書體에 흠뻑 빠졌던 잡스
- ▲ 이철민 디지털뉴스부장
작년 봄 서울의 한 종합대학은 오랜 진통 끝에 인문대 일부 학과를 통·폐합하는 구조조정을 했다. 대기업 회장 출신인 이 학교 이사장은 "대학이 자동차 시대에 여전히 마차(馬車)를 가르친다" "여기가 구청 문화센터냐"고 했다.
해묵은 '인문학 논쟁'은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다. 지난 2월 28일 빌 게이츠는 전미(全美)주지사협회 연설에서 "리버럴 아츠(liberal arts) 분야 고등교육에 대한 주(州)정부 지원을 중단하고, 직업과 관련된 전문 교육을 강화하라"고 주장했다. '리버럴 아츠'는 문학·언어학·철학·역사학·수학 및 순수 자연과학을 의미한다. 게이츠 얘기는 지원해봤자 취업에 도움도 안 되는 리버럴 아츠에 아까운 세금을 붓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로부터 이틀 뒤 스티브 잡스는 태블릿PC인 아이패드 2를 공개하면서 대형 스크린에 '리버럴 아츠'와 '테크놀로지'의 교차로 표지판을 띄웠다. 그는 "애플의 DNA에는 기술만으론 충분치 않다는 생각이 확고하다. 리버럴 아츠와 결합한 기술이야말로 우리 가슴을 노래하게 한다. 지금과 같은 PC 이후의 시대에 이는 더욱 진리"라고 말했다. 잡스는 인간의 욕구와 잠재력을 일깨우는 여러 학문적 사고의 통합이 남다른 제품을 만든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을 것이다. IT업계의 두 거인(巨人)이 내린 정반대 결론은 미국 내에서 인문학의 유용성 논쟁에 다시 불을 댕겼다.
잡스는 지난 2005년 스탠퍼드대 졸업식 연설에서, 리드 칼리지를 한 학기 만에 중퇴하고 이 학교의 서체(書體·calligraphy) 강좌에 푹 빠졌던 시절을 이렇게 회고했다. "획의 삐침, 여러 글자 조합에서 다양한 자간(字間) 시도, 멋진 조판(組版)이 뭔지를 배웠다. 과학으로선 파악할 수 없는, 아름답고 역사가 담겨 있고 예술적으로 미묘한 작업이었다"고 했다. 그때 그는 이걸 배워서 뭘 하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그의 말대로 "일생에서 실용적으로 써먹으리라는 희망은 조금도 없었다." 하지만 10년 뒤, 그의 맹목적인 서체 탐닉은 애플이 출시한 매킨토시 컴퓨터의 다양한 글자체와 조판 능력에서 결실을 보게 된다.
물론 인문학에 빠진다고 모두 잡스가 되는 것은 아니다. 사회 분위기 탓도 있다. 이코노미스트지(誌)는 이달 초 같은 영어권이고 컴퓨터·IT 분야에서 우수한 대학이 많은 영국에선 세계적인 IT 인물이 나오지 않는 이유 중 하나로 까다로운 이민 정책을 꼽았다. 구글의 공동 창업자 세르게이 브린은 여섯 살 때 부모를 따라 러시아에서 미국으로 왔고, 잡스의 친부(親父)는 시리아 이민자였다. 또 대학 실패가 인생 낙오로 이어지고, 대기업들이 벤처기업의 아이디어를 등치고, 학교에서 '기업가 정신'이라는 걸 배워본 적이 없는 토양에서 잡스를 기대할 수는 없다.
그런 면에서, 삼성전자가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소프트웨어 개발자 300명을 충원한다는 소식은 반가우면서도 궁금증을 낳는다. 인문학을 어떻게 육성하고 어떤 소양을 계발할 것이냐에 대한 치열한 토론 없이 어느 날 '소양'을 갖춘 이들을 대량 입하(入荷)하면 기업과 사회의 체질이 바뀔까. 지난 수개월 무상급식이 단계적이어야 하느냐, 전면적이어야 하느냐를 놓고 우리 사회가 얼마나 많은 공력(功力)을 쏟아 논쟁했는지 생각해 보라. 그 무상급식으로 자라날 아이들과 사회가 먹고살 방편이기에, 인문학에 대한 토론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고 아무리 늦어도 늦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