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용 하.전국한시백일장에서
중용 제19장 해설
子ㅣ曰 武王周公은 其達孝矣乎ㅣ신뎌
공자 말씀하시기를 “무왕과 주왕은 통한 효이신저!”
達은 通也ㅣ라 承上章而言武王周公之孝는 乃天下之人이 通謂之孝니 猶孟子之言達尊也ㅣ라
달은 통함이라. 윗글을 이어서 말하되 무왕과 주공의 효는 이에 천하의 사람이 공통적으로(이구동성으로) 효라고 하니 맹자의 ‘달존’이라는 말과 같으니라.
[앞주 해설]
무왕과 주공 두 형제분은 지극한 효자로서 세상사람 모두가 칭찬하는 바로 『맹자』「公孫丑章句下」에 나오는 다음의 ‘三達尊’과 같은 뜻이다.
曰豈謂是與ㅣ리오 曾子ㅣ曰 晉楚之富는 不可及也ㅣ나 彼以其富ㅣ어든 我以吾仁이오 彼以其爵이어든 我以吾義니 吾何慊乎哉리오 하시니 夫豈不義를 而曾子ㅣ 言之시리오 是或一道也ㅣ니라 天下에 有達尊이 三이니 爵一 齒一 德一이니 朝廷엔 莫如爵이오 鄕黨엔 莫如齒오 輔世長民에 莫如德이니 惡得有其一하야 以慢其二哉리오
(맹자께서) 말씀하시길 “어찌 이것을 말한 것이리오? 증자께서 말씀하시길 ‘진나라와 초나라의 부함은 가히 따를 수 없으나 저들이 그 부로써 하면 나는 내 인으로써 하며 저들이 그 관작으로써 하면 나는 내 의로써 하니 내 어찌 부족할 것이 있겠는가’ 하셨으니, 이 어찌 불의를 증자께서 말씀하셨으리오. 이것도 혹 한 가지 방법일 것이니라. 천하에 달존이 세 가지가 있으니, 관작이 하나요, 연륜이 하나요, 덕이 하나이니, 조정엔 관작만한 것이 없고, 향당에는 연륜만한 것이 없고, 세상을 돕고 백성을 자라게 하는 데는 덕만한 것이 없으니, 어찌 그 한 가지를 갖고 그 둘을 가진 것을 업신여기리오?”
慊 : 찐덥지 않을 겸 惡 : 어찌 오
夫孝者는 善繼人之志하며 善述人之事者也ㅣ니라
무릇 효도라는 것은 사람(부모)의 뜻을 잘 이으며 사람의 일을 잘 전술하느니라
[본문 해설]
효도라는 것은 부모님이 살아 계실 때 부모의 뜻을 어기지 않고 잘 따르는 것뿐만 아니라 돌아가신 뒤에는 살아생전에 하셨던 일들을 엮어 문집을 만들거나 기록하여 후세에 영구히 잘 전하는 것을 말한다.
上章은 言武王이 纘大王王季文王之緖하야 以有天下하고 而周公이 成文武之德하야 以追崇其先祖하니 此는 繼志述事之大者也ㅣ라 下文에 又以其所制祭祀之禮로 通于上下者言之니라
윗장(제18장)은 무왕이 태왕과 왕계, 문왕의 실마리(왕통이 이어지는 단서)를 이으시어 써 천하를 두시고, 주공이 문왕과 무왕의 덕을 이루어 선조를 높히셨으니 이는 뜻을 계승하고 일을 기술한 큰 것이니라. 아랫글에 또 그 마름한 바 제사의 예로써 위 아래를 통해서 말함이니라.
春秋에 修其祖廟하며 陳其宗器하며 設其裳衣하며 薦其時食이니라
봄과 가을에 그 할아버지(선조) 사당을 닦으며 제기를 진열하며 그 옷을 설치해 놓으며 그 때때로의 음식을 올리느니라.
[본문 해설]
봄 가을로 사당을 수리하며 선대로부터 소장해온 귀중한 기물을 진열하고, 선대에 입었던 의상을 설치하고 그때그때 제철에 나오는 음식을 조상께 올리며 제사지내는 것을 말한다.
宗器 : 종손이 제사를 지내기에 제사지내는 그릇을 종기라 한다.
祖廟는 天子는 七이오 諸侯는 五오 大夫는 三이오 適士는 二오 官師는 一이라 宗器는 先世所藏之重器니 若周之赤刀大訓天球河圖之屬也ㅣ라 裳衣는 先祖之遺衣服이니 祭則設之하야 以授尸也ㅣ라 時食은 四時之食이 各有其物이니 如春行羔豚膳膏香之類가 是也ㅣ라
할아버지 사당은 천자는 7이고 제후는 5이고 대부는 3이고 적사는 2이고, 관사는 1이라. 종묘에서 지내는 제기는 선대에서 간직해놓았던 소중한 그릇이니, 주나라의 적도와 대훈과 천구와 하도 등속이니라. 상의는 선조가 남기신 의복이니 제사할 때에는 이를 펼쳐 놓아 써 시동에게 줌이라. 때때로 먹는 음식은 사시의 음식이 각각 그 음식물이 있으니 봄에는 양소와 돼지를 쇠기름과 향으로 요리하는 것과 같은 유가 이것이니라.
尸 : 시동 시, 주장할 시 膏 : 기름 고
[앞주 해설]
천자가 사당 일곱을 지었다는 것은 7묘제로 이를 달리 표현하면 소목제(昭穆制)로 3소3목(三昭三穆)을 두었다는 뜻이다. 곧 가운데에 제1세(先祖, 혹은 不祧之典)를 모시고 왼쪽 줄을 소(昭), 오른쪽 줄을 목(穆)이라 한다. 이에 따라 천자는 소에 2세 4세 6세의 신위를 두고, 목에 3세 5세 7세의 신위를 모신다. 제후는 2소2목의 오묘, 대부는 1소1목의 삼묘를 두고, 적사의 사당은 태조는 모시지 않고 2위만 모시고, 관사는 사당 하나만 모시고 제사를 지낸다.
종기를 보면 음식을 담는 그릇만이 아니라 선대로부터 내려오는 중요한 물건들까지를 포함한다. 적도는 은나라를 망친 주를 벤 붉은 칼을 말하며, 대훈은 문왕 무왕이 백성을 가르친 바를 기록한 책이며, 천구는 주나라에서 보배로 여기는 구슬이고, 하도는 복희씨 때 황하에서 나온 용마의 등에 그려진 그림으로 팔괘의 시원이자 『주역』의 원천이 되는 그림이다.
상의는 선조 대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의복으로 제사지낼 때 시동에게 입힌다. 지금은 지방을 써놓고 제사를 지내지만, 전에는 신주를 모셨고, 신주가 있기 전에는 시동을 모셨다. 일곱 살 먹은 순수한 어린 아이에게 조상의 의복을 입혀 그 앞에 제물을 놓고 제사를 지내면 신이 내려온다고 하였다.
제사의 음식은 때에 맞는 음식들로 여기에서 예를 든 것은 봄철 제사 때 드리는 음식의 한 종류로 『周禮』에 전해지는 내용이다.
宗廟之禮는 所以序昭穆也ㅣ오 序爵은 所以辨貴賤也ㅣ오 序事는 所以辨賢也ㅣ오 旅酬에 下ㅣ 爲上은 所以逮賤也ㅣ오 燕毛는 所以序齒也ㅣ니라
종묘에서 제사를 지내는 예는 써 소목을 차례로 하는 바이오, 벼슬을 차례로 하는 것은 써 귀천을 분별하는 바이오, 일을 차례로 하는 것은 써 어진 이를 분별하는 바이오, 여럿이 술을 마시는데 아래 사람이 윗 사람을 위해주는 것은 천한 사람에게까지 미치는 바이오 잔치하는데 터럭을 따지는 것은 연치(나이)를 차례로 하는 바이니라.
旅 ; 여러 려 酬 : 술 권할 수
[본문 해설]
종묘의 예, 벼슬의 순서, 일의 순서, 주도(酒道) 등등의 예는 모두 중용지도로 만들었음을 설명하는 구절이다. 소목의 순서는 앞 구절의 ‘앞주 해설’과 같다. 종묘에 제사를 지내는 것은 좌소우목의 순서에 따라 했으며, 서작 즉 벼슬의 높낮이는 귀천을 분별하기 위한 것이고, 서사 즉 일의 순서는 어진 이를 분별하기 위한 것이고, 어질다는 것은 각자 맡은 일을 잘하는 것을 말한다. 제사를 지내고 여럿이 음복하기 위해 술을 마시는데 이때 아랫 사람이 윗사람에게 먼저 술을 올리는 것은 즉, 직책은 비록 나보다 낮으나 나이가 많은 사람에게 먼저 술을 올리는 것은 천한 사람에게까지 미치는 것을 말한다. 잔치를 베풀고 머리털을 본다는 것은 나이를 분별해 나이 순에 따라 하기 위한 것이다.
宗廟之次는 左爲昭오 右爲穆而子孫이 亦以爲序하야 有事於太廟則子姓兄弟群昭群穆이 咸在而不失其倫焉이라 爵은 公侯卿大夫也ㅣ오 事는 宗祝有事之職事也ㅣ라 旅는 衆也ㅣ오 酬는 導飮也ㅣ니 旅酬之禮에 賓弟子兄弟之子ㅣ 各擧觶於其長而衆相酬하니 蓋宗廟之中에 以有事爲榮이라 故로 逮及賤者하야 使亦得以申其敬也ㅣ라 燕毛는 祭畢而燕이면 則以毛髮之色으로 別長幼하야 爲坐次也ㅣ라 齒는 年數也ㅣ라
종묘에서 제사지내는 차례는 좌측에는 소이요 우측은 목이 되고, 자손들 또한 순서가 있어 일이 태묘에 있게 되면(제사를 지내게 되면) 아들 조카 형제들이 여러 소와 여러 목이 다 있어 그 질서를 잃지 않느니라. 작은 공과 후와 경대부이오, 사는 종묘제사의 축관과 유사(집사)의 직책의 일이라. 여는 무리이오, 수는 마심을 인도함(권함)이니, 여럿이 술을 마시는 예에 빈제자(손님으로 온 아우나 자식)와 형제의 자식들이 각각 술잔을 그 어른에게 먼저 들어 올리고 여럿이 서로 수작을 하니, 대개 종묘 제사를 지내는 중에 제사를 지내는 것으로 써 영화를 삼느니라. 그러므로 천한 자에게까지 미처 하여금 또한 써 그 공경을 거듭함이라. 연모는 제를 다 지내고 잔치를 베풀게 되면 모발의 색으로써 어른과 어린이를 분별해서 앉는 차례를 정하는 것이라. 치는 나이 수이라.
觶 : 술잔 치(향음주(鄕飮酒)의 의식에 쓰이는 뿔잔)
踐其位하야 行其禮하며 奏其樂하며 敬其所尊하며 愛其所親하며 事死如事生하며 事亡如事存이 孝之至也ㅣ니라
그 (선왕의) 자리(지위)를 밟아서 그 예를 행하며 그 음악을 연주하며 그 높이신 바를 존경하며 그 친하셨던 바를 사랑하며, 죽은 이 섬기기를 살아있는 이 섬기듯이 하고, 없는 이 섬기기를 있는 이 섬기듯이 하는 것이 효의 지극함이니라.
踐은 猶履也ㅣ오 其는 指先王也ㅣ라 所尊所親은 先王之祖考 子孫 臣庶也ㅣ라 始死를 謂之死오 旣葬則曰反而亡焉이니 皆指先王也ㅣ라 此는 結上文兩絶이니 皆繼志述事之意也ㅣ라
천은 밟음과 같음이라. 기는 선왕을 가리킴이라. 높인 바 친한 바는 선왕의 조상 자손 신하와 백성을 말한 것이라. 비로소 죽는 것을 ‘사’라 이르고 이미 장사를 지내면 돌아가서 없어지는 것이니 다 선왕을 가리킴이라. 이것은 윗글의 두 마디를 맺은 것이니 모두 뜻을 잇고 일을 따르는 뜻이다.
郊社之禮는 所以事上帝也ㅣ오 宗廟之禮는 所以祀乎其先也ㅣ니 明乎郊社之禮와 禘嘗之義면 治國은 其如示諸掌乎인뎌
교제(郊祭)와 사제(社祭)는 상제를 섬기는 바이오 종묘의 예는 그 선조를 제사지내는 것이니 교제와 사제의 예와 체제(禘祭)와 상제(嘗祭)의 뜻에 밝으면 나라 다스림은 그 손바닥을 보는 것과 같을진저.
郊 : 들 교 禘 : 큰 제사 체(천자가 정월에 南郊에서 하늘에 지내는 제사) 嘗 : 가을제사 상
[본문 해설]
제사의 종류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천자문에도 “嫡後嗣續하고 祭祀蒸嘗이라(적자로 뒤를 잇고 증제와 상제를 지냄이라” 하였듯이 봄의 제사는 사제(祠祭), 여름의 제사는 약제(禴祭), 가을의 제사는 상제(嘗祭), 겨울의 제사는 증제(蒸祭)라 한다. 또한 하늘에 지내는 제사를 교제(郊祭), 토지신에게 지내는 제사를 사제(社祭)라 하여 상제를 섬기고, 종묘의 제사는 왕가의 선조를 제사지내는 것이다.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낼 때 동지(冬至)에는 남교(南郊)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하지(夏至)에는 북교(北郊)에서 땅에 제사를 지낸다. 체제(禘祭)는 천자가 시조(始祖)를 하늘에 배향하여 지내는 제를 말하고, 천자가 하늘과 땅에 제사지내는 것을 봉선(封禪)이라 한다. 천자문에도 봉선의식에 대해 “嶽宗恒垈요 禪主云亭하니라”고 나와 있다.
이렇게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내고 철마다 제사를 지내는 뜻에 밝으면, 결국 천지신명과 사시변화에 중용을 지키는 것이 된다. 이렇게 되면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마치 손바닥을 보듯이 쉬울 것이다. 즉 나무의 뿌리인 근본이 튼튼하면 나무 가지가 잘 벋고 꽃과 이파리가 무성하여 열매가 잘 맺듯이, 만물의 근본에 해당하는 천지신명과 사시변화를 잘 살펴 예를 갖춘다면 당연히 나라도 잘 다스릴 수 있다는 말이다.
郊는 祭天이오 社는 祭地니 不言后土者는 省文也ㅣ라 禘는 天子宗廟之大祭니 追祭太祖之所自出於太廟하고 而太祖로 配之也ㅣ라 嘗은 秋祭也ㅣ니 四時皆祭로대 擧其一耳라 禮必有義하니 對擧之는 互文也ㅣ라 示는 與視로 同하니 視諸掌은 言易見也ㅣ라 此는 與論語文意로 大同小異하니 記有詳略이라.
교는 하늘에 제사하는 것이오, 사는 땅에 제사하는 것이니 후토라고 말한 것은 글을 덜음이라. 체는 천자가 종묘에 지내는 큰 제사이니 태조가 나온 바 태묘에 추제하고 태조를 배향함이라. 상은 가을 제사이니 사시에 모두 제사하는데 그 하나를 들었을 뿐이라. 예에는 반드시 뜻이 있으니 상대하여 든 것은 호문이다. 시는 시와 같으니 손바닥을 본다는 것은 쉽게 봄을 말한다.l 이는 논어의 글 뜻과 대동소이하니, 기록함에 상세함과 간략함이 있을 따름이라.
右는 第十九章이라
중용 제20장 해설
哀公이 問政한대
애공이 정사를 묻자
[본문 해설]
노나라의 인군인 애공이 공자에게 정치를 질문한 것이다.
애공은 춘추시대 노(魯)나라의 왕(BC494~BC468)으로 성은 희(姬) 이름은 장(蔣, 將)이다. 당시 노나라에는 삼환씨(三桓氏)라 불리는 공족(公族)의 힘이 강했으며, 대외적으로 오(吳)와 제(齊)나라의 공격을 받아 노나라는 정국이 불안하였다. 위(衛)나라에서 귀국한 공자도 BC479년 불우한 가운데 숨을 거두었다. 그 뒤 애공은 월(越)나라의 힘을 빌려 삼환씨를 제거하려 했으나, 도리어 삼환씨의 공격을 받아 재위 27년만에 죽었다.-[한국세계대백과사전 제18권, 동서문화]
哀公은 魯君이니 名은 蔣이라
애공은 노나라 임금이 이름은 장이라
蔣 : 수풀 장, 성 장
子ㅣ曰 文武之政이 布在方策하니 其人이 存則其政이 擧하고 其人이 亡則其政이 息이니라
공자 말씀하시길 문왕과 무왕의 정치가 펼쳐진 것이 방책(목판과 책)에 있으니 그 사람이 있으면 그 정치가 일어나고 그 사람이 없으면 그 정치가 마비되느니라.
策 : 대쪽 책(죽간(簡)을 말아놓은 두루마리 책을 말한다.)
[본문 해설]
애공의 물음에 공자는 정치를 잘한 문왕과 무왕의 정치에 방책에 모두 있으니 그것을 잘 알고 그대로 따르면 정치를 잘할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정치를 잘못할 것이라고 답하는 내용이다.
方은 版也ㅣ오 策은 簡也ㅣ라 息은 有滅也ㅣ라 有是君有是臣則有是政矣라
방은 판자요 책은 죽간이라. 식은 멸(없어짐)과 같음이라 이와같은 군과 이와같은 신이 있으면 곧 이 정사가 있으니라.
人道는 敏政하고 地道는 敏樹하니 夫政也者는 蒲盧也ㅣ니라
사람의 도는 정치에 민첩하고 땅의 도는 심는데 민첩하니 대저 정치라는 것은 부들과 갈대와 같으니라.
蒲 : 부들 포 盧 : 갈대 로
敏은 速也ㅣ라 蒲盧는 沈括以爲蒲葦是也ㅣ라 以人立政이 猶以地種樹니 其成이 速矣요 而蒲葦는 又易生之物이니 其成이 尤速也ㅣ라 言人存政擧ㅣ 其易如此라
민은 빠름이오, 포로는 심괄((1031~1095, 北宋 때의 학자이자 정치가로 왕안석의 정치개혁 때 수리와 관개를 맡았다. 天地를 모시는 의식 절차를 南郊식으로 정리했다. 여기에서 심괄을 사람이름으로 보지 않고 ‘침괄’이라 읽고 ‘잠겨 모여’란 뜻으로 해석하기도 한다.)이 써 포위(부들과 갈대)라 하니 이것이라. 사람으로써 정치를 세우는 것이 땅에 나무를 심는 것과 같으니 그 이룸이 빠르며, 포위는 또한 쉽게 나오는 물건이니 그 이룸이 또한 빠름이라. 사람이 있어서 정사가 거행되는 것이 그 쉬움이 이와같음을 말함이라.
括 : 모일 괄 葦 : 갈대 위
故로 爲政이 在人하니 取人以身이오 脩身以道ㅣ오 脩道以仁이니라
그러므로 정치를 하는 것이 사람에게 있으니 사람을 취하는 것은 몸으로써 함이오 몸을 닦는 것은 도로써 함이오 도를 닦은 것은 인으로써 함이라.
此는 承上文人道敏政而言也ㅣ라 爲政在人은 家語에 作爲政이 在於得人이니 語意尤備라 人은 謂賢臣이오 身은 指君身이라 道者는 天下之達道요 仁者는 天地生物之心而人得以生者니 所謂元者는 善之長也라 言人君爲政이 在於得人이니 而取人之則은 又在修身이니 能仁其身이면 則有君有臣而政無不擧矣라
이것은 윗글을 이어 사람의 도는 정치에 민감함을 말함이라. 정치가 사람에 있다는 것은 『공자가어』에 ‘정치를 하는 것이 사람을 얻는 것에 있다’고 지어져 있으니 『논어』에 말뜻이 더 잘 갖추어져 있음이라. 인은 어진 신하를 말함이오 신은 인군의 몸을 가리킴이라. 도는 천하의 통한 도요 인은 천지생물의 마음이요 사람이 얻어서 써 나옴이니 원은 선의 어른이라. 인군이 정사를 함이 사람을 얻음에 있고 사람을 취하는 법은 또 몸을 닦는데 있으니 능히 그 몸을 어질게 하면 곧 인군이 있고 신하가 있어 정사가 일어나지 않음이 없음을 말한 것이라. ‘元者는 善之長也’란 글귀는 주역에 있는 말로 중용 제16장 제2절의 앞주 해설을 참고하기 바란다.
仁者는 人也ㅣ니 親親이 爲大하고 義者는 宜也ㅣ니 尊賢이 爲大하니 親親之殺와 尊賢之等이 禮所生也ㅣ니라
어질다는 것은 사람이니 어버이를 친함이 큼이 되고 의라는 것은 마땅함이니 어진 이를 높이는 것이 큼이 되니 어버이를 친하면서 줄이는 것과 어진 이를 높이는 차등이 예가 생하는 바이니라
殺 : 덜 쇄
[본문 해설]
애공이 정사에 관해 묻자, 처음에 공자는 정치는 사람에게 있고 사람을 얻는 것은 자신이 도로 몸을 닦아야 하고, 인으로 도를 닦아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그 인이라는 것은 바로 사람이라고 했다. 仁은 글자 자체에서 볼 수 있듯이 사람(人)끼리 서로(二) 사랑을 베푸는 뜻이 담겨있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할 줄 모르고 애완동물이나 다른 것을 사랑한다면 그것은 진정 사랑이 아니다. 그러면 인을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며 무엇이 가장 중요하겠는가. 그것은 내가 나온 근원 즉 어버이라는 것이다. 仁은 봄이고 義는 가을에 해당하는 것으로 仁이 내적인 것이라면 義는 외적인 것이다. 仁을 體로 한다면 義는 用이 된다. 그러므로 내적인 가정에서 어버이를 친히 하는 것은 體가 되는 인을 실현하는 것이고, 외적으로 나아가 세상의 어진 사람을 높이는 것은 用인 의가 되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내적인 체가 되는 인은 가장 근본이 되는 어버이를 친히 하는 데에서부터 시작하여 그 바깥으로 점점 줄여나가야 하는데 즉 어버이는 나의 망극한 은인이시니 최고의 사랑을 베풀어야 하고 다음으로 형제간, 숙질간 등으로 줄여나가는 것이다. 喪을 당했을 때 3년복, 1년복, 9개월복, 5개월복, 3개월복 등이 이러한 이유이다. 마찬가지로 사회적으로 어진 이를 높이는 데에도 차등이 있어야 하는데 가령 벼슬하는 이에게는 등급이 있고, 현인에게도 대현, 성현, 군자 등의 차등이 있고, 연장자에게 절을 해야 하듯이 바로 여기에서 절도가 있는 예가 나오는 것이다.
人은 指人身而言이라 具此生理하야 自然便有惻怛慈愛之意하니 深體味之면 可見이라 宜者는 分別事理하야 各有所宜也ㅣ라 禮則節文斯二者而已라
인은 사람의 몸을 가리키는 말이라. 이 생리(생하는 이치)를 갖추고 있어 자연히 문득 슬퍼하고(惻怛) 자애로운 뜻이 있으니 깊이 체득하여 맛들이면 가히 볼 수 있느니라. 宜는 사리를 분별하여 각각 마땅한 바를 두는 것이라. 예는 이 두 가지(仁과 義)를 절도있게 조절하여 무늬나게 할 뿐이라.
便 : 문득 변 惻 : 슬플 측 怛 : 슬플 달
[앞주 해설]
사람은 아무리 악한 이일지라도 슬퍼하고 자애로운 마음이 있어 어린 아이가 기어가다 물에 빠지려고 하면 달려가 구해준다. 이렇듯 누구에게나 타고난 이치를 갖추고 있어 깊이 몸에 체득하여 맛들이면 가히 仁이 무엇인지 알 수가 있다. 生理와 관련해서 맹자는 四端으로써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惻隱之心은 仁之端也ㅣ오 羞惡之心은 義之端也ㅣ오 辭讓之心은 禮之端也ㅣ오 是非之心은 知之端也ㅣ니라 人之有是四端也ㅣ 猶其有四體也ㅣ니 有是四端而自謂不能者는 自賊者也ㅣ오 謂其君不能者는 賊其君者也ㅣ니라 凡有四端於我者를 知皆擴而充之矣면 若火之始然하며 泉之始達이니 苟能充之면 足以保四海오 苟不充之면 不足以事父母ㅣ니라 - 『맹자』 公孫丑章句上에서
(측은지심은 인의 단서요 수오지심은 의의 단서요 사양지심은 예의 단서요, 시비지심은 지의 단서이니라. 사람이 이 사단을 가지고 있음은 그 사체를 있음과 같으니 이 사단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스스로 (인의를) 행할 수 없다고 말하는 자는 스스로를 해치는 자요. 그 군주가 (인의를) 행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그 군주를 해치는 자이니라. 무릇 사단이 나에게 있는 것을 다 넓혀서 채울 줄 알면 마치 불이 처음 타오르며 샘물이 처음 나오는 것과 같을 것이니 진실로 능히 이것을 채운다면 족히 사해를 보호할 수 있고, 진실로 채우지 못한다면 부모도 족히 섬기지 못하느니라.)
在下位하야 不獲乎上이면 民不可得而治矣리라
아래 자리에 있어서 위에서 얻지 못하면 백성을 가히 얻어 다스리지 못하리니라.
[본문 해설]
낮은 자리에 있으면서 윗사람인 자기 상관에게 신임을 얻지 못하면 그런 사람이 어찌 자기 부하를 다스리고 백성을 다스릴 수 있겠는가!
鄭氏曰 此句在下하니 誤重在此라
정씨(鄭玄)이 말하기를, “이 글귀는 아래에 있는데, 잘못으로 거듭하여 여기에 있느니라.”
故로 君子ㅣ 不可以不脩身이니 思脩身인댄 不可以不事親이오 思事親인댄 不可以不知人이오 思知人인댄 不可以不知天이니라
그러므로 군자가 가히 써 몸을 닦지 않음이 없으니 몸을 닦음을 생각할진댄 가히 써 어버이섬김을 아니치 못하고 어버이 섬김을 생각할진댄 가히 써 사람을 알지 아니치 못하고 사람 앎을 생각할진댄 가히 써 하늘을 알지 아니치 못하느니라.
[본문 해설]
군자가 인을 행하려면 수신을 해야 한다. 이렇게 몸을 닦을 것을 생각하면 먼저 백행의 근본인 효도를 생각지 않을 수 없으니 먼저 어버이를 섬겨야 할 것이고, 어버이를 섬기려고 생각하면 어떻게 섬겨야 할지 먼저 사람을 알아야 하고, 사람을 알려면 먼저 하늘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즉 정치를 하려면 철학이 있어야 하는데 그 철학이 바로 하늘, 곧 자연의 이치에서 나왔음을 깊이 새기게 해주는 말이다.
이러한 사상은 이미 고대부터 형성된 동양정치철학이다. 동양정치철학의 근간이 되었던 홍범구주가 바로 정치를 하기 위해서 먼저 알아야 할 것으로 자연의 이치인 오행을 첫째로 들고 있으며 인군이 되는 왕은 바로 가운데(中) 자리에서 不偏不倚하고 無偏無陂하며 無黨無偏의 자세로 임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爲政在人하고 取人以身이라 故로 不可以不修身이오 修身以道하고 修道以仁이라 故로 思修身댄 不可以不事親이오 欲盡親親之仁댄 必由尊賢之義라 故로 又當知人이오 親親之殺와 尊賢之等이 皆天理也ㅣ라 故로 又當知天이라
정치를 하는 것이 사람에게 있고 사람을 취하는 것이 몸으로써 함이라. 그러므로 가히 써 몸을 닦지 않음이 없고 몸을 닦는 것은 도로써 하고 도를 닦는 것은 인으로써 함이라. 그러므로 몸을 닦음을 생각할진댄 가히 써 어버이를 친하지 아니함이 없고, 어버이 친하는 그 사랑을 다하고자 할진대 반드시 어진 이를 높이는 의리로써 말미암음이라. 그러므로 또 마땅히 사람을 알아야 하고 어버이를 친하면서부터 덜어지는 것과 어진 이를 높이는 데서부터 차등을 두는 것은 모두가 하늘의 이치이라. 그러므로 또 마땅히 하늘을 알아야 하느니라.
殺 : 덜 쇄
天下之達道ㅣ 五에 所以行之者는 三이니 曰君臣也父子也夫婦也昆弟也朋友之交也五者는 天下之達道也ㅣ오 知仁勇三者는 天下之達德也ㅣ니 所以行之者는 一也ㅣ니라
천하의 통한(공통된) 도가 다섯에 써 행하는 바는 삼이니 가로되 군신과 부자와 부부와 형제와 벗의 사귐, 다섯 가지는 천하의 통한 도이고, 지 인 용 셋은 천하의 통한 덕이니 써 행하는 바는 하나이니라.
[본문 해설]
達道는 체가 되고 達德은 용이니 윗글은 5체3용(五體三用)을 말하고 있다. 道는 가는 길이고, 德은 길을 가면서 베푸는 것이기에 達道는 체가 되고 達德은 용이 된다. 그렇지만 달도를 행하나 달덕을 행하나 행하는 것은 한 가지일 뿐이다. 공자의 “吾道는 一以貫之니라”와 통하는 내용이다.
達道者는 天下古今所共由之路니 卽書所謂五典이오 孟子所謂父子有親 君臣有義 夫婦有別 長幼有序 朋友有信이 是也ㅣ라 知는 所以知此也ㅣ오 仁은 所以體此也ㅣ오 勇은 所以强此也ㅣ니라 謂之達德者는 天下古今所同得之理也ㅣ라 一은 則誠而已矣라 達道는 雖人所共由나 然이나 無是三德이면 則無以行之오 達德은 雖人所同得이나 然이나 一有不誠이면 則人欲이 間之하야 而德非其德矣니라 程子ㅣ曰所謂誠者는 止是誠實此三者니 三者之外에 更別無誠이니라
달도라는 것은 천하 고금에 한 가지 말미암은 바의 길이니 즉 『서경』에 이른바 五典이오, 『맹자』에 이른바 부자유친 군신유의 부부유별 장유유서 붕우유신이 이것이라. 지는 써 이것(달도)을 아는 바이오 인은 써한 바 이것을 체득하는 것이고 용은 써한 바 이것을 강제로 이끌어가는 것이니라. 달덕이라 하는 것은 천하 고금에 한 가지 얻은 바의 이치이라. 일은 즉 정성일 뿐이라. 달도는 비록 사람이 한 가지 말미암은 바이나 그러나 이 삼덕이 없으면 즉 써 행하지 못함이오 달덕은 비록 사람이 한가지로 얻어진 바이나 그러나 하나라도 성실함이 없으면 즉 사람 욕심이 그 사이에 끼어들어 덕이 그 덕이 아니니라. 정자 말씀하시길 “이른바 정성이라는 것은 다만 이 세 가지를 성실히 하는 것이니 세 가지 외에는 다시 별도로 성실이 없느니라.”
[앞주 해설]
공통된 도라는 것은 천하에 예나 지금이나 사람이 모두 행해야 할 길이다. 五體인 달도를 『서경』우서 순전(虞書 舜典)에서는 五典(다섯 가지 전법)이라 했으며, 『맹자』에서는 오륜(五倫)으로 설명(滕文公章句上편)하고 있다. 이 五體를 아는 것이 知이고, 五體를 체득하여 그대로 베풀고 행하는 것이 仁이며, 알고 행하는 것을 힘써 나가는 것이 勇이다. 『주역』중천건괘 대상전에 “하늘의 운행이 굳건하니, 군자가 이로써 스스로 굳세어 쉬지 않느니라(象曰 天行이 健하니 君子ㅣ 以하야 自彊不息하나니라)”고 했듯이 강하게 이끌고 나가는 것을 말한다.
달덕이라는 것은 천하에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그 길을 가면서 한 가지로 얻은 이치이다. ‘德은 得也라’ 하였듯이 덕은 얻는 것인데 그것은 오직 정성으로만 얻어지는 것이다. 『중용』을 ‘정성 誠’ 한 글자로 압축해 말할 수 있는 것은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성실한 정성이 아니면 달덕이나 달도는 모두가 한갓 공염불에 불과한 것이다. 정자의 인용구절도 知仁勇 세 가지에 성실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글이다.
或生而知之하며 或學而知之하며 或困而知之하나니 及其知之하야난 一也ㅣ니라 或安而行之하며 或利而行之하며 或勉强而行之하나니 及其成功하야난 一也ㅣ니라
혹 날 때부터 알며 혹 배워서 알며 혹 곤해서 아느니 그 앎에 이르러서는 한 가지이니라. 혹 편안하면서 행해지며 혹 이롭게 하여 행하며 혹 힘써서 행하나니 그 성공에 이르러서는 한 가지이니라.
[본문 해설]
앎의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다. 공자나 노자 같은 성인처럼 날 때부터 저절로 그 이치를 아는 사람이 있는 반면(生而知之), 현인은 성인처럼 저절로 알지는 못하나 열심히 공부하여 알고(學而知之), 또 현인처럼 재주가 훌륭하지 못하나 투철한 사람은 열심히 애쓰고 갖은 고초를 감내하며 이치를 알아가는(困而知之) 방법이 있는데 결국에 가서 아는 것은 모두가 한 가지로 같을 뿐이다.
『주역』계사상전 제12장에 “神而明之는 存乎其人하고 黙而成之하며 不言而信은 存乎德行하니라(신비스러워 밝히는 것은 그 사람에게 있고, 묵묵해서 이루며 말을 아니 해도 믿음은 덕행에 있느니라)”고 하였다. 알면 그대로 실행해야 하는데 나면서부터 저절로 안 사람은 곧 묵묵히 이루며 말을 하지 않아도 덕행을 행하듯이 편안하게 행하고, 열심히 배워서 안 사람은 이롭게 하는 가운데 행하고, 어려움을 감내하며 안 사람은 힘써서 행하니 곧, 安而行之(用)는 生而知之(體)와 같고 利而行之(用)는 學而知之(體)와 같으며, 勉强而行之(用)는 困而知之(體)와 같다.
윗글 역시 體用의 이치로 설명하였는데, 지적인 것은 체가 되고, 공을 이루는 것은 용으로 하였으나 모두가 한 가지임을 밝혔다.
知之者之所知와 行之者之所行은 謂達道也ㅣ라 以其分而言하면 則所以知者는 知也ㅣ오 所以行者는 仁也ㅣ오 所以至於知之成功而一者는 勇也ㅣ니라 以其等而言하면 則生知安行者는 知也오 學知利行者는 仁也오 困知勉行者는 勇也ㅣ라 蓋人性이 雖無不善이나 而氣禀이 有不同者라 故로 聞道에 有蚤莫하며 行道에 有難易나 然이나 能自强不息이면 則其至는 一也ㅣ니라 呂氏曰 所入之塗雖異나 而所至之域則同하니 此는 所以爲中庸이어니와 若乃企生知安行之資하야 爲不可幾及이라 하고 輕困知勉行하야 謂不能有成이라 하면 此는 道之所以不明不行也ㅣ니라
아는 자의 아는 바와 행하는 자의 행하는 바는 달도라 이르니라. 써 그것을 나누어서 말한다면 써한 바 아는 자는 아는 것이요 써한 바 행하는 자는 어진 것이요 써한 바 알아서 성공에 이르러서 하나라는 것은 용맹이니라. 써 그것을 등급으로 말하면 나면서부터 알고 편안히 행하는 것은 지(순임금의 大知)이고, 배워서 알고 이롭게 행하는 것은 어짊(안자의 克己復禮, 克己爲仁)이오, 곤해서 알고 힘써서 행하는 것은 용맹(자로의 용맹)이라. 대개 사람의 사람의 성품이 비록 선하지 않음이 없으되 기품이 같지 않음이 있느니라. 그러므로 도를 들음에 빠름과 늦음이 있으며, 도를 행함에 어렵고 쉬움이 있느니라. 그러나 능히 스스로 강하여 쉬지 않는다면 즉 그 이르는 것은 하나이니라. 여씨가 말하기를 들어가는 바의 길이 비록 다르나 이르는 바의 경계는 같으니 이것이 써 중용을 하는 바이어니와 만약에 (성인이 행하는) 生知와 安行의 바탕을 바래서 가히 거의 미치지 못한다 여기고, 困知와 勉行을 가벼이 여겨 이르되 능히 이룸이 있지 못하다고 이르면, 이는 도가 밝아지지 못하고 행해지지 못하는 바이니라
蚤 : 일찍 조 莫 : 저물 모 企 : 바랄 기
(子ㅣ曰) 好學은 近乎知하고 力行은 近乎仁하고 知耻는 近乎勇이니라
공자 말씀하시길 배움을 좋아함은 지에 가깝고 힘써 행함은 어짊에 가깝고 부끄러움을 앎은 용맹에 가까우니라
子曰 二字는 衍文이라
此는 言未及乎達德而求以入德之事라 通上文三知爲知요 三行爲仁이니 則此三近者는 勇之次也ㅣ라 呂氏曰 愚者는 自是而不求요 自私者는 徇人欲而忘返이요 懦者는 甘爲人下而不辭라 故로 好學이 非知나 然이나 足以破愚요 力行이 非仁이나 然이나 足以忘私요 知耻가 非勇이나 然이나 足以起懦니라
‘子’와 ‘曰’ 두 자는 연문(혹처럼 붙음)이라. 이것(好學 ․ 力行 ․ 知恥)은 달덕에 아직 미치지는 못하고 써 덕에 들어가는 일을 구함을 말함이라. 윗글을 통해서 三知(生而知之 ․ 學而知之 ․ 困而知之)는 지요, 三行(安而行 ․ 利而行 ․ 勉强行)은 인이 되는 것이니 즉 이 세 가지 가까움은 勇의 다음이라.
徇 : 좇을 순 返 : 돌아올 반 懦 : 게으를 나 耻 : 恥(부끄러울 치)의 俗字
[앞주 해설]
연문이라 함은 굳이 있을 필요가 없는 말이다(제20장은 애공의 물음에 공자가 계속 답변하는 내용으로 이미 앞에 언급되어 있기 때문이다.).
여씨 말하기를 어리석은 자는 스스로 옳다고는 하면서 구하지 못하고 스스로 삿된 자는 사람의 욕심을 따라서 (옳은 생각, 본성에) 돌아올 줄을 잊어버리고 게으른 자는 남의 아래가 됨을 좋아하고 사양하지 않음이라. 그러므로 배움을 좋아하는 것이 知는 아니나 족히 써 우매함을 깨는 것이요, 힘써 행하는 것이 仁은 아니나 족히 써 사사로움을 잊어버리고, 부끄러움을 아는 것은 勇은 아니나 족히 써 게으름에서 일어남이니라.
知斯三者則知所以脩身이오 知所以脩身則知所以治人이오 知所以治人則知所以治天下國家矣리라
이 세 가지를 알면 수신을 알고, 수신을 알면 사람 다스림을 알고, 사람 다스림을 알면 천하국가 다스림을 앎이라.
[본문 해설]
대학의 修身 齊家 治國 平天下를 이룰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몸 닦을 줄을 알면 明德을 알고 新民할 수 있어 나라와 천하를 다스릴 수 있음을 밝힌 글이다.
斯三者는 指三近而言이라 人者는 對己之稱이라 天下國家는 則盡乎人矣라 言此하야 以結上文修身之意하고 起下文九經之端也ㅣ라
이 세 가지는 삼근을 가르쳐서 말함이라. 남이라는 것은 자기와 상대해서 일컬음이라. 천하국가는 곧 사람에게 다함이라. 이것을 말하여 써 윗글의 수신의 뜻을 맺고, 아랫글의 九經의 실마리를 일으킴이라.
凡爲天下國家ㅣ 有九經하니 曰修身也와 尊賢也와 親親也와 敬大臣也와 體群臣也와 子庶民也와 來百工也와 柔遠人也와 懷諸侯也ㅣ니라
무릇 천하국가를 함(다스림)이 구경이 있으니 가로대 몸을 닦음과 어짊을 높임과 어버이를 친함과 대신을 공경함과 여러 신하를 몸소 체득함과 여러 백성을 내 자식처럼 여김과 백공들을 오게 함과 먼 곳의 사람들을 회유함과 제후들을 포용함이라.
子 : 아들같이 여길 자, 사랑할 자
[본문 해설]
여기서 九經은 『書經』 「洪範九疇」에서 연원했다. 홍범구주는 치수법이자 우리나라와 중국에서는 가장 근본적인 통치철학이 되는 글이다.
**** 메인화면에서 古典을 클릭한 뒤 서경으로 들어가면 홍범구주의 내용을 볼 수 있으니 참고하기 바랍니다.
經은 常也ㅣ라 體는 謂設以身處其地而察其心也ㅣ라 子는 如父母之愛其子也ㅣ라 柔遠人은 所謂無忘賓旅者也ㅣ라 此는 列九經之目也ㅣ니라 呂氏曰 天下國家之本이 在身이라 故로 脩身이 爲九經之本이라 然이나 必親師取友然後에 脩身之道ㅣ 進이라 故로 尊賢이 次之하고 道之所進이 莫先其家라 故로 親親이 次之하고 由家以及朝廷이라 故로 敬大臣體群臣이 次之하고 由朝廷以及其國이라 故로 子庶民來百工이 次之하고 由其國以及天下라 故로 柔遠人懷諸侯가 次之하니 此는 九經之序也ㅣ라 視群臣을 猶吾四體하고 視百姓을 猶吾子하니 此는 視臣視民之別也ㅣ니라
경은 떳떳함이라. 체는 몸으로 베풀어 그 곳에 거처해 그 마음을 살피는 것을 이름이라. 자는 부모가 그 자식을 사랑하는 것과 같음이라. 유원인은 (외국에서 오는) 손님과 나그네를 잊음이 없음이라. 이것은 구경의 조목을 벌려 놓음이라. 여씨가 말하기를 천하국가의 근본은 (인군) 몸에 있느니라. 그러므로 수신이 구경의 근본이 됨이라. 그러나 반드시 스승을 친하고 벗을 취한 후에 수신의 도가 나아감이라. 그러므로 尊賢이 그 다음이고, 도가 나아가는 바가 그 집보다 먼저 함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親親이 그 다음하고, 가정으로 말미암아 써 조정에 미치느니라. 그러므로 敬大臣體群臣이 그 다음하고, 조정으로 말미암아 써 그 나라에 미침이라 그러므로 子庶民來百工이 그 다음하고, 그 나라로 말미암아 써 천하에 미침이라 그러므로 柔遠人懷諸侯가 그 다음이니 이것은 구경의 순서이라. 여러 신하 보기를 나의 팔다리와 같이 하고 백성 보기를 나의 자식처럼 하니, 이는 신하를 봄과 백성을 봄의 다름이라.
修身則道立하고 尊賢則不惑하고 親親則諸父昆弟ㅣ 不怨하고 敬大臣則不眩하고 體群臣則士之報禮ㅣ 重하고 子庶民則百姓이 勸하고 來百工則財用이 足하고 柔遠人則四方이 歸之하고 懷諸侯則天下畏之니라
몸을 닦으면 도가 성립되고, 어짊을 높이면 미혹되지 아니하고, 친척을 친하면 제부(諸父 : 아버지의 형제들)와 형제들이 원망하지 아니하고, 대신을 공경하면 어지럽지(혼란하지) 아니하고, 여러 신하를 직접 체감(체험)하면 선비들이 보답하는 예가 후중하고, 백성을 자식처럼 여기면 백성이 서로 권면(勸勉)하고, 기술 있는 이들을 모두 오게 하면 재물 씀(나라 경제)이 풍족해지고, 먼 데의 사람들을 유화하면(잘해주면) 사방(각처)에서 돌아오고, 제후들을 모두 품으면 천하가 두려워하니라.
[본문 해설]
옛날에 임금이 나라를 잘 다스리려면 먼저 자기 몸을 닦는 것, 곧 수신을 가장 근본으로 하여야 함을 강조하는 대목이다. 여기서는 수신의 효력에 대해 열거하고 있는데, 가까운 내 주변부터 점차 나아가 먼 곳의 사람은 물론 신분이 하찮은 이들까지 모두 잘 대해 주어야 하는 이치를 설명하고 있다. 그리하면 집안이 화목해지고 신하들 사이에 질서가 잡히고 백성들이 서로 힘써 일함은 물론 기술가진 이들이 나라를 위해 더욱 그 기술을 개발하여 경제가 풍족해지고 덕분에 그 나라를 보기 위해 세계 각국의 많은 관광객들까지 몰려옴을 얘기하였다. 임금은 不惑하고 不眩함이 없이 나라를 다스리되 백성을 풍족하게 하려면 경제를 일으켜야 한다.
주역에서 이러한 교역의 이치를 계사하전 제2장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日中爲市하야 致天下之民하며 聚天下之貨하야 交易而退하야 各得其所케 하니 蓋取諸噬嗑하니라(한낮에 저자를 만들어 천하의 백성을 이르게 하며 천하의 재물을 모아서 교역하고 물러나 각각 그 바를 얻게 하니 대개 저 서합괘에서 취하니라)”
참고로 관광(觀光)이라 함은 본래 ‘觀國之光’으로 ‘나라의 빛을 본다’는 뜻이다. 여기서 빛은 정치를 말하는 것으로 나라의 정치가 잘되어 빛이 난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그 잘사는 나라를 보기 위해 많은 나라 사람들이 구경을 간다는 데서 ‘觀光’의 뜻으로 사용된다. 주역 20번째괘인 風地觀괘 六四효에 나오는 말이다.
此는 言九經之效也ㅣ라 道立은 謂道成於己而可爲民表니 所謂皇建其有極이 是也ㅣ라 不惑은 謂不疑於理라 不眩은 謂不迷於事라 敬大臣이면 則信任專而小臣이 不得以間之라 故로 臨事而不眩야오 來百工이면 則通功易事하야 農末이 相資라 故로 財用이 足하고 柔遠人이면 則天下之旅ㅣ 皆悅而願出於其途라 故로 四方이 歸하고 懷諸侯면 則德之所施者ㅣ 博而威之所制者ㅣ 廣矣라 故로 曰天下ㅣ畏之라 하니라
이것은 구경의 효력을 말함이라. 도립은 도가 자기 몸에서 이루어져 백성의 표본이 되니 이른바 (『서경』 「홍범구주」에서 말하는) 황건기유극(황이 그 유극을 세움)이 이것이라. 불혹은 이치에 의심치 않음을 말함이라. 불현은 일에 아득하지 않음을 이름이라. 대신을 공경하면 신임이 전일(專一)해서 낮은 신하(小臣)들이 얻어 써 이간질을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일에 임해서 현혹됨이 없음이오, 모든 기술자들을 오게 하면 공(기술)을 통하고 일을 바꿔 하여(교역) 농업과 말업(상공업 등 기타 업종)이 서로 바탕함이라. 그러므로 재물 씀이 족하고, 먼 곳의 사람을 부드럽게 해서 오게 하면 모두가 기뻐서 천하의 나그네가 그(천자의 나라) 길에 나다니기(관광)를 원함이라. 그러므로 사방에서 돌아오고, 제후를 포용하면 덕을 베푸는 바가 넓어져 위엄을 짓는 바가 넓어지느니라. 그러므로 ‘천하가 두려워함이라’고 한 것이라.
齊明盛服하야 非禮不動은 所以修身也ㅣ오 去讒遠色하며 賤貨而貴德은 所以勸賢也ㅣ오 尊其位하며 重其祿하며 同其好惡는 所以勸親親也ㅣ오 官盛任使난 所以勸大臣也ㅣ오 忠信重祿은 所以勸士也ㅣ오 時使薄斂은 所以勸百姓也ㅣ오 日省月試하야 旣禀稱事난 所以勸百工也ㅣ오 送往迎來하며 嘉善而矜不能은 所以柔遠人也ㅣ오 繼絶世하며 擧廢國하며 治亂持危하며 朝聘以時하며 厚往而薄來난 所以懷諸侯也ㅣ니라
재계(齋戒)하고 밝게(깨끗이) 하고 옷을 성대하게 해서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않음은 몸을 닦는 바이오, 참소하는 이를 버리고 여색을 멀리하며 재물을 천하게 여기고 덕 있는 이를 귀하게 여기는 것은 어진 이를 권면하는 바이오, 그 벼슬자리를 높여주며 그 봉록을 후하게 주며 그 좋아하고 미워하는 것을 한가지로 하는 것은 친척 친하는 것을 권면하는 바이오, 벼슬을 성대하게 하고 부림을 맡기는 것은 대신을 권면하는 바이오, 충성으로 대하고 녹을 후하게 주는 것은 선비를 권면하는 바이오, 때로 부리고 세금을 박하게 하는 것은 백성을 권면하는 바이오, 날로 살피고 달로 시험을 하여 봉록(희름, 旣稟)을 일에 맞추는 것은 백공을 권면하는 바이오, 가는 이를 전송하고 오는 이를 맞이하며 선한 이를 아름다이 여기고 능치 못한 이를 가긍히 여기는 것은 먼 사람을 부드럽게 하는 바이오, 끊어진 세대를 이어주며 폐지된 나라를 일으켜 주며 난을 다스리고 위태로운 곳을 붙들어 주고 조회(朝會)와 빙례(聘禮)를 때로 써 하며 가는 이를 후하게 해주고 오는 이를 박하게 하는 것은 제후를 포용하는 바이니라.
讒 : 참소할 참 薄 : 엷을 박 斂 : 거둘 렴 旣 : 곳집 희(饎) 禀 : 곳집 름(廩) 稱 : 맞을 칭 嘉 : 아름다울 가 矜 : 불쌍히 여길 긍 聘 : 찾아갈 빙
[본문 해설]
앞 절에서는 몸을 닦는 효력을 말했고, 여기서는 몸을 닦는 방법을 말하고 있는데 그 기본이 예를 갖추는 것으로 들고 있다. 『주역』 뇌천대장(雷天大壯)괘에 ‘예가 아니면 밟지 않는다’(象曰 雷在天上이 大壯이니 君子ㅣ 以하야 非禮不履하나니라)’고 하였다. 『논어』에서도 공자는 안연(顔淵)이 인을 실천하는 방법을 묻자 “非禮勿視하며 非禮勿聽하며 非禮勿言하며 非禮勿動이니라”고 답하였다. 앞서 “자신을 이기고 예를 회복하는 것이 인(克己復禮爲仁)이며 하루라도 극기복례를 한다면 천하가 인으로 돌아갈 것이다(一日克己復禮면 天下歸仁焉하나니)”라 하였듯이 수신의 제1단계는 먼저 자기 몸을 깨끗이 하는 齊明盛服을 들고 있다.
옷을 깨끗이 입는 것을 재계라 하고, 두루마기 등 예를 갖춰 옷을 입는 것을 성복이라 한다. 따라서 齊明盛服은 옷을 성대하고도 화려하게 입는 것이 아니라 갖출 것을 갖춰 깨끗하고 단정히 입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어진 이를 권면(勸勉)한다는 것은 아첨하고 참소하는 이를 제거하고 여색을 멀리하며 축재에 눈돌리지 말고 덕 있는 사람을 귀하게 여겨야 어진 이들이 임금을 보필하기 위해 모여든다는 의미이다. 또한 친척을 친하게 권면한다는 것은 친척이라도 능력있는 이가 있으면 높은 벼슬도 주고 녹도 후하게 주어 집안에서 원망이 없도록 好惡를 똑같이 해야 한다는 뜻이다.
대신을 권면하는 것은 벼슬을 성대히 하고 부림을 책임지게 하는 것이다. 여기서 ‘官盛’이라 함은 오늘날 각 부처의 장관 밑에 차관, 국장, 과장 등을 두어 서로 맡은 바 업무를 분담토록 하고 장관은 중요 정책을 결정하는 결재권을 갖도록 하듯이 대신이 나라의 큰 일을 할 수 있도록 여러 부서를 두어 일을 나누도록 한 것이며 ‘任使’란 아래 벼슬자리의 사람들에게 각자 해야 할 일들을 맡겨 부린다는 뜻이다. 만약 이렇게 하지 않고 대신 혼자서 모든 일을 떠맡게 된다면 아무 일도 되지 않기에 대신을 권면하기 위해 ‘관성임사’를 해야 하는 것이다. 선비를 권면함은 충성되고 미덥게 하며 녹을 후하게 주는 것인데, 이것은 필요할 때만 부리다 버리는 ‘토사구팽(ꟙ死狗烹’)이 아니라 일을 의욕적으로 할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백성들을 권면하는 것은 아무 때나 데려다 부역을 시키는 것이 아니라 농번기는 피하고 농한기에 시켜야 하며 세금은 조금만 거둬들여 백성들을 살맛나게 하는 것이다.
백공을 권면하는 것은 물건을 제대로 만드는지 늘 살피고 매달 시험을 하여 더욱 잘 만들게 하고 일한 만큼 그 일의 성과에 맞춰 봉록(봉급)을 잘 주는 것이다. 그래야만 기술자가 더욱 기술 발휘에 노력하여 나라가 부강해질 것이다.
외국 사람들이 내 나라를 방문하고 돌아갈 때는 전송을 잘해주고, 오는 이는 환영하며, 잘한 일이 있으면 선양해주고 능치 못한 이는 가긍히(불쌍히) 여겨 많은 이들이 내 나라를 방문하고 싶도록 해야 한다.
끝으로 제후가 다스리는 나라의 대가 끊기면 이어지도록 도와주고 기울어지거나 폐지된 나라는 다시 일으켜주며, 난이 일어나면 다스려주고, 위태로운 곳은 잘 붙들어주며(예 :『천자문』의 桓公匡合하여 濟弱扶傾이라) 일정한 때에 맞춰 제후들의 조회를 소집하고, 가끔씩은 일정 때마다 공물을 올리도록 하는 빙례를 하고, 갈 때는 후히 선물 등을 주어 잘 보내고 올 때는 처음부터 지나치게 후의를 베풀지 말고 조금씩 천천히 잘 대해주는 것이 제후를 품는 것이다.
此는 言九經之事也ㅣ라 官盛任使는 謂官屬衆盛하야 足任使令也ㅣ니 蓋大臣이 不當親細事라 故로 所以優之者ㅣ 如此라 忠信重祿은 謂待之誠而養之厚니 蓋以身體之하야 而知其所賴乎上者ㅣ 如此也ㅣ라 旣는 讀曰餼니 餼稟은 稍食也ㅣ라 稱事는 如周禮 槀人職에 曰考其弓弩하야 以上下其食이 是也ㅣ라 往則爲之授節以送之하고 來則豐其委積以迎之라 朝는 謂諸侯ㅣ見於天子오 聘은 謂諸侯使大夫로 來獻이라 王制에 比年에 一少聘이오 三年에 一大聘이오 五年에 一朝라 厚往薄來는 謂燕賜厚而納貢薄이라
이것은 구경의 일을 말함이라. ‘관성임사’는 관직에 속한 것을 여럿으로 성하게 해서 족히 사령(부려서 시키는 것)을 맡김이니, 대개 대신이 마땅히 세세한 일을 친히 하지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그를 우대하는 바가 이와 같음이라. ‘충신중록’은 이르되 대접하는 것을 성실히 하고(忠信) 기르는 것을 후하게 함(重祿)이니, 대개 몸으로써 체감하여 그 위에 의뢰하는(힘입는) 바가 이와 같음을 아는 것이라. ‘旣(이미 기)’는 ‘희’로 읽음이니, 희름은 초식(稍食, 祿俸)이라. ‘칭사’는『주례』「고인직」에 가로되 ‘그 궁노를 상고하여 써 그 食(봉록)을 올리고 내리는 것’이 이것이라. 가는 이는 부절(符節, 신임장)을 주어서 써 보내고, 오는 이는 위자(생활필수품)를 풍부히 해서 써 맞이함이라. 朝는 제후가 천자께 알현하는 것을 이름이오, 聘은 제후가 대부로 하여금 천자국에 와서 공물을 받치는 것을 이름이라. 「왕제」에 보면 해마다(比年) 한번 작은 빙례를 올리고, 3년에 한번 큰 빙례를 올리고, 5년에 한번 조회함이라. 후왕박래는 (송별)잔치 베푸는 것은 후하게 하고 공물을 들이는 것은 박하게 함을 말함이라.
餼 : 녹봉 희 稍 : 나아갈 초, 점점 초 弩 : 쇠뇌 노 委 : 쌓을 위 積 : 쌓을 적, 저축할 자
凡爲天下國家ㅣ 有九經하니 凡以行之者는 一也ㅣ니라
무릇 천하국가를 함에(다스림에) 아홉 가지 법이 있으니 무릇 써 행하는 것은 한 가지이니라.
一者는 誠也ㅣ니 一有不誠이면 則是九經이 皆爲虛文矣라 此는 九經之實也ㅣ라
한 가지는 정성이니 하나라도 성실하지 않으면 이 구경이라는 것은 다 헛된 글이 되느니라. 이는 구경의 실제이니라.
凡事ㅣ 豫則立하고 不豫則廢하나니 言前定則不跲하고 事前定則不困하고 行前定則不疚하고 道前定則不窮이니라
무릇(모든) 일이 미리하면 성립되고 미리하지 아니하면 무너지나니, 말을 앞에(미리) 예정하면 미끄러지지 아니하고, 일을 앞에 예정하면 곤하지 아니하고, 행하는데 앞에 예정하면 병들지 아니하고, 길을 가는데 앞을 예정하면 궁하지 않느니라.
跲 : 미끄러질 겁, 넘어질 겁 疚 : 오랜 병 구
凡事는 指達道達德九經之屬이라 豫는 素定也ㅣ라 跲은 躓也ㅣ라 疚는 病也ㅣ라 此는 承上文하야 言凡事ㅣ 皆欲先立乎誠이니 如下文所推ㅣ 是也ㅣ라
무릇 일은 달도와 달덕과 구경에 속한 것을 가르침이라. 예는 본디 정함이라. 겁은 미끄러짐이라. 구는 병듦이라. 이것은 윗글을 이어서 말하기를 모든 일이 다 먼저 성실함에 세우고자 하는 것이니 아랫글에 미룬 바와 같은 것이 이것이라.
躓 : 미끄러질 지, 넘어질 지
在下位하야 不獲乎上이면 民不可得而治矣리라 獲乎上이 有道하니 不信乎朋友ㅣ면 不獲乎上矣리라 信乎朋友ㅣ有道하니 不順乎親이면 不信乎朋友矣리라 順乎親이 有道하니 反諸身不誠이면 不順乎親矣리라 誠身이 有道하니 不明乎善이면 不誠乎身矣리라
아래 지위에 있으면서 윗사람에 (신임을) 얻지 못하면 백성을 가히 얻어 다스리지 못하리라. 윗사람에게 얻음이 도가 있으니 벗에게 믿음이 없으면 윗사람에게 얻지 못하리라. 벗에게 믿음을 얻음에 도가 있으니 어버이에게 순하지 못하면 벗에게 믿음을 받지 못하리라. 어버이에게 순함이 도가 있으니 저 몸을 돌이켜 성실하지 못하면 어버이에게 순하지 못하리라. 몸을 성실히 함에 도가 있으니 선에 밝지 못하면 몸에(자신에게) 성실하지 못하리라.
此는 又以在下位者로 抽言素定之意라 反諸身不誠은 謂反求諸身하야 而所存所發이 未能眞實而無妄也ㅣ라 不明乎善은 謂不能察於人心天命之本然하야 而眞知至善之所在也ㅣ라
이것은 또 아래 지위에 있는 자로써 본디 정해야 하는 뜻을 미루어 말함이라. 저 몸에 돌아가 성실하지 못하다는 것은 저 몸에 반성하여 구해 존하는 바와 발하는 바가 능히 진실해서 망령됨이 없지 못함을 이르니라. 선에 밝지 못하다는 것은 능히 인심과 천명의 본연을 살펴 참으로 지극히 선한 것이 있는 바를 알지 못함을 이르니라.
誠者는 天之道也ㅣ오 誠之者는 人之道也ㅣ니 誠者는 不勉而中하며 不思而得하야 從容中道하나니 聖人也ㅣ오 誠之者는 擇善而固執之者也ㅣ니라
誠이란 것은 하늘의 도요, 誠을 하는 것은 사람의 도이니, 성실이란 것은 힘쓰지 않아도 맞으며 생각하지 않아도 얻어져 종용히 도에 맞으니 성인이요, 성실하게 하는 것은 선을 가려서 그것을 고집하는 것이니라.
[본문 해설]
정성이라는 것은 그 자체가 하늘의 도인 體가 되는 것이고, 정성스럽게 행하는 것은 사람의 도로 用에 해당한다. 다시 말해 정성이라는 것은 굳이 노력해 힘쓰지 않아도 그 일에 맞으며 생각하지 않아도 저절로 얻어지는 것이다.『주역』19번째 지택림(地澤臨)괘 九二爻 象傳에 “象曰 咸臨吉无不利는 未順命也ㅣ라(상전에 이르길 ‘함림길무불리’는 명에 순하려 함이 아님이라)” 하여 命을 순하려 하지 않아도 저절로 命이 순해진다 하였고, 25번째 망령됨이 없다는 천뢰무망(天雷无妄)괘 六二爻에서는 “六二는 不耕하야 穫하며 不菑하야 畬ㅣ니 則利有攸往하니라(육이는 밭 갈지 아니해서 거두며 묵히지 않았던 탈밭이 옥토가 되니 곧 나아가는 바를 둠이 이로우니라 / 穫 : 거둘 확, 菑 : 일년 묵은 탈밭 치, 畬 : 삼년 묵은 탈밭 여)” 하였다. 또한 繫辭上傳 제10장에는 “唯神也 故로 不疾而速하며 不行而至하나니(오직 신인 까닭에 빨리 아니해도 빠르며 행하지 아니해도 이르나니)”라 하였다. 바로 이것이 不勉而中하고 不思而得이고, 소리없이 도에 맞으니 生而知之하고 安而行之하는 성인인 것이며, 하늘의 도이다. 그리하여 乾卦 文言傳 마지막 6절에서는 “知進退存亡而不失其正者ㅣ 其唯聖人乎뎌(나아가고 물러남과 존하고 망함을 알아서 그 바름을 잃지 않는 자, 그 오직 성인이실 뿐인저!)라고 하였다.
그리고, 선을 선택할 줄 알고 그것을 고집해 나갈 줄 아는 것은 어진 사람의 일이며 군자의 일이다. 그것이 성실해지는 것, 정성을 행하는 것이다. 정성을 행하려 하니 택선할 줄 알아야 하고, 고집해서 잘 붙잡고 나가야 한다. 위에서는 성인만을 언급했지만 이것은 學而知之하고 利而行之하는 현인에 해당하는 것이고 바로 사람의 도이다.
此는 承上文誠身而言이라 誠者는 眞實無妄之謂니 天理之本然也ㅣ오 誠之者는 未能眞實無妄而欲其眞實無妄之謂니 人事之當然也ㅣ라 聖人之德은 渾然天理하야 眞實無妄하야 不待思勉而從容中道하니 則亦天之道也ㅣ오 未至於聖이면 則不能無人欲之私하야 而其爲德이 不能皆實이라 故로 未能不思而得하야 則必擇善然後에 可以明善이오 未能不勉而中하야 則必固執而後에 可以誠身이니 此則所謂人之道也ㅣ라 不思而得은 生知也ㅣ오 不勉而中은 安行也ㅣ오 擇善은 學知以下之事오 固執은 利行以下之事也ㅣ니라
이것은 윗글의 성신을 이어서 말함이라. 정성이라는 것은 진실해서 망령됨이 없음을 말함이니 천리의 본연이오, 성실하게 한다는 것은 능히 진실무망하지 못하여 그 진실무망하고자 함을 이름이니 인사의 당연함이라. 성인의 덕은 천리에 혼연해서 진실무망하여 사면(힘써야 할 것을 생각함)을 기다리지 않고 종용히 도에 맞으니 곧 또한 하늘의 도요, 성인에 이르지 못하면 능히 인욕의 사사로움이 없지 못하여 그 덕됨이 능히 다 진실하지 못함이라. 그러므로 능히 생각하지 않아도 얻을 수 없으면 반드시 선을 택한 후에야 가히 선을 밝게 할 수 있음이오, 능히 힘쓰지 않아도 맞지 못하면 반드시 고집한 후에 가히 써 몸을 성실히 하니 이것은 곧 사람의 도라고 하는 바이라. 생각지 않고도 얻음은 태어나면서 아는 것이오, 힘쓰지 않아도 맞으면 편안히 행하는 것이오. 택선은 배워서 아는 것 이하의 일이요 고집은 이롭게 여겨 행하는 것 이하의 일이니라.
博學之하며 審問之하며 愼思之하며 明辨之하며 篤行之니라
널리 배우며 살펴서 물으며 삼가서 생각하며 밝게 분별하며 돈독히 행하느니라
審 : 살필 심
[본문 해설]
이 글은 학문하는 중용지도를 설명하고 있다. 학문은 널리 배워야 하며, 묻는 것은 쓸데없이 되나 안되나 묻는 것이 아니라 요점만 살펴서 물어야 하며, 생각은 삼가서 해야 하며, 분별은 밝게 해야 하며, 행실은 후중하고 돈독히 해야 한다. 『주역』 건괘 문언전 제6절에서 “君子ㅣ 學以聚之하고 問以辨之하며 寬以居之하고 仁以行之하나니 易曰 見龍在田利見大人이라 하니 君德也ㅣ라(군자가 배워서 모으고 물어서 분별하며 너그러움으로써 거처하고 어짊으로써 행하나니 역에 이르길 ‘현룡재전이견대인’이라 하니 인군의 덕이라)”라 하였다. 여기에서 ‘學問’이라는 말이 나왔는데 學聚問辨은 내적인 체가 되고 寬居仁行는 외적인 용에 해당한다.
此는 誠之之目也ㅣ라 學問思辨은 所以擇善而爲知니 學而知也ㅣ오 篤行은 所以固執而爲仁이니 利而行也ㅣ라 程子ㅣ曰 五者에 廢其一이라도 非學也ㅣ니라
이것은 정성을 들이는 조목이니라. 학문사변은 써한 바 선을 가려서 知로 삼음이니, 배워서 아는 것이오. 독행은 써한 바 고집해서 仁으로 삼음이니 이롭게 여겨 행함이라. 정자 말씀하시길 “이 다섯 가지에 하나라도 폐하면 배움이 아니니라.”
有弗學이언정 學之ㄴ댄 不能을 弗措也하며 有弗問이언정 問之ㄴ댄 弗知를 弗措也하며 有弗思ㅣ언정 思之댄 弗得을 弗措也하며 有不辨이언정 辨之s댄 弗明을 弗措也하며 有弗行이언정 行之ㄴ댄 弗篤을 弗措也하야 人一能之어든 己百之하며 人十能之어든 己千之니라
배우지 않음이 있을지언정 배울진댄 능치 않음을 두지 말며, 묻지 않음이 있을지언정 물을진댄 알지 못함을 두지 말며, 생각지 않을지언정 생각을 할진댄 얻지 못함을 두지 말며, 분별하지 않음이 있을지언정 분별할진댄 밝지 못함을 두지 말며, 행하지 않음이 있을지언정 행할진댄 돈독하지 않음을 두지 말아서, 다른 사람이 한 번에 능하거든 나는 백 번에 능하며, 다른 사람이 열 번에 능하거든 나는 천 번에 능할지니라.
[본문 해설]
윗 글은 천하의 공통된 덕(達德)인 ‘知仁勇’ 가운데서 ‘勇’을 말하고 있다. 즉 남이 한번에 능하면 나는 백 번이라도 해서 능하고, 남이 열 번에 능하면 나는 천 번이라도 해서 능하게 한다는 ‘困而知之’와 ‘勉强行之’를 말하고 있다.
君子之學은 不爲則已어니와 爲則必要其誠이라 故로 常百倍其功하나니 此는 困而知勉而行者也ㅣ니 勇之事也ㅣ라
군자의 학문은 하지 않으면 그만이어니와, 하면 반드시 그 이룸을 요하느니라. 그러므로 항상 그 공을 백배로 하나니 이는 곤해서 알고 힘써서 행함이니 용감해서 하는 일이라.
果能此道矣면 雖愚ㅣ나 必明하며 雖柔ㅣ나 必强이니라
과연 이 도를 능히 하면 비록 어리석으나 반드시 밝으며 비록 유약하나 반드시 강해지느니라.
明者는 擇善之功이오 强者는 固執之效라 呂氏 曰君子所以學者는 爲能變化氣質而已니 德勝氣質則愚者ㅣ 可進於明이오 柔者ㅣ 可進於强이어니와 不能勝之則雖有志於學이라도 亦愚不能明하며 柔不能立而已矣라 蓋均善而無惡者는 性也ㅣ니 人所同也오 昏明强弱之稟이 不齊者는 才也ㅣ니 人所異也ㅣ라 誠之者는 所以反其同而變其異也ㅣ라 夫以不美之質로 求變而美라도 非百倍其功이면 不足以致之어늘 今以鹵莾滅裂之學으로 或作或輟하야 以變其不美之質이라가 及不能變하야는 則曰天質ㅣ 不美하야 非學所能變이라 하니 是는 果於自棄니 其爲不仁이 甚矣라.
明은 선을 가리는 공이오, 强은 고집의 효력이라. 여씨 말하기를 군자가 써 배우려는 바는 능히 기질을 변화할 뿐이니 덕이 기질을 이기면 어리석은 자가 가히 밝은데 나아가고 유약한 자가 가히 강한데 나아가거니와, 능히 이기지 못하면 비록 뜻을 배움에 둔다 하더라도 또한 어리석은 이가 능히 밝지 못하며 유약한 이가 능히 서지 못할 뿐이니라. 대개 선을 고르게 하고 악함이 없는 자는 (하늘이 그대로 준) 성품이니 사람마다 같은 바요, 어둡고 밝고 강하고 유약한 품성이 가지런하지 못한 것은 재질이니 사람마다 다른 바라. 성실히 하는 것은 그 같은 것을 돌이키고 그 다름을 변화시키는 것이라. 대저 아름답지 못한 재질로서 변함을 구해서 아름답게 하더라도 그 공을 백배로 하지 않는다면 족히 써 이루지 못하거늘 이제 노모멸렬(아무렇게나 대충하는 것)한 배움으로써 혹 짓기도 하고 혹 그만두기도 하여 그 불미한 재질을 변하려고 하다가 능히 변치 못함에 미쳐서는 곧 ‘타고난 하늘의 기질이 불미하여 배워서 능히 변할 바가 아니라’ 하니, 이는 스스로 포기함에 과감하니 그 어질지 못하게 됨이 심하니라.
鹵 : 황폐할 로 莾 : 거칠 모(망), 莽과 같이 쓰임 輟 : 그칠 철
[앞주 해설]
『대학』에서도 “지극한 선에 그쳐야 한다(止於至善)”고 했다. 이러한 선을 가리는 공은 밝음이며, 그 가린 선을 굳게 잡고 가는 효력은 강함이다. 따라서 明은 體가 되고, 强은 用이 되므로 ‘擇善之功’은 體가 되고 ‘固執之效’는 用이 된다. ‘明者 擇善之功’은 내적으로 알기 위한 모든 방법으로 體가 되고, ‘强者 固執之效’는 굳게 지켜 외적으로 나아가 성공하기 위한 효력이니 用인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으로부터 부여받는 성품이 선한데 기질이 달라 악한 사람도 있고 유약한 사람도 있다. 군자가 학문을 한다고 하는 것은 그 서로가 다른 기질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그리하여 덕이 그 기질을 이기면 어리석은 자는 밝아지고 유약한 사람은 강해질 수가 있다. 그런데 학문에 뜻을 두고도 사적인 기질을 확고히 이기지 못하면 어리석은 자는 밝아지지 못하고 유약한 자가 강해질 수가 없다는 것이 여씨의 설명이다.
右는 第二十章이라
此는 引孔子之言하야 以繼大舜文武周公之緖하야 明其所傳之一致하니 擧而措之라도 亦猶是爾라 蓋包費隱兼小大하야 以終十二章之意라 章內에 語誠이 始詳하니 而所謂誠者는 實此篇之樞紐ㅣ라 又按孔子家語에 亦載此章而其文이 尤詳하야 成功一也之下에 有公曰子之言이 美矣至矣로대 寡人이 實固不足以成之也ㅣ라 故로 其下에 復以子曰로 起答辭어늘 今無此問辭而猶有子曰二字하니 蓋子思ㅣ 刪其繁文하야 以附于篇而所刪이 有不盡者ㅣ니 今當爲衍文也ㅣ라 博學之以下는 家語에 無之하니 意彼有闕文이어나 抑此或子思所補也歟인저
이는 공자의 말씀을 이끌어서 대순과 문왕 무왕 주공의 실마리를 이어서 그 전한 바가 일치하니 들어다가 두더라도 또한 이와 같을 뿐임을 밝힌 것이라. 대개 비은을 포함하고 작고 큰 것을 겸해서 써 12장의 뜻을 마친 것이라. 이 문장 안에 정성을 말함이 비로소 자세하니, 이른바 정성이라는 것은 실지로 이 책의 추뉴(돌쩌귀와 단추, 지도리와 매듭)이니라. 또한 『공자가어』를 상고하건데 또한 이 문장이 실려 있는데 그 글이 더욱 자세하여 성공은 하나라고 한 아래에 “애공이 말하길 ‘선생의 말씀이 아름답고 지극하되 과인이 실은 족히 써 이루지 못함이라.”라는 내용이 있음이라. 그러므로 그 아래에 다시 ’子曰‘로써 답한 말씀을 일으킨 것인데 지금은 물은 말이 없는데도 오히려 ‘자왈’이란 두 글자가 있으니, 대개 자사가 그 번거로운 글을 깎아서 써 편에 붙이면서 깎은 바가 다하지 못함이 있으니 이제 마땅히 연문이 됨이라. ‘博學之’ 이하는 『가어』에 없으니 아마도 저 (『예기』의 가어편에) 빠진 글이거나 아니 이 혹 자사가 보충하신 듯함이라.
措 : 둘 조 爾 : 뿐 이 樞 : 지도리 추 紐 : 맬 뉴 按 : 살필 안 闕 : 빠질 궐 抑 : 아니 억, 누를 억 歟 : 누를 여
중용 제21장, 제22장 해설
自誠明을 謂之性이오 自明誠을 謂之敎ㅣ니 誠則明矣오 明則誠矣니라
정성으로 말미암아 밝아지는 것을 ‘性’이라 이르고, 밝음으로 말미암아 정성스러워지는 것을 敎라 이르니, 정성스러우면 밝아지고 밝으면 정성스러워지느니라.
[본문 해설]
『중용』은 이치가 깊은 글이니 생각을 많이 해야 뜻을 통할 수 있는 글이다. 성실함으로 말미암아 자연스럽게 훤히 밝아지는 것은 하늘로부터 그대로 받은 진실무망의 성품이고, 세상에 나와 배워 알면서 정성스럽게 하는 것은 하늘이 부여해준 본바탕으로 돌아가려는 노력으로 이를 일러 교육이라 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정성과 밝음은 한 가지이기에 굳이 어떤 것이 더 먼저라고 구분할 문제는 아니다. 정성스러우면 밝아지고 밝으면 자연 정성스러워지기에 ‘生而知之’거나 ‘學而知之’거나 ‘困而知之’거나를 막론하고 그 아는 데 이르러서 성공하는 것은 같다는 점이다.
自는 由也ㅣ라 德無不實而明無不照者는 聖人之德이 所性而有者也ㅣ니 天道也ㅣ오 先明乎善而後에 能實其善者는 賢人之學이 由敎而入者也ㅣ니 人道也ㅣ라 誠則無不明矣오 明則可以至於誠矣니라.
自는 말미암음이라. 덕은 실하지 않음이 없고 밝음은 비추지 않음이 없는 것은 성인의 덕이 성품으로 해서 둔 것이니 하늘의 도요, 먼저 선에 밝은 뒤에 능히 그 선을 실지로 행하는 하는 자는 현인의 배움이 가르침으로 말미암아 들어가는 것이니 사람의 도라. 성실하면 밝지 않음이 없고 밝아지면 가히 성실함에 이르느니라.
右는 第二十一章이라
子思ㅣ 承上章夫子天道人道之意而立言也ㅣ라 自此以下十二章은 皆子思之言이니 以反覆推明此章之意니라
자사가 윗글 부자(공자)의 천도 ․ 인도의 뜻을 이어서 말을 세움이라(예전에는 세로로 글을 썼으므로 세운다는 표현을 많이 쓴다). 이로부터 써 아래로(제22장부터) 열두 장은 모두 자사의 말씀으로 이 장의 뜻을 반복하여 미루어 밝힌 것이라.
唯天下至誠이아 爲能盡其性이니 能盡其性則能盡人之性이오 能盡人之性則能盡物之性이오 能盡物之性則可以贊天地之化育이오 可以贊天地之化育則可以與天地參矣니라
오직 천하의 지극한 정성이어야 능히 그 성품을 다할지니, 능히 그 성품을 다하면 능히 사람의 성품을 다할 것이오, 능히 사람의 성품을 다하면 능히 물건의 성질을 다할 것이오, 능히 물건의 성질을 다하면 가히 써 천지의 화육을 도울 것이오, 가히 써 천지의 화육을 도우면 가히 써 천지와 더불어 셋이 되느니라.
贊 : 도울 찬 參 : 석 삼, 참여할 참
[본문 해설]
지극한 정성을 가진 성인의 덕을 말하고 있다. 성인에 대해 『주역』 건괘 문언전 마지막 제6절에서 “나아가고 물러남과 존하고 망함을 알아서 그 바름을 잃지 않는 자, 그 오직 성인이실 뿐인저!(知進退存亡而不失其正者ㅣ 其唯聖人乎인저)”라 하였으며, 이보다 앞서 언급한 ‘大人’의 경지이다.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夫大人者는 與天地合其德하며 與日月合其明하며 與四時合其序하며 與鬼神合其吉凶하야 先天而天弗違하며 後天而奉天時하나니 天且弗違온 而況於人乎ㅣ며 況於鬼神乎여
무릇 대인은 천지와 더불어 그 덕을 합하며, 일월과 더불어 그 밝음을 합하며, 사시와 더불어 그 차례를 합하며, 귀신과 더불어 그 길흉을 합하여, 하늘보다 먼저 해도 하늘이 어기지 아니하며, 하늘보다 뒤에 해도 하늘의 때를 받드나니, 하늘도 또한 어기지 아니하는데, 하물며 사람이며 하물며 귀신이랴!
성인의 덕이 이러하기에 천하의 이치를 얻음에 자리가 하늘과 땅의 그 가운데서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天下之理ㅣ 得而成位乎其中矣니라 - 『주역』 계사상전 제1장). 또한 ‘석 三’ ‘임금 王’, ‘사람 人’, 중천건괘의 모양 등은 모두가 『천부경』에서 말하는 ‘人中天地一’로서 지극한 정성을 가진 사람 곧 대인이나 성인이라면 가히 천지와 더불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성인의 대표적인 예가 바로 복희씨(伏犧氏)이다. 『주역』계사하전 제2장을 보면, "古者包犧氏之王天下也애 仰則觀象於天하고 俯則觀法於地하며 觀鳥獸之文과 與地之宜하며 近取諸身하고 遠取諸物하야 於是에 始作八卦하야 以通神明之德하야 以類萬物之情하니(옛적 포희씨가 천하에 왕이 되었을 때에 우러러서는 하늘의 형상을 보고 구부려서는 땅의 법을 보며 새와 짐승의 무늬와 땅의 마땅함을 보며 가까이로는 저 몸에서 취하고 멀리로는 저 물건에서 취하여 이에 비로소 팔괘를 지음으로써 신명의 덕을 통하여 만물의 실정을 같이하니)”에서 성인의 지극한 공덕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설괘전 제1장에서는 “昔者聖人之作易也애 幽贊於神明而生蓍하고 參天兩地而倚數하고 觀變於陰陽而立卦하고 發揮於剛柔而生爻하니 和順於道德而理於義하며 窮理盡性하야 以至於命하니라(옛적 성인이 역을 지을 때 그윽히 보이지 않는 데서 신명을 도와 시초를 내고 하늘은 셋으로 땅은 둘로 해서 수를 의지하고 음양의 변함을 보아서 괘를 세우고, 강유를 발휘해서 효를 내니, 도덕에 화순하고 의리를 다스리며, 이치를 궁구하고 성품을 다함으로써 명에 이르느니라)” 하였다.
위 본문의 마지막 문장인 ‘與天地參矣’에서 ‘參’을 ‘석 삼’으로 읽고 ‘천지와 더불어 셋을 이루니라’고 하거나, ‘참여할 참’으로 읽고 ‘천지와 더불어 참여하게 되니라’고 해석해도 두루 뜻이 통한다. 천지인 三才의 의미를 나타내는 글이다.
天下至誠은 謂聖人之德之實이니 天下에 莫能加也ㅣ라 盡其性者는 德無不實이라 故로 無人欲之私而天命之在我者를 察之由之하야 巨細精粗가 無毫髮之不盡也ㅣ라 人物之性은 亦我之性이로되 但以所賦形氣ㅣ 不同으로 而有異耳라 能盡之者는 謂知之無不明而處之無不當也ㅣ라 贊은 猶助也ㅣ라 與天地參은 謂與天地로 並立而爲三也ㅣ라 此는 自誠而明者之事也ㅣ라
천하지성은 성인의 덕의 실함이니 천하가 능히 더할 것이 없음을 이르느니라. 그 성품을 다하는 자는 덕이 실하지 않음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사람 욕심의 사사로움이 없고 천명이 내게 있는 것을 살피고 말미암아서 크고 가늘고 정하고 거칠음이 터럭끝만큼이라도 다하지 않음이 없느니라. 사람이나 물건의 성품은 또한 나의 성품이로되 다만 (하늘이) 부여해준 형체와 기질이 같지 않음으로 다름이 있느니라. 능히 (성품을) 다하는 자는 아는 것이 밝지 않음이 없고 처함이 합당하지 않음이 없느니라. 찬은 ‘도울 조’와 같으니라. 천지와 더불어 셋이라는 것은 천지와 더불어 나란히 서서 셋이 됨을 이르니라. 이는 정성으로 말미암아 밝아지는 자의 일이라.
右는 第二十二章이라
言天道也ㅣ라
천도를 말함이라.
중용 제23장, 제24장 해설
其次는 致曲 曲能有誠이니 誠則形하고 形則著하고 著則明하고 明則動하고 動則變하고 變則化ㅣ니 唯天下至誠이아 爲能化ㅣ니라
그 다음은 곡진함으로 이룸이니, 곡진하면 능히 성실함이 있으니, 성실하면 형체가 나오고, 형체가 나오면 나타나고, 나타나면 밝아지고, 밝아지면 움직이고, 움직이면 변하고, 변하면 화하니, 오직 천하의 지극한 정성이어야 능히 화하느니라.
[본문 해설]
이 글은 주역 계사하전 제2장의 “역이 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하고 통하면 오래하니라(易이 窮則變하고 變則通하고 通則久ㅣ라)”라는 이치에서 연유한 글임을 알 수 있다. 윗 글은 천도에 해당하는 ‘自誠明’ ‘天下至誠’이 첫째가 되는데, 지성으로 다할 수 없으면 그 다음에는 곡진함으로 이뤄야 한다는 것이다. 그저 열심히 노력하고 차근차근 다져나가는 곡진함이 있으면 능히 성실해져 밖으로 드러난다. 『대학』성의장에 “誠於中이면 形於外라(속마음에 성실하면 밖으로 드러나니라)”는 귀절과 같은 의미이다. 또한 지극한 정성이면 하늘을 감동시킨다(至誠感天)는 말처럼 오직 천하의 지극한 정성이어야 능히 변화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주역 풍택중부(風澤中孚)괘의 어미학과 새끼 학의 믿음이 바로 이를 말한다.
其次는 通大賢以下凡誠有未至者而言也ㅣ라 致는 推致也ㅣ오 曲은 一偏也ㅣ라 形者는 積中而發外오 著則又加顯矣오 明則又有光輝發越之盛也ㅣ라 動者는 誠能動物이오 變者는 物從而變이오 化則有不知其所以然者라 蓋人之性이 無不同이나 而氣則有異라 故로 惟聖人이아 能擧其性之全體而盡之하고 其次則必自其善端發見之偏而悉推致之하야 以各造其極也ㅣ라 曲無不致則德無不實하야 而形著動變之功이 自不能已이니 積而至於能化하면 則其至誠之妙ㅣ 亦不異於聖人矣리라
‘그 다음’이란 것은 대현 이하로(써 아래로) 통틀어 무릇 성실하고도 지극하지 못함이 있는 자를 말함이라. ‘치’는 미루어 이룸이오 ‘곡’은 한 편이라. ‘형’이라는 것은 중에 쌓아서 밖으로 나타남이오, ‘저’는 곧 또한 더욱 나타남이라, 밝으면 또한 광휘발월(빛남이 드러나 넘침)의 성함이 있음이라. 동하는 것은 성실함이 능히 물건을 움직임이오, 변한다는 것은 물건 따라 변하는 것이오, 화하면 그 소이연(연유)을 알지 못함이 있느니라. 대개 사람의 성품은 같지 않음이 없으나 기운이 곧 다름이 있느니라. 그러므로 오직 성인이라야 그 성품을 온전히 들어서 다하고, 그 다음은 곧 반드시 그 착한 단서가 발현되는 한쪽에서부터 모두 미루어 이루어 각각 그 극진함에 나아가느니라. 곡진함으로 이루지 않음이 없으면 덕이 실하지 않음이 없어 형체로 나타나 움직여 변하는 공이 스스로 능히 끝나지 못할 것이니, 쌓여서 능히 화하는 데까지 이르면 그 지극한 정성의 신묘함이 또한 성인과 다르지 않으리라.
右는 第二十三章이라
言人道也ㅣ라
사람의 도를 말함이라.
至誠之道는 可以前知니 國家將興에 必有禎祥하며 國家將亡에 必有妖孽하야 見乎蓍龜하며 動乎四體라 禍福將至에 善을 必先知之하며 不善을 必先知之니 故로 至誠은 如神이니라
지극한 정성의 도는 가히 써 앞일을 알 수 있으니, 국가가 장차 흥함에 반드시 상서로움이 있으며, 국가가 장차 망함에 반드시 재앙이 있어서 시초와 거북에 나타나며 사지(四肢)에 움직이느니라. 화와 복이 장차 이름에 선함을 반드시 먼저 알려 선하지 못함을 반드시 먼저 아느니, 그러므로 지극한 정성은 신과 같으니라.
禎祥者는 福之兆오 妖孼者는 禍之萌이라 蓍는 所以筮오 龜는 所以卜이라 四體는 謂動作威儀之間이니 如執玉高卑에 其容俯仰之類라 凡此는 蓋理之先見者也ㅣ라 然이나 唯誠之至極而無一毫私僞ㅣ 留於心目之間者라야 乃能有以察其幾焉이라 神은 謂鬼神이라.
상서롭다는 것은 복의 징조요, 요얼이라는 것은 화의 싹이라. 시초는 서점(댓가지점, 주역점)이오, 거북은 거북점이라. 사체는 동작과 위의의 사이를 이르니, 옥을 잡는데 높고 낮게 함에 그 용모가 구부리고 우러르고 하는 종류와 같음이라. 대저 이것은 이치가 먼저 나타나는 것이라. 그러나 오직 정성이 지극하여 한 터럭 사사롭고 거짓됨이 마음과 눈 속에 머무름이 없는 자라야 이에 능히 그 기미를 살핌이 있느니라. 신은 귀신을 이름이라.
[앞주 해설]
시초라는 것은 주역에서 말하는 댓가지 50개로 점을 치는 것을 말하고 거북점은 거북의 등껍질을 불에 달궈 갈라지는 모습으로 점치는 것을 말한다. 또한 사람은 늘 움직이는 동작을 하게 마련인데 그 움직임 속에서 그 사람의 모습을 알 수 있다. ‘執玉高卑에 其容俯仰之類’는 동작의 예를 든 것으로 『춘추좌씨전』定公 15년조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주(邾)나라 은공이 노(魯)나라로 조회를 왔는데 자공(공자 제자인 자사)이 이를 살폈다. 주나라 군주가 (예물인) 옥을 잡아 올림에 너무 높게 하여 얼굴이 너무 들렸고, 공(노나라 정공)은 옥을 받음에 너무 낮게 하여 얼굴이 너무 숙여졌다. 자공이 이것을 보고는 ‘예의를 차리는 거동을 보아서는 두 군주는 모두 곧 돌아가실 것이다. 예의는 사람이 죽고 살고, 나라가 보존되고 망하는 기본인 것이다. 손발을 좌우로 내고, 몸을 돌리며, 앞으로 나가고 뒤로 물러서고, 위를 쳐다보고 아래를 굽어보는 것으로 곧 죽을 것인가 오래 살 것인가를 알아보고, 조정에서의 거동, 제사지내는 태도, 服喪하는 자세, 軍事에서의 행동으로 나라를 지킬 것인가 망칠 것인가를 알아보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 정월달에 서로 우호를 위하여 만나, 다 법도를 지키지 못했으니 마음은 이미 잃고 있는 것이다. 좋은 일에 근본을 지키지 못했는데 어찌 오래 살 수가 있으랴. 물건을 높이 들어 온몸이 위로 올라가는 것은 교만함을 나타냄이고, 몸을 낮추어 아래로 굽힘은 기운이 빠졌음을 나타냄이다. 교만 부림은 난리를 일으키기 쉽고, 기운이 빠졌음은 병 들기 쉬운 것이다. 군(정공)이 주인이 되니, 먼저 돌아가실 것이다(十五年春에 邾隱公來朝라 子貢觀焉에 邾子執玉高하여 其容仰하고 公受玉卑하여 其用俯라. 子貢曰 以禮觀之면 二君子皆有死亡焉하리라 夫禮死生存亡之體也라 將左右周旋進退俯仰於是乎取之하고 朝祀喪戎於是乎觀之라. 今正月相朝하여 而皆不度하니 心已亡矣라 嘉事不體어늘 何以能久아 高仰驕也요 卑俯替也라 驕近亂하고 替近疾이라 君爲主에 其先亡乎인저)”는 내용인데, 그해 정공이 죽고, 애공 7년에 노나라가 주나라를 치니, 두 임금이 모두 죽게 되어 자공이 예견한 것이 딱 맞게 되었다는 말이다. 몸가짐, 곧 四體의 모습을 보고 앞날을 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조짐을 살필 수 있는 것은 오직 정성이 지극하고 마음과 눈 사이에 한 터럭의 사사로움이나 거짓됨이 없이 깨끗하여야 가능하다는 말이다.
右는 第二十四章이라
言天道也ㅣ라
천도를 말함이라.
중용 제25장 해설
誠者는 自成也ㅣ오 而道는 自道也ㅣ니라
성이라는 것은 스스로 이룸(無爲)이오, 도라는 것은 스스로 도함이라.
[본문 해설]
誠이라는 글자는 ‘말씀 言’에 ‘이룰 成’으로 이루어져 있다. 言을 빼놓고 보면 成만을 본다면, 하늘의 밝은 기운(丁)을 받아 땅위에서 무성하게(戊) 그대로 이루어진다(成)는 뜻이다. 여기서 誠은 『성경』의 창세기에서 하느님이 ‘빛이 있으라’ 말씀하시니 빛이 생겼다는 의미와 일맥상통됨을 알 수 있다.
言誠者는 物之所以自成이오 而道者는 人之所當自行也ㅣ라 誠은 以心으로 言이니 本也ㅣ오 道는 以理로 言이니 用也ㅣ라
성이라는 것은 물건이 써 스스로 이루는 바요, 도라는 것은 사람이 마땅히 스스로 가야 할 바이니라. 정성은 마음으로써 말하는 것이니 근본이요, 도는 이치로써 말하는 것이니 용이라.
誠者는 物之終始니 不誠이면 無物이니 是故로 君子는 誠之爲貴니라
성이라는 것은 물건의 마침과 시작이니 성실하지 않으면 물건이 없으니 이런 까닭으로 군자는 성실함을 귀하게 여기느니라
天下之物이 皆實理之所爲라 故로 必得是理然後에 有是物이니 所得之理ㅣ 旣盡이면 則是物이 亦盡而無有矣라 故로 人之心이 一有不實이면 則雖有所爲라도 亦如無有일새 而君子ㅣ 必以誠爲貴也ㅣ라 蓋人之心이 能無不實이라야 乃爲有以自成이요 而道之在我ㅣ 亦無不行矣리라
천하의 물건이 모두 실질적인 이치가 하는 바이라. 그러므로 반드시 이 이치를 얻은 연후에 이 물건이 있는 것이니 얻은 바의 이치가 이미 다하면 이 물건이 또한 다해서 있음이 없어지느니라. 그러므로 사람의 마음이 하나라도 실함이 없으면 비록 하는 바가 있더라도 또한 있는 것이 없는 것과 같아서 군자가 반드시 정성으로써 귀함을 삼느니라. 대개 사람의 마음이 능히 실하지 않음이 없어야 이에 써 스스로 이룸이 있고 도가 나에게 있는 것이 또한 행하지 않음이 없느니라.
誠者는 非自成己而已也ㅣ라 所以成物也ㅣ니 成己는 仁也ㅣ오 成物은 知也ㅣ니 性之德也ㅣ라 合內外之道也ㅣ니 故로 時措之宜也ㅣ니라
성실하다는 것은 스스로 자기를 이룰 뿐만이 아니라 물건(남)을 이루는 바이니, 자기를 이루는 것은 인이요, 물건(남)을 이루는 것은 지혜니 성품의 덕이니라. 내외의 도를 합함이니 그러므로 때로 둠이 마땅하니라.
[본문 해설]
誠에는 仁과 知가 다 들어있음을 말하고 있다. 자기 몸을 이루는 것은 어짊(仁)이고, 내적인 체가 되고, 물건을 이루는 것 즉 남을 이루어주는 것은 지혜(知)로, 외적인 용이 된다. 즉 性의 덕은 인과 지가 합한 도가 되므로 그때그때 맞게 행해야 하는 것이다. 곧 주역 중지곤(重地坤)괘 문언전의 “군자가 공경함으로써 안을 곧게 하고 의리로써 밖을 방정하게 하여 경과 의가 섬에 덕이 외롭지 아니하나니(君子ㅣ 敬以直內하고 義以方外하야 敬義立而德不孤하나니)”라고 한 말과 같다.
‘誠’은『대학』에서 말하는 ‘止於至善’에 해당하는 것으로, ‘때로 마땅함을 두는 것(時措之宜)’이『대학』의 내적인 明明德이라면『중용』에서는 成己에 해당하고, 『대학』의 외적인 親民은 『중용』에서는 成物에 해당한다.
誠은 雖所以成己나 然이나 旣有以自成이면 則自然及物이오 而道亦行於彼矣라 仁者는 體之存이오 知者는 用之發이니 是皆吾性之固有而無內外之殊하니 旣得於已면 則見於事者ㅣ 以時措之而皆得其宜也ㅣ라
성은 비록 자기를 이루는 바이나 이미 스스로 이룸이 있으면 곧 자연히 물건에 미칠 것이오, 도가 또한 저기에서 행해지느니라. 仁이라는 것은 體에 존함이요, 知라는 것은 用의 발함이니, 이것은 모두 내 성품의 고유함이오 안팎의 다름이 없나니, 이미 자기에게서 얻으면 일에 나타나는 것이 때에 따라 둠에 모두 그 마땅함을 얻게 될 것이라.
右는 제二十五章이라
言人道也ㅣ라
사람의 도를 말함이라.
중용 제26장 해설
故로 至誠은 無息이니
그러므로 지극한 정성은 쉼이 없으니
[본문 해설]
사람이 본래 타고난 성은 진실무망(眞實无妄)이나 形氣에 의해 가려져 있어 지극한 정성을 기울여야만 회복할 수 있다. 그 지극한 정성을 기울이려면 천도의 운행이 굳세어 자강불식하듯이 조금도 쉼이 없어야 한다. 주역 중천건(重天乾)괘 대상전에 “하늘의 운행이 굳건하니, 군자가 이로써 스스로 굳세어 쉬지 않느니라(天行이 健하니 君子ㅣ 以하야 自彊不息하나니라)”고 했다. 이와 같이 至誠은 조금도 쉼이 없는 것이다.
旣無虛假하니 自無間斷이라
이미 헛되고 거짓됨이 없으니 스스로 간단이 없느니라.
不息則久하고 久則徵하고
쉬지 않으면 오래하고 오래하면 증험하고
[본문 해설]
지극한 정성은 쉼이 없이 오래하고, 오래하면 증험이 나타나는데 오래할 수 있는 이유는 천지의 이치가 쉽기 때문이다. 『주역』 계사상전 제1장에서 천하의 이치가 모두 하늘과 땅의 이간(易簡)의 법칙에 들어 있으니 사람이 그것을 터득해 얻는다면 천지와 더불어 나란히 어깨할 수 있음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乾以易知오 坤以簡能이니 易則易知오 簡則易從이오 易知則有親이오 易從則有功이오 有親則可久ㅣ오 有功則可大ㅣ오 可久則賢人之德이오 可大則賢人之業이니 易簡而天下之理ㅣ 得矣니 天下之理ㅣ 得而成位乎其中矣니라(건은 쉬움으로써 주장하고, 곤은 간단함으로써 능하나니, 쉬우면 주장하기 쉽고, 간단하면 따르기 쉽고, 쉽게 주장하면 친함이 있고, 쉽게 따르면 공이 있고, 친함이 있으면 오래할 수 있고, 공이 있으면 클 수 있고, 오래갈 수 있으면 현인의 덕이요, 클 수 있으면 현인의 업이니, 쉽고 간단함에 천하의 이치를 얻으니, 천하의 이치를 얻음에 위를 그 가운데에 이루느니라)”
久는 常於中也ㅣ오 徵은 驗於外也ㅣ라
구는 가운데 떳떳함이오, 징은 바깥에 증험함이라.
[앞주 해설]
구는 내 마음 속에 늘 갖고 있고 지극한 정성 그대로 떳떳한 것을 말한다. 그 떳떳한 것이 오래가면 외적으로 모든 일을 하는데 하나하나가 증험으로 나타나는데 그것을 위 본문해설에서 볼 수 있듯이 『주역』에서는 현인의 덕으로 말하고 있다.
徵則悠遠하고 悠遠則博厚하고 博厚則高明이니라
증험하게 되면 아득하게 멀고, 아득하게 멀면 넓고 두텁고, 넓고 두터우면 높고 밝으니라.
[본문 해설]
자강불식하기에 오래하고 오래하다 보니 밖으로 증험이 나타난다. 그러면 시간적으로 유원(悠遠)해지고 공간적으로는 박후(博厚)해져 나중에는 시공을 가릴 것 없이 고명(高明)하게 된다. 천지의 고명함 그대로를 닮게 되는 것이다.
此는 皆以其驗於外者로 言之니 鄭氏所謂至誠之德이 著於四方者ㅣ 是也ㅣ라 存諸中者ㅣ 旣久則驗於外者ㅣ 益悠遠而無窮矣라 悠遠故로 其積也ㅣ 廣博而深厚하고 博厚故로 其發也ㅣ 高大而光明이라
이는 모두 그 밖에서 징험함으로써 말한 것이니 정씨가 이른바 지극한 정성의 덕이 사방에 나타난다는 것이 이것이라. 저 속에 존하는 자는 이미 오래가면 밖에 증험을 하는 것이 더욱 유원하여 끝이 없음이라. 유원하기 때문에 그 쌓인 것이 넓으며 심후하고, 박후하기 때문에 그 발함이 높고 크고 광명함이라.
博厚는 所以載物也이오 高明은 所以覆物也ㅣ오 悠久는 所以成物也ㅣ니라
박후는 물건을 싣는 바요 고명은 물건을 덮는 바요 유구는 물건을 이루는 바이니라.
[본문 해설]
천부지재(天覆地載)라는 말처럼 박후는 땅의 덕이고, 고명은 하늘의 덕이며, 유구는 천지의 조화로운 덕으로, 이 모두가 사람에게 있음을 비유한 것이다.
悠久는 卽悠遠이니 兼內外而言之也ㅣ라 本以悠遠으로 致高厚하고 而高厚ㅣ 又悠久也ㅣ니 此는 言聖人이 與天地同用이라
유구는 즉 유원이니 내외를 겸해서 말함이라. 본래 유원으로써 고후해지고 고후가 또 유구해지니 이는 성인이 천지와 더불어 한가지로 씀이라.
博厚는 配地하고 高明은 配天하고 悠久는 無疆이니라
박후는 땅과 배합되고, 고명은 하늘과 배합되고, 유구는 끝이 없느니라.
此는 言聖人이 與天地同體라
이는 성인이 천지와 더불어 체가 같음이라.
如此者는 不見而章하며 不動而變하며 無爲而成이니라
이와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아도 빛나며, 움직이지 않아도 변하며, 함이 없어도 이루어지느니라.
[본문 해설]
윗글의 ‘不見而章’은 땅 속의 물건이 보이지 않아도 밖으로 생명체가 나와서 빛나듯이, 땅에 배합하여 말한 것으로 『주역』중지곤(重地坤) 육삼효 상전에 “含章可貞이나 以時發也ㅣ오(빛남을 머금어 가히 바르게 하나 때로써 발함이라)는 데서 취한 글이다.
천지와 더불어 동체가 되면 천지와 더불어 그 덕을 합하고(與天地合其德), 일월과 더불어 그 밝음을 합하고(與日月合其明), 사시와 더불어 그 차례를 합하고(與四時合其序), 귀신과 더불어 그 길흉을 합하며(如鬼神合其吉凶), 빨리 아니 해도 빠르고(不疾而速), 행하지 아니해도 이르는(不行而至) 경지가 되고, 묵묵해도 이루며(黙而成之), 말을 아니 해도 믿는(不言而信) 경지가 된다. 이렇게 저절로 빛나고 활동하지 않아도 저절로 변화가 이루어지고, 함이 없이도 이루어지니 이것이 무강(無疆)한 천지조화인 것이다.
見은 猶示也ㅣ라 不見而章은 以配地而言也ㅣ오 不動而變은 以配天而言也ㅣ오 無爲而成은 以無疆而言也ㅣ라
현은 ‘보일 시’와 같음이라. 보이지 않아도 빛난다는 것은 땅에 배합해서 말함이오, 움직이지 않아도 변한다는 것은 하늘에 배합해서 말함이오, 함이 없어도 이룸은 끝이 없음으로써 말함이라.
天地之道는 可一言而盡也ㅣ니 其爲物이 不貳라 則其生物이 不測이니라
천지의 도는 가히 한마디 말로 다하니 그 물건됨이 둘이 아니니라. 곧 그 물건을 생함이 헤아리지 못하느니라.
貳 : 둘 이, 의심할 이
[본문 해설]
『중용』을 ‘반(半)주역’이고 할 만큼 그 이치가 웅숭깊다. 천지의 도란 것이 한 말로 딱 짚어 말할 수 있으니 그 물건됨이 이것저것으로 나가지 않고 한결같아 의심할 바가 없다. 生生之易이듯이 태극 → 음양 → 사상 → 팔괘로 계속 낳고 진화해나가며 물건을 내고 있으니 헤아릴 수가 없다.
此以下는 復以天地로 明至誠無息之功用이라 天地之道ㅣ 可一言而盡은 不過曰誠而已라 不貳는 所以誠也ㅣ라 誠故로 不息而生物之多ㅣ 有莫知其所以然者라
이로써 아래로는 다시 천지로써 지극한 정성은 쉼이 없다는 성공적인 쓰임을 밝힘이라. 천지의 도를 가히 한마디로 말함은 ‘誠“을 말하는데 지나지 않을 뿐이라. 의심치 않는다는 것은 성실하다는 것이다. 정성스럽기 때문에 쉬지 않아 물건을 냄이 많아서 그 까닭을 알지 못함이 있느니라.
[앞주 해설]
『주역』을 음양불측의 ‘神’이라고 압축해 말한다면, 『중용』은 정성 ‘誠’으로 요약할 수 있다. 따라서 중용의 천지의 도는 ‘정성’ 그 자체이고 의심할 나위없는(不貳) 성실함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성실함은 『주역』풍택중부괘에서 ‘중심으로 믿는 마음(中孚之心)’을 말하며, 돼지나 물고기까지도 믿게 하는 마음(中孚는 豚魚면 吉하니)을 말한다. 또한 九二爻의 “우는 학이 그늘에 있거늘 그 자식이 화답하도다. 나에게 좋은 벼슬이 있어서 내가 너와 더불어 얽히노라(鳴鶴이 在陰이어늘 其子ㅣ 和之로다 我有好爵하야 吾與爾靡之하노라)”와 같이 어미 학이 우니 새끼 학이 화답하고 임금과 신하가 중심(中心)으로 수작(酬酌)하듯이, 성인이 천지와 더불어 하는 도가 바로 지극한 정성이다.
이러한 정성이 있기에 쉬지 않는 것이고 천지가 쉬지 않으니 생물이 많아지는데 그 까닭(所以然)은 알 수가 없다. 오늘날 생명의 신비를 벗기기 위해 생명공학이 발달하며 일부 유전자의 비밀을 알아내어 치료 등의 목적으로 활용하고 있지만 대자연의 生生之易의 정미한 이치를 밝혀내기란 지극히 어렵다. 생명공학의 발달은 자칫 대자연의 질서를 그르칠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가운데 인간의 자연에 대한 지극한 믿음만이 자연을 더욱 조화롭게 보존할 수 있리라고 본다.
天地之道는 博也厚也高也明也悠也久也ㅣ니라
천지의 도는 넓고 두텁고 높고 밝고 멀고 오래하느니라.
[본문 해설]
천지의 도는 博 厚 高 明 悠 久가 아니고는 말할 수가 없다. ‘박후’의 땅 ‘고명’의 하늘, ‘유구’의 무강으로, 이를 삼재지도(三才之道)로 말한다면, 천도(天道)는 고명, 지도(地道)는 박후, 인도(人道)는 유구인 것이다.
言天地之道는 誠一不貳라 故로 能各極其盛하야 而有下文生物之功이라
천지의 도가 정성스럽고 한결같아서 둘이 아니니라(의심하지 않느니라). 그러므로 능히 각각 그 성함을 지극히 하여 아랫글의 ‘생물지공(물건을 내는 공)’이 있느니라.
今夫天 斯昭昭之多니 及其無窮也하야난 日月星辰이 繫焉하며 萬物이 覆焉이니라 今夫地ㅣ 一撮土之多ㅣ니 及其廣厚하야난 載華嶽而不重하며 振河海而不洩하며 萬物이 載焉이니라 今夫山이 一卷石之多ㅣ니 及其廣大하야난 草木이 生之하며 禽獸ㅣ 居之하며 寶藏이 興焉이니라 今夫水ㅣ 一勺之多ㅣ니 及其不測하야난 黿鼉蛟龍魚鼈이 生焉하며 貨財ㅣ 殖焉이니라
이제 무릇 하늘이 이 소소함이 많으니 그 무궁한데 미쳐서는 해와 달과 별이 매어 있으니 만물이 덮여 있느니라. 이제 무릇 땅이 한 줌 흙이 많으니 그 넓고 두터운데 미쳐서는 화악을 싣고서도 무겁지 아니하며 하해를 거두면서도 새지 아니하며 만물이 실려 있느니라. 이제 무릇 산이 한 주먹 돌이 많으니 그 광대함에 미쳐서는 초목이 나며 새와 짐승이 살며 보배가 감추어져 나오느니라. 이제 무릇 물은 한잔 물이 많으니 그 헤아릴 수 없음에 미쳐서는 큰 자라, 악어, 교룡, 물고기, 자라가 자라며 화재(貨財)가 번식하느니라.
撮 : 한줌 촬, 잡을 촬 洩 : 샐 설 卷 : 작을 권 勺 : 술잔 작 黿 : 자라 원 鼉 : 악어 타 鼈 : 자라 별 殖 : 번성할 식
[본문 해설]
박후고명한 땅과 하늘의 공효인 ‘생물지공’의 증거로, 天覆地載의 사례를 들고 있다. 참고로 화악이라 함은 천자문의 ‘악종항대(嶽宗恒岱)’에서 나왔듯이 중국의 대표적인 오악(五嶽)의 하나를 말한다. 동악인 태산(泰山, 岱山), 서악인 화산(華山), 남악인 형산(衡山), 북악인 항산(恒山), 중악인 숭산(崇山)이 바로 오악으로 일컬어진다.
昭昭는 猶耿耿이니 小明也ㅣ라 此는 指其一處而言之라 及其無窮은 猶十二章及其至也之意니 蓋擧全體而言也ㅣ라 振은 收也ㅣ오 卷은 區也ㅣ라 此四條는 皆以發明由其不貳不息하야 以致盛大而能生物之意라 然이나 天地山川은 實非由積累而後에 大하니 讀者ㅣ 不以辭害意ㅣ 可也ㅣ라
소소는 경경(반짝거림)과 같으니 조금 밝으니라. 이것은 그 한 곳만을 가르켜 말함이라. ‘극기무궁’은 12장의 ‘及其至也’의 뜻과 같으니 대개 전체를 들어서 말함이라. 진은 거둠이요, 권은 구역이라. 이 네 가지는 모두 써 불이불식으로 말미암아 성대함을 이루어 능히 물건을 내는 뜻을 발명함이라. 그러나 천지산천은 실지로 쌓고 포갬으로 말미암은 뒤에 커진 것은 아니니, 읽는 자가 말로써 뜻을 해치지 않음이 가하니라.
耿 : 빛날 경 區 : 구구할 구(작은 모양)
詩云 維天之命이 於穆不已라 하니 蓋曰天之所以爲天也ㅣ오 於乎不顯가 文王之德之純이여 하니 蓋曰文王之所以爲文也ㅣ니 純亦不已니라
『시경』에 이르길 “하늘의 명이 아! 심원하여 그치지 않느니라” 하니 대개 하늘이 써 하늘이 된 바를 말함이오. “아! 나타나지 않는가. 문왕의 덕이 순전(純全)함이여”라 하니 대개 문왕이 써 문(文)이 된 바니 순전함이 또한 그치지 않느니라.
於 : 어조사 오(아름다움을 뜻하는 감탄사)
詩는 周公維天之命篇이라 於는 歎辭라 穆은 深遠也ㅣ라 不顯은 猶言豈不顯也ㅣ라 純은 純一不雜也ㅣ라 引此하야 以明至誠無息之意라 程子ㅣ曰 天道ㅣ 不已어늘 文王이 純於天道ㅣ 亦不已하시니 純則無二無雜이오 不已則無間斷先後라
시는 『시경』「주송 유천지명」이라. 오는 감탄한 말이라. 목은 심원(깊고 멀음)이라. 불현은 어찌 나타나지 아니하랴와 같음이라. 순은 순전하고 한결같아 섞이지 않음이라. 이를 인용해서 지성무식의 뜻을 밝힘이라. 정자 말씀하시길 “하늘의 도가 그치지 아니하거늘 문왕이 천도에 순전함이 또한 그치지 아니하니, 순전하면 둘이 없고 섞임이 없음이오 그치지 않으면 간단 선후가 없느니라.
右는 第二十六章이라
言天道也ㅣ라 천도를 말함이라
중용 제27장 해설
大哉라 聖人之道여
크도다, 성인의 도여!
包下文兩節而言이라
아래 글 두 구절을 싸서(함축하여) 말함이라.
洋洋乎發育萬物하야 峻極于天이로다
넘실넘실 만물을 발육하여 하늘의 높음이 닿았도다.
洋 : 넘심넘실할 양
峻은 高大也ㅣ라 此는 言道之極於至大而無外也ㅣ라
준은 높고 큼이라. 이것은 도가 지극히 큰 데 다하여 밖이 없음을 말함이라.
[앞주 해설]
‘至大而無外 至小而無間’이다. 작다면 작은 것이 끝나지 않고 크다면 큰 것이 끝나지 않으니 그 內外가 없는 것이다. 큰 도라는 것은 지극한 데까지 극해서 안과 바깥의 한계가 없다는 말이다.
優優大哉라 禮義三百과 威儀三千이로다
넉넉하고 넉넉해서 크도다. 예의는 삼백편이요 위의는 삼천편이로다.
[본문 해설]
성인이 지으신 『예기』를 보면 사람이란 짐승과 다르고, 만물의 영장으로서 살아야 하므로 예의와 위의가 있어야 하기에, 예의는 삼백편이나 되고 위의는 삼천 편이나 된다는 말이다.
優優는 充足有餘之意라 禮儀는 經禮也ㅣ오 威儀는 曲禮也ㅣ라 此는 言道之入於至小而無間也ㅣ라
우우는 충족하여 남음이 있는 뜻이라. 예의는 경례(법도의 예)요, 위의는 곡례라. 이것은 도가 지극히 작은 데까지 들어가 틈이 없음을 말함이라.
[앞주 해설]
앞 문장에서 양양은 바깥이 없음을 말한 반면 이곳에서는 남음을 얘기하고 있다. 성인의 도가 큰 데에 이르러서는 한없이 커서 내외가 없고, 작은 데 미쳐서는 한없이 작아 틈이 없음을 대비하여 말하는 것이다. 『예기』에 보면 ‘예의’와 ‘곡례’가 있다. ‘예의’는 經禮로 법도가 되는 큰 예이고, 이것이 줄기라면, ‘위의’는 곡례로 가지가 되는 작은 예를 말한다. 이러한 줄기가 되는 예의가 3백편이고, 가지가 되는 곡례는 3천편이 되는 도가 지극히 작은 데까지 들어가서 틈이 없다는 것이다. 앞 문장의 ‘至大而無外’는 외적인 것을 말하고 ‘至小而無間’은 내적인 것을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도는 아무나 행하는 것이 아니다. 주역 계사하전 제8장에서 “苟非其人이면 道不虛行하나니라(진실로 그 사람이 아니면 도가 헛되이 행하지 않는다)”고 하였듯이 모든 것은 진실로 도를 펼 수 있는 성인만이 가능한 일이다.
待其人而後에 行이니라
그 사람을 기다린 뒤에 행하느니라.
總結上兩節이라
위의 두 마디를 다 맺음이라.
故로 曰苟不至德이면 至道ㅣ 不凝焉이라 하니라
그러므로 말하기를 “진실로 지극한 덕이 아니면 지극한 도가 엉겨지지 않느니라” 하니라
至德은 謂其人이오 至道는 指上兩節而言이라 凝은 聚也ㅣ며 成也ㅣ라
지극한 덕은 그 사람을 말함이오, 지극한 도는 위 두 마디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 응은 모임이며 이룸이라.
[앞주 해설]
지덕은 “待其人而後에 行이니라”에서 ‘其人’을 말하는 것이고, 지도는 “洋洋乎發育萬物하야 峻極于天이로다”와 “優優大哉라 禮儀三百과 威儀三千이로다”의 두 마디를 가리켜 한 말이다.
故로 君子는 尊德性而道問學이니 致廣大而盡精微하며 極高明而道中庸하며 溫故而知新하며 敦厚以崇禮니라
그러므로 군자는 덕성을 높이고 문학을 말하니, 광대함을 이르고 정미함을 다하며, 고명함을 다하고 중용을 이르며, 옛 것을 익히고 새 것을 알며, 두터움을 돈독히 하고 써 예를 숭상하느니라.
[본문 해설]
군자는 지극한 도가 엉기는 사람이다. 그러한 군자는 하느님으로부터 타고난 선한 본성인 덕성을 높이고 밖으로 학문적인 것을 말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자연 광대함을 이루게 되고 깨끗하고 은미한 데까지도 다하게 된다. ‘致廣大’는 ‘洋洋乎發育萬物’의 외적인 것이고(至大), ‘盡精微’는 ‘禮儀三百 威儀三千’의 내적인 것이다(至小). 또한 높고 밝음을 다하고서 중용지도를 말해야 하고, 옛 것을 익히고 새 것을 알며, 두터움을 돈독히 해서 예절을 숭상해 나가야 하는 것이다.
윗 글에서 尊德性, 致廣大, 極高明, 溫故는 내적인 체가 되고, 道問學, 盡精微, 道中庸, 知新은 외적인 용이 되는 관계이다. 이 체와 용이 표리가 되어 ‘敦厚以崇禮’로 나아가면 되는 것이다.
尊者는 恭敬奉持之意라 德性者는 吾所受於天之正理라 道는 由也ㅣ라 溫은 猶燖溫之溫이니 謂故學之意니 復時習之也ㅣ라 敦은 加厚也ㅣ라 尊德性은 所以存心而極乎道體之大也ㅣ오 道問學은 所以致知而盡乎道體之細也ㅣ라 二者는 修德凝道之大端也ㅣ라 不以一毫私意自蔽하며 不以一毫私欲自累하여 涵泳乎其所已知하며 敦篤乎其所已能이니 此皆存心之屬也ㅣ라 析理則不使有毫釐之差요 處事則不使有過不及之謬요 理義則日知其所未知요 節文則日謹其所未謹이니 此皆致知屬也ㅣ라 蓋非存心이면 無以致知오 而存心者ㅣ 又不可以不致知라 故로 此五句는 大小相資하고 首尾相應하야 聖賢所示入德之方이 莫詳於此하니 學者ㅣ 宜盡心焉이니라.
높힌다는 것은 공경하고 봉지한다는(받들어 갖는다는) 뜻이라. 덕성이라는 것은 내가 하늘에게서 받은 바 바른 이치이니라. 도는 말미암음(연유)이라. 온은 심온(불을 때서 따뜻하게 익힌다)의 온과 같으니 옛 것을 배우고 다시 때로 익힘을 말함이라. 돈은 더욱 두터움이라. 덕성을 높인다는 것은 써 마음을 존해서 도체의 큰 데에 다하는 것이오, 문학을 이룬다는 것은 써 앎을 이루어 도체의 세밀한 데까지 다함이니라. 이 두 가지는 덕을 닦고 도를 엉기는 큰 단서이라. 한 터럭 사사로운 뜻으로 스스로 가리지 아니하며 한 터럭 사사로운 욕심으로 스스로 더럽히지 아니해서 그 이미 아는 바를 무젖게 하며 그 이미 할 수 있는 바에 돈독해야 하니 이는 모두가 마음을 존한다는 등속이라. 이치를 분석하면 터럭 끝 만큼의 차이도 있지 아니하게 하고, 일에 처하게 되면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하는 어긋남도 있지 아니하게 하고, 의리를 다스린다고 하면 날마다 그 알지 못하는 바를 알고, 글을 절도있게 한다면 날로 그 삼가지 못하는 바를 삼갈 것이니 이는 다 앎을 이루는 등속이라. 대개 마음을 존하지 아니하면 앎을 이룰 수 없고, 존심한 자는 또 가히 써 치지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느니라. 그러므로 이 다섯 글귀는 큼과 작음이 서로 바탕하고, 머리와 꼬리가 서로 응하여 성현이 덕에 들어가는 방법을 보여준 바가 이보다 자세함이 없으니, 배우는 자가 마땅히 마음을 다할 지어니라.
燖 : 데울 심 蔽 : 가릴 폐 累 : 더러울 루 涵 : 젖을 함 釐 : 털끝 리
是故로 居上不驕하며 爲下不倍라 國有道에 其言이 足以興이오 國無道에 其黙이 足以容이니 詩曰 旣明且哲하야 以保其身이라 하니 其此之謂與인뎌
이런 고로 위에 거해서 교만하지 아니하며, 아래가 되어서 거스리지 않느니라. 나라에 도가 있음에 그 말이 족히 써 일어나고 나라에 도가 없음에 그 묵묵함이 족히 써 용납할지니, 『시경』에 이르기를 그 밝고 또 밝아서 써 그 몸을 보존한다 하니 이것을 이름인저!
倍 : 거스릴 패, 배반할 배
[본문 해설]
『中庸』이란 책은 서문에서도 밝혔지만 『周易』乾卦 九二爻에 대한 文言傳의 해설에서 자사가 취한 내용으로, 君德 즉 군자가 나아가야 할 덕을 밝힌 내용이다. 그러기에 중용에는 주역의 원리와 일맥상통하고 있다. 윗 글 내용 또한 『周易』乾卦 九三爻에 대한 文言傳의 해설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데, 원문을 보면 다음과 같다.
九三曰 君子終日乾乾夕惕若厲无咎는 何謂也오
구삼에 이르길 ‘군자종일건건석척약려무구’는 어찌 이름인고?
子曰 君子ㅣ 進德修業하나니 忠信이 所以進德也ㅣ오
공자 이르길 군자가 덕에 나아가며 업을 닦나니 충성되고 미덥게 함이 덕에 나아가는 바요
修辭立其誠이 所以居業也ㅣ라
말을 닦고 그 정성을 세움이 업에 거하는 바라
知至至之라 可與幾也ㅣ며 知終終之라 可與存義也ㅣ니
이를 줄을 알고 이르나니 더불어 기미(조짐)할 수 있으며,
마칠 줄을 알고 마치나니 더불어 의리를 보존할 수 있으니
是故로 居上位而不驕하며 在下位而不憂하나니
이런 까닭에 높은 자리에 있어도 교만하지 아니하며 낮은 자리에 있어도 근심하지 아니하나니
故로 乾乾하야 因其時而惕하면 雖危나 无咎矣리라
그러므로 굳세고 굳세게 해서 그 때로 인하여(때에 따라) 두려워하면 비록 위태하나 허물이 없으리라.
참고로 주역의 九三자리는 내괘이면서 양이 양자리에 있어 바른 자리이므로 군자이지만 내괘를 마치고 외괘로 넘어가기 직전이고 지나치게 강하여 위태로운 상태이다. 이때 군자는 진덕수업을 행하여 내적으로는 늘 덕을 행하고 외적으로는 늘 업을 닦는 것이다.
‘충성 忠’은 中心 즉 속마음 그대로 성실한 것을 말하고 ‘믿을 信’은 사람이 말한 그대로 행하여 미더운 것을 말한다. 이러한 충과 신에 바탕하여(忠信) 내적인 덕을 행하는 것이고(所以進德也) 밖으로는 늘 말 한마디마다 잘 닦아 헛되게 하지 않고 성실함이 있어(修辭立其誠) 그 정성을 다 바쳐서 업에 거처하는 것이다(所以居業也).
그렇게 진덕수업을 했을 때 이를 데를 알아 이르므로(知至至之) 필연코 일의 기미를 알고 일을 시작하게 되며(可與幾也) 또한 마칠 데를 알아 마치는 까닭에(知終終之) 필연코 결실(종결)을 알게 되니(知終終之) 그 결실과 의리를 보존하게 되는 것이다(可與存義也).
이렇기 때문에 구삼은 초구의 구이보다 윗자리에 있지만 교만하게 대하지 아니하고(居上位而不驕), 구사와 구오보다 아랫자리에 있지만 그보다 못한 처지를 부러워하거나 근심하지 않는다(在下位而不憂).
즉 사람이 높은 자리에 있다고 교만해서는 안 되며, 아랫사람은 윗사람의 명에 따르지 않고 거스르거나 위배되는 일을 해서는 안된다. 이 두 가지만 가지고도 사람이 왜 학문을 하고, 왜 덕성을 높여야 하는지를 알 수 있다. 또한 나라에 도가 있어 정치가 잘 이루어질 때에는 군자가 하는 말이 인정받아 흥기되고 반면 無道한 세상에서는 바른 말을 하면 잡아가두기 때문에 이런 때는 아무 말하지 않고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 용납될 뿐이다.
주역은 明哲保身의 학문이다. 밝음을 밝혀서 자기 몸을 보호하는 학문이라는 뜻이다. 바로 윗글에서 인용한 『시경』의 “旣明且哲 以保其身”의 말이다. ‘明’은 밝은 것을 말하는 것이고 ‘哲’은 입으로 딱딱 끊어서 말하는 것이다. 다 같은 밝음인데 明은 체가 되고 哲은 용이 된다. 그래서 哲學이라고 한다.
興은 謂興起在位也ㅣ라 詩는 大雅烝民之篇이라
흥은 흥기해서 지위에 있음을 이름이라. 시는 「대아장 증민편」이라.
[앞주 해설]
족히 써 일어난다는 것은 내가 배운 것이 많고 그것을 발표했을 때, 세상이 알아주고 높은 사람들이 끌어올려 벼슬자리에 있게 됨을 말하는 것이다.
『시경』「대아 증민편」에 다음과 같은 시가 있다.
肅肅王命을 仲山甫將之하며 엄숙한 왕명을 중산보가 받들어 행하며
邦國若否를 仲山甫明之로다 나라의 좋고 나쁨을 중산보가 밝히도다
旣明且哲하야 以保其身이며 이미 밝고 또 밝아서 그 몸을 보호하며
夙夜匪解하야 以事一人이로다 밤낮으로 게을리하지 하니하여 한 사람을 섬기도다
右는 第二十七章이라
言人道也ㅣ라
인도를 말함이라.
중용 제28장 해설
子ㅣ曰 愚而好自用하며 賤而好自專이오 生乎今之世하야 反古之道ㅣ면 如此者는 烖及其身者也ㅣ니라
공자 말씀하시기를 어리석고 스스로(제멋대로) 씀을 좋아하며, 천하면서 스스로 오로지 함을 좋아하고, 지금 세상에 나와서 옛적의 일을 돌이키려고 하면 이와 같은 자는 재앙이 그 몸에 미치는 자이니라.
烖 : 재앙 재(災)
[본문 해설]
자기 자신이 어리석음에도 그 어리석음을 모르고 제멋대로 제 생각대로 쓰는 것을 좋아하고, 제 자신이 참으로 천하면서도 천한 줄을 모르고 오로지 제 뜻대로 하는 것을 좋아하며, 지금 세상에 나왔으면 지금 세상의 법도대로 살아야 함에도 隨時變易을 하지 못하고 옛 것을 고집한다면 그 몸에 재앙이 미치게 된다.
여기서 ‘反古之道’의 ‘道’라는 것은 성인의 도를 말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성인의 도라면 적극적으로 펴려고 노력해야 하지만 여기서는 옛날의 있었던 것, 오늘날에는 버려야 할 것들을 그대로 답습하려는 행위를 말한다. 공자가 이 말을 한 뜻은 殷나라가 폭정으로 멸망한 뒤 새로 일어난 周나라가 紂의 폭정을 답습해서는 안된다는 뜻이다.
以上은 孔子之言을 子思ㅣ 引之反復也ㅣ라
이상은 공자의 말씀을 자사가 반복하여 인용하심이라.
非天子ㅣ면 不議禮하며 不制度하며 不考文이니라
천자가 아니면 예를 의논하지 못하며 법도를 짓지 못하며 글을 상고하지 못하느니라.
此以下는 子思之言이라 禮는 親疎貴賤이 相接之禮也ㅣ라 度는 品制오 文은 書名이라
이로써 아래는 자사의 말씀이라. 예는 친한 사람, 소원한 사람, 귀한 사람, 천한 사람이 서로 접하는 예이니라. 법도는 품제(물품을 마름하는 것)요, 문은 글 이름이라.
今天下ㅣ 車同軌하며 書同文하며 行同倫이니라
이제 천하가 수레는 바퀴가 같으며, 책에는 글이 같으며, 행실에는 윤리가 같으니라.
車 : 수레 거 軌 : 바퀴 궤
今은 子思ㅣ自謂當時也ㅣ라 軌는 轍迹之度오 倫은 次序之體오 三者皆同은 言天下一統也ㅣ라
이제는 자사가 스스로 당시를 이름이라. 궤는 수레바퀴 자취의 법도요, 윤은 차서(질서)의 체이니 세 가지가 다 같다는 것은 천하가 하나로 통합된 것을 말함이라.
轍 : 수레바퀴 철
雖有其位나 苟無其德이면 不敢作禮樂焉이며 雖有其德이나 苟無其位면 亦不敢作禮樂焉이니라
비록 그 위가 있으나 진실로 그 덕이 없으면 감히 예악을 짓지 못하며, 비록 그 덕이 있으나 진실로 그 위가 없으면 또한 감히 예악을 짓지 못하느니라.
[본문 해설]
사람에게 행동규범의 禮와 흥을 푸는 樂이 없으면 금수(禽獸)나 다를 바 없다. 곧 예악은 사람이 사는 생명이나 마찬가지인데 그 예악을 아무나 짓는 것은 아니다. 천자라고 하여도 그 덕이 없으면 오히려 예악을 흩트리고, 位도 없으면서 덕이 있다고 예악을 짓는다면 그 권위가 서지 않아 아무도 따르지 않을 것이다. 요임금이나 순임금처럼 그 位와 德을 갖춘 성군만이 예악을 지을 수 있다는 말이다.
鄭氏曰 言作禮樂者는 必聖人이 在天下之位라
정씨(鄭玄) 말하기를, 예악을 짓는 자는 반드시 성인이 천자의 자리에 있어야 함을 말함이라.
子ㅣ曰 吾說夏禮나 杞不足徵也ㅣ오 吾學殷禮호니 有宋이 存焉이어니와 吾學周禮호니 今用之라 吾從周호리라
공자 가라사대 내가 하나라 예를 설명하나 기나라가 족히 증거를 대지 못하고 내가 은나라 예를 배우니 송나라가 존하거니와 내가 주나라 예를 배우니 이제 이것을 쓰노라. 나는 주나라를 따르리라.
杞 : 나라이름 기, 버드나무 기
[본문 해설]
성인으로서의 덕은 있지만 천자의 자리에 있지 못했기 때문에 예악을 짓지 아니하고 주례를 따른 공자의 지극한 겸양의 도를 엿볼 수 있는 글이다. 위 글은 고대 중국에 하나라와 은나라, 주나라의 예가 있는데, 공자께서 그 가운데 周禮를 따르는 이유를 말씀하신 내용이다.
하나라의 예가 있기는 하지만 하나라를 뒤이은 杞나라가 夏禮에 대해 증거를 대지 못하며, 은나라의 경우 말기에 紂王의 폭정으로 比干이 죽음을 당하고, 箕子는 거짓으로 미친 체하여 살아남고, 微子는 神主를 훔쳐 도망가 송나라를 세우고 시조가 되었지만 殷禮에 대해 충분히 증거를 대주지 못하고 있다. 이에 대해 『논어』팔일편(八佾篇)에서 좀더 구체적으로 언급된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子曰 夏禮를 吾能言之나 杞不足徵也ㅣ며 殷禮를 吾能言之나 宋不足徵也는 文獻不足故也ㅣ니 足則吾能徵之矣로리라(하나라의 예를 매가 말할 수 있으나 기나라에서 충분한 증거를 대주지 못하며, 은나라의 예를 내가 말할 수 있으나 송나라에서 충분히 증거를 대주지 못함은 문헌이 부족하기 때문이라. 충분하다면 내가 증거를 댈 수 있으리라.)”
此는 又引孔子之言이라 杞는 夏之後라 徵은 證也ㅣ라 宋은 殷之後라 三代之禮를 孔子ㅣ 皆嘗學之하야 而能言其意로되 但夏禮는 旣不可考證이오 殷禮雖存이나 又非當世之法이오 惟周禮는 乃時王之制니 今日所用이라 孔子ㅣ 旣不得位시니 則從周而已시니라
이는 또한 공자의 말씀을 인용함이라. 기나라는 하나라의 후예라. 징은 증거이라. 송은 은나라의 후손이라. 삼대의 예를 공자께서 모두 일찍이 배워 능히 그 뜻을 말씀할 수 있으나. 다만 하나라의 예는 이미 가히 고증할 수 없고, 은나라의 예는 비록 남아 있으나 또 당세의 법이 아니오, 오직 주나라의 예는 바로 당시 왕의 제도이니 오늘날 쓰는 바이라. 공자께서 이미 지위를 얻지 못하셨으니 주나라를 따를 뿐이시니라.
[본문 해설]
참고로 공연히 쓸데없는 걱정을 ‘기우(杞憂)’라고 하는데 杞나라에서 누군가 하늘이 무너진다고 소문을 내니까 온 나라 사람들이 걱정 근심에 쌓인 데서 비롯된 말이다.
右는 第二十八章이라
承上章爲下不倍而言이니 亦人道也ㅣ라
윗장의 ‘위하불패’를 이어서 또한 사람의 도를 말함이라.
중용 제29장 해설
王天下ㅣ 有三重焉이니 其寡過矣乎인뎌
천하를 왕함이 세 가지 중요함이 있으니 그 허물이 적을진저!
[본문 해설]
왕이 되어 나라를 다스림에 세 가지 중요한 것이 있는데, 이를 잘 지켜나간다면 왕으로서 허물이 적을 것이다.
呂氏曰 三重은 謂議禮制度考文이니 惟天子라야 得以行之則國不異政하고 家不殊俗而人得寡過矣리라
여씨 말하기를 세 가지 중요하다는 것은 의례(예를 의논), 제도(법도를 지음), 고문(글을 상고함)이니, 오직 천자라야 얻어서 써 행하게 되면 나라의 정사가 다르지 않을 것이고, 집집마다 풍속이 다르지 않아 사람이 얻어 허물이 적을 것이리라.
上焉者는 雖善이나 無徵이니 無徵이라 不信이오 不信이라 民弗從이니라 下焉者는 雖善이나 不尊이니 不尊이라 不信이오 不信이라 民弗從이니라
위인 자는 비록 선하나 징험이 없으니, 증험이 없음이라 믿지 않음이오, 믿지 않음이라 백성이 따르지 않느니라. 아래인 자는 비록 선하나 높지 아니하니, 높지 않음이라 믿지 않음이오, 믿지 않음이라 백성이 따르지 않느니라.
上焉者는 謂時王以前이니 如夏商之禮ㅣ 雖善而皆不可考오 下焉者는 謂聖人在下하니 如孔子ㅣ 雖善於禮나 而不在尊位也ㅣ라
위인 자는 당시 왕 이전을 이름이니, 하나라와 상나라의 예가 비록 선하나 모두 가히 상고할 수 없음과 같고, 아래인 자는 성인이 아래에 있음을 이름이니, 공자와 같이 비록 예에 선하나 높은 자리에 있지 못함과 같음이라.
故로 君子之道는 本諸身하야 徵諸庶民하며 考諸三王而不謬하며 建諸天地而不悖하며 質諸鬼神而無疑하며 百世以俟聖人而不惑이니라
그러므로 군자의 도는 몸에 근본하여 서민을 고증하며, 삼왕(夏 殷 周)을 고증하여 어긋나지 아니하며, 저 천지를 세워도 거슬리지 않으며, 저 귀신에게 질정을 해도 의심이 없으며, 백세(3천년)에 성인을 기다려도 의혹되지 않느니라.
[본문 해설]
『주역』 풍지관(風地觀)괘에 九五효에 “觀我生호대 君子ㅣ면 无咎ㅣ리라(나의 생김새를 보되 군자면 허물이 없으리라)”하였고, 그 爻象傳에 “象曰 觀我生은 觀民也ㅣ라(나의 생김새를 본다는 것은 백성을 봄이라)” 하였듯이 왕이 되어 나의 업적을 보려면 바로 백성을 보면 알 수 있는 것이다. 백성이 잘살면 내가 군자로써 나타나는 것이고, 백성이 못살면 내가 소인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래서 군자의 도는 내 몸을 근본으로 삼아 백성들에게 얼마나 값어치 있는지 고증해야 할 뿐만 아니라 하 은 주 삼대의 왕을 고증해서도 어긋나지 않고, 與天地合其德하듯 저 천지에 세워도 거슬리지 않고, 저 귀신에게 질정해도 의심이 없으며, 아주 먼 훗날에 성인을 기다려도 의혹되지 않는 만세의 귀감이 되는 것이어야 한다.
此君子는 指王天下者而言이라 其道는 則議禮制度考文之事也ㅣ라 本諸身은 有其德也ㅣ오 徵諸庶民은 驗其所信從也ㅣ라 建은 立也ㅣ니 立於此而參於彼也ㅣ라 天地者는 道也ㅣ오 鬼神者는 造化之迹也ㅣ라 百世以俟聖人而不惑은 所謂聖人復起사도 不易吾言者也ㅣ라
이 군자는 왕천하하는 이를 가르켜 말함이라. 그 도는 곧 의례, 제도, 고문의 일이라. 자신에게 근본한다는 것은 그 덕이 있음이오, 저 서민에게 고증한다는 것은 믿고 따르는 바를 증험함이라. 건은 세움이니 여기에 세워놓고 저기에 참여함이라. 천지라는 것은 도요, 귀신이라는 것은 조화의 자취라. 백세에 성인을 기다려도 의혹되지 않는다는 것은 이른바 ‘성인이 다시 일어나신다 해도 내 말을 바꾸지 않을 것’이란 것이라.
[앞주 해설]
여기의 군자는 학덕이 있는 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천하를 다스리는 왕을 말한다. 그러한 군자의 도는 의례, 제도, 고문을 말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에게 근본한다는 ‘本諸身’은 먼저 내 몸에 덕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고, ‘徵諸庶民’은 백성을 보는 것이 곧 나를 보는 것과 같이 백성이 믿고 따르는 바로 시험해보는 것이다.
‘건’은 천지를 세운다는 것이 아니고 한 나라를 다스리는 왕으로서 의례, 제도, 고문을 확립해 놓고, 이것을 천지 사이에 잘 펼쳐서 여기저기 모두에 영향을 미쳐 모두 이에 참여하게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천지라는 것을 도를 말하는 것으로 천지에 세운다는 것은 곧 도를 세운다는 뜻이다.
귀신이라는 것은 조화의 자취로, 낮이 밤으로 바뀌고, 밤이 낮으로 바뀌며 하루가 가고, 달이 가고 해가 가면서 춘하추동 사시가 바뀜과 같이 사람이 모르는 가운데 변화가 있는 것이기 때문에 조화의 자취라고 한다.
‘百世以俟聖人而不惑’은 ‘聖人復起사도 不易吾言’이라고 했는데 이 말은 『맹자』공손추장구상(公孫丑章句上)편에 나오는 말과 같다. 즉 공손추가 ‘知言’을 묻자 맹자가 이에 답하면서 “聖人復起사도 必從吾言矣시리라(성인이 다시 일어나신다 해도 반드시 내 말을 따르실 것이다)”라는 한 말과 같은 뜻이다. 구체적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
何謂知言이니잇고 曰 詖辭에 知其所蔽하며 淫辭에 知其所陷하며 邪辭에 知其所離하며 遁辭에 知其所窮이니 生於其心하야 害於其政하며 發於其政하야 害於其事하나니 聖人復起사도 必從吾言矣시리라
(공손추가 묻기를 “무엇을 지언이라 합니까?” 맹자 말씀하시길 “편벽된 말에 그 가리운 바를 알며, 방탕한 말에 그 빠진 바를 알며, 삿된 말에 그 괴리된 바를 알며, 도피하는 말에 그 궁한 바를 아니, 그 마음에서 나와 그 정사에 해를 끼치며, 그 정사에 발하여 그 일에 해를 끼치나니, 성인이 다시 일어나신다 해도 반드시 내 말을 따르실 것이니라”)
質諸鬼神而無疑는 知天也ㅣ오 百世以俟聖人而不惑은 知人也ㅣ니라
저 귀신에 질정하여도 의심이 없음은 하늘을 아는 것이오, 백세에 성인을 기다려도 의혹되지 않음은 사람을 아는 것이니라.
知天知人은 知其理也ㅣ니라
하늘을 알고 사람을 아는 것은 그 이치를 아는 것이라.
是故로 君子는 動而世爲天下道ㅣ니 行而世爲天下法하며 言而世爲天下則이라 遠之則有望이오 近之則不厭이니라
이런 고로 군자는 동함에 세대로 천하의 도가 되니, 행함에 세대로 천하의 법이 되며, 말함에 세대로 천하의 준칙이 되느니라. 멀면 바라봄이 있고 가까우면 싫지 않느니라
[본문 해설]
귀신에 질정해도 의심이 없는 것은 하늘의 이치를 아는 것이고 백세의 성인을 기다려도 의혹됨이 없는 것은 인간세상사의 이치를 아는 것이다. 이렇게 하늘을 알고 사람을 아는 군자가 움직여 활동하면 그 모든 일이 후세 대대로 도가 되니, 그러한 군자가 행하면 천하의 법이 되고, 말 한마디 한마디는 천하의 준칙이 되어 만고의 귀감이 되는 것이다. 먼 후대로 내려가면, 마치 우리가 공자를 높이 바라보듯 우러러 봄이 있고, 가까이에서 그런 군자를 모시면 조금도 싫을 까닭이 없는 것이다.
動은 兼言行而言이오 道는 兼法則而言이라 法은 法度也ㅣ오 則은 準則也ㅣ라
동은 언행을 겸해서 말함이오, 도는 법칙을 겸해서 말함이라. 법은 법도요, 칙은 준칙이라.
詩曰 在彼無惡하며 在此無射이라 庶幾夙夜하야 以永終譽ㅣ라 하니 君子ㅣ 未有不如此而蚤有譽於天下者也ㅣ니라
『시경』에 이르기를 “저기에 있어도 싫지 아니하며 여기에 있어도 싫지 않느니라. 거의 새벽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해서 명예를 길이 마치리라”하니 군자가 이와 같지 않고서 일찍이 천하에 명예를 둔 자는 있지 않느니라.
惡 : 미워할 오 射 : 싫을 역 蚤 : 일찍 조
詩는 周頌振鷺之篇이라 射은 厭也이라 所謂此者는 指本諸身以下六事而言이라
시는 「주송 진로편」이라. 역(射)은 싫어함이라. 이른바 이것이란 ‘本諸身’ 이하의 여섯 가지 일을 가리켜 말한 것이라.
[앞주 해설]
이 여섯 가지는 ‘本諸身’ ‘徵諸庶民’ ‘考諸三王而不謬’ ‘建諸天地而不悖’ ‘質諸鬼神而無疑’ ‘百世以俟聖人而不惑’을 말한다.
右는 第二十九章이라
承上章居上不驕而言이니 亦人道也ㅣ라
윗장(제27장)의 ‘위에 거해도 교만하지 않음이라’는 것을 이어서 말함이니, 또한 인도이라.
중용 제30장 해설
仲尼는 祖述堯舜하시고 憲章文武하시며 上律天時하시고 下襲水土하시니라
중니는 요임금과 순임금을 할아버지로 지으시고 문왕과 무왕을 법으로 문장하시며 위로는 하늘의 때를 법으로 삼으시고, 아래는 수토를 익히시니라
尼 : 가까울 니, 중 니 襲 : 익힐 습
[본문 해설]
子思가 할아버지 공자(字는 중니)에 대해서 쓴 글이다. 중니께서는 요임금과 순임금을 祖宗으로 삼아 전술하시고, 문왕과 무왕의 모든 행적을 법으로 삼았으며, 위로는 天文, 곧 천도의 운행법칙을 법으로 삼고, 아래로는 地理, 곧 물이 흐르고 땅에서 모든 동식물이 나오는 수토를 익히고 또 익히셨다고 하였다.
주역의 관점에서 자사가 쓴 글에 하나를 덧붙인다면, 공자는 『주역』계사하전 제2장에서 조종을 복희씨에 두고 그 뒤를 신농씨와 황제, 요, 순으로 이어짐을 밝히고 있다. 참고로 역의 祖宗이 되는 복희씨가 대자연의 근본 이치를 담은 팔괘를 지은 것에 대해 공자가 서술한 내용을 들여다보면 다음과 같다.
“古者包犧氏之王天下也애 仰則觀象於天하고 俯則觀法於地하며 觀鳥獸之文과 與地之宜하며 近取諸身하고 遠取諸物하야 於是애 始作八卦하야 以通神明之德하야 以類萬物之情하니......
(옛적 포희씨가 천하에 왕이 되었을 때에 우러러서는 하늘의 형상을 보고 구부려서는 땅의 법을 보며, 새와 짐승의 무늬와 땅의 마땅함을 보며, 가까이로는 저 몸에서 취하고 멀리로는 저 물건에서 취하여, 이에 비로소(처음) 팔괘를 지음으로써 신명의 덕을 통하여 만물의 실정이 같이하니(분류하니))“
祖述者는 遠宗其道요 憲章者는 近守其法이오 律天時者는 法其自然之運이오 襲水土者는 因其一定之理니 皆兼內外該本末而言也ㅣ라
할아버지로 짓는다는 것은 멀리 그 도를 祖宗으로 삼는다는 것이요, 헌장이라는 것은 가까이 그 법을 지킴이오, 천시를 법도로 삼는다는 것은 그 자연의 운행을 법으로 삼는다는 것이오, 수토를 익힌다는 것은 그 일정한 이치를 인함이니 안과 바깥을 겸하고 근본과 끝을 포함해서 다 말함이라.
該 : 포함할 해, 다 해
[앞주 해설]
내외 본말을 다 겸하고 포함해서 공자 도의 기상을 말했음을 설명하고 있다. ‘祖述堯舜’이 本이고 內的이라면, ‘憲章文武’는 末이고 外的이다. 또한 ‘上律天時’가 本이고 內的이라면, ‘下襲水土’는 末이며 外的이다.
辟如天地之無不持載하며 無不覆幬하며 辟如四時之錯行하며 如日月之代明이니라
비유컨대 천지가 가져 싣지 않음이 없으며, 덮고 덮지 않음이 없으며, 비유컨대 사시가 섞여 운행하는 것과 같으며, 일월이 번갈아 밝히는 것과 같으니라.
辟 : 비유할 비(譬) 幬 : 덮을 도
錯은 猶迭也ㅣ라 此는 言聖人之德이라
착은 갈마듦(번갈아 함)과 같으니라. 이는 성인의 덕을 말함이라.
迭 : 갈마들 질
萬物이 並育而不相害하며 道ㅣ並行而不相悖라 小德은 川流ㅣ오 大德은 敦化ㅣ니 此ㅣ天地之所以爲大也ㅣ니라
만물이 아울러 기르되 서로 해하지 아니하며 도가 아울러 행하되 서로 거스르지 않느니라. 작은 덕은 냇물이 흐름이요, 큰 덕은 돈독히 화함이니, 이는 천지가 써 큼이 되는 바이니라.
悖는 猶背也ㅣ라 天覆地載하야 萬物이 並育於其間而不相害하며 四時日月이 錯行代明而不相悖하니 所以不害不悖者는 小德之川流오 所以並育並行者는 大德之敦化라 小德者는 全體之分이오 大德者는 萬殊之本이오 川流者는 如川之流니 脉絡이 分明而往不息也ㅣ오 敦化者는 敦厚其化니 根本이 盛大而出無窮也ㅣ라 此는 言天地之道하야 以見上文取譬之意也ㅣ라
패는 등짐과 같으니라. 하늘은 덮고 땅은 실어서 만물이 아울러 그 사이에 길러져 서로 해하지 아니하며 사시와 일월이 번갈아 운행하며 번갈아 밝으며 서로 거스르지 아니하니, 써한 바 해치지도 않고 거스르지도 않는 것은 소덕의 내가 흐르는 것이오, 써한 바 아울러 길러지고 아울러 행한다는 것은 대덕의 돈화라. 소덕이라는 것은 전체의 나뉨이요, 대덕이라는 것은 만 가지 다름의 근본이요, 천류라는 것은 냇물의 흐름과 같으니 맥락이 분명하고 감이 쉬지 않음이오, 돈화라는 것은 돈독하고 후중하게 그 화함이니 근본이 성대하여 나옴이 궁함이 없는 것이라. 이것은 천지의 도를 말하여 써 윗글에 비유를 취한 뜻을 밝혀놓는 것이라.
[앞주 해설]
소덕과 대덕을 구분하여 말하고 있다.
서로 해하지 않고 서로 어긋나지 않는 것은 소덕으로 이를 냇물의 흐름인 川流에 비유했다. 천자문에 보면 ‘川流不息(냇물은 흘러 쉬지 않는다)’이 있고, 『논어』자한편(子罕篇)에는 “子在川上曰 逝者ㅣ 如斯夫인저 不舍晝夜로다(공자께서 시냇가에 계시면서 말씀하시길, '가는 것이 이 물과 같구나. 밤낮을 그치지 않도다’)”라고 하여 천지조화의 끊임없는 이치를 시냇물에 비유하고 있다. 또한 노자의 『道德經』제8장에서는 “上善은 若水하니 水善利萬物而不爭하야 處衆人之所惡하나니 故로 幾於道矣니라(최상의 선은 물과 같으니, 물의 훌륭한 점은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도 다투지 않으며 뭇 사람이 싫어하는 바에 거처하나니, 그러므로 물은 도에 가까우니라)”고 하였다.
한편 천지가 자연히 모든 만물을 아울러 기르고 일월성신을 아울러 운행하는 것은 마치 천류가 모여 큰 바다로 모두 모이듯이 대덕의 敦化라 하였다.
右는 第三十章이라
言天道也ㅣ라
천도를 말함이라.
중용 제31장 해설
唯天下至聖이아 爲能聰明睿知ㅣ 足以有臨也ㅣ니 寬裕溫柔ㅣ 足以有容也ㅣ며 發强剛毅ㅣ 足以有執也ㅣ며 齊莊中正이 足以有敬也ㅣ며 文理密察이 足以有別也ㅣ니라
오직 천하의 지극한 성인이어야 능히 총명하고 예지함이 족히 써 군림함이 있나니, 너그럽고 넉넉하고 온화하고 부드러움이 족히 써 용납함이 있으며, 펼치고 강하고 강함과 굳셈이 족히 써 잡음(고집스러움)이 있으며, 재계하고 씩씩하고 중정함이 족히 써 공경함이 있으며 문이 있고 조리있고 치밀하고 살핌이 족히 써 분별함이 있느니라.
聰明睿知는 生知之質이라 臨은 謂居上而臨下也ㅣ라 其下四者는 乃仁義禮智之德이라 文은 文章也ㅣ오 理는 條理也ㅣ오 密은 詳細也ㅣ오 察은 明辨也ㅣ라
총명예지는 나서부터 아는 바탕이다. 임은 위에 거하여 아래로 군림함을 이름이라. 그 아래 네 가지는 인의예지의 덕이라. 文은 문장이오 理는 조리이며, 密은 상세함이요, 察은 밝게 분별함이라.
[앞주 해설]
성인은 태어나면서부터 아는 生而知之이다. 오직 지극한 성인이어야 백성들 위에 군림해서 백성들을 잘 다스릴 있는데 그 바탕은 ‘聰明睿知’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위 본문에서 언급한 ‘聰明睿知’는 오행으로 말하면 가운데 중앙 土에 해당하는 ‘信’이고, ‘寬裕溫柔’는 동방 木인 ‘仁’이며, ‘發强剛毅’는 서방 金인 ‘義’이며, ‘齊莊中正’은 남방 火인 ‘禮’이며, ‘文理密察’은 북방 水인 ‘智’에 해당한다.
溥博淵泉하야 而時出之니라
크고 넓고 깊고 깊어서 때로 나오니라.
溥 : 클 부, 넓을 부
溥博은 周徧而廣闊也오 淵泉은 靜深而有本也ㅣ라 出은 發見也ㅣ라 言五者之德이 充積於中而以時發見於外也ㅣ라
부박은 주변이 광활함이요 연천은 고요하고 깊어서 근본이 있음이라. 출은 밖으로 나타남이라. 다섯 가지의 덕이 중심에 충적되어 때로써 밖에 발현함이라.
徧 : 두루 편
[앞주 해설]
『대학』에 “誠於中이면 形於外라(마음 속에 정성을 다하면 밖으로 나타나니라)” 하였듯이 위의 다섯 가지 덕이 ‘溥博淵泉’으로 마음 속에 채워지고 쌓이면 때로 밖으로 발현된다. 이것이 바로 천하의 至誠이 되는 것이다.
溥博은 如天하고 淵泉은 如淵이라 見而民莫不敬하며 言而民莫不信하며 行而民莫不說이니라
부박은 하늘과 같고, 연천은 못과 같음이라. 나타남에 백성이 공경하지 않음이 없으며, 말함에 백성이 믿지 않음이 없으며, 행함에 백성이 기뻐하지 않음이 없느니라.
言其充積이 極其盛而發見이 當其可也ㅣ라
그 충적함이 지극히 성하고 발현함이 그 가함에 마땅함을 말함이라.
是以로 聲名이 洋溢乎中國하야 施及蠻貊하야 舟車所至와 人力所通과 天之所覆와 地之所載와 日月所照와 霜露所隊애 凡有血氣者ㅣ 莫不尊親하니 故로 曰配天이니라
이로써 성명(소리와 이름)이 나라 가운데 넘치고 넘쳐서 변방의 땅까지 뻗쳐서 배와 수레가 이르는 바와 인력이 통하는 바와 하늘이 덮은 바와 땅이 싣는 바와 해와 달이 비치는 바와 서리와 이슬이 내리는 곳에 무릇 혈기가 있는 자들이, 높이고 친하지 않음이 없으니 그러므로 가로되 하늘을 짝하느니라.
施 : 뻗을 이 貊 : 북쪽 오랑캐 맥 隊 : 떨어질 추(墜)
舟車所至以下는 蓋極言之라 配天은 言其德之所及이 廣大如天也ㅣ라
‘주거소지’ 이하는 대개 지극히 말한 것이라. ‘배천’은 그 덕의 이르는 바가 넓고 커서 하늘과 같음을 말함이라.
[앞주 해설]
『주역』건괘 문언전에서 “대인은 천지와 더불어 그 덕을 합한다(夫大人者는 與天地合其德하며.......)”고 하였듯이 오직 성인이어야 지극한 정성이 있기에 천지와 더불어 셋이 되고 천지와 같이 참여하는 경지가 된다.
右는 第三十一章이라
承上章而言小德之川流하니 亦天道也ㅣ라
윗장을 이어서 소덕의 천류를 말했으니 또한 천도이라.
[앞주 해설]
천도의 운행이 自彊不息하듯, 쉴 새 없이 흐르는 냇물과 같은 소덕 또한 주자는 천도의 이치로 보았다.
중용 제32장 해설
唯天下至誠이아 爲能經綸天下之大經하며 立天下之大本하며 知天地之化育이니 夫焉有所倚리오
오직 천하에 지극한 정성이라야 능히 천하의 큰 법도를 경륜하며, 천하의 큰 근본을 세우며, 천지의 화육을 알지니, 어찌 의지하는 바가 있으리오!
[본문 해설]
앞장에서는 지극한 성인(至聖)으로 말하고, 여기서는 지극한 정성(至誠)으로 말하고 있는데 천하의 지극한 정성이 곧 지극한 성인이고, 지극한 성인이 곧 지극한 정성이다. 여기서 정성이라는 것은 두 손을 합장하고 백배 천배를 올리는 것이 아니라 오직 깨끗한 마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깨끗한 마음을 가진, 오로지 지극한 정성을 가진 사람이라야 능히 지상낙원을 건설할 수 있는 천하의 큰 법을 경륜할 수 있고, 천하의 근본을 세울 수 있으며 천지가 만물을 나오도록 하고 길러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다른 것에 의지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천지와 더불어 짝하는 성인이기에 저절로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經綸은 皆治絲之事니 經者는 理其緖而分之오 綸者는 比其類而合之也ㅣ라 經은 常也ㅣ라 大經者는 五品之人倫이오 大本者는 所性之全體也ㅣ라 唯聖人之德이라야 極誠無妄이라 故로 於人倫에 各盡其當然之實하야 而皆可以爲天下後世法이니 所謂經綸之也ㅣ라 其於所性之全體에 無一毫人欲之僞以雜之하야 而天下之道千變萬化가 皆由此出하니 所謂立之也ㅣ라 其於天地之化育에 則亦其極誠無妄者ㅣ 有黙契焉하니 非但聞見之知而已라 此皆至誠無妄自然之功用이니 夫豈有所倚著於物而後에야 能哉리오
경륜(經은 실을 나르는 것이고, 綸은 북으로 짜는 것)은 모두가 실을 다스리는 일(베짜는 일)이라. 경이라는 것은 그 실마리를 다스려서 나누는 것이오, 윤이라는 것은 그 유를 나란히 해서 합함이라. 경은 떳떳함이라. 대경이라는 것은 오품의 인륜(五倫)이오, 대본이라는 것은 성품인 바의 전체이라. 오직 성인의 덕이라야 지극히 성실하고 망령됨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사람의 윤리에 각각 그 당연함의 실지를 다하여 다 가히 써 천하 후세의 법이 되니 이른바 경륜이란 것이라. 그 성품인 바의 전체에 한 터럭만한 사람 욕심의 거짓이 섞임이 없어서 천하의 도에 천 번 변하고 만 번 화함이 모두 이로 말미암아 나오니 이른바 세운다는 것이라. 그 천지의 화육함에 또한 지극히 성실하고 망령됨이 없는 자라야 묵묵히 앎이 있으니 다만 듣고 보아서 알 뿐만이 아니라. 이는 모두가 지극한 성실함과 망령됨이 없는 자연의 공용이니 무릇 어찌 물건에 의착한(기대고 붙은) 바가 있은 뒤에야 능하겠는가!
契 : 알 계, 묶을 계
肫肫其仁이며 淵淵其淵이며 浩浩其天이니라
간곡하고 간곡한 그 어짊이며, 깊고 깊은 그 못이며, 넓고 넓은 그 하늘이니라.
肫 : 간곡할 준(순)
肫肫은 懇至貌니 以經綸而言也ㅣ오 淵淵은 靜深貌니 以立本而言也ㅣ오 浩浩는 廣大貌니 以知化而言也ㅣ라 其淵其天則非特如之而已라
준준은 간곡하고 지극한 모양이니 경륜으로써 말함이오, 연연은 고요하고 깊은 모양이니 입본으로써 말함이오, 호호는 광대한 모양이니 지화로써 말함이라. 그 못이며 그 하늘이면 특별히 이와 같을 뿐만이 아니라.
[앞주 해설]
다시 말해 肫肫은 ‘爲能經綸天下之大經’을 말하는 것이고, 淵淵은 ‘立天下之大本’을 말하며, 浩浩는 ‘知天地之化育’을 말한다. 그러한 연못과 하늘이기에 한정지어서 말할 수는 없지만 굳이 말하자면 위와 같이 표현할 수 있을 뿐이지 이보다 더 무한한 초월적 의미가 있다는 말이다.
苟不固聰明聖知達天德者ㅣ면 其孰能知之리오
진실로 진짓 총명하고 성스럽고 지혜로와서 하늘의 덕에 통달한 자가 아니면 그 누가 능히 알리오!
固 : 진짓 고, 실제 고
固는 猶實也ㅣ라 鄭氏曰 唯聖人이아 能知聖人也ㅣ라
고는 실제와 같음이라. 정씨(鄭玄)가 말하기를 오직 성인이라야 능히 성인을 앎이라.
右는 第三十二章이라
承上章而言大德之敦化하니 亦天道也ㅣ라 前章은 言至聖之德하고 此章은 言至誠之道라 然이나 至誠之道는 非至聖이면 不能知오 至聖之德은 非至誠이면 不能爲니 則亦非二物矣라 此篇은 言聖人天道之極致ㅣ 至此而無以加矣라
윗장을 이어 대덕의 돈화를 말함이라. 앞 장(제31장)에서는 지극한 성인의 덕을 말하고, 이 장에서는 지극한 정성의 도를 말함이라. 그러나 지극히 성실한 도는 지극한 성인이 아니면 능히 알지 못함이오, 지극한 성인의 덕은 지극한 정성이 아니면 능히 하지 못하니 곧 또한 두 가지 물건이 아니라. 이 편은 성인의 천도의 극치를 말함이니 이에 이르름에 더할 것이 없느니라.
중용 제33장 해설
詩曰 衣錦尙絅이라 하니 惡其文之著也ㅣ라 故로 君子之道는 闇然而日章하고 小人之道는 的然而日亡하나니 君子之道는 淡而不厭하며 簡而文하며 溫而理니 知遠之近하며 知風之自하며 知微之顯이면 可與入德矣리라
시에 가로되 “비단옷을 입고 홑옷을 덧입는다” 하니 그 무늬의 나타남을 미워함이라. 그러므로 군자의 도는 어두우면서 날로 빛나고 소인의 도는 밝으면서 날로 없어지나니, 군자의 도는 담박하되 싫지 아니하며, 간략하되 무늬가 있으며, 온화하되 조리가 있으며, 먼 것이 가까운 곳부터라는 것을 알며, 바람이 부터함(어느 곳에서부터 일어남)을 알며, 은미함이 드러남을 알면 가히 더불어 덕에 들어가리라.
絅 : 홑옷 경
[본문 해설]
『시경』에 나오는 衣錦尙絅이란 말은 비단옷을 입었다고 으스대며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덧옷을 입어 그 비단옷의 화려함을 가렸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화려함이 겉으로 드러나는 것을 싫어해 가렸다는 것인데 여기서 비단옷이라 함은 많이 알고 아름다운 것을 많이 품은 군자를 말하고 덧옷은 겸양을 뜻한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조금만 알아도 그것을 확대해 남들에게 자랑하려고 야단이지만 군자는 자신을 낮추는 겸손함을 갖추고 있어 오히려 감추려고 애쓴다는 말이다.
『주역』地火明夷괘 大象傳에 “밝음이 땅 가운데 들어감이 ‘명이’니, 군자가 이로써 무리에 다다름에 그믐을 써서 밝히느니라(象曰 明入地中이 明夷니 君子ㅣ 以하야 莅衆애 用晦而明하나니라)”라 하였다. 군자의 도란 겉으로는 어두운 그믐인 체하면서 세상을 밝힌다는 것이다. 그믐이 다하면 초승달에서 보름달로 훤히 밝아지듯, 군자의 도는 어두우면서 날로 자연히 빛난다는 뜻이다. 하지만 소인의 도는 겉으로 굉장히 밝은 것 같지만 그 밝은 것이 날로 없어지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군자의 도는 담백한 물과 같이 아무리 마셔도 싫지 아니하며, 간략하지만 자연스럽게 아름다운 무늬가 나오고, 늘 온화하면서도 조리가 있어 잘 다스리고, 먼 곳이 가까운 데서부터 시작됨을 알고, 바람이 어느 곳에서부터 불기 시작했는지 다시 말해 무슨 사건이 일어나면 그 사건이 어디에서부터 비롯되었는지도 알며, 은미하게 시작하여 후에 훤히 드러나는 것까지 알게 된다. 이런 정도가 되면 가히 덕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前章엔 言聖人之德이 極其盛矣오 此는 復自下學立心之始로 言之而下文에 又推之하야 以至其極也ㅣ라 詩는 國風 衛碩人 鄭之丰에 皆作衣錦褧衣하니 褧은 絅으로 同이니 襌衣也ㅣ라 尙은 加也ㅣ라 古之學者는 爲己라 故로 其立心이 如此라 尙絅故로 闇然이오 衣錦故로 有日章之實이며 淡簡溫은 絅之襲於外也ㅣ오 不厭而文且理焉은 錦之美ㅣ 在中也ㅣ라 小人은 反是則暴於外而無實以繼之니 是以로 的然而日亡也ㅣ라 遠之近은 見於被者ㅣ 由於此也ㅣ오 風之自는 著乎外者ㅣ 本乎內也ㅣ오 微之顯은 有諸內者ㅣ 形諸外也ㅣ라 有爲己之心하고 而又知此三者면 則知所謹而可入德矣라 故로 下文에 引詩하야 言謹獨之事하니라
앞장(제32장)에서는 성인의 덕이 그 성함을 다함을 말하고 여기서는 다시 아래에서 배우는 이가 마음을 세우는 시작부터 말하였으며 아랫글에 또 이것을 미루어서 써 그 지극함에 이르게 한 것이라. 시는 「국풍」의 ‘위풍 석인편’과 ‘정풍 봉편’에 모두 ‘의금경의’로 되어 있으니 ‘褧’은 ‘絅’으로 같으니, 홑옷이라. ‘尙’은 더함이라. 옛날의 학자들은 자기를 위함이라. 그러므로 그 마음을 세움이 이와 같으니라. 홑옷을 덧입었기 때문에 어두움이오, 비단옷을 입었기 때문에 날로 빛나는 실제가 있느니라. 담담하고 간략하고 온화함은 홑옷이 밖에서 껴입어짐이오. 싫지 않고 무늬가 나며 또 조리가 있음은 비단의 아름다움이 속에 있음이라. 소인은 이와 반대로 하니 밖에 드러나되 실제로써 이어짐이 없으니, 이로써 밝되 날로 없어짐이라. ‘원지근’은 저기에 나타남이 여기에서 말미암은 것이요, ‘풍지자’는 밖에 나타난 것이니 안에 근본함이요, ‘미지현’은 저 안에 있는 것이 저 밖으로 형체가 됨이라. 자기를 위하는 마음이 있고 또 이 세 가지(遠之近, 風之自, 微之顯)를 알면 삼갈 바를 알아 가히 덕에 들어갈 수 있느니라. 그러므로 아랫 글에 『시경』을 인용하여 홀로를 삼가는(謹獨) 일을 말하였느니라
褧 : 홑옷 경 襌 : 홑옷 단 襲 : 껴입을 습 暴 : 나타날 폭
[앞주 해설]
학문에는 ‘爲己之學’과 ‘爲人之學’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爲己之學’이란 남을 의식하거나 벼슬하고자 공부하는 것이 아니고 남이 뭐라고 하던 나를 위해서, 스스로 수신을 위해서, 사람이 되고자 학문을 하는 것을 말한다. 반면 ‘爲人之學’이란 자신은 아무것도 없으면서 남에게 큰소리치거나 벼슬하려고 혹은 돈을 벌려고 하는 공부를 말한다. 옛날 성현이나 군자들은 위기지학의 자세로 공부를 했는데 처음 공부를 하려는 사람 또한 위기지학으로 임해야 한다.
윗 글에서 군자의 밖으로 드러난 행동을 ‘絅之襲於外’라 표현하고, 소인의 밖으로 드러나는 행동을 ‘暴於外’라고 표현한 것은 잘 음미해야 한다. 군자는 겉으로 홑옷을 껴입어 밝음이 잘 드러나지는 않지만 실제는 속에 비단옷을 입고 있어 날로 밝아지지만, 소인은 큰소리만 치고 주먹을 휘두르고 폭력을 쓰니 금방 드러나기는 하지만 실제 알맹이가 없어 날로 없어진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군자의 도는 밖으로나 멀리서나 은미한 가운데서도 드러나니 ‘遠之近’과 ‘風之自’와 ‘微之顯’으로 표현하였다.
『주역』계사상전 제8장에 風澤中孚괘 九二효사 “우는 학이 그늘에 있거늘 그 자식이 화답하도다. 나에게 좋은 벼슬이 있어 내가 너와 더불어 얽히노라(鳴鶴이 在陰이어늘 其子ㅣ 和之로다 我有好爵하야 吾與爾靡之하노라)”에 대해 공자가 “군자가 그 집에 거해서 그 말을 냄에 선하면 천리 밖에서 응하나니, 하물며 그 가까운 데에서랴! 말이 몸에서 나와 백성에게 더하며, 행실이 가까운 데서 발해 먼 곳에서 나타나나니, 언행은 군자의 추기니 추기의 발함이 영과 욕의 주가 되느니라. 언행은 군자가 이로써 천지를 움직이는 바니 가히 삼가지 아니하랴!(子曰 君子ㅣ 居其室하야 出其言에 善이면 則千里之外ㅣ 應之하나니 況其邇者乎여 居其室하야 出其言에 不善이면 則千里之外ㅣ 違之하나니 況其邇者乎여 言出乎身하야 加乎民하며 行發乎邇하야 見乎遠하나니 言行은 君子之樞機니 樞機之發이 榮辱之主也ㅣ라 言行은 君子之所以動天地也ㅣ니 可不愼乎아)”라고 말씀하신 뜻과 같다.
이러한 군자이기에 말에는 항상 실지가 있고 행동에는 항상함이 있다는 것을 『주역』風火家人괘 대상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象曰 風自火出이 家人이니 君子ㅣ 以하야 言有物而行有恒하나니라(상에 가로되 바람이 불에서 나는 것이 가인이니, 군자가 이로써 말에는 실지가 있고 행동에는 항상함이 있게 하나니라).” 여기서 가인은 한 집안을 말하는데, 집에서 남들이 듣지 않는다고 말한 것이 밖으로 새어나가 남들이 모두 알게 되듯이, 밖에 나타난 것은 바로 내 집안 내 마음 속에서 근본이 된 것이다.
즉 자기 몸을 위하여 공부하는 마음(爲己之心)이 먼저 있고, ‘遠之近’ ‘風之自’ ‘微之顯’의 세 가지가 진리라는 것을 알면, 삼갈 바를 알아서 가히 덕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이다. 아래는 『시경』을 인용해서 ‘謹獨’을 말하고 있다.
詩云 潛雖伏矣나 亦孔之昭ㅣ라 하니 故로 君子는 內省不疚하야 無惡於志나 君子之所不可及者는 其惟人之所不見乎인뎌
『시경』에 이르기를 “잠긴 것이 비록 엎드려 있으나 또한 심히 밝다” 하니 그러므로 군자는 안으로 살펴 병들지 아니해서 뜻(마음)에 미워함이 없으니 군자의 가히 미치지 못하는 것은 그 오직 사람이 보지 않는 바인저!
孔 : 심히 공
[본문 해설]
『시경』「小雅」正月편에 다음과 같은 시가 있다.
魚在于沼하니 고기가 못에 있으니
亦匪克樂이로다 또한 능히 즐겁지 못하도다
潛雖伏矣나 물에 잠겨서 엎드려 있으나
亦孔之炤이로다 또한 심히 밝게 보이도다
憂心慘慘하여 마음에 근심하기를 심히 하여
念國之爲虐하노라 나라의 포악함을 염려하노라
“잠긴 것이 비록 엎드려 있으나 또한 심히 밝다”는 것은 세상 속에 엎드려 있다 하더라도 그 곳에서 밝은 빛이 나온다는 말이다. 앞서 ‘衣錦尙絅’과 같이 비록 겉옷을 덧입었지만 결국은 빛이 나게 된다는 말을 이어서 한 것이다.
그러므로 군자는 겉으로보다 안으로가 더 중요하다는 말이다. 안으로 스스로 가책을 느끼거나 마음의 병폐가 조금도 없어서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어야 한다. 군자가 남들과 다른 점은 남들이 보지 못하는 곳, 나 홀로 있는 것을 삼가는 것이다. 이 제33장은『중용』을 마무리 지으면서 맨 처음 제1장의 “道也者는 不可須臾離也ㅣ니 可離면 非道也ㅣ라 是故로 君子는 戒愼乎其所不睹하며 恐懼乎其所不聞이니라”를 다시 한번 강조하여 말하는 대목이다.
詩는 小雅正月之篇이라 承上文하야 言莫見乎隱莫顯乎微也ㅣ라 疚는 病也ㅣ라 無惡於志는 猶言無愧於心이니 此는 君子謹獨之事也ㅣ라
시는 「소아 정월편」이라. 윗글을 이어 숨은 것보다 드러남이 없고, 은미한 것보다 나타남이 없음을 말한 것이라. 구는 병이라. 마음에 미움이 없다는 것은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다는 말과 같으니 이는 군자가 홀로를 삼가는 일이라.
[앞주 해설]
주자 또한 자사가 예를 든 『시경』의 구절을 『중용』 제1장에 나오는 “莫見乎隱이며 莫顯乎微니 故로 君子는 愼其獨也ㅣ니라”를 들어 ‘愼獨’을 ‘謹獨’으로 설명하고 있다.
詩云 相在爾室혼대 尙不愧于屋漏ㅣ라 하니 故로 君子는 不動而敬하며 不言而信이니라
『시경』에 이르기를 “너의 집안에 있는 것을 보니 오히려 방구석에서도 부끄럽지 않다” 하니 그러므로 군자는 동하지 않아도 공경하며 말하지 않아도 믿느니라.
漏 : 샐 루, 서북모퉁이 루 * 屋漏 : 방구석, 아랫목 한구석
[본문 해설]
위에 인용된 시는 앞서 『중용』제16장에서도 인용된 바가 있다(인용 시 내용은 제16장에서 참조 바람). 앞글에 이어서 ‘謹獨’의 효험을 말하고 있다. 즉 남이 볼 때나 홀로 있을 때를 삼가 안으로 마음을 잘 닦아 正心修道를 하니 군자는 억지로 남에게 잘 보이려고 움직이지 않아도 결국은 세상에 진심이 드러나게 되어 남들이 공경하게 되고, 굳이 말을 하지 않더라도 남들이 믿어주게 된다.
詩는 大雅抑之篇이라 相은 視也ㅣ라 屋漏는 室西北隅也ㅣ라 承上文하야 又言君子之戒謹恐懼가 無時不然하야 不待言動而後에 敬信하니 則其爲己之功이 益加密矣라 故로 下文에 引詩하야 幷言其效하니라
시는 「대아 억편」이라. 상은 봄이라. 옥루는 방의 서북쪽 귀퉁이라. 윗글을 이어 또 군자의 경계하고 삼가고 두려워하고 두려워함(戒謹恐懼)이 때로 그렇지 않음이 없어 말과 행동을 기다리지 않은 뒤에 공경하고 믿게 함을 말하였으니 ‘위기지공(몸을 위한 공력)’이 더욱더 주밀함이라. 그러므로 아랫글에 시를 인용해서 아울러 그 효험을 말함이라.
[앞주 해설]
屋漏를 방의 서북쪽이라 하고 귀퉁이라고 하는 이유는 보통 집을 남향으로 짓는데, 이 경우 문을 열고 들어 갈 경우 아랫목은 서쪽이 되고, 그 구석이 서북쪽이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잘 보이지 않는 구석에 있으면서도 부끄럽지 않는 행동을 하는 것이 ‘謹獨’의 자세이다. 戒謹恐懼는 누가 두려워서라기 보다 스스로를 경계하고 두려워하여 삼가는 마음 자세이다. 만약 벌을 받을까봐 누구로부터 야단을 맞을까봐 삼가는 것은 ‘謹獨’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중용』 제1장에서도 인용한 바 있지만 불가(佛家)의 금강경(金剛經) 사구게(四句偈)에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만약 빛으로써 나를 보거나 음성으로써 나를 구한다면 이 사람은 사도를 행하는 것이니 영원히 여래를 보지 못할 것이니라)”라고 한 말도 바로 不睹하고 不聞이라 하여 도를 닦지 않음을 경계한 말이다.
이것은 자기 자신을 위한 공부(爲己之學)로 더욱더 주밀하게 해야 하는 것이다. 爲己之功은 爲己之學과 같은 뜻이다.
詩曰 奏假無言하야 時靡有爭이라 하니 是故로 君子는 不賞而民勸하며 不怒而民威於鈇鉞이니라
『시경』에 이르기를 “(신 앞에) 나아가 (신이 감격해) 이름에 말이 없어서 때에 다툼이 있지 않다”하니, 이런 고로 군자는 상을 주지 않아도 백성들이 권하며, 성내지 않아도 백성들이 작도와 도끼보다 더 두려워하느니라.
奏 : 아뢸 주, 나아갈 주 假 : 이를 격 鈇 : 작도 부 鉞 : 도끼 월
[본문 해설]
“奏假無言하야 時靡有爭이라”는 말은 『중용』제16장의 “神之格思를 不可度思ㅣ온 矧可射思아”라는 말과 같이 신은 오직 지극한 정성으로 받들 때에 헤아릴 수 있고, 느낄 수 있다. 우리가 신 앞에 나아가 지극한 정성으로 받들면 신이 감격하여 이르게 되는데 이때에는 아무 말이 필요 없고 묵묵한 가운데 신과 통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곳에 다툼이 있을 수가 없듯이 군자가 지극한 정성으로 백성에게 임하면, 군자가 백성에게 상을 주지 않아도 백성들은 서로 잘하자고 권하며, 군자가 성내지 않아도 백성들은 형벌보다도 더욱 두려워하여 잘 따르게 된다.
詩는 商頌烈祖之篇이라 奏는 進也ㅣ라 承上章而遂及其效하야 言進而感格於神明之際에 極其誠敬하야 無有言說而人自化之也ㅣ라 威는 畏也ㅣ라 鈇는 莝斫刀也ㅣ오 鉞은 斧也ㅣ라
시는 「상송 열조편」이라. 주는 나아감이라. 윗글을 이어 드디어 그 효험에 미쳐 나아가 신명을 감격할 즈음에 그 정성과 공경을 지극히 하여 말과 설명을 하지 않아도 사람이 스스로 감화됨을 말한 것이라. 위는 두려워함이라. 부는 여물을 써는 작도요, 월은 도끼라.
遂 : 드디어 수 際 : 즈음 제 莝 : 여물 좌 斫 : 벨 작
詩曰 不顯惟德을 百辟其刑之라 하니 是故로 君子는 篤恭而天下ㅣ平이니라
『시경』에 이르기를 “드러나지 않은 덕을 백벽(여러 제후)이 법으로 삼는다” 하니 이런 고로 군자는 공순함을 돈독히 하여 천하가 평평해지느니라.
詩는 周頌烈文之篇이라 不顯은 說見二十六章이라 此는 借引以爲幽深玄遠之意라 承上文하야 言天子ㅣ 有不顯之德而諸侯ㅣ 法之하니 則其德이 愈深而效愈遠矣라 篤은 厚也ㅣ니 篤恭은 言不顯其敬也ㅣ라 篤恭而天下平은 乃聖人至德이 淵微하야 自然之應이니 中庸之極功也ㅣ라
시는 「주송 열문편」이라. 불현은 설명이 제26장에 보이니라. 이는 빌리고 인용해서 써 그윽하고 깊고 아득하고 먼 뜻을 삼은 것이라. 윗글을 이어서 천자가 드러나지 않은 덕이 있어 제후가 그것을 법으로 삼으면 그 덕이 더욱 깊어 효험이 더욱 멀어지는 것을 말함이라. 독은 두터움이니 독공은 그 공경함이 나타나지 않음을 말함이라. 공순함을 돈독히 해서 천하가 평평해짐은 이에 성인의 지극한 덕이 깊고 은미하여 자연히 응함이니, 중용의 지극한 공효이라.
詩云 予懷明德의 不大聲以色이라 하야날 子ㅣ曰 聲色之於以化民애 末也ㅣ라 하시니라 詩云德輶如毛ㅣ라 하니 毛猶有倫이어니와 上天之載ㅣ 無聲無臭아 至矣니라
『시경』에 이르기를 “내가 명덕의 소리와 다못(또) 색을 크게 여기지 않음을 생각한다”하거늘, 공자 말씀하시기를 “소리와 빛은 백성을 교화하는데 끝이라” 하시니라. 시경에 이르기를 “덕이 가볍기가 터럭과 같다” 하니 터럭은 오히려 비교할 수 있거니와 상천의 일은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어야만 지극하니라.
以 : 다못 이, 또 이 倫 : 비교 륜 載 : 일 재
[본문 해설]
『시경』「大雅 皇矣篇」에서 “予懷明德의 不大聲以色이라”는 내용을 인용하여 말하고 있다. 대학의 도는 밝은 덕을 밝히는데 있다(大學之道 在明明德)고 하였듯이 사람은 모두 밝은 덕을 갖고 나왔다. 이것이 앞에서 나온 不顯惟德이다. 이 드러나지 않는 덕은 멋진 소리나 화려한 색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기에 시경에서 ‘밝은 덕의 소리와 색을 대단치 않게 여긴다’고 하였다. 공자는 이러한 소리와 빛은 백성을 교화시키는데 지엽말단적인 것이라고 하였다. 덧붙여 시경의 말을 인용하여 덕은 가볍기가 터럭과 같다고 하였다. 만약 덕이 무겁다면 누가 그것을 마음에 품고 있겠는가. 하지만 그러한 터럭조차 물건이라 큰 터럭, 작은 터럭이 있듯이 비교가 된다. 이렇게 비교가 되는 것으로 덕을 나타낼 수가 없다는 말이다.
주역 산천대축괘의 상구효에 보면 “어느 하늘의 거리인고, 형통하니라(上九曰 何天之衢ㅣ오 亨하니라)” 하였고, 그 爻象傳에“何天之衢는 도가 크게 행함이라(象曰 何天之衢는 道ㅣ 大行也ㅣ라)”고 하였다. 주역의 易簡의 법칙이 있을 뿐이다. 하늘은 쉬운 법칙이 있기에 만물을 내고, 땅은 하늘의 쉬운 법칙을 그대로 따르는 간단한 법칙으로 만물을 기르고 있을 뿐이다. 이와 같이 상천의 일은 易簡의 법칙에 따라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이 지극할 뿐인 것이다. 『중용』은 『시경』「文王篇」의 “上天之載 無聲無臭”를 인용하고 이 뒤에 “至矣라(지극하니라)”라는 두 단어만을 덧붙여 끝맺음을 하였다. 하늘의 덕은 지극하기에 더 이상 보탤 말이 없다는 것이다.
詩는 大雅皇矣之篇이니 引之하야 以明上文所謂不顯之德者ㅣ 正以其不大聲與色也ㅣ라 又引孔子之言하야 以爲聲色은 乃化民之末務어늘 今但言不大之已면 則猶有聲色者ㅣ 存하니 是未足以形容不顯之妙라 不若烝民之詩에 所言德輶如毛하니 則庶乎可以形容矣어니와 而又自以爲謂之毛면 則猶有可比者하니 是亦未盡其妙라 不若文王之詩所言上天之事無聲無臭니 然後에 乃爲不顯之至耳라 蓋聲臭는 有氣無形하야 在物에 最爲微妙어늘 而猶曰無之라 故로 惟此에 可以形容不顯篤恭之妙오 非此德之外에 又別有是三等然後에 爲至也ㅣ니라
시는 「대아 황의편」이니 이것을 인용하여 써 윗글에 이른바 드러나지 않는 덕을 정히 써 소리와 색을 크게 여기지 않음을 밝혔느니라. 또 공자의 말씀을 인용하여 소리와 색은 백성을 교화시키는데 끄트머리에 힘써야 하는 일이거늘, 이제 다만 크게 여기지 않게 여긴다고 말했을 뿐이라면, 이것은 오히려 소리와 색이 남아 있는 것이니 드러나지 않는 묘함을 형용하기에 충분하지 못함이라. 『시경』「증민」시에 말한 바 ‘덕은 가볍기가 터럭과 같다’라고 한 것만도 못하니 즉 거의 가히 써 형용이 되었으되 또 스스로 이르기를 터럭이라고 하면 오히려 가히 비교가 되니 이 또한 그(불현지덕) 묘함을 다하지 못한 것이리라. 「문왕시」에 말한 바 ‘상천의 일은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다’고 한 것만 못하니, 그렇게 한 후에야 드러나지 않음의 지극함이 될 뿐이라. 대개 소리와 냄새는 기운만 있고 형체가 없어서, 물건에 있어 가장 미묘한 것임에도 오히려 없다고 말한 것과 같으니라. 그러므로 오직 이것은 가히 써 드러나지 않은 공순함을 돈독히 한다는 묘함을 형용함이오, 이 덕의 밖에 또 별도로 이 세 가지 등수(성색→ 터럭→무색무취)가 있은 연후에 지극함이 된다고 함이 아니니라.
右는 第三十三章이라
子思ㅣ 因前章極致之言하야 反求其本하야 復自下學爲己謹獨之事로 推而言之하야 以馴致乎篤恭而天下平之盛하시고 又贊其妙하야 至於無聲無臭以後에 已焉하시니 蓋擧一篇之要而約言之하야 其反復丁寧示人之意가 至深切矣시니 學者ㅣ 其可不盡心乎아
자사가 앞 장 극치의 말을 인해서, 돌이켜 그 근본을 구하게 하여 다시 하학(초학)이 자기 몸을 위한 근독의 일로부터 미루어 말해서 써 공순함을 돈독히 해서 천하가 평해지는 성한 데까지 길들여 이루게 하시고, 또 그 묘함을 찬양하여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은 뒤에 끝나는 데 이르게 하시니, 대개 한 편(제33장)의 요점을 들어 간략하게 말씀하시어 그 반복하고 정녕하여 사람에게 보여주신 뜻이 지극히 깊고 절실하시니, 배우는 자가 그 가히 마음을 다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앞주 해설]
이상으로 『중용』은 마지막 제33장에 시경 8편의 시를 인용하여 지극한 정성의 의미를 마무리하고 있다. 그 지극한 정성의 덕은 드러나지 않아 소리나 빛, 터럭으로도 비교할 수 없는 무색무취의 지극함만이 있을 뿐인 것이다. 지극한 정성은 신과 같다(至誠如神). 그러하므로 사람이 항상 지극한 정성으로 임한다면 신이 감격하여 이르니 하늘이 감동한다는 것(至誠感天)이 자사가 『중용』을 통해 우리들에게 가르치려는 요체일 것이다. 따라서 배우는 우리들은 그 마음을 다하여 中庸의 道를 배워야 할 것이다.
『中庸』강의록을 마치며
『中庸』강의록을 마치며
작년 12월 말부터 쓰기 시작한 『中庸』강의록을 약 5개월 남짓한 기간에 걸쳐 모두 마쳤습니다. 이 강의록은 명문당판(1992년 重版本) 原本備旨 『中庸』과 大山 金碩鎭 선생님이 1998년 8월부터 11월까지 홍역학회(사단법인 동방문화진흥회 전신)에서 진행한 강의 녹취 테이프 16개를 꼼꼼히 듣고 풀어가며 정리한 글입니다.
다행히도 그 사이에 수산 신성수(秀山申性秀) 선생이 대산 선생님의 강의 테이프를 충실히 풀이해 기록하고 다른 경전의 원문을 그대로 인용해 해설한 『대산 중용 강의』(한길사, 2004년)를 만나게 되어 제 작업은 훨씬 수월했습니다. 풀이글이 간혹 매우 구어체적이거나 지금은 잘 쓰지 않는 옛말(예를 들면 ‘또’라는 뜻의 ‘다못’)을 그대로 쓰고, 주자의 해설과 관련해 토가 다른 이유는 대산 선생님의 말씀을 우선적으로 앞세웠기 때문입니다. 특히 대산 선생님의 쓰시는 옛말은 지금 거의 없어져가지만 잃어버리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말인지라 되도록이면 그대로 살려놓았습니다. 다만 내용이 부실하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제 불찰일 뿐입니다. 대산 선생님은 하나하나 상세히 풀이해주셨지만 저는 글을 읽는 이들이 미루어 짐작하라고 대충 넘어간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더욱이 제 생활이 다소 바쁘다는 핑계로 강의록을 훨씬 더 일찍 끝낼 수도 있었지만 그러하지 못했고, 때론 충실한 해설이 뒷받침되지 못하고 어설프게 넘어간 부분도 꽤나 있을 것입니다. 구의원으로서, 초등학생과 이제 고등학교에 막 입학한 자녀를 둔 어머니로서, 생활인으로서, 그리고 한문강사로서, 답사 안내자로서 활동하다보니 바쁜 틈을 쪼개가며 강의록을 작성하는 것이 그리 만만한 작업이 아니었음도 아울러 고백합니다. 이러한 고백은 실은 ‘충실하지 못한 강의록’에 대해 여러분의 용서를 구하는 변명이기에 너그러움 마음으로 받아들여주셨으면 합니다. 부족한 부분은 별도의 현장 강의(상계5동 주민자치센타 매주 목요일 2시 강의)를 진행해가며 그때그때 보충해 나가고 교정해나가도록 할 것입니다.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점은 『中庸』강의록를 정리하는 동안 항상 자신의 생활을 되돌아보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사욕이 일어나거나 남을 미워하거나 하는 마음이 들 때면 전후좌우를 살피게 되고, 되도록이면 중용의 도를 지켜나가야지 하는 마음이 구름처럼 일어난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 ‘謹獨’하게 되고, 매사 정성스러운 마음이 되려고 항상 조심하게 된다는 점입니다. 이러하기에 아마도 옛날 성현들이 『中庸』공부에 더욱 매진했던 것 같습니다. 날로 각박(刻薄)해지는 현실 속에서 『中庸』를 공부하라면 ‘웬 공자왈 맹자왈?’ 하면서 씨도 안 먹힐 답변이 돌아오기 십상일 것입니다. 하지만 각박한 현실이기에 더욱 중용의 도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中庸』의 가르침은 오직 ‘정성 성(誠)’ 하나입니다. 지성이면 감천(至誠感天)이라고 우리가 하는 매사 일마다 지극한 정성이면 아니 될 일이 없을 것이고, 불선(不善)한 일들이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자, 하늘을 한번 우러러 쳐다보면서 광막한 하늘의 도를 한번 생각해봅시다. 감모여재(感慕如在)란 말이 있습니다. 佛家의 말입니다. 부처님을 친견하고 싶은 지극한 소망에서 일심으로 생각하면 그윽한 경지에 도달했을 때 그 분의 모습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어떤 모습일지는 각자가 지향하는 바에 따라 다른 모습일 것입니다. 우리의 지극한 정성이면 우리 모두의 마음이 하늘을 닮아 원만(圓滿)해지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