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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조건>작성자: 임보
굴어당
2012. 2. 10. 08:03
작성자: 임보
<시의 조건>
시를 공부하는 사람들이 가끔 자신이 쓴 글을 내보이며 시가 되었느냐고 물어오는 경우가 있다. 그들은 물론 시가 되었다는, 기왕이면 시가 아주 썩 잘 되었다는 대답을 듣고 싶어 하리라. 그러나 그들의 기대와는 달리 나 역시 시와 시 아닌 글을 시원하게 구분할 수 없으니 난감하기는 마찬가지다.
과거의 정형시는 시가 갖추어야 할 조건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시와 시 아닌 글을 구분하기가 어렵지 않았다. 즉 시행(詩行)이나 압운(押韻) 등 정해진 조건들을 못 갖춘 글은 시가 아니라는 객관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었다. 그런데 오늘의 자유시는 아무런 규제도 따르지 않으므로 시와 비시의 한계가 모호해지고 말았다. 그러니 시인이 시라는 이름으로 발표한 글이면 시라고 불러주어야만 하는 곤경에 이른 셈이다.
정말 시는 아무렇게나 써도 되는 자유방임의 글인가?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시는 원래 글 가운데서도 가장 정련(精練)된 글이 아니던가. 시는 글 중의 진수(眞髓)며, 문학 중의 귀족이라 할 수 있다.
자유시가 생겨난 원래 의도는 정형시가 지니고 있는 틀의 한계성을 극복하자는 데 뜻이 있었던 것이지 시의 산문화나 시의 저속화를 지향하자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그런데 형식으로부터 자유롭고자 했던 그 자유의지가 드디어는 시의 본질마저 허물어 가는 쪽으로 변질되어 가고 있음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정해진 압운의 틀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던 것이 이젠 운율 자체를 무시하려는 경향으로까지 변질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어떤 시는 정련된 글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조잡(粗雜)을 지향하는 글처럼 보이기도 한다.
세상의 모든 것이 변해 가는 마당에 시라고 변하지 말라는 법이 있는가? 시도 변하는 대로 허용하는 것이 순리가 아니겠는가? 라고 말하는 분들도 있으리라. 과히 틀린 생각은 아니다. 그러나 흘러가는 모든 세태가 반드시 최상, 최선의 것이라고 긍정할 수만은 없다. 잘못 흘러가는 것이라면 바로잡도록 해야 할 것이 아닌가. 우리는 흐르는 강물 줄기를 돌려 광야를 옥토로 바꾸는 역사(役事)를 수없이 보아 왔다. 관망과 방치만이 능사는 아니다. 흐르는 물줄기가 잘못 되었으면 뚝을 쌓아 막기도 하고, 새로운 물길을 트기도 해야 한다.
날로 새롭게 변해가는 의상(衣裳) 문화를 보면서 경탄을 금치 못한다. 좋은 의상을 만들기 위해 새로운 천을 개발하고 새로운 디자인을 통해 아름다운 의상을 만들어 내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문제는 그 새로운 시도들이 ‘의상의 본질’을 넘어선 것이어서는 곤란하다. 말하자면 의상의 본질이 ‘신체의 보호’라고 한다면, 설령 아무리 아름다운 의상이 만들어졌다 손치더라도 그것이 신체에 유해한 천으로 만들어졌다면 이는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다. 어떤 기발한 시도라 할지라도 ‘본질’을 벗어난 것이면 무용한 것이다.
시의 본질은 무엇일까? 시를 다른 글들과는 달리 시답게 하는 본질은 무엇인가? 사람에 따라 견해의 차이가 없지 않겠지만 나는 다음의 네 가지― 창조성, 유미성, 압축성, 감동성을 시의 본질로 상정(想定)한다.
첫째, 창조성은 모든 예술작품이 지니고 있는 공통된 특질이다. 시는 느낌과 생각을 적은 글인데 그 느낌이나 생각, 그리고 표현의 기법이 독창적인 것이어야 한다. 내용과 형식이 다 독창적이라면 더 바랄 나위 없겠지만 적어도 어느 하나만이라도 창의적이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창작물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 유미성이 요구된다. 이 역시 창조성과 마찬가지로 예술일반이 지니고 있는 공통된 특질이다. 시가 예술 작품이기를 바란다면 ‘아름다움’을 떠나서는 곤란하다. 원래 예술이란 아름다움을 창조해 내는 활동이기 때문이다. 요즈음 아름답지 않은 예술도 있지 않느냐고 반문할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은 전통에 대한 의도적인 반발로 잠시 시도된 것에 불과한 것이다. 본질에 어긋난 것은 긴 생명력을 가질 수 없다.
셋째, 압축성의 문제다. 이는 시가 산문으로부터 구분되는 중요한 특질이다. 분량이 우선 산문처럼 방대하지 않고 간결하다. 분행 배열하는 것도 압축적 표현의 한 형식으로 설명할 수 있으리라. 상징이며 은유, 역설 등 다양한 수사적 기법들도 결국 압축성을 지향한 표현으로 해석할 수 있다. 짧은 산문이 시일 수는 없다. 시는 비록 짧은 분량의 글이지만 그 안에 적지 않은 오묘한 뜻을 품고 있는 의미의 결정체라야 한다. 산문이 ‘무우’라면 시는 ‘인삼’에 비유할 수 있을 것도 같다.
넷째, 감동성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감동성’이란 작품과 향수자와의 관계를 한정하는 말이다. 다른 예술작품들도 마찬가지지만 시가 존재의 의미를 지니려면 이 세상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키는데 기여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시가 윤리적인 가치를 지녀야 한다거나 사회를 계도해야 한다거나 하는 효용론적 문학관에 서 있지는 않지만, 적어도 시가 세상을 어지럽히는 글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다. 아니, 시는 읽는 이의 마음을 위무하기도 하고, 기쁨을 주기도 하고, 때로는 용기를 갖게 하는 글이어야 한다. 감동성을 지닌 글이 아니면 세상에 존재할 아무런 의미가 없다.
시의 이름으로 불리는 글이 되려면 적어도 앞에 제시한 4가지 요소를 구비하고 있어야 한다. 만일 이 네 가지 요소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등한시했다면 이는 시의 자격을 갖춘 글이라고 할 수 없다. 시의 본질을 형성하는 이 네 가지 요소를 잃지 않는 것, 이것이 시의 조건이다. 이 조건들을 기준으로 따져본다면, 자신이 쓴 글이 시에 가까운가, 그렇지 못한가를 판별하는 일이 그렇게 어렵지만은 않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는, 긴 생명을 지닌 명시를 남기고자 하는 이들은 앞의 4가지 조건뿐만 아니라 감미로운 운율과 고매한 시정신까지를 그의 작품 속에 담는 데 게을리 하지 않는다.
시를 공부하는 사람들이 가끔 자신이 쓴 글을 내보이며 시가 되었느냐고 물어오는 경우가 있다. 그들은 물론 시가 되었다는, 기왕이면 시가 아주 썩 잘 되었다는 대답을 듣고 싶어 하리라. 그러나 그들의 기대와는 달리 나 역시 시와 시 아닌 글을 시원하게 구분할 수 없으니 난감하기는 마찬가지다.
과거의 정형시는 시가 갖추어야 할 조건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시와 시 아닌 글을 구분하기가 어렵지 않았다. 즉 시행(詩行)이나 압운(押韻) 등 정해진 조건들을 못 갖춘 글은 시가 아니라는 객관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었다. 그런데 오늘의 자유시는 아무런 규제도 따르지 않으므로 시와 비시의 한계가 모호해지고 말았다. 그러니 시인이 시라는 이름으로 발표한 글이면 시라고 불러주어야만 하는 곤경에 이른 셈이다.
정말 시는 아무렇게나 써도 되는 자유방임의 글인가?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시는 원래 글 가운데서도 가장 정련(精練)된 글이 아니던가. 시는 글 중의 진수(眞髓)며, 문학 중의 귀족이라 할 수 있다.
자유시가 생겨난 원래 의도는 정형시가 지니고 있는 틀의 한계성을 극복하자는 데 뜻이 있었던 것이지 시의 산문화나 시의 저속화를 지향하자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그런데 형식으로부터 자유롭고자 했던 그 자유의지가 드디어는 시의 본질마저 허물어 가는 쪽으로 변질되어 가고 있음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정해진 압운의 틀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던 것이 이젠 운율 자체를 무시하려는 경향으로까지 변질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어떤 시는 정련된 글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조잡(粗雜)을 지향하는 글처럼 보이기도 한다.
세상의 모든 것이 변해 가는 마당에 시라고 변하지 말라는 법이 있는가? 시도 변하는 대로 허용하는 것이 순리가 아니겠는가? 라고 말하는 분들도 있으리라. 과히 틀린 생각은 아니다. 그러나 흘러가는 모든 세태가 반드시 최상, 최선의 것이라고 긍정할 수만은 없다. 잘못 흘러가는 것이라면 바로잡도록 해야 할 것이 아닌가. 우리는 흐르는 강물 줄기를 돌려 광야를 옥토로 바꾸는 역사(役事)를 수없이 보아 왔다. 관망과 방치만이 능사는 아니다. 흐르는 물줄기가 잘못 되었으면 뚝을 쌓아 막기도 하고, 새로운 물길을 트기도 해야 한다.
날로 새롭게 변해가는 의상(衣裳) 문화를 보면서 경탄을 금치 못한다. 좋은 의상을 만들기 위해 새로운 천을 개발하고 새로운 디자인을 통해 아름다운 의상을 만들어 내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문제는 그 새로운 시도들이 ‘의상의 본질’을 넘어선 것이어서는 곤란하다. 말하자면 의상의 본질이 ‘신체의 보호’라고 한다면, 설령 아무리 아름다운 의상이 만들어졌다 손치더라도 그것이 신체에 유해한 천으로 만들어졌다면 이는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다. 어떤 기발한 시도라 할지라도 ‘본질’을 벗어난 것이면 무용한 것이다.
시의 본질은 무엇일까? 시를 다른 글들과는 달리 시답게 하는 본질은 무엇인가? 사람에 따라 견해의 차이가 없지 않겠지만 나는 다음의 네 가지― 창조성, 유미성, 압축성, 감동성을 시의 본질로 상정(想定)한다.
첫째, 창조성은 모든 예술작품이 지니고 있는 공통된 특질이다. 시는 느낌과 생각을 적은 글인데 그 느낌이나 생각, 그리고 표현의 기법이 독창적인 것이어야 한다. 내용과 형식이 다 독창적이라면 더 바랄 나위 없겠지만 적어도 어느 하나만이라도 창의적이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창작물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 유미성이 요구된다. 이 역시 창조성과 마찬가지로 예술일반이 지니고 있는 공통된 특질이다. 시가 예술 작품이기를 바란다면 ‘아름다움’을 떠나서는 곤란하다. 원래 예술이란 아름다움을 창조해 내는 활동이기 때문이다. 요즈음 아름답지 않은 예술도 있지 않느냐고 반문할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은 전통에 대한 의도적인 반발로 잠시 시도된 것에 불과한 것이다. 본질에 어긋난 것은 긴 생명력을 가질 수 없다.
셋째, 압축성의 문제다. 이는 시가 산문으로부터 구분되는 중요한 특질이다. 분량이 우선 산문처럼 방대하지 않고 간결하다. 분행 배열하는 것도 압축적 표현의 한 형식으로 설명할 수 있으리라. 상징이며 은유, 역설 등 다양한 수사적 기법들도 결국 압축성을 지향한 표현으로 해석할 수 있다. 짧은 산문이 시일 수는 없다. 시는 비록 짧은 분량의 글이지만 그 안에 적지 않은 오묘한 뜻을 품고 있는 의미의 결정체라야 한다. 산문이 ‘무우’라면 시는 ‘인삼’에 비유할 수 있을 것도 같다.
넷째, 감동성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감동성’이란 작품과 향수자와의 관계를 한정하는 말이다. 다른 예술작품들도 마찬가지지만 시가 존재의 의미를 지니려면 이 세상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키는데 기여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시가 윤리적인 가치를 지녀야 한다거나 사회를 계도해야 한다거나 하는 효용론적 문학관에 서 있지는 않지만, 적어도 시가 세상을 어지럽히는 글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다. 아니, 시는 읽는 이의 마음을 위무하기도 하고, 기쁨을 주기도 하고, 때로는 용기를 갖게 하는 글이어야 한다. 감동성을 지닌 글이 아니면 세상에 존재할 아무런 의미가 없다.
시의 이름으로 불리는 글이 되려면 적어도 앞에 제시한 4가지 요소를 구비하고 있어야 한다. 만일 이 네 가지 요소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등한시했다면 이는 시의 자격을 갖춘 글이라고 할 수 없다. 시의 본질을 형성하는 이 네 가지 요소를 잃지 않는 것, 이것이 시의 조건이다. 이 조건들을 기준으로 따져본다면, 자신이 쓴 글이 시에 가까운가, 그렇지 못한가를 판별하는 일이 그렇게 어렵지만은 않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는, 긴 생명을 지닌 명시를 남기고자 하는 이들은 앞의 4가지 조건뿐만 아니라 감미로운 운율과 고매한 시정신까지를 그의 작품 속에 담는 데 게을리 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