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부, 명문고 지고 특목고 떠오른다
사법부, 명문고 지고 특목고 떠오른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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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서초구 서초동은 대한민국 법조 권력의 심장부이다. 사법부를 상징하는 대법원 청사와 검찰 권력의 상징인 대검찰청이 웅장하게 버티고 서 있다. 한국 사회에서 판사와 검사는 직업의 로망 또는 출세의 상징으로 통한다. 시대가 바뀌면서 법조 권력에도 지각 변동이 일어나고 있다. <시사저널>이 현직 판사 2천6백7명의 명단을 입수해 분석한 결과 판사들의 출신 지형도가 크게 바뀌는 것으로 나타났다. 전통적인 법조 명문고 출신들이 퇴보하는 현상이 확연하게 드러났다. 그 자리를 메운 것은 특목고 출신들이었다. 특히 외국어고 출신들의 사법부 진출이 두드러졌다. 지금까지 전통 법조 사관학교의 모델은 경기고가 전형이었다. 경기고는 판사 배출에서 부동의 1위 고교였다. 그러나 시대의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고교 평준화가 되면서 일반 고교들의 ‘명문 학교’ 진입 장벽이 허물어졌고, 학교별 실력 차도 줄어들었다. 이런 때에 영재 교육의 산실인 특목고가 등장했다. ‘성공의 등용문’이 된 특목고에 우수 학생들이 몰려들었다. 특목고 출신들이 사법부로 대거 진입하면서 ‘신법조 명문 학교’로 떠올랐다. 전체 판사들 중에서 외고 출신은 2백12명이었다. 여기에 과학고 26명과 국제고 1명까지 합치면 2백39명으로 특목고가 전체 법관 중에서 9.13%를 차지했다. 판사 열 명 중 한 명은 특목고 출신인 것이다. 연도별로 보면 그 차이를 뚜렷하게 알 수 있다. 특목고 출신 판사는 2001년 3명이었으나 2003년 13명, 2006년 25명, 2009년 38명으로 해마다 급증했다. 1위 대원외고, 2위 경기고에 두 배가량 앞서
하지만 불과 2년 만에 그 숫자는 더욱 벌어졌다. 1위인 대원외고(79명)가 2위인 경기고(39명)를 두 배가량 앞섰기 때문이다. 경기고는 각각 3, 4위인 한영외고(37명)와 명덕외고(32명)에도 바짝 쫓기고 있었다. 법조 명문 학교라는 말이 무색해질 정도였다. 해가 갈수록 1, 2위의 격차는 크게 벌어질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경기고의 2위 자리도 한영외고나 명덕외고 등에 빼앗길 가능성이 크다. 신규 판사에 대원외고 등 외고 출신이 많이 임용되는 반면, 경기고 출신들은 정년 퇴임이나 변호사 개업 등으로 현직에서 물러나면서 생긴 현상이다. 법조계에서 대원외고를 ‘뜨는 해’, 경기고를 ‘지는 해’로 보는 이유이다. 김창호 대원외고 교감은 “우수한 학생들이 많기 때문에 법조계로 많이 진출하는 것이다. 특별히 법조 분야로 진출하기 위해 학교에서 진로 지도를 하지는 않는다”라고 말했다. 올해 임용된 신임 판사들 중에서도 외고 출신이 많았다. 신임 판사(사법연수원 40기) 80명 중 외고 출신은 20명(25%)이다. 반면 경기고 출신은 한 명도 없었다. 대원외고 출신은 다섯 명, 한영·명덕·대일외고 출신은 각각 네 명이었다. 1999년부터 2009년까지 10년간 판사를 배출한 고등학교 순위에서도 경기고는 외고에 밀렸다. 대원외고가 64명을 배출한 데 비해 경기고는 15명이었다. 경기고는 한영외고(26명), 서울고·학성고(24명), 명덕외고(21명), 순천고(19명), 대전고(17명)에도 밀렸다. 최근 신흥 법조 3대 고교를 ‘대원외고, 한영외고, 명덕외고’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사법연수원이 생긴 이래 첫 만점으로 수석 졸업한 정현희 서울 동부지법 판사(연수원 38기)와 40기를 수석 졸업한 강인혜 서울중앙지법 판사도 각각 대원외고와 한영외고를 졸업했다. 이상돈 중앙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고교 평준화가 잘못되었다.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으로 하다 보니 그것이 오히려 특목고를 잉태하면서 새로운 부유층을 만들었다”라고 말했다. 비록 외고에 밀리고는 있으나 전통 명문고들도 죽지는 않았다. 전체 판사 숫자에서 경북고는 28명, 서울고·학성고는 27명, 전주고는 24명, 광주제일고는 22명의 판사를 배출했다. 특이한 것은 검정고시 출신들의 약진이다. 전체 판사 중 25명(0.96%)으로 8위에 올랐다. 올해 임용된 판사들 중에서도 세 명이 검정고시 출신이었다. 법조계에서 검정고시가 ‘숨은 명문고’로 불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렇다고 사법부 내에서 특목고 출신들이 주류라고 볼 수는 없다. 평판사는 많지만 아직 고위법관이나 중간 간부들은 전통 명문고 출신들이 차지하고 있다. 당장 일선 법원만 보더라도 부장판사급 이상에는 외고나 특목고 출신들이 한 명도 없다. 하지만 향후 5년 내에는 지형도가 바뀔 전망이다. 대원외고 1회 졸업생의 경우 올해 나이는 44세이다. 이들이 수년 후에는 사법부 내 주요 요직에 들어갈 것으로 보여 ‘특목고 천하’는 현실로 다가왔다.
법조계 일각에서는 특목고 출신들이 약진한 현상에 대해 걱정하는 목소리도 있다. 특목고 출신 판사들 대부분은 부유한 가정에서 사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일반 서민들과 단절된 상황에서 중산층 생활을 했기 때문에 ‘세상 물정’을 잘 모른다는 지적이다. 특목고의 선두 주자인 대원외고 출신들이 사법부 내 새로운 ‘이너서클’이 되지 않을까 우려하는 시각도 있다. 이상돈 중앙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옛날에는 가난한 가정의 학생들이 고학해서 판사가 된 경우가 많았다. 이런 법조인들은 우리 사회의 어두운 면도 많이 살폈다. 그런데 특목고 출신들은 유복한 가정에서 자란 사람이 대부분이다. 이런 엘리트 의식이 재판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법조계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전반에 걸쳐 특목고 출신들의 영향력이 커질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은재 국회법사위원(한나라당)도 “중산층 사교육을 받은 판사들이 많아지면서 편향적인 판결을 내릴 소지가 있다. 판사들이 균형 감각을 잃지 않도록 법원 내에서도 제도적인 뒷받침을 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현직 판사들의 출신 대학은 어떨까. 전국 2백1개 4년제 대학 가운데 판사를 배출한 대학은 41개 대학뿐이었다. 전체 판사들 중 서울대 출신은 1천5백23명(58.42%)으로 열에 여섯은 서울대를 나왔다. 가히 ‘서울대 천하’라고 할 만하다. 사법부가 ‘서울대 동창회’라는 말이 나오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 다음으로 고려대(4백11명), 연세대(1백73명), 성균관대(1백3명), 한양대(90명) 순이었다. 일명 ‘SKY’로 불리는 3대 명문대학(서울대·고려대·연세대) 출신이 2천1백7명(80.83%)에 달했다. 사법부에서는 ‘명문대 간판’이 없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정도이다.
시골 마을에서는 사법고시 합격자가 나오면 동네 어귀에 플래카드가 내걸리곤 했다. 이런 모습은 갈수록 보기 어려울 것 같다. 판사들의 출신 지역이 대도시로 몰리고 있기 때문이다. 판사들의 출신지에서 서울이 6백86명으로 압도적으로 많았다. 그 뒤를 이어 경북 2백50명, 전남 2백45명, 부산 2백18명, 경남 2백14명 순이었다. 해외에서 태어난 판사들도 일곱 명이나 있었다. 미국이 세 명이고 노르웨이, 타이완, 영국, 일본이 각각 한 명씩이다. 김현룡 사법연수원 교수는 일본, 이재경 부산지방법원 판사는 노르웨이, 현낙희 울산지방법원 판사·이현경 대전지방법원 판사·윤동연 의정부지방법원 판사는 미국 태생이다. 현낙희 울산지법 판사는 여성 판사로는 처음으로 2009년 8월부터 지난해 8월까지 구 유고슬라비아국제형사재판소(ICTY) 재판연구관을 지냈다. 현판사는 대원외고와 연세대를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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