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blog.daum.net·k2gim·
21세기에 웬 선비정신? 선비는 자신을 돌아보는 사람
굴어당
2011. 5. 10. 15:26
도산서원 체험수련 해보니
아직도 선비 정신이 유효한가? 서원·종택 답사하고 강의 듣고… 1박2일 짧은 일정이었지만 수료 후 떠날 땐 마음가짐 달라져
경북 안동의 '마지막 선비' 이야기를 들은 것이 2007년이었다. 그런데 얼마 전 도산서원 선비문화수련원은 새 원사(院舍)를 지었다. 찾는 사람이 많다는 말도 들렸다. 아직도 선비 정신이 유효한가. 1박2일 수련을 자원하고 2일 안동으로 향했다.길은 멀었다. 서울에서 KTX로 동대구역까지 1시간 40분, 버스로 안동까지 1시간 20분. 다시 차로 40분을 더 달렸다. '안동소주' '간고등어' 간판 사이로 '대한민국 정신문화의 수도'란 글씨가 보이는가 싶더니 도산서원(陶山書院) 입구가 나왔다. 퇴계 이황(李滉·1501~1570) 선생이 만년에 학문에 힘썼던 곳, 영남 유림의 본산이자 선비정신의 수원(水源)이다. 수련의 시작은 퇴계(退溪)였다.
- ▲ 도산서원 선비문화 체험수련 입교식은 서원의 강당 격인 전교당에서 전통 복장을 입고 진행된다. 2일 입교한 남부발전 여직원들과 본지 전병근 기자(왼쪽 앞줄)가 별유사(別有司;서원의 살림을 총괄하는 사람)로부터 설명을 듣고 있다. /안동=이덕훈 기자 leedh@chosun.com
"과거 400년간 여성은 이 위로 올라오지를 못했어요." 마침 남부발전 여직원 37명이 입교하는 날이었다. "작가 모윤숙 선생도 퇴계 알묘(謁廟·위패 참배)를 간청했지만 퇴짜를 맞고 울고 갔습니다. 시대는 바뀌었습니다." 황색 도포에 갓을 쓴 김종길 수련원장의 축사가 사립문 밖까지 울렸다. 서원의 강당 격인 전교당(典敎堂)에 정렬해 있던 입교생들은 한복 차림으로 퇴계 알묘까지 마쳤다. 하지만 '이런 의례로 선비정신이 살아날까' 의구심은 가시지 않았다.
실마리는 퇴계 종택(宗宅) 답사 때부터 조금씩 풀렸다. 오래된 기와집 앞엔 개울이 흘렀다. '퇴계(退溪)'다. 이황 선생은 46세에 벼슬을 뒤로하고 이 시내(원이름이 토계·兎溪) 옆 고향집으로 돌아온 후 '퇴계'를 아호로 썼다. 물가엔 그의 시를 새긴 돌이 있었다. "몸은 물러나서 어리석은 분수에 마음 편하나/ 학문은 퇴보하여 늘그막이 걱정이더니/ 토계 물가에 비로소 거처를 정하고/ 시냇물 흐르는 옆에서 날마다 성찰을 하네."
◆"이육사 抗日 바탕도 선비 정신"
솟을대문을 지나자 16대 종손 이근필(80)옹이 마루 위에서 인사했다. 흰 두루마기 차림의 어르신은 낯빛이 밝고 얼굴주름이 고왔다. "편히들 앉으세요. 저는 이 자세가 편하고 허리에도 좋아요." 그는 무릎을 꿇은 채 객을 대했다. "퇴계 어른 이야기는 않겠습니다. 조상 자랑으로 들릴까 해서입니다." 대신 조선 성종 때 벼슬 진급을 알선하려던 사람에게 오히려 매질을 했다는 청백리 등 선비 미담을 들려줬다. 그가 작은 선물이라며 글이 적힌 종이를 꺼냈다. 퇴계의 '수신십훈(修身十訓)'. 재작년 101세로 작고한 선친이 100세 때 쓴 글씨라 했다. 첫째가 입지(立志)다. "뜻을 세움에는 마땅히 성현을 목표로 하고 털끝만큼도 못났다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강의는 수련관에서 이어졌다. "선비란 학식과 인품을 두루 갖춘 사람을 뜻합니다. 청렴과 도덕을 중시하고 명분이 뚜렷한 것은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실행했지요." 김병일(66·한국국학진흥원장) 이사장은 "물질적 성장 뒤에 내면은 황폐해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선비정신"이라고 했다.
다음날 인근 이육사(1904~1944) 문학관을 찾았다. 육사는 퇴계의 14대손이다. 조영길 관장이 연단에 섰다. "육사는 40세에 일제 감옥에서 숨질 때까지 독립운동에 헌신하면서 17회나 옥고를 치릅니다. 자신의 시마저 민족독립을 위한 실천의 방편이라 했지만 그는 문학사적으로도 거인이었지요. 그 지행합일(知行合一)의 바탕이 선비정신이었습니다." 이 외진 고장에 의병과 독립운동가가 유독 많았던 이유이기도 했다.
◆"옛 사람 못뵈도 가던 길 앞에…"
1박2일은 짧았다. 수백 년 온축된 정신의 높이를 단기에 오르려는 자체가 애당초 무망한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곳에 들 때와 날 때 마음의 어떤 차이가 느껴졌다. 이를 '감화'라 부를 수 있다면 그 힘의 8할은 퇴계라는 거인의 자취에서 나온 것이었다. 유서 깊은 서원과 종택, 유적을 보고 걸으며 일화에 귀 기울이다 보면 어느새 선생의 문하에 든 듯했다. 투박하지만 진솔한 원로들의 말씀이 내려앉는 곳도 머리가 아니라 가슴이었다. '늘 자신을 돌아보고 최선을 다하며 남을 배려하라.'
수료증에는 '522-31991호'라고 적혀 있었다. 522기 3만1991명째란 뜻이다. 떠나는 길 다시 한번 '퇴계' 앞을 지났다. 물소리는 여전했다. 70세에 운명을 예감하고 앉은 채로 숨 거둘 때까지 영정 하나 남기지 않았던 사람. 임금을 가르친 당대 최고의 석학이면서도 자신이 죽으면 작은 돌에 '늘그막에 도산으로 물러나 은거한 진성이공의 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고만 쓰라 했던 사람. 돌아오는 길 그의 시 한 구절을 되뇔 수밖에 없었다. "옛사람 날 못 보고 나도 옛사람 볼 수 없건만/ 옛사람 못 보아도 가던 길 앞에 있네/ 가던 길 앞에 있으니 아니 가고 어쩌리"('도산십이곡' 중).
-
- ▲ 2일 경북 안동 도산서원에서 제522기 '선비문화 체험 수련 교육과정' 참가자들이 교육을 받고 있다. 도산서원 선비문화 체험과정에서는 상읍례, 알묘례 등 도산서원 전통의례를 직접 체험하고 퇴계사상에 대한 강의도 듣는다./이덕훈 기자 leedh@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