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유기천.학원탄압 맞서 정의 지켜낸 지성 박정희 대통령과도 맞장 뜨며 담판
교회 장로로 공산체제 맞서 처형당한 순교자 유계준의 아들
박정희의 총장자리 제의에 “학문 자유 달라” 내세워
박 정권과 끝내 충돌 美 망명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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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hoto 유기천교수 기념사업회 |
부친 유계준(劉啓俊)은 고당 조만식과 함께 평양 산정현교회 장로로서 공산체제에 맞서다 처형당한 순교자이다. 그의 아호 월송은 시인 모윤숙이 자신의 아호 영월(嶺月)에 맞춰서 지은 것이다. ‘달빛 아래 소나무처럼 단아하면서도 절개를 지키는 선비로 살아가라’는 뜻이 담겼다.
월송은 1915년 7월 5일 평남 평양시 염점동 33번지에서 유계준과 윤덕준(尹德俊) 사이에 6남2녀 중 4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평남 안주에서 부농의 아들로 태어나 부친이 별세하여 13살 때 평양으로 나왔다.
이어 외가 안동 김문의 부자 무역상에 사환으로 들어가 장사를 배웠다. 평양 대동문 밖 대동강변에서 시작한 장사는 진남포에서 중국 산둥성, 톈진을 왕래하며 청염과 시탄 장작 등을 교역하는 무역선, 수상선 10여척의 큰 배들을 부리는 큰 무역상으로 발전했다. 대지 1650여㎡(약 500평)에 무역사무소와 창고, 숙소 등이 이어지는 대저택에 살았다.
유계준은 “민족의식을 함양하기 위해서는 사립학교에 다녀야 한다”면서 아들 딸 구별 않고 8남매를 모두 사립학교에 보냈다. 더 구체적으로 “종합병원을 세워 동포들에게 봉사하자”면서 자녀들에게 전공을 달리하는 의학을 공부하게 하여 8남매 중 7남매를 의사와 약사로 키웠다.
애초 유계준은 미국인 선교사 새뮤얼 모펫이 평양 시내에서 전도하는 것을 보고 선교사를 구타해 선교를 방해했으나 그렇게 맞고서도 예수를 믿으라고 권유하는 그에게 설득되어 기독교에 귀의한다. 그후 한석진·길선주·주기철 목사와 조만식·오윤선 장로, 도산 안창호 및 도산의 백씨인 안치호 장로 등과 교유한다. 특히 조만식·오윤선과는 평양 기독교계의 상징인 산정현교회(주임목사 주기철)의 3장로로, 형제처럼 절친하게 지냈다. 그는 상하이 임시정부의 기관지 독립신문의 반포 책임자로 일했다.
“주기철 목사가 일제의 신사참배를 거부, 1944년 4월 감옥에서 순교할 때까지 5년4개월 동안 옥고를 치렀는데, 일경의 협박 속에서도 그의 옥바라지와 가족의 뒷바라지를 유계준이 맡아 해냈으며 그가 순교하자 일제의 금지령을 어기고 사회를 맡아 성대한 장례식을 치러줬다.”(‘신 명가’ 조선일보 1995년 5월 29일자)
맏딸 기옥(91)씨는 “주기철 목사가 순교를 앞두고 비장한 모습으로 부친을 찾아와 가족들의 생계를 부탁하시니 부친께서 기꺼이 응낙하고 격려하는 현장을 목격했다”고 전했다.
유계준은 많은 재산을 숭덕학교 숭인상업학교를 설립하는 데 출연하고 재단의 재정관리와 경리를 책임졌다. 이 학교 출신으로 박재창 전 평남지사, 김성환 전 한은총재, 양호민 전 조선일보 논설위원, 시인 박남수 등이 있다.
유계준은 광복 후 공산 정권이 교회를 압수하자 자신의 집을 예배장소로 제공했고, 3남과 장남의 투옥을 지켜보다 ‘죽어서 천당에 가서 다시 만나자’며 부인과 자녀들 모두 남하시켰다. 혼자 남아 교회를 지키다가 평소 자녀들에게 일러온 ‘한 알의 밀알이 되라’는 가훈대로 6·25 때 퇴각하던 공산군에 의해 1950년 10월 처형당했다.
유계준의 장남 기원(基元·별세)은 1907년 태어나 국립의료원장을 지낸 하버드대 의학박사다. 유년주일학교 때 고당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조동수 전 연세대 부총장과 함께 숭덕학교 보통과 고등과를 수학했고, 경신학교로 옮겨 졸업한 후 세브란스의전을 나왔다. 원용덕 전 헌병사령관, 테너 이인선, 문창모 전 국회의원 등이 동기다. 일제 때 평양연합기독병원에서 함께 근무하던 장기려가 일군에 징발되지 않도록 돕기도 했다. 광복 후 공산군에 구속됐으나 고당의 제자였던 최용건(전 북한 부수상)의 도움으로 함께 구속됐던 동생 기선을 구출하여 월남했다. 이어 미군정청고문, 석공 장성병원장을 거쳐 서울복음병원장 등을 역임했다. 최은엽씨와 사이에 5남2녀를 뒀다. 장남 정철(77·서울대 공대 졸업, 오란도건축설계사무소 운영)씨는 김수자(74·이화여대 졸업)씨와 결혼하였으며, 차남 정훈(75·고려대대학원 졸업)씨는 김경희(73·덕성여대 졸업)씨, 3남 정욱(72·한양대 공대 졸업, 삼성건설 상무 역임)씨는 이영자(66·이재곤 전 서울대 공대 교수의 딸)씨와 결혼했다. 4남 정남(69·인하대 공대 졸업, 제일감정법인 경영)씨는 나숙영(62·이화여대 졸업)씨, 5남 정식(67·인하대 공대 졸업, 재미)씨는 양성욱(67·숙명여대 졸업)씨와 결혼했다. 장녀 정희(82·이화여대 졸업)씨는 런던올림픽 출전 육상선수인 이윤석(고려대 졸업)씨, 차녀 정혜(79·이화여대 졸업)씨는 이한빈 전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하버드대 경영대학원 졸업)과 결혼했다.
유계준의 차남 기형(基亨·별세)은 서울대 치대, 연세대 교수와 기독교의사회 회장을 역임하였으며 김화선(공주사대 졸업)씨와 사이에 2남4녀를 남겼다. 장남 정호(67·부산대 의대·서울대 대학원 졸업, 신경내과전문의)씨는 양연수(65·숙명여대 졸업)씨와 결혼하여 미국 시카고에서 살고 있으며, 차남 정칠(53·부산대 졸업)씨는 케임브리지대 생물학 박사이다. 유기형의 장녀 정간(76·이화여대 졸업)씨는 조봉윤(78·서울대 약대 졸업, 세븐스타케미컬 대표 역임)씨와 결혼했으며, 차녀 정극씨(별세)는 임대지(80·연세대 졸업, 청와대민원비서관 역임)씨와 결혼했다.
3녀 정실(69·부산대의대 재활의학과 전공)씨는 김동백(부산대 의대 소아과 전공)씨와 결혼하여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부부 의사로 활약하고 있다. 4녀 정해(62·한양대 졸업)씨는 유충걸(65·서울대 법대 졸업, 대우상무·요하네스버그 지사장 역임)씨와 결혼했다.
유계준의 3남 기선(基善·별세)은 경성약전, 서울대 의대, 서울대 법대 학부 3곳을 다닌 이색 학력의 소유자이다. 그는 광복 직후 부친의 동지인 고당을 도와 반탁운동에 앞장섰다가 소련군에 구속됐었다. 장형 기원의 도움으로 곧바로 남하, 서북청년단 등으로 반공전선에서 활약했다. 다음은 그가 떠올린 일제 말 고당과 선친의 교유 모습이다.
“고당 선생은 오윤선 장로 사랑방에서 오 장로님과 나의 아버지(유계준 장로)와 세 분이 항상 형제와 같이 동고동락하시며 전국(戰局)의 동향과 세계 정세며 교회 일 등을 협의하곤 하셨는데… 연령으로는 아버지가 고당보다 3년 위였고 오 장로보다는 조금 아래였기 때문에 의견 교환도 맏형 격인 오 장로의 의견 진술이 있은 후에 나의 아버지가, 그리고 고당의 순서로 간담상조(肝膽相照)하며 격의 없는 의견들을 주고받는 것이 상례였다.”
기선은 박화선(94·일동지사대 졸업)씨와 사이에 2남2녀가 있다. 장남 정걸(72·고려대 의대 졸업, 흉곽외과전문의 미 오하이오주에서 개업)씨는 최순자(72·이화여대 졸업)씨와 결혼하였으며, 차남 정근(별세·서울대 법대 졸업, 동원탄좌 상무 역임)씨는 이주배(68·이화여대 졸업, 이연 동원탄좌 회장의 딸)씨와 결혼했다. 기선의 맏딸 정은(70·이화여대, 미 캘리포니아대 졸업, 고려대 문학박사, 아주대 교수 역임)씨는 윤승영(76·서울대 법대 졸업, 서울고법원장 역임)씨와 결혼하였으며, 차녀 정순(66·이화여대 졸업, LA퓨리턴주립대 교육학박사)씨는 강병욱(70·서울대 의대 졸업, 정형외과 전문의)씨와 결혼했다.
유계준의 5남 기진(基鎭·작고·세브란스의전 졸업)은 미국 시카고 일리노이병원에 근무 중 알게 된 여동생 기옥의 대학 1년 선배 고란경(작고·도쿄여자의대 졸업, 서울여대 창립자 고황경의 동생)씨와 결혼하여 딸 정애(66·이화여대, 시카고대 졸업)씨를 낳았다. 6남 기묵(基默·83·세브란스의전 졸업, 내과전문의 미 캘리포니아대 교수 역임, 재미)씨는 미국인 부인과의 사이에 딸 정미(61·UCLA의대 졸업, 할리우드병원 소아과의사)씨가 있다. 유계준의 장녀 기옥(基玉·91·도쿄여자의대 졸업, 누가의원장 역임)은 차조웅(88·고려대 졸업, 일성냉동 부사장 역임)씨와 사이에 아들 한(54·서울대 의대 졸업, 가천의대 교수)씨와 딸 송이(55·서울여대 졸업, 서울여대 교수)씨를 두었다. 차녀 기숙(基淑·89·도쿄제대 약대 졸업, 뉴욕생화학연구소 약리사 역임)은 미국인 플리처(93·오스트리아 빈의대 졸업)씨와 사이에 아들 미로(54·미프린스턴대 교수)씨를 두었다.
- ▲ 인천시 고잔동 자택에서 만난 유기천의 여동생 기옥씨(오른쪽)와 매제 차조웅씨.
월송은 기독교 집안이라 어린 시절부터 성경과 기독교 의식에 익숙했다. 그는 특히 고당 조만식을 지극히 따랐다. 월송은 장로교 계통의 숭덕소학교에 다녔다. 공부를 잘하고 당찬 학생으로 이름이 높았다.
“부당한 핍박이나 의롭지 못한 일을 보고는 참고 넘기는 일이 없었다. 키가 작다고 깔본다든가 힘으로 억누른다든가 얕보고 건드리면 물불 가리지 않고 대항하였다. 누구든 끌끌한 형들을 상대할 각오 없이는 선생님을 홀대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어릴 때부터 안전지대에서 자랐다.”(‘유기천의 삶’ 오성식)
월송은 이어 선교사가 세운 숭실중학교로 진학한다. 키가 가장 작아 맨 앞줄에 섰으나, 공부는 제일 잘했다.
“의사 발표가 분명하고 리더십이 강하다 보니 급장을 맡아 수고했다. 졸업할 때까지 줄곧 반장으로 반을 지휘통솔한 것으로 유명하다. 숭실은 선생님의 기초학력 연마의 요람이었다. 여기에서 기독교 신앙이 자라고 민족의식이 원숙하게 연단되었다.”(‘유기천의 삶’)
월송은 1936년 일본 히메지(姬路)고교에 입학한다. 당시 함께 일본 유학길에 나섰던 누이동생 기옥씨는 창씨개명을 하지 않아 특별조사를 받고서야 맨 나중에 겨우 승선할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그는 신입생들에게 권하는 과외활동으로 유도를 택해 유단자가 된다. 그러나 유도부 강제훈련을 빠져서 집단 기합을 받게 되자 이에 당당히 맞선다.
“‘내가 이 고등학교에 들어온 목적은 공부하기 위해서다. 유도를 전공하러 온 것이 아니다. 심신을 공히 단련하고자 유도부에 들어왔다. 공부에 지장을 주는 유도 연습은 할 수 없다. 주장 선배께서 유도 연습을 해야 한다고 하면 나는 유도부를 탈퇴하겠다. 분명히 밝혀주기 바란다’ 하고 유도부 전원 앞에서 소신을 개진했다. 그러자 지금까지 집단 기합을 주려던 주장과 선배들이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지더니 ‘네 말이 옳다. 시간이 있을 때 연습하라’고 했다는 것이다.”(‘유기천의 삶’)
월송은 1939년 도쿄제국대학 법문학부에 입학한다. 그는 형법은 법인 동시에 도덕·윤리·종교·철학, 인간의 삶 그 자체이기 때문에 전공으로 택했다고 했다. 1943년 졸업과 함께 월송은 재학 중 전인격적인 교류를 해온 단도 시게미츠 교수의 추천을 받아 그의 장인인 센다이 동북제국대학 법학부 가쓰모토 교수의 조수로 간다. 이곳에서 광복을 맞은 그는 센다이지역 교민대표로 주둔미군과 교섭에 나서기도 한다. 1946년 귀국 후 서울대 법과대학의 창설멤버로서 강의를 시작한다. 당시 국대안 반대(국립대 설립안 반대)를 내건 좌익학생들이 월송의 연구실 진입을 몸으로 막자 그는 유도 2단의 실력으로 이를 뿌리쳤다.
월송은 1952년부터 예일대와 하버드 로스쿨에서 연구하며 1958년 예일 로스쿨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취득한다. 이어 서울대 교무처장직을 맡는다. 1959년 6월 1일 월송은 연구동료로 여러 해 사귀어 오던 ‘미국 형법학의 여왕’으로 지칭되던 헬렌 실빙 교수와 뉴욕대학의 스토다드 부총장댁에서 결혼한다.
1961년에는 서울대 법대학장에 취임하며 이듬해 서울대 사법대학원도 창설하여 원장을 맡아 오늘의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의 바탕을 다졌다.
1965년 9월 한·일 국교정상화와 관련한 학생시위문제를 둘러싸고 박정희 대통령과 담판을 벌였고, 월송은 세 가지 조건을 수락받고 서울대 총장에 취임한다.
“‘총장직을 수행하는 데 세 가지 조건을 제시하고 싶습니다. 내 첫 번째 관심사는 대학의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게 하는 것입니다.… 대학은 사회과학 및 자연과학 분야에서 창조적이고 과학적인 진보를 이룩하기 위해 만들어진 기관입니다. 이 목적을 달성하려면 학생과 교수 모두에게 학문의 자유를 주어야 합니다. 두 번째 조건은 아주 개인적인 것입니다.… 이 달 말에 학장 임기가 끝나기 때문에 저는 학문연구에 더 전념할 것을 생각해 왔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총장 일과 함께 학생을 가르치고 연구하는 일도 병행하고 싶습니다. 세 번째 조건은 제가 이 자리를 수락한다면, 각하와 직접적인 통로를 갖고 싶습니다. 결단코 각하의 보좌관들의 회합을 갖는 선에서 그치고 싶지는 않습니다.’ 이 조건들에 대한 박 대통령의 반응은 매우 놀라웠다. ‘조건을 수락하지요.’”(‘헬렌 실빙 박사 자서전’)
월송은 불안한 학원사태 속에서도 한·일국교정상화와 대학의 자유 확립을 위해 온 힘을 쏟았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박 대통령은 월송을 청와대로 소환했다.
“어느 날 나는 대통령 집무실로 호출됐다. 내가 들어서자마자 대통령은 소리쳤다. ‘뭘 하는 거요? 학생들의 불법적인 행동을 멈추게 하기로 하지 않았소? 그런데 시위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단 말이오. 이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면 군대를 보내 서울대를 점령하여 질서를 회복시킬 밖에!’ … ‘이제 소리 다 지르셨습니까?’ 이런 대답을 그는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나는 계속했다. ‘소리를 다 질렀다면 이제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서울대에 군대를 보내겠다는 식의 발언은 참을 수가 없습니다. 겨우 몇 주 전에 한 약속을 벌써 잊으셨습니까? 제게 책임을 맡기고 방해하지 않겠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저는 지금까지 대학을 진정시키는 일을 계획대로 아주 잘 해내고 있습니다. 자, 군대를 보내고 싶으면 어서 보내 보십시오!’ 나도 화가 나 있었기 때문에 목청껏 소리를 질렀다. ‘저는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과 함께 일할 수 없습니다. 총장직을 당장 물러나겠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나는 대통령 집무실을 나서서 긴 복도를 걸어갔다. 대통령이 나를 죽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20초쯤 지났을까. 나는 뒤쫓아 달려오는 발소리를 들었다. 박 대통령이었다. 그는 내 왼팔을 붙잡으며 말했다. ‘화나게 해서 미안합니다. 할 말이 있어요. 내 집무실로 돌아갑시다!’ ‘제가 왜 돌아가야 합니까? 우리의 합의사항을 하나도 이행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은데….’”(‘헬렌 실빙 박사 자서전’)
이런 실랑이를 한동안 벌이다가 학원사태에 대한 대학의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박 대통령이 점심을 함께하자고 해 ‘선약이 있어 실례해야겠다’고 말했으나 ‘대통령은 다른 어떤 사람보다 우선권이 있다’고 주장하며 함께 식사하자고 고집했다.
그러나 월송은 1966년 11월 30일 서울대 총장직을 물러난다. 이후 그는 유신체제를 예언하는 등 박 정권과 정면으로 맞서다 미국으로 망명한다. 1980년 이른바 ‘서울의 봄’을 맞아 귀국하여 서울대 법대에서 잠시 강의하다 5·17 신군부 등장 이후 다시 도미한다.
월송은 1998년 6월 27일 미국 샌디에이고에서 심장수술 후유증으로 별세하여 경기도 고양시 오금동산 137의 1 산정현교회 묘지에 안장된다.
내가 본 월송 유기천 오성식 인제대 연구교수 월송 선생님 집안과 우리 집안은 일찍부터 세교로 트고 지내는 사이였다. 그분의 부친인 유계준 장로와 산정현교회에서 교유해오신 오윤선 장로가 곧 우리 집안의 할아버지셨다. 선생은 서울대 법대 창설멤버로 한평생 운명을 함께하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51년 피란하여 부산 대신동 구덕산 기슭에 판잣집을 짓고 법과대학을 개교할 때 선생님께서 학장서리였다. 패기만만한 선생님께서 교문에 철제 아치를 세워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는 세워라’ 라고 모토를 내세웠다. 학생들로 하여금 어려운 시기에 원칙을 지키라는 것으로 긍지를 갖고 용기를 주려는 선생님의 뜻인 것으로 안다. 1966년 서울대 총장직을 사임하고 미국에 망명하셔서도 샌디에이고 자택의 뜰에 3·1운동의 33인을 기린다고 33그루의 무궁화를 심고 가꾸시던 선생님의 애국심을 우리 모두가 본받아야 할 것이다. 인생을 살아보니 바로 선생님 스스로 몸소 온갖 고난과 위협을 무릅쓰고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우신 사표’임을 보여주신 것이다. 이처럼 큰 스승을 대학생 때부터 가까이서 모실 수 있었음은 내 인생의 더 없는 행운이요 보람이었다고 생각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