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 기획 시리즈 / 신 인맥 지도 | 경기 수원
경기의 중심’에서 세상을 외치다 | |||||||||||||||||||||||||||||||||||||||||||||||||||||||||||||||||||||||||||||||||||||||||||||||||||||||||||||||||||||||||||||||||||||||||||||||||||||||||||||||||||||||||||||||||||||||||||||||||||||||||||||||||||||||||||||||||||||||||||||||||||||||||||||||||||||||||||||||||||||||||||||||||
특별 기획 시리즈 / 신 인맥 지도 | 경기 수원 | |||||||||||||||||||||||||||||||||||||||||||||||||||||||||||||||||||||||||||||||||||||||||||||||||||||||||||||||||||||||||||||||||||||||||||||||||||||||||||||||||||||||||||||||||||||||||||||||||||||||||||||||||||||||||||||||||||||||||||||||||||||||||||||||||||||||||||||||||||||||||||||||||
| |||||||||||||||||||||||||||||||||||||||||||||||||||||||||||||||||||||||||||||||||||||||||||||||||||||||||||||||||||||||||||||||||||||||||||||||||||||||||||||||||||||||||||||||||||||||||||||||||||||||||||||||||||||||||||||||||||||||||||||||||||||||||||||||||||||||||||||||||||||||||||||||||
수원 지방을 얘기할 때면 흔히 수원시와 화성시를 합쳐 ‘수원·화성’이라고 부르곤 한다. 여기에는 그럴 만한 역사적 배경이 있다. 수원군은 경기도의 옛 행정 구역으로 현재의 수원시와 화성시를 아울렀던 군이다. 조선조 이전까지 ‘수성(水城)’ ‘수주(水州)’ 등으로 불렸던 이곳은 태종 13년 ‘수원(水原)’으로 개명되었다. 조선 중기까지 한적한 촌락에 불과하던 수원은 정조가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무덤을 양주에서 수원의 화산으로 이장하면서 확장되기 시작했다. 수원에 화성(華城)을 축성하고 능행 때 묵을 행궁(行宮)을 지었다. 수원은 도호부에서 유수부로 승격되었다. 하지만 정조 사후 쇠퇴의 길을 걸었으며 일제 강점기에 화성 행궁이 철거되고 6·25의 전화로 화성마저 심한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현재는 화성과 행궁이 대부분 복원되었다. 화성시의 화성이라는 지명은 이 수원 화성(華城)에서 유래한다. 1949년 수원군 수원읍이 수원부로 승격되면서 수원군의 나머지 지역이 화성군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이후 수원부는 수원시로, 화성군은 2001년 화성시로 승격했다. 그러니 두 도시 사람들은 본래 뿌리가 같고 한솥밥을 먹었던 사이인 셈이다.
수원시는 2010년 8월 기준으로 기초자치단체 중 인구가 가장 많다. 수원시는 도청 소재지이면서 인구가 광역시 승격 요건인 100만명이 넘었음에도 면적이 좁기 때문에 화성시, 오산시와 통합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으나 서로 간의 이견으로 성사 여부는 예측할 수 없다. 수원시에는 4개의 국회의원 선거구가 있다. 이찬열·정미경 의원은 초선이지만 남경필·김진표 의원은 각기 4선 의원과 당 원내대표의 타이틀을 가진 중진이다. 남경필 의원은 13년 전 33세의 나이로 처음 금배지를 달고 정치권에 등장했다. 아버지의 지역구를 물려받으면서였다. 아버지인 고 남평우 의원은 운수업체 소유주로서 지역 신문인 경인일보의 대주주였으며 14, 15대 의원을 지낸 인물이다. 미국 유학 중이던 그는 아버지가 별세하자 귀국해 지역구를 맡은 지 4개월 만에 치러진 보궐선거에서 당시 여권 연합 후보를 누르는 기염을 토했다. 이를 두고 언론은 “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쳤다”라고 표현했다. 그로부터 2년 뒤 16대 총선에서는 초반부터 우위를 빼앗기지 않으며 여유 있게 승리했다. 이전의 승리가 아버지의 후광을 등에 업고 이룬 것이었다면, 이번에는 그동안의 역량과 가능성을 검증받아 ‘홀로서기’에 성공한 것이었다. 36세에는 총재 비서실 부실장에서 일약 당 대변인으로 발탁되어 또 한 번 화제를 뿌렸다. 상임위 활동을 통해 논리 정연한 언변으로 주목을 받았으며, 4선을 기록한 18대에 들어와서는 후반기 외교통상통일위원장을 맡았다. 성실하고 치밀한 일처리와 겸손한 자세가 돋보인다는 평을 듣는다. ‘영원한 소장파’라고 불리는 남의원은 ‘미래연대’ ‘수요모임’ 등을 주도했으며 자천 타천으로 차기 당권 주자로 거론되기도 한다. 한나라당 내 쇄신 모임이자 신주류로 떠오른 ‘새로운 한나라’의 멤버이다. 지난 5월13일에 열린 민주당 의원총회에서 김진표 의원이 새 원내대표로 선출되었다. 김의원은 경제 관료 출신의 2선 의원이다. 경복고와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행정고시에 합격해 세무서에서 공직 생활을 시작한 그는 재무부 세제국과 국세심판소에서 근무했다. 재정경제원으로 자리를 옮겨서도 세제실장을 지낸 세제 전문가로서 재정경제부 차관을 거쳐 김대중 대통령 말기 청와대 정책기획수석비서관과 국무총리 국무조정실장을 역임했다.
2008년 18대 총선에서는 실패하고 2009년 10·28 재·보선에서 당선된 이찬열 의원은 2002년 한나라당 당원으로 경기도의회 의원을 지내며 당시 지사였던 손학규 대표와 인연을 맺었고, 손대표를 따라 한나라당을 탈당했다. 재·보선 공천 때에도 이의원은 자신이 지역위원장을 맡았던 장안구에 거처까지 마련해 손대표의 출마를 권유했던 ‘충성파’이다. 그러나 손대표는 자신의 출마 대신 이의원의 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아 선거 기간 내내 이 거처에 묵으며 밤낮으로 뛰었다.
정미경 의원은 고려대 법학과를 나와 사법시험에 합격한 여검사 출신이다. 그는 검사 시절 <여자 대통령이 아닌, 대통령을 꿈꿔라>라는 책을 펴내 세간에 이름을 알렸다. 이 책에서 그는 총선 때 민주당 선대위원장을 맡았던 강금실 전 법무부장관을 프랑스 루이 16세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에 비유하며 비판해 눈길을 끌었다. 여성가족부에 파견되었던 정의원은 책이 나온 뒤 검찰로 복귀했지만 원근무지인 수원이 아니라 부산으로 발령이 나자 사표를 냈다. 수원지검에서 근무할 때 만난 경기도 아동학대보호센터 자원봉사자들의 강력한 권고를 받은 것이 정계 입문의 동기였다고 한 그는, 첫 출마에서 현역이던 이기우 의원을 물리쳤다. 현재 한나라당에서는 박흥석 전 경기일보 편집국장과 고희선 17대 의원이, 민주당에서는 이기우 전 의원과 이대의 지오 대표이사가 지역구를 맡아 내년 19대 총선을 벼르고 있는 중이다.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백중세를 이룬 가운데 제5회 지방선거에서 당선된 염태영 수원시장은 민주당 소속이다. 수원에서 태어나 수원에서 초·중·고를 다니고 대학도 수원에 있던 서울대 농대를 다닌 토박이이다. 수질 관리가 전공인 환경기술사 자격증을 소지하고 기업체 환경사업부와 수원환경운동단체, 녹색연합, 수원천 되살리기 시민운동본부 등에서 환경운동가로 활동했다. 노무현 대통령 시절 청와대에서 근무한 경험과 국립공원관리공단 감사를 지낸 경력이 있다. 당적(黨籍)을 떠나 수원을 위해 열심히 뛰는 일꾼이라는 평을 받는다.
자산 규모 재계 4위 SK가(家)의 고향이 수원이다. 최종건 선경직물 창업주는 48세의 나이에 동생인 고 최종현 회장에게 가업을 맡기고 세상을 떠났다. 최창업주는 광복 전 한때 견습기사로 취직했던 선경직물을 불하받아 기업의 터전을 마련했다. 형이 20년간 SK의 섬유를 책임졌다면 동생은 25년간 석유를 개척하고 이동통신의 길을 텄다. 최종건 회장의 직계는 최신원 SKC 회장과 최창원 SK케미칼 부회장이고 최종현 회장의 직계가 최태원 SK 회장과 최재원 SK 수석부회장이다. 동생의 아들인 최태원 회장이 그룹 계승자로 확정된 것은 1998년 8월 가족회의에서였다. 최종현 회장이 별세하자 최씨 가문의 차세대 5인방인 사촌 형제들이 모여 결정을 내렸다. 최씨 가의 혼맥에는 굵직굵직한 사람들이 섞여 있다. 최태원 회장은 노태우 전 대통령의 딸인 노소영씨와 결혼했다. 최종건 회장의 사위 중에는 이후락 전 정보부장의 아들이 있다. 최회장과 이 전 부장은 호형호제할 정도로 막역한 사이였다.
‘제철의 마술사’라고까지 불린 정준양 포스코 대표이사 회장은 서울대 공대를 졸업하고 포항제철에 공채 사원으로 입사해 최고경영자까지 오른 전문 경영인이다. 4년간 EU사무소에 근무한 기간을 제외하고 30여 년간 생산 현장을 떠난 적이 없다. 전임 회장들은 일찍부터 박태준 명예회장이 재목으로 점찍어 엘리트 코스를 밟았던 데 비해 그는 생산 현장의 거친 풍상 속에서 생존했고 실력을 다져왔다. 상무 승진은 늦었지만 이후 1~2년마다 전무-부사장-사장으로 초고속 승진을 거듭했다. 그가 현장에서 주도한 다양한 혁신 아이디어가 높은 평가를 받은 결과였다. 백성기 포스텍 총장이 정회장과 동향인이다. 연배도 비슷해 같은 시기에 서울대 공대를 다녔다. 백총장은 미국에서 학위 공부를 마친 뒤 연구소에서 근무하다 1986년 귀국해 포항공대 재료금속과에 자리를 마련했다. 연구 활동 한편으로 각급 보직 교수를 거쳐 2007년부터 한국의 대표적 공과대학의 하나인 포스텍을 이끌어오고 있다. 종교계의 큰 인물로 꼽히는 김장환 목사(극동방송 이사장)가 수원 출신이다. 화성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6·25 때 미군 부대에서 하우스보이로 일하다 그의 근면 성실성을 눈여겨본 미군 병사들의 도움으로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미국에서 고교 과정부터 시작해 신학대학원을 마치고 목회자가 되어 귀국한 그는 1973년 세계적 부흥사인 빌리 그레이엄 목사가 방한했을 때 설교 통역을 맡아 일약 유명 인사로 발돋움했다. 그의 영어 이름인 ‘Billy Kim’은 하우스보이 시절에 얻었던 것이어서 그레이엄 목사와는 더욱 인연이 깊다. 아시아인으로는 처음으로 침례교세계연맹 총회장을 역임했다. “천당 가면 잠이나 실컷 자겠다”라고 농담할 정도로 바쁜 생활을 해 온 그는 지금도 10여 명의 교인으로 출발해 거대 교회로 성장한 수원중앙침례교회의 원로목사로서 전국을 누비며 설교 활동에 열의를 보이고 있다. 두 아들도 목사이다. 이 밖에 정광모 한국소비자연맹 회장, 장명국 내일신문 대표이사 발행인, 박은경 한국물포럼 총재, 첼리스트 장한나, 가수 이용이 수원에서 태어났다.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