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상화의 비밀' 전 내일 개막… 조선·中·日·유럽 작품 망라.전시는 11월 6일까지. (02)2077-9000
'초상화의 비밀' 전 내일 개막… 조선·中·日·유럽 작품 망라
터럭 한 올이라도 틀리면 그 사람이 아니다… 魂까지 그려낸 조선 초상화는 서구 사실주의 뛰어넘는 성취
전시장 한복판, 나란히 걸린 초상화 두 점이 눈에 띈다. 하나는 보물 제1487호인 '서직수(1735~?) 초상'. 풍성한 백색 도포를 입고 서 있는 조선 선비의 형형한 눈빛과 당당한 표정이 관람객을 압도한다. 1796년 서직수가 62세 되던 해, 당대 최고의 궁중화원인 이명기가 얼굴을 그리고 김홍도가 몸체를 그렸다. 빳빳한 목의 깃, 얌전하게 가슴에 묶은 검정 띠, 부드러우면서도 형체감을 잘 드러내는 의복의 윤곽선과 주름이 선비의 풍모를 보여준다.다른 그림은 바로크 거장 페터르 파울 루벤스가 그린 '한국인 초상'(미국 폴게티박물관 소장). 당초 이 인물은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끌려가 이탈리아로 건너간 '안토니오 코레아'라 알려졌지만, 인상착의로 보아 에도시대 일본에 파견된 네덜란드의 자크 스펙스 무역관장이 발탁한 조선의 전직 관리였던 것으로 새롭게 밝혀졌다. 그림 속 인물이 16세기 조선 관리들이 입던 철릭을 입고 두 손을 앞으로 모은 공수(拱手)자세를 취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한 것이다.
- ▲ 조선 최고의 초상화가 이명기가 얼굴을 그리고 김홍도가 몸체를 그린‘서직수 초상’(왼쪽·보물 제1487호)과 바로크 거장 루벤스가 그린‘한국인 초상’(오른쪽). 그림 속 인물이 서 있는 자세와 두 손을 모은 방식이 비슷하지만 표현 기법과 양식에서 차이가 난다. 입체적 음영이 돋보이는 루벤스 그림은 두 볼과 콧등, 입술에 붉은색을 칠해 생기를 불어넣었고, 조선인인데도 어딘지 모르게 서양인 느낌이 난다. 반면 이명기 그림은 형형한 눈빛과 선비다운 풍모를 통해 인물의 내면까지 그려낸 조선시대 초상화의 전형을 보여준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특히 나란히 걸린 이명기와 루벤스의 그림을 비교해보면, 조선시대 초상화의 표현양식과 기법을 뚜렷이 파악할 수 있다. 두 점 모두 조선시대 선비(관리)를 그린 전신입상(全身立像)이지만, 루벤스 그림은 입체적 음영이 도드라진 반면 '서직수 초상'은 평면적이다. 대신 내면의 세계를 충실히 표현하기 위해 눈동자를 강조했다. 꼬리가 치켜 올라간 눈의 윤곽에는 고동색 선을 덧그려 깊이감을 주었고, 동공 주위에는 주황색을 넣어 형형한 눈빛을 표현했다.
우리 역사에서 초상화가 가장 성행하고 발달했던 시대는 조선왕조였다. 통치자로서 위엄 있는 왕, 의로운 일에 목숨 걸었던 충신, 청렴결백하고 강직한 선비들…. 주로 모범이 되는 역사 인물을 그려 넋을 기렸다. '터럭 한 올이라도 틀리면 그 사람이 아니다'라고 했고, 외모뿐 아니라 그 사람의 정신까지 그리고자 했다.
- ▲ 보물 제931호 '태조 어진'(왼쪽), 도쿠가와 이에야스 초상(가운데), 청나라 오보이 초상.
한·중·일 초상화 비교도 흥미롭다. 17세기 초에 일본을 통일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초상(교토대박물관 소장)은 앞마루에 한 쌍의 사자 모양 석상을 그리는 등 인물을 신격화했고, 청나라 황제 강희제가 어린 시절 8년 동안 섭정한 오보이(鼇拜)의 초상(미국 스미스소니언 프리어새클러미술관 소장)은 화려하기 이를 데 없다. 김울림 학예연구관은 "조선의 초상화는 대륙적 스케일의 중국 초상화보다 겸손하고, 섬세한 분위기의 일본 초상화보다 절제돼 있다"며 "내면의 혼까지 드러내고자 했다는 점에서 시각적 사실주의를 추구한 서구의 초상화를 뛰어넘는 위대한 성취"라고 했다.
뒷면에 색을 칠해 앞면에 반투명 상태로 은은히 드러나게 하는 배채법(背彩法)은 조선 초상화의 중요한 키워드. 전시 마지막에선 초상화 제작과정의 전모를 소개하고, X선과 적외선 촬영을 통해 초상화의 이면에 감춰진 또 다른 그림의 실체도 공개한다. 공재 윤두서가 그린 자화상은 현재 얼굴만 남아 있지만 적외선 투시 결과 눈으로 보기 힘든 옷깃과 옷 주름 선이 어깨 부분에서 확인됐다. 전시는 11월 6일까지. (02)2077-9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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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로크 시대 유럽의 화가 페터르 파울 루벤스(1577-1640)가 1617년에 그린 '한복입은 사람' 초상. 드로잉, 38.4x23.5cm, 폴게티박물관 소장. 국립중앙박물관이 마련하는 '초상화의 비밀' 특별전에 선보인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 조선시대 초상화의 비밀은?
- 국립중앙博 ’조선시대 초상화Ⅱ’ 출간
한국 미술사에서 중국 초상화의 영향을 받은 시기는 16세기와 17세기 초 무렵이다.
이 시기 가운데 중국의 초상화풍을 엿볼 수 있는 대표적인 그림이 선조 때의 문인 정곤수(1538~1602)의 초상화다.
이 초상화는 그간 정확한 연대가 밝혀지지 않았으나 정곤수가 중국에 사신으로 갔을 때 중국 화가가 그린 것으로 알려져 왔다. 하지만 최근 국립중앙박물관이 ’한국서화유물도록’ 시리즈의 15번째 성과물로 ’조선시대 초상화Ⅱ’를 출간하는 과정에서 그의 사후에 그려진 것이 확인됐다.
X-레이 분석 결과, 육안으로 보이는 초상화 밑에 청대 의복을 입고 있는 또 다른 초상화가 발견된 것이 근거가 됐다. 박물관 측은 청대 의복이 확인된 점을 들어 제작 시기를 적어도 청 왕조가 건립된 1616년 이후로 봐야하고 초상화의 주인공으로 알려진 정곤수는 물론 그 제작배경에 대해서도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결론지었다.
국립중앙박물관이 28일 펴낸 ’조선시대초상화Ⅱ’에는 이밖에 금관의 머리둘레 부분과 후면 문양 부분에 금박을 입힌 흥선대원군 초상(보물 제 1499호)과 눈동자 부분을 금으로 배채(背彩)한 정조 때 문인 서매수(1731~1818)의 초상화 등 총 44점의 초상화를 수록했다. 배채란 고려불화에서도 발견되는 기법으로 종이 뒷면에 칠한 색채가 앞에서도 은은하게 드러나도록 하는 채색법을 말한다.
중앙박물관 측은 올해 말에 발간하는 ’조선시대 초상화Ⅲ’을 끝으로 박물관이 소장한 초상화에 대한 조사ㆍ정리 작업을 마무리한다는 방침이다.
정곤수 초상화
400년전 루벤스가 그린 최초의 조선인 누구일까?
노랗게 바랜 종이 위에 조선인 남자가 서 있다. 한복 깃을 단정히 여몄고, 통이 큰 소매에 양쪽 손을 집어넣었다. 17세기 바로크 시대 거장 페터르 파울 루벤스(1577-1640)가 400여년 전에 그린 ‘한복 입은 사람(1617년作)’이다. 이는 서양인이 그린 최초의 한국인 그림이다.
그림 속 주인공은 안토니오 코레아로 추정된다. 본명(本名)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진단학회의 ‘한국사’에 따르면 안토니오 코레아는 전라북도 남원에서 태어나, 정유재란 당시 일본 나가사키에 노예로 팔려갔다. 아직 소년인 그를 눈여겨 본 사람이 이탈리아 무역상 프란체스코 카를레티였다. 카를레티는 그를 1606년 피렌체로 데려갔고, ‘코레아(Corea)’라는 성(姓)을 주고 석방했다.
안토니오 코레아는 로마에 정주(定住), 그곳에서 교회일에 종사했다. 실제로 이탈리아의 남부 알비시라는 마을에는 300여명의 코레아씨(氏)가 거주하고 있다. 안토니오 코레아가 유럽대륙에 정착한 시기는 화가 루벤스의 활동을 하던 때와 일치한다. 그림 ‘한복 입은 사람’의 주인공이 안토니오 코레아라는 주장의 핵심 근거다.
의문도 있다. 어린 시절 일본으로 건너가, 이탈리아에 정착한 안토니오 코레아가 조선시대 어른들이 입는 한복을 입었겠느냐는 것이다.
그림의 주인공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일본 무역관장 자크 스펙스가 고용한 전직 관리 출신 조선인이라는 다른 주장도 있다. 조선에 관심이 높았던 스펙스는 한복을 입힌 조선인을 네덜란드로 파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림 왼쪽 하단에 희미하게 그려진 배는 이 조선인이 배를 타고 도착했음을 암시한다.
수많은 물음에도 그림 속 사내는 알듯 말 듯한 표정으로 먼 곳을 바라보고 있다. 그림 ‘한복 입은 사람’은 다음 달 27일부터 11월 6일까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 ‘초상화의 비밀’ 특별전에서다. 200여점에 달하는 초상화가 전시된다.
태조 이성계 어진과 윤두서 자화상, 이재 초상처럼 이미 잘 알려진 초상화뿐만 아니라 이명기·김홍도 등 당대 최고로 꼽힌 대가의 국보급 초상화가 대거 출품된다. 정몽주, 이순신, 논개, 황희, 박문수, 오성과 한음 등의 초상화도 걸린다.
중국·일본의 작품도 있다. 유럽 초상화까지 등장한다. ‘초상화 백과사전’이라고 할 만하다. 특별전은 초상화의 초본과 정본을 통해 그 제작과정에 대한 전모를 소개한다. 아울러 X-선과 적외선 촬영을 통해 초상화의 이면에 감춰진 또 다른 그림의 실체를 파악할 수 있도록 한 자리도 마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