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0년의 기다림… 신라 명필 김생의 환생
-김생 기념전 여는 박대성
펄펄 끓는 무쇠 들이붓듯 힘 넘치는 김생의 글씨
쓸 때마다 두려운 마음에 벌벌 떨면서 붓 놀려
-내 인생 좌우명은 '不便'
어릴 때 빨치산 낫에 찍혀 팔꿈치 아래가 없는 왼팔
이 불편함이 내 평생 스승 김생처럼 모질게 글씨 연마
박대성(67)의 붓 쥔 손은 예사롭지 않다. 보통 엄지로 붓 뒤를 버티고 나머지 네 손가락으로 붓의 몸통을 다스리는데, 그는 약지도 붓 뒤로 밀어 넣는다. 그의 오른손에서 붓은 한지(韓紙)를 대하는 도구가 아니라 무쇠나 돌을 깎는 공구(工具)처럼 보였다.
"붓을 필봉(筆鋒)이라고 하는 이유가, '봉' 자에 쇠 금(金)을 쓰는 이유가 있습니다. 붓은 금강석을 깎아 만든 칼이고, 종이는 화강암 석판입니다. 다이아몬드 칼에 영원히 색이 변치 않는 먹으로 화강암에 새기는 것, 이것이 서예이고 동양 미술입니다."
제도 미술교육을 일절 받지 않고도 한국화와 서예에서 거장 자리에 오른 그는 지금 통일신라 명필 김생(金生·711~790?)의 후예를 자임하는 전시를 열고 있다. 지난 1일부터 29일까지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에서 전시 중인 '김생 1300주년 기념전'에 그간 쓰고 그려온 작품들을 내놓았다. 초정(艸丁) 권창륜(69)과 함께 작품을 내건 이 전시회에서 박대성은 서(書)와 화(畵)가 각각의 장르가 아니라 한몸임을 대작(大作)들을 통해 웅변한다. 김생을 기념해 열리는 전시회 자체가 처음이라고 한다.
"30년 전쯤부터 글씨를 본격적으로 쓰면서 머리가 확 열리는 걸 느꼈어요. 서예가 중국 것만이 아니라는 사실도 깨닫고 수천 년 우리 공동체를 엮어온 문화유산인 것을 알았습니다. 이런 걸 놓치고 있으니까 우리 사회 전반의 질서가 흐트러지는 거예요. 20년 전쯤 김생의 글씨를 처음 봤는데, 그때 벼락 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가 쓴 한 일(一)자 하나만 봐도 대자연의 기운을 느낄 수 있습니다."
"붓을 필봉(筆鋒)이라고 하는 이유가, '봉' 자에 쇠 금(金)을 쓰는 이유가 있습니다. 붓은 금강석을 깎아 만든 칼이고, 종이는 화강암 석판입니다. 다이아몬드 칼에 영원히 색이 변치 않는 먹으로 화강암에 새기는 것, 이것이 서예이고 동양 미술입니다."
제도 미술교육을 일절 받지 않고도 한국화와 서예에서 거장 자리에 오른 그는 지금 통일신라 명필 김생(金生·711~790?)의 후예를 자임하는 전시를 열고 있다. 지난 1일부터 29일까지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에서 전시 중인 '김생 1300주년 기념전'에 그간 쓰고 그려온 작품들을 내놓았다. 초정(艸丁) 권창륜(69)과 함께 작품을 내건 이 전시회에서 박대성은 서(書)와 화(畵)가 각각의 장르가 아니라 한몸임을 대작(大作)들을 통해 웅변한다. 김생을 기념해 열리는 전시회 자체가 처음이라고 한다.
"30년 전쯤부터 글씨를 본격적으로 쓰면서 머리가 확 열리는 걸 느꼈어요. 서예가 중국 것만이 아니라는 사실도 깨닫고 수천 년 우리 공동체를 엮어온 문화유산인 것을 알았습니다. 이런 걸 놓치고 있으니까 우리 사회 전반의 질서가 흐트러지는 거예요. 20년 전쯤 김생의 글씨를 처음 봤는데, 그때 벼락 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가 쓴 한 일(一)자 하나만 봐도 대자연의 기운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한국화가이자 서예가인 박대성은 주로 대작(大作)에 천착해 왔다. 김생이 평생 글을 쓴 청량산 그림에 글씨를 쓴 작품 ‘청량산 필봉’ 앞에서 그가 붓을 잡았다. 이 작품은 높이 6m에 이른다./이진한 기자 magnum91@chosun.com
![](http://image.chosun.com/sitedata/image/201204/06/2012040601360_0.jpg)
경북 청도 출신인 그는 네 살 때 아버지를 잃었다. 빨치산들이 아버지에게 낫을 휘둘렀다. 그때 아버지 등에 업혀 있던 박대성은 왼쪽 팔 절반을 잃었다. 그 후 신라의 천재화가 솔거 이야기를 듣고 나뭇가지로 흙바닥에 그림을 그리고, 숯으로 삽날에 데생 연습을 한 그는 1970년대 국전에서 연달아 8회 입상하면서 화단(畵壇)을 놀라게 했다.
"팔꿈치 아래가 없는 이 왼팔이 내 평생 스승입니다. 이 팔 하나가 없는 바람에 줄기차게 노력을 했지요. 그래서 내 인생의 좌우명이 '불편(不便)'이에요. 편리하면 할수록 인간정신은 게을러집니다. 김생도 평생 불편함을 추구했습니다. 경북 봉화 청량산 골짜기에서 글쓰기에 정진해, 그 앞에 묵강(墨江)이 흘렀다고 하지요." 경주 왕릉 근처에 집을 짓고 15년 가까이 경주 그림을 그리며 사는 그는 집에도 '불편당(不便堂)'이란 당호를 붙였다고 했다.
박대성은 김생의 글씨 가운데 2500자가량을 954년에 집자(集子)해 만든 '낭공대사백월서운탑비명'을 수십 번가량 임서(臨書·베껴 씀)했다. 이 가운데 한 작품이 이번 전시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것을 쓸 때면 두려운 마음에 벌벌 떨면서 붓을 놀립니다. 하루 10시간씩 쓰고도 꼬박 열흘이 걸리는 작업이지요."
그는 1990년대 중반 미국 뉴욕에서 화실을 얻어 1년간 그림을 그린 적이 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내가 이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나' 하고 퍼뜩 깨달아 한국에 돌아왔다. 경주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다. "현대미술, 서구미술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어요. 자유로움이 있더군요. 그런데 자칫 방종으로 흐를 수 있는 자유였습니다. 우리에겐 법도가 있고 원칙이 있지요. 장미 한 송이를 그리려면 서양사람들은 붓질을 100번 하는데, 우리는 일필휘지(一筆揮之)로 10번이면 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미술의 고박(古樸)한 맛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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