⑤ 무굴제국 5대 황제 샤 자한이 지은 황궁 붉은색 사암 성곽 안에 보석 장식 대리석 건물들
가수·광대 등 동원 거대한 천도행사 레드포트, 자금성보다 작은 규모
1857년 세포이항쟁 직후 17대 황제 바하두르 샤 2세 때 망국
영국 점령 후 군 병영으로 사용 내부 건축물들 많이 사라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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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델리의 무굴황성 |
얼핏 봐서는 어디까지가 뉴델리인지 어디서부터 올드델리인지 구분이 잘 안된다. 두 지역은 딱 붙어 있다. 뉴델리의 한복판인 인디아게이트에서 올드델리 황성까지의 직선거리는, 구글 어스 프로그램을 화면에 띄워놓고 재니 약 5㎞. 매우 가깝다. 흔히 두 지역은 사이클 릭샤가 길에 다니느냐 아니냐에 따라 구분할 수도 있다. 델리국가수도(NCT·National Capital Territory of Delhi) 당국은 손님을 뒤에 태우는 자전거인 사이클 릭샤의 운행을 올드델리에서만 허용하고 뉴델리에서는 불허하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교통질서가 어지러운 인도인데 사이클 릭샤까지 도로에 나오니 그 혼잡도가 극에 달한다. 휴! 인도다. 교통체증과 어지러운 거리, 소음 속에서 서서히 움직이던 차창 오른쪽 밖으로 어느 순간 거대한 붉은색 성이 보였다. 레드포트다. 거대한 성곽, 압도적인 크기다. 성곽 앞의 녹색 잔디와 붉은색 성곽이 주는 색의 대비가 뚜렷하다. 큰 나라의 황제는 저 정도의 황성을 갖는구나 하는 생각이 새삼 든다.
영국 점령 후 15개 건물만 남아
레드포트에 가까이 가니 성곽 주변에는 깊은 해자가 파여 있다. 동양의 또다른 거대한 황성인 중국 베이징의 자금성과 이 점은 마찬가지다. 명과 청의 황궁이었던 자금성도 적이 성곽을 넘어 궁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황궁 주변을 깊이 파고 물을 채워 놨다. 왕의 거처란 느낌만을 주는 조선의 궁전 담장과는 다르다. 레드포트는 적과 격한 전투를 한판 치를 수 있을 정도로 견고하다. 레드포트를 자금성과 비교하면 규모는 조금 작다. 자금성보다 황성이 된 시기도 계산해 보면 228년 늦다. 자금성은 명의 세 번째 황제인 영락제(재위 1402~1424) 때부터 국가의 권력중심지가 됐고, 레드포트는 1548년에 북인도제국의 황성이 됐다.
레드포트는 외관은 장중하나 기자의 눈에 그리 아름답게 보이지는 않는다. 그 점에서 중국인이 세운 자금성보다 좀 떨어진다. 자금성은 전체적인 외관이나, 정문인 오문(午門)을 보면 거대하면서도 단순미가 느껴진다. 건물 전체 윤곽을 이루는 직선과 사선, 그 아래쪽의 출입문이 만드는 아치 모양은 위압적이면서도 조형미를 갖고 있다. 기자는 건축에 문외한이지만 레드포트의 외관은 좀 투박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레드포트의 정문 격인 라호르 게이트 옆 매표소에서 입장권을 사고 들어간다. 오늘날 파키스탄의 대도시 라호르 쪽으로 난 문이라고 해서 라호르게이트라고 불린다. 게이트 앞의 안내문에 ‘델리에 세워진 7번째 도시’라는 안내문이 보인다. 델리 지역에는 지금까지 많은 도시가 들어섰는데, 무굴제국의 극성기 때인 5대 샤 자한 황제가 자신의 신도시 ‘샤자하나바드’를 건설했고, 레드포트는 샤 자한의 황성이다.
라호르게이트와 이어져 있는 시장통을 지나면 황성의 속살이 나온다. 황성 내부는 라호르게이트 쪽에서 보면 가로로 길게 배치된 구조다. 황실에서 가장 은밀하고 보호받아야 하는 침전과 같은 공간이 제일 안쪽에 있고, 대접견실과 같은 공적 공간은 그 앞에 배치되어 있다. 황실의 공간과 행정부처의 공간으로 나눠진다고 할까? 레드포트의 내부는 영국이 델리를 접수하는 과정에서 크게 파괴됐다. 그 안에 병영을 짓는다고 전각들을 상당 부분 철거해 원형이 훼손됐다. 황제의 공간을 제외한 나머지 사무 공간에 있었던 건물들은 몇 개 남지 않았다. 현재 남아있는 건물의 수는 15개라고 했다.
평탄한 지형에 탈권위적 구조
황제의 전용구역을 보면서 인도인이 지은 건물은 탈권위적이라는 생각을 했다. 황제 전용구역의 가장 앞쪽에 자리잡은 대접견실(디완이암)에 있는 옥좌는 절대군주의 자리치고는 높이가 그리 높지 않다. 사람의 키 높이 정도에 옥좌 자리가 있다. 베이징의 자금성을 보면 궁전 뜰에서 황제의 전각에 오르려면 수많은 계단을 올라야 하고, 전각 안에서의 황제 자리는 또 높았다. 레드포트는 그런 구조가 아니다. 전반적으로 황성 내부는 평탄한 지형이고 건물은 수평적이고 탈권위적 구조다.
대접견실 뒤로는 황제의 침전과, 황후의 침전, 황제의 소접견실 등 대리석으로 만든 건물들이 일렬로 서 있다. 건물 사이에 별도의 담을 쌓아 놓지도 않았다. 왕래가 쉽고, 옆 건물에서 바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구조다. 건물 구조는 당대 인도인, 혹은 현대 인도인의 기질까지도 드러낸다고 본다.
황제의 개인 공간에는 함맘, 즉 목욕탕이 있다. 함맘은 아랍·이슬람 문화의 일부다. 이집트 카이로의 구시가지 한복판에도, 터키의 이스탄불 시내에서도 함맘을 쉽게 볼 수 있다. 이슬람제국인 무굴의 술탄도 이들의 영향을 받아 목욕탕을 만들고 목욕을 즐겼다. 함맘 옆에는 작은 모스크가 있다. 모티마할은 샤 자한의 후계자 아우랑제브가 만든 개인 모스크이다. 독실한 무슬림이었던 그는 이곳에서 신과 대화하며 사색의 시간을 가졌다.
레드포트 건축가의 솜씨를 느껴볼 수 있는 곳은 바로 황제의 구역이다. 붉은 사암으로 지은 대접견실, 그 뒤로 흰색 대리석으로 만든 소접견실, 황제의 침전, 황후의 침전이 극히 아름답다. 대리석 건물 벽에 박아놓은 반(半)보석 꽃무늬 장식이 화려하다. 달이 밝은 밤에 보면 붉고 파란 색깔이 빛을 받아 빛난다고 한다. 소접견실(디완이카스)의 기둥 한쪽에는 “지상에 천당이 있다면 이곳이다”가 새겨져 있다고 했다. 샤 자한 황제가 만든, 세상에서 가장 호화로웠던 옥좌가 있었다는 곳이기도 하다. 옥좌는 없어졌지만 그곳에 박혀있던 세상에서 가장 큰 다이아몬드 중의 하나는 지금은 영국 여왕의 왕관에 박혀 있다고 한다. 레드포트의 주인공은 샤 자한. 그럼 샤 자한의 입을 통해 레드포트 이야기를 더 들어보기로 하자.
무굴제국 두 개의 수도, 델리와 아그라
내 이름은 샤 자한, 무굴제국의 5대 황제다. 황위에 오른 지 21년이 지났다. 이슬람력 1058년, 서기로는 1648년이다. 아그라 황성 바로 옆을 지나는 야무나강을 보며 아그라는 너무 어수선하다고 생각했다. 떠나야 할 때가 가까워졌다. 야무나강을 거슬러 북쪽으로 올라가면 나오는 델리에 짓고 있는 새로운 황성 ‘랄킬라(붉은성이라는 뜻, 영어로 Red Fort)’가 곧 준공된다는 보고를 받았다. 신도시 공사를 시작한 지 9년3개월이 됐다. 4대조 바부르 황제가 세운 제국은 이제 반석 위에 올라서 있다. 영토는 서쪽으로 아프가니스탄, 남쪽으로는 데칸고원까지 뻗어 있다. 제국은 극성기를 맞고 있었다. 내 이름 샤 자한은 페르시아어로 ‘세계의 황제’라는 뜻이다. 샤 자한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무굴제국의 위세는 동방세계는 물론 페르시아와 중앙아시아에까지 떨치고 있다.
무굴제국의 수도는 그간 델리와 아그라 두 곳 사이를 오갔다. 제국의 창업주 바부르 황제는 아그라에 나라를 세웠다. 할아버지 후마윤 황제는 아그라에서 나라를 이어받았으나 관리를 잘못해 지방 태수에게 빼앗기고 페르시아까지 쫓겨갔었다. 절치부심하고 나라를 찾는 데 성공한 뒤에는 델리에서 통치했다. 후마윤 황제는 불운했다. 뜻밖의 사고로 복위 339일 만에 신의 곁으로 갔다. 델리의 황성 내 황실 도서관 계단을 내려오다가 발을 헛디뎌 넘어지면서 머리를 다쳐 사흘 만에 사망했다. 후마윤의 미망인이자 나의 할머니인 하미다 바누 베굼은 델리에 후마윤 할아버지를 위한 멋진 묘당(廟堂)을 짓고는 1558년 델리를 떴다. 하미다 바누 베굼은 어린 아들 아크바르를 설득해, 델리가 지세가 좋지 않으니 천도하자고 했다고 전해진다.
아그라가 다시 제국의 중심지가 된 지 90년. 나는 이제 아그라를 떠나 다시 델리로 돌아가려 한다. 내게 아이를 14명이나 낳아준 사랑하는 황후 뭄타지 마할(1631년 사망)이 죽은 지 벌써 17년이 지났다. 아그라의 황성에서 보이는, 야무나 강변에 황후를 위한 묘당 타지마할이 한창 올라가고 있다.
“아무리 써도 돈이 줄지 않는다”
- ▲ 레드포트 내 황제 가족을 위한 공간. 소접견실, 침전, 목욕탕, 예배당이 들어서 있다. photo 아룬 가네시
나는 타지마할 등 후대에 건축왕이라고 불릴 정도로 수많은 건축을 남겼다. 황후도 죽고 이제 아그라를 떠나기로 했다. 후마윤 할아버지의 수도 델리로 돌아간다. 후마윤 황제가 살던 옛 황성이 아니라 새 황도를 세웠다. 세계를 놀라게 할 만한 거대한 건축물이다. 새 황성에 대해서는 내가 살아있을 때 황실 도서관장이었던 무함마드 타히르(1627~1666)가 남긴 나의 전기 ‘샤자한나마’를 보시라. 당시 상황이 짐작될 것이다.
“성채는 천국을 닮았으며, 야무나 강변, 델리시 외곽에 건설됐다. 전지하신 분(샤 자한)은 앞에서 언급한 강의 제방 위에 기후가 온화하고, 쾌적한 자리를 고르고 그곳에 장엄한 성곽과 아름다운 건물들을 세워야겠다는 생각을 하셨다. 물줄기가 흘러야 하며, 성에서 강을 내려다볼 수 있어야 했다. 오랜 물색 끝에 델리시에서 가장 먼 외곽과 살림가르(城) 사이에 있는 부지가 선택됐다. 착공 행사는 그리 요란하지 않았다. 이슬람력 1049년 1월 9일(1639년) 금요일 밤에 고귀한 건물의 초석이 놓여졌다. 제국 전역에서 장인들이 명을 받고 모였다. 치세 21년인 이슬람력 1058년 3월 24일(서기 1648년 4월 18일)에 완공됐다. 공사는 9년3개월여가 걸렸으며 공사대금으로 6000만루피가 소요됐다.”
황성과 함께 조성한 신도시에는 나의 이름을 붙였다. ‘샤 자한의 거처’라는 뜻의 ‘샤자하나바드’라고 했다. 성곽도시다. 천도를 위한 길일을 골랐다. 인도인은 길일을 많이 따진다. 아그라를 떠나 1648년 4월 19일 레드포트에 들어갔다. 야무나강 쪽으로 난 궁성문을 이용했다. 천도를 축하하기 위해 나는 성대한 행사를 명령했다. 나의 치세를 기록한 황실 사관들의 당시 기록을 종합해 보도록 한다.
“이란과 투란, 카슈미르와 힌두스탄에서 온 가수들이 노래를 했고, 춤꾼과 광대들이 신이 나서 뛰어다녔다. 황성은 거대했다. 황성 낙성을 축하하기 위해 사아압둘라 칸은 6만루피 상당의 카펫을 특별접견실용으로 바쳤고, 알리 마르단 칸은 아람가, 즉 침전(寢殿)용 카펫을 진상했다. 사아압둘라 칸은 시를 지었고, 그걸 침전 벽에 새기도록 했다. 대접견실의 지붕과 벽, 기둥에는 투르크산 벨벳 양단과 중국산 실크가 내걸렸다. 대접견실 앞의 뜰에는 벨벳으로 만든 큰 천막, 캐노피가 세워져 있었다. 네 개의 은제 기둥이 캐노피를 받쳤고, 아마다바드에 있는 황실 공방 장인들이 준비한 캐노피의 크기는 가로 65.7m 세로 40.5m, 높이는 21m였다. 캐노피의 주변은 은제 난간으로 둘러져 있었고, 캐노피 안에는 1000명 이상이 들어갔다. 황제는 특별히 만든 옥좌에 앉았고, 옥좌 주위에는 금제 난간이 둘러져 있었다. 황제의 앞에는 왕자들과 고관들이 앉아 있다. 샤 자한은 대연회를 열고 정부의 고관들에게 선물과 명예를 하사했다. 제위 후계자인 다라 키코 황태자는 예복 한 벌과, 코끼리 한 마리, 20만루피를 받았으며 2만잣을 받는 지위로 승급됐다. 사아둘라 칸은 예복 한 벌과, 7000잣과 6000수와르를 받는 지위로 승진했다. 마크라맛 칸은 예복 한 벌과 5000잣 및 5000수와르를 받는 지위로 승급됐다.”
메카 방향 서쪽을 향해 건설
황성은 가로 918m 세로 495m 크기의 팔각형 모양이고, 메카 방향인 서쪽을 향해 있다. 담 높이는 강 쪽은 18m, 육지 쪽은 33.5m다. 아그라 인근의 파테푸르 시크리에서 캐어온 붉은 사암으로 지었고 황성 둘레는 3㎞다. 레드포트에는 4개의 큰 출입문, 2개의 작은 출입구, 21개의 감시탑이 있고, 서쪽으로 난 라호르게이트가 주 출입문이다.
레드포트 안에서 가장 빛나는 자리, 그곳은 나의 옥좌다. 나의 옥좌가 그 유명한 공작좌(孔雀座)이다. 수많은 다이아몬드와 루비, 사파이어, 에메랄드를 박아 만들었다. 샤자하나바드와 레드포트를 만든 기념으로 찬드니 촉의 장인들에게 만들도록 했다. 당시 나의 궁성을 찾아왔던 한 유럽인 보석상(Tavernier)은 650만파운드스털링의 가치가 있다고 평가한 바 있다.
알다시피 인도는 당시 세계에서 유일하게 다이아몬드가 나는 나라였다. 세상의 많은 군주들이 얼마나 힌두스탄의 다이아몬드를 탐냈는지? 인도의 다이아몬드에 대한 이야기는 많다. 바부르 황제가 북인도의 주인이 되기 위해 아그라에 들어갔을 때 바부르보다 먼저 아그라에 진입한 그의 아들 후마윤이 바쳤다는 다이아몬드는 유명하다. 바부르 황제는 그의 자서전 ‘바부르나마’ 중 아그라 입성 직후 “괄리오르의 힌두왕족들이 후마윤에게 붙들린 뒤 보석들을 자발적으로 바쳤다. 그중에는 유명한 다이아몬드 하나가 있었다. 너무 값나가 다이아몬드의 가치는 전 세계가 하루 쓰는 비용의 절반 가격이 된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다이아몬드가 나의 옥좌인 공작좌에 들어가 있던 다이아몬드라고 일부에서는 얘기한다.
세포이항쟁의 마지막 전장, 레드포트
나의 치세에도 큰 다이아몬드가 발견돼 황실로 들어왔다. 황실 사관인 이낫 칸이 기록한 ‘샤자한나마’를 보면 관련 기록이 남아있다. 골콘다의 광산에서 나온 놀라울 정도로 큰 다이아몬드의 가치를 보석상들은 15만루피라고 판정했다.
나의 아들 아우랑제브가 죽은 뒤 무굴제국의 구심력은 약해졌다. 나라나 사람이나 영고성쇠가 있는 법이다. 극성기를 지나면 국가 구성원의 씩씩했던 기상은 약화되고, 사회는 느슨해진다. 왕권은 약해지고, 신권이 강해졌다. 변방의 수비선이 약화됐고, 서쪽 국경선에서 외적이 자주 들어왔다.
나의 공작좌는 페르시아의 임금인 나디르 샤(재위 1736~1747)가 델리의 황성까지 쳐들어와 들고 갔다. 델리 북서쪽에 등장한 시크왕국의 병력이 1783년 3월 11일 레드포트에 진입하기도 했다. 레드포트는 만신창이가 되었다. 무굴제국의 위엄은 땅에 떨어졌다.
내가 만든 레드포트는 이후 무굴제국의 끝을 지켜봤다. 내 후손으로 마지막 황성의 주인이었던 바하두르 샤 2세(재위 1837~1857)는 영국의 동인도회사의 지배에 반기를 든 세포이들의 얼굴마담이 됐다가 1857년 옥좌에서 끌어내려졌다. 무굴의 17대 황제 바하두르 샤 2세는 결국 오늘날 미얀마로 끌려가 양곤에서 가택 연금된 채로 살다가 이국땅에서 죽고 말았다.
영국인들은 무굴제국의 간판을 공식적으로 내려버렸다. 레드포트는 1857년 세포이항쟁의 마지막 전장으로 변해 크게 손상됐다. 영국인은 레드포트의 높은 담장을 파괴하기 위해 대포를 퍼부었다. 이후 레드포트는 제국의 중심지에서 영국 식민주의자들의 군대가 주둔하는 병영이 되었다. 황성 안의 아름다운 많은 건물이 철거되고 그 자리에는 멋대가리 없는 병영 건물이 들어섰다. 1947년 8월 15일 레드포트에서 인도 독립을 알리는 인도의 삼색기가 올라가기까지 레드포트의 주인은 영국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