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의 정계에서는 여풍이 거세다. 새누리당의 박근혜 비상대책위원회 위원장, 민주통합당의 한명숙 대표, 통합진보당 이정희 대표까지 여성 일색이다. 조선시대에는 일반 여성으로 그 이름이 기록되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그런데 최고의 국정 기록인 『조선왕조실록』에 그 이름을 당당히 알린 여성이 있다. 바로 김만덕이다. 김만덕은 여성이라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실록에 그 이름을 올렸고, 정조는 특별히 그녀를 궁궐에 초청하고 금강산 유람까지 보내주었다. 또한 정조대 정승을 지낸 채제공은 그의 문집에서 특별히 김만덕의 전기를 기록하였다. 김만덕이 이처럼 각광을 받은 까닭은 무엇일까? 우선『정조실록』에서 그 단서를 찾을 수가 있다.
제주(濟州)의 기생 만덕(萬德)이 재물을 풀어서 굶주리는 백성들의 목숨을 구하였다고 목사가 보고하였다. 상을 주려고 하자, 만덕은 사양하면서 바다를 건너 상경하여 금강산을 유람하기를 원하였다. 허락해 주고 나서 연로의 고을들로 하여금 양식을 지급하게 하였다. [濟州妓萬德, 散施貨財, 賑活饑民, 牧使啓聞。 將施賞, 萬德辭, 願涉海上京, 轉見金剛山, 許之, 使沿邑給糧] - 『정조실록(正祖實錄)』(정조 20년(1796년) 11월 25일)
1795년(정조 19) 제주에 큰 기근이 들어 굶어 죽는 이가 많으므로 나라에서 구휼하고자 하였으나 도저히 감당하지 못하였다. 이에 만덕이 천금을 내어 육지에서 쌀을 사들여 친족을 구휼하고, 관가에도 보내어 부황난 백성을 구휼하게 하였으므로 만덕의 은덕을 칭송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제주 목사가 이 일을 적어 임금께 올리니 임금이 기특히 여겨 칭찬하고, 만덕의 소원하는 바를 들어 시행하게 하였다.
조선시대 한반도 최변방 중의 한 곳인 제주에서, 그것도 기생 출신 여자가 재물을 풀어 백성을 구제했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운 것이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실록에 기록하였다는 점 또한 매우 이례적이었다. 여성이 쉽게 능력을 발휘할 수 없었던 조선후기 사회에서 만덕과 같은 여성의 성공 신화는 매우 이례적인 것이었다. 그럼 만덕은 어떤 방식으로 큰 돈을 벌 수 있었을까? 만덕이 살았던 조선후기 영조, 정조시대는 변화의 시기였다. 전통적인 산업인 농업 이외에 상업에 대한 인식이 확대되었다. 상업과 유통 경제의 발달에서 빼 놓을 수 없었던 것이 포구 무역과 객주업이었다. 만덕은 포구 무역과 객주업으로 많은 돈을 번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후기 제주도가 어업과 해상 무역의 중심지로 떠오르면서 만덕은 시대의 흐름을 읽고 상업 전선에 뛰어 들었다. 만덕은 관기를 그만두고 건입 포구에서 객주를 차리고 장사를 시작했다. 객주는 상인들에게 숙식을 제공하고 상품을 위탁 판매하는 일종의 중개 상인이었다. 관기로 있으면서 관리들과 맺어진 친분도 중요한 작용을 한 것으로 여겨진다. 여기에 특유의 장사 수완이 큰 몫을 하였다. 제주는 쌀 등의 곡물이 특히 부족한 곳이었다. 만덕은 외부에서 반입되는 쌀이나 제주에서 생산되지 않는 소금의 독점권을 확보하여 이를 미역, 전복 등 제주의 해산물과 교환하였다. 만덕은 쌀과 소금의 시세 차익을 이용하여 계속 부를 축적해 나갔고, 결국 제주도 최고의 여성 갑부가 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만덕의 선행은 조정에까지 알려졌고, 정조는 궁궐에서 만덕을 직접 만났다. 그리고 만덕의 행적은 채제공(蔡濟恭 1720~1799)의 문집인 『번암집(樊巖集)』55권에 「만덕전(萬德傳)」이라는 제목으로 기록되었다.
만덕은 성이 김씨이며, 탐라(제주)의 양인 집안의 딸이다. 어려서 어머니를 잃고 귀의할 바가 없었다. 기녀를 의탁하여 살았는데, 점차 성장하자 관부(官府)에서는 만덕의 이름을 기안(妓案)에 올렸다. 만덕은 비록 순종적으로 기녀의 역을 행하였지만, 스스로 기녀로 대접하지는 않았다. 나이 스무 살에 그 사정을 관아에 읍소하니, 관에서 그것을 불쌍히 여겨 기안에서 제외하고 양민으로 복귀하였다. 만덕은 비록 집안에 고용된 노와 거주했으나, 탐라의 남자를 남편으로는 맞이하지 않았다. 그 재주는 재산을 늘리는 데에 뛰어 났다. 때에 따라 물가의 높고 낮음에 능하여, 팔거나 샀다. 수 십년에 이르러 자못 명성을 쌓았다. [萬德者。姓金。耽羅良家女也。幼失母無所歸依。托妓女爲生。稍長。官府籍萬德名妓案。萬德雖屈首妓於役。其自待不以妓也。年二十餘。以其情泣訴於官。官矜之除妓案。復歸之良。萬德雖家居乎庸奴。耽羅丈夫不迎夫。其才長於殖貨。能時物之貴賤。以廢以居。至數十年。頗以積著名]
성상(정조) 19년 을묘(1795년)에 탐라에 큰 흉년이 들어 백성들의 시신이 침상을 이루었다. 왕이 곡식을 배에 싣고 가서 구제하기를 명했다. 바닷길 800리에 바람 편에 오가는 것이 베짜는 북과 같았으나 오히려 때에 미치지 못했다. 이에 만덕이 천금을 희사(喜捨)하여 쌀을 사들였다. 육지의 여러 군현의 사공들이 때맞춰 이르자 만덕은 십분의 일을 취하여 친족을 살리고, 그 나머지는 모두 관가에 수송하였다. 부황난 자가 듣고 관가 뜰에 모여들기가 구름과 같았다. 관가에서는 완급을 조절하여 차등있게 나누어 주었다. 남녀는 나와서 만덕의 은혜를 칭송하였다. “우릴 살려준 이는 만덕이로다.” 구제가 끝나자, 목사는 그 일을 조정에 아뢰었다. 왕이 그것을 크게 기이하게 여기고 분부했다. “만덕에게 소원이 있다면 쉽고 어려움을 묻지 말고 특별히 베풀어라.” 목사가 만덕을 불러 임금의 분부대로 물었다. “어떤 소원이 있느냐?” 만덕이 대답하기를, “별다른 소원은 없습니다만 원컨대 서울에 한 번 가서 왕이 계신 곳을 바라보고, 이내 금강산에 들어가 일만 이천 봉을 구경한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 대개 탐라의 여인의 금법에 바다를 건너 육지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어 있었으니, 이는 국법이었다. 목사가 그 소원을 상주(上奏)했더니, 왕이 명을 내려 그 소원을 좇아 관가에서 역마를 주고, 또 음식을 번갈아 제공케 했다. [聖上十九年乙卯。耽羅大饑。民相枕死。上命船粟往哺。鯨海八百里。風檣來往如梭。猶有未及時者。於是萬德捐千金貿米。陸地諸郡縣棹夫以時至。萬德取十之一。以活親族。其餘盡輸之官。浮黃者聞之。集官庭如雲。官劑其緩急。分與之有差。男若女出而頌萬德之恩。咸以爲活我者萬德。賑訖。牧臣上其事于朝。上大奇之。回諭曰。萬德如有願。無問難與易。特施之。牧臣招萬德以上諭諭之曰。若有何願。萬德對曰。無所願。願一入京都。瞻望聖人在處。仍入金剛山。觀萬二千峯。死無恨矣。盖耽羅女人之禁不得越海而陸。國法也。牧臣又以其願上。上命如其願。官給舖馬遞供饋]
만덕의 기부 행위에 조정에서도 포상을 논의했지만, 쉽게 관직을 내릴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만덕은 이런 고민을 깨끗하게 해결해 준다. “다른 소원은 없으나 오직 하나, 한양에 가서 왕이 계시는 궁궐을 우러러 보는 것과 천하 명산인 금강산 1만 2천봉을 구경하는 것입니다.” 거액의 기부자 답지 않는 소박한 소원이었다. 당시 제주도의 여인들은 육지로 나가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으므로, 제주목사는 조정에 민원을 보고하였다. 정조는 흔쾌히 만덕의 소원을 수용하고 적절한 조처를 지시하였다. 1796년 만덕이 서울 궁궐에 오자 정조는 효의왕후와 함께 직접 만덕을 격려하였다. 이듬해 봄에는 평생의 소원이던 금강산을 유람하고 돌아왔다. 꿈을 이룬 만덕은 만폭동, 묘길상을 거쳐 삼일포에서 배를 타고 총석정을 둘러보는 것으로 금강산 유람을 마쳤다. 만덕은 이제 ‘장안의 스타’가 되어 있었다. 『번암집』에서 ‘만덕의 이름이 한양에 가득하여 공경대부와 선비 등 계층을 가리지 않고 모두 그녀의 얼굴을 한 번 보고자 하였다.’는 기록은 이러한 분위기를 잘 보여주고 있다. 「만덕전」의 후반부는 만덕의 입경과 금강산 여행, 그리고 채제공과의 이별 이야기로 구성된다.
만덕은 배를 타고 만경창파를 건너서 병진년(1796) 가을 서울에 들어와 정승 채제공을 한두 번 만났다. 채제공은 그 사실을 왕께 아뢰었다. 왕은 선혜청에 명하여 달마다 식량을 지급하도록 하였다. 며칠 후에 명하여 내의원 의녀로 삼아 모든 의녀의 반수로 두었다. 만덕은 전례에 의거하여 대궐로 들어가 여러 궁에 문안을 드리고 각기 의녀로서 시중을 들었다. 이에 왕이 전교하기를, “네가 일개 여자로서 의로운 기운을 발휘하여 주린 백성 천여 명을 구제했으니, 참으로 기특하다.” 상으로 하사한 것이 매우 많았다. 거한지 반 년 만인 정사년(1797년) 3월에 금강산에 들어가 만폭동과 중향성의 기이한 경치를 두루 탐방하고, 금불(金佛)을 만나면 반드시 절을 하고 공양을 드려 그 정성을 다했다. 대개 불법이 탐라국에는 들어가지 않은 까닭에 만덕이 이때 나이가 쉰여덟이었으나 처음으로 절과 부처를 구경했다. 마침내 안문재를 넘어 유점사를 거쳐 고성으로 내려가, 삼일포에서 배를 타고 통천 총석정에 올라 천하의 기이한 경치를 구경하였다. [萬德一帆雲海萬頃。以丙辰秋入京師。一再見蔡相國。相國以其狀白。上命宣惠廳月給粮。居數日。命爲內醫院醫女。俾居諸醫女班首。萬德依例詣內閤門。問安殿宮。各以女侍。傳敎曰。爾以一女子。出義氣救饑餓千百名。奇哉。賞賜甚厚。居半載。用丁巳暮春。入金剛山。歷探萬瀑,衆香奇勝。遇金佛輒頂禮。供養盡其誠。盖佛法不入耽羅國。萬德時年五十八。始見有梵宇佛像也。卒乃踰鴈門嶺。由楡岾下高城。泛舟三日浦。登通川之叢石亭。以盡天下瑰觀]
이후에 (만덕은) 돌아와 서울로 들어갔다. 며칠을 머문 뒤 장차 고향으로 돌아갈 때, 대궐에 들어가 돌아감을 고했다. 대전과 궁에서 각기 상을 내리는 것이 이전과 같았다. 이때에 만덕의 이름이 서울 안에 가득하여 공경대부와 선비 등이 만덕의 얼굴 보기를 원하지 않음이 없었다. 만덕이 떠남에 임하여 채제공에 감사하며 목멘 소리로 말하였다. “이승에서는 재상의 얼굴을 다시 뵙지 못하겠나이다.” 이에 처연히 눈물을 흘렸다. 채제공이 말하기를, “진시황과 한무제는 모두 ‘해외(海外)에 삼신산(三神山)이 있다’라고 하였고, 세상에서 우리나라의 한라산은 곧 이른바 영주산이요, 금강산은 곧 봉래산이라 이르는 바이다. 너는 탐라에서 자라 한라산에 올라가 백록담의 물을 먹고, 이제 또 금강산을 두루 구경했으니 이는 삼신산 중에서 그 둘을 모두 포함하여 유람한 것이 아니겠느냐. 천하의 수많은 남자들 중에 이것을 능히 한 자는 없다. 지금 이별함에 임하여 도리어 아녀자의 가련한 태도를 짓는 건 무슨 까닭인고.” 이에 이 일을 서술하여 「만덕전」이라 하고, 웃으면서 주었다. 성상 21년 정사년 하지일이요, 번암 채제공의 나이 일흔 여덟이었다. 충간의담헌(忠肝義膽軒, 채제공의 서재)에서 썼다. [然後還入京。留若干日。將歸故國。詣內院告以歸。殿宮皆賞賜如前當是時。萬德名滿王城。公卿大夫士無不願一見萬德面。萬德臨行。辭蔡相國哽咽曰。此生不可復瞻相公顔貌。仍潸然泣下。相國曰。秦皇漢武皆稱海外有三神山。世言我國之漢挐。卽所謂瀛洲。金剛卽所謂蓬萊。若生長耽羅登漢挐。 白鹿潭水。今又踏遍金剛。三神之中。其二皆爲若所包攬。天下之億兆男子。有能是者否。今臨別。乃反有兒女子刺刺態何也。於是敍其事。爲萬德傳。笑而與之。聖上二十一年丁巳夏至日。樊巖蔡相國七十八。書于忠肝義膽軒]
금강산 유람 후 만덕은 벼슬을 내놓고 제주도로 돌아갈 것을 결정했다. 이 때 정조의 최고 참모이던 재상 채제공을 다시 만났다. 처음 상경했을 때도 만난 바 있었던 채제공은 이별의 자리에서 직접 지은 「만덕전」을 그녀에게 주었다. 「만덕전」은 채제공의 문집인 『번암집』에 실려 그녀를 영원히 기억하게 하였다. 만덕은 제주도에 돌아온 후 15년 만인 1812년 세상을 떠났고, 그녀의 유언에 따라 무덤은 제주 성안이 한 눈에 내려 보이는 ‘가운이 마루’ 길가에 묻혔다고 한다. 영원히 제주의 연인으로 남기를 원한 것이다. 제주도에서는 해마다 만덕상을 제정하여, 또 다른 만덕을 계속 배출해가고 있다. 제주의 기녀 출신에서 성공한 CEO로 자리 잡은 여인, 나눔의 미덕을 실천한 기부 천사 만덕. 그녀로 인해 조선시대 여성사는 더욱 풍부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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