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blog.daum.net·k2gim·

Re:왕유 [王維, 699?~759]

굴어당 2011. 7. 7. 15:31

중국 당(唐)의 시인이자 화가로서 자연을 소재로 한 서정시에 뛰어나 ‘시불(詩佛)’이라고 불리며, 수묵(水墨) 산수화에도 뛰어나 남종문인화의 창시자로 평가를 받는다.
별칭 자 마힐(摩詰)
국적 중국 당나라
활동분야 문학
출생지 중국 산시성[山西省]
주요저서 《왕우승집》
주요작품 《창주도(滄州圖)》,《망천도(輞川圖)》
본문
중국 당()의 시인이자 화가로서 자()는 마힐()이고 분주(, 지금의 西 ) 출신이다. 상서우승()의 벼슬을 역임하여 왕우승()이라고도 불린다. 그가 태어난 해와 죽은 해는 《구당서()》와 《신당서()》에 각기 다르게 기술되어 있다. 《구당서()》에는 699년에 태어나 759년에 죽은 것으로 되어 있으나, 《신당서()》에는 701년에 태어나 761년에 죽은 것으로 나타나 있다.

사마() 벼슬을 하던 왕처렴()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그의 어머니는 독실한 불교도였다. 때문에 왕유는 어려서부터 불교의 영향을 크게 받았는데, 그의 이름인 유()와 자()인 마힐()도 《유마경(経)》에 나오는 거사() ‘유마힐()’의 이름에서 비롯된 것이다. 아우인 진()과 함께 어려서부터 시()와 서(), 음곡() 등에 뛰어난 재주를 나타냈다. 9살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으며, 15살에는 당()의 수도였던 장안(, 지금의 西)으로 유학을 가서 황실()에까지 이름을 떨쳤다. 현종(, 재위 712∼756) 때인 721년( 9년)에 진사()에 급제()하여 태악승()이 되었다. 한때 제주(, 지금의 )의 사창참군()으로 좌천되었다가 관직을 떠나기도 하였으나, 734년( 22년) 우습유()로 발탁되어 다시 중앙의 관직으로 복귀한 뒤 감찰어사(), 좌보궐(), 고부낭중() 등을 역임하였다. 어머니 최씨()가 죽은 뒤 상()을 치르기 위해 관직에서 잠시 물러나기도 했지만, 현종() 말기에는 이부낭중()과 급사중() 등의 요직()을 역임하였다.

755년 안사의 난이 일어나고, 756년 장안()이 점령되자 왕유()는 반란군에 사로잡혀 뤄양[]으로 끌려갔다. 이 곳에서 그는 벼슬을 받았지만 이를 탐탁지 않게 여기고 남전(, 西 동남의 )의 중난산[] 기슭에 세운 망천장()에 머물며 시()로서 자신의 마음을 나타냈다. 758년 현종()의 뒤를 이은 숙종(, 재위 756~762)이 반란군을 물리치고 장안()과 뤄양[]을 탈환한 뒤에 그는 안녹산(祿)에게 벼슬을 받은 일로 문책을 받았지만 사정이 인정되어 사면()을 받았다. 그리고 태자중윤()으로 등용된 뒤, 태자중서자(), 중서사인(), 급사중()을 거쳐 상서우승()이 되었다.

이처럼 왕유()는 당() 문화가 가장 화려하게 번성했던 시기에 고위 관직을 역임했을 뿐 아니라, 시대를 대표하는 시인이자 화가, 음악가로서 다방면에 모두 이름을 떨쳤다. 시인으로서 그는 시선()이라고 불리는 이백(, 701~762), 시성()이라고 불리는 두보(, 712~770)와 함께 중국의 서정시 형식을 완성한 3대 시인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그의 시에는 불교의 영향이 많이 나타나있어 '시불()’이라고도 불린다. 그는 그림에도 뛰어나 남종문인화()의 개조()로 여겨지고 있다. 송(, 960∼1279) 때의 소식(, 1036~1101)은 그의 시와 그림을 “시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다( )”라고 평하였다.

왕유()의 시는 전기와 후기가 뚜렷한 차이를 나타낸다. 전기의 시들이 도회지의 삶을 소재로 하고 있는데 비해 후기의 시들은 전원 생활과 자연의 정취들을 나타내는 작품들이 주를 이룬다. 그 가운데 자연의 청아한 정취를 소재로 한 후기의 작품들이 특히 높은 예술적 성취를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평가를 받는데, 만년()에 남전()의 망천장()에 은거하면서 지은 작품들이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자연을 소재()로 한 오언() 율시()와 절구()에 뛰어난 성취를 보여 육조() 시대부터 내려온 자연시()를 완성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동진(, 317∼419) 도연명(, 365~427)의 전원시()와 송(, 420∼478) 사령운(, 385~433)의 산수시()의 영향을 받아 회화(畫)의 기법으로 자연의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자연시()를 크게 발달시켰다. 당() 시대의 자연시() 전통을 대표하는 인물을 ‘왕맹위유()’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왕유()와 위응물(, 737~804), 맹호연(, 689~740), 유종원(, 773~819)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들 가운데에서도 왕유는 자연시()를 대표하는 중심 인물로 평가를 받는다. 그의 시는 《왕우승집()》으로 전해진다.

한편 그는 정건(), 오도자(呉) 등과 함께 중국 남종화()의 개조()로 여겨지고 있으며, 전문적인 화가가 아니라 시인이나 문인들이 그리는 문인화()의 발달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그는 인물이나 꽃, 대나무, 산수()의 정경 등 다양한 소재를 그림으로 나타냈는데, 특히 수묵() 산수화()로 이름을 떨쳤다. 당시에는 장안()에 있는 건축물에 그린 ‘장벽산수화()’나 《창주도()》, 《망천도()》 등이 널리 알려져 있었지만 오늘날에 확실한 진본()들은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그의 작품들이 후대에 큰 영향을 끼쳐 구도나 표현들을 모방한 사본()들이 다양하게 만들어졌기 때문에 이들 사본()들과 기록들에 근거해 어느 정도 그 작품들의 구도와 내용들이 확인되고 있다.

,,,,,,,,,,,,,,,,,,,,,,,,,,,,,,,,,,,,,,,,,,,,,,,,,,,,,,,,,,,,,,,,,,,

王维

baikeViewInfo.expIndex="0";

求助编辑百科名片

  
王维画像

王维生于公元701年,字摩诘,汉族,祖籍山西祁县,唐朝诗人,外号“诗佛”。开元九年(721年)中进士,任太乐丞相。今存诗400余首。王维精通佛学,佛教有一部《维摩诘经》,是维摩诘向弟子们讲学的书,这是王维名和字的由来。王维诗书画都很有名,非常多才多艺。音乐也很精通。受禅宗影响很大。

中文名: 王维
别名: 王摩诘,诗佛
国籍: 中国
出生地: 中国山西
出生日期: 公元701年
逝世日期: 公元761年
职业: 诗人
信仰: 佛教
主要成就: 创造了水墨山水画派
近体诗严守声律 意态豪放
代表作品: 九月九日忆山东兄弟》,《王摩诘文集》

目录

人物简介
人物生平
诗集造诣
诗集内容及著名作品
  1. 二、 王维山水诗的基本特点
  2. 三、 王维的山水诗对后世的影响
绘画理论著作
  1. 《山水论》
  2. 《山水诀》
画作评价
人物评价
王维诗选
展开

bk.view.catalog().start("0");
  

经历

  王维生于公元701年,开元九年(721年)中进士,任太乐丞,因伶人舞黄狮子受累,贬为济州司仓参军。张九龄执政,擢为右拾遗,又迁监察御史。开元二十五年奉命出塞,为凉州河西节度幕判官。此后半官半隐居。安史之乱被捕后被迫出任为伪职,战乱平息后下狱。后官至尚书右丞。

编辑本段人物简介

  王维(701年-761年),字摩诘(jié、jí) ,人称诗佛 ,名字合之为维摩诘,维摩诘乃
  

王维画像

是佛教中一个在家的大乘佛教的居士,是著名的在家菩萨,意译为净名、无垢称诘,意思是以洁净,没有染污而称的人(古人的名和字可以相成,所以维和摩诘一为名一为字是没有问题的,请不要再修改说王维的字“摩诘”是“很脏”了)。可见王维的名字中已与佛教结下了不解之缘。王维生前,人们就认为他是“当代诗匠,又精禅上理。”(苑咸《酬王维序》),死后更是得到了“诗佛”的称号。王维出生在一个虔诚的佛教徒的家庭里,根据王维写的《请施庄为寺表》云:“亡母故博陵县君崔氏,师事大照禅师三十余年,褐衣蔬食,持戒安禅,乐住山林,志求寂静。”王维从小就受到了母亲的熏陶,同时,根据《王右丞集注》卷二五,有一篇《大荐福寺大德道光禅师塔铭》,文中述及了诗人同当代名僧道光禅师的关系是说:“维十年座下,俯伏受教,欲以毫末度量虚空,无有是处,志其舍利所在而已。”可见王维确实也佛家因缘不浅,其晚年更是过着僧侣般的生活。据《旧唐书》记载:“在京师,长斋,不衣文采,日饭十数名僧,以玄谈为乐,斋中无所有,惟茶铛药臼,经案绳床而已。退朝之后,焚香独坐,以禅颂为事。”此时的王维俨然是一僧侣了。盛唐时期的著名诗人,官至尚书右丞,原籍祁(今山西祁县),迁至蒲州(今山西永济),崇信佛教,晚年居于蓝田辋川别墅。他是唐代山水田园派的代表之一。与孟浩然并称“王孟”。因曾任尚书右丞,世称“王右丞”。
  王维青少年时期即赋于文学才华。开元九年(721年) 中进士第,为大乐丞。因故谪济州司仓参军。后归至长安。开元二十二年(734年)张九龄为中书令。王维被擢为右拾遗。其时作有《献始兴公》诗,称颂张九龄反对植党营私和滥施
  

王维

爵赏的政治主张,体现了他当时要求有所作为的心情。二十四年 (736)张九龄罢相。次年贬荆州长史。李林甫任中书令,这是玄宗时期政治由较为清明到日趋黑暗的转折点。王维对张九龄被贬,感到非常沮丧,但他并未就此退出官场。开元二十五年,曾奉使赴河西节度副大使崔希逸幕,后又以殿中侍御史知南选,天宝中,王维的官职逐渐升迁。安史乱前,官至给事中,他一方面对当时的官场感到厌倦和担心,但另一方面却又恋栈怀禄,不能决然离去。于是随俗浮沉,长期过着半官半隐的生活......
  王维在诗歌上的成就是多方面的,无论边塞、山水诗、律诗还是绝句等都有流传人口的佳篇。他的诗句被苏轼称为“味摩诘之诗,诗中有画,观摩诘之画,画中有诗”。他确实在描写自然景物方面,有其独到的造诣。无论是名山大川的壮丽宏伟,或者是边疆关塞的壮阔荒寒,小桥流水的恬静,都能准确、精炼地塑造出完美无比的鲜活形象,着墨无多,意境高远,诗情与画意完全融合成为一

王维诗画(11张)
个整体。
  山水田园诗派是盛唐时期的两大诗派之一,这一诗派是陶渊明、谢灵运、谢朓的后继者,这一诗派的诗人以擅长描绘山水田园风光而著称,在艺术风格上也比较接近,通过描绘幽静的景色,借以反映其宁静的心境或隐逸的思想,因而被称为“山水田园诗派”。其主要作家是孟浩然、王维、常健、祖咏、裴迪等人,其中成就最高、影响最大的是王维和孟浩然,也称为“王孟”。

编辑本段人物生平

  早熟,与其小一岁的弟弟缙幼年均聪明过人。十五岁时去京城应试,由于他能写一手好诗,工于书画,而且还有音乐天赋,所以少年王维一至京城便立即成为京城王公贵族的宠儿。有关他在
  

王维塑像

音乐上的天赋,《唐国史补》曾有这样一段故事:一次,一个人弄到一幅奏乐图,但不知为何题名。王维见后回答说 :“这是《霓裳羽衣曲》的第三叠第一拍。”请来乐师演奏,果然分毫不差(根据沈括《梦溪笔谈》卷十七“书画”的考证,《霓裳羽衣曲》第三叠并没有拍,是散曲,白居易的句子“中序擘騞初入拍”也可以说明这一点。沈括精通音律,其言可信。王维工于音律,是正史所载之事,但这个故事却是编造的)。
  在诗歌方面,有他十五、十七、十八岁时写成的有文字记载的资料。可见,他在十几岁时已经是位有名的诗人了。这在诗人中是罕见的。当时,在那贵族世袭的社会中,像王维这样多才多艺的资质,自然会深受赞赏。因此,二十一岁时就考中了进士。
  出仕后,王维利用官僚生活的空余时间,在京城的南蓝田山麓修建了一所别墅,以修养身心。该别墅原为初唐诗人宋之问所有,那是一座很宽阔的去处,有山有湖,有林子也有溪谷,其间散布着若干馆舍。王维在这时和他的知心好友度着悠闲自在的生活。这就是他的半官半隐的生活情况。
  一直过着舒服的生活的王维,到了晚年却被卷入意外的波澜当中。玄宗天宝十四年(755)爆发了安史之乱。在战乱中他被贼军捕获,被迫当了伪官。而这在战乱平息后却成了严重问题,他因此被交付有司审讯。按理投效叛军当斩,幸其在乱中曾写过思慕天子的诗,加上当时任刑部侍郎的弟弟(曾跟随皇帝出逃)的求情,恳请将其官职等换其兄性命,王维才得免于难,仅受贬官处分。其后,又升至尚书右丞之职。
  王维早年有过积极的政治抱负,希望能作出一番大事业,后值政局变化无常而逐渐消沉下来,吃斋念佛。四十多岁的时候,他特地在长安东南的蓝田县辋川营造了别墅,过着半官半隐的生活。《辋川闲居赠裴秀才迪》这首诗是他隐居生活中的一个篇章,主要内容是“言志”,写诗人远离尘俗,继续隐居的愿望。诗中写景并不刻意铺陈,自然清新,如同信手拈来,而淡远之境自见,大有渊明遗风。
  《旧唐书·王维传》
  王维,字摩诘,太原祁人。父处廉,终汾州司马,徙家于蒲,遂为河东人。维开元九年进士擢第。事母崔氏以孝闻。与弟缙俱有俊才,博学多艺亦齐名,闺门友悌,多士推之。历右拾遗、监察御史、左补阙、库部郎
  

王维

中。居母丧,柴毁骨立,殆不胜丧。服阕,拜吏部郎中。天宝末,为给事中。
  禄山陷两都,玄宗出幸,维扈从不及,为贼所得。维服药取痢,伪称瘖病。禄山素怜之,遣人迎置洛阳,拘于普施寺,迫以伪署。禄山宴其徒于凝碧宫,其乐工皆梨园弟子、教坊工人。维闻之悲恻,潜为诗曰:“万户伤心生野烟,百官何日再朝天?秋槐花落空宫里,凝碧池头奏管弦。”贼平,陷贼官三等定罪。维以《凝碧诗》闻于行在,肃宗嘉之。会缙请削己刑部侍郎以赎兄罪,特宥之,责授太子中允。乾元中,迁太子中庶子、中书舍人,复拜给事中,转尚书右丞。
  维以诗名盛于开元、天宝间,昆仲宦游两都,凡诸王驸马豪右贵势之门,无不拂席迎之,
  

王维

宁王、薛王待之如师友。维尤长五言诗。书画特臻其妙,笔踪措思,参于造化,而创意经图,即有所缺,如山水平远,云峰石色,绝迹天机,非绘者之所及也。人有得《奏乐图》,不知其名,维视之曰:“《霓裳》第三叠第一拍也。” 好事者集乐工按之,一无差,咸服其精思。
  维弟兄俱奉佛,居常蔬食,不茹荤血,晚年长斋,不衣文彩。得宋之问蓝田别墅,在辋口;辋水周于舍下,别涨竹洲花坞,与道友裴迪浮舟往来,弹琴赋诗,啸咏终日。尝聚其田园所为诗,号《辋川集》。在京师日饭十数名僧,以玄谈为乐。斋中无所有,唯茶铛、药臼、经案、绳床而已。退朝之后,焚香独坐,以禅诵为事。妻亡不再娶,三十年孤居一室,屏绝尘累。乾元二年七月卒。临终之际,以缙在凤翔,忽索笔作别缙书,又与平生亲故作别书数幅,多敦厉朋友奉佛修心之旨,舍笔而绝。
  代宗时,缙为宰相。代宗好文,常谓缙曰:“卿之伯氏,天宝中诗名冠代,朕尝于诸王座闻其乐章。今有多少文集,卿可进来。”缙曰:“臣兄开元中诗百千余篇,天宝事后,十不存一。比于中外亲故间相与编缀,都得四百余篇。”翌日上之,帝优诏褒赏。缙自有传。

编辑本段诗集造诣

  
  

王维

[1]
 他是盛唐诗人的代表。王维长年在京师做官,又多与亲王贵主交接往来,文名盛极一时,被公认为开元、天宝时期的文宗。他擅长五言诗,又因他精通音乐,故其所作五言诗容易合乐,传播既广,声名亦高。王维写的近体诗,严守声律,意态豪放,他写的风景诗多是情景并胜。殷蟠评价他的诗说:“维诗辞秀调雅,意新理惬,在泉为珠,着壁成绘,一字一句,皆出常境。”王维在写诗的技巧上有着很高的成就,但由于他有消极遁世的思想,在其不少诗篇中,含有逃避现实的消极因素。因此,在文学史上称他与孟浩然同为“隐逸诗派”的代表人物。王维爱慕他人诗文中的佳句,往往直接引入自己的诗文中,如“行到水穷处,坐看云起时”,是《文苑英华》集中的诗句;“漠漠水田飞白鹭,阴阴夏木啭黄鹂”,又是李嘉之祐诗句,故有人称“王维好取人嘉句”。唐代宗对王维的诗给予了很高的评价,他在《批答王缙进集表手敕》中说:“卿之伯氏,天下文宗,经历先朝,名高希代,时论归美,诵于人口。”到了唐朝末年,梨园弟子仍相沿唱王维绝句,足见其影响之深。
  王维诗现存不满400首。其中最能代表其创作特色的是描绘山水田园等自然风景及歌咏隐居生活的诗篇。王维描绘自然风景的高度成就,使他在盛唐诗坛独树一帜,成为山水田园诗派的代表人物。他继承和发展了谢灵运开创的写作山水诗的传统,对陶渊明田园诗的清新自然也有所吸取,使山水田园诗的成就达到了一个高峰,因而在中国诗歌史上占有重要的位置。与孟浩然并称,是唐代山水田园诗派的代表人物。《旧唐书·王维传》说代宗时王缙编次王维诗 400余篇。又王缙《进王右丞集表》云编次王维诗文凡10卷。述古堂原藏有南宋姚沙本《王右丞文集》10卷,后归陆心源□宋楼。北京图书馆藏有宋蜀刻本《王摩诘文集》10卷,上海古籍出版社1982年据以影印出版。元刻有刘须溪评点《王右丞集》(诗集) 6卷,《四部丛刊》据以影印,其中已杂有钱起、姚象、崔兴宗等人作品。明人顾起经有《类笺唐王右丞诗集》10卷,附文集4卷,这是现存最早的王维诗注本。清赵殿成《王右丞集笺注》是迄今为止较好的注本。除笺释全部诗文外,并附评语,对于作者可疑的诗歌加以说明,间有考订;又收辑有关王维生平和诗画评论的资料,作为附录。中华书局上海编辑所于1961年将赵注本重加校订,排印出版。又郑振铎曾以《四部丛刊》本为底本,用赵殿成注本等四种版本加以校勘,收入《世界文库》中。事迹见新、旧《唐书》本传。顾起经注本和赵殿成注本都附有注者所撰王维年谱。今人陈贻有《王维生平事迹初探》一文,后附《王维简要年表》(载《唐诗论丛》)。
  王维的创作才能是多方面的。他的五律和五、七言绝造诣最高,同时其他各体也都擅长,这在整个唐代诗坛是颇为突出的。他的七律或雄浑华丽,或澄净秀雅,为明七子所师法。七古《桃源行》、《老将行》、《同姚傅答贤弟》等,形式整饬而气势流荡,堪称盛唐七古中的佳篇。散文也有佳作。 《山中与裴秀才迪书》清幽隽永,极富诗情画意,与其山水诗的风格相近。
  王维集中最不足取的是那些歌功颂德的应制诗、阿谀奉承的唱和诗和直接宣扬佛理的作品。它们的内容多不足道,语言亦多陈词套语,或是枯燥乏味。但其中也有少数名篇佳句,如“云里帝城双风阙,雨中春树万人家”(《奉和圣制从蓬莱向兴庆阁道中留春雨中春望之作应制》),气象高华,体物细致,亦为人所称道。王维诗《少年行》插图 选自明代万历集雅斋刻本《唐诗七言画谱》 。

编辑本段诗集内容及著名作品

  
  

王维像

[2]
 王维的大多数诗都是山水田园之作,在描绘自然美景的同时,流露出闲居生活中闲逸萧散的情趣。王维的写景诗篇,常用五律和五绝的形式,篇幅短小,语言精美,音节较为舒缓,用以表现幽静的山水和诗人恬适的心情,尤为相宜。王维从中年以后日益消沉,在佛理和山水中寻求寄托,他自称“一 悟寂为乐,此生闲有余”(《饭覆釜山僧》)。这种心情充分反映于他的诗歌创作之中。过去时代不少人推崇王维此类诗歌,一方面固然由于它们具有颇高的艺术技巧,一方面也由于对其中体现的闲情逸致和消极思想产生共鸣。明代胡应麟称王维五绝“却入禅宗”,又说《鸟鸣涧》、《辛夷坞》二诗,“读之身世两忘,万念皆寂”(《诗薮》),便是一个明证。雪景 传为王维作 王维其他题材的作品,如送别、纪行之类的诗中,也经常出现写景佳句,如“远树带行客,孤城当落晖”(《送綦毋潜落第还乡》)、“山中一夜雨,树杪百重泉”(《送梓州李使君》)、“日落江湖白,潮来天地青”(《送邢桂州》)、“大漠孤烟直,长河落日圆”(《使至塞上》)等,都是传诵不衰的名句。
  以军旅和边塞生活为题材的《从军行》、《陇西行》、《燕支行》、《观猎》、《使至塞上》、《出塞作》等,都是壮阔飞动之作。《陇头吟》、《老将行》则抒发了将军有功不赏的悲哀,反映了封建统治阶级内部矛盾的一个侧面。《观猎》生动地描写了打猎时的情景。《夷门歌》歌咏历史人物的侠义精神。《少年行》四首表现侠少的勇敢豪放,形象鲜明,笔墨酣畅。这些作品一般认为是王维早期所作。还有一些诗歌,如贬官济州时所作《济上四贤咏》以及《寓言》、《不遇咏》和后期所作《偶然作》六首之五《赵女弹箜篌》,对于豪门贵族把持仕途、才士坎坷不遇的不合理现象表示愤慨,反映了开元、天宝时期封建政治的某些阴暗面。《洛阳女儿行》、《西施咏》、《竹里馆》则以比兴手法,寄托了因贵贱不平而生的感慨和对权贵的讽刺。还有抒写妇女痛苦的《息夫人》、《班婕妤》等,悲惋深沉,也具有一定的社会意义。一些赠送亲友和描写日常生活的抒情小诗,如《送别》“山中相送罢”、《临高台送黎拾遗》、《送元二使安西》、《送姚子福归江东》,《九月九日忆山东兄弟》、《相思》、《杂诗》“君自故乡来”等,千百年来传诵人口;《送元二使安西》、《相思》等在当时即播为乐曲,广为传唱。这些小诗都是五言或七言绝句,感情真挚,语言明朗自然,不用雕饰,具有淳朴深厚之美,可与李白、王昌龄的绝句比美,代表了盛唐绝句的最高成就。
  王维山水诗
  一、王维山水诗的创作基础山水田园诗源远流长。早在《诗经》、《楚辞》中就有一些描写这方面内容的诗句。陶、谢以来,山水田园生活已经成为诗歌创作的重要题材,并积累了丰富的艺术经验。王维在前人的基础上踵事增华,学陶之自然浑成,取谢之细丽精工。加之王维有高度的文学、绘画和音乐修养,因此,王维一生创作了许多不朽的诗作,成为诗坛上开宗立派的大师。此乃其山水诗形成的文学基础。 纵观王维的一生,大约可以四十岁为界,划分为前后两期,前期仕途顺利,政治热情高涨,充满济世之志。并写下了很多咏政诗,边塞诗,风格也较为热烈豪放。四十岁后,随着李林甫执政,唐代政治逐渐走向腐败,他的政治热情受到压抑,逐步走上一条回避政治斗争,追求的闲适的生活道路。他先是在终南山、蓝田、辋川等了隐居,身为官吏,却全身远祸于林下。期间创作了许多优美的山水田园诗。此乃其山水诗。创作的社会基础和思想基础。盛唐的殷在《河岳英灵集》中评价王维的诗曰:“词秀调雅,意新理惬;在泉成珠,着壁成绘;一字一句,皆出常境”。

二、 王维山水诗的基本特点

  王维以清新淡远,自然脱俗的风格,创造出一种“诗中有画,画中有诗”“诗中有禅”的意境,在诗坛树起了一面不倒的旗帜。
  (一)诗如画卷,美不胜收
  苏轼曾说:“味摩诘之诗,诗中有画,观摩诘之画,画中有诗”(《东坡志林》)。王维多才多艺,他把绘画的精髓带进诗歌的天地,以灵性的语言,生花的妙笔为我们描绘出一幅幅或浪漫、或空灵、或淡远的传神之作。他的山水诗关于着色取势,如“漠漠水田飞白鹭,阴阴夏木啭黄鹂”(《积雨辋川庄作》)“雨中蓝色绿堪染,水上有飞花红欲燃。”(《辋川别业》)“白水明田外,碧峰出山后”(《新晴野望》)
  王维的山水诗关于结构画面,使其层次丰富,远近相宣,乃至动静相兼,声色俱佳,更多一层动感和音乐美,如“松含风声里,花对池中影”(《林园即事寄舍弟》)“万壑树参天,千山响杜鹃。山中一夜雨,树杪百重泉。”(《送梓州李使君》“郡邑浮前浦,波澜动远空。”(汉江临眺)“草间蛩响临秋急,山里蝉声落暮悲。(《早秋山中作》)又如《山居秋螟》:空山新雨后,天气晚来秋。明月松间照,清泉石上流。竹喧归浣女,莲动下渔舟。随意春芳歇,王孙自可留。有远景近景,仰视俯视,冷
  
  

王维诗境

色暖色,人声水声,把绘画美、音乐美与诗歌美充分地结合起来。 王诗的画境,具有清淡静谧的人性特征。如《竹里馆》:独坐幽篁里,弹琴复长啸,深林人不知,明月来相照 。幽静的竹林,皎洁的月光,让诗人不禁豪气大发,仰天长啸,一吐胸中郁闷。而千思万绪,竟只有明月相知。
  神韵的淡远,是王维诗中画境的灵魂。《鹿柴》云:“空山不见人,但闻人语响,返景入深林,复照青苔上。”诗中着意描写了作者独处于空山深林,看到一束夕阳的斜晖,透过密林的空隙,洒在林中的青苔上,在博大纷繁的自然景物中,诗人捕捉到最引人入胜的一瞬间,有简淡的笔墨,细致入微地给出一幅寂静幽清的画卷,意趣悠远,令人神往。
  (二)情景交融,浑然天成。
  王维山水诗写景如画,在写景的同时,不少诗作也饱含浓情。王维的很多山水诗充满了浓厚的乡土气息和生活情趣,表现自己的闲适生活和恬静心情。如《田园乐七首》其六曰:“桃红复言宿雨,柳绿更带青烟。花落家僮未扫,莺啼山客犹眠。”《辋川闲居赠裴秀才迪》曰:“寒山转苍翠, 秋水日潺湲。倚杖柴门外,临风听暮蝉。渡头余落日,墟里上孤烟。复值接舆醉,狂歌五柳前。”在优美的景色和浓厚的田园气氛中抒发自己冲淡闲散的心情。还有如《渭川田家》:“ 斜光照墟落,穷巷牛羊归。野老念牧童,倚杖候荆扉。雉雊麦苗秀,蚕眠桑叶稀。田夫荷锄至,相见语依依。即此羡闲逸, 怅然吟《式微》。”从细微处入笔,捕捉典型情节,抒发无限深情。
  王维写情还多言及相思别离和朋友间的关怀,慰勉之情。在《淇上别赵仙舟》一诗中写道:相逢方一笑,相送还成泣。祖帐已伤离,荒城复愁入。天寒远山净,日暮长河急。解缆君已遥,望君犹伫立。浓郁深情,扦面而至。
  王维诗歌中借景寓情,以景衬情的手法,使他写景饶有余味,抒情含蓄不露。如《临高台送黎拾遗》:“相送临高台,川原杳何极。日暮飞鸟还,行人去不息。”写离情却无一语言情而只摹景物。《送杨长史赴果州》:“鸟道一千里,猿啼十二时。”既是景语,也是情名,将道路的荒凉之景与行者的凄楚之情融为一体,自然、含蓄而又回味深长。
  在王维的诗歌中,有不少采用了直抒胸臆的表达方式,而且往往显得自然流畅,蕴藉含蓄。比如《送元二使安西》:渭城朝雨浥轻尘, 客舍青青柳色新。 劝君更尽一杯酒, 西出阳关无故人。关怀体贴之情溢于言表。
  王维写情之处妙处还在于对现实情景平易通俗的描写中,蕴含深沉婉约的绵绵情思。其《相思》一篇,托小小红豆,咏相思情愫,堪称陶醉千古相思的经典之作。
  王维写情,又多隐喻比兴。如《杂诗二首》:家住孟津河,门对孟津口。常有江南船,寄
  
  

王维小像

书家中否。君自故乡来,应知故乡事。来日绮窗前,寒梅著花未。已见寒梅发,复闻啼鸟声。心心视春草,畏向阶前生。全篇不著“相思”二字,看似信手拈来,实则句句意深。藉“寒梅”、“春草”喻意,相思之情跃然纸上。 (三)诗渗禅意,流动空灵。
  与上述相反,王维又有很多诗清冷幽邃,远离尘世,无一点人间烟气,充满禅意,山水意境已超出一般平淡自然的美学,含义而进入一种宗教的境界,这正是王维佛学修养的必然体现。王维的生活的时代,佛教繁兴。士大夫学佛之风很盛。政治上的不如意,一生几度隐居,使王维一心学佛,以求看空名利,摆脱烦恼。
  有些诗尚有踪迹可求,如《过香积寺》云:不知香积寺,数里入云峰。薄暮空潭曲,安禅制毒龙。”有些诗显得更空灵,不用禅语,时得禅理。有如羚羊挂角,无迹可求。如行到水穷处, 坐看云起时。 偶然值林叟, 谈笑无还期(《终南别业》) 松风吹解带,山月照弹琴。 君问穷通理,渔歌入浦深(《酬张少府》)充满一派亲近自然,身与物化,随缘任运的禅机。又如:空山不见人,但闻人语响。 返景入深林,复照青苔上(《鹿柴》) 人闲桂花落,夜静春山空。 月出惊山鸟, 时鸣春涧中。(《鸟鸣涧》) 一切都是寂静无为的,虚幻无常,没有目的,没有意识,没有生的喜悦,没有死的悲哀,但一切又都是不朽的,永恒的,还像胡应麟《诗薮》和姚周星《唐诗快》所评:使人“读之身世两忘,万念皆寂,不谓声律之中,有此妙诠”。

三、 王维的山水诗对后世的影响

  王维的山水诗大都写于后期,与前人比较,他扩大了这类诗的内容,增添了它的艺术风采,使山水诗的成就达到前所未有的高度,这是他对中国古典诗歌的突出贡献。其中,写乡村景物和农家生活的田园诗充满着牧歌情调,表现他闲逸萧散的情趣和恬淡自适的心境。如《渭川田家》 ,《春中田园作》。更多的作品着重写农村美丽如画的风光,《新晴野望》:“新晴原野旷,极目无氛垢。农月无闲人,倾家事南亩。”《山居秋暝》写暮雨方霁,山村呈现的美景。王诗中那些描绘大自然幽静恬美的山水诗具有更高的审美价值。如《青溪》:言入黄花川,第每逐清溪水。随山将万转。趣途无百里。声喧乱石中,色静深松里。漾漾没菱荇,澄澄映葭苇。我心素已闲,清川淡如此。请留盘石上,垂钓将已矣。
  通篇以心照水,用水衬心,物我融成一片,反映一种内在的对美的追求。但有些山水田园诗着力渲染空寂意境与落寞情怀。如《竹里暄》 、《辛夷坞》情走淡薄,旨归静趣。这无疑会对后世山水诗产生一定的消极影响。
  王维具有多种才艺,不同艺术相互渗透对其诗歌诗歌产生了深刻的影响。他以画入诗,使其山水诗形成了富有诗情画意的基本特征。
  王诗语言含蓄,清新明快,句式、节奏富于变化,音韵响亮、和谐,具有音乐美。 总之,王维的山水诗无论从诗的题材内容,还是诗歌的艺术丰采上都对后世诗歌产生了深远的影响。

编辑本段绘画理论著作

《山水论》

  凡画山水,意在笔先。丈山尺树,寸马分人。远人无目,远树无枝。远山无石,
  

王维画

隐隐如眉;远水无波,高与云齐。此是诀也。
  山高云塞,石壁泉塞,道路人塞。石看三面,路看两头,树看顶头,水看风脚。此是法也。
  凡画山水,平夷顶尖者巅,峭峻相连者崖,悬石者岩,形圆者峦,路通者川。两山夹道者名为壑也,两山夹水名为涧也,似岭而高者名为陵也,极目而平者名为坂也。依此者粗知之仿佛也。
  观者先看气象,后辨清浊。定宾主之朝揖,列群峰之威仪,多则乱,少则慢,不多不少,要分远近。远山不得连近山,远水不得连近水。山腰掩抱,寺舍可安;断岸坂堤,小桥小置。有路处则林木,岸绝处则古渡,水断处则烟树,水阔处则征帆,林密处居舍。临岩古木,根断而缠藤;临流石岸,欹奇而水痕。
  凡画林木,远者疏平,近者高密,有叶者枝嫩柔,无叶者枝硬劲。松皮如鳞,柏皮缠身。生土上者根长而茎直,生石上者拳曲而伶仃。古木节多而半死,寒林扶疏而萧森。
  有两不分天地,不辨东西。有风无雨,只看树枝。有雨无风,树头低压,行人伞笠,渔父蓑衣。雨霁则云收天碧,薄雾霏微,山添翠润,日近斜晖。
  早景则千山欲晓,雾霭微微,朦胧残月,气色昏迷。晚景则山衔红日,帆卷江渚,路行人急,半掩柴扉。
  春景则雾锁烟笼,长烟引素,水如蓝染,山色渐清。夏景则古木蔽天,绿水无波,穿云瀑布,近水幽亭。秋景则天如水色,簇簇幽林,雁鸿秋水,芦岛沙汀。冬景则借地为雪,樵者负薪,渔舟倚岸,水浅沙平。凡画山水,须按四时。或曰烟笼雾锁,或曰楚岫云归,或曰秋天晓霁,或曰古冢断碑,或曰洞庭春色,或曰路荒人迷。如此之类,谓之画题。
  山头不得一样,树头不得一般。山籍树而为衣,树籍山而为骨。树不可繁,要见山之秀丽;山不可乱,须显山之精神。能如此者,可谓名手之画山水也。

《山水诀》

  夫画道之中,水墨最为上。肇自然之性,成造化之功。或咫尺之图,写千里之景。东西南北,宛尔目前;春夏秋冬,生于笔下。初铺水际,忌为浮泛之山;次布路歧,莫作连绵之道。主峰最宜高耸,客山须是奔趋。回抱处僧舍可安,水陆边人家可置。村庄著数树以成林枝须抱体;山崖合一水而瀑泻,泉不乱流。渡口只宜寂寂,人行须是疏疏。泛舟楫之桥梁,且宜高耸;著渔人之钓艇,低乃无妨。悬崖险峻之间,好安怪木;峭壁巉岩之通途。远岫与云容交接,遥天共水色交光。山钩锁处,沿流最出其中;路接危时,栈道可安于此。平地楼台,偏宜高柳人家;名山寺观,雅称奇杉衬楼阁。远景烟笼,深岩云锁。酒旗则当路高悬,客帆宜遇水低挂。远山须要低排,近树惟宜拔迸。手亲笔砚之馀,有时游戏三昧。岁月遥永,颇探幽微。妙悟者不在多言,善学者还从规矩。
  塔顶参天,不须见殿,似有似无,或上或下。芳堆土埠,半露檐廒;草舍芦亭,略呈樯柠。山分八面,石有三方。闲云切忌芝草样,人物不过一寸许,松柏上现二尺长。

编辑本段画作评价

  苏轼曾说:“味摩诘之诗,诗中有画;观摩诘之画,画中有诗。”(《东坡题跋·书摩诘蓝田烟雨图》)同一时期的殷璠在其著作《河岳英灵集》中评价王维之诗:“在泉成珠,著壁成绘。”王维不但有卓越的文学才能,而且是出色的画家,还擅长音乐。深湛的艺术修养,对于自然的爱好和长期山林生活的经历,使他对自然美具有敏锐独特而细致入微的感受,因而他笔下的山水景物特别富有神韵,常常是略事渲染,便表现出深长悠远的意境,耐人玩味。他的诗取景状物,极有画意,色彩映衬鲜明而优美,写景动静结合,尤善于细致地表现自然界的光色和音响变化。例如“声喧乱石中,色静深松里”(《青溪》)、“泉声咽危石,日色冷青松”(《过香积寺》)以及《鸟鸣涧》、《鹿柴》、《木兰柴》等诗,都有体物入微之作。王维诗《九月九日忆山东兄弟》插图 选自清代光绪刻本《名家画稿》。 并著有绘画理论著作《山水论》,《山水诀》。

编辑本段人物评价

  世有“李白是天才,杜甫是地才,王维是人才”之说。王维不仅是公认的诗佛,也是文人画的南山之宗(钱钟书称他为"盛唐画坛第一把交椅"),并且精通音律。是少有的全才。
  王维诗在其生前以及后世,都享有盛名。史称其“名盛于开元、天宝间,豪英贵人虚左以迎,宁、薛诸王待若师友”(《新唐书》本传)。唐代宗曾誉之为“天下文宗”(《答王缙进王维集表诏》)。杜甫也称他“最传秀句寰区满”(《解闷》十二首之八)。姚璠说:“维诗词秀调雅,意新理惬,在泉为珠,着壁成绘,一句一字,皆出常境。”(《河岳英灵集》)唐末司空图则赞其“趣味澄复,若清沈之贯达[3]”(《与王驾评诗书》)。昔人曾誉王维为“诗佛”,并与“诗圣”杜甫、“诗仙”李白并提。以思想内容而言,王维诗远不能与李、杜相提并论;而在艺术方面,王维确有其独特的成就与贡献。唐刘长卿、大历十才子以至姚合、贾岛等人的诗歌,都在不同程度上受到王维影响。直到清代,王士祯标举神韵,实际上也以其诗为宗尚。但这派诗歌,往往陶情风景,缺乏社会内容。

编辑本段王维诗选

  山居秋暝
  空山新雨后,天气晚来秋。
  明月松间照,清泉石上流。
  竹喧归浣女,莲动下渔舟。
  随意春芳歇,王孙自可留。
  送邢桂州
  铙吹喧京口,风波下洞庭。
  赭圻将赤岸,击汰复扬舲。
  日落江湖白,潮来天地青。
  明珠归合浦,应逐使臣星。
  鸟鸣涧
  人闲桂花落, 夜静春山空。
  月出惊山鸟, 时鸣春涧中。
  使至塞上
  单车欲问边,属国过居延。
  征蓬出汉塞,归雁入胡天。
  大漠孤烟直,长河落日圆。
  
萧关逢候骑(jì),都护在燕(yān)然。
  竹里馆
  独坐幽篁里,弹琴复长啸。
  深林人不知,明月来相照。
  辋川闲居赠裴秀才迪
  寒山转苍翠,秋水日潺潺。
  倚杖柴门外,临风听暮蝉。
  渡头余落日,墟里上孤烟。
  
夏值接舆醉,狂歌五柳前。
  九月九日忆山东兄弟
  独在异乡为异客,每逢佳节倍思亲。
  遥知兄弟登高处,遍插茱萸少一人。
  汉江临眺
  楚塞三湘接,荆门九派通。
  江流天地外,山色有无中。
  郡邑浮前浦,波澜动远空。
  襄阳好风日,留醉与山翁。
  送元二使安西
  渭城朝雨邑轻尘,客舍青青柳色新。
  劝君更尽一杯酒,西出阳关无故人。
  鹿柴
  空山不见人,但闻人语响。
  返景入深林,复照青苔上。
  
  

王维诗

相思
  红豆生南国,春来发几枝?
  愿君多采撷,此物最相思。
  终南别业
  中岁颇好道,晚家南山陲。
  兴来每独往,胜事空自知。
  行到水穷处,坐看云起时。
  
偶然值林叟,谈笑无还期。
  归嵩山作
  清川带长薄,车马去闲闲。
  流水如有意,暮禽相与还。
  荒城临古渡,落日满秋山。
  迢递嵩高下,归来且闭关。
  终南山
  太乙近天都,连山接海隅。
  白云回望合,青霭入看无。
  分野中峰变,阴晴众壑殊。
  欲投人处宿,隔水问樵夫。
  过香积寺
  不知香积寺,数里入云峰。
  古木无人径,深山何处钟?
  泉声咽危石,日色冷青松。
  
薄暮空潭曲,安禅制毒龙。
  送别
  
山中相送罢,日暮掩柴扉。
  春草明年绿,王孙归不归?
  酬张少府
  
晚年惟好静,万事不关心。
  自顾无长策,空知返旧林。
  松风吹解带,山月照弹琴。
  群问穷通理,渔歌入浦深。
  送梓州李使君
  万壑树参天,千山响杜鹃。
  山中一夜雨,树杪百重泉。
  汉女输橦布,巴人讼芋田。
  文翁翻教授,不敢倚先贤。
  送别
  下马饮君酒,问君何所之。
  君言不得意,归卧南山陲。
  但去莫复问,白云无尽时。
  秋夜曲
  桂魄初生秋露微,轻罗已薄未更衣。
  银筝夜久殷勤弄,心怯空房不忍归!
  青溪
  言入黄花川,每逐青溪水。
  随山将万转,趣途无百里。
  声喧乱石中,色静深松里。
  漾漾泛菱荇,澄澄映葭苇。
  我心素已闲,清川澹如此。
  请留盘石上,垂钓将已矣。
  渭川田家
  斜阳照墟落,穷巷牛羊归。
  野老念牧童,倚杖候荆扉。
  雉雊麦苗秀,蚕眠桑叶稀。
  田夫荷锄立,相见语依依。
  即此羡闲逸,怅然吟式微。
  西施咏
  艳色天下重,西施宁久微。
  朝为越溪女,暮作吴宫妃。
  贱日岂殊众,贵来方悟稀。
  邀人傅脂粉,不自著罗衣。
  君宠益娇态,君怜无是非。
  当时浣纱伴,莫得同车归。
  持谢邻家子,效颦安可希!
  送綦毋潜落第还乡
  圣代无隐者,英灵尽来归。
  遂令东山客,不得顾采薇。
  既至金门远,孰云吾道非?
  江淮度寒食,京洛缝春衣。
  置酒长安道,同心与我违。
  行当浮桂棹,未几拂荆扉。
  远树带行客,孤城当落晖。
  吾谋适不用,勿谓知音稀。
  杂诗
  君自故乡来,应知故乡事。
  来日绮窗前,寒梅著花未?
  和贾舍人早朝大明宫之作
  绛帻鸡人送晓筹,尚衣方进翠云裘。
  九天阊阖开宫殿,万国衣冠拜冕旒。
  日色才临仙掌动,香烟欲傍衮龙浮。
  朝罢须裁五色诏,佩声归向凤池头。
  酬姚给事
  洞门高阁霭馀辉,桃李阴阴柳絮飞。
  禁里疏钟官舍晚,省中啼鸟吏人稀。
  晨摇玉佩趋金殿,夕奉天书拜琐闱。
  强欲从君无那老,将因卧病解朝衣。
  奉和圣制从蓬莱向兴庆阁道中留春雨中春望之作应制
  渭水自萦秦塞曲,黄山旧绕汉宫斜。
  銮舆迥出千门柳,阁道回看上苑花。
  云里帝城双凤阙,雨中春树万人家。
  为 乘阳气行时令,不是宸游玩物华。
  积雨辋川庄作
  积雨空林烟火迟,蒸藜炊黍饷东菑。
  漠漠水田飞白鹭,阴阴夏木啭黄鹂。
  山中习静观朝槿,松下清斋折露葵。
  野老与人争席罢,海鸥何事更相疑。
  送张五归山
  送君尽惆怅,复送何人归。
  几日同携手,一朝先拂衣。
  东山有茅屋,幸为扫荆扉。
  当亦谢官去,岂令心事违。
  新晴野(一作晚)望
  新晴原野旷。极目无氛垢。
  姚门临渡头。村树连溪口。
  白水明田外。碧峰出山後。
  农月无闲人。倾家事南亩。
  黄花川
  危径几万转,数里将三休。
  回环见徒侣,隐映隔林丘。
  飒飒松上雨,潺潺石中流。
  静言深溪里,长啸高山头。
  望见南山阳,白露霭悠悠。
  青皋丽已净,绿树郁如浮。
  曾是厌蒙密,旷然销人忧。
  濮阳兄季重前山兴
  秋色有佳兴,况君池上闲。
  悠悠西林下,自识门前山。
  千里横黛色,数峰出云间。
  嵯峨对秦国,合沓藏荆关。
  残雨斜日照,夕岚飞鸟还。
  故人今尚尔,叹息此颓颜。
  老将行
  少年十五二十时,步行夺得胡马骑。
  射杀山中白额虎,肯数邺下黄须儿!
  一身转战三千里,一剑曾当百万师。
  汉兵奋迅如霹雳,虏骑崩腾畏蒺藜。
  卫青不败由天幸,李广无功缘数奇。
  自从弃置便衰朽,世事蹉跎成白首。
  昔时飞箭无全目,今日垂杨生左肘。
  路旁时卖故侯瓜,门前学种先生柳。
  苍茫古木连穷巷,寥落寒山对虚牖。
  誓令疏勒出飞泉,不似颍川空使酒。
  贺兰山下阵如云,羽檄交驰日夕闻。
  节使三河募年少,诏书五道出将军。
  试拂铁衣如雪色,聊持宝剑动星文。
  愿得燕弓射大将,耻令越甲鸣吾君。
  莫嫌旧日云中守,犹堪一战取功勋!
  桃源行
  渔舟逐水爱山春,两岸桃花夹古津。
  坐看红树不知远,行尽青溪不见人。
  山口潜行始隈隩,山开旷望旋平陆。
  遥看一处攒云树,近入千家散花竹。
  樵客初传汉姓名,居人未改秦衣服。
  居人共住武陵源,还从物外起田园。
  月明松下房栊静,日出云中鸡犬喧。
  惊闻俗客争来集,竞引还家问都邑。
  平明闾巷扫花开,薄暮渔樵乘水入。
  初因避地去人间,及至成仙遂不还。
  峡里谁知有人事?世中遥望空云山。
  不疑灵境难闻见,尘心未尽思乡县。
  出洞无论隔山水,辞家终拟长游衍。
  自谓经过旧不迷,安知峰壑今来变?
  当时只记入山深,青溪几曲到云林。
  春来遍是桃花水,不辨仙源何处寻。
  洛阳女儿行
  洛阳女儿对门居,才可容颜十五馀。
  良人玉勒乘骢马,侍女金盘脍鲤鱼。
  画阁朱楼尽相望,红桃绿柳垂檐向。
  罗帷送上七香车,宝扇迎归九华帐。
  狂夫富贵在青春,意气骄奢剧季伦。
  自怜碧玉亲教舞,不惜珊瑚持与人。
  春窗曙灭九微火,九微片片飞花琐。
  戏罢曾无理曲时,妆成只是薰香坐。
  城中相识尽繁华,日夜经过赵李家。
  谁怜越女颜如玉,贫贱江头自浣纱!
  早春行
  紫梅发初遍,黄鸟歌犹涩。
  谁家折杨女,弄春如不及。
  爱水看妆坐,羞人映花立。
  香畏风吹散,衣愁露沾湿。
  玉闺青门里,日落香车入。
  游衍益相思,含啼向彩帷。
  忆君长入梦,归晚更生疑。
  不及红檐燕,双栖绿草时。
  从岐王过姚氏别业应教
  姚子谈经所,淮王我酒过。
  兴间略鸟缓,坐久落花多。
  经转回银烛,林开散工可。
  姚城时未启,前路拥第歌。
  从岐王在宴卫家山地应教
  座客香貂满,宫娃绍使张。
  涧花轻粉色,山月少灯光。
  积翠纱富睛,飞泉绣产原。
  还将歌舞出,归路莫愁长。
  同姚员外秋育寓直
  建礼高秋夜,承明候晓过。
  九门寒温彻,万井晤钟多。
  月回藏珠斗,云消出绝河。
  更渐衰朽质,南陌共鸣何。
  寄荆州张丞相
  所思竟何在,帐望深荆门。
  举世无相识,终身思旧思。
  方将与农圃,艺植老丘园。
  目尽南飞雁,何由寄一言。
  酬虞部苏员外过蓝田别业不见留之作
  贫居依谷口,乔木带荒村。
  石路枉回驾,山家难候门。
  渔舟胶标浦,猪火烧寒原。
  唯有白云外,疏钟闻夜猿。
  送张判官赴河西
  单车曾出塞,报国敢邀勋。
  见逐张征虏,今思霍冠军。
  沙平连白云,蓬卷入黄云。
  慷慨倚长剑,高歌一进君。
  送丘为落第归江东
  传君不得意,况复柳条春。
  为客黄金尽,还家白发新。
  五湖三亩宅、万里一归人。
  知尔不能荐,羞称献纳座。
  送友人前归
  万里春应反,三江雁亦稀。
  连天汉水广,孤客郢城归。
  郧国稻苗秀,楚人范米肥。
  悬知倚门望,遥识老菜衣。
  陇西行
  十里一走马。
  五里一扬鞭。
  都护军书至。
  匈奴围酒泉。
  关山正飞雪。
  烽戍(一作火)断无烟。
  观猎
  
风劲角弓鸣,将军猎渭城。
  草枯鹰眼疾,雪尽马蹄轻。
  忽过新丰市,还归细柳营。
  回看射雕处,千里暮云平。
  木兰柴
  秋山敛馀照,飞鸟逐前侣。
  彩翠时分明,夕岚无处所。
  送姚子福之江东
  
杨柳渡头行客稀,罟师荡桨向临圻。
  惟有相思似春色,江南江北送君归。

编辑本段王维墓

  据《蓝田县志》记载,王维墓位于辋川乡白家坪村东60米处,墓地前临飞云山下的辋川河岸,原墓地约13.3亩。现被压在向阳公司14号厂房下。《唐右丞王公维墓》碑石被向阳公司14号按石料使用,压在水洞里。墓前遗物有清乾隆四十一年(1776年),督邮程兆声和陕西巡抚毕沅竖立的碑石两座,“文革”中被毁。王维的母亲也葬在此地。交通部六处修辋川公路时将王维母坟塔平毁。当年建设中的短视行为给蓝田的文物旅游资源造成了难以弥补的缺憾。

,,,,,,,,,,,,,,,,,,,,,,,,,,,,,,,,,,,,,,,,,,,,,,,,,,,,,,,,,,,,,,,,,,,,,,,,,,,,,,,,,,,,,,,,,,,,,,,,

王维(701--761)

  王维(701--761)字摩诘,太原祁(今山西祁县)人。出身世代官僚地主之家。其母崔氏奉佛三十余载。佛经《维摩诘经》,是智者维摩诘居士与弟子讲学之书。王维的名和字取于此。王维后半生之避世与佛教有关。《新唐书》本传说王维早慧,"九岁知属辞,与弟缙齐名,资孝友。"年十六、七,即往长安、洛阳游历,谋取仕进。此期间写了一些游侠诗。开元七年(719)七月,他赴京兆府试,中解头。他是一位文艺全才,诗、文、书、画都很著名,又精通音乐,善弹琴、琵琶。开元九年(721)中进士,任太乐丞等官,后弃官隐居。 开元十七年(729),在长安从大荐福寺道光禅师学顿教。开元十九年,王维的妻子病故。他从此不再续娶,一直孤居三十年。
  开元二十三年(735)被宰相张九龄擢为右拾遗。二十五年(737)为监察御史,春天奉使出塞,并留在凉州河西节度幕兼为判官近一年,写了一些有名的边塞诗。
  天宝元年(742),王维转左补阙。以后,又屡迁侍御史、库部员外郎、库部郎中等职。但是,目睹朝政的黑暗腐败,他深深感到过去的开明政治已经消失。于是采取一种半官半隐的生活方式,得过且过。他经营了蓝田辋川别墅,修习佛、道,此时期他的许多诗文都濡染释、道色彩。他的思想儒、释、道杂糅,表现为人生态度,就是无可无不可,但求适意。
  他的"中隐"方式使他获得了一种平和宁静的心境,又使他得以从官场脱身,投入大自然的怀抱,从而创作了大量的山水田园诗。
  天宝十四载(755)安史之乱爆发。次年六月,长安陷落,玄宗仓皇奔蜀。王维当时任给事中,扈从皇帝不及,被叛军俘获。他不愿做伪官,服药取痢,伪称谙疾。安禄山将他囚禁在洛阳菩提寺,迫以伪署。七月,肃宗即位于灵武,改元至德。八月,安禄山宴其群臣于洛阳禁苑中的凝碧池,命梨园诸工奏乐,诸工皆泣。王维在菩提寺中闻悉此事,含泪赋成《菩提寺禁裴迪来相看说逆贼等凝碧池上作音乐供奉人等举声便一时泪下私成口号诵示裴迪》一诗:
  万户伤心生野烟,百官何日再朝天。秋槐叶落空宫里,凝碧池头奏管弦。
  抒发对帝都沦陷的悲痛和对李唐王朝的思念之情。九月,王维被迫充任了给事中伪职。
  至德二载(757),唐军收复两京。凡做过伪官的人,分六等定罪。王维被从轻处分,削官为民。次年春复官,责授太子中允,加集贤殿学土。同年,又升迁为太子中庶子、中书舍人。乾元二年(759),复拜给事中。上元元年(760),升任尚书右丞。
  王维对自己"没于逆贼,不能杀身,负国偷生"(《责躬荐弟表》)的行为深感愧疚。他看到当时张后弄权、李辅国专政,朝廷毫无振作的气象,于是思想更为消沉,"在京师,日饭十数名憎,以玄谈为乐,斋中无所有,唯茶挡、药臼、经案、绳床而已。退朝以后,焚香独坐,以禅诵为事"(《旧唐书》本传)。
  上元二年(761)七月,这位天才的诗人离开了人间。死后,他被安葬在清源寺西,也就是他曾经生活了多年的辋川别业旁。
  王维的朋友苑咸《〈酬王维〉序》中称他为"当代诗匠,又精禅理。"唐代宗《批答王缙进王右丞集表手敕》中说他是"天下文宗。"杜甫《解闷》诗说他"最传秀句寰区满。"《旧唐书》本传称他"天宝中诗名冠代"。后世诗论家称他为"诗佛"。
  王维的诗歌现存四百多首。其中存在着真伪问题的约有六十首。今传世王集以清人赵殿成《王右丞集笺注》最为完备,上海古籍出版社1984年出版标点本。又有陈铁民《王维集校注》本,中华书局1997年出版。

王维作品列表

,,,,,,,,,,,,,,,,,,,,,,,,,,,,,,,,,,,,,,,,,,,,,,,,,,,,,,,,,,,,,,,

 

 

 

 

문인화 [文人畵] 

 

전문적인 화가가 아닌 사대부층 사람들이 여기(餘技)로 그린 그림.

본문
그림을 직업으로 하지 않는 선비나 사대부들이 여흥으로 자신들의 심중을 표현하여 그린 그림을 일컫는 말로서 달리 사인지화() 혹은 사대부화()· 문인지화()로 불리다가 문인화가 되었다. 이들 사대부의 그림은 중국 북송시대부터 유래되었으며 서화나 서예, 인물화, 묵죽화, 말그림 등 주제에 구애받지 않고 다양한 분야에 걸쳐있으며 전문 화공이 그린 그림과는 기교면에서나 분명한 차이가 난다. 따라서 화공들의 그림과 구별하기 위해 붙여진 이름이다.        

중국 명말()의 대표적 문인인 동기창()이 그의 《화지()》에서 제시한 중국 문인화가의 계보를 통해 남북종화() 이론이 성립되었고, 그 으뜸에 당()나라 때 시인이며 그림에도 능했던 왕유()를 꼽았다. 그후 동원()·거연()·이성()·범관(이공린()·왕선() 등을 열거하고, 다시 원말()의 대가로 황공망()·왕몽()·예찬()·오진()과 명나라의 문징명()·심주() 등을 문인화가로 들고 있다.

문인화는 처음에 특정한 양식을 갖지 않았으나 ‘원말 4대가’의 출현으로 수묵산수화 양식의 전형이 완성되었다. 이를 남종화() 또는 남화()라고 하며, 비로소 문인화 특유의 양식이 정착하였다. 수묵산수화 다음으로는 문인들의 행동양식이나 의식과 잘 어울리는 사군자()가 유행하였다.

북송시대의 문인화 경향은 고려시대 유입되어 이제현() · 김부식() 등의 작품이 있으며, 조선시대의 사대부들도 많은 그림을 남겼다. 대표적으로 조선전기의 강희안()을 들 수 있다. 그는 많은 그림을 그렸지만 화가로 이름이 남는 것을 꺼려 자손들에게 자신의 그림을 소각하도록 할 정도로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가 문인화에 대한 인식이 확산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남종화가 본격적으로 수용되고 유행하였던 시기는 17세기 이후부터이다. 즉 강세황() · 이인상() · 심사정() 등의 남종문인화가 대표적인 인물이며, 문인화의 화풍을 절정에 올린 인물은 김정희()이다.  

[출처] 문인화 [文人畵 ] | 네이버 백과사전

,,,,,,,,,,,,,,,,,,,,,,,,,,,,,,,,,,,,,,,,,,,,,,,,,,,,,,,,,,,,,,,,,,,,,,,,,,,,,

중국의 회화 

 

 

중국에서 어느 때부터 회화가 그려지게 되었는가를 알아보기란 어려운 일이지만 현재 발견된 유물에서 본다면, 창사[]고분에서 출토된 전국시대()의 비단에 그려진 무녀도()를 최고()의 것으로 보며, 이는 BC 400년부터 BC 200년 사이의 것으로 추정한다. 전한()시대에 들어서면서, 묘실의 벽돌에 새긴 인물이나 동물 ·귀신의 흔적이 있다. 이것은 일종의 선묘()로서 회화적 요소가 짙은 것이다. 후한()이 되면서, 무량사() 분묘의 석실에 있는 화상석()이 회화로서 한층 발전하였고 신화 전설을 주제로 한 그 유품은 조형적인 박력을 갖추었다. 회화뿐만 아니라 다른 미술 분야에서도 한대()는 중국미술의 원형이 형성된 시대라 할 수 있다.

삼국시대()에는 전문적 직업으로서 화공이 나타나고, 육조()시대가 되면서 지식인의 교양의 하나로서 회화가 유행하며, 그 화풍 등이 쟁론()되기에 이른다.

한대의 분묘 석실의 전각도()는 벽화의 소박한 형태를 이루는 것으로 간주되고 있으나, 불교가 성행하자 이것이 다시 석굴사원의 벽화로 되어 수() ·당() 시대로 계승된다.

당대()에는 뛰어난 화가가 많이 나타나며, 초기에는 염립본()과 위지을승() 등이 있고, 중기에는 오도현()이 있으며, 주된 사원의 벽화는 모두 그의 손으로 된 것이라 하며, 후세에까지 동양화의 상징이라 일컬어진다.

이 밖에 말그림의 명수 한간(), 시인이며 또한 산수화에 능한 왕유() 및 이사훈()이 있다. 송대()에는 역대의 천자가 화원()을 설치하여 회화의 제작 ·감상 ·수집이 성행하였다. 전대로부터 계승된 사실주의를 더욱 추구하려는 경향이 화원을 지배하고, 이것을 원체화()라 불렀다. 이것과는 대조적으로 원체화의 권위주의에 반항하여 사실보다도 정신의 고양을 이상으로 하는 재야()의 활동도 활발하였고, 전자는 전문화가, 후자는 문인화가라 일컫는 지식인의 여기()로서 행하여져서 송대 회화는 크게 둘로 나뉜다.

원체화는 북송()의 곽희(), 남송()의 이당() ·마원() ·하규() 등이 산수화에 능하였고, 양해()는 산수 ·인물에 뛰어났으며, 화조화()에는 이안충() ·이적()이 유명하다.

문인화()에서는 북송의 동원() ·거연() ·이공린() ·미불(芾) 등이 대표적인 화가이다. 수묵화()는 당대에 이미 그려졌는데, 남송의 문인 ·승려들 사이에 성행하였으며, 특히 선종()의 영향을 받아 크게 발전하였다.

원말()의 사대가() 황공망() ·오진() ·예찬() ·왕몽()은 먹에 오채()를 더한 것 같은 정취를 나타냈다 한다.

이러한 부드러운 필치를 자유롭게 구사한 그림을 남종화()라 하고, 원체화의 흐름을 가지는 대상을 정확히 묘사하는 딱딱한 느낌의 그림을 북종화()라 일컫는다. 원대()에 해체된 화원은 명대()에 부활하여 화조화에서는 여기(), 산수화에서는 대진()을 시조로 하는 절파()가 화계의 주류를 이룬다. 이 밖에 명대의 대표적 화가에는 인물화의 구영(), 남종화 융성의 중심을 이룬 심주() ·문징명() ·동기창()이 있다.

청대()에는 남종화가 주류를 차지하고 왕시민() ·왕감() ·왕휘(翬) ·왕원기() ·오역() ·운수평() 등 사왕오운()을 비롯하여, 도제(:) ·팔대산인() 등 개성이 강한 화가가 활약하였다.

청대 중기에는 양주팔괴()라 일컬어지는 문인화가가 배출되어, 아무 것에도 구속되지 않고, 서로 자유로운 입장을 취하여 작품을 제작하였다. 이 전통을 근대에 이어받은 자오지첸[] ·우창숴[] 등은 근대화가로서 중국 회화사에 이채로운 존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