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가 호응얻는 이유. 임민혁 워싱턴 특파원
- ▲ 임민혁 워싱턴 특파원
최근 몇 달 사이에 미국의 시사잡지와 방송에서 '미국의 쇠락(American Decline)'을 주제로 한 특집을 본 게 대여섯 번은 넘는 것 같다. 포린폴리시·타임지 등은 이를 커버스토리로 다뤘다. 찢어진 성조기, 발목에 채워진 족쇄 때문에 날지 못하는 독수리, 늪에 빠져 허우적대는 엉클샘…. 이 주제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표현방식도 다양했다.
미국이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는 근거로 제시되는 것들은 서로 크게 다르지 않다. 주요선진국 중 하위권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과학·수학 성적, 9%를 넘나드는 실업률, 국내총생산(GDP)과 맞먹는 14조달러의 정부 부채, 세계에서 가장 높은 범죄율·비만율 등이 빠짐없이 등장한다. 여기에 중국의 부상(浮上)에 따른 상대적 영향력 감소, 미국의 국가 신용등급 전망을 낮춘 S&P의 결정까지 더해지면 미국은 '지는 해'를 넘어 '이미 진 해'처럼 보이기도 한다.
물론 이 같은 비관적 지표 뒤에는 항상 반론(反論) 성격의 희망적 근거들이 뒤따른다. 미국의 군사력은 다른 나라들과 비교가 의미 없을 정도로 압도적이고, 여전히 세계의 우수 두뇌들은 미국으로 몰려들고 있다. 세계 특허권의 절반이 미국 소유이고, 페이스북·구글·트위터·애플로 상징되는 혁신·도전정신도 살아있다. 1980년대에 일본에 1위를 내줄 뻔하다가도 결국 다시 반등에 성공했던 저력은 어디 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미국의 쇠락'이 과연 실체가 있는지, 있다면 어느 정도 심각한지에 대한 판단은 매체마다 차이가 있다. 하지만 이들이 공통으로 인정하는 부분은 미국민이 더이상 '1등'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며, 이에 따라 압도적인 선두만이 누릴 수 있었던 여유를 점점 잃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워싱턴의 한 보수 성향 싱크탱크 관계자는 "미국민들은 더이상 미국 정부가 모든 국제문제에 '정의의 사도(使徒)'를 자처하며 자신들이 낸 세금을 쓰고 다니는 것에 관대하지 않다"고 했다. "미국에 수입되는 모든 중국 제품에 25% 관세를 물려야 한다" "기름값이 뛰면 석유수출국기구(OPEC)를 때려야 한다" 등 아무런 근거 없이 모든 책임을 외국에 돌리는 도널드 트럼프의 단순·무식한 발언들이 은근한 호응을 얻고 있는 것도 이 같은 미국민의 심리를 반영하는 부분이다.
미국은 이미 정부 차원에서도 그동안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으로 기꺼이 짊어졌던 짐들을 다른 나라들이 나눠서 지길 원하고 있다. 리비아에 대한 군사개입 초기에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비용 문제'를 노골적으로 거론하고, "부담과 책임이 미국 혼자의 것이 돼선 안 된다"며 작전권을 나토에 넘긴 것은 이전의 미국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모습이었다.
한국을 비롯한 미국의 동맹국들은 앞으로 글로벌 이슈와 관련해 미국으로부터 더 많은 '청구서'를 받게 될 것으로 보인다. 한국이 국력이 커짐에 따라 국제사회에 대한 기여를 늘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다만 우리의 예상보다 그 시기가 조금 앞당겨지고 액수가 늘어날 수도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