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종원집 1,2,3,4.유종원 저/오수형,이석형,홍승직 공역 | 소명출판
당(唐) 유종원(柳宗元, 773~819)의 시문을 모두 모은 책으로, 저자의 절친한 친구이자 시인인 유우석(劉禹錫)에 의해 처음 정리된 이래 긴 기간을 지나며 여러 사람들에 의해 잘 편집 정리되었다. 유종원은 당시의 대문장가 한유(韓愈)와 함께 이른바 고문운동에 앞장서, 당시의 유미주의적인 문풍에 반대하여 자유로운 형식의 새로운 글쓰기에 힘썼다. 그리하여 산문의 새로운 영역 확대는 물론 높은 예술적 경지를 개척하였다. 그중에서도 심각한 풍자의 우언(寓言)이나 경물과 서정을 융화시킨 산수유기(山水遊記)는 중국문학사에서 독보적인 위상을 차지한다. 그밖에도 탁월한 견식에 의한 날카로운 의론문이나 주목받지 못하던 미미한 존재를 주인공으로 하는 전기문 등 역시 그 우수성이 높이 인정된다. 또한 그는 시가의 영역에서도 이전의 전통을 계승하는 동시에 독특한 풍격을 지닌 우미한 작품을 다수 남겨 드물게 보는 시문(詩文)에 두루 뛰어난 문인으로 이름을 남겼다. 이 책은 바로 그의 다양한 형식의 문학 창작과 진보적 사상을 엿볼 수 있는 풍부한 자료로서 손색이 없을 것이다.
제1권 아시가곡(雅詩歌曲)
제2권 고부(古賦)
제3권 논(論)
제4권 의변(議辯)
제5권 비(碑)
제6권 석교비(釋敎碑)
제7권 비명(碑銘)
제8권 행장(行狀)
제9권 표명갈뢰(表銘碣?)
제10권 지(誌)
제11권 지갈뢰(誌碣?)
제12권 표지(表誌)
제13권 지(誌)
『유종원집』은 당(唐) 유종원(柳宗元, 773~819)의 시문을 모두 모은 책으로, 저자의 절친한 친구이자 시인인 유우석(劉禹錫)에 의해 처음 정리된 이래 긴 기간을 지나며 여러 사람들에 의해 잘 편집 정리되었다. 본 번역서의 저본인 중국 중화서국의 『유종원집』은 교감이 거의 완전하며 풍부한 자료를 부록하고 있다.
유종원은 자가 자후(子厚)이며, 유주(柳州)의 자사를 지낸 탓에 유유주(柳柳州)라고, 또 조적(祖籍)이 하동(河東)인 까닭에 유하동(柳河東)이라고도 불린다. 그는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사람으로 중국의 대표적인 문장가일 뿐만 아니라 각종 형식의 운문 영역에서도 뛰어난 성과를 올린 시인이다. 그러나 그의 일생은 비교적 불우하였다. 비록 21세에 일찍 진사과에 급제하여 관리가 되었으나, 그가 참여한 혁신적 정치집단이 몰락함에 따라 이상을 실현할 기회를 제대로 갖지 못하였다. 벽지인 영주(永州)로 쫓겨나 10년을 지내고, 다시 유주(柳州)에서 4년을 지내다 결국 47세의 한창 나이로 임지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벽지로 쫓겨난 이래 학문과 창작에 힘써 그로써 높은 평가를 얻으며 후대에 불후의 이름을 남겼다.
유종원은 당시의 대문장가 한유(韓愈)와 함께 이른바 고문운동에 앞장서, 당시의 유미주의적인 문풍에 반대하여 자유로운 형식의 새로운 글쓰기에 힘썼다. 그리하여 산문의 새로운 영역 확대는 물론 높은 예술적 경지를 개척하였다. 그중에서도 심각한 풍자의 우언(寓言)이나 경물과 서정을 융화시킨 산수유기(山水遊記)는 중국문학사에서 독보적인 위상을 차지한다. 그밖에도 탁월한 견식에 의한 날카로운 의론문이나 주목받지 못하던 미미한 존재를 주인공으로 하는 전기문 등 역시 그 우수성이 높이 인정된다. 또한 그는 시가의 영역에서도 이전의 전통을 계승하는 동시에 독특한 풍격을 지닌 우미한 작품을 다수 남겨 드물게 보는 시문(詩文)에 두루 뛰어난 문인으로 이름을 남겼다.
유종원은 봉건주의 시대를 산 문인으로는 드물게 보는 진보적이고 과학적인 사유의 소유자였다. 그는 하늘과 인간의 영역을 분리함으로써 절대 왕권을 부정하고 민주정신을 제창하는가 하면, 유가(儒家)를 기반으로 하면서도 불가(佛家)?도가(道家)?법가(法家) 등의 사상도 두루 수용하는 사상적 포용성을 지녔다. 이른바 신중국 성립 이후의 그에 대한 평가가 이전의 수준을 훨씬 뛰어넘을 수 있었던...『유종원집』은 당(唐) 유종원(柳宗元, 773~819)의 시문을 모두 모은 책으로, 저자의 절친한 친구이자 시인인 유우석(劉禹錫)에 의해 처음 정리된 이래 긴 기간을 지나며 여러 사람들에 의해 잘 편집 정리되었다. 본 번역서의 저본인 중국 중화서국의 『유종원집』은 교감이 거의 완전하며 풍부한 자료를 부록하고 있다.
유종원은 자가 자후(子厚)이며, 유주(柳州)의 자사를 지낸 탓에 유유주(柳柳州)라고, 또 조적(祖籍)이 하동(河東)인 까닭에 유하동(柳河東)이라고도 불린다. 그는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사람으로 중국의 대표적인 문장가일 뿐만 아니라 각종 형식의 운문 영역에서도 뛰어난 성과를 올린 시인이다. 그러나 그의 일생은 비교적 불우하였다. 비록 21세에 일찍 진사과에 급제하여 관리가 되었으나, 그가 참여한 혁신적 정치집단이 몰락함에 따라 이상을 실현할 기회를 제대로 갖지 못하였다. 벽지인 영주(永州)로 쫓겨나 10년을 지내고, 다시 유주(柳州)에서 4년을 지내다 결국 47세의 한창 나이로 임지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벽지로 쫓겨난 이래 학문과 창작에 힘써 그로써 높은 평가를 얻으며 후대에 불후의 이름을 남겼다.
유종원은 당시의 대문장가 한유(韓愈)와 함께 이른바 고문운동에 앞장서, 당시의 유미주의적인 문풍에 반대하여 자유로운 형식의 새로운 글쓰기에 힘썼다. 그리하여 산문의 새로운 영역 확대는 물론 높은 예술적 경지를 개척하였다. 그중에서도 심각한 풍자의 우언(寓言)이나 경물과 서정을 융화시킨 산수유기(山水遊記)는 중국문학사에서 독보적인 위상을 차지한다. 그밖에도 탁월한 견식에 의한 날카로운 의론문이나 주목받지 못하던 미미한 존재를 주인공으로 하는 전기문 등 역시 그 우수성이 높이 인정된다. 또한 그는 시가의 영역에서도 이전의 전통을 계승하는 동시에 독특한 풍격을 지닌 우미한 작품을 다수 남겨 드물게 보는 시문(詩文)에 두루 뛰어난 문인으로 이름을 남겼다.
유종원은 봉건주의 시대를 산 문인으로는 드물게 보는 진보적이고 과학적인 사유의 소유자였다. 그는 하늘과 인간의 영역을 분리함으로써 절대 왕권을 부정하고 민주정신을 제창하는가 하면, 유가(儒家)를 기반으로 하면서도 불가(佛家)?도가(道家)?법가(法家) 등의 사상도 두루 수용하는 사상적 포용성을 지녔다. 이른바 신중국 성립 이후의 그에 대한 평가가 이전의 수준을 훨씬 뛰어넘을 수 있었던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유종원은 유가 부흥에 크게 공헌한 대문장가 한유에 비해 역대로 통치계층에 의해 상대적으로 덜 주목을 받아왔다. 그것은 그의 사상적 경향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문집과 새로 편집한 선집이 여전히 조선에서 적잖이 유통되며 정통 고문으로서 많은 영향을 미쳤다. 본 『유종원집』은 바로 그의 다양한 형식의 문학 창작과 진보적 사상을 엿볼 수 있는 풍부한 자료로서 손색이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