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호 인근 음식의 거리 건륭제의 발길 잡은 20여곳 식당 줄지어. 저장성 항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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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호 동쪽의 가오인미식가 |
오늘은 저장성의 항저우를 여행하면서 강남의 미식을 맛보려고 합니다. 항저우는 저장성의 성도인데, 저장이란 항저우를 지나가는 첸탕강(錢塘江)의 옛 이름이지요. 춘추시대에는 월(越)나라에 속했다가 오(吳)나라가 점령했었고, 다시 월나라가 오나라를 멸망시키자 월나라에 속했다가, 전국시대에는 초(楚)나라 땅이었습니다.
삼국시대를 지나 사마의(司馬懿)가 세운 서진(西晋)이 멸망하고, 남경을 수도로 동진(東晋)이 세워지면서 항저우도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합니다. 이때부터 경제력에 관한 한 남방이 북방을 추월했고, 수나라는 항저우로부터 북방의 군사 중심지인 베이징으로 물자를 수송하기 위해 경항대운하를 건설하게 되었습니다.
북송의 수도 카이펑(開封)이 여진족의 금나라에 함락당하고, 항저우로 쫓겨 내려와 남송을 세우자 항저우는 일시적으로 남송의 정치와 경제의 중심지가 됐지요. 그러나 쿠빌라이가 이끄는 몽골의 군대가 남송마저 멸망시킨 이후 항저우는 권력에서는 소외되지만 경제와 문화에서는 발전했고 음식문화도 지속적으로 발전해서 지금도 저장 또는 항저우는 중국 음식문화에서 대표적인 지방으로 꼽힙니다.
항저우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서호(西湖)입니다. 서호는 호수가 아니라 첸탕강의 하구로 바다와 직접 접하고 있었으나, 동한 시대에 방파제를 만들면서 바다와 격리된 호수가 됐습니다. 이후에도 첸탕강 하류는 범람과 퇴적이 반복되면서 이제는 바다로부터 50㎞ 이상 들어온 위치가 됐습니다.
서호는 둘레가 15㎞ 정도로 도보여행을 하기에 적당합니다. 호숫가의 공원 길도 잘 정비돼 있고, 시인 소동파(蘇東坡)가 항저우 지사로 부임해서 만들었다는 제방인 쑤디(蘇堤)도 걷기에 좋습니다. 레이펑탑(雷峰塔)과 악비묘(岳飛墓)와 같은 역사의 명소는 물론 저장성 박물관과 미술관 등 볼거리도 풍부하지요. 서호 동쪽 가까운 곳에 가오인미식가(高銀美食街)와 허팡제보행가(河坊街步行街)가, 북서쪽으로는 러우와이러우(樓外樓)라는 유서 깊은 식당이 있어 항저우 음식문화를 만끽하기에도 그만입니다.
가오인미식가 인근에 숙소를 정하는 것도 좋습니다. 가오인미식가는 허팡제보행가와 함께 있고, 서호도 가깝고, 성황각이 있는 오산도 가깝지요. 가오인미식가에서 저녁을 한 다음에 허팡제를 둘러보고 그 다음날 아침 서호 도보일주를 하면 일정도 적절합니다.
아침에 가오인미식가를 출발해서 호숫가를 따라 걷다가 레이펑탑에 올라가 서호 전체를 조망해 보고, 제방을 걸어 호수를 가로지른 다음, 러우와이러우에서 점심을 먹고, 저장성 박물관과 미술관, 시후톈디(西湖天地)를 거쳐 가오인미식가로 돌아와 저녁식사를 하면, 중국 여행에서 도보와 음식 여행으로는 최고가 아닐까 싶습니다.
- ▲ (왼쪽부터) 죽순과 해산물로 요리한 바바오여우탸오, 시후춘차이탕
가오인미식가는 동서로 약 400m의 길 한쪽으로만 20여개의 식당이 늘어서 있는데, 한눈에 보기에도 괜찮아 보이는 식당들입니다. 어디를 들어가든 실망하지 않겠지만, 황판얼(皇飯兒)이란 식당을 먼저 찾아보는 것도 좋습니다. 황판얼이란 황제가 식사를 한 곳이란 뜻인데, 청의 건륭제가 내려준 것이지요. 이 식당의 대표적 요리인 첸룽위터우(乾隆魚頭)가 주인공입니다.
건륭제가 세 번째 강남 순행에 나섰을 때 하루는 평복을 하고 혼자서 오산(吳山)에 올라 첸탕강과 서호를 바라보다가 그만 비를 만났습니다. 비가 좀처럼 그치지 않는 데다가 시장해진 건륭제는 근처 허름한 민가에 들어가 비도 피하면서 식사를 청했습니다. 집주인 아싱(阿興)은 어떤 식당의 종업원이었는데, 이 사람이 황제인 줄은 몰랐지요. 가난한 집이라 변변한 식재료는 없었고, 점심식사에 쓰고 남은 생선대가리 반 토막과 두부 한 모만 있었습니다. 이것을 사기 냄비에다가 두반장(豆瓣醬)을 넣고 요리를 해서 내왔는데, 춥고 배고프던 황제는 아주 맛있게 먹었지요. 은자로 밥값을 지불하고 베이징으로 돌아왔는데, 그 맛이 생각나서 황실 주방에 몇 번 주문을 했으나 그 맛이 아니더랍니다.
건륭제는 네 번째 강남 순행에서 다시 그 집을 찾아가 생선대가리와 두부로 만든 요리를 청했고, 식사 후에 밥값으로 은자 이십 냥을 내면서 아예 식당을 열도록 했습니다. 아싱은 이때 황제란 것을 알았지요. 이런 연유로 생긴 식당이 바로 왕룬싱판좡(王潤興飯庄)입니다. 이 이름이 참 재미있는데, 핵심은 룬(潤)에 있습니다. 룬의 한자를 뜯어보면, 氵는 삼수(水)변이니 비가 내린다는 뜻이고, 閏은 문(門) 아래 왕(王)이 있으니 황제가 비를 피한다는 뜻이 됩니다. 곧 황제(王)가 비를 피해 문으로 들어와서(潤) 맛있게(興) 식사(飯)를 한 곳(庄)이란 말이 되는 것이지요.
다시 5년이 지난 후 건륭제가 강남 순행에서 이 식당을 찾았을 때 아싱은 극진하게 요리를 만들어 올렸고, 황제가 식사 후에 친히 황판얼이라는 이름을 하사해서 지금도 황판얼과 왕룬싱 두 곳이 각각 사업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요즘 대중스타의 마케팅 효과가 대단하지만, 당시의 황제 마케팅에 비교할 수는 없겠지요. 이렇게 황제로 마케팅을 했으니 그저 복을 타고났다고 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황판얼에서는 첸룽위터우(乾隆魚頭) 이외에도 항저우의 미식을 여러 가지 맛볼 수 있습니다. 첸룽위터우로 생선요리가 결정됐다면, 육류로 자오화지(叫花鷄)를 주문하는 것도 좋습니다. ‘거지닭’이라고 부르는데 항저우의 유명한 특산 닭고기 요리지요. 어느날 거지에게 닭이 한 마리 생겼습니다. 닭을 연잎으로 싸고 진흙을 바른 다음 옆집 아궁이를 빌려서 구웠답니다. 단단해진 진흙을 망치로 두드리자 닭에서 연잎의 향기가 솔솔 나고 기름이 모두 빠져서 담백한 맛의 닭고기가 탄생된 것이지요.
서민스러운 느낌과 고급스러움이 한데 어우러진 바바오여우탸오(八寶油條)도 특색 있는 요리입니다. 서민들의 아침식사로 잘 알려진 여우탸오에 죽순과 해산물 등 고급스러운 재료들을 얹어서 만든 것인데, 아삭대는 죽순도 좋고 여우탸오의 고소한 맛도 참 좋습니다.
시후춘차이탕(西湖蒓菜湯)도 항저우에서 꼭 맛봐야 할 것으로 항저우 사람이라면 누구든 추천하는 음식입니다. 춘차이는 수련의 잎으로 중국에서는 아주 귀한 수생식물이지요. 아교질을 함유하고 있어서 입에 들어가면 미끌미끌합니다만, 100g의 춘차이 안에 단백질이 90㎎이나 들어있고 비타민도 풍부하게 들어있습니다. 부재료는 닭 가슴살과 돼지 뒷다리를 염장한 훠퉤이(火腿)와 함께 탕으로 만들어 눈으로 보기만 해도 맛있어 보입니다.
식사를 잘 마쳤다면 가오인미식가의 옆길인 허팡제보행가를 걸어 보면 좋습니다. 이 길은 차가 없는 길로서, 현대 중국의 세련된 디자인에서 티베트 향기가 진한 액세서리, 전통적인 약방에서 샤오츠(小吃)까지 아주 다양한 상품들이 즐비합니다. 멋진 상점과 예쁜 노점도 구경할 만하고, 이곳을 찾아오는 서양 여행객들에서부터 항저우의 젊은이들까지 다양한 사람들을 구경하는 재미도 있는 거리입니다.
- ▲ 허팡제 동쪽 끝에 있는 야식 골목.
이 허팡제의 동쪽 끝부분에 가면 즐거운 야식 골목이 있습니다. 가오인미식가와 허팡제를 남북으로 잇는 40m 정도의 골목길에는 양측으로 샤오츠 노점상들이 가득 차 있고, 가운데에는 공용 식탁이 길게 이어져 있습니다. 어디서든 샤오츠 실물을 보고 편하게 고른 다음 공용 식탁의 빈자리에서 먹습니다.
이곳에서 정말 다양한 간식거리를 맛볼 수 있습니다. 다양한 만두, 각종 국수, 크고 작은 꼬치, 조그만 그릇에 담아서 파는 과일, 철판에 부친 것들, 닭고기 요리, 오리 대가리, 완자, 철판에서 요리한 개구리, 참새구이에 연근까지 정말 다양한 간식거리들이 즐비해서 보는 것만으로도 배가 부를 지경이지요.
본격적으로 서호를 걷는 도보여행은 다음 편에 이어가겠습니다만, 항저우의 황판얼에서 나온 건륭제 이야기는 음식이 아닌 다른 측면에서 한번쯤은 음미해볼 만합니다.
청나라는 잘 알다시피 만주족이 세운 왕조입니다. 30만명 정도의 인구로 1억이 넘는 대륙을 지배했고, 몽골제국을 제외하면 가장 넓은 땅을 지배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고정관념 속에 은근히 여진족의 나라라고 폄하하는 경향이 있는데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청나라 강희제·옹정제·건륭제 세 황제는 성군으로 평가받습니다.
이 세 황제는 스스로 검소해서 강희제의 경우 재임 초기 20년간의 황실 비용 총액이 명나라 황제들의 1년 경비보다도 적었고, 재정이 안정되었던 옹정제와 건륭제도 명나라의 반 정도였습니다. 만주족의 전체적 문화수준이 높지 않았던 탓에 세 황제는 스스로 열정적으로 공부하여 어떤 한족 학자에게도 뒤지지 않는 학문적 소양을 보여주었지요. 세 황제는 한족에 대해서는 가장 앞장섰던 문화적 투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정치·군사적으로 상당한 업적을 남겨 건륭제 시절 최대 판도를 이뤘습니다.
그리고 수시로 평복을 입고 민간인들의 생활을 시찰하는 등 가장 부지런한 공무원이 바로 황제 자신이었지요. 이런 민생시찰 가운데 황판얼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 것이니, 21세기의 한국인들, 특히 한국의 리더들은 황판얼에서 미각과 함께 그 속에 드리워진 모범적인 리더의 모습도 음미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