지 말라.” 하였다.
이처럼 세종께서는 참석자들의 기를 살리면서도 의심되는 점을 추후로 찾아 스스로 깨달을 수 있도록 했다.
5) 논쟁 중에 자신이 궁지에 몰리면 엉뚱한 논리를 내세우기도 했다. 세종 후년에는 성군인 세종도 인간이기에 잘 못한 일도 있었다. 내불당 문제가 그 중 하나이다. 내불당 문제는 경복궁 안에 절을 건설하는 사건이었다. 세종 30년 7월 19일에는
임금이 또 정인지(鄭麟趾)에게 묻기를, “경이 나더러 여러 사람의 의논을 취하지 않는다고 하니, 장차 나를, 스스로 가부를 결정하지 못하고 일일이 신하에게 의논을 취하게 하려는 것인가.”하니, 인지(麟趾)가 대답하기를, “근자에 절을 창건하는 것으로, 혹은 불사로 간하는 자가 많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신이 감히 이 말을 한 것입니다.”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경들이 불도를 나쁘다고 하여 뜻을 합하여 간하니, 내가 심히 아름답게 여긴다. 만일 어진 임금이라면 반드시 경들의 말을 따르겠지만, 나는 부덕(否德)하니까 따를 수가 없다.
종합해 보면 세종은 신하들과 대화를 나눌 때 상대방의 말을 일단 수긍함으로써 마음을 준 다음 자신의 주장을 펼쳤다. 그러나 좀처럼 목소리를 높이거나 화를 내는 경우가 적었으며 상대방의 허점을 예리하게 파고 들어가되, 논쟁을 위한 논쟁으로 끝나지 않도록 회의의 종착지까지 토론의 배를 이끌어가곤 했다. 그러나 가끔 궁지에 몰리면 엉뚱한 논리로 상대방을 당황하게 하는 사이에 다음 함구로 슬쩍 빠져나가기도 했다.
세종의 음식 습관
태종의 세종 평가에서 보면 세종대왕은 술을 잘 못하지만 마실 경우에는 적당히 마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한번 마시면 끝장을 보는 양녕대군과 한 모금도 못 마시는 효령대군 사이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세종은 신하들의 지나친 음주를 지적하곤 하였다. 대표적인 경우는 세종이 아끼던 윤회(尹淮)가 술 때문에 ‘서연(書筵)’2)에 불참했을 때 이렇게 타일렀다.
경이 술을 마시어 도를 지나치는 일이 한 차례가 아니었고, 내가 경에게 술을 많이 마시지 못하게 한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신이 임금의 명령에 대하여는 물이나 불 속을 들어가라 하여도 오히려 피하지 않을 터인데, 하물며 그 밖의 일이겠는가. 자기의 주량(酒量)을 생각하여 한두 잔쯤 마시든지, 반잔쯤만 마신다면 그렇게 정신이 없고 체면을 잃게까지야 되겠는가. 이제부터는 부디 지나치게 마시지 말라. 따르지 않으면 죄를 받을 것이다. [세종 12년 12월 22일]
지금도 그렇듯이 관리 생활의 스트레스가 많았을 것이다. 그래서 술에 취한 기록이 많은 것 같다. 세종시대 3大 주가는 윤회, 술에 취해 낙마해 사망한 세종의 유아시절 스승이었던 이수(李隨), 그리고 한글 창제를 끝까지 반대한 최만리(崔萬理)로 알려져 있다.
실록 이곳저곳에 세종은 하루에 4끼의 수라를 드실 정도로 식성이 좋았으며 특히 육식을 즐기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세종 22년 6월 29일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의정부(議政府) 우참찬(右參贊) 박안신(朴安臣), 예조 판서(禮曹判書) 민의생(閔義生) 등이 아뢰기를, “혜령군(惠寧君)3)의 상사(喪事)가 이미 사흘이 지났는데 오히려 육선(肉膳)을 드시지 않으시니, 옛날에 태종께서 일찍이 신 등에게 말씀하시기를, ‘주상(主上)이 고기가 아니면 수라를 들지 못한다.’ 하셨습니다. 지금 한여름을 당하여 비록 보통 사람이라도 고기가 아니면 밥을 들지 못하는데, 하물며 성체(聖體)이겠습니까. 원컨대, 전하께서는 태종의 지극한 뜻을 생각하시고, 신 등의 성심(誠心)을 인정하시어 육선4)을 들도록 허락하소서.”
실록에서 찾지 못했으나 복숭아를 좋아해서 세자인 향[文宗]이 궁궐 마당에 있는 복숭아를 따서 세종에게 바쳤다고 한다. 또한 앵두도 좋아하셨다고 하는데 그래서 그런지 지금도 창덕궁에는 앵두나무가 많이 있다.
세종의 취미 – 강무
강무(講武)란 조선시대의 국왕들이 직접 주관해서 사냥과 군사훈련을 겸하는 수렵대회 이다. 말 그대로 왕이 신하들과 작전 계획을 세워 군사들에게 무예를 가르쳤기 때문에 강무라고 했다. 이런 강무를 세종의 취미라고 말하기에는 무리일 수도 있으나 취미에 관한 기록의 처음은 세종 즉위년 10월 9일에
上王이 “주상은 사냥을 좋아하지 않으시나, 몸이 비중(肥重)하시니 마땅히 때때로 나와 노니셔서 몸을 존절히 하셔야 하겠으며, 또 문과 무에 어느 하나를 편벽되이 폐할 수는 없은즉, 나는 장차 주상과 더불어 무사(武事)를 강습하려 한다." 하였다.
그 외 비중에 관한 기록은 세종 1년 2월 20일에도 태종이 세종과 같이 廣津(현 광진구)에 나가고자 한다고 하였다. 세종은 태종의 이 말을 받아들여 재위 중 사냥과 군사훈련을 겸하는 강무를 열심히 해서 도리어 재위 중반부터 신하들이 강무 일수를 줄여야 한다고 요청했다고 한다. 세종 14년 1월 24일 기록에는
형조 참판 고약해(高若海)가 아뢰기를, “강무는 곧 옛 대열(大閱)의 유제로서 폐지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희에 가까우며, 또 요사이는 사신을 접대하느라고 京畿道와 江原道에는 폐를 끼치는 일이 더욱 심합니다. 비옵건대, 강무 일수를 줄이고, 또 가까운 곳에 거둥하도록 하시어서 백성의 힘을 쉬게 하소서.”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의 말이 매우 좋도다. 그러나 강무는 유희가 아니다. 강무는 종묘를 받들고 빈객을 접대하고 무예를 익히는 일로써 관계되는 바가 가볍지 않다…”
세종의 화법인 ‘경의 말이 매우 좋도다’가 나온다. 그리고 조금 전에 고약해란 인물이 또 등장한다. 민폐를 끼친다고 반대하는 신하도 있었지만 국가가 오랫동안 무사하다 보니 군사들이 안일한 습관이 되어 유사시를 대비해 강무를 더 강화해야 한다는 신하도 있었다. 세종대왕은 강무를 통해 자신의 건강을 다스리면서 강무의 중요성을 모르고 임금의 취미로 한 신하들의 문약(文弱)을 막고 군사들의 기강을 바로 세우려는 여러 가지 목적을 달성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재위 24년까지 거의 매년 빠짐없이 강무를 거행했는데 이동거리와 훈련 강도가 매우 높았던 것을 세종 13년 2월 20일 기록을 보면 알 수 있다. 양주, 연천, 평강, 철원으로 천여 명의 군대가 이동하는 거리로는 매우 벅찬 코스였으며 특히 그 해는 매서운 추위 속에서 강행군을 하다가 집단 동사 사태가 발생했다. 마지막 사냥터인 포천 보장산(寶藏山)으로 가는 도중 군사들이 추위와 굶주림에 지쳐 무려 26명이 사망하고 70여필의 마소가 동사하였다.
세종은 재위기간 강무을 총 27회(월 평균 0.7회)로 대략 10~15일간, 수 천명 군사와 같이 강무를 했고 많이 간 곳은 현 북한의 강원도 평강 (17회), 북쪽으로 황해도 구월산, 강원도 이천, 남쪽으로 경기도 수원과 용인, 동쪽으로 강원도 원주와 횡성까지 갔다.
취미 – 격구 등
격구(擊毬)를 종친과 직접 치기도 하고 구경하는 것을 즐겨 하였다. 세종 실록 3년 11월 25일에는 격구에 대한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태상왕이 임금과 더불어 비로소 신궁의 내정(內庭)에서 구(毬)를 쳤다. 일기가 추워서 교외(郊外)에는 나갈 수 없으므로, 〈내정에서〉 이 놀음을 하였는데, 이듬해 봄에 이르러서야 그치었다....
구(毬)를 치는 방법은 편을 나누어 승부를 겨루는 것이다. 〈치는〉 몽둥이는, 모양은 숟가락과 같고, 크기는 손바닥만 한데, 물소 가죽으로 만들었으며, 두꺼운 대나무로 합하여 자루를 만들었다. 구의 크기는 달걀만 한데, 마노(碼碯玉髓.quartz), 혹은 나무로써 만들었다. 땅을 주발과 같이 파서 이름을 와아(窩兒)라 하는데, 혹은 전각(殿閣)을 사이에 두고, 혹은 섬돌 위에, 혹은 평지에 구멍[窩]을 만든다....
그 외에 취미로는 매사냥도 즐기셨고 수박(手搏 – 일종의 무술)과 씨름을 구경하기를 즐겼다.(1/7/1) 또한 왕자시절 태종께서 무예를 즐겨하지 않는 충녕에게 음악과 서예를 가르치셔 전문가 수준이 되었고 후에 악기를 만드는 업적을 남겼다. 반면 즐겨하지 않은 것으로는 바둑, 화초 가꾸기, 애완동물 키우기였으며 그의 궁극적인 관심은 애민(愛民), 백성을 사랑하는 임금이었다.
세종의 건강
나라 일에 너무 매달린 나머지 재위 중반부터 여러 가지 질병에 시달렸다. 잠을 거의 안자고 국정을 살피고 백성을 만나러 다니면서 체력이 바닥이 난 것이다. 건강 관계로 세자 섭정을 문의하는 기록을 보면 세종 20년 4월 28일에는
.....내가 전부터 물을 자주 마시는 병이 있고, 또 등 위에 부종(浮腫)을 앓는 병이 있는데, 이 두 가지 병에 걸린 것이 이제 벌써 2년이나 되었다. 그러나 그 병의 뿌리가 다 근절되지 않은데다가 이제 또 임질(淋疾)을 얻어 이미 열 하루가 되었는데, 번다한 서무를 듣고 재가(裁可)하고 나면 기운이 노곤하다.....
부종이란 부증을 말하며 사전에 “심장병 또는 신장병에 걸리거나, 어느 국부의 혈액 순환에 탈이 나서 몸이 퉁퉁 부어오르는 병” 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부대하였다니 심장질환을 앓고 게셨던 것 같다.
세종의 임질
실록에 임질이란 단어가 나와 깜작 놀랐다. 임금이 임질에 걸리 셨다니… 그러나 그 당시 기록을 보면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임질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려 고종때 발간된 ‘향약구급방(鄕藥救急方)’에서는 임질을 소변이 통하지 않는 병이라고 했으며 세종 13년에 편찬된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에는 신이 허하고 방광에 열이 있을 때 생기는 병이라고 기록되었다. ‘동의보감(東醫寶鑑)’에도 긴 설명이 있는데 역시 현대 임질과는 다른 요로결석(尿路結石)으로 적혀 있다. 1999년 서울대 이선복(李鮮馥)교수의 논문에 당시 임질은 임균성 요도염이 아닌 요로결석을 말 한다고 발표했다.
세자 교체
태종 직위 말년인 1418년에 사랑하는 영특한 막내아들 성녕대군(誠寧大君)이 급작스럽게 홍역으로 사망하자 태종은 정치 의욕을 상실하였다. 그 전에도 태종 7년 9월 18일에는 민무구(閔無咎)형제 제거 전후 “고급 노예와 같은 국왕 자리를 그만 두고 싶다”, “내가 어찌 임금 자리를 즐겁게 여기겠는가?” 하며 왕위에서 물러나겠다고 언급하기 시작했다.
계속되는 세자 양녕의 반발이 거세질 때 태종을 실망시킨 공부를 싫어하는 양녕과는 대조적인 충녕은 주역까지 통달한 실력으로 의서를 연구하면서 사경을 해매는 동생 성녕대군에게 약을 달여 먹이는 우애를 보였다.(태종 18/1/26)
세자 교체에는 군신이 합의했으나 후보에 관해서는 의견차가 있었다. 태종과 왕비 민씨는 적장자 승계 원측에 따라 양녕의 5살 난 장남을 주장했다. 이에 대해, 아비가 살아 있는데 아들이 독자적인 정치를 탈 없이 할 수 있겠느냐는 신하의 반박으로 태종은 힘을 얻지 못했다. 둘째인 효령대군도 물망에 올랐으나 “항상 빙긋이 웃기만 할 뿐 일을 처리하는 능력이 없다”는 이유로 태종에 의해 배제되었다. 당시 서자까지 포함한 왕자가 모두 12명이다 보니 충녕이 후보로 수면으로 떠오르지 않은 상태였다.
영의정 유정현(柳廷顯)은 택현(擇賢, 어진 사람을 택하라)을 제시하였으니 “누가 어진가”를 가리는 일이었다. 이조판서 이원은 ‘점’을 치자고 하자 태종도 ‘그러자’고 했다가 그 후에 왕 자신이 신뢰하고 신하가 추대를 받아야 한다는 판단을 한 것이다.
양녕의 문제점은 방탕 생활
양녕은 무당 가이(加伊)를 궁궐 내에 들여와 함께 지내고 있어 태종은 내보내라는 명을 내렸는데 양녕은 반발로 다음과 같은 일을 저질렀다.
세자가 내관(內官) 박지생(朴枝生) 을 보내어 친히 지은 수서(手書)를 상서(上書)하였는데, 사연은 이러하였다. “전하(殿下)의 시녀(侍女)는 다 궁중(宮中)에 들이는데, 어찌 다 중하게 생각하여 이를 받아들입니까? 가이(加伊)를 내보내고자 하시나, 그가 살아가기가 어려울 것을 불쌍히 여기고…[중약]” (태종 18/5/30)
또한 초궁장(楚宮粧), 곽선(郭璇)의 첩 어리(於里) 등 기생에 푹 빠졌다. 막내 성녕대군의 병중 활쏘기는 충녕이 직접 약을 다리는 것과 대조적이었다. 공부하기를 싫어하고 꾀병을 부려, 결국에는 신료들의 세자 교체 건의가 빈번해졌다.
충녕의 장점
태종 18년 6월 3일자 기록을 요약하면
(1) 충녕은 총명하고 배우기를 좋아한다. 즉, 스승을 실망시킨 양녕과 달리 충녕은 밤이 새도록 글을 읽어 당대 최고의 지식인인 변계량(卞季良)의 칭찬을 들을 정도였다. 특히 武人 가문이라는 이미지를 벗을 수 있고 지식인 사회를 이끌어갈 수 있는 리더십을 겸비한 좋은 후계자의 등장이 태종에게는 필요한 때였다.
(2) 충녕은 정치의 대체를 안다는 점이다. 충녕은 정치의 흐름을 알아서 큰 일이 닥쳤을 때 헌의하는 것이 합당했고 보통 사람이 낼 수 없는 생각을 제시했다는 것이다.
(3) 외교능력이다. 사신을 접대할 때 충녕는 몸이 빛나고 언행에 예의가 바르다고 기록되어 있다. 사신들을 맞이해야 했던 조정으로서는 적당한 주량과 주법을 갖춘 왕자가 필요했는데 술을 마시면 그칠 줄 모르는 양녕과 전혀 술을 못하는 효령과의 사이의 중도에 있었던 충녕이 적격이었다.
(4) 충녕 자식 중에는 왕위계승자(珦.文宗)가 있었다는 점이다.
(5) 경회루에 연구(聯句)를 잘 지어 태종이 감탄하였다.(태종 16/7/18)
전위의 단행
충녕이 세자가 된지 불과 50 여일 만에 태종이 전위를 태종 18년 8월 8일부터 3일간에 걸처 단행하였다. 태종 18년 8월 8일에는
“내 왕위에 있은 지 이제 이미 19년이 되었는데, 밤낮으로 늘 송구스러운 마음에 감히 편안할 겨를이 없었다. 위로 하늘의 뜻을 보답하지 못하여 여러 차례 재변(災變)이 나타났으며, 또 묵은 병이 있어 요즈음 더욱 심하니, 이제 이 자리를 세자에게 전위하고자 하노라."
이에 신하들이 이것은 될 수 없는 일이라고 아뢰나 태종은 듣지도 않고 옥새를 세자에게 보내라고 한다. 여섯 대언들이 하늘을 우러러 통곡하며 옥새를 잡아 당기며 드리지 못하게 한다. 이에 태종은 화를 낸다. 부득이 옥새를 바치니 충녕이 엎드려 이러나지 아니하니 태종이 충녕의 소매를 잡아 일으키고 옥새를 주며 안으로 들어갔다. 충녕은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가 사양하였고 여러 신하들도 통곡을 그치지 않았다. 이어 태종은 붉은 양산을 내 주고 왕자 시절 살던 연화방(蓮花坊)의 신궁(新宮)으로 거소를 옮겼다. 백관들이 뒤 따라 신궁 뜰에서 통곡하며 전과 같이 하기를 청했으며 충녕 역시 밤중까지 사양했다. 이에 태종은 충녕에게 내 뜻을 말한 것이 두세 차례에 이르렀는데 어찌 효도할 것을 생각지 않고 요란하게 구느냐하며 꾸짖었다. 그리고 손을 맞잡아 북두성(北斗星)을 향하여 변하지 않을 뜻을 맹세한다. 이에 충녕은 황송하여 명덕으로 하여금 옥새를 받들고 경복궁으로 돌아가려고 한다.
8월 9일에는 문무백관이 다시 글을 올려 청하고 성균관 학생도 글을 올려 극진히 말하였으나 태종은 보지도 않았으며 신하가 태종에게 충녕과 함께 진정하자고 하자 태종은 문을 닫고 신하에게 하교하기를 “이미 황천과 종묘에 고하였으니 고칠 수가 없다”고 하였다.
10일에는 승여(乘與.가마)와 의장(儀仗)을 경복궁으로 보냈다. 세자 충녕은 여러 가지 이유로 사양하지만 태종은 윤허하지 않았다. 궁궐 안뜰에서 신하들의 호곡이 어좌까지 들렸다고 한다.
“내가 이성(異姓)의 임금에게 전위한다면 경들의 청이 옳겠지만, 내가 아들에게 전위하는데, 어찌 이와 같이 하는가?"하고, 곧 익선관(翼善冠)을 친히 임금의 머리에 씌우고 드디어 임금으로 하여금 국왕의 의장을 갖추어 경복궁에 가서 즉위하게 하였다. 임금이 부득이 명을 받고 나와서 여러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나이 어리고 어리석은 내가 국가의 대사를 감당하기 어려워 지성껏 사양하였으나, 마침내 윤허를 받지 못하였도다."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임금이 익선관을 머리에 쓰고 있음을 보고 모두 땅에 엎드리었다.
여러 차례에 걸친 어려운 상황에서 신하들은 태종의 진심을 알아 채리고 전위를 받아들인 것이다. 이것은 민무구(閔無咎) 형제들을 제거 할 때 이와 비슷한 절차를 보았기에 잘못 받아드렸다가는 처벌받을 것을 두려워한 때문이다.
충녕의 사양 논리
즉위 과정에서 충녕이 전위을 사양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 力� 자신의 학문 미숙
• 쩝씬� 건강 양호
• 뗍씬� 신령 놀람
• 뼁� 전위의 놀람
• 榮育� 예에 어긋남
세종의 즉위
우선 세종은 만조백관의 하례를 받으며 즉위하셨다. 이 행사는 조선조에 처음으로 있는 즉위 행사였으며 후에도 이런 사례가 없다고 본다. 그 이유는 왕권의 전위 과정이 대부분 왕의 죽음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좋은 예로 세종이 돌아가신 후 문종은 빈전 문 밖에서 면복 차림으로 즉위하고 상복을 갈아입고 곡을 했다. 물론 정종, 태종, 세조, 중종, 인조, 고종, 순조는 거대한 즉위식을 가졌으나 성격이 다르다. 우선 정종과 태종은 태조의 축하 없는 즉위식이었으며 세조, 중종, 인조의 경우는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하였기에 정상적인 왕권 계승이 아니어서 세종의 즉위와는 비교 할 수 없다.
단종은 슬퍼하는 가운데 근정전이 아닌 근정문에서 즉위했고 성종도 마찬가지. 성종의 아들 연산군은 창덕궁 인정전 처마 밑에서, 숙종과 영조는 인정문에서 즉위했다. 다시 말하면 대부분의 왕들의 즉위는 법궁 앞의 문이나 처마 밑에서 거행 되었다.
백관들로부터 즉위 하례를 받고 세종 자신의 정치 비전이 담긴 즉위 교서, 즉 취임사를 밝힌다. 세종 즉위년 8월 11일
“삼가 생각하건대, 태조께서 홍업(洪業: 나라를 세우는 사업)을 초창하시고 부왕 전하께서 큰 사업을 이어받으시어, 삼가고 조심하여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사랑하며, 충성이 천자(天子)에게 이르고, 효하고 공경함이… 아아, 위(位)를 바로잡고 그 처음을 삼가서, 종사의 소중함을 받들어 어짊을 베풀어 정치를 행하여야 바야흐로 땀 흘려 이루어 주신 은택을 밀어 나아가게 되리라.”
그리고 창덕궁에 머물고 계시는 태종에게 인사를 올리고 사람을 종묘로 보내 조상에게 즉위 사실을 고하게 하였다.
반포문(頒布文)의 의미
반포의 의미는
1. 앞으로 큰 변화가 없다
2. 반포문에서 읽지 않은 부분이 사면령인데 화합 차원에서 사면령을 반포 한다.
3. 모든 것의 위치를 바로잡고 그 시작을 조심해서 하겠다. 즉, 시인발정(施仁發政)이다. 이는 “어짊을 베풀어 정치를 일으켜 세운다”라고 해석한다.
반포문
시인발정이 있는 구절은 반포문의 제일 마지막 부분인데 다음과 같다.
於戲, 正位謹始, 以奉宗祧施仁發政, 方推渙汗之恩.
어희! 정위근시, 이봉종조시인발정, 방추환한지은.
신 번역은 “아아, 위(位)를 바로잡고 그 처음을 삼가서, 종사의 소중함을 받들어 어짊을 베풀어 정치를 행하여야 바야흐로 땀 흘려 이루어 주신 은택을 밀어 나아가게 되리라.”이다. 어짊을 베풀어 정치를 일으킨다는 것은 세종시대를 관통하는 통치철학인데 맹자의 발정시인(發政施仁)5)을 시인발정(施仁發政)으로 앞뒤를 바꿔 사회적 약자인 백성들에게 어짊과 덕을 잘 베푸는 것으로 정치를 시작하겠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법령과 제도를 만든 다음 따라 오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가지고 있는 것을 먼저 베풀고 모범을 보이겠다는 것이다. 그러면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동참하게 될 것이고 바로 거기서 제도와 정치의 방향을 찾아 가겠다고 다짐한 것이다. 이 말은 작은 나라라도 부강한 나라가 될 수 있다고 맹자가 말한 것이 세종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본다.
세종의 첫 마디
즉위식을 마친 다음날 세종의 첫 마디를 요약하면 ‘의론하자’였다. 이는 정조의 첫 마디였던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와는 너무도 대조적이다. 세종 즉위년 8월 12일에 도승지 하연(河演)에게
予未知人物, 欲與左右議政, 吏兵曹堂上, 同議除授
여미지인물, 욕여좌우의정, 리병조당상, 동의제수
즉, 왕께서 “내가 인물을 잘 알지 못하니, 좌의정·우의정과 이조·병조의 당상관(堂上官)과 함께 의논하여 벼슬을 제수하려고 한다.”고 말씀하니 하연이 아뢰기를 “매우 마땅하옵니다.”고 하였다는데, 이 말은 대단히 중요한 뜻을 함축하고 있다. 우선 나이 어린 새 임금이었으나 그 당시 최고의 문형(文衡)인 변계량(卞季良)으로부터 학문적 능력을 인정받았고 부왕 태종으로부터도 “정치의 대체를 안다”고 인정받은 세종이 “인물을 잘 알지 못한다”는 의미는 겸손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었으나 박현모 교수는 정치적 의미가 크다고 본다. 이에 대해 박교수는
1. 신하의 의견을 들음으로 신하의 동참을 촉구하는 말이며,
2. 정치란 혼자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같이 하자고 강조한 말이라 한다.
세종의 효행과 태종의 행복
세종에게 왕위를 넘겨주고 태종은 행복해졌다. 정치 세계에서 ‘행복’이란 단어는 무척 찾기 힘든 일이라고 정치학자 박현모 교수는 말한다. 요새 정치를 보면 정말 행복한 사람은 별로 없을 것 같다.
세종 2년 4월 14일에 낙천정(樂天亭)에서 태종은 중국 사신을 맞이한다. 사학회에서 작년 11월에 답사 갔었던 낙천정은 광진구 자양동에 있는 정자로 세종 때 완성되었다고 한다. 낙천정이란 이름은 좌의정 박은(朴訔)이 주역의 “하늘이 나에게 맡긴 소명을 알고 따르고 즐기기 때문에 근심이 없다”라는 구절에서 따 왔다고 한다. 태종의 마음을 잘 읽은 박은이 “이미 왕위를 넘겼으니 이제는 천명으로 알고 즐기십시오. 그럼 근심이 없을 것입니다”라는 의미로 지었을 것이다. 중국 사신 조양(趙亮)이 왔을 때 이 낙천정에서 연회를 열었는데
사신이 두루 바라보고 감탄하며 말하기를, “하늘이 만들어 주신 선경(仙境)입니다. 전하께서 한가함을 얻으시어 편히 수양하시기에 가장 좋은 곳입니다."하다. 상왕이 술을 돌릴 때에, 서서 임금에게 술을 주니, 임금이 부복(俯伏)하여 받고, 임금이 술을 돌릴 때에는 꿇어앉아 올리는데 매우 경근하고, 상왕은 앉아서 받으니, 양(亮)이 감탄하여 말하기를, “신왕(新王) 전하는 조정(朝廷)을 공경하고 노왕을 공경하시어 충효가 겸전하십니다. 내가 사절을 받들고 제후 나라에 간 것이 여러 번 이었으나, 신왕 전하 같으신 어진 분은 있지 않았습니다. 노 전하께서 이미 세상일을 떨어버리시는 데 부탁할 만한 사람을 얻으시고, 세상 밖에서 마음 편히 노니시면서 정신을 수양하시니, 과연 지극하신 낙이라 하겠삽고, 신왕 전하는, 위로는 황제의 권고(眷顧)하심을 받고, 다음으로는 아버님의 사랑하심을 받자와, 충성을 다하시고 효도를 다하심이 과연 듣던 바와 같이 흡족하오니, 고금에 흔하지 않은 일이외다.”하고, 이내 옛말로 영탄하기를, “돈이 있어도 자손의 어짊은 사기 어려운 것입니다.”하니, 상왕이 사신 앞에 나아가 사례하며 말하기를, “이제 사신의 말씀을 듣고 눈물이 흐름을 깨닫지 못하였으니, 행여 괴이쩍게 여기지 마시오.”하고, 드디어 눈물과 콧물이 턱에 흐르니, 연회에 모시고 있던 여러 신하들도 모두 다 감동하여 울었다. 상왕이 사신에게 말[馬]을 선사하며 말하기를, “나는 한가한 사람이오. 말도 역시 토종이므로 성의를 표하는 것뿐이오.” 하였으나, 굳이 사양하고 받지 아니하다.[세종실록 2년 4월 14일]
어머니 원경왕후의 학질병과 임종
세종이 왕위에 오른지 2년 만에 슬픔이 닥쳐왔다. 어머니 원경왕후 민씨가 급작스러운 병으로 돌아가셨다. 세종 2년 5월 27일, 태종의 생신에 즐거운 연회를 마친지 11일 만에 낙천정에 가신 대비가 학질병에 걸려 드러누우셨다. 음력 5월이면 양력 6월이니 모기가 기승할 시기이다. 낙천정은 바로 한강 뚝에 있었으니 한강이나 인근 하천에 모기떼가 많이 있었을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세종은 병문안을 하고 병석에 머물며 수라를 폐하고 간호를 하는 한편 환관을 보내 관음보살에게 기도하게 했다. 또 스님들에게 음식을 베풀며 약사여래 등에게도 기도하게 했다.
세종 2년 6월 6일 기록을 보면 임금과 양녕과 효령이 대비를 모시고 지금 동구릉에 있었던 개경사로 피병을 갔다고 한다. 당시 병이 걸리면 자꾸 여기저기로 돌아다녀야 병을 피할 수가 있다고 생각하여 이를 ‘피병(避病)’이라고 했다. 그런데 임금이 직접 어머니를 피병시킨 경우는 세종 외에는 없다. 신하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평상복으로 한밤중에 어머니를 모시고 개경사(開慶寺)로 가다 길도 잃었다고 한다. 개경사는 동구릉에 있었다는 기록만 있지 언제 어떻게 없어졌다는 기록은 없다. 만일 동구릉을 발굴하면 절터가 나올지 모르겠지만 왕릉을 발굴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태종과 원경왕후의 화해
이 사실을 안 태종은 “피병을 꾀하니 그 효성이 아름답다”고 감탄하였다 한다. 이 일로 태종은 즉위한 후 부부의 사이가 멀어진 것을 화해하는 기회가 됐다. 원경왕후는 태종을 왕위에 오르게 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민씨는 예전에 좋았던 부부관계를 궁궐에서는 유지할 수가 없었고 왕실의 번창을 위한 후궁제도를 용납 못하고 후궁들을 질투 하는 등 태종이 국사 처리로 인해서 왕비를 가까이 하기가 쉽지 않았던 일에 적응하지 못했다. 또한 왕권 확립을 위해 민씨 동생들을 제거한 것에도 불만이 커서 두 사람 사이는 매우 좋지 않았는데 태종은 세종을 만나기 위해 왕후 곁으로 가면서 세종의 효심을 보고 감탄하여 왕후와 화해를 하게 되었다.
세종의 민생 경영
세종의 민생경영은 배려와 감동의 정치라고 한다. 세종 0/12/20에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궁중에서 나고 자랐으므로, 민생(民生)의 간고(艱苦)한 것은 다 알지 못한다.”고 하매, 정초(鄭招)가 아뢰기를, “소민(小民)을 찾아서 물으시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세종 1/2/12에는 왕지(王旨)하기를,
“백성이란 나라의 근본이요, 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과 같이 우러러보는 것이다. 요즈음 수한풍박(水旱風雹)의 재앙으로 인하여, 해마다 흉년이 들어 환과고독(鰥寡孤獨)과 궁핍한 자가 먼저 그 고통을 받으며, 떳떳한 산업을 지닌 백성까지도 역시 굶주림을 면치 못하니, 너무도 가련하고 민망하였다.”
하니 이는 백성의 아픔을 진단하셨고 무고한 서러움도 이해하신 것이다. 또한 세종은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는 노비들의 생활을 이해하였다. ‘권채(權採)의 인간 돼지’ 사건을 보면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는 사람들의 한(悍) 뿐만 아니라 원(寃)까지, 즉 원한을 가졌던 집현전 응교(應敎)였던 권채의 노비 덕금(德金)이 첩이됨으로서 발생한 사건이다. 간단히 말하면 노비가 첩이됨에 본처의 질투로 인간돼지 취급을 당해 고려장을 치르러가는 것을 형조판서가 보고 조사하여 탄로가 나서 노비 덕금은 생명을 유지하게 됬고 권채와 그 부인은 유배지로 가게 된 사건이다.(세종 9/8/24) 한(悍)과 원(寃)의 차이를 건국대 신복룡 교수는 “한은 숙명적으로 주어진 것이고 원은 사고로 부모자식을 잃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세종의 감동 비전
세종의 리더십은 한마디로 말한다면 감동의 정치라고 할 수 있다. 가까이는 조정 신하들의 마음을 움직여서 혼신을 다해 국가 일을 하도록 하는 것이며 밖으로는 백성들의 마음을 감읍시켰고, 멀리는 명나라 황제까지도 감동하게 하셨다.
세종은 신하들의 말을 잘 들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샀다. 경연과 어전회의에서 왕의 말을 최소화 함으로써 신하들로 하여금 속마음을 터놓을 수 있게 했다. 허조(許稠)가 임종 시에 “우리 임금은 간언하면 행하시고 말하면 들어주셨다”고 말한 것과 항상 임금에게 대들던 고약해가 어전회의에서 논전을 하고 왕의 허락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던 일 역시 너그러운 세종의 리더십의 일면이라고 생각된다.
명 황제는 세종의 지성 사대에 감동했다. 소 1만마리를 강요(13/1/28)했을 때 대다수 신하들의 반대에 불구하고 왕이 점검해서 보냈으며 조선의 처녀를 요구(6/9/1)했을 때도 최선을 다 함으로서 명 황제가 조선에 대한 종래의 불신을 버리고 신뢰하게 되여 사신(환관)들 특히 조선출신 윤봉(尹鳳)과 창성(昌盛)의 횡포적인 요구를 안 들어줘도 좋다고 할 정도였으며 태조 때 천명된 ‘강대국 동맹노선’을 일관되게 따르며 양국관계를 공고히 함으로써 여진족(女眞族)과 왜구(倭寇)의 침략을 억제하는 계산에 따른 것이었다.
가장 많이 감동 받은 사람은 백성들이었다. 백성들은 나라의 근본으로 존중받으면서 감읍하여 세종이 승하하셨을 때 사관의 기록은 “백성들이 생업에 종사하기를 즐겨 한지 무릇 30여년이라”고 평가했다. (32/2/17)
훗날 율곡 이이(李珥)는 율곡전서 동호문답집에 “세종께서 국가를 안정시켜… 후손에게 잘 살 수 있는 길을 터놓았으며, 우리나라 만년 운의 기틀을 다져놓았다”고 기술하였다. 이 ‘잘 살 수 있는 길’이란 오늘날로 말해 ‘삶의 질’이 향상되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노인 공경
세종의 노인 공경은 장수의 기준이다. 우선 그 당시의 자료는 없지만 평균수명이 짧은 관계로 노인들에 대한 국가나 사회의 대우 방식이었다. “나이 많은 사람을 존경해야 효제(孝悌)의 풍속이 두터워진다”라고(17/6/21) 하였다. 80세 이상 양민, 천민 모두 참석한 양로연을 베풀었다.(16/8/22) 양로연에서 89세 이귀령(李貴齡)은 “비로서 조정이 양로의 예를 일으켜서 노인을 우대하시니 심히 거룩한 일이며 신은 나이가 이미 늙어 보답 할 길이 없사옵고, 다만 신의 나이로 성상의 장수를 기약하옵니다.”라고 했다.
90세 이상 양민 노인에게 1급 증직(贈職)시키고 부인에게 봉작(封爵)을 제수하였다. 천민인 경우 남녀 모두에게 각각 쌀 2석을 내리고, 100살인 경우 남녀 모두 천민을 면해 주었고 남자에게는 7품을 여자에게는 봉작을 주어 노인을 어른으로 여기는 어진 정치를 베풀었다.(17/6/21) 승지들이 천민 노인들의 양로연 참석을 막으려 하자 세종은 “양로하는 까닭은 노인들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고 그 높고 낮음을 헤아리는 것이 아니다.”라 하였다. 이런 분위기에 즉석에서 시를 지어 왕에게 바치는 사람도 있었고 당하에서 일어나 흥겹게 춤을 추는 할머니도 있었다 한다. (22/9/12) 잔치가 끝날 무렵이면 노인들이 취하고 배불러서, 지팡이를 짚거나 자재들의 부축을 받으며 조용히 돌아가기도 했다. 아마 이러한 양로연이었다 하더라도 양민들은 천민들의 참석을 달갑게 보지는 않았을 것이나, 증직에다 부인들이 봉작을 받는 데는 불만을 가질 수는 없었을 것이다.
주거환경의 개선
삶의 질의 조건은 생존의 문제이기도 하고 문명을 탈피하고 재산능력을 획득할 기회를 얻는데 필요한 조건이다. 살림집의 변화로 세종 8년 당시 도성 안의 즐비했던 초가집이 대규묘 화재로 기와집으로 많이 바뀌었고 화재방비책을 명하였다.(8/2/20)
과전법(科田法)을 3등전에서 6등전으로 세분화하였고 확대한 의창제(義倉制)를 운영한 결과(5/9/16) 고려 말 과전법 제정 당시 평균 50만결에서 약120만결로 2배 이상 증가하였다.6)
사회적 약자에 우선적 배려와 보호
사회적 약자에 대한 우선적 배려와 보호이다. 사회에서 가장 취약한 처지에 놓여있는 병자나 죄수들이 잘못되지 않도록 세심한 관심을 기울였다. 예로 한 여름 궁궐에서만 사용하는 부순 어름(쇄빙: 碎氷)을 열병을 앓는 활인원(活人院)에 보내 치료하게 하고, 옥중에 갇힌 죄수들이 가엾다하여 조속히 지시(16/6/11)하셨으며 또 추울 때는 군인들이 얼어 죽지 않도록 조차하도록 하였다.(17/10/19)
세종은 국왕의 자리는 “민생들이 하려고 하는 일을 혼란스럽지 않게 하려고 임금을 세워서 다스리게 했다”(13/6/20)고 말하였다. 즉 왕을 세운 백성들의 삶의 질이 취약해지는 것은 임금이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는 것이니 ‘나라의 근본이 흔들리는 것이며 정치의 본령에서 벗어나는 일’이라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
백성들의 편안한 삶과 죽음
1) 관노 휴가제도
또 하나의 세종의 감동 비전은 관비의 삶의 질을 향상 시키는 일이었다. 정말 놀라운 사실은 600년이 지난 지금도 없는 출산 휴가제도의 개선이다. 이런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을 때 받은 충격은 대단하였다. 종래 관노 산후 7일 휴가를 3 단계로 진행되었다.
1) 우선 출산 휴가를 100일로 늘렸다. 대한민국이 이 제도를 도입한 때가 언제인지 기억 못 하나 불과 몇 년 전으로 알고 있다.
2) 또한 출산 후 휴가를 출산 전후로 바꿔 출산 1개월 전부터 휴가를 갈 수가 있었다. (12/10/19)
3) 남편에게 휴가를 주지 않아 산모를 구호 할 수가 없어 간혹 목숨을 잃는 일이 있었다고(16/4/26) 기록되어있으며 천하에 돌봐 줄 사람이 없는 노비를 진심으로 가엾게 여겨 제위 16년부터 남편에게도 한 달간의 산후 휴가를 허락했다. 현 정부는 내년부터 남편에게 2일의 산후 휴가를 준다고 한다.
2) 죄수에 대한 배려
지방의 경우 죄수의 사망 사실은 형조에게만 보고되고 임금에게 올라오지 않는 문제점도 지적하였다. 경중에 상관없이 과도한 채찍을 사용하는 폐단이 있으니 죄의 경중에 따라 10, 20, 50대까지 시행하되 참혹한 형벌을 말리고 특히 가죽 두 쪽을 합해 기어서 만든 채찍은 태형, 장형보다 배가 더하니 참혹하게 형벌을 하지 않도록 제지하였다. (17/9/30)
또한 감옥의 죄수가 억울하게 죽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했다. “감옥은 악을 징계하는 곳이지 사람을 죽게 만드는 곳이 아니다. 옥수가 사망하면 죄의 경중을 분별할 것 없이 모두 사연을 아뢰도록” 말하였다. (19/1/23)
다양한 조치에도 죄수가 죽었다는 말을 들으면 “형벌이 적당하지 못했던가 보석을 때 맞추지 못해 죽게 되었던가, 나는 매우 불쌍하게 여긴다”라고 동정의 말씀을 한 기록이 있다. (22/8/29)
3) 여의(女醫) 제도
여자들이 남자 의사들의 진료를 받는 것을 꺼려서 병이 악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의녀 제도를 전국으로 확장시키고 의학 서적을 편찬하고 국산 약제를 개발하였다
여의 제도는 태종이 도성에 두게 했지만 세종이 전국으로 의녀 제도를 확장하면서 나이 어린 현명한 지방 관비를 제생원(濟生院)에서 교육하고 본 고장으로 내려 보내게 하였다. (5/12/4)
4) 제생원(濟生院)
유아 사망을 막기 위한 조치로는 유명무실하던 제생원의 개선으로 버려진 아이들을 보호하는 일과 아이를 버린 자를 고발하면 상을 주고 아이를 받아 기르려는 사람은 그 사람의 이름과 연월일을 문서에 명백히 기록하였다. (20/3/20)
5) 훈민정음 창제
훈민정음에 대해서는 너무도 잘 알려진 일이니 특별히 다루지 않겠다. 훈민정음 창제 기록(25/12/30)과 과거에 훈민정음 시험(28/12/26)을 실시하였으며 최만리 등이 언문 제작의 부당함을 주장하여 아뢰었으나 세종은 양반 지배층이 독점한 문자를 백성들을 위해 창제하신 것은 다 잘 알려진 사건이다. (26/2/20)
6) 자격루(自擊漏)
자격루 역시 잘 알려진 장영실(蔣英實)의 발명이나 한마디 한다면 경회루 남쪽에 보루각에 자격루를 설치하고 광화문 대종고부터 시각을 맞춰 울려 시간이란 정보를 백성들에게 스스로 판단할 수 있게 만들었다는데 큰 의미가 있다. (19/6/28)
위의 사진은 고궁박물관에 20년 걸려 복원된 자격루 이다. 높이가 5미터이며 하루를 12시로 사용했기에 24시간 시계로 홀수 시에 종이 울린다. 건국대 남문현(南文鉉)교수 팀이 연구 끝에 성공적으로 복원하였다.
결론적으로 세종은 한 평생 게으르지 않게 살면서 백성들의 삶을 넉넉하게 만들어 조선의 인구도 많아졌으며 조선에서 살고 싶다는 야인들의 진정서도 받았고 사람들은 각자 맡은 일을 하면서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 부부간의 우애하는 행복을 누릴 수 있게 만드신 것이다. 세종이야 말로 성군이라고 말하지 않을 백성이 어디 있었겠는가?
세종의 그늘
이런 성군에게도 그늘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우선 불교 인식은 모호하였다. 원경왕후가 승하했을 때 헌릉 옆에 반대를 묵인하고 ‘쓸쓸할까봐 위로하는 도리’로 원묘(原廟)를 세웠다.(2/7/11) 광평, 평원대군이 연이어 돌아가시고 소헌왕후가 승하하시자 창덕궁 서북쪽 공터에 불당을 건립할 것을 지시하였다.(30/8/6) 유교 국가인 조선의 국가사상과 일치 하지 않는 점이다.
세자빈이 3명이었으나 문종이 승하 한 후 한명의 대비도 없어 궁에 어른이 안계시어 수양대군를 저지할 이가 없었다.
김씨 - 압승술(壓勝術)을 쓴 단서가 발각되어 폐비 (세종 11/7/20)
봉씨 – 여종 소쌍(召雙)과의 동성연애로 폐비 (세종 18/10/26)
권씨 – 후궁 권양원(權良媛)을 세 번째 세자빈으로 (세종18/12/28)
원손을 난 다음날 졸하였다. (세종 23/7/23)
후계자 문제는 실록에 없으나 승하하신 후 일어난 사건을 볼 때 가장 오랫동안 세자교육을 받은 세자 향(문종)은 병약함을 알고 아무런 조치도 하지 않은 세종이 승하하신 후 권력쟁탈을 초래하게 되었다. 더욱이 궁궐에는 대비조차 없어 대군들의 권력쟁탈은 상상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병약한 문종을 왕위에 오르게 한 점은 세종의 가장 큰 그늘이라고 생각한다.
나가면서
고려 말부터 태조, 태종시대, 세밀히 세종시대의 상왕기까지만 해도 왕자의 난, 외척 및 공신제거, 강상인(姜尙仁) 옥사 같은 권력쟁탈의 연속이었으나 세종 친정기 동안에는 역모나 반란의 혐의를 쓰고 처형당한 일이 한 건도 없었으며 세종대왕 승하 후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의 정적관계, 김종서(金宗瑞)도 세종 때 북방영토 일에 공을 세웠을 때 시기하는 사람이 없었으나 그 후 권력을 추구한 사람으로 그려져 있다.
이것은 회엄사에서 지리산 노고단에 오르는 가파른 산길과 까마득한 절벽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지나 세석평전에 이르렀을 때 5월에 펼쳐진 철쭉이 만발한 평지의 아득함을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나타난 바위투성이의 내리막길과 천 길 낭떠러지 등산길로 이어지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세종대왕이 이런 세석평전과 같은 태평성대를 이루었던 성군이 된 것은 세종의 인간됨과 리더십에서 찾아 볼 수 있다고 생각하고 정리한 글이다.
1) 용류란 못난 사람, 모자라는 사람. 부족한 사람 앞에 나오는 말이다.
2) 서연(書筵)이란 조선 때, 왕세자 앞에서 경서(經書)를 강론(講論)하던 일 또는 그 자리를 말한다.
3) 태종의 9번째 아들이며 세종의 이복동생
4) 육선(肉膳)이란 고기를 뜻하는 말이다. 선(膳)이란 글자가 임금의 식생활과 관련이 있다. 사극에 상선(尙膳)이란 내시가 있다. 상선은 임금의 음식을 관활하는 내시 중 제일 우두머리이다. 참고로 실록에 한문 오자가 종종 있다. 예로 번역문에 반찬 선(膳)이 기울 선(繕)으로 되어 있으며 교정도 제대로 되어있지 않다.
5) 발정시인은 맹자의 양해왕 장구 상 7장을 참조할 것.
6) 참고로 1결은 약 3,000평에 해당한다.(26/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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