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동파가 詩 읊던 절벽 동굴에 앉아 중국식 갈비찜 별미.창장싼샤와 후베이성 이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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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장싼샤 유람선 종착지인 후베이성 이창의 유적지 싼여우둥. |
이 창장싼샤에서 창장 양안의 절경을 감상하며 삼국시대의 영웅호걸들이 만들어내고 후세의 여러 작가들이 윤색한 이야기들을 제대로 음미한다면 손가락 안에 꼽을 수 있는 중국 여행이 될 것입니다. 게다가 유람선의 종착 지점인 이창에 내려 싼여우둥(三游洞)에서 당·송 시인들의 묵향을 맡아보고, 한국인의 입에도 착 달라붙는 후베이(湖北)의 미식으로 마무리를 할 수 있다면 신선이 따로 없지요.
창장 양안은 수직에 가까운 절벽이 곳곳에 있어 거슬러 오르기 어려운 강입니다만, 지금은 높이 185m의 댐이 풍부한 수량을 확보하고 있어 유람선까지 다니고 있습니다. 이 지역에 와 보면 유비와 제갈량이 왜 이 지역에 나라를 세웠는지가 명확하게 이해됩니다. 상대방보다 세력이 약해 상대방 내부에서 틈이 벌어지기를 기다려야 하는 그들로서는 싼샤의 상류인 파촉(巴蜀), 즉 충칭과 청두를 중심으로 한 산세와 물길 험난한 곳에 촉한(蜀漢)을 세운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3박4일짜리 유람선은 저녁에 승선해서 충칭의 야경을 훑어가면서 출발합니다. 다음날 오전에 펑두구이청(豐都鬼城)을 들르는데, 우리말로 ‘귀신공원’이라 할 수 있지요. 살아서 나쁜 일을 한 사람들이 죽어서 갈 지옥을 보여주는데, 이것은 중국인들의 일상생활 속에 가장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 도교문화의 유산이기도 합니다.
셋째 날 이른 아침에 삼국시대 유비가 이릉전(彛陵戰)에서 패퇴하여 주둔했다가 궁궐로 돌아가지 못하고 병사한 백제성(白帝城)을 오르게 됩니다. 백전노장 유비가 오나라의 30대 ‘소장파’ 육손에게 패배하여 ‘천하 삼분지계’라는 촉한의 국가전략을 망가뜨리면서 어린 아들 유선을 제갈량에게 맡기고 죽은 곳이지요. 유비가 덕장이고 전쟁은 주로 제갈량이 했다고 잘못 알기 쉬운데, 유비는 죽을 때까지 한번도 군 지휘권을 제갈량에게 쥐어준 적이 없는 역전의 무장이었습니다. 제갈량은 유비가 살아있을 때에는 후방의 행정관이었고 적벽전에서는 영리한 외교관이었을 뿐입니다. 제갈량은 유비가 죽은 다음에야 군 통수권을 직접 행사할 수 있었던 문관이었습니다.
유비가 파란만장했던 자신의 일생을 마감한 곳에서, 그의 일생을 압축해 보는 것도 자그마한 인문학적 즐거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유비는 저잣거리의 짚신장수 출신으로 용병과 다를 바 없이 초라한 행색으로 출발합니다. 자신보다 월등한 군벌들과의 치열한 각축전에서 승리하여 황제 자리까지 오른 시대의 영웅입니다.
다만, 개인으로서는 커다란 성공이었으나 ‘역사 삼국지’에서 보면 삼국 가운데 끝자리를 탈피할 수 없었고, ‘소설 삼국지’에서는 주인공의 자리마저 제갈량에게 넘겨줄 수밖에 없었던 인물입니다.
- ▲ 싼여우둥 절벽의 동굴 속에 있는 식당 팡웡주자.
백제성을 보고 난 다음에 싼샤의 첫 번째 협곡인 취탕샤를 지납니다. 취탕샤를 지나서는 작은 배로 옮겨 타서 창장의 지류인 다닝허(大寧河)를 거슬러 올라가 샤오싼샤(小三峽)를 유람합니다. 이곳에서는 깎아지른 절벽의 가는 틈새에 관을 안치해 놓은 현관(懸棺)을 볼 수 있습니다. 먀오족들의 특이한 장례 풍습과 같은 것이지요.
다시 창장을 따라 내려가면서 두 번째 협곡인 우샤를 지나고, 창장싼샤에서 가장 높은 선녀봉을 지나면 셋째 날의 해도 벌써 떨어집니다. 이날 저녁에 선장이 주최하는 환송만찬을 즐기고 나면 밤에는 커다란 유람선이 도크를 통해 싼샤댐을 향해 내려가는데 유람선 창밖으로 볼만한 광경이 펼쳐집니다. 다음날 아침 싼샤댐 근처에서 하선하여 싼샤댐을 구경하고 다시 두어 시간 하류로 내려가면 종착점인 후베이성 이창에 도착합니다.
후베이성은 삼국시대 조조·손권·유비가 천하 대권을 잡기 위해서는 피할 수 없었던 패권 쟁탈의 길목이었습니다. 손권이 당시 최강의 조조군에 맞서 일생일대의 승전을 기록한 적벽(赤壁), 손권이 일궈낸 최고의 승리 속에서 유비가 영특하게 차지해버린 형주(荊州), 제갈량과 방통 등 젊은 인재들이 사마휘의 학당에 모여 난세를 논하며 시세를 조망하고 출세를 꿈꾸던 룽중(隆中)과 난장(南漳), 관우가 오나라에 덜미를 잡혀 죽음에 이르게 된 당양(當陽) 등이 모두 후베이성에 있습니다.
후베이는 서부에 산지가 많고 동부에는 강한평원(江漢平原)에 내수면과 농경지가 많아 식재료가 풍부합니다. 후베이 음식은 청양고추와 같이 맵고 단맛이 나는 고추를 많이 써서 그런지 한국인의 입맛에도 잘 맞습니다. 또 다양한 민물고기를 맛나게 조리해 내는데, 사용하는 재료의 색깔도 선명하게 살려내 보는 이들의 식욕을 자극합니다.
먼저 후베이에 가면 어디서든 드실 수 있는 대표 음식 두 가지를 소개할까 합니다. 첫 번째 요리는 소동파가 즐겨먹었다는 동파육(東坡肉)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동파육이 저장성 항저우 음식으로 알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후베이성의 황강(黃岡)에서 처음 만들어진 음식이었더군요. 동파육은 삼겹살 속의 비계가 살코기의 두 배는 되는 듯합니다. 보기만 해도 얼마나 느끼할까 지레 염려가 되지만 먹어보니 두부처럼 부드럽고 전혀 느끼하지 않습니다. 동파육에 죽순과 시금치 등의 부재료를 더하는 요리는 호북성 동쪽 지역에서는 잔칫상에 빠지지 않는 요리이지요.
- ▲ 동파육, 파이구오우탕, 이에차이빙(왼쪽부터)
두 번째 음식은 황피샤오싼허(黃陂燒三合)입니다. 황피(黃陂)지방에서 먹던 음식이 근대 이후 인근 지역으로 퍼진 것인데, 생선살과 돼지살코기와 비계를 갈아 쪄낸 러우까오(肉餻), 생선완자 위완(魚圓), 고기완자 러우위안(肉圓) 세 가지를 넣어 볶아낸 것입니다. 홍색·황색·백색의 식재료가 어우러져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돌지요.
이창에서 유람선을 하선하여 서쪽으로 조금만 올라가면 싼여우둥(三游洞)이란 유적지가 나옵니다. 북에서 내려오는 샤라오허(下牢河)가 창장에 이어지면서 만들어낸 자그마한 반도에 있는 동굴인데, 깎아내린 듯한 양쪽 절벽이 절경을 이룹니다. 당나라 때에는 백거이(白居易)·백행간(白行簡)·원진(元稹) 세 사람이, 송나라 때는 소동파의 삼 부자가 와서 시를 읊었다는 연유로 싼여유둥이란 이름이 붙었답니다.
이 싼여우둥 정문 바로 건너편에 팡웡주자(放翁酒家)라는 식당이 있습니다. 팡웡(放翁)은 싼여우둥을 찾아 시를 남겼던 남송의 시인 육유(陸游)의 호입니다. 이 식당은 싼여우둥 절벽의 동굴 속에 있습니다. 입구나 통로, 창가의 식탁에서 수십m 아래의 창장 지류를 건너는 작은 현수교를 내려다볼 수 있습니다.
이 식당에서 주문할 수 있는 이 지방의 특색 음식을 소개해 드리죠. 우선 파이구오우탕(排骨藕湯)이 먹을 만합니다. 갈비를 토막 내어 물에 담갔다 건져서 물기를 빼지요. 팬에 기름을 두르고 갈비를 볶은 다음, 작은 단지에 넣어 물을 붓고 소금 간을 해서 끓입니다. 연근은 껍질을 벗겨 깨끗이 씻은 다음 마름모꼴로 썰어서 함께 넣고 끓이는데 그 깊은 맛이 아주 일품입니다.
이외에도 찻잎에 파를 넣어 깔끔하게 볶은 총쓰칭차오차이에(蔥絲淸炒茶葉), 밀가루에 야생 채소를 넣어 튀겨낸 이에차이빙(野菜餠)을 주문해 보시지요.
생선요리를 주문할 때는 몇 가지 요리법 용어를 익혀서 구사해 보십시오. ‘칭정(淸蒸)’은 생선을 양념하지 않고 그대로 쪄서 깔끔한 맛에 먹을 수 있는 방법이고, ‘훙샤오(紅燒)’는 간장을 넣어 붉게 조린 약간 간간한 맛이 나는 생선요리입니다. ‘간소(干燒)’는 새콤 매콤 달콤한 요리입니다. 생선을 고르고 양념을 한자로 써주면 잠시 후에 후베이의 미식을 즐길 수가 있습니다.
협곡의 동굴 식당에 자리를 잡고 후베이 음식 몇 가지를 주문해서 입맛을 즐기고 나면 이제 본격적인 삼국시대 유람이 기다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