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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보 시 300수,두보 저/정범진,이성호 공역 | 문자향

굴어당 2015. 7. 12. 08:59

 

 

두보 시 300수

양장

두보 저/정범진,이성호 공역 | 문자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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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보 시 300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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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소개

    『두보시300수』는 중국 당나라 때의 위대한 시인 두보(杜甫, 712~770)의 시를, 평생을 중국문학 연구에 종사한 노학자와 소장학자가 함께 우리말로 옮긴 번역본이다. 두보의 시를 시기별로 나누어 그 시기를 대표하는 중요한 시들을 꼼꼼한 주석과 함께 번역했다. 그리고 부록으로 두보 연보, 역대 명가들의 두시총평(杜詩總評), 두보의 시를 제재로 한 유명한 화가들의 두보시의도(杜甫詩意圖)를 실어놓았다. 또한 원문에는 한글 음을 함께 붙여서 한자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의 편의를 도왔다.

    저자 소개

    작가파일보기 관심작가알림 신청 저 : 두보

    杜甫 두 보(杜甫, 712∼770)는 중국 당대(唐代)의 시인으로 이백(李白)과 함께 중국 시단을 대표하며 우리에게도 친숙한 시인이다. 그는 본래 유가(儒家)로서 정치에 몸담고자 했으나 여러 가지 요인으로 말미암아 결국 시인의 길을 가게 되었다. 두보가 처한 시대는 당나라가 찬란한 번영을 구가하다가 안사의 난으로 제국의 붕괴 위기를 맞았던 때였다. 그의 생애는 크게 보아 755년에 발발한 안사의 난을 중심으로 전·후반으로 양분된다. 안사의 난 이전, 그는 당대의 다른 시인들처럼 독서와 유람으로 견문을 쌓아 착실히 벼슬에 나아갈 준비를 하였다. 735년 진사 시험의 낙제는 그에게 그다지 큰 영향을 주지 않았다. 그는 재차 유람에 나서는 한편 이백, 고적(高適) 등과 교류하기도 했다. 746년 이후 두보는 거처를 장안으로 옮겨와 고위 관리에게 벼슬을 구하는 간알시(干謁詩)를 써서 보내며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하고자 애썼다. 이러한 생활이 10년간 지속되면서 두보는 점차 경제적으로 열악한 상황에 놓였고 당시 귀족들의 사치와 서민들의 궁핍한 삶에 대하여 절감하기 시작했다. 755년은 그에게 여러모로 특별한 해였다. 그해 10월, 그는 10년 노력의 결과로 무기의 출납을 관리하는 우위솔부주조참군(右衛率府?曹參軍)이라는 미미한 벼슬을 받고 스스로 낭패감에 휩싸였다. 그러나 국가적으로는 이로부터 한 달 뒤인 11월, 당 왕조를 거의 멸망시킬 만큼 파급력이 대단했던 안사의 난이 발발한다. 이후 두보의 삶은 전란과 긴밀한 연관을 맺으며 전개된다. 두보는 잠시 장안 근처 부주에 떨어져 살던 가족을 만나러 갔다가 어린 아들이 먹지 못해 요절한 사실을 알고 참담한 마음으로 장편시 『장안에서 봉선으로 가며 회포를 읊어(自京赴奉先縣詠懷五百字)』를 남겼다. 벼슬을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던 자신을 돌아보고 당시 귀족들의 사치와 서민들의 궁핍한 처지를 그렸으며 총체적인 사회의 부패상을 고발했다.
    이후 두보의 삶은 이전과는 크게 달라진다. 전란의 와중에 현종(玄宗)은 사천으로 피난 가고 숙종(肅宗)이 영무(靈武)에서 임시로 즉위한 사실을 알고 두보는 이를 경하하기 위해 영무로 가던 중 반군에 붙잡혀 장안으로 호송되어 얼마간 억류되었다. 이때 우리에게 잘 알려진 『봄의 전망(春望)』을 썼다. 757년 2월, 숙종이 행재소를 봉상(鳳翔)으로 옮겼을 때 두보는 위험을 무릅쓰고 장안을 탈출하여 숙종을 배알하여 그 공으로 좌습유(左拾遺) 벼슬을 받았다. 그러나 곧 반군 토벌에 실패한 방관(房琯)을 변호하다 숙종의 미움을 사게 되고 그것은 곧이어 파직으로 이어졌다. 화주사공참군(華州司功參軍)으로 좌천된 두보는 벼슬에 적응하지 못하고, 마침내 관직을 버리고 진주(秦州)행을 감행한다. 두보의 대표적 사회시로 알려진 이른바 『삼리(三吏)』와 『삼별(三別)』이 이즈음에 지어졌다.

    759년 두보는 진주에서부터 여러 지역을 전전하여 성도(成都)에 정착하게 되었다. 이곳에서 두보는 친구들의 도움으로 초당에 거처를 마련하고 나중에는 엄무(嚴武)의 추천으로 막부(幕府)에서 검교공부원외랑(檢校工部員外郞)이란 벼슬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여기에도 잘 적응하지 못했으며, 엄무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두보는 성도를 떠나 운안(雲安)을 거쳐 기주(夔州)에 이르게 되었다. 기주는 성도에 비해서도 더욱 낯선 곳이었지만 비교적 물산이 풍부했던 이곳에서 두보는 어느 정도 심신의 안정을 찾고 시가 창작에서도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 이때의 대표작으로 『가을날의 흥취(秋興八首)』를 꼽을 수 있다. 파란만장했던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풍요로웠던 과거와 일순간에 일어난 전란을 지극히 미려한 언어로 수를 놓듯이 새긴 이 시는 율시(律詩)가 이룩한 미감의 정점을 보여준다. 그러나 두보는 기주 생활에 결코 안주하지 못했다. 중앙 정부에서 벼슬하리라는 희망을 끝내 놓을 수 없었기에, 768년에 협곡을 빠져나가 강릉(江陵)을 거쳐 악양(岳陽)에 이르렀다. 이후 그의 생활은 주로 선상에서 이루어졌고 건강이 악화되고 경제적으로 궁핍한 가운데, 악양과 담주(潭州) 사이를 전전하다 뱃길에서 사망하였다.
    시인 두보가 품었던 뜻은 시종일관 정치를 바르게 펼쳐 백성을 구원하는 데 있었으나 운명은 그에게 기회를 주지 않았고, 전란의 틈바구니에서 그의 삶은 자기 한 몸도 돌보기 힘들만큼 곤란해지는 때가 많았다. 시인으로 이름을 남기는 것이 그의 꿈은 아니었으나, 역설적으로 상황이 열악해질수록 그는 더욱더 시인의 눈으로 피폐한 사람과 영락한 사물을 따뜻하게 돌아보고, 보다 많은 사람이 행복해지는 방법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열정적으로 시를 썼다. 사후에 그에게 붙은 ‘시성(詩聖)’이나 ‘시사(詩史)’라는 칭호는 그의 고단하고 정직했던 삶에 대한 애도 어린 칭송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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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자 : 정범진(丁範鎭)

    경북 영주 출생. 성균관대학교 중국문학과, 국립대만사범대학 중국문학연구소(문학석사),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중어중문학과(문학박사)를 졸업했다. 한국중어중문학회 회장, 한국중국학회 회장, 성균관대학교 교수와 총장을 지냈으며, 중국 산동대학교 명예교수, 대만정치대학 명예문학박사, 한-우크라이나 친선협회 회장이다.
    지은 책으로 『중국문학사』, 『唐代소설연구』 등이 있으며, 옮긴 책으로는 『중국소설사략』, 『唐代전기소설선』, 『사기』(공역) 등이 있다.

    역자 : 이성호(李聖浩)

    경남 함안 출생. 건국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거쳐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중어중문학과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성균관 부설 한림원과 민족문화추진회 국역연수원에서 한학을 공부했다. 건국대?성균관대?대진대 강사와 안동대 안동문화연구소 연구원을 지냈다.
    연구논문으로 「목련변문연구」, 「진사도 산문연구」 등이 있으며, 옮긴 책으로 『사기본기』(공역), 『사기열전』(공역), 『내 마음을 찾아가는 길』, 『대경전:위민지략』, 『역경:역경의 지혜로 미리 보는 세상살이』가 있다.

    목차

    두보전(杜甫傳)
    두보 관계 지도

    용문산 봉선사를 유람하다(遊龍門奉先寺)
    태산을 바라보다(望嶽)
    연주의 성루에 올라(登?州城樓)
    원외랑 송지문의 옛 별장에 들르다(過宋員外之問舊莊)
    용문산(龍門)
    정씨의 동쪽 정자(重題鄭氏東亭)
    이백에게(贈李白)
    항상 술에 취한 여덟 명의 선인(飮中八仙歌)
    병거행(兵車行)
    가난할 때 사귄 친구(貧交行)
    안서로 가는 위서기를 전송하다(送韋書記赴安西)
    곡강(曲江)
    여인행(麗人行)
    구일 곡강에서(九日曲江)
    영가 현위가 된 배이규를 전송하다(送裵二?尉永嘉)
    종손 제에게 보이다(示從孫濟)
    뜰 앞 감국을 탄식하다(歎庭前甘菊花)
    정광문에게 희롱 삼아 증여하고 아울러 소사업에게 올리다(戱贈鄭廣文虔兼呈蘇司業)
    백수 명부의 외삼촌댁에서 비를 기뻐하다가 ‘過’ 자를 얻다(白水明府舅宅喜雨得過字)
    서울에서 봉선현으로 가서 읊은 오백 자의 감회(自京赴奉先詠懷五百字)
    피난하다(避地)
    왕손을 슬퍼하다(哀王孫)
    ...

    부록
    시성(詩聖) 두보의 시와 인생
    두보 연보
    역대 명가들의 두시총평(杜詩總評)
    두보시의도(杜甫詩意圖)
    제목 찾기

    출판사 리뷰

    두보는 중국 하남성(河南省) 공현(鞏縣) 출신으로, 자는 자미(子美), 호는 소릉(少陵)이다. 그의 먼 조상은 진(晉)나라 때의 학자 두예(杜預)이고, 조부는 당나라 초기에 이름을 떨쳤던 시인 두심언(杜審言)이다. 이러한 가풍의 영향으로 두보는 어린 시절부터 시를 잘 지었으나 과거에는 급제하지 못하고, 각지를 유랑하며 이백(李白)ㆍ고적(高適) 등과 교유하기도 하였다. 그 뒤로도 두보는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안녹산의 난을 비롯한 잦은 전란으로 인해 유랑의 삶을 계속해야 했다.

    그는 오랜 유랑 생활 속에서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소망을 평생토록 가슴에 품고 있었다. 그러나 끝내 그 소망을 이루지 못한 채, 동정호(洞庭湖) 인근의 배 안에서 병을 얻어 객사하고 만다. 두보의 삶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고향을 떠나서 고향으로 돌아가는 여정'이었다 할 수 있다. 그의 시는 바로 그 과정에서 나온 것들이다.

    두보는 동시대의 시인 이백과 함께 '이두(李杜)'로 일컬어지는 중국 최고의 시인이다. 두보의 시는 이전의 시풍(詩風)을 집대성했다는 평가를 받으며, 그와 아울러 후대의 시인들에게는 한시(漢詩)의 전범이 되어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래서 그를 '시성(詩聖)'이라 한다. 또한 두보의 장편 고시(古詩)는 사회성이 강하게 반영되어 있어서, '시사(詩史 : 시로 표현된 역사)'라고 부르기도 한다. 두보에 대한 이러한 평가는 당나라 때의 한유(韓愈)가 "이백ㆍ두보의 문장이 있는 곳에, 그 불꽃은 만 길이나 빛나리" 하며 찬양한 이래로, 송나라로 접어들어 왕안석(王安石)?소식(蘇軾) 등에게 칭송됨으로써 확고하게 자리를 잡는다.

    "두보는 슬픔과 기쁨(悲歡), 막힘과 통함(窮泰), 밖으로 발함과 안으로 거두어들임(發斂), 아래로 내리누름과 위로 올라감(抑揚), 빠름과 느림(疾徐), 종횡(縱橫) 등 이 모든 것을 아우르고 있다. 그래서 그의 시에는 평담(平淡)하고 간이(簡易)한 것이 있고, 화려하고 정확한 것이 있고, 삼군(三軍)의 장수 같은 엄함과 위엄이 있고, 천리마같이 치달림이 있고, 산골짜기 은사 같은 담백하고 정간(精簡)함이 있고, 고귀한 공자(公子) 같은 풍류가 있다. 두보의 시는 들어가는 실마리가 치밀하고 사상 감정이 깊기 때문에, 보는 자가 그 속내까지 깊이 들여다보지 않는다면 그 묘처를 알기가 쉽지 아니하니, 견문이 얕은 자가 어찌 쉬이 두보의 시를 엿볼 수 있으리오? 이것이 바로 두보가 전무후무한 위대한 시인이 되는 까닭이다."(왕안석)

    "두보의 시, 한유의 문장, 노공(魯公, 顔眞卿)의 서예는 모두 각 분야의 집대성한 것들이다. 시를 배울 때는 마땅히 두보를 스승으로 삼아야 하는데, 규칙과 법도가 있기 때문에 배울 만하다. 한유는 시에 대해서는 본래 이해함이 없었지만, 재주가 워낙 높았기 때문에 빼어났을 따름이다. 도연명은 시를 지은 것이 아니고 자기 마음의 취향을 써내었을 뿐이다. 두보의 시를 배우면, 설령 완벽하게 배우지 못하더라도, 썩 괜찮은 좋은 시를 지을 수 있다. 그러나 한유의 재주와 도연명의 묘함이 없이 그들의 시를 배운다면, 결국에는 백거이(白居易)가 될 뿐이다."(소식)

    두보의 시는 우리나라의 시인들에게도 끼친 영향이 매우 크다. 두보의 시를 모르고서는 시인으로서 학자로서 행세할 수조차 없을 정도였다. 다산 정약용(丁若鏞)은 두보의 시에 대해 이렇게 평가한 바 있다.

    "시는 마땅히 두보를 공자(孔子)로 삼아야 한다. 그의 시가 백가의 으뜸이 되는 것은 『시경』 3백 편을 이었기 때문이다. 『시경』 3백 편은 모두 충신, 효자, 열부, 양우(良友)들의 진실하고 충후한 마음의 발로이다. 두보의 시는 고사를 인용함에 있어 흔적이 없어서 언뜻 보면 자작인 것 같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모두 출처가 있다. 바로 두보가 시성(詩聖)이 되는 까닭이다."

    또한 한글이 창제된 뒤에는 왕명으로 두보의 시 전체가 번역되기도 했다. 이것이 바로 『두시언해(杜詩諺解)』(원제는 『분류두공부시언해(分類杜工部詩諺解)』)이다. 『두시언해』는 세종 25년(1443)에 착수하여 38년 만인 성종 12년(1481)에 간행하였는데, 이는 국가사업으로는 처음으로 번역한 개인의 시집이다. 유학(儒學)을 국시로 채택한 조선에서 사서삼경(四書三經)보다 오히려 먼저 번역한 셈이니, 두보의 시가 그 당시 얼마나 높이 평가되었는지 알게 해주는 자료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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