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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자 [朱子, 1130.10.18~1200]

굴어당 2012. 1. 10. 10:43

 

 

중국 송대의 유학자. 주자학을 집대성하였다. 그는 우주가 형이상학적인 '이()'와 형이하학적인 '기()'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았다. 인간에게는 선한 '이'가 본성으로 나타난다고 하였다. 그러나 불순한 '기' 때문에 악하게 되며 '격물'()'로 이 불순함을 제거할 수 있다고 하였다.

원회·중회
회암·회옹·운곡산인·창주병수·둔옹
본명
국적 중국 송
활동분야 문학
출생지 중국 푸젠성 우계
주요저서 《사서집주》
본문

자 원회()·중회(). 호 회암()·회옹()·운곡산인(창주병수(叟)·둔옹(). 이름 희(). 푸젠성[] 우계() 출생. 선조는 대대로 휘주무원(:)의 호족으로 아버지 위재()는 관직에 있다가 당시의 재상() 진회()와의 의견충돌로 퇴직하고 우계에 우거()하였다. 주자는 이곳에서 14세 때 아버지가 죽자 그 유명()에 따라 호적계()·유백수()·유병산()에게 사사하면서 불교와 노자의 학문에도 흥미를 가졌으나, 24세 때 이연평()을 만나 사숙()하면서 유학에 복귀하여 그의 정통을 계승하게 되었다.

그의 강우()로는 장남헌(여동래()가 있으며, 또 논적()으로는 육상산()이 있어 이들과 상호 절차탁마()하면서 주자의 학문은 비약적으로 발전 심화하여 중국사상사상 공전()의 사변철학()과 실천윤리()의 체계를 확립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19세에 진사시에 급제하여 71세에 생애를 마칠 때까지 여러 관직을 거쳤으나, 약 9년 정도만 현직에 근무하였을 뿐, 그 밖의 관직은 학자에 대한 일종의 예우로서 반드시 현지에 부임할 필요가 없는 명목상의 관직이었기 때문에 학문에 전념할 수 있었다.

그의 학문을 저서를 통해서 관찰해 보면 46세까지를 전기, 이후 60세까지를 중기, 61세 이후를 후기로 하는 3기()로 대별할 수 있다. 주자연보()에 의해 전기 저서를 순차적으로 열거하면 《논어요의()》 《논어훈몽구의()》 《곤학공문편()》 《정씨유서()》 《논맹정의()》 《자치통감강목()》 《팔조명신언행록()》 《서명해의(西)》 《태극도설해()》 《통서해()》 《정씨외서()》 《이락연원록()》 《고금가제례()》로 이어져 《근사록()》의 편차()로 끝맺었다. 이 전기는 북송의 선유()인 주염계(장횡거()·정명도(정이천()의 저서교정과 주례에 전념하고, '논어·맹자' 등은 차기()의 예비사업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즉, 주자의 학문적 기초가 확립된 시기로서 그것이 《근사록》에 집약된 것으로 보인다. 그후에 논적이었던 육상산 형제와의 아호사() 강론에서 존덕성()에 대해 도학()의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중기에는 《논맹집주혹문()》 《시집전()》 《주역본의()》 《역학계몽()》 《효경간오()》 《소학서()》 《대학장구()》 《중용장구()》 등이 있으나 가장 중요한 것은 '사서()의 신주()'가 완성된 점이다.

60세 때는 《중용장구》에 서문을 붙여 상고()에서 후대까지 도학을 전한 성현()의 계통을 밝혀 도학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후기에는 오경()에 손을 대어 《석존예의()》 《맹자요로()》 《예서(:)》 《한문고이()》 《서전()》 《초사집주후어변증()》 등이 있다. 더욱이 71세로 생애를 마치던 해 3월, 《대학》의 '성의장()'을 개정()한 점으로 미루어 그의 《사서집주()》에 대한 지정()이 어느 정도이었는지 엿볼 수 있다.

주자의 정치에 대한 의견은 〈임오응조봉사()〉나 〈무신봉사()〉에 나타나 있으며 또 절동()의 지방관으로 있을 때 대기근()을 구제하였다는 실적도 있으나 만년에는 권신의 미움을 사 그의 학문이 위학()이라 하여 많은 박해를 받았으며, 해금()이 있기 전에 죽었다. 그후 그의 학문이 인정되어 시호가 내리고 다시 태사()·휘국공()이 추증()되었다. 그의 유언을 수록한 것으로는 주자의 막내아들 주재()가 편찬한 《주문공문집()》(100권, 속집 11권, 별집 10권)이 있고, 문인과의 평생문답을 수록한 여정덕() 편찬의 《주자어류()》 140권이 있다. 

[출처] 주자 [朱子 ] | 네이버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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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朱熹, 1130~1200)는 중국 남송의 유학자로, 주자(朱子)라는 존칭으로도 불린다. 성(姓)은 주(朱), 휘(諱)는 희(熹)이며, 자(字)는 원회(元晦) · 중회(仲晦)이다. 그리고, 호(号)는 회암(晦庵) · 회옹(晦翁) · 운곡노인(雲谷老人) · 창주병수(滄洲病叟) · 둔옹(遯翁)이다. 중국 복건성(福建省) 우계(尤溪)에서 출생했으며 19세에 진사가 된 후 여러 관직을 지내면서 맹자 · 공자 등의 학문에 전념하였으며 주돈이 · 정호 · 정이 등의 사상을 이어받았다. 그는 유학을 집대성하였으며 '오경'의 진의를 밝히고 '주자학'을 창시하여 완성시켰다.

주희는 주렴계, 정주로 대표되는 이전 송학의 흐름을 이어받아 이를 집대성하고 종래 유교가 불,도에 비해 사상적인 약점이었던 이론적 결여를 보완하는 우주론적, 인간론적 형이상학을 수립하게 된다. 이로써 한당의 훈고학적인 한계에서 벗어나 윤리학으로서의 본래성을 되찾는 한편 그것을 우주론적인 체계 속에 자리잡게 하고자 했다.

이후 주자의 철학은 20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동아시아를 지배하는 주도 이념으로 자리잡는다.

목차

 [숨기기

[편집] 사상

주희

[편집] 이기이원론과 태극도설

우주만물을 형이상학적인 이(理)와 형이하학적인 기(氣)로서 구성되어있다고 보고, 인간의 본성은 선한 이가 발하여 나타나는 것이나 불순한 기로 인하여 악하게 되는 것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이와 기로 이뤄진 우주와 만물이 생성되고 움직이는 운동법칙, 원리로서 태극을 제시한다.

이상의 개념들을 통해 주자는 주렴계(周濂溪)의 태극도설(太極圖說), 정이(程頤)의 성즉리,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에서 강한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주자는 동시에 젊은 시절 탐독했던 불교와 도교의 사상에서 받았던 영향에서 착안하여 유학의 사상적 이학적 내용을 풍성하게 하는 것에 기여했다.

[편집] 저서

[편집] 주자문집

주자문집(朱子文集)은 주희(朱憙)가 쓴 문장(文章)을 집록(集錄)한 100권의 서(書)이다. 여기에 수록된 주자의 글은 실로 다종다양하다. 특히 그의 상주문(上奏文) · 사면문(辭免文) · 기(記) · 공이(公移) 등등은 주자의 구체적인 정치활동이나 정치사상을 아는 데 지극히 중요한 자료이다. 또 서간문(書簡文) · 잡저(雜著) · 기(記) 등은 주자의 학문사상을 아는 데 있어 《어류(語類)》와 함께 필독해야 할 부분이다. 기타 이 문집(文集) 100권은 별집(別集) · 속집(續集)을 합하여 주자의 사상이나 역사적 성격을 전체적으로 규정하는 점에서 필요 불가결한 자료이나, 종래 주자를 논하는 사람 가운데서 문집을 자세히 읽은 사람은 거의 없다. 주자 연구에 있어서 새로운 설이나 해석을 제공할 수 있는 자료적 보고(寶庫)라 해도 무방하다.

[편집] 사서집주

오경(五經) 뿐만 아니라 사서(四書)를 존중하고 유학의 핵심 경전으로 삼고자 했다. 이에 사서집주(四書集注)를 저술하였고 이후에 유교의 기본 경전으로서 귄위를 부여받게 된다.

[편집] 관련 항목

[편집] 바깥고리

[편집] 참고 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