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운석(雲石) 장면(張勉).주미대사 때 한국전쟁 UN 회원국 돌며 파병 호소 제2共 내각제 총리 역임
4·19혁명 주도 민주정치 지도자로 쿠데타에 밀려나 불운한 마감
전차표 하나도 공사 구분 가톨릭 사립학교서 17년 근무
일본어 시험 거부한 김수환 추기경 유학 주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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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hoto 윤석회 |
운석은 1899년 8월 28일 서울 삼군부(三軍部) 뒷골(지금의 종로구 적선동) 외갓집에서 장기빈(張箕彬)과 황루시아 사이에 3남4녀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선대는 인동(仁洞) 장씨 개옹공파로, 8대조 장익붕이 안동에서 처가가 있던 평안도 성천으로 이주했다. 고조 장인각이 평남 중화로 이거한 이래 이 지역에 자리잡는다.
부친 기빈은 아들 3형제의 집을 손수 장만해 줄 만큼 상당한 재산을 모았다. 또한 손자대의 미래 학자금을 위해 지금은 북한 땅인 강원도 통천 근처에 수십만 평의 땅을 사서 잣나무 묘목 수백만 그루를 심었다고 한다. 기빈은 아들 3형제가 어릴 적에 직접 아호를 지어주었다. 장남인 면은 운석, 차남 발(勃)은 우석(雨石), 막내 극()은 하석(霞石)으로 모두 비 우(雨) 자를 넣었다.
가톨릭 집안에서 성장
고향에서 한학을 익히던 장기빈은 1894년 인천에 사는 친척을 만나러 갔다가 외국인을 보고 ‘외국어 공부를 해야겠다’고 결심, 이듬해 한성외국어학원에 들어갔다. 장기빈은 1896년에 천주교에 귀의하며, 다음해 평양 외성 8대가의 한 사람인 천주교인 황성집의 차녀 루시아와 결혼한다. 그는 제물포 해관(지금의 세관)에 등용돼, 탁지부(지금의 기획재정부) 주사까지 승진했으나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자 사직한다. 이어 30여년간 스탠더드 오일 인천 대리점, 영국 런던에 본점이 있는 타운센트회사 등에서 무역과 보험 업무에 종사한다. 그는 영어 외에 일본어·중국어·러시아어에도 능통했다. 장면의 회고에 의하면 자신이 미국 유학에서 귀국해 부친을 뵈니, 자기보다도 영어를 더 잘했고 문장 또한 명확했다고 한다. 운석 역시 미국인도 놀라는 고급 영어를 구사하는 실력자였으니, 부친의 실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실감할 수 있다.
“이러한 가정적 배경은 운석 선생을 비롯한 슬하의 3남3녀 모두가 일본과 구미에 유학해 근대 교육을 받아 각계의 전문가로 성장하는 한편, 충실한 신앙 생활을 영위하며, 타인과 사회를 위해 봉사하는 인물들로 살아가게 만들었다고 여겨진다.”(‘장면’, 하동현)
장기빈의 차남 발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인 고희동의 제자로, 우리나라의 성화를 개척한 선구적 화가로 손꼽힌다. 1920년 우에노미술학교에 다니다 도미해 뉴욕의 내셔널 디자인 아카데미를 거쳐 1925년에 컬럼비아대 미술학과를 졸업했다. 명동성당의 제대(祭臺) 뒷면에 있는 ‘14종도상’이 그의 대표작 중 하나다. 자신이 설립한 서울대 미대의 초대 학장을 역임했다. 장기빈의 3남 극은 세계적으로 저명한 항공공학자로 유체역학 분야의 독보적 존재였다. 1933년 경성제대 의과 본과 2년 때 항공공학으로 진로를 바꾸기로 결심하고, 독일에 유학하여 1940년에 베를린대 공대를 졸업했다. 독일의 유수한 항공기 생산업체인 시벨과 다임러 벤츠의 엔진공장에서 엔지니어로 근무, 세계적 항공학자로 성장했다. 그의 저서 중 1970년 영어로 출판된 ‘유동(流動)의 박리(剝離)’는 소련이 러시아어로 번역하여 전국 항공공학과의 교과서로 사용했으며, 동구권과 스페인에서도 번역된 항공공학의 필독서로 꼽힌다. 장기빈의 차녀 정온은 평양에서 ‘영원한 도움의 성녀수도회’ 초대원장으로 일하다 6·25전쟁 중 순교했다.
9살 때 혼자 ‘단발’ 감행한 말썽쟁이
장씨 일가를 지배하는 큰 흐름은 가톨릭이다. 장기빈도 세례(세례명 네온)를 받았음은 물론, 자손 중에서 주교와 신부 한 명, 수녀를 배출하는 가톨릭 가문을 이루었다. 정부 수반이었던 운석마저도 정치인이라기보다는 성직자의 풍모를 물씬 풍겼다.
운석은 1906년 인천 박문학교에 입학하여 동몽선습, 대학, 통감 등 한학과 산술 등 신학문을 배운다.
“그때는 아직 어릴 때라 매일 아침 어머니가 머리를 빗겨 주시는데 여간 귀찮지 않았고, 나도 왜 그런지 머리 땋고 다니기가 싫어서 때마침 인천에 처음으로 이발소가 생겨 머리를 자른다기에, 부모님 승낙도 없이 혼자 가서 머리를 싹 잘라 버렸다. 자른 머리를 들고 집으로 돌아왔더니 어머님은 깜짝 놀라 질겁을 하시며 역정을 내시어, 나는 혼이 나서 울기까지 하였는데, 이것이 아홉 살 때 일이다.”(‘한 알의 밀이 죽지 않고는’, 장면 박사 회고록)
부친이 장난이 심한 아들을 계도하기 위해 어느날 이름을 ‘힘쓸 면(勉)’으로 지어 주었다. 모친은 구운몽·삼국지 등 고전소설을 외우다시피 탐독하였으며, 훤칠한 키에 여행을 즐긴 활달한 여성이었다. 박문학교 고등과를 졸업한 운석이 상급 학교로 진학하려 했을 때 어리다고 모두들 받아 주지 않아 수원농림학교에 겨우 원서를 접수했다. 지원자 1000여명 중 40여명을 모집하는 데 끼어 간신히 입학하였다.
“이때의 농림학교는 지금의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전신으로 관비학교였으므로, 매월 5원씩 급여해 주는데 기숙사에 3원50전을 내고 1원50전을 쓰게 됨으로 여간 편리하지 않았으며,나는 수염이 덥수룩한 어른들 틈에 끼어 귀여움도 받고 괴로움도 받으며 공부에 열중하였다. 농업학교는 당시 실질적으로는 전문학교 정도의 수준으로 우리는 임학·농학· 축산학·양잠학 등 농림 부문 전반에 걸쳐 배우면서 여름 방학도 없이 실습이라고 하여 밭도 매고, 논도 갈고, 모도 심고, 때로는 똥통도 지고, 거름도 퍼 나르며, 어지간한 농사꾼이 되었다.”(‘한 알의 밀이 죽지 않고는’)
운석은 1916년 5월 20일 서울 중림동에서 미곡상을 경영하는 김상집의 막내딸 김옥윤(金玉允)과 결혼한다. 결혼 당시의 상황이 담긴 조경희씨와의 인터뷰 대목이다.
문: 그때 얼굴을 보셨지요?
답: 어딜? 판자가 가로막혀 있으니까 서로 손만 앞으로 내밀고 악수를 하는 거지. 결국 결혼식이 다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서 겨우 힐끗 쳐다봤어.
문: 그때 감상은 어떠셨어요?
답: 그건 얘기하기 곤란한데.(웃음)
문: 좋으셨죠?
답: (껄껄 웃고 만다.) 그런데 결혼을 하고서도 신부의 얼굴을 제대로 기억할 수 없었단 말이거든.
문: 설마 그러실라고요?
답: 정말입니다. 내 안식구에게 가만히 가서 물어보구려.(웃음) 그때만 하더라도 가정에 대한 예의 범절이 퍽 엄해서 신부는 시아버지나 시어머니 앞에서는 신랑을 보더라도 얼른 외면을 해야 하니까 얼굴을 볼 수 있어요?”(‘장면’)
앞에선 채찍, 뒤에선 지지
운석은 1917년 수원농림학교를 졸업하고 YMCA 영어과에 입학하며 1920년 최우등으로 졸업한다. 이어 도미 유학을 한다. 미국에서는 약 반년간 예과에서 영어를 더 배우고 뉴욕 맨해튼대학에 입학하여 교육학을 전공한다. 5년간의 유학을 마치고 1925년에 미국을 떠나 로마에서 열린 한국 순교자 시복식(諡福式)에 한국 가톨릭신도 대표로 참석한 후 귀국한다. 이어 평양교구로 가서 메리놀 센터 하우스의 어학 교수로 부임하며, 평양천주교 청년회장 등으로 활약하다가 1931년 서울 동성상업학교 교사로 일한다. 1933년에는 정지용·이동구 등 문인과 한국문화운동사에도 한 획을 그은 ‘가톨릭 청년’(월간)을 창간한다.
1936년 운석은 동성상업학교 교장에 취임한다. 동성학교에서 17년간 고 김수환 추기경, 고 노기남 대주교, 전예용 전 공화당 의장 등 숱한 제자들을 키워낸다.
“가톨릭계 사립학교라고는 하지만 당시 정부는 엄연히 총독부 아닙니까? 행정지시를 받게 되어 있었지요. 가톨릭 당국에서도 일단 순응하지 않으면 이 땅에 발을 붙일 수가 없으니까요. 그때 ‘황국신민으로서의 소감을 말하라’는 제목으로 일본어 시험 답안을 쓰게 되었는데 학생이었던 김수환 추기경이 백지 답안을 냈다고 해요. 선친께서는 일단 책임자니까 엄하게 야단을 치시고 하니 아마도 김 추기경은 퇴학당하실 줄로 아신 모양이에요. 그런데 뜻밖에도 일본 조지(上智)대학으로 유학을 다녀 오시게 됐으니 어리둥절하셨겠지요. 겉으로는 처벌 대신 야단을 치시고는 오히려 그런 기개 있는 학생을 지도자로 키워야 한다’며 막후에서는 가톨릭 당국에 적극 유학을 주선하신 것이지요. 김 추기경께서 평생 고마워하셨지요. 그런 내막을 모르고 겉으로만 보고 일부 사람들이 친일 운운하니 참으로 답답하지요. 또 공사 구분도 명확히 하셨지요. 전차표 한 장 쓰는 데도 공과 사를 가리셨으니까요. 그때는 지금과 달리 전차에서 내릴 적에 표를 내게 되어 있었지요. 그러니까 만원일 경우 그대로 밀려나와 표를 내지 못하는 때도 있었지요. 선친께서는 꼭 전차표를 그 자리에서 찢어 없애버리셨지요. 학교에도 일절 오신 적이 없어 좀 서운했는데…. 내가 학교 교장인데 자식 학교에 가는 것이 역시 맞지 않는다는 것이지요.”(4남 익씨)
구 정권의 잔재를 쓸어라
광복 이듬해 운석은 천주교 대표로 미 군정 자문기관인 민주의원 의원에 임명된 데 이어 입법의원 의원으로 지명된다. 그는 주로 좌익과의 투쟁, 군정 당국과의 절충, 미·소공동위원회에 대한 정책 수립 등에 전념하며, 1948년 5월 10일 총선거에 종로을구에서 출마하여 제헌국회의원으로 당선된다.
“이 제헌국회야말로 신생 대한민국이 민주주의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터전을 닦게 한 것이었다. 사실 이 제헌국회가 생김으로 해서 오늘의 한국이 이루어진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헌법을 만들고 대통령을 선출하였다. 그때의 기쁨은 8·15 광복날의 기쁨에 못지않은 것이었다.”(장면 ‘내가 걸어온 길’, ‘희망’ 1957년 1월호)
운석은 이해 8월 유엔 총회 파견 대한민국 대표단 수석대표로 선임된다. 차석에 장기영, 고문 조병옥·김우평·전규홍·김활란·정일형·모윤숙 등 쟁쟁한 멤버였다.
“국제 외교무대에 처음 나서는 우리는 모든 것이 낯설고 유엔 총회에 모인 세계 열강 외교단들에게 우리의 실정과 승인의 필요성을 납득시키려니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하루는 우리 일행이 헤이그의 이준 열사 묘지를 참배하고 돌아가서 설복하여, 드디어 제3차 유엔 총회 마지막 날 밤의 최종 안건으로 국제 승인을 획득하게 되었다. 이날의 나의 감격은 일생을 두고 잊지 못할 만큼 큰 것이었다.”(‘한 알의 밀이 죽지 않고는’)
그후 운석은 다시 대통령특사로 바티칸의 교황 비오 12세를 알현하고, 미국에 와서 1949년 정초 트루먼 대통령의 한국 승인 성명발표를 들으면서, 초대 주미대사로 임명되었다는 전문을 받는다. 1950년 북한이 남침하자 운석은 미 국무성과 대통령을 순방하면서 구원을 요청하고, 유엔의 민주 우방 대표들에게 눈물의 호소를 하면서 구국 활동에 나선다. 이해 11월 28일 운석은 국무총리에 지명되어 국회의 인준을 받는다.
“6·25전쟁을 맞아 그의 정치적 신념인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미군이 파병되도록 하는 데 힘을 보탰으며, 1951년 초 국무총리로 임명되어 귀국하기까지 주미대사로서 유엔군 총사령부 설치, 대한(對韓)구호안 가결, 안보회의 참석 활동, 대본국 방송 계속, 가톨릭 교회를 통한 구호금품 급송 추진 등 전쟁에서의 승리와 전쟁으로 인한 국민의 고통을 줄이기 위한 맹렬한 외교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대한민국을 세운 사람들’, 일조각)
이후 발췌 개헌안 등 이승만 대통령과 자유당 독재정치가 가열화되면서 운석은 1955년 민주당 창당에 참여하여, 신익희·조병옥·곽상훈·박순천과 함께 최고위원으로 선출된다. 이듬해 대선에서 신익희 대통령 후보와 러닝메이트로 부통령 후보가 되나 신익희의 급서로 우여곡절 끝에 자유당의 이기붕을 누르고 부통령에 당선된다. 부통령에 취임한 그는 그해 9월 29일 명동 시공관에서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총상을 당했다. 정권교체를 위해 값비싼 대가를 지불했던 것이다. 1960년의 대선에서도 그는 표면상 이기붕에게 진 것으로 공표되었지만, 결국 부정선거에 대한 민중 봉기를 이끌어 이승만을 하야시켰다. 4·19혁명 후 재구성된 국회(민의원)의 제2공화정 내각제 총리 선거에서 신파 민주당 대표인 운석은 2표를 더 얻어 극적인 집권에 성공한다. 따라서 그는 구파 출신의 상징적 대통령 윤보선과 국군통수권 문제와 거국내각 문제로 암투를 벌였으며 민주당 구파로부터 끊임없는 공세에 시달렸다.
“야당의 선봉 역할을 하던 당내 소장파로부터의 불만도 만만치 않았다. 집권 8개월 동안 내무장관을 네 번, 국방장관과 육군총장을 두 번이나 바꿨다. 구 정권의 잔재를 쓸어내고 새로운 민주제도의 기둥을 박는 일이 시급했다. 가난에 허덕이는 사람들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는 것도 시급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압제에 억눌린 사람들에게 정치적 자유를 주는 일은 민주당 정부가 외면할 수 없는 필수의 과제였다. 민주당 정권은 이승만의 강력한 통제에 익숙해 있던 군이나 경찰의 실정을 파악할 겨를이 없었다. 온갖 대모가 자유라는 바람을 타고 민심을 뒤흔들었다.”(‘한국을 바꾼 100인’ 월간중앙 1995년 신년호 별책부록)
제2공화정 각료들 신앙으로 이끌어
- ▲ 선친에 대해 얘기하고 있는 4남 장익 주교.
국무총리 운석은 1961년 5월 16일 새벽 공수부대가 그의 숙소인 반도호텔(지금의 롯데호텔 자리) 809호실을 덮치기 불과 몇 분 전에 황급하게 지프로 탈출하여 혜화동의 수녀원에 잠적했다. 이틀 후 그는 중앙청 총리실에 끌려와 ‘금번 군사사태의 발생에 대하여 정치적·도의적인 책임을 통감하고 불법적인 비상계엄을 추인하고 내각 총사퇴한다’는 성명을 내고 ‘불운한 정치가’로 마감했다.
정계 은퇴 후 운석은 본연의 가톨릭 신앙인으로, 제2공화정의 각료들 대부분이 독실한 신앙을 갖게 한다. 운석은 1966년 6월 4일 서울 명륜동 자택에서 별세하여, 국민장으로 경기도 포천군 칠보산 기슭 천주교 묘지에 안장된다.
운석은 김옥윤과 사이에 9남매를 낳았다. 장남 영씨는 일찍이 별세했고, 차남 진(84·미 프린스턴대 생물학 박사)씨는 서강대 부총장을 지낸 저명한 세포생리학자로 김종숙(77·이화여대 영문과 졸업)씨와 결혼했다. 3남 건(79·미 일리노이주립대 건축학 석사)씨는 경향신문 사장을 지낸 한창우씨의 딸 광희(76·조지언코트대 졸업)씨와 결혼하여 윤(41·가톨릭대 건축과 졸업)씨를 두었다. 4남 익(77·미 메리놀대, 벨기에 루벵대, 오스트리아 인스브르크대, 대만국립대 졸업)씨는 1994년 주교로 승품돼 한국인 최초로 춘천교구장에 임명됐으며 영어·프랑스어·독어·일본어·중국어·이탈리어는 본토인 수준이고 그리스어· 라틴어·아랍어·스페인어도 수준급이다. 5남 순(75·조지타운대 정치학 박사)씨는 보스턴 리지스대 교수와 베이징대 초빙교수로 중국 개방에 기여했으며 독일인 아나리사 훼르스트와 결혼하여 인(44·매사추세츠주립대 졸업)씨와 현(36)씨 형제를 뒀다. 6남 흥(72·파리신학대 졸업)씨는 프랑스은행인 방크내셔널드파리의 임원을 지냈으며 프랑스인 마리 오딜 오베르(63)와 결혼하여 네 아들을 두었다. 훈(40·토목공학)·문(37·경영학)·원(35·화공학)씨는 프랑스에서, 은(29·음향공학)씨는 스페인에서 살고 있다. 운석의 2녀 의숙(81·분다, 워싱턴 가톨릭대 석사)씨는 수녀로 미국에서 살고 있으며, 3녀 명숙(작고)씨는 공영길(78)씨와 결혼하여 3남매를 두었다. 큰 딸 은혜(39·재미)씨와 아들 요한(36)씨는 변호사, 작은 딸 은영(35)씨는 회계사이다.
내가 본 운석 장면 허동현 경희대 교수ㆍ한국사 민주화 시대의 격랑 속을 살아온 세대에게 운석 장면 선생은 남다른 감회를 불러일으키는 민주지도자이다. 더구나 해방 공간의 혼란을 딛고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게 한 유엔 승인 과정과 6ㆍ25전쟁에 유엔군 참전을 이끌어낸 운석 선생의 구국활동은 우리 역사 속에 큰 업적으로 기록될 것이다. 선생은 일제하에서는 민족의 인재를 키워내는 교육활동과 종교운동에 헌신하셨다. 광복 후에는 신생 조국에 대한 국제적 승인과 유엔군의 6·25 참전을 이끌어내어 국가의 기틀을 세우고 자유당 독재체제에 맞서 진정한 자유민주주의 이념을 구현하는 데 신명을 바쳤다. 그분은 우리에게 자유민주주의 시대로의 길을 열어 준 실천적 선각자임에 틀림없다. 그리하여 오늘의 우리가 다원적 시민사회를 건설하고, 민간 자율의 시장경제로 번영하게 된 밑거름이 된 것이다. 운석 선생이 선도한 자유민주주의와 자율을 바탕 삼은 시민사회의 경험은, 어둡고 긴 군부독재의 터널을 지나오는 동안 한국 민주주의 운동이 지속하도록 이끈 희망의 동력이었다고 생각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