過垂虹(수홍교를 지나며) - 강기(姜夔, 1155-1221)
過垂虹(수홍교를 지나며) - 강기(姜夔, 1155-1221)
自作新詞韻最嬌(자작신사운최교) : 내가 지은 새 가사가 더없이 멋들어져
小紅低唱我吹簫(소홍저창아취소) : 소홍이는 노래하고 이 몸은 퉁소 분다.
曲終過盡松陵路(곡종과진송릉로) : 노래를 다 부르자 송릉 길이 끝나고
回首煙波十四橋(회수연파십사교) : 돌아보니 다리 열넷이 안개 속에 아련하다.
남송 소희 2년(1191) 늦겨울에 강기(姜夔, 1155-1221)는 석호(石湖)로 놀러 갔다. 석호는 소주(蘇州) 서남쪽에 있는 작은 호수로 당시 남송 시인 범성대(范成大)가 은거하고 있던 곳이다. 마침 매화가 청아하게 피어서 두 사람의 시심을 자극했다. 범성대가 강기에게 매화를 읊은 사(詞)를 한 수 지어보라고 청했다. 송나라의 대표적인 문학양식인 사는 기존의 곡조에 맞추어 써넣는 가사인데 강기는 음악에도 능통했기 때문에 스스로 <암향(暗香)>과 <소영(疏影)>이라는 제목의 기다란 곡조 두 편을 작곡한 뒤 가사를 썼다. 범성대는 그것이 너무나 마음에 들어 자기 집 기녀 소홍(小紅)이에게 불러보라고 했다. 소홍이는 이 두 곡조를 구성지게 불렀고 강기는 자신이 작사 · 작곡하고 소홍이가 부른 그 노래가 참으로 마음에 들었다. 강기가 소홍이를 그토록 좋아하는 모습을 보고 범성대는 그녀를 그에게 주었다.
며칠 뒤인 섣달 그믐날 강기는 소홍이를 데리고 호주(湖州)에 있는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석호에서 호주로 가는 길에 수홍교라는 다리가 있었다. 북송 경력 8년(1048)에 지어진 이 다리는 강남에서 가장 긴 다리로 원나라 때는 원래의 목조 다리를 헐고 그 자리에 다시 석조 다리를 지었는데 그 길이가 약 500m나 되었다고 한다. 반달처럼 둥근 모양이 마치 무지개가 뜬 것 같다고 하여 수홍교라고 불리게 된 이 다리는 유명 시인이 지은 시와 유명 화가가 그린 그림이 100편이 넘을 정도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1967년 5월 안타깝게도 다리가 그만 붕괴해버렸기 때문에 지금은 양쪽 끝에 조금씩 남아 있는 잔재를 통하여 옛날 모습을 가늠해볼 수 있을 뿐이다. 그래도 그 부근이 수홍교유지공원(垂虹橋遺址公園)으로 조성되어 있어서 접근하기가 어렵지는 않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강기는 소홍이를 얻은 기쁨을 참을 수가 없어서 집으로 가는 배 안에서도 소홍이에게 자신의 신곡을 부르게 하고 자신은 옆에서 퉁소를 불어 반주를 넣었다. 참으로 신바람이 났다. 마음이 경쾌해서 그런지 배가 한결 빠른 것 같았다. 노래를 다 부르고 나서 뒤를 한번 돌아보았더니 벌써 송릉(松陵, 지금의 강소성 吳縣)이 다 지나가고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 작은 물길과 그 위에 놓여 있는 수없이 많은 소형 다리들이 아련하게 안개에 묻혀 있었다. 그야말로 그림처럼 아름다운 수향풍경이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의 입에서 시가 한 수 나왔다.
이렇게 하여 지어진 이 시는 <암향> 및 <소영>이라는 두 수의 사와 함께 시인 강기의 위상을 드높여주었음은 물론 수홍교라는 다리를 전국적인 명소로 만드는 데에도 크게 기여했다. 별로 한 일도 없이 또 한 해가 지나간다는 아쉬움 때문에 제야를 배경으로 하는 시가 대부분 우울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는 것과 달리 이 시는 매우 명랑하고 경쾌한 정조를 띠고 있어서 이채롭다. (이 작시배경 해설은 서울대 커뮤니티에서 인용하였음.거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