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천관우.서서 죽을지언정 무릎 꿇지는 않겠다” 자유언론 기틀 다진 언론인·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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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hoto 천기흥 |
동아일보는 천관우를 ‘치열한 역사의식과 함께 호방하면서도 강직한 성품을 지닌 언론인, 역사학자’라고 추모했다. ‘서서 죽을지언정 무릎을 꿇지 않겠다’는 자세로 불의와 대결한 것이 그의 치열한 역사의식이다.
천관우는 신문윤리강령을 기초하였으며, 박정희 정권의 언론윤리위원회법에 반대하는 ‘전국언론인대회 선언’을 기초하여 자유언론의 기틀을 지켰다. 조선일보 논설위원 및 편집국장, 민국일보 편집국장, 서울일일신문 주필, 동아일보 편집국장과 주필 등을 역임하다가 1968년 ‘신동아’ 필화사건으로 언론계에서 물러났다. 이어 민주화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1971년 민주수호국민협의회 공동대표와 1974년 민주회복국민회의 공동대표 등을 지냈다. 그는 서구의 민주화·근대화 정신을 우리의 민족주의 정신으로 살찌우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천관우 선생은 언론인, 사학자, 민주화 운동가로 올곧은 인생을 살았고, 우국적인 한말 언론인의 사상과 행동을 계승한 논객이자 문장가로 규정할 수 있는 풍모를 지녔던 인물이다.”(정진석 한국외대 명예교수)
후석(後石)이란 아호도, 올곧은 선비의 표상으로 살아 온 일석(一石) 이희승에서 따온 것이다. 일석은 천관우의 서울대 문리대 은사이자 천관우가 동아일보 주필 시절 사장으로 모시기도 했다.
천관우의 본관은 영양(潁陽). 1925년 8월 10일 충북 제천군 금성면 북진리에서 농업을 하는 천명선(千命善)과 여흥 민씨 사이의 2남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임진왜란 때 명나라의 이여송 장군과 함께 왜적을 물리치기 위해 파병됐다가 귀화한 천만리(千萬里) 장군의 후손이다. 천관우의 조부 천인봉(千仁鳳)은 중추원 의원을 지낸 동리 유지로 성망이 높아 제천시의 청풍문화단지에는 그의 공을 기리는 송덕비가 남아있다.
“저의 증조부의 동생이 숙부님(천관우)의 조부님이시고, 전부 외아들로 이어오고 있으니 사실 제가 가장 가까운 아들 같은 조카인 셈이지요. 숙부님이 제 결혼식 때 친척 대표로 인사말씀을 하셨는데, 넥타이를 안 매고 왔다고 일부 친척들이 쑥덕거리기도 했지만 저는 잘 이해합니다. 워낙 소탈하신 데다 당시 동아일보 편집국장 시절 기사마감 시간 때 막 빠져나오시느라고 경황이 없으셨겠지요. 제가 검사에 임용되어 인사하러 찾아가 뵈었더니 오히려 제 신상을 걱정하시며 다시는 찾아오지 말라고 당부하시는 거예요. 민주화운동을 하시는 숙부 때문에 혹여 제게 누가 되지 않을까 배려하신 것이지요. 숙부님의 윗분(천중우)으로 일제 때 조선일보 기자를 하신 분이 있어, 아마도 후에 언론계로 진출하시는 데에 영향을 주셨을 것입니다.”(조카 기흥씨)
천관우의 생가터는 충주댐 건설로 수몰되었으며, 그가 네 살 때 이주한 제천군 청풍면 읍리도 수몰되었다. 다섯 살 때 조부로부터 한문을 배우면서 이듬해 1930년 청풍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한다. 그의 한문 실력과 붓글씨는 초등학교 재학 중에 인근에 널리 알려져 천재라는 칭찬을 들어, 그의 이름이 신문에 소개될 정도였다. 그가 3학년 때인 1934년 2월 17일자 동아일보는 ‘글씨 잘 쓰는 천관우 9세, 5살부터 독서 가능해’라는 제목으로 사람들의 칭찬이 자자하다는 기사와 함께 천관우의 사진과 ‘송죽(松竹)’이라고 쓴 붓글씨를 게재했다.
천관우는 1937년에 청주제일고보에 입학하여 1942년에 졸업한다. 졸업 후 경성제대에 응시하나 2년 연속 불합격한다. 첫해에는 경성제일고보 보습반(현 경기고)에서, 다음해는 경성제2고보(현 경복고)에서 대학입시 준비를 했다고 한다. 중학 시절 세계문학전집과 같은 독서에 심취한 나머지 입시과목을 가르치는 학교 공부에 소홀했기 때문이다.
천관우는 1944년 경성제대 예과 문과 을류(인문계)에 입학하여 1946년 예과를 거쳐 서울대 문리대 사학과에 진학하여 이병도, 손진태, 이인영, 유홍렬 등 당대 일류 교수진의 가르침을 받는다. 대학원생들과 함께 홍기문의 집에서 ‘대전회통(大典會通)’ 연습 강의를 듣기도 하는데, 조선왕조사 이해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홍명희의 아들인 홍기문은 월북하여 조선왕조실록을 국역하는 사업을 주도한 인물이었다.
재학 중에 천관우는 ‘경성대학 예과신문’을 편집한다. 타블로이드 2면 체제인 이 신문은 1946년 3월 6일에 순간(旬刊)으로 창간해 발행되었다. 한운사도 신문 발행에 동참하여 좌익학생들과 함께 맞선다.
천관우는 1949년에 서울대 문리대 사학과를 졸업한다. 그의 학위논문은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 연구’. 이 논문이 어떤 평가를 받았던가는 일찍이 이기백 교수가 “천 형의 졸업논문은… 창간 초기의 역사학보에 게재되어 광복 후에 하나의 붐을 이루다시피 한 실학연구에 결정적인 영향을 발휘하였다. 이 논문을 지도한 은사 이병도 선생은 군계일학(群鷄一鶴)이란 말로 이를 칭찬하여 마지않던 기억이 새롭다”고 한 데서 알 수 있다.
1952년 역사학회를 발기할 때 한국사, 동양사, 서양사 세 분야에서 각각 세 사람의 대표를 내었다. 전해종·고병익·정병학이 동양사학계를, 민석홍·안정모·이보형이 서양사학계를, 천관우는 한우근·김철준과 함께 국사학계를 대표하여 참석했다.
천관우는 졸업 후 무급 조교로 연구실에 남으며 6·25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경기중학 교사로 재직한다. 1951년 1·4후퇴 때 부산으로 피란 가서 대한통신 기자로 언론계에 첫발을 디디게 된다.
그는 이때 ‘몇 달 동안의 외근 수습을 내놓고는, 이 통신이 맡고 있던 UP통신 번역을 주로 하면서 지냈다’(‘60자서’)고 회고했다. 정일형이 사장을 맡은 이후에 그의 부인 이태영이 고등고시를 준비할 때는 후석이 국사 과목에 도움을 주기도 했다. 이듬해 천관우는 유네스코 기금으로 미국 미네소타대학에서 신문학을 공부한다.
“1952년 나는 외삼촌이 살고 있는 청풍에 간 일이 있었다. 나의 외삼촌댁과 천관우의 자당은 동네친구로 자주 만나 지내는 처지인데 그때 천관우가 미국 유학 중이라며 칭찬이 대단했다. 청풍(5세 때 청풍면으로 이사)이 낳은 신동이고 그가 고향에 돌아온 어떤 때는 초등학교 밴드까지 동원되어 환영한 일이 있었을 정도란다. 앞으로 대단한 인물이 될 것이라는 게 고향의 공론이었다. 그가 미국 유학 후에 쓴 ‘그랜드 캐년’이라는 기행문은 대단한 명문으로서 학교 교과서에 실리기까지 하였다.”(‘한국언론인물사화’ 남재희)
천관우는 1952년 9월부터 이듬해 6월까지 유학을 마치고 돌아왔다. 전쟁 중에 미국에서 연수를 받은 최초의 언론인이 된 것이다. 1954년 한국일보가 창간될 때 그는 조사부 차장으로 참여하게 된다. 5개월 후에는 29세의 젊은 나이에 논설위원이 된다. 이듬해 3월부터 한국일보 고정칼럼 ‘지평선’을 집필하기 시작한다. 창간 당시 조풍 연이 써오던 것을, 미혼의 30세 후석이 이어받은 것이다. 1955년 5월에 천관우는 최정옥(崔貞玉)과 결혼한다. 논설위원을 하는 동안에도 대학강의를 계속하면서 역사논문도 꾸준히 발표한다.
1950년대에 발표한 논문으로 ‘갑오경장과 근대화’(사상계 1954년 12월), ‘여말(麗末) 선초(鮮初)의 한량(閑良)’(이병도박사 회갑기념논총), ‘홍대용의 실학사상’(문리대학보 6-2), ‘60년 전에 될 뻔했던 국회’(신태양 1958년 5·6), 등이 대표작이다.
서울대 문리대에서 1963년에 후석의 강의를 수강했던 국사학자 이만열은 그 시절의 강의실 풍경을 이렇게 떠올렸다.
“선생은 강의실에 들어오시면 먼저 책보에 싼 보따리를 풀어제끼고 담배 한 대를 급하게 퍽퍽 피우신다. 그리고는 이것저것 자료를 꺼내놓고 때로는 소개하면서 강의를 시작했다. 그의 강의는 무엇에 쫓기듯 빨랐고, 판서 글씨는 신문사에서 급하게 원고를 작성할 때의 단련된 듯한 초서형 달필이었다.… 한문을 줄줄 내려 쓸 때에 강의안이나 원고를 보는 일이 없었다. 한 강좌 강의에 칠판을 아마도 대여섯 번은 지우는 것 같았다. 그럴 때에는 분필가루가 펄펄 날리기도 하여 윗옷 소매를 털기도 했다. 그러다가도 생각이 나시면 담배를 또 꾸어댔다.”(‘천관우 선생을 생각한다’)
1956년 천관우는 조선일보 논설위원으로 옮겨, 고정코너 ‘만물상’을 개설하여 집필한다. 1958년에는 조선일보 편집국장을 맡는다.
“지금은 작고한 천관우는 생전에 어느날 ‘잠깐 봅시다’라는 방 대표(방일영)의 전갈을 받고 갔더니 뜻밖에 편집국장을 맡으라는 통고였다며 ‘내 터수도 모르는 채 중책을 맡았으니 내심 겁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방일영은 나이 어리고 경험이 적은 천관우의 고충을 미리 짐작하고 있었다. 대선배인 유봉영에게 편집고문이란 직책을 새로 만들어 주고, 편집국장 바로 옆에 자리를 마련해 대소사를 의논하게 했고, 신문제작의 베테랑으로 이름이 높았던 유건호와 조동건을 편집부국장으로 앉혀 보좌하도록 했다.”(‘방일영과 조선일보’)
당시는 조·석간시대여서 24시간 동안 국장과 부국장 셋 중 누군가가 국장석을 지켜야 했다. 천관우는 두 명의 부국장에게 돌아가며 3교대로 하자고 했으나, 두 부국장은 주간은 국장이 매일 맡고, 야간은 두 사람이 격야 교대를 하겠다고 고집했다. 부국장들은 이렇듯 협조적이었으나 그 밑 편집국 내부의 반발과 동요는 적지 않았다. 일부 연조가 오랜 간부들은 그동안 형성돼온 내부의 질서가 허물어질까봐 상당한 위기의식마저 느끼고 있었다. 방일영 대표는 천관우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 1959년 초 제2기 수습기자 9명을 공채로 선발했다. 그때 입사해 나중에 정치부장과 편집부국장을 지낸 이종식씨는 천 국장 밑에서 수습을 지냈다. 그는 “천 국장은 우리 동기들 사이에서 인기가 있었다”면서 후석에 대해 이런 인물평을 남겼다.
- ▲ 조카 기흥씨가 천관우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과묵하면서도 퍽 괄괄한 성격이었다. 편집국장석에 가득히 신문을 펴놓고 거기다가 붓으로 낙서를 하고 있을 때는 뭔가 구상을 하고 있을 때다. 종일 어떤 형태로든 움직여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 탓으로 신문도 움직이고 있었다. ‘현장주의’와 ‘기사는 발로 써야 한다’는 훈련방법 때문에 엊그제 입사한 견습기자들에게 르포기사를 요구하기도 했다. ‘24 파동’을 실감나게 보도하고 이를 규탄했다고 해서 천 국장의 실력이 널리 펴져 있었고, 그의 명성이 기자 사회의 체온 속에 유지되고 있었다. 그래서 그가 정론의 화신처럼 느껴지기도 하던 때였다.”(1969년 6월 1일자 조선일보 사보)
1959년 9월 18일 천관우는 다시 논설위원으로 물러앉고, 논설위원 송지영이 편집국장이 된다. 당시 사회부 기자였던 수습 1기 조동오는 천관우 국장 시대를 이렇게 증언했다.
“천 국장 체제는 조선일보의 청년화시대를 염두에 둔 방일영 사장의 다목적 포석으로 보였다. 그런 만큼 구질서의 한 축을 이루고 있던 편집국 선배들의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천 국장은 편집국장 기밀비를 봉투에 넣어서 나눠주는 등 새로운 관례를 만들고, 나름대로 인화단결에 애를 썼지만 역부족이었다. 노장파들이 협조를 안해줘 애를 많이 먹었던 것이다.”(‘방일영과 조선일보’)
이후 천관우는 다시 한국일보 논설위원으로 갔다가 1960년 6월 세계일보로 가서 제호를 ‘민국일보’로 바꾸고 ‘신문인의 신문’이란 꿈을 실현하기 위해 심혈을 쏟는다. 민국일보 편집부장이던 김경환씨의 회고.
“몇몇 원로, 중견 신문인들 간에 ‘신문인의 신문’을 만들어 보자는 움직임이 있었다. 그때만 해도 오늘과 같이 경영진이 신문제작을 좌우하는 풍토는 아니었지만 4·19의 대변혁을 겪으면서 ‘신문은 역시 신문인이 만들어야 올바른 신문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많은 현역 언론인들 가운데 은연중에 공감의 대를 이루게 했던 것 같다. 그 움직임으로, 중심 인물은 내가 아는 한, 석천(오종식)과 후석(천관우) 두 분이었다.”(‘보람 있었던 순간’ 기자협회보 1970년 10월 30일자)
민국일보는 ‘독자와 더불어 호흡하는 신문’을 표방하고 참신한 ‘독립지’를 지향했으나 경영난으로 뜻을 접는다. 이듬해 천관우는 서울일일신문 주필이 된다. 4·19와 5·16으로 언론이 격동기를 맞으면서 천관우는 동아일보 편집국장과 주필 일을 하는 한편, 편집인협회 활동으로 독재체제하의 언론자유를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천관우는 신문편집인협회 부회장(1966년 4월~1969년 1월)에 피선되어 기자협회와 함께 언론자유를 수호하기 위한 공동투쟁을 벌인다.
이런 와중에서 천관우는 동아일보 주필로 신동아 1968년 12월 ‘차관 특집’ 필화사건으로 언론계를 떠나게 된다. 동아일보를 퇴사한 이듬해 ‘한국언론의 가스중독론’을 펼쳐 주의를 환기시킨다.
“한국 특유의 비극적 가스중독 같은 것이 있다고 할까. 잠든 사이에 스며든 가스에 취하여 비명 한번 못 질러 보고 어리둥절하고 있는 상태에 비할 수 있을 법한 것이었다. 돌이켜보면 가스가 스며들기도 하루이틀 저녁 일이 아니었던 것 같다. 신문이 자유보다 자율을 외치고 신문의 저항정신보다 협동정신을 외치면서부터 가스는 스며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자유의 저항정신을 잊어버리고도 안일하게 나날이 지나가는 것을 합리화시켜준 사이비의 언론자유와 사이비의 협동정신이 가장 큰 독소였다. 우선 나 자신부터 창을 열고 맑은 바람을 받아들여 내 정신을 가다듬어야 하겠다.”(기자협회보 1969년 1월 10일자)
천관우는 1971년 4월 민주수호국민협의회 창립 당시 공동대표로 피선되나 이듬해 정부는 그의 활동을 정지시켰다. 그러나 1974년 12월 유신체제 아래 민주회복국민회의를 창설하고 이듬해 4월까지 공동대표를 지낸다.
말년의 천관우는 1981년 전두환 정권 당시 민족통일중앙협의회 의장 자리를 받아들여 재야 지식인들과 멀어진다. 천관우는 ‘통일에는 여야가 없다’는 입장이었고,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니로되’ 역사학자로서 사설을 늘어놓지 않겠다고 말한 바 있다.
“그의 삶은 1991년 사망까지 전체적으로 언론자유 쟁취의 투쟁으로 점철되어 왔다.” 조맹기 교수(서강대)는 그의 저서 ‘한국언론인물사상사’에서 이렇게 매듭지었다.
천관우는 1991년 1월 15일 서울 불광동 자택에서 별세해 천안 공원묘지에 안장된다. 부인 최정옥씨는 양딸이 사업을 하다 집을 날려 충주에서 기초노령연금으로 어렵게 살고 있다. 후석과 가장 가까운 인척인 조카 기흥(69·서울대 법대 졸업, 법무법인 한얼 고문)씨는 서울지검 검사를 거쳐 대한변협 회장을 역임했다. 엄영희(69·숙명여대 약대 졸업)씨와 결혼하여 2남1녀를 두었다. 장남 석범(45·서울대 공대 졸업, 한국IBM 전무)씨는 박은혜(42·고려대 교육학과 졸업)씨와 결혼하였으며, 차남 명범(37·한국외국어대 졸업, 한진해운 차장)씨는 조수현(36·이화여대 영문과 졸업)씨와 결혼하였고, 장녀 현주(43·이화여대 교육과 졸업)씨는 여운국(44·서울대 법대 졸업)씨와 결혼했다.
내가 본 후석 천관우 남재희 언론인·전 노동부 장관 나는 1957년에 언론계 진출을 협의하기 위해 후석 선생을 처음 만났다. 그분은 청주고교 선배이기도 하고, 집안끼리도 가깝게 지냈다. 나의 외삼촌댁과 후석의 자당은 동네친구로 자주 만나 지내는 처지였다. 동료나 후배와 어울리면 소주를 대여섯 병씩 두주불사로 마시는 호방한 성격이고 그러면서도 가족 문제나 예의 문제에 있어서는 너무나도 엄격한 유교적 선비이다. 그분이 언론인으로서 가장 진가를 발휘한 시기는 민국일보 편집국장 시절일 것이다. 야전침대를 방에다 두고 전신투구를 하다시피 제작에 몰두했다. 언론인, 사학자 못지않게 그는 그와 거의 같은 비중으로 민주투사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참으로 치열한 민주화투쟁을 했다. 민주수호국민협의회 등의 공동대표로 활약한 모습은 당시 신문에 잘 보도되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그가 말년에 민족통일중앙협의회 의장을 맡지 않았더라면 하고 아쉽게 느껴진다. 그의 거인적 풍모에는 역시 옥의 티라고 보여지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