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동역사(海東繹史)》 해제(解題)
정선용(鄭善溶)
민족문화추진회 전문위원
1. 머리말
《국역해동역사(國譯海東繹史)》는 실사구시(實事求是)의 학풍이 두드러졌던 조선조 정조(正祖)와 순조(純祖) 때 옥유당(玉蕤堂) 한치윤(韓致奫 1765~1814)과 그의 조카인 한진서(韓鎭書)가 함께 편찬한 《해동역사》를 이해하기 쉽게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해동역사》는 한치윤이 중국과 일본의 각종 전적(典籍) 540여 책에 나오는 우리나라 관계의 기사를 뽑아 편찬한 원편(原篇) 70권과 한치윤이 죽은 뒤 한진서가 뒤를 이어 편찬한 속편(續篇)인 지리고(地理考) 15권, 도합 85권으로 이루어진 기전체(紀傳體) 양식의 한국 통사(韓國通史)이다.
안정복(安鼎福)의 《동사강목(東史綱目)》, 이긍익(李肯翊)의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과 함께 조선 후기 실학자의 3대 사서(史書)로 평가되는 《해동역사》에 대한 연구는 실학자(實學者)들의 역사 인식을 논함에 있어서는 결코 빠뜨려서는 안 되는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도 《해동역사》가 한문으로 된 거질의 책인 탓에 이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피상적으로만 접근할 수 있었을 뿐, 실제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쉽사리 접근할 수가 없어 심층적인 연구가 부진한 상태였다.
민족문화추진회(民族文化推進會)에서는 그동안에 《동사강목》과 《연려실기술》의 국역을 이미 마쳤으면서도 《해동역사》는 국역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이 책의 중요성과 시의성(時宜性)을 감안해 볼 때 더 이상은 국역을 미룰 수가 없다고 판단하여, 마침내 이를 국역하여 학계에 제공함으로써 연구자들의 편의를 도모하고자 하였다. 이에 필자가 그 국역을 맡아 8년간의 작업 끝에 완역을 해 이를 8책으로 나누어 출간하였다.
국역을 하기 전에 미리 해제를 작성하여 책의 첫머리에 싣는 것이 일반적인 규례이다. 그러나 처음 국역을 시작할 때에 해제를 붙이지 못하였기에 국역을 마친 지금 해제를 작성해 색인과 함께 수록하게 되었다. 해제를 작성하기 위해 몇 편의 논문을 읽어 본 결과, 《해동역사》의 편찬 동기나 체제, 내용 등에 관해서는 한영우(韓永愚) 교수가 쓴 논문에 아주 자세하게 언급되어 있기에, 이를 요약한 다음 몇 가지 사항만을 더 보충해 해제를 대신하였다. 그리고 번역을 마친 뒤의 미진한 점에 대한 아쉬움이 크기에 국역 후기를 적고, 국역을 하면서 참고한 서책의 목록을 나열해, 뒤에 《해동역사》를 다시 국역하거나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도록 하였다.
2. 한치윤의 생애와 학문
한치윤은 우리 사학사(史學史)에서 뚜렷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학자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일반 학자들과는 달리 생애를 알려 주는 자료가 많지 않다. 단지 그의 증손인 한일동(韓日東)이 쓴 옥유당한공행장(玉蕤堂韓公行狀)과 《청주한씨세보(淸州韓氏世譜)》 및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등이 지은 제문(祭文) 몇 편이 있는 데에 불과하다. 이를 근거로 하여 한치윤의 생애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한치윤의 자는 대연(大淵)이고 호는 옥유당(玉蕤堂)이며, 본관은 청주(淸州)이다. 영조 41년(1765) 11월 4일에 한성부(漢城府) 남부(南部)의 나동(羅洞)에서 통덕랑(通德郞) 한원도(韓元道)와 고령 신씨(高靈申氏)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한치윤의 가계(家系)는 조선 초 훈구파(勳舊派) 가문에서 출발한 명문이었다. 그러나 사림(士林)이 득세하던 성종조(成宗朝) 이후로 점차 가세가 기울기 시작하였으며, 16세기 말의 동서분당(東西分黨) 이후로는 동인(東人)을 거쳐 남인(南人) 계열에 속하였다. 그 뒤 인조반정을 거치면서 권력의 핵심에서 점차 멀어지면서 비교적 낮은 관직에 머물다가 드디어 한원도 때에 이르러서는 벼슬길에 나아가지 못하였다.
한치윤은 어려서부터 문명(文名)이 높아 그가 지은 글이 세인(世人)들의 입에 회자되면서 당시의 가사(佳士)로 칭송되었다. 한치윤은 25세가 되던 해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이해에 형님인 한치규(韓致奎)가 네 살 난 조카 진서(鎭書)를 남긴 채 3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 가세(家勢)가 크게 기울었으며, 또 남인(南人) 계열의 신분으로서는 벼슬길에 진출하기가 힘든 상황이었으므로, 마침내 과거 공부를 중단하였다. 처사(處士)로서 일생을 바치기로 작정한 한치윤은 경외(京外)의 청류(淸流) 양반들과 교유하면서 독서와 학문에 전념하였는데, 그 당시에 한치윤이 한 학문은 서울의 진보적 지식인 사이에 널리 퍼졌던 북학적(北學的) 학풍에 침잠하는 것이었다.
한치윤은 35세 되던 해인 정조 23년(1799)에 일생에 있어서 하나의 커다란 전기(轉機)가 되는 일을 겪었다. 그것은 바로 족형(族兄) 한치응(韓致應)을 따라 당시의 학자들이면 누구나 한 번은 가보고 싶어하던 선진 문화의 중심지인 연경(燕京)에 가 2개월가량 머문 것이었다. 이 시기에 한치윤은 청나라의 선진 문물을 접하면서 안목을 넓혔을 것이며, 또한 뒤에 《해동역사》를 편찬하면서 이용한 서책들도 대부분 이때 구입하여 왔을 것이다. 이 사행길에서 한치윤은 여행 기록인 《연행일기(燕行日記)》를 지었는데, 이 책은 현재 남아 있지 않다.
연경을 다녀온 한치윤은 한층 더 넓어진 시각으로 한국사의 객관적인 서술을 시도하게 되었으며, 그 이후 10여 년 동안은 그의 필생의 저서인 《해동역사》 찬술에 전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끝내 《해동역사》의 찬수를 완료하지 못하고 50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한치윤은 죽기 직전에 조카인 한진서에게 자신의 유업(遺業)을 계승하여 완성해 주기를 부탁하였다. 한치윤의 유명(遺命)을 받은 한진서는 《해동역사》 원편의 초고를 정리하는 한편, 자료를 새로 수집해 지리고(地理考) 15권을 속찬(續撰)하여 순조 23년(1823)에 총 85권의 《해동역사》를 완성하였다.
한치윤의 학문 세계는 그의 문집이 남아 있지 않아 자세히 알 수가 없다. 다만 그가 교유한 학자들의 학문 성향과 그가 죽은 뒤 학우들이 쓴 만장(挽章) 등을 통해서 조금이나마 그의 학문 세계를 가늠해 볼 수 있다. 그는 젊은 시절 유득공(柳得恭)을 위시하여 홍명주(洪命周), 이해응(李海應), 김유헌(金裕憲), 심영석(沈英錫) 등의 북학파(北學派) 인사들과 친분을 맺었으며, 또 그의 족형이자 죽란시사(竹欄詩社)의 일원이었던 한치응(韓致應)과도 가깝게 지냈다. 이들은 서로 당색(黨色)은 다르지만, 세도정치(勢道政治)와는 인연이 먼 청류(淸流)의 문인과 학자로서, 북학의 학풍에 젖어 있던 선진적인 지식인들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이들과 교우 관계를 유지하였던 한치윤의 학문 역시 북학파의 북학 사상과 밀접한 관련을 갖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한치윤이 죽은 뒤 김정희는 만장(挽章)에서 한치윤의 학문을 평하여 “굉대하고 박아함은 왕백후(王伯厚)와 같고, 정확하고 해박함은 고정림(顧亭林)과 같다.”고 하였는데, 왕백후는 송나라 말기 《옥해(玉海))》의 저자인 왕응린(王應麟)이고, 고정림은 청나라 고증학의 대가인 고염무(顧炎武)이다. 그리고 이해응은 만장에서 한치윤의 성품을 후한(後漢) 때의 박통한 학자로 유명한 곽태(郭泰)에 비하였으며, 한치응은 묘지(墓誌)에서 한치윤의 인간성과 처세에 대해 “공은 성품과 도량이 청개하고 고아하며, 법도가 있는 사람이나 학문을 하는 선비가 아니면 교제하지 않았다. 공은 또 책 모으기를 매우 좋아하여 집에는 중국과 우리나라의 기서(寄書) 수천 종이 있었다.” 하였다. 이러한 말들로 볼 때 한치윤의 학문은 이용후생학(利用厚生學) 또는 실사구시학(實事求是學)이라고 불리는 북학파에 속하면서 박학고거주의(博學考據主義)를 지향하는 학자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3. 《해동역사》의 찬술 동기
조선 후기 실학파들은 현실적인 경세치용(經世致用)의 학문에 몰두하였다. 경학(經學)을 중심으로 하면서 그 경학이 시사하는 세계를 구현하기 위해서 많은 개혁론을 주장했다. 그러나 그 개혁론에는 합리적이고 실증적인 배경이 필수로 요구되었는바, 현실적인 문제를 역사적인 현실로 포착하자는 것이었다. 이런 생각은 실학파 중에서도 이익(李瀷)을 중심으로 한 근기학파(近畿學派)에 의해서 주로 주창되었다. 이 학파에 속하는 인물로서 사학 분야에서 가장 탁월한 업적을 낸 사람은 한치윤과 그의 조카 한진서이다. 이 두 사람은 평생을 오직 사학에만 전념한 최초의 사학 전문가이다. 근기학파에 속한 인물 가운데에서 안정복(安鼎福) 역시 뛰어난 사학자였지만, 안정복은 경학에의 관심을 다 버리지는 못하였다. 이에 비한다면 한치윤과 한진서는 경학에서 완전히 독립된 사학자로서 특이한 위치를 차지한다.
한치윤이 《해동역사》를 찬술하게 된 동기는 한치윤 자신이 직접적으로 언급한 말이 없어서 분명하게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그의 벗인 유득공(柳得恭)이 지은 《해동역사》 서문과 한진서가 지은 지리고의 서문 및 한일동(韓日東)이 지은 한치윤의 행장을 보면 대략적이나마 알 수가 있다.
한치윤이 《해동역사》를 찬술한 동기는 무엇보다도 먼저 보다 객관적인 자료를 가지고 한국사를 재구성해 보고자 하는 목적에서였다. 이것은 한일동이 행장에서 “할아버지께서는 과거 공부를 폐하고 문학 공부에 전념하였는데, 백가(百家)의 서(書)에 대해서 관철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러면서 항상 우리 동사(東史)의 무징(無徵)을 병통으로 여겨 자료를 수집하고 편찬하였는데, 위로는 경전(經典)으로부터 아래로는 총패류(叢稗類)에 이르기까지 인용한 서목이 무릇 540여 종이었으며, 10년의 공력을 들여 비로소 《해동역사》를 완성하였다.” 하였으며, 한진서는 지리고 서문에서 “나의 숙부께서는 우리나라 역사서가 황당한 것을 병통으로 여겨 중국 서적에 실려 있는 우리나라의 사실에 관한 기록들을 끌어 모으고, 아울러 일본 서적에 실려 있는 것들까지 남김없이 채록한 다음, 이를 종류별로 나누고 조목을 세웠다.” 한 데에서 알 수가 있다. 이를 통해서 보면, 한치윤이 《해동역사》를 쓰게 된 동기는 무엇보다도 먼저 ‘동사의 무징’을 개탄하면서 이를 바로잡고자 한 데에서 비롯된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한국사를 서술함에 있어서 자료 부족, 증거 부족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개탄하고, 증거가 많고 착실한 한국사를 써 보고 싶은 충동에서 출발한 것이다. 그 결과 한치윤은 무엇보다도 새로운 자료 발굴에 힘을 기울여 수천 종의 가장 도서(家藏圖書) 가운데 540여 종의 외국 자료를 이용해 70권의 방대한 《해동역사》를 편찬하였던 것이다.
다음으로 한치윤은 고대사를 재구성하기 위한 목적에서 《해동역사》를 찬술하였다. 이는 유득공의 서문에서 “우리나라의 역사책이 무릇 몇 종이던가. 이른바 고기(古記)라는 것들은 모두가 치류(緇流 승려)들의 허황되고 황당한 말이라서 사대부들이 입에 담을 수 없는 것이다. 김부식(金富軾)이 지은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대해 사람들이 소략하여 볼만한 것이 없다고 허물하고 있다. 그러나 명산(名山)의 석실(石室)에 보관되어 있는 자료가 하나도 없었으니, 김부식인들 그런 처지에서 어떻게 할 수 있었겠는가. 그렇다면 오로지 정인지(鄭麟趾)가 지은 《고려사(高麗史)》가 있을 뿐이다. 그런즉 고려 이전의 사실에 대해서는 무엇을 보고서 상고하겠는가. 이에 내가 일찍이 중국의 21사에서 동국전(東國傳)만을 뽑아 모아 중복된 부분을 삭제하고서 주석을 내고 변증을 하고자 하였다. 그런 다음 《삼국사기》와 《고려사》 두 사서(史書)와 함께 참조하여 보면 징신(徵信)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았는데, 끝내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 한 데에서 알 수가 있다. 이 말이 비록 유득공이 한 말이기는 하지만, 서문이라는 글이 본디 아무에게나 부탁하여 쓰는 글이 아님을 감안해 볼 때, 어느 정도는 한치윤의 입장을 대변한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여기에서 보면 유득공은 승려들이 쓴 고기는 황탄하여 믿을 것이 못 되며,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탈락된 부분이 많아 볼 것이 없다고 개탄하면서, 고대사를 재구성하기 위해서는 부득이 중국의 자료를 이용하지 않을 수 없다고 토로하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나라는 삼국 이전의 역사적 사실을 전하는 사적(史籍)이 없어 우리와 빈번한 교섭을 가졌던 중국의 사적을 통해서 알 수밖에 없다는 말인 것이다. 그런즉 한치윤이 주로 중국 자료를 이용하여 우리나라 역사를 편찬한 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고려 시대 이전의 우리나라 고대사의 누락된 부분을 재구성하려는 목적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음을 알 수가 있다.
한치윤이 죽은 뒤 한진서가 《해동역사》의 원편에 이어 속편인 지리고를 편찬한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한치윤의 유지(遺志)를 완수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는 한진서가 지리고의 서문에서 “숙부께서 돌아가신 뒤에 내가 숙부의 뜻이 완수되지 못한 것을 두렵게 여겨, 예전의 초고를 편집하고 또 다른 서책의 글을 널리 채집하여 빠져 있던 지지(地志)를 보충하였다.” 한 것을 보면 알 수가 있다. 한치윤이 세상을 떠날 때 29세였던 한진서는 네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숙부인 한치윤의 보호와 훈도 밑에서 자라 마침내 숙부의 유업을 계승해 완성했던 것이다.
4. 《해동역사》의 편찬에 이용된 자료
《해동역사》는 고증학적 방법에 의해 쓰인 책인 까닭에 자연히 이용된 자료가 많을 수밖에 없다. 《해동역사》에서 인용한 외국 자료는 모두 545종이며, 이 가운데 중국 기록이 521종이고 일본 기록이 24종으로서, 중국 기록이 압도적으로 많다. 한치윤이 외국 자료를 주로 참고하여 우리나라 역사를 다시 쓰고자 한 것은, 우리나라 자료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의도에서였다.
우리나라 역사를 서술함에 있어서 중국 기록을 참고하여 한국사를 연구하려는 경향은 유독 한치윤만 그렇게 한 것은 아니다. 이는 《삼국사기》 이래로 관례가 되어 온 것이며, 18세기와 19세기의 학자들 사이에서 널리 유행하던 풍조였다. 그러나 《해동역사》처럼 많은 기록을 인용한 적은 일찍이 없었으며, 더더구나 총패류(叢稗類)의 자료까지 모두 망라하여 인용한 적은 없었다. 한치윤이 이처럼 많은 자료를 이용하여 편찬한 것은, 철저한 박학고거주의(博學考據主義)에서 역사를 쓰려는 한치윤의 고증학적 자세에서 연유한 것이며, 청(淸)나라와의 문화적 교류가 그만큼 활발했던 당시의 사정에서 기인한 것이다.
한치윤은 또 중국 자료뿐만이 아니라 일본 자료도 다수 참고하였는데, 이것은 획기적 의미를 갖는 것이다. 《일본서기(日本書紀)》를 비롯한 일본 자료에 우리나라 역사에 관한 기사가 많고, 이를 참고하여 우리 역사를 보완할 가능성은 매우 크지만, 일찍이 그러한 시도를 한 사람은 없었다. 한치윤이 그러한 일을 처음 시도한 것은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 사이에 한일(韓日) 간의 문화 교류가 그만큼 활발하여 서책의 수입이 가능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해동역사》의 참고 서목 가운데 특히 주목할 것은, 일본의 《이칭일본전(異稱日本傳)》을 참고하였다는 것이다. 이 책은 1688년에 막부(幕府) 시대 초기 국학자(國學者)의 한 사람인 송하견림(松下見林 1637~1702)이 지은 것으로, 《해동역사》의 인용 서목에 직접 올라 있을 뿐만 아니라, 교빙지(交聘志)나 본조비어고(本朝備禦考) 중의 일본 관계 부분에서 활용 빈도가 매우 높게 나타나고 있다. 송하견림이 지은 이 책의 서문에, “중국이나 사로(斯盧 신라)의 기록 중에서 일본에 대해 서술한 것이 시비가 뒤섞여 있고 허실이 분명치 않으므로, 이것을 가리기 위해 이 책을 편찬하였다.”고 하였는바, 자국의 역사를 연구하면서 타국의 역사를 이용한 점에 있어서는 양자 사이에 공통점이 있다. 그리고 두 책은 또 각 기사의 끝 부분에 전거를 제시하는 방법에 있어서도 상당한 근사성이 보인다. 이것을 보면 한치윤이 《해동역사》를 찬수함에 있어서 어느 정도 이 책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론해 볼 수도 있다. 만약에 《이칭일본전》이 《해동역사》의 참조 대상이 되었다면, 그것은 곧 한치윤이 저술에 임하여 중국만이 아니라 일본 쪽의 학문 조류도 수렴하고 있음을 뜻하는 것으로, 나름대로 학술사적 의미가 있는 것이다.
한치윤은 이처럼 많은 외국 자료를 이용해서 《해동역사》를 찬수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삼국사기》나 《고려사》와 같은 국내의 정사(正史)를 완전히 무시한 것은 아니었다. 유득공의 서문에서 보았듯이 국내 자료와 외국 자료를 서로 의지해서 이용한다는 상호보완적 입장에 있었다. 즉 한치윤은 외국 기록이라고 하여 무조건 다 사실로 받아들이지는 않으면서 국내 자료와 비교하여 외국 자료의 잘못된 서술을 무수히 바로잡고 있다. 따라서 한치윤이 주로 외국 자료에 의존해서 《해동역사》를 찬술하였다고는 하지만, 외국 기록만 맹신하고 국내 기록은 무조건 불신하는 태도를 지닌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실증적인 방법으로 한국사를 재구성하려는 태도를 가진 이라면 반드시 거쳐야 할 기초적인 자료 정리를 시도했다는 점에서 한치윤의 공적은 높이 평가되어도 좋다. 근대 역사학은 역사 해석에 있어서 인과적(因果的) 설명과 자료의 엄밀한 고증에 의한 합리적 서술을 필수로 요하는 것이라 할 때, 《해동역사》의 이러한 편찬 태도는 비록 역사 해석의 인과적 설명에까지는 미치지 못했다 하더라도, 자료 취급 방법에 있어서는 분명히 근대 역사학에 한 발자국 다가갔다고 할 수 있다. 이 점에 있어서 한치윤은 중세 사학에서 근대 사학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역할을 수행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6. 《해동역사》의 사학사적(史學史的) 지위
《해동역사》는 한치윤과 한진서의 20여 년에 걸친 각고의 산물이지만, 거기에 담긴 역사의식과 역사 서술 방법은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의 사회경제적 조건과 사상적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다. 이 시기는 국내상업이나 대외 교역은 물론이요, 농업, 수공업, 광업 등 모든 산업에서 상업적 분위기가 크게 성숙하고, 부(富)의 축적을 통한 중인(中人) 혹은 평민층의 신분 상승 욕구와 정치 참여 욕구가 증폭되던 시기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시기에 전향적 양반 학자들의 관심은 농업 중심의 자급자족경제를 뒷받침하는 성리학에서 이탈하여, 중상적(重商的) 유통경제(流通經濟)와 기술의 진보, 그리고 이용후생을 강조하는 ‘북학’으로 향하였다. 또한 19세기 초에는 일본의 급속한 무기(武器) 발전과 경제 성장에 자극을 받고, 국내적으로도 국방 개념이 바다로 향하게 되어 이른바 해방(海防) 문제가 점차로 식자들의 관심을 모으게 되었다. 이와 같은 새로운 사회경제적 변화와 문화 변동에 대응하여 종합적인 국가경영철학을 제시한 이가 정약용(丁若鏞)이라면,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새로운 한국사 서술을 시도한 이가 한치윤과 한진서라 하겠다.
《해동역사》는 성리학적 명분론에서 탈피하여 북학의 이용후생적 관점에서 쓰인 역사책이라는 데 가장 큰 특징이 있다. 또한 《해동역사》는 광역의 동이문화권(東夷文化圈)을 설정하고 그 주류적 자리에다 우리 자신을 놓고, 화(華)와 이(夷), 그리고 이(夷)와 이(夷) 사이의 문화 교류사를 정리한 것이다. 엄중한 가치판단을 존중하는 성리학적 명분론을 탈피한 그 자리에는 엄격한 실증적 문헌고증학이 들어서게 되었다. 이는 19세기 초의 과학의 발전에 따른 합리적 사고의 진전이 반영된 것인 동시에 청나라로부터 들어온 고증학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해동역사》는 자료를 선정하고 이를 분류입목(分類立目)하는 과정에 묵시적으로 찬자의 의도가 반영되어 있으며, 자료에 붙인 안설(按說)은 직접적으로 찬자의 편사(編史) 의도를 보여 주고 있다. 《해동역사》는 술이부작(述而不作)의 자세를 내보이면서 되도록 찬자의 주관을 보이지 않으려고 한 사서(史書)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료 수집 그 자체만을 목적으로 한 책은 결코 아니다. 이 같은 사정을 고려하면서 찬자인 한치윤과 한진서의 역사의식의 특색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한치윤은 청ㆍ조선ㆍ일본 동양 3국의 국제 관계를 역사적으로는 사대교린(事大交隣)의 전통적 질서 속에서 이해하면서도, 현실적으로는 전통 질서를 극복하고자 하는 입장을 견지하였다. 이러한 것은 사대교린의 명분이 담긴 본기(本紀)나 세가(世家) 등의 용어를 버리고 세기(世紀)라는 용어를 선택한 것과 조공(朝貢)이라는 용어 대신 교빙(交聘)이라는 용어를 선택한 사실에서 단적으로 알 수 있다.
둘째, 한치윤은 우리의 국사(國史)에 대하여 크나큰 긍지를 가지고 있다. 그 긍지의 근원은 혈통이나 문화의 독자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중국과 같은 수준의 문화를 상고 시대부터 유지해 왔다는 사실에 대한 믿음에 있다. 한치윤은 한국 문화의 뿌리를 단군조선보다 더 넓고 오랜 동이문화권과 연결시켰다. 한치윤은 어느 종족이 우리 민족의 주족(主族)이고 객족(客族)인가를 따지지 않고, 주된 관심이 문화 수준에 있었다. 한국 문화의 뿌리로서 동이 문화는 중국 문화와 성격이 다르고 질이 낮은 야만적 문화가 아니라, 중국인의 높은 칭송을 얻은 고급문화로 파악하였다.
셋째, 한국사의 체계에 대해 정통(正統)과 윤통(閏統)의 구별을 무시하고 고대사를 재편성하려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도덕적이고 명분론적 역사 해석에서 탈피하는 것을 의미한다. 《해동역사》에서의 세기의 왕조 순서는 건국 순서에 따랐을 뿐 어느 국가가 도덕적으로 정통이고 이단이냐를 기준으로 한 것은 아니다. 《해동역사》에서의 역대 건국 연대에 관한 새로운 고증은 지금까지의 국사 체계에 대한 통설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 삼한을 사군 앞에 둔 것과 삼국의 건국 순서를 고구려, 백제, 신라의 순으로 한 것, 발해를 독립된 세기로 넣은 것 등이 그것이다. 이에 따라 결과적으로 삼한사, 고구려사, 백제사의 상한이 올라가고, 발해사의 위치가 높아졌다.
넷째, 한치윤은 우리 역사의 범위를 넓혔다. 동이족을 우리 역사에 포함시키고, 발해를 독립된 세기에 포함시키고, 숙신, 탐라, 주호, 정안국 등을 국사에 포함시키고, 금나라의 시조를 고려의 인물로 본 것 등은 우리 역사의 범위를 기존의 역사가들이 본 것보다 훨씬 광범하게 본 것을 의미한다.
다섯째, 한치윤은 이용후생 및 국방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지(志)에 나오는 담배나 인삼의 재배와 같은 상업적 농업에 대한 관심, 본국 물산에 대한 관심, 호시(互市)와 사행무역(使行貿易)에 대한 관심, 화폐에 대한 관심, 의식주 생활에 대한 관심은 모두가 이용후생에 관련된 것이라고 할 수가 있다. 이러한 찬자의 이용후생 정신은 단순한 자급자족의 농업경제를 뛰어넘어 국내상업과 국제무역을 매개로 한 상품유통경제를 지향하는 것이다. 또 한치윤의 국방에 대한 깊은 관심은 군사제도적인 측면에서보다는 무기라든지 해양 침입로와 같은 전술적인 측면에 더 집중되어 있었다. 교빙지에 실린 해방책(海防策)에 대한 제언(提言)이나 조총과 거북선에 대한 관심, 양마(養馬)에 대한 관심이 그것을 말해 준다.
여섯째, 한치윤의 자료 취급 태도는 되도록 많은 자료를 모으려는 고거주의(考據主義)를 지향하면서도 자료에 대한 검증과 비판을 병행하고 있다. 한치윤은 외국 문헌을 존중하고 국내의 고기류(古記類)를 불신하기는 하였지만, 외국 문헌이라고 하더라도 두찬(杜撰)의 성격을 지닌 문헌에 대해서는 《삼국사기》나 《고려사》 등 국내 기록에 의존하여 시정하고 보완하였다. 《해동역사》에서의 문헌 취급 태도는 그 기록이 얼마나 정확한 것이냐에 기준을 둔 것이지, 외국 문헌에 대한 맹신에서 출발한 것은 아니다.
《해동역사》는 여러 가지 장점을 가지면서도 몇 가지 약점과 한계를 가진 것도 간과할 수 없다. 무엇보다도 먼저 한국인의 혈통상, 문화적 독자성에 대한 의식이 미약하다는 점이다. 단군조선의 문화나 고유 신앙에 대한 배려가 지나치게 소홀한 것, 한국인을 구성한 종족 범위를 지나치게 넓게 이해한 나머지 무엇이 주족(主族)을 형성하여 한국을 대표하는 민족으로 성장했는지를 추적하지 않은 것이 그것이다. 그다음으로 지적될 수 있는 것은, 중국 자료를 이용하는 데 있어서 위서(僞書)와 진서(眞書)를 구별하지 않고 모든 자료를 보이는 대로 동등하게 망라한 것이다. 이는 한치윤의 서지학적(書誌學的) 지식의 한계를 드러낸 것이다. 그리고 한치윤이 갖고 있는 국내 고기류(古記類)에 대한 불신은 당시의 소론이나 노론 계통의 학자들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지나친 감이 있다.
《해동역사》는 이상과 같은 몇 가지 단점과 한계가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높은 가치를 지닌 책으로 평가되는 것은, 종래의 관찬사서(官撰史書)에서 취한 관료적 사관에서 탈피했고, 아울러 외국 사료에 실린 자국의 역사를 객관적으로 보되, 실증주의적 방법에 의해서 새로운 통사의 체계를 모색하고자 한 데에 있다. 그리고 실제적으로 이 책이 후세 사학에 미친 영향은 적지 않다. 중세적 명분론의 청산과 문헌고증학은 근대 사학으로 나아가는 데 있어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라는 점에서 《해동역사》의 사학사적 의의는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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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역사
《해동역사》(海東繹史)는 조선 말기에 실학자 한치윤과 조카 한진서(韓鎭書)가 기전체로 서술한 사서이다. 단군조선부터 고려까지를 기전체로 기술했다.
[편집] 개설
한치윤은 원편 70권, 한진서는 속편(續編) 15권을 저술하여 85권이다. 속편은 지리고(地理考)로 한치윤이 10여 년 작업에도 완성하지 못하고 사망하여, 조카 한진서가 뒤이어 1823년(순조 23년) 편찬을 마쳤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원편 70권
- 권1~권16 : 단군조선부터 고려까지의 여러 나라 세기(世紀)
- 권17 : 성력(星曆)
- 권18권~권22 : 예악(禮樂)
- 권23 : 병지(兵志)
- 권24 : 형법
- 권25 : 식화(食貨)
- 권26~권27 : 물산
- 권28 : 풍속
- 권29 : 궁궐
- 권30~권31 : 관제
- 권32 : 석가(釋家)
- 권33~권41 : 교빙(交聘 : 외교)
- 권42~권59 : 예문(藝文)
- 권60 : 숙신(肅愼)
- 권61~권66 : 비어(備禦 : 미리 준비하여 막음)
- 권67~권70 : 인물
- 속편 15권 : 지리 서술.
[편집]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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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실학자 한치윤(韓致奫)이 단군조선으로부터 고려시대까지의 역사를 서술한 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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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사본으로 85권 6책이다. 조선 정조·순조 때의 사학자(史學者) 한치윤(韓致奫)이 저술한 본편 70권과 그의 조카 한진서(韓鎭書)가 〈지리고〉를 보충한 속편 15권 6책으로 되어 있다. 조선의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 등의 서적은 물론 중국의 사서 523종과 일본의 사서 22종 등 550여종의 외국 서적에서 조선 관련 기사를 발췌하여 세기(世紀)와 지(志) 및 전기(傳紀) 부분으로 나누어 편찬하였다. 체제는 기전체(紀傳體)이다. 세기는 권1∼16으로 단군으로부터 고려까지의 역대 왕조에 관해 서술하였다. 지는 권17~59이며 권17은 성력지(星曆志), 권18∼21은 예지(禮志), 권22는 악지(樂志), 권23은 병지(兵志), 권24는 형지(刑志), 권25는 식화지(食貨志), 권26∼27은 물산지(物産志), 권28은 풍속지(風俗志), 권29는 궁실지(宮室志), 권30∼31은 관씨지(官氏志), 권32는 석지(釋志), 권33∼41은 교빙지(交聘志), 권42∼59는 예문지(藝文志)이다. 그리고 권60은 숙신씨고(肅愼氏考), 권61∼66은 비어고(備禦考)이며 권67∼70의 인물고(人物考)는 전기에 해당한다. 그리고 속편 15권은 모두 지리고(地理考)이다. 필사본으로 전하던 것을 조선고서간행회(朝鮮古書刊行會)에서 양장(洋裝) 4책으로 간행하였고, 또 1913년 광문회(光文會)에서 한장(漢裝) 6책으로 간행한 바 있다. 국립중앙도서관에는 정교한 필사본(71권 26책)이 소장되어 있다. 이 책은 방대한 양의 역사책들을 두루 섭렵하였으며, 객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외국의 사료를 그대로 옮겨 적었다. 그 과정에서 사료에 대한 비판이 이루어지지 않아 오류가 있는 내용까지 옮기는 우를 범하기도 했으며, 한국사의 기년(紀年)까지 중국 중심으로 삼아 편찬하는 등 일부 한계점도 가지고 있다. 여기에 편찬자의 의견과 교감(校勘)을 붙이면서 자신의 역사 해석과 고증을 시도한 바도 있다. 당시 실학적 학풍이 유행하던 시기에 나온 책으로서 풍부하지 못했던 한국사 서술을 위해 객관적 입장에서 편찬되었고, 후학들이 다양한 사료를 접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다. |
<이상배>
[출처] 해동역사 [海東繹史 ] | 네이버 백과사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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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학자로 실증적으로 한국사를 편찬하여 10년에 걸쳐 《해동역사(海東繹史)》70권을 저술하였다. 후에 조카 한진서가 <지리고> 부분을 추가하여 모두 85권이 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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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학자로 본관은 청주, 자는 대연(大淵), 호는 옥유당(玉?堂)이다. 아버지는 통덕랑(通德郞)을 지낸 한원도(韓元道)이며, 어머니는 고령신씨이다. 서울에서 출생하였으며 남인계열로 정국에 참여하지 못하였다. 1789년(정조 13)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한 뒤 학문에만 전념하여 약관에 문명을 날렸다. 당시로서는 남인이 국정에 참여하기보다는 정치에서 멀리 떨어져 학문 연구에 전념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그도 당색을 초월하여 폭넓은 교우관계를 유지하면서 학문에 매진하였다. 그런 가운데 족형(族兄)인 한치응(韓致應)이 청나라에 사행으로 가게 되어 이를 따라가 북경에 머물면서 청나라 문물과 고증적 학술방법을 배워 귀국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한국의 역사가 엉성하고 조잡하게 편찬되어 있는 것을 보고 한국사의 참모습을 찾기 위한 목적에서 실증에 의거한 한국사 저술에 착수하여 10년만에 《해동역사(海東繹史)》 본편 70권을 저술하였다. 그리고 미처 마무리 하지 못한 〈지리고(地理考)〉 부분은 뒤에 그에게서 학문을 배워 감사를 지낸 조카 한진서(韓鎭書)가 15권을 속편으로 완성하였다. 지나칠 정도로 객관적이고 실증적으로 역사서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일부 중국의 사료를 무비판적으로 인용하는 우를 범하기도 했지만, 저자 나름대로의 역사 해석과 고증을 시도하는 등 한국사 연구의 새로운 방법을 제시하였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깊다. |
<이상배>
[출처] 한치윤 [韓致奫 ] | 네이버 백과사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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