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제 : 孟子評傳-走向內聖之境,양구오롱 지음 ,이영섭 옮김 ,미다스북스
- 역자
- 이영섭 옮김 역자평점 0.0
- 출판사
- 미다스북스 | 2002.08.14
- 형태
- 판형 B4 | 페이지 수 316 | ISBN
원제 : 孟子評傳-走向內聖之境
ISBN 10-8989548128
ISBN 13-9788989548126 - 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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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독
혼돈의 시대에 이상사회를 추구한 실천적 지식인 맹자. 적극적인 이론의 수립과 논쟁을 통해 맹자는 공자가 창시한 유학 전통을 이어갈 수 있었고 더 나아가 '현학'의 자리를 지켜냈다. 공자의 사상을 계승하면서 동시에 원시 유학에 여러 방면의 확대와 발전을 이루고 그것을 더욱 체계화시킨 맹자의 학설을 그의 언행을 통해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목차
서문 ...7
공자의 후계자 ...15
천인 관계론의 가치와 내용 ...55
주체의 자유와 천명의 대립 ...77
이성 원칙의 재건과 강화 ...99
개인과 집단의 관계론 ...123
의리론 ...147
임기응변의 중시와 독단화 경향 ...177
현실과 이상:복고 지향 ...197
인격의 경지 ...213
완전한 인간의 길 ...237
역사 속의 맹자 ...267
번역시 참고한 책 ...315
- 그의 인물과 사상, 삶에 대한 입체적인 묘사
대통일의 전야前夜라는 전환기 시대적 특징을 통찰한 뛰어난 역사적 감각의 소유자
전국시대는 군웅들이 각축을 벌이는 단계로 들어선다. 크고 작은 전쟁이 끊이지 않았으며 엄청난 사회적 파괴가 이루어졌다. 전체적으로 보면, 당시 각 나라는 노예제에서 봉건제로 넘어가는 과정에 있었다. 시대의 주류는 이미 생산방식의 변화를 배경으로 영토분할 전쟁을 끝내고 천하의 안정을 실현하는 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명민한 철학자 맹자는 이를 인식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양나라 양왕이 맹자에게 "천하가 어떻게 되어야만 안정될까요?"라고 묻자, 맹자는 이렇게 대답한다. "천하는 통일되어야 비로소 안정될 것입니다." 그리고 100년 후 진시황에 의해 천하는 통일되었다.
이러한 역사 의식을 전제로 맹자는 인정仁政이라는 구상을 내놓고, 인정을 온 세상에 펼칠 것을 기도하였다. 인정이란 맹자의 주장에는 적잖이 순진한 환상이 담겨 있다. 그래서 현실과 동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세상에 왕도의 이상을 보편적으로 실행하려는 그의 철학은 결국 대통일로 향하는 역사의 추세를 보여준다.
공자를 뛰어넘어 유학을 완성하고 시대의 '논쟁가'로 우뚝 선 맹자
여전히 원시적 소박성이 남아 있고 많은 관념들이 구체적으로 전개되지 못한 공자의 사상을 계승한 맹자는 선의 추구를 주축으로 하고, 인문 가치를 강조하며 도덕적 자유를 받들고 집단동일시를 강조하고 이성의 본질을 부각시키고 인격의 완성을 요구하는 등 유가의 가치에 더욱 완전한 형식을 부여하였다. 그것은 여러 사상가가 출현하고 많은 논쟁이 벌어지던 전국시대의 혼란한 사회상과 연관되어 있다.
당시 본연의 인도人道 원칙과 현실의 이익 원칙의 결합을 주장한 묵가, 이기利己를 원칙으로 하면서 개인의 권리 의식을 강조한 양주, 농사일과 전쟁을 장려하고 폭력을 높이 평가했던 법가, 약소국들이 연합하여 하나의 강대국에 맞서야 한다는 합종과 강대국에 밀착하여 약소국을 공격하는 연횡을 주장한 종횡가 등의 득세로 유학이 위기를 맞게 되자 '어떻게 유학을 다시 일으킬까?' 하는 문제에 직면하게 된 것이 맹자의 입장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적극적인 이론 수립과 논쟁을 통해 유학의 함의와 이론적 역량을 보임으로써 현학으로서의 유학의 자리를 지키려 애를 쓰게 되었다. 또한 그 과정에서 맹자가 여러 학파의 사상가들과 치열한 논쟁을 벌인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이를 두고 당시 사람들은 맹자를 호변가(논쟁을 즐기는 사람)라고 하였다.
드높은 이상을 추구했으나 성공하지 못한 비운의 혁명적 지식인 맹자
유가는 나라를 안정시키고 세상을 구하겠다는 포부를 가졌으며 사회의 정치적 변동에 늘 관심을 두고 있었다. 맹자 역시 유학 이론을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유가의 기본 원칙을 구체적인 정치적 주장으로 변화시키고 나아가서 이것을 온 세상에 실천하려 노력했다. 중년 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는 제후들 사이를 오가며 자신의 인정 사상을 실현하려 하였다. 맹자가 거듭된 패전으로 위기에 처한 위나라를 방문했을 때 혜왕이 여러 해에 걸친 치욕을 씻을 방법을 묻자, 인정을 베풀라 하고 그 구체적 내용으로 형벌과 세금을 감면하고 백성들에게 효도와 공경을 가르치고 백성을 위해 몸과 마음을 다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는 실리를 기대한 혜왕에게 매력적일 수 없었다. 예우는 받았으나 그의 견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것이다.
제나라 선왕과도 그런 식이었고, 송나라에서도 마음을 두지 못했다. 등나라 문공은 맹자의 사상에 부합하는 듯했으나 제와 초 두 강대국들의 틈바구니라는 지리적 여건에 의해 결국 나라의 안전을 초미의 관심사로 삼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 해결책에 대해 인정이라는 비현실적인 대답으로 일관한 맹자는 그곳 역시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렇듯 불우했던 그의 정치적 삶의 원인을 맹자 자신은 천명이라 여겼을 뿐 자신의 신념에 내재된 추상성에서 찾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거듭된 좌절 속에서도 강한 의지를 거두지 않았다. 본문에는 맹자의 강한 사명 의식과 열정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내용들이 세세하게 소개되고 있다.
호연지기의 이데아를 갖춘 대장부 - 맹자식 혁명적 지식인의 표상
맹자는 제자백가의 논쟁과 온갖 정치적 풍파를 겪으면서도 풍부하고 독특한 세계를 만들었는데 이 점을 두고 스스로 다음과 같이 평가한 일이 있다. "나는 남이 하는 말을 알고 내 호연지기를 잘 기른다."
맹자에게 양기養氣는 우선 독립된 인격을 기르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한 맹자이기에 왕공이나 귀족이 예의를 다하지 않으면 거기에 상응하는 반응을 하였고 결코 그들에게 굴복하지 않았다. 이에 관한 기록들이 본 책에 구체적으로 소개되어 있다. 가령, 제나라 왕이 맹자를 만나러 가려다가 병이 났다는 핑계를 대며 맹자가 알현하도록 전갈을 넣었는데, 이에 맹자가 자신도 병이 있어 못나가겠다고 응수하고 후에 의원이 보내졌어도 나가길 거부한 일 등이 그 예이다.
이 때 맹자는 자신을 비난하는 이에게, "장차 큰일을 하려는 임금은 반드시 불러서 볼 수 없는 신하를 갖기 마련이며, 그와 의논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자신이 찾아가오. 덕을 존중하고 도를 즐기기를 이와 같이 하지 않으면 함께 큰일을 하기에는 부족한 거요."라고 당당히 응수한다. 전국시대 초기에 명성을 얻으면서 각국의 제후들과 가깝게 왕래하던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부귀영화를 거머쥘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위정자들에게 대담한 비판을 하여 그들을 궁지에 몰아넣기도 하였으니, 당시 권력에 의지해 영예를 구하는 말류 문사들과 달리 선비의 존엄을 느낄 수 있다.
그런데 정중함을 너무 의식하다 보면 남들에게 두려움을 주게도 되는데 맹자 또한 공자에 비하면 매우 엄한 형상으로 남아있다. 사제간의 면모에서도, 가깝고 자유분방하게 그려지는 공자의 제자와의 관계와 달리 맹자는 엄격한 스승의 모습을 보여준다.
맹모삼천에서 비롯된 맹자 사상의 원류
<맹자> 첫 장에 실린 맹자와 양나라 혜왕의 대화에서 나탄나 맹자의 기본 관점은 이런 것이다. "왕께서 하필 '이로움'을 말하십니까? 오직 인의仁義가 있을 뿐입니다."
이렇듯 맹자가 공리功利를 낮게 평가한 까닭은 그의 어머니가 시장 상인의 이익 추구 노력을 경원시한 일까지 거슬러 올라가 찾을 수 있다. 만약 어머니가 상인들이 모이는 곳에서 계속 살았더라면 훗날 맹자의 시각과 사고는 달라졌을 것이다. 또한 엄격한 가정교육 때문에 맹자는 어려서부터 유가 사상의 영향을 받았다. 어린 맹자가 "절하고 사양하는" 예절을 흉내낸 일에서 이 점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그리하여 후에 공자의 손자인 자사의 계열로 들어가 공자를 계승하고자 노력하게 된다.
치밀한 논리와 압도적인 웅변가적 풍모의 맹자
맹자가 자신의 특징으로 내세운 한 가지인 "남의 말을 아는 것"은 다시 말하면 타인의 관점을 분석하고 비판하는 것이다. 백가쟁명 시대에 유가학설을 지키기 위해 각 학파와 벌인 논쟁들의 기록이 이 책에는 구체적으로 소개되고 있어 맹자를 아는 기쁨을 더하게 한다.
한 예로 당시 번창한 농가 대표자 허행의 추종자 진상과 벌인 논쟁은 그의 논리력과 논쟁력(?)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게 한다. 모든 사람, 심지어 군주까지도 직접 농사를 짓고 자급자족해야 한다는 농가의 관점에 대해 맹자는 이렇게 논리를 펴나간다. 허행은 솥과 시루로 취사를 하고 쇠로 만든 쟁기로 농사를 지을 때 그것들을 직접 만들지 않는다. 곡식을 가지고 쟁기와 기물을 바꾸어 쓰는데 이것은 도공과 대장장이를 괴롭히는 것이 아니다. 또한 도공과 대장장이도 그들의 기물을 곡식과 바꾸어 먹는다.
모든 것을 자기 집에서 만들어 쓰지 못하고 교역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장인들이 농사를 지으면서 기물을 만들 수 없듯이 천하를 다스리는 일도 농사를 지으며 할 수 없는 것이다. 이 논쟁에서 맹자는 정신 노동과 육체 노동의 분업이 합리적임을 논증하고 있다. 아울러 농가가 분업을 부정한다는 핵심 논리를 틀어쥐고 힘있는 논리로 공격하여 상대방이 이론에서 후퇴하게 만들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맹자라도 때론 관점의 분석, 비판의 의미를 잃어버리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는데, 묵가가 겸애兼愛를 주장하자 '부모도 모르는 짐승의 논리'라고 인신공격에 가까운 주장을 하는 경우 등의 예로서 이러한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맹자는 자신의 관점과 다른 경우 확실히 화약 냄새를 강하게 풍긴다.
이상적 인격을 추구하는 유학의 기원이 된 맹자
전통적 견해에 따르면 유학은 '내성內聖'과 '외왕外王'을 주제로 설정한다. 맹자는 내성에 좀더 주의를 기울였다. 비록 맹자 본인은 경세의 영역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았지만, 그의 가치 추구의 논리적 귀결은 내성의 경지이다. 그는 자연의 인간화를 천성을 덕성으로 바꾸는 것으로 이해했으며 인간의 자유를 자아의 도덕 선택으로 한정했다. 그는 도의의 내면적 가치를 부각시키고 자아의식의 기능을 강조함으로써 학문의 길에 마음을 둘 것을 요구하는데 여기에 그의 내성 지향이 드러난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자아의 실현(본연의 나에서 이상적인 나를 실현하는 것)에는 무엇보다 어짊(仁), 지혜(智) 등 내면적 품격을 형성하는 것이 나타나게 된다. 이상적 인격에 이르는 성인成人의 과정은 내면에 존재하는 선의 실마리를 출발점으로 삼는데 이러한 선의 실마리는 자아에서 전개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현실과의 사이에서 역사적으로 괴리된 맹자의 인정 사상
등나라 문공이 제나라와 초나라 사이에서 안전을 걱정하며 맹자에게 제나라를 따를지 초나라를 따를지를 묻자 맹자는 단지 '소박하게' 답한다. 이 문제는 맹자 역시 해결할 수 없었고 그기 할 수 있는 유일한 건의는 이런 것뿐이었다. 성 둘레에 하천을 깊이 파고 성곽을 견고하게 쌓고 백성들과 생사를 같이해야 한다... 문공이 구체적인 가르침을 요구하자 맹자의 대답은 더 비현실적이 되었다. 문공이 인정을 실행하기만 하면 강국과 맞설 수 있다.... 이런 이론은 백성들과 존망을 같이해야 한다는 따위의 공허한 이론보다 더 비현실적이다. 이렇듯 인정이라는 사상이 훌륭하다 해도 당시의 역사적 요구에 부응하기는 어려웠던 것이다.
맹자가 드러낸 유학의 부정적 경향
천인 관계에서 인을 핵심으로 하는 인도의 원칙이 강조되고 더욱 구체화되지만 자연의 원칙은 무시될 수밖에 없었다. 명실名實 논쟁에서 이성의 여러 계기들은 비교적 많이 관찰되지만 감성의 경험은 자기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고 있다. 힘과 운명의 관계에서 도덕상에서의 주체의 자유는 명제 속에 참으로 있어야 할 의미를 부여받지만 천하를 다스리는 일이라는 역사 창조 작업은 희석된다. 의리의 관계에서 도의의 내면적 가치는 거듭 강조되지만 공리의 의식은 지나치게 억제된다. 이밖에도 집단 원칙을 강조하고 개인 원칙을 상대적으로 약화시키는 것, 이단 배척에 담긴 독단의 경향, 현실 비판 경향과 복고의 이상화 사이의 혼돈 등등. 이런 것들에서 맹자가 체계화한 유학의 복잡한 함의가 드러나는데 이것들은 중국의 전통 문화에 중층적 영향을 미치고 있다.
사상논쟁의 와중에서 몰락과 중흥을 반복한 그의 사상
맹자는 역사의 복잡한 변천 과정을 겪으면서 여러 차례 부침을 겪는다. 전국시대 세력을 얻었던 그의 학파는 진시황의 분서갱유를 거치면서 큰 타격을 받았다. 그리고 한나라 문제 때는 박사를 둘 만큼 그 지위가 올라가더니 무제 때는 박사도 없어지고 관학으로서의 지위도 잃어버리게 된다. 그러나 당시에도 민간에서 학식 높은 경학자들이 꾸준히 맹자를 연구했는데 이를 통해 맹자와 그의 저서가 중시되었음을 알 수 있다. 5ㆍ4 시기에는 공자를 비롯한 유학파들이 타도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는데, 이는 계몽이라는 시대적 요구에 의해 생겨난 편파적 경향의 오류였음을 저자는 지적하고 있다.
이 책 말미에 저자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결국 맹자는 중국 문화사에 지우기 힘든 역사적 흔적을 남기고 있다. 가치 관념, 사유 방식, 인격의 추구에서 넓은 의미의 문화심리 상태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면에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맹자 유학 사상의 지도적, 규정적 작용을 볼 수 있다. 한 사람의 역사적 인물로서 맹자는 과거에 속한다. 그러나 그는 현대에도 여전히 여러 방면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저자 소개
지은이 양구오롱(楊國榮)
중국 상해에서 태어났다. 화동사범대학교에서 철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고 현재 모교에서 후학 양성과 연구에 주력하고 있다. 한때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서 연구활동을 하면서 중국 고유 사상과 서양 철학의 관계 등에 관심을 가졌다. 중국의 명망 있는 철학사상가로 잘 알려져 있는 그는 {중국사회과학} 등 중국 유명 학술 잡지에 백여편의 논문을 발표하였고, {왕학통론(王學通論)}, {호적과 중서문화(胡適與中西文化)}(공저), {선의 역정(善的歷程)}, {실증주의와 중국 근대철학(實證主義與中國近代哲學)}, {심학의 사상(心學之思)}, {이성과 가치(理性與價値)} 등 중국 철학에 대한 심도 있는 저서들을 집필하였다.
옮긴이 이영섭
충청북도 영동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중문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만청시기 '소설림'파의 소설관 연구}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모교에서 박사과정 중에 있으며 강사로도 활동하고 있다. 중국 철학에 관한 소양을 바탕으로 중국 문학 연구도 활발히 수행하고 있는 그는 특히 중국 근대문학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리하여 넘치는 열정을 중국 소주에서 수학과 연구 활동으로 풀어낼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