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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비 정초부, 시인(詩人)이 되다.<초부유고(樵夫遺稿)>

굴어당 2011. 11. 18. 20:44

2011년 11월 17일 역사스페셜<펌> 노비 정초부, 시인(詩人)이 되다 TV,예능등 / 세상사는 이야기

2011/11/17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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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비 정초부, 시인(詩人)이 되다


 

▣방송 : 2011. 11. 17 (목) 22:00~22:50 (KBS 1TV)
▣진행 : 한상권 아나운서
▣연출 : 이승하 PD
▣글, 구성 : 고은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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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노비의 시집이 발굴되다!

최근 한 대학도서관에서 발굴된
조선시대의 필사본 시집.

정약용과 당대 지식인들의 작품을 모은 이 시집에는
또 하나의 시집 <초부유고(樵夫遺稿)>가 들어있다.

저자 초부(樵夫)는 글자 그대로 나무꾼.
그는 조선 최하층 천민
‘노비(奴婢)’였다!

 

■ 김홍도의 그림에 실린 노비의 시(詩)

 

▲ <송수관화첩>에 수록되어

있는 또 다른 ‘도강도’

▲ 동호범주(東湖泛舟)

한 척의 나룻배가 강을 건너는 모습을 묘사한 김홍도의 <도강도>. 그림의 상단에는 김홍도가 영감을 받았다는 시가 쓰여 있다. 서정적이고 회화적인 필치로 쓰인 시, ‘동호범주(東湖泛舟)’. 그런데 최근 이 시와 동일한 작품이 실린 시집, <초부유고(樵夫遺稿)>가 발굴됐다. 조선 후기 천재 화원의 마음을 움직인 시인은 초부(樵夫). 그는 다름 아닌 ‘나무꾼’이었다!

 

■ 노비 시인, 양반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다!

 

▲ 정초부의 시가 실려 있는

<병세집>

▲ 월계협에 살던 정초부는
  ‘월계초부’로도 불렸다.


조선 후기 최고 시인들의 작품을 실은 <병세집>에는 정초부의 시가 무려 11수나 실려 있다. 기록에 따르면 정초부는 동원아집(東園雅集)과 같은 양반들의 시회에 초대받아 그들과 함께 시를 지었다. 그의 시에 감명 받은 양반들은 그가 살던 양근(지금의 양평) 월계협으로 직접 찾아오기까지 했다. ‘월계초부’ 정초부의 시가 실린 조선시대의 시선집은 발견된 것만 10여권에 이른다.

 

■ 노비가 어떻게 한시를 짓게 됐을까?

 

▲ 화성행궁 낙남헌에서 열린 한시백일장.


한시는 운율과 음의 높낮이 등을 맞춰 기승전결에 맞게 풀어낸다. 한 편의 한시를 짓기 위해서는 한자에 대한 깊은 이해와 함께 15개 내외의 규칙들을 충족해야 해 보통 10년 이상 공부해야 쓸 수 있다고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교육을 받지 못한 노비는 어떻게 한시를 쓸 수 있었을까?

 

‘주인이 기특하게 여겨 글을 읽게 했다.’ - <삼명시화>

 

▲ 여춘영이 정초부를 기리며 쓴 제문


정초부의 주인은 그가 가진 특별한 재능을 알아보고 아들의 글공부에 함께 하도록 배려한 것으로 보인다. 그 아들 여춘영은 노비 정초부를 스승이자 친구로 여겼다. 여춘영의 문집, <헌적집>에는 정초부에 대한 시, 두 사람이 함께 지은 시 뿐 아니라 그의 죽음을 애도한 제문까지 실려 있다. 신분의 벽을 뛰어 넘어 깊은 교우 관계에 있었던 주인과 노비. 여춘영은 정초부의 시를 사대부 사회에 널리 소개하며 그를 세상에 알렸다.

 

■ “시인의 남은 생애는 늙은 나무꾼 신세”


기록에 의하면 정초부는 43세 무렵에 면천되어 양근 갈대울에 거주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나무꾼 신세였다.

‘시인의 남은 생애는 늙은 나무꾼 신세 / 지게 위에 쏟아지는 가을빛 쓸쓸하여라
동풍이 장안대로로 이 몸을 떠다밀어 / 새벽녘에 걸어가네 동대문 제이교를’
                     - 정초부의 시 중


양인이 된 정초부는 시인으로서의 높은 명성에도 불구하고 극심한 가난에 시달렸다. 그는 굶주림에 시달리는 삶의 애환을 특유의 서정적 필치로 시에 담아냈다.

‘‘한밤중에 다락에 오른 것은 달빛 구경하려는 것이 아니고
아침 세끼 곡기를 끊은 것은 신선되려는 것 아닐세’

                                                           - 정초부의 시 중

세상의 벽 앞에 날개를 접고 고단한 인생을 살 수 밖에 없었던 노비 시인 정초부 삶을 되돌아본다.

‘삼한 땅에 명문가 많으니
다음 생에는 그런 집에 태어나시오.’

                     - 정초부를 기리며 주인 여춘영이 지은 제문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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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1 '역사스페셜' 밤 10시

최근 한 대학도서관에서 조선시대 필사본 시집이 발견됐다. 정약용을 비롯해 당대 지식인들의 저작을 모은 이 시집 속에는 별책으로 된 또 하나의 시집 '초부유고(樵夫遺稿)'가 들어 있었다. 나무할 초(樵), 지아비 부(夫), '초부'는 나무꾼이란 뜻으로, 조선시대 최하층 천민인 노비(奴婢) 정초부의 시집이었다.

KBS 1TV '역사스페셜'은 17일 밤 10시 '노비 정초부, 시인(詩人)이 되다'를 방송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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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시는 김홍도의 그림에서도 발견됐다. 시의 제목은 '동호범주'로 '초부유고'에 실린 것과 동일하다. 김홍도는 이 시에 영감을 받아, '도강도(渡江圖·나룻배가 강을 건너는 그림)'를 그렸다. 조선시대 후기 시인들의 작품을 모은 '병세집'에는 정초부의 시가 열한 수나 실려 있다. 기록에 따르면 정초부는 '동원아집(東園雅集)'과 같은 양반의 모임에 초대됐었다. 그에게 감명받은 양반들은 그가 살던 양근(현재의 경기도 양평) 월계협으로 직접 찾아가기도 했다.

정초부의 시가 실린 시선집은 발견된 것만 10여권에 이른다. 그렇다면 천민인 그가 어떻게 한자로 시를 지을 수 있었을까. 제작진은 그의 재능을 알아본 주인이 아들 여춘영의 글공부에 함께하도록 배려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한다. 여춘영의 문집 '헌적집'에는 정초부에 관한 시, 함께 지은 시, 그리고 정초부의 죽음을 애도하는 제문까지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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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bebright75&logNo=12321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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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나무꾼 노비의 한시집 발굴 var url = document.URL;var pos = url.indexOf("AKR");var nid = url.substr(pos,20);var pos2 = url.indexOf("audio=");var nid2 = url.substr(pos2+6,1);if (nid2 == 'Y'){document.write("");}
고려대도서관 소장 필사본 '초부유고'

안대회 교수, '樵夫遺稿' 찾아내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그동안 이름만 전해지던 조선 정조시대 노비 정초부(鄭樵夫.1714∼1789)의 한시집 초부유고(樵夫遺稿)가 발굴됐다.

  


성균관대 한문학과 안대회 교수는 최근 발간된 계간지 '역사비평' 2011년 봄호(통권 94호)에 기고한 글에서 다른 문헌을 통해 그 이름만 알려진 초부유고가 고려대도서관에 필사본 형태로 소장 중이며 여기에 한시 90수 정도가 실린 사실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초부유고는 정초부를 포함해 정약용ㆍ박제가ㆍ이학규 등 4명의 시를 골라 묶은 필사본 시집 다산시령(茶山詩零) 안에 포함돼 있었다.

   안 교수는 "노비였다가 양인이 된 홍세태(洪世泰.1653∼1725)를 비롯해 조선시대에 노비 시인이라 일컬을 만한 작가가 더러 보이지만 신분이 노비임이 확연한 이가 남긴 시가 이처럼 많이 담긴 한시집은 사실상 처음"이라고 말했다.

   이번에 발굴된 그의 한시는 "서정적이고 조금은 우수에 찬 느낌을 준다"고 안 교수는 소개했다.

   정초부는 글자 그대로는 정씨라는 성씨의 나무꾼이라는 뜻이지만 그의 실제 이름과 어느 집 노비였는 지 등은 명확하지 않았다.

   하지만 안 교수는 그와 같은 시대를 살다간 여춘영(呂春永.1734∼1812)이라는 사람의 문집으로 오직 규장각에만 1종이 확인된 헌적집(軒適集)을 함께 찾아내 이에서 정초부 관련 기록을 발굴, 그의 생몰연도를 확인하는 한편, 주인이 여춘영이라는 사실도 밝혀냈다.

   여춘영은 조선후기 명문가 집안 중 하나인 함양 여씨다.
헌적집에는 1789년 정초부가 76세로 사망하자 여춘영이 그를 추억하며 지은 만시(輓詩) 12수가 담겨있다.

   그 중 한 시에서 여춘영은 "어릴 때는 스승, 어른이 되어서는 친구로 지내며, 시에서는 오로지 내 초부뿐이었지"(少師而壯友, 於詩惟我樵)라고 정초부를 추억하기도 했다.

   여춘영은 그를 묻고 돌아오는 길에 다음과 같은 시를 짓기도 했다.

   "저승에서도 나무하는가?(黃려<土+廬>亦樵否) / 낙엽은 빈 물가에 쏟아진다(霜葉雨空汀) / 삼한 땅에 명문가 많으니(三韓多氏族) / 내세에는 그런 집에 나시오(來世托寧馨)"
정초부가 나무하는 노비였음은 그 자신의 시에서도 확인된다.

   "시인의 남은 생애는 늙은 나무꾼신세(翰墨餘生老採樵) / 지게 위에 쏟아지는 가을빛 쓸쓸하여라(滿肩秋色動蕭蕭) / 동풍이 장안 대로로 이 몸을 떠다밀어(東風吹送長安路) / 새벽녘에 걸어가네 동대문 제이교를(曉踏靑門第二橋)"
정초부는 실제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번에 발굴된 초부유고에는 "정초부는 이름이 이재(彛載)다. 여씨가 노비문권(노비증서)을 불사르니 갈대울(지명)에 거주했다"는 구절이 보인다고 안 교수는 덧붙였다.
정초부는 나무를 하는 노비로 어린 시절 낮에는 나무를 하고 밤에는 주인집 자제들이 배우는 글을 어깨너머로 배웠으며, 이를 주인이 기특하게 여겨 한자를 가르친 것으로 전해진다.

  

여춘영의 문집 '헌적집' 중 정초부 제문


http://blog.yonhapnews.co.kr/ts1406/
taeshik@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