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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의 고향 廣東. 중국근현대사기행 ⑤
굴어당
2011. 5. 13. 23:11
⊙ 일찍 개방한 광동인들, 손문의 혁명정권 후원
⊙ 삼원리 抗英기념비, 대원수부, 중산기념당, 광주기의열사능원, 황포군관학교 등 중국혁명
관련 유적들 산재
⊙ “‘전쟁의 함성’이 들리지 않는 곳에서, ‘태평의 시대’라는 소리에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投槍을
치켜드는, 결국 극한까지 달려 ‘태평의 가면’을 향해 창을 던지는 이가 바로 전사다”(魯迅)
⊙ 삼원리 抗英기념비, 대원수부, 중산기념당, 광주기의열사능원, 황포군관학교 등 중국혁명
관련 유적들 산재
⊙ “‘전쟁의 함성’이 들리지 않는 곳에서, ‘태평의 시대’라는 소리에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投槍을
치켜드는, 결국 극한까지 달려 ‘태평의 가면’을 향해 창을 던지는 이가 바로 전사다”(魯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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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 장개석에게 희생된 공산주의 혁명가들을 기리는 광주기의열사능원. |
다 맞는 말이다. 중국에서는 “중국 땅이 넓은지 알려면 신강(新疆)에 가 보고, 중국이 얼마나 부유한지 알려면 광동에 가 보라”는 말이 있다. 광동 이외의 지역을 여행할 때, “광동 사람들은 돈을 쓸 줄 안다”, “광동 사람들은 예의가 있다” 등등의 말을 종종 듣는다. 하다못해 옷이라도 좀 깨끗하게 입은 사람, 혹은 유행을 따른 머리 모양을 한 사람은 “광동 사람이냐?”는 질문을 받는다.
필자도 광동을 여행하면서 느끼는 점이 몇 가지 있다. 광동성의 성도(省都)인 광주에 갈 때마다 거대한 잡탕 도시라는 느낌을 받는다. 거리에 넘치는 다양한 인종들, 특히 흑인들이 눈에 띈다. 택시 기사는 “광동에는 아프리카계 흑인들이 많이 와요. 여기서 사업을 벌이는 거죠. 한 번 들어오면 돌아가지 않는다”고 말한다.
지금은 대단히 많이 정비되었지만 광주역에 들어서면 또 다른 신천지를 만나게 된다. 도대체 어디에서 이렇게 많은 인간들이 모이게 되었을까? 역사와 광장을 빼곡히 메운 거대한 민중의 물결. 못 알아듣는 남방 방언에서, 그런대로 익숙한 하남(河南)·사천(四川) 방언, 북방계 사람들, 심지어 서쪽 끝의 위구르인들까지 모여들어 마치 언어의 전시장을 보는 느낌이다.
전국 어디에서든 남쪽으로 가는 열차를 타면 광동으로 간다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모두들 자기 나름의 꿈을 안고 남쪽으로 떠난다. 한반도 전체보다 약간 작은 땅에 상주(常住)인구 1억이 모여 있는 곳. 사실 상주인구 통계는 무의미한 것인지도 모른다. 필자처럼 인구통계에 잡히지 않고 광동의 곳곳을 돌아다니는 인구는 또 얼마나 되겠나. 광동의 무엇이 사람들을 끌어들이는가?
개혁·개방의 시험장
1979년 등소평(鄧小平) 주도의 중국공산당중앙위원회(흔히 당중앙이라 불린다)는 심천(深?)·주해(珠海)·산두(汕頭)·하문(廈門)을 경제특구로 지정했다. 최초의 경제특구 중 하문을 제외한 세 도시가 광동성에 위치하고 있다. 항구, 배후 인구, 화교(華僑)자본 등 경제성장에 이용할 수 있는 것이 충분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하여 이른바 개혁개방 정책에서 광동은 개방의 실질적인 시작점이 되었다. 그후 중국은 오늘날까지 달려왔고 이제는 세계경제에서 무시 못할 실력자로 성장했다.
그러나 광동이 개방구로 선정된 데는 경제적인 이유만 작용했을까? 필자의 판단으로는 정치적인 이유가 더 컸다. 20세기 초부터 장강(長江)삼각주의 중심지역(상해, 소주·蘇州, 항주·杭州)은 줄곧 주강(珠江)삼각주의 광동지역을 경제적으로 능가했다. 중국이 단지 더 큰 성장잠재력을 이끌어 내려고 했다면 경제중심지인 상해에서 개방을 시작하는 것이 나았을 것이다. 그러나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널 정도로 극도로 신중한 등소평은 그런 모험을 할 사람이 아니다. 문화대혁명 직후 혼란의 와중에서 장강 하구의 경제중심지들을 기반으로 과감한 실험을 할 생각은 없었던 것이다. ‘먼저 실험해 보고, 성공하면 확대한다’는 것이 그의 확고부동한 태도였다.
왜 광동에서 먼저 시작하는가? 광동은 이미 개방에 물든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이었다. 그곳은 개방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다는 압박감이 가장 강한 곳이었다. 바로 바다 건너 홍콩을 바라보고 있는 지역이었다. 그리고 광동은 여전히 변방이었기 때문이다. 변방에서는 실험이 가능하지만 중심에서의 실험은 위험하다.
18세기 중반에서 20세기 초까지 개방과 혁명의 역사를 이끌어 갔던 곳은 바로 광동이다. 대외(對外) 무역을 담당하던 광동의 상인(買辦)들은 열강(列强)에 기대어 돈을 벌었지만, 그 돈은 혁명 열기의 불쏘시개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