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남도 홍성과 경상남도 합천과 거창, 경상북도 고령, 서울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지리적으로도 정서적으로도 가깝지 않은 이 다섯 곳의 공통점은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 빛나는 한 사건의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기념비의 주인공이 바로 유림들이라는 것이다.
지하철 동대역 입구에 내려 왼쪽으로 돌아가면 그리 크지 않은, 그러나 역사적 의미가 깊은 공원에 다다른다. 조선조 영조때 도성의 남쪽을 수비하던 남소영이 있던 자리에 조성된 장충공원이다. 지난해 서울시에 의해 깨끗하게 정비된 이곳에는 장충단비, 파리장서비, 이한응 선생비, 사명대사 동상, 이준 열사상, 수표교 등 기념조형물로 가득하다.
이들 다양한 조형물 중 앞에서 말한 다섯 곳에 공통적으로 세워져 있는 기념비가 바로 파리장서비다. 8·15 광복이 가능했던 것은 36년 일제 강점기 동안 독립을 위한 지난한 투쟁이 있었기에 가능했고, 파리장서비는 그 지난한 투쟁에 유림이 한 축을 이루었던 역사를 기념하는 기념비다.
그리고 동국대를 왼쪽으로 바라보며 서있는 장충공원의 기념비는 산재해 있는 파리장서비 중 전국에서 최초로 건립된 것이라는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學派 넘은 儒林의 거국적 독립운동
파리장서운동은 1919년 3월1일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자, 당시 영남의 거유인 곽종석(郭鍾錫)의 문인인 윤충하(尹忠夏)의 제안으로 시작됐다.
윤충하는 서울의 만세시위 상황과 파리 강화회의 등 국내외의 정세를 설명하고, 3·1운동에 주동적인 역할을 하지 못한 유림들이 파리 강화회의에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장문의 글을 작성하고 곽종석이 대표로 나서 줄 것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제자의 주장에 공감한 곽종석은 당시 영남의 거유였던 김창숙(金昌淑)과 협의하여 3·1운동 때 유림이 제외되어 일어난 사실을 아쉬워하며 유림이 독자적인 행동을 추진하기로 결정한다. 파리 강화회의에 한국의 독립요구를 밝히고 독립을 청원하기로 한 것이다. 파리 강화회의에 보내는 장서에는 곽종석을 대표로 영남 유림의 명망 있는 인물들이 서명했다.
당시 유림들은 장서에서
▶여러 나라 여러 겨례는 제각기 전통과 습속이 있어 남에게 복종이나 동화를 강요받을 수 없다.
▶사람이나 나라는 그 자체의 운용능력이 있게 마련이므로 남이 대신 관리하거나 통치할 필요가 없다.
▶한국은 삼천리강토와 2,000만 인구와 4,000년 역사를 지닌 문명의 나라이며 우리 자신의 정치원리와 능력이 있으므로 일본의 간섭은 배제되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이어 일본이 겉으로는 자주독립을 약속하면서도 사기와 포악한 수법으로 독립을 보호로, 보호를 병합으로 변하게 하는 등 교활한 술책으로 한국 사람이 일본에 붙어살기를 원한다는 허위선전을 하고 있다고 통탄했다.
유림들은 우리민족이 거족적 독립운동을 벌이고 있으며, 만국평화회의와 폴란드 등의 독립소식을 듣고 희망에 부풀어서 만국평화회의가 죽음으로 투쟁하는 우리 2천만의 처지를 통찰해줄 것으로 믿고 있음을 2천674자의 글로 호소했다.
이러한 사실이 알려지자 호서유림들도 동참했다. 당시 호서의 명망있던 유림인 김복한(金福漢)은 여러 선비들의 연명으로 파리 강화회의에 보낼 장서를 준비하고 있는 사실을 김복한의 제자인 임경호(林敬鎬)를 만나 확인하고 서로 공동행동을 할 것을 결의했다.
장서를 해외로 가져가는 책임을 맡은 심산 김창숙은 양쪽에서 작성한 장서를 공동의 문서로 가지고 상해에 도착하여 장서를 강화회의에 파견되어 있는 김규식에게 우송하여 제출하게 하고 영문번역과 국문번역을 수천 부 인쇄하여 각국 대표와 외국의 공관을 비롯한 국내의 각 향교 등 여러 기관에 우송했다.
유림 統合의 정신으로 살아 있어
파리장서 사건은 일제강점 이후 유림들의 학파와 지역을 초월해 가장 조직적인 움직임을 보인 유림 독립운동의 결정체였던 것이다. 지역과 학파를 뛰어넘은 유림들의 독립운동인 파리
장서의 의미는 각 지역의 파리장서 기념비 건립과정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지난 2007년 충남 홍성에 파리장서비가 건립됐을 때 홍성군은 파리장서운동에 동참한 137인 가운데 김복한 선생 등 홍성지역 유림 4명을 비롯하여 인근 내포지역에서 모두 17명의 유림이 서명했음을 강조했다.
당시 홍성군 관계자는 “독립운동사의 대사건인 파리장서운동의 기념비가 홍성지역에 건립됨으로써 이제껏 잘 알려지지 않았던 김복한 선생과 내포지역 유림 등의 업적이 재조명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국내외 관광객들에게 역사의 교육의 장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같은 해 경상남도 합천에서는 파리장서비를 세우며 파리장서 사건에 대한 동기와 합천에서 참여한 11인의 독립운동가를 다시 한 번 새김으로써, 유림들의 독립운동에 대한 자긍심 고취와 후세들의 산교육장으로 활용할 목적으로 이 사업을 추진해 왔다고 강조했다.
당시 건립추진위원장인 차판암 합천문화원장은 “늦었지만 합천인의 정신을 대내외에 알릴 수 있게 돼 다행스럽다”고 말했었다. 파리장서 운동이 100년의 세월을 넘어 지역과 지역을 하나로 연결시켜 주고 있는 것이다.
꺾이지 않은 의지 儒林 位相 높여
파리장서 운동은 결국 실패로 끝났지만 그 주역들은 불굴의 의지와 단심(丹心)으로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 지울 수 없는 족적을 남기게 된다. 그리고 이들의 이러한 굳건한 자세는 역사와 현실에서 유림의 위상을 높여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주역이었던 곽종석은 일제에 의해 체포되자 74세의 노령에도 옥중에서 일본의 법에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포로로서 잡혀왔다는 전사(戰士)의 의지로 대응하다가 심한 고문을 받고 언도 받은 2년형도 채우지 못하고 도중에 병보석으로 풀려나와 그해 8월에 죽었다.
항일의병장이기도 하였던 김복한 선생도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한 뒤 지병을 얻어 불편한 생활을 하면서도 후학 양성을 위해 노력했다.
심산 김창숙은 이후 해외에서 활발하게 독립운동을 전개하다 결국 중국에서 일제에 체포돼 고문으로 앉은뱅이가 되어 스스로를 벽옹이라 칭할 정도였으나 끝내 그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그는 광복 후에도 유림조직 재건과 반독재 투쟁에 매진하며 유림의 사표(師表)로서 그 명망을 잃지 않았다.
李弘益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