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어당

굴어당의 한시.논어.맹자

http:··blog.daum.net·k2gim·

필운대(弼雲臺)는 조선 중기의 명신 이항복이 살던 곳으로

굴어당 2014. 1. 11. 22:13

 

http://blog.daum.net/robustus/11607266

필운대(弼雲臺)는 조선 중기의 명신 이항복이 살던 곳으로 '필운'은 그의 호이다. 종로구 필운동의 배화여자고등학교 뒤뜰에는 큰 암벽이 있는데, 그 왼쪽에 "필운대(弼雲臺)"라는 정자(正字)가 크게 새겨져 있고, 가운데에 시구(詩句)가 새겨져 있으며, 오른쪽에 10명의 인명이 나열되어 있다.

이항복의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자상(子常), 호는 필운 외에 백사(白沙)라고도 했다. 고려말의 대학자 익재(益齋) 이제현의 후손이며 참찬 이몽량(李夢亮, 1499∼1564)의 아들이다. 뒤에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에 봉해졌기 때문에 세간에서 흔히 '오성대감'이라 불렀다. 특히 죽마고우인 한음(漢陰) 이덕형과의 기지(機智)와 작희(作戱)에 얽힌 일화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병조판서·이조판서로서 홍문관·예문관 대제학 등을 겸임하는 등 여러 요직을 거치면서 안으로 국사에 힘쓰고 밖으로 명(明)나라 사신의 접대를 전담하였다. 특히 임진왜란 때에는 선조를 모시고 의주까지 호종했고, 명군(明軍)에게 도움을 청할 것을 적극 건의했으며, 명군과의 교섭에서 능란한 외교를 벌였던 인물이다. 난리 후 우의정을 지냈으며 청백리(淸白吏)에 선정되었다.

암벽 왼쪽의 "弼雲臺" 글씨는 누구의 것인지 미상이나 이항복의 글씨라기보다는 이유원의 글씨로 추정된다. 암벽 가운데 새겨진 시구(詩句)는 이항복의 후손 귤산(橘山) 이유원(李裕元, 1814∼1888)이 고종 10년(1873) 이곳에 들러 조상의 자취를 보고 느낌을 적은 것으로 이유원의 장기인 예서(隸書)로 새겨져 있다.

또한 암벽 오른쪽에는 "동추(同樞) 박효관(朴孝寬)" 등 10명의 인명이 새겨져 있는데, 이유원과 관련된 인물인지는 미상이다.

,,,,,,,,,,,,,,,,,,,,,,,,,,,,,,,,,,,,,,,,,,,,,,,,,,,,,,,,,,,,,,,,,,,,,,,,,,,,,,,,,,,,

西村, 백사 이항복의 필운대-정조의 詩 필운화류

[조인스 블로그] 입력 2012-02-16

종로구 필운동 언덕배기를 오르면 배화여고와 배화여대가 있고, 여고 뒤편
인왕산 오른쪽 자락 암벽에  필운대라고 새긴 이항복 집터가 있다. 본래는
그의 장인인 권율장군의 집이 있었는데, 권장군은  경치가 좋은 그집을 사위인
이항복에게 물려주었다고 한다. 권율장군의 집도 바로 이웃해 있었다고도 한다.
 
[편집]P1190481.jpg
집 뒤 바위에 새긴 필운대
이항복의 글씨인지 미상이지만 그의 후손 李裕元(1814∼1888)의 글씨라고도
한다.
 
[편집]P1190486.jpg
 
이항복의 호중 대표적인 호가 弼雲과 白沙 인데, 그의 호 필운에서 필운동이라는
동네명이 생겼다. 그외 청화진인(淸化眞人)·동강(東岡)·소운(素雲)이라는 호를 썼고, 시호는 문충(文忠)이었다. 정치가이자 시인 작가 그리고 재담가였기에 그에 맞는
호를 많이 썼던 모양이다.
 
[편집]P1190480.jpg
 
필운대 일대는 조선후기 중인문화가 꽃을 피운 인왕산 자락 중에서 중심 공간이었다고 한다. 이곳에서 중인들이 시문을 창작하고 교유했던 모습은 ‘필운대풍월’이라는 말로 후대에도 널리 회자됐다.  -건국대교수 신병주의 인문학 산책 중


[편집]theory10_4.jpg
이항복(1556-1618)
이항복하면, 어려서 이웃에 살던 죽마고우 이덕형과의 '오성과 한음'이 먼저
떠오른다. 9세때 부친을 잃고 홀어머니의 보살핌을 받고 자랐다. 어린 시절에는
놀기를 좋아하여 동네 불량배의 우두머리로 세월을 보냈었으나, 후에 어머니의
교훈으로 학업에 정진하게 되었다고 한다. 16세에 어머니마저 잃었다.
이항복과 이웃에 살고 있던 영의정을 지낸 권철(권율의 아버지)이 이항복의 됨됨이
를 알아보고 아들에게 사위삼을 것을 추천했다고 한다. 19세에 이항복은 권율의
딸과 혼인을 하였다.
 
[편집]P1190483.jpg
 
암벽 가운데 시구는 이항복의 후손 귤산 이유원이 고종 10년(1873년) 이곳에
들러서 조상의 자취를 보고 느낌을 적은 것으로 이유원의 장기였던 예서(隸書)로
새겨져 있다. 남산 아래 남창동 마을엔 이항복의 정자 홍엽정(紅葉亭)이 있었는데
9대손 이유원(李裕元1814-1888)이 홍엽정을 물려받아 별서(別墅)로 살면서
남쪽 산에 사는 나무란 뜻의 귤산(橘山)이란 글씨를 바위에 새겨두었다. 라는
김달진 미술자료박물관 기록을 읽었다. 


[편집]P1190482.jpg

9대손인 이유원의 예서

우리 조상님 사시던 옛집에 후손이 찾아왔는데,

푸른 소나무와 바위벽에는 흰구름만 깊이 잠겼도다.

백년의 오랜 세월이 지났건만 遺風은 가시지 않아

옛조상들의 차림새는 예나 지금이나 같아라

[편집]P1190484.jpg
 
암벽 오른쪽에는 '동추(同樞) 박효관(朴孝寬)' 등 10명의 인명이 새겨져 있는데,
이유원과 관련된 인물인지는 미상이라고 한다. 아래 안내글에는 공사를 맡은
감독자들이라고 하는데, 아마 이유원과 같이 와서 바위에 글을 새긴 사람들인
모양이다.
 
[편집]P1190485.jpg
 
봄에는 복사꽃이 무리지어 피었던 동네, 배화여고가 가리기 전에는
서울 시내가 훤히 내려다 보였던 동네 였다.
 
[편집][편집]3-1.jpg
 
필운대 옆에 있는 사람들이 집에 꽃나무를 많이 심어 성안 사람들이 봄날 꽃구경
하는데 먼저 여기를 손꼽고, 또한 거리 사람들도 술병을 차고 와서 시를 짓느라
날마다 모여들곤 하는 명승’이었으니 ....
 
[편집]4-1.jpg
필운대 아래 마을은 도성의 꽃시장에 내다 팔았을 화초 재배단지였다고도 한다.
이 그림을 그린 화가 정선(鄭敾1676-1759)의 관심은 필운대 근처에 모여 꽃놀이
하는 선비들이었다. 정선과 그 벗들이 필운대풍월 누리는 한 장면이었으므로
여기엔 농부도 꽃밭도 보이지 않는다. -김달진 미술자료박물관
 
그러나 정선과 같은 시대 살아간 중인 정래교(鄭來僑1681-1759)의 눈에는 이 땅에 살아가는 한양토박이들 모습이 보여 <<완암집(浣巖集)>>에‘가난한 집 출신으로
유식(遊食)하는 사람’이라고 묘사하였다.

 
[편집]P1190487.jpg
 
이항복은 임진왜란 때에는 선조를 모시고 의주까지 호종했고, 명군(明軍)에게
도움을 청할 것을 적극 건의했으며, 명군과의 교섭에서 능란한 외교를 벌였던
인물이다. 임진왜란 후 우의정을 지냈으며 청백리(淸白吏)에 선정되었다고...

[편집]P1190488.jpg

배화여고가 이항복 유적을 너무 가려 버렸다. 그리고 참으로 허술하게 관리되고
있었다.
이항복은 평생토록 당쟁에 가담하지 않았으나, 대북파에 의해서 인목대비 폐모론이 거론되자 이에 반대하며 서인(西人)에 가담하였다. 그는 관직을 삭탈당하고 북청으로 귀양을 가게되어 중풍 재발로 거기서 죽게되었다. 광해군은  관직을 회복시켜
주고 경유지마다 관에서 운구에 협조할 것을 명했다. 예를 잘 갖춘 장례를 지낸
그의 묘는 경기도 포천시 가산면 금현리 산4번지에 있다. 


[편집]P1190489.jpg

독립운동가인 이회영(李會榮), 이시영(李始榮) 형제도 이항복의 후손이다.
이항복의 저서 : 백사집, 북천일록(北遷日錄), 사례훈몽(四禮訓蒙)등 문집
15권이 남아 있다.
봄꽃하면, 필운대의 살구꽃 무리가 가장 유명했던 모양이다.
다산 정약용과 정조대왕도 필운대 꽃구경 詩를  지었다고 한다.
 
백단령 차려입은 사람들은 모두 시짓는 친구들이고
푸른 깃발 비스듬히 걸린 집은 바로 술집일세
혼자 주렴 내리고 글읽는 이는 누구 아들인가
동궁에서 내일 아침 또 조서를 내려야겠네
 
(정조의 필운화류 詩 뒷부분. 허경진 연세대 국문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