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인도, 중국과는 또 다른 대국
영국이 식민 지배할 때도 독립 토후국 500개가 전역에 존재
인도인들 끝없이 정체성 논쟁
언어·종교·민족으로도 정체성이 설명 안 되는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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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그라성에서 본 타지마할. 아우랑제브의 부황 샤 자한이 타지마할을 지었다. 샤 자한은 아우랑제브에 의해 아그라성에 갖혀 있다가 죽었다. 유폐되어 있는 동안 아내가 묻혀 있는 타지마할을 보며 탄식을 그치지 않았다고 한다 |
아우랑제브는 이때 남인도의 데칸고원에 자리잡은 ‘데칸 술탄 국가’ 중 강력한 두 나라를 정복, 병합했다. 1686년 9월 12일에는 비자푸르 왕국(1527~1686년)을 무너뜨렸고, 1687년 9월 21일에는 골콘다 왕국(1512~1687년)을 9개월의 포위 공격 끝에 격파했다. 골콘다성(城)은 오늘날 인도 의약산업의 메카인 하이데라바드의 대표적 관광 명소다.
무굴제국의 수석 판사는 비자푸르와 골콘다 왕국을 상대로 한 아우랑제브의 전쟁을 반대했다. 두 왕국은 무굴제국과 같은 이슬람 국가였다. 무굴제국의 지도층이 수니파 무슬림인 데 반해, 이들은 무슬림 중 소수파인 시아파라는 게 다르기는 했다. 무슬림 간의 전쟁을 수석 판사는 극력 말렸고, 그는 자신의 뜻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사임하고 말았다. 아끼는 신하가 자신의 정부에서 물러나는데도 아우랑제브는 생각을 바꾸지 않았다. 그만큼 통일전쟁에 대한 그의 의지는 강력했다.
무굴제국의 영광
데칸고원과의 인연은 많았다. 부왕 샤 자한은 아우랑제브 왕자를 데칸 태수로 두 번이나 보냈다. 두 번째 데칸 태수로 임명된 1653년, 35세의 아우랑제브는 자신의 이름을 딴 아우랑가바드란 도시를 만들고 그곳에서 지역을 통치했다. 대제국의 황제가 된 그가 군대를 몰고 데칸고원에 온 건 세 번째다.
아우랑제브는 데칸고원의 두 강력한 왕국을 굴복시키면서 무굴제국의 영역은 이때 최대 판도를 형성했다. 아우랑제브는 이제 인도 역사상 자신의 최대 라이벌인 아쇼카 왕을 뛰어넘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기원전 3세기 마우리아 왕조의 아쇼카는 아프가니스탄부터 북인도, 중인도를 영토로 만들었고, 남인도는 속국으로 삼았다.
아우랑제브는 제국의 또 다른 수도 아그라로 돌아가지 않고, 아예 데칸고원에 눌러앉았다. 조정을 이미 아우랑가바드로 옮겨왔다. 대업을 당대에 마무리 짓겠다는 필사적인 의지의 표현이었다.
1695년 10월 19일 아우랑제브는 다시 전쟁의 북을 울리게 했다. 이번엔 남인도의 또 다른 강대한 세력인 마라타가 상대였다. 힌두교도인 시바지가 이끄는 마라타 왕국은 1674년 제국임을 선언하고 아우랑제브에 도전해 왔다. 무굴은 시바지가 죽은 뒤 그를 계승한 아들(삼바지)을 체포하는 성과를 올렸지만 지도자를 잃고도 마라타인들은 끈질겼다. 전쟁의 끝이 보이지 않았다. 마라타인의 성을 빼앗을 수는 있었으나, 이를 지키지는 못했다. 성을 빼앗긴 마라타인들은 몇 달 후 수비가 약해진 틈을 타 무굴 군으로부터 성을 다시 빼앗았다. 치고 빠지기, 이런 일이 되풀이됐다. 아우랑제브는 친정에 나서 수없이 많은 성을 빼앗았으나 수없이 빼앗겼다. 6월이면 몬순을 알리는 먹구름이 처음 몰려오는 남인도의 끝에 근접할 수가 없었다.
아우랑제브의 죽음
나이가 들수록 신앙심이 깊어진 아우랑제브는 저녁에 혼자 있을 때면 펜을 들어 이슬람 경전 코란을 필사했다. 황제가 펜으로 쓴 코란을 시장에 내다 팔아 돈을 만들었고, 그 돈으로 빈민층 복지기금으로 쓰게 했다. 아우랑제브는 연승 때 거의 모든 걸 얻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모든 걸 잃고 있었다. “무굴제국은 너무 커져서 한 사람이나 하나의 중심으로부터 통치될 수가 없을 정도가 됐다. 자신이 소화할 수 없는 덩치가 큰 동물을 삼킨 보아뱀과 같았다. 적들을 이길 수는 있었으나 영원히 누를 수는 없었다”고 후대의 사가들은 평했다. 데칸고원 정벌을 위해 친정을 시작한 지 십수 년이 지났고, 그의 나이 81세였다. 그는 이미 무굴의 어떤 선대 황제보다도 나이가 많았다. 더구나 그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전장에서 갑옷을 입고 있었다.
황위 계승 전쟁에서 형들과 동생을 죽이고, 능력 없는 맏형을 황위에 밀어올리려던 아버지(샤 자한 황제)를 아그라의 성에 잡아 가둔 일도 아득한 옛일이 됐다. 타지마할을 만들었던 부황 샤 자한은 자신이 만든 타지마할이 바라다보이는 아그라성에 8년간 연금되어 있다가 1666년 1월 죽었다. 노 황제 아우랑제브는 서서히 지치고 있었다. 아우랑제브의 장군들은 고대 그리스신화 속 시시포스 신화와 같이 헛일을 반복하는 데 진저리가 났다. 철군을 간청했다. 그러나 아우랑제브는 비겁하다며 이를 물리쳤다. 몸이 무너져 내리고 있는데도 아우랑제브 군의 행군은 멈추지 않았다. 결국 데바푸르라는 도시에서 아우랑제브는 치명적인 병을 얻었다. 그는 죽음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우랑제브는 신하들의 간청에 굴복, 1705년 12월 6일 바하두르푸르로 물러났다. 그리고 다시 아흐마드나가르라는 곳으로 옮겨 1년 뒤 그곳에서 죽었다. 90세였다. 아우랑제브는 죽어서도 제국의 수도로 돌아가지 않았다. 자신의 이름을 붙인 도시 아우랑가바드 인근에 묻혔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유명한 아잔타 석굴을 보러 가는 길에 있는 조그마한 마을 돌라타바드 인근의 한 이슬람 성자 옆에 지극히 소박한 무덤을 만들었다. 흰 대리석판이 그가 영면하고 있음을 표시하고 있을 뿐이다.
토후국들의 반란
중국은 진나라의 시황이 기원전 221년에 전역을 통일했다. 지금부터 2232년 전의 일이다. 진시황이 황허(黃河) 인근의 땅인 셴양(咸陽·함양)에 통일국가를 세웠고 이후 중국 땅에 들어선 왕조는 중국의 영토를 사방으로 넓혔다. 중국의 마지막 통일 왕조인 청은 최대 강역을 확보했고, 오늘의 중국은 그 영토를 물려받았다. 이런 역사적 과정에서 중국 땅에는 몇 개의 국가가 동시에 들어서 분단된 적이 있었지만 대체로 통일된 나라를 유지해왔다.
인도는 중국과 완전히 다르다. 통일국가가 들어선 적이 역사상 단 한 차례도 없다. 인도 땅을 거의 다 아우른 제국은 두세 차례 등장했다. 앞서 언급한 아우랑제브 시대의 무굴제국과 기원전 3세기 아쇼카 왕(재위 기원전 274~232년) 때, 그리고 영국령 인도(1858~1947년)였다. 하지만 오늘날 인도·파키스탄 영토를 아우르는 전역을 직할령으로 둔 통일국가는 없었다.
아우랑제브가 90세에 죽은 직후 무굴제국은 급속도로 와해됐다. 무굴의 구심력이 약해지자 제국의 태수들과 토후국들이 고개를 들고 일어났다. 인도는 다시 사분오열됐고, 외침과 내전으로 혼미했다. 무굴의 황제들은 실세들에 권력을 빼앗기고, 정치에 관심을 가지면 죽어야 했다. 현명한 황제들은 예술과 오락에 몰두해야 목숨을 지켜낼 수 있었다.
인도 전역을 사실상 지배한 세력은 바다 건너 유럽에서 왔다. 영국은 무굴제국에 간청, 아라비아해의 항구도시 수라트에 1608년 상관을 열면서 인도에 진출했다. 영국은 이후 포르투갈, 네덜란드, 프랑스와 경쟁하면서 인도를 야금야금 삼키기 시작했다. 특히 프랑스와 인도를 놓고 수차례 전쟁을 벌여 인도 정복의 결정적 발판을 만들었다. 1757년 콜카타 인근에서 벌인 플라시전투로 벵골만 지역에 향후 식민 지배를 위한 전초기지를 닦았고, 이후 마라타 왕국, 시크 왕국, 네팔 왕국, 아프가니스탄 왕국과 수없이 많은 전쟁을 치르며 인도의 패자가 됐다. 영국은 이때까지도 형식적으로는 델리의 무굴황실을 인도 제국의 통치자로 인정했으나, 1857년 세포이항쟁이 일어난 뒤에는 간접통치를 직접통치로 바꿨다. 영국령 인도제국을 세웠고,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이 영국령 인도제국의 황제로 공식 즉위했다. 영국의 인도 통치는 효율적이었다. 인도 곳곳에 직할령을 두었으나 수없이 많은 토후국의 존재를 인정했다.
무엇이 인도이고, 누가 인도인인가
1947년 인도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할 때의 상황은 영국의 현란하고 복잡한 인도 지배를 잘 보여준다. 인도 땅에는 500~600개의 토후국과 추장국이 존재했다. 초대 인도 총리가 된 자와할랄 네루 총리는 토후국들을 인도 공화국에 포함시키기 위해 온 힘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됐다. 마지막 인도 총독이었던 루이스 마운트배튼경의 정무비서관이었던 V.P. 메논은 인도 독립을 전후해 수백여 개의 토후국과 추장국 지도자들과 협상을 벌여 이들 국가가 인도로 통합하도록 하는 데 무려 2년의 시간을 들였다. 1947년 등장한 현재의 인도도 통일국가라고 할 수는 없다. 1947년 당시 영국의 지배로부터 벗어나면서 영국령 인도의 일부분이 파키스탄이라는 이름으로 떨어져 나갔다. 때문에 진정한 의미로 인도 대륙을 아우르는 통일국가는 아직까지도 나오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역사상 단 한 번도 통일국가가 없었다는 점은 영국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 마하트마 간디와 자와할랄 네루가 독립운동을 벌일 때도 장애로 작용했다. 인도라는 단일국가가 과연 가능한가라는 의문을 인도인 스스로 가졌기 때문이다. 특히 식민 지배자 영국은 인도의 독립 추진 세력에게 ‘역사상 인도란 나라가 어디 있느냐. 뭘 독립하겠다는 것이냐’는 식으로 비아냥거리며 대응했다.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가 1931년 3월 18일 영국 런던의 공연예술장인 로열 알버트홀에서 했던 인도 관련 연설은 특히 유명하다. 처칠 총리는 “인도란 추상이다. 인도는 유럽과 같은 정도의 정치적 인성이라고 하겠다. 인도는 지리학적 용어다. 그건 적도보다도 통일된 국가가 아니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인도의 정체성 논란은 오늘도 인도 사회에서 계속되고 있다. 무엇이 인도이고, 누가 인도인인가라는 의문이다. 정의하기가 쉽지 않다고 인도인들은 말한다. 인도의 작가이자 기업인인 산크란트 사누는 “식자층에서도 대화 중 툭 튀어나오는 이야기가 인도라는 나라는 영국인이 만들어낸 것이란 주장”이라며 “이는 인도는 인위적인 존재라는 결론으로 이어진다”고 말했다.
18개 언어 인정할 만큼 민족·종교 다양
사누는 이에 대한 반론으로 반도라는 지형에 맞춰진 인도의 지리적 통합, 문화적 통합을 예로 들면서 인도가 단일의 정체성을 갖고 있다고 주장한다. 인도의 대표적 고대 서사시 중 하나인 마하바라타의 내용이 그 증거 중 하나란다. 마하바라타는 인도 전역을 아우르는 배경과 서로 연결돼 있음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마하바라타에 나오는 드리트라슈트라의 부인 간다리는 오늘날 아프가니스탄의 제2도시인 칸다하르 출신이며, 드로파디는 오늘날 잠무-카슈미르 출신이고, 아르준이 결혼한 신부는 동북부 나가의 공주라고 사누는 말한다. 사누는 인도 최고의 힌두교 행사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한다. 북인도 사람들이 남인도의 최대 힌두 성지인 티푸파티 사원에 순례를 가고, 남인도 사람들이 북인도의 갠지스 강변에서 열리는 쿰바 멜라 축제에 몰려가는 걸 보면 인도인들의 문화적 연대와 통일성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
유엔 사무차장과 인도 외교차관을 지낸 작가이자 현역 하원의원인 샤시 타루르(Shashi Tharoor)는 이탈리아와 인도를 비교해 인도의 정체성과 인도라는 국가 존재의 당위성을 설명한다. 18세기 후반 이탈리아가 오랜 분리주의 시대를 뒤로하고 단일국가로 출범했을 때 이탈리아 민족주의자 마시모 타파렐리 다젤리오(Massimo Taparelli d’ Azeglio)는 “이탈리아는 만들었다. 이제 우리가 필요로 하는 건 이탈리아인을 만드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샤시 타루르는 “네루는 인도를 만들었지만 이 같은 말을 할 유혹을 받지 않았다. 인도와 인도인은 이미 수천 년간 존재해왔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인도는 국가적 정체성을 갖지만 그건 전통적인 어떤 기준에도 근거하지 않는다고 했다. 단일 언어도 단일 민족도 단일 종교도 인도를 설명하지 못한다. 인도 헌법은 18개의 다른 언어를 인정하고 있으며 100만명 이상이 구사하는 말만 해도 35개에 달한다. 수없이 많은 민족 집단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힌두, 이슬람, 시크, 기독교 등 다양한 종교가 병존하는 게 인도다. “결국 인도 민족주의는 언제나 생각 속에서 존재해온 민족주의였다”고 샤시 타루르는 말했다. 인도의 시성인 라빈드라나트 타고르(1861~1941)는 인도라는 나라에 대해 많은 걸 끌어안고 있는 하나의 땅이라고 설명했다. 타고르는 “인도라는 생각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들로부터 분리돼야 한다는 강한 인식에 반대한다”고 말한 바 있다.
수수께끼 같은 나라
인도라는 정체성은 1947년 독립 이후 오늘까지도 시험대에 올라 있다. 분리주의 세력이 인도 도처에서 중앙정부에 도전하고 있다. 실제로 인도 독립 1년 전인 1946년 여름 인도 북동부 지역의 나가 민족의 일파는 ‘영국이 떠나면 독립국가를 세우겠다’고 선언했고, 1947년 여름에는 비슷한 주장을 트래방코르 왕국(인도 최남단), 카슈미르 왕국(인도 최북단), 하이데라바드 왕국(중부의 이슬람 국가)의 왕들이 폈다. 남동부의 타밀 지역에서는 강력한 타밀 정당인 드라비다 카자감이 1947년 8월 15일 인도 독립일을 조문의 날로 지정하기도 했다. 펀자브 지역의 일부 시크교도는 칼리스탄이라는 국가 건설을 추진했다. 많은 영국인들은 인도에 대해 독립했으나 통일된 인도는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폭발하던 분리주의 움직임은 시간이 흐르면서 잦아들었다. 1950년까지 500개의 토후국은 인도로 통합됐고, 남동부 타밀 지역의 드라비다인 정당들도 1963년 정강에서 독립 추진 방침을 삭제했다. 동북부의 또 다른 민족 그룹인 미조인들은 1965년 분리 투쟁을 시작했으나 20년 뒤 무기를 손에서 내려놓았다. 아삼주의 분리주의자들은 1980년대와 1990년대 무장투쟁을 격렬하게 벌였으나 지금은 많이 약화됐다. 1980년대에는 시크 분리주의자들이 무장 소요를 펀자브주에서 일으켰으나 오늘날은 안정돼 있다.
온갖 혼란한 요소에도 불구하고 인도는 1947년 이후 많은 영국인의 기대에 어긋나게 단일국가를 유지해왔다. 그리고 지구상 최대의 민주주의 국가로 칭송받고 있다. 수수께끼와 같은 나라가 인도다. 특히 외부인은 이해하기 힘들다. 단 며칠 인도를 여행하고 와서 인도가 이렇더라고 예단하는 건 경계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