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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식물 이름의 유래 : 『조선식물향명집』 주해서,편저 : 조민제 외,감수 : 이우철 출판사 : 심플라이프

굴어당 2021. 8. 14. 21:24

한국 식물 이름의 유래 : 『조선식물향명집』 주해서,편저 : 조민제 외,감수 : 이우철 출판사 : 심플라이프 발행 : 2021년 08월 15

 

 

정가128,000원

 

출판사 서평

옛사람의 삶, 식물의 생태, 그리고
식물과 사람이 맺어온 관계의 역사를 담다

‘식물 애호가들이 집념으로 일궈낸 식물학의 유의미한 이정표’

한국 식물 이름의 유래』 출판 배경
『조선식물향명집』과 그 저자들에 대한 잘못된 평가를 바로잡다


최근 식물의 한글명과 그 유래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한국 식물 이름의 유래를 본격적으로 다룬 서적들이 출간되고, 식물분류학이나 식물생태학 전문가를 자처하는 이들도 이러한 대열에 합류하고 있다. 그런데 항간에는 “일제강점기에 제국주의에 길들여진 식물학자들이 일제의 식물 자원 착취를 등에 업고 자신의 학문적인 업적을 위해 조선을 조사하면서 일본어로 지은 이름을 무비판적으로 번역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는 근거 없는 말들이 떠돌기도 한다.
옛사람들이 식물과 함께 생활하며 만들고 발전시켜온 우리말 이름인 ‘광대나물’, ‘벼룩나물’, ‘벼룩이자리’, ‘등골나물’, ‘곰취’, ‘호랑버들’, ‘개불알꽃’, ‘등대풀’ 등이 줄줄이 일본명의 번역어로 취급되는가 하면, 나라 잃은 슬픔과 원망이 쌓여 언중(言衆) 사이에 형성된 ‘망초’ 같은 이름은 비루한 것으로 취급되고 있다. 식물학에 대해 조금만 더 연구하고 조사했더라면 결코 나올 수 없는 말들이다.
이 책의 편저자들은 『조선식물향명집』이나 그 저자들에 대한 연구와 이해 부족에서 비롯된 이런 근거 없는 평론에 맞서 『조선식물향명집』을 반복적으로 읽었으며, 방대한 자료를 모아 한 권의 책으로 정리하기에 이르렀다. 『조선식물향명집』이 과학으로서 식물분류학을 기초로 하고, 조선어학회와 교류하면서 우리의 전통적 식물명을 살리고자 한 민족적 자각의 결과물이었음을 확인한 것이다.

개불알꽃이라는 이름은 『조선식물명휘』에 기록된 ‘개불알달’에 어원을 둔 것으로, 꽃의 모양이 개의 불알과 유사하다는 뜻에서 유래했다. 『조선식물명휘』의 ‘개불알달’에서 ‘개불알’은 꽃의 모양에서 유래했다고 추정하며, ‘달’은 입술꽃잎의 원모양을 달(月)에 비유한 것 또는 땅속줄기로 번식하는 모습을 벼과의 달풀(달)에 비유한 것에서 유래했다고 추정한다. 중국명이나 일본명과는 그 유래가 다르고 『조선식물명휘』에서 조선명을 별도로 신칭하지 않은 것을 고려할 때, ‘개불알달’은 민간에서 부르던 이름을 채록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식물향명집』은 이 ‘개불알달’을 꽃의 모양을 강조해 ‘개불알꽃’으로 기록했다. ‘국가표준식물목록’은 ‘개불알’이라는 이름이 부르기 민망하다는 이유로 『원색한국식물도감』에 기록된 ‘복주머니란’을 추천명으로 사용하고 있으나, 난초과 식물을 총칭하는 영어명 orchid(포유류 수컷의 고환을 뜻하는 라틴어 orchido에서 유래)는 버젓이 사용하는데 굳이 우리말에서만 이를 꺼리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_본문 385쪽 개불알꽃(복주머니란)

■ 식물과 가까워지는 가장 쉬운 방법
“식물의 이름을 알자. 왜 그런 이름이 붙었는지 알면 더욱 쉽다.”


“처음엔 그저 이름이 궁금했다. 눈에 띄는 풀, 꽃, 나무 사진을 찍어 식물도감과 비교해보곤 했다. 그러다 차츰 이름 유래에도 관심이 생겼다. 예를 들어 ‘바람꽃’이라는 꽃이 있다. ‘왜 이런 이름이 붙었을까’ 보니 학명에 ‘Anemone’라는 단어가 있었다. 그리스어로 ‘바람’을 뜻하는 ‘anemos’에서 유래한 단어다. 이 꽃의 영어 이름은 ‘wind flower’다. 학명과 국명에 전부 바람이 들어간다. 이런 걸 보면 또 궁금해졌다. ‘서로 다른 지역에서 동시에 이런 이름이 생겨난 걸까, 아니면 한 이름이 먼저 생긴 뒤 그 영향을 받아 다른 지역에서도 같은 이름을 붙인 걸까.’ 호기심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점점 더 많은 책을 뒤지게 됐다. 그 과정에서 『조선식물향명집』을 만났다. 일제강점기 책인데 라틴어, 일어와 함께 우리말 식물 이름이 적혀 있었다. ‘어떻게 이런 책이 나왔지? 그 엄혹한 시기에 우리 식물 이름을 찾아 정리한 사람은 대체 누구지?’ 궁금한 마음이 생겼다. 그렇게 또 공부가 이어졌다.”

위의 글은 이 책의 편저자 중 한 사람인 조민제가 한 인터뷰에서 ‘식물학에 대체 왜 관심을 갖게 됐는지, 무슨 까닭으로 이렇게까지 성실히 연구했는지’라는 질문에 답한 내용이다.
그렇게 처음엔 그저 이름이 궁금했고 차츰 그 이름의 유래에도 관심이 생겨 시작한 공부에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하게 됐다. 식물과 그 식물이 살아가는 모양이나 생태에서 아름다움을 느끼고 그 생태를 배워가는 식물 애호가들이었다. 아마추어인 그들이 『조선식물향명집』을 읽고 또 읽으며 자료를 모으고 협의와 토론을 거듭한 이유는 무엇일까?

바람꽃이라는 이름은 잎이나 꽃이 매우 가늘어 바람에 쉽게 산들거리는 데서 유래했다. 문헌상으로 『조선식물향명집』에서 최초로 등장하는 표현으로 보이며, 직접적으로는 바람에 어원을 둔 학명 Anemone에 착안해 붙여진 이름으로 보인다. 한편 『한불자전』과 『조선어사전』은 큰 바람이 일어나려고 할 때 먼 산에 구름같이 끼는 뽀얀 기운을 뜻하는 고유어 보통명사로서 ‘바람’(風花)을 기록했는데, 포 위의 흰색 꽃 모양이 그러한 형태를 띠므로 이 역시 바람꽃이라는 식물명이 형성되는 데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추정한다._본문 655쪽 바람꽃

『한국 식물 이름의 유래』 편저자들은『조선식물향명집』 주해서인 이 책을 통해 식물이 사람의 삶과 무관하지 않으며 이 땅 위에 같이 살아가는 생물이라는 점, 또한 언어 공동체로서 우리 민족의 역사와 무관하지 않다는 점을 일깨우고자 했다.

■ 우리 식물 이름의 뿌리를 알고 싶다는 절실함
『조선식물향명집』을 읽게 된 계기


이웃 나라 일본은 1940년대에 식물도감 기술의 한 부분으로 자국명(일본명)의 유래를 포함시켰다. 『마키노일본식물도감』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 식물명(한국명)을 도감이나 식물학 관련 문헌에 관행적으로 기재했을 뿐, 그 유래나 어원에 대해서는 깊이 다루지 않았다. 충분히 해설되지 못한 식물명의 빈 공간은 소위 민간어원설로 채워졌다. 즉, 이름이 생겨난 시대에 식물과 사람이 맺어온 관계와 언어 변화에 따른 역사를 추적하지 않고, 그저 현재의 관점과 언어로 얼기설기 엮은 해설이었다. 이 책의 편저자들은 우리 식물 이름의 뿌리를 알고 싶다는 목마름을 느꼈다. 이것이 『조선식물향명집』을 읽게 된 계기다.

■ 만 5년 6개월에 걸친 연구와 자료조사, 정리 그리고 3년에 걸친 편집
『한국 식물 이름의 유래』가 나오기까지


『한국 식물 이름의 유래』는 『조선식물향명집』에 표기된 식물명(국명)이 어떤 과정과 유래를 거쳐 형성됐는지 밝히고 『조선식물향명집』 발간 이후 현재까지 어떤 변화를 거쳐왔는지를 추적하는 것에 주된 목적이 있다. 이를 위해 이 책의 편저자들은 『조선식물향명집』 저술 당시의 과학으로서의 식물학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고, 그 이후 변화하고 축적된 국내외의 식물학 관련 연구 결과물을 수집하고 분석했다.
『조선식물향명집』의 저자들이 전국 각지의 식물 분포지를 찾아다니며 채록한 당시 조선인이 실제 사용한 이름을 이해하기 위해 당시 문헌과 식물 이름에 관한 방언, 그에 관한 기록물을 찾아 주요 도서관과 중고서점을 샅샅이 뒤졌다. 보충적 방법으로 사용한 옛 문헌상의 식물 이름을 확인하기 위하여 옛 문헌 자료를 검토했다. 관련성이 있는 경우 중국 문헌과 일본 문헌도 참고했다. 한국어, 옛말(고어), 영어, 라틴어, 중국어 및 일본어를 망라하여 검토했으며, 식물학, 역사학, 본초학(한의학) 그리고 언어학의 분야를 넘나들어야 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원전만 300여 권, 고서적부터 근래 출간된 도서, 인터넷 정보까지 참고한 자료만도 수천 권에 달해 그 양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편저자 6명이 각자 주된 연구 파트를 맡아 검증과 집필을 한 후 그 내용을 모아 함께 점검하는 과정을 거쳐 최종 집대성했다. 집필에 그치지 않고 마지막 최종 편집 과정까지 새로운 정보를 찾아 꾸준히 보강하며 정확도를 높이기 위해 애썼다.
편저자들이 이 책에 들인 시간만 만 5년 6개월, 별도의 편집 과정 3년까지 합치면 10년의 세월이 녹아든 책이다. 관련 자료를 찾느라 해외 도서를 뒤지고, 희귀본을 구하느라 책 한 권에 한 달치 월급을 다 쓰기도 했다. 편저자들의 서재엔 수를 헤아릴 수 없는 다양한 식물 관련 책과 각종 자료들이 넘쳐난다. 이사할 때 가장 골칫거리가 자료 도서일 정도다. 누구보다 식물을 좋아하고 더 알고 싶어하며 제대로 알리고 싶었던 아마추어들이 모여, 식물학계 전문가들도 시도하지 못했던 대작업을 시도해 한 권의 책으로 정리해낸 것이다. 한국식물분류학회 회장을 역임한 이우철 박사의 감수를 통해 책의 전문성을 높였다.

■ 『조선식물향명집』은 어떤 책인가?
식물도감을 향한 과학적 토대로서의 식물분류명집


『조선식물향명집(朝鮮植物鄕名集)』은 일제강점기인 1937년 조선인 식물학자 4명(정태현(鄭台鉉), 도봉섭(都逢涉), 이덕봉(李德鳳), 이휘재(李徽載))이 조선박물연구회에서 발간한 책으로 한반도에 분포하는 143과 684속 1,944종의 식물 이름을 기록한 식물분류명집이다. 조선인들이 조선명으로 된 식물도감을 만들기 위해 시작한 첫 걸음마이었다. 명실공히 우리 학자가, 우리 땅에 있는 식물을 근대 학문 체계에 맞춰 분류한 뒤, 우리말 이름을 적어 펴낸 사상 최초의 책이다. 여기에는 우리 땅에서 자라는 식물 1944종의 학명, 일본 국명, 조선 국명이 실려 있다. 학명에 근거해 식물명을 모아 기록했기에 본문은 라틴어 학명과 이에 대해 부여된 일본명, 실제 사용하는 조선명을 알파벳과 한글로 표기했다.

■『조선식물향명집』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근대 과학에 기초한 조선명(한국명)의 체계적 정립


『조선식물향명집』이 발간될 무렵 “내선일체로 일본과 조선이 한 나라인데 조선명을 새로 만들 필요가 어디 있느냐며 일제의 심한 제재가 있었으나, 당시 농촌에서는 일본어를 모르는 사람이 많으므로 이들을 교육하기 위해 일본어를 번역하는 것이라고 무마시켰다”라는 일화는 당시 시대 상황을 잘 드러낸다. 이처럼 『조선식물향명집』은 일제의 문화통치가 그 외피를 벗기 시작할 즈음이었던 1933년경에 저술을 시작해 일제가 중국 침략과 더불어 조선에서 일제에 반하는 사상과 조선어 사용을 사실상 제약했던 시점에 완성해 출간되었다.
그러므로 『조선식물향명집』은 국권 피탈의 고통 속에서 피지배민이라는 숙명을 벗어날 수 없었던 조선인 식물 관련 실무자와 학자가 식물 연구를 통해 민족적 정체성을 찾으려 한 과정이었다. 조선의 언중이 사용하는 실제 식물명을 찾아내는 과정에서 조선의 산림·문화·전통을 서로 연결 지었으며 동시에 근대 과학의 보편성을 수용했다. 식민성을 극복할 수 있는 자주적 과학 탐구의 씨앗이 된 연구였다. 『조선식물향명집』을 통해 비로소 과학이라는 토대와 전통을 계승한 식물명이 결합될 수 있었고, 그러한 노력의 주요 결과물이 수많은 변화를 거치면서도 현재의 식물명으로 이어지고 있다.

■ 『한국 식물 이름의 유래』 서술의 기본 방식과 특징
『조선식물향명집』에 실린 식물 1944종의 이름 각각의 유래를 설명하다


『조선식물향명집』의 저자들은 식물의 조선명에 대한 연구와 기록 작업을 가리켜 ‘명명(命名)’이라고 하지 않고 ‘사정(査定)’이라고 했다. 사정은 말 그대로 조사해 정하는 작업이다. 먼저 과학적 분류 방법을 습득하고 표본을 대조하며 확인하는 절차를 거쳤다. 그 이후 쓰이던 이름이 있는지를 확인했다. 식물 분포지를 찾아다니며 실제 사용하는 이름들을 조사했고, 『향약집성방』과 『동의보감』 등 옛 향약(鄕藥) 연구서들까지 검토했다. 그러면서 뛰어난 명명자들의 머릿속에서 창출된 고상하고 교양 있는 이름이 아닌 ‘공통 언어를 가진 사람과 식물이 맺어온 관계의 역사’를 온전히 드러냈다. 그렇게 기록된 식물명은 조선인이 조선어로 한반도에 분포하는 식물에 대한 이해와 맺어온 관계를 나타내는, 살아 숨 쉬는 언어가 되었다. 저자들이 『조선식물향명집』에서 사정한 이 방식이 바로 이 책 서술의 기본 방식이다.
이 책은 『조선식물향명집』에 실린 식물 1944종의 이름 각각의 유래를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조선식물향명집』 주해서’라는 부제를 붙였다. 식물 유래를 다룬 기존 문헌과 비교했을 때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조선식물향명집』이 식물명을 사정한 방식에 따라 식물명의 유래를 추적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사정에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자료와 문헌을 최대한 많이 수집하기 위해 노력했다. 특히 『조선식물향명집』이 저술된 일제강점기 당시 우리 민족이 사용한 식물명에 대한 기록이 있는 경우 그 저자가 조선인이든 일본인이든 관계없이, 또한 기존 식물학이나 국문학 관련 문헌에서 전혀 다루지 않던 것이더라도 광범위하게 수집하고 분석, 정리했다.
식물분류학 및 식물생태학에 근거하되, 어떤 식물명이 일제강점기 이전에 형성되어 유래한 경우 그 어휘적인 의미와 유래에 관한 국어학계의 연구 성과도 수용한 것도 이 책의 특징이다. 또한 『조선식물향명집』 이후 식물명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변화하는 과정에서 기존 분석과 검토 자료에서는 주요한 것으로 다루지 않았으나 현재의 식물명 표기에 상당한 영향을 남긴 식물학 논문과 문헌 역시 분석해 반영한 것, 북한에서 정립된 식물명의 경우 최종 이름만을 추적하는 기존 문헌과 달리 북한의 광범위한 식물학 서적을 추적하고 변화를 살폈다는 것도 이 책만의 특징이다.

등대풀이라는 이름은 꽃차례가 등대(燈臺)를 닮은 풀이라는 뜻에서 유래했다. 옛말 등대(燈臺)는 20세기 초반에 등대(lighthouse)를 건설하기 이전에는, 등잔을 받치는 대(등잔 받침대 또는 손잡이)라는 의미로 사용했다. 일제강점기에 저술된 『제주도및완도식물조사보고서』는 당시 제주도 방언으로 ‘トゥデクル’(도데쿨)이 있음을 기록했고, 현재의 방언 조사에서도 유사한 이름이 발견되는 점에 비추어 제주 방언을 채록한 이름으로 보인다. 한편 옛 문헌에 중국에서 전래된 한자명 澤漆(택칠)이라는 이름이 기록되었으나, 『동의보감』은 중국의 『신농본초경집주』와 『경사증류비급본초』의 영향을 받아 “此大戟之苗也”(이것은 대극의 어린싹이다)라고 기록해 택칠을 대극과 구별되는 별도 식물로 보지 않았다._본문 1087쪽 등대풀

■ 식물학계가 미뤄둔 오랜 과제 풀어낸 『한국 식물 이름의 유래』
식물 애호가라면 곁에 두고 펼쳐봐야 할 필독서


식물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곁에 두고 틈틈이 살펴봐야 할 필독서다. 식물 애호가라면 제각각 잘못 알고 있는 식물 이름의 근원을 알고 바로잡을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며 숲해설가나 식물을 사랑하고 더 알고자 하는 이들이라면 반드시 소장해야 할 책이다. 일반인들이 식물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해주며, 식물학 연구의 새로운 토대가 되어줄 책으로도 손색이 없다.
더불어 이 책은 과학으로서 식물학이 우리에게 정착하게 된 역사를 보여주는, 말 그대로 우리와 식물이 맺어온 관계를 알려주는 산증인이다. 한 권의 책 자체가 현대와 과거를 연결하는 하나의 가교인 셈이다. 식물학 전공자나 예비 전공자뿐 아니라 옛 언어와 방언을 연구하는 사람, 옛 한의학 서적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도 한번은 살펴봐야 할 관문이다.

■『조선식물향명집』 저자 소개

- 정태현(鄭台鉉, 1882~1971)
제1 저자 정태현은 『조선식물향명집』 저술 당시 조선총독부 산하 임업시험장의 하급관리였다. 1911년부터 한반도에서 식물 채집 활동을 시작해 1913년 일본인 식물학자 나카이 다케노신(中井猛之進)의 한반도 식물 조사의 안내역(통역)을 맡으면서 활동이 본격화되었다. 식물학 연구를 자신의 삶의 방향으로 택한 것과 관련해 “어떻게 하면 우리도 잘 살 수 있으며 한을 풀 수 있을까를 생각한 끝에 실학에 몸을 던졌고 이곳에서 자신이 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고심한 끝에 인간 생활에 가장 밀접한 식물학을 택했던 것이다”라고 회고한 바 있다. 첫 직장이었던 농상공부 수원임업사무소 기수(技手)직에서 일제의 강제병합 이후 단순 고용원으로 강등되었고 1931년 감봉과 촉탁(계약직) 발령의 수모를 겪었다. 사립학교 교원으로의 전업 등 다른 선택이 가능했음에도 식물 연구를 위해 42년간 임업시험장에서 하위직을 마다하지 않았고, 과학적 방법의 습득과 실천 그리고 전통적 문헌과 지식에 대한 연구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조선의 전통적 지식과 과학으로서의 근대 식물분류학을 결합시키려는 그의 노력은 최초의 저작인 『조선삼림수목감요』(1923)에 실제 민간에서 부르는 목본식물에 대한 조선명을 한글로 기록한 것을 비롯해 주요 저술의 식물명은 반드시 조선명을 함께 기록하는 것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당시 조선총독부 산하의 공무원 신분으로 조선인만으로 구성된 조선박물연구회의 활동에 참여했던 것은 민족적 자각과 소명 의식의 발로로 보인다. 『조선식물향명집』에 기록된 식물의 주요 표본 제공과 식별 그리고 수십 년에 걸쳐서 각지에서 조사 수집한 식물에 대한 향명과 옛 문헌상의 조선명 정리는 전적으로 그가 이루어낸 결실로 파악된다.

- 도봉섭(都逢涉, 1904~?)
제2 저자 도봉섭은 도쿄제국대학 의학부 약학과를 졸업하고 27살의 나이에 경성약학전문학교(현 서울대학교 약학대학)의 약학 교수가 된 당대 최고의 엘리트였다. 귀국 후 경성제국대학 약리학 교실에 있던 일본인 이시도야 쓰토무(石戶谷勉)와 대등한 위치에서 교류하면서 한반도 분포 식물에 대한 분류학적 기초를 익혔다. 『동아일보』가 민족주의 운동의 일환으로 주창했던 ‘과학조선’의 달성을 민족의 과제로 받아들이고, 일국의 산업 발달의 기초를 다지는 과학조선의 달성을 위해 “조선 산야에 분포되어 있는 식물을 완전히 조사해 인생과의 관계를 천명”하는 것을 자신의 소명으로 설정했다. 그러한 그의 인식은 조선인으로만 구성된 조선박물연구회의 참여로 이어졌다. 그는 자기 스스로 확인하지 않은 식물의 소개를 원칙적으로 배제하는 등 식물 연구에서 엄격한 과학적 태도를 유지했다. 『조선식물향명집』의 전체적 방향을 설정한 것은 그가 주도했던 것으로 이해된다. 수록 식물의 종수가 참여자가 함께 확인한 1,944종으로 그친 것과 각 식물명의 표제 부분에 조선 특산종에 ⓧ 표식을 일일이 단 것 등은 그의 기여가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부분이다.

- 이덕봉(李德鳳, 1898~1987)
제3 저자 이덕봉은 배화여자고등보통학교 박물(생물) 교사로서 상대적으로 나이가 많았던 정태현과 당시 젊은 세대인 도봉섭 및 이휘재를 연결하는 매개자로 조선박물연구회의 구성에 주도적 역할을 했다. 과학적 토대 위에 민족의 전통적 지식을 결합해 식물의 조선명을 정리하겠다는 생각은 그의 오래된 꿈이었다. 조선박물연구회의 구성과 관련해 “그들(일본인)을 따라다니다 보니 멋쩍은 생각이 들어 더 이상 조선박물학회에 더부살이를 하기가 싫었다”라고 했는데, 이는 과학 연구에서도 일본인과 조선인의 연구는 서로 다르다는 것에 대한 민족적 자각을 에둘러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산 식물의 조선명고」(1937)를 저술한 것에 비추어 연구 성과물을 정리하는 작업을 맡았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어학회와 교류가 깊었고 『조선식물향명집』의 한글 표기가 조선어학회가 발표한 1933년 『한글 마춤법 통일안』과 일치하게 하는 등 맞춤법 정리와 대외 관계 업무를 도맡았던 것으로 추정한다.

- 이휘재(李徽載, 1903~1986)
제4 저자 이휘재는 1926년에 수원고등농림학교 농학과를 졸업한 후 중동중학교 교원으로 근무하던 중 『조선식물향명집』의 저술에 참여했다. 『조선식물향명집』의 저술과 관련해 정태현을 조선박물연구회에 참여하도록 했으며, 편집과 출판 및 판매에 관한 일을 도맡아 처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