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芝峰類說}의 杜詩批評 硏究 ( 陳 甲 坤 )
굴어당
2012. 10. 11. 07:07
{芝峰類說}의 杜詩批評 硏究 ( 陳 甲 坤 )
1
어문론총 제32호
1998. 11.
경북어문학회
Ⅱ. 本 論
어문론총 제32호
1998. 11.
경북어문학회
{芝峰類說}의 杜詩批評 硏究
陳 甲 坤
< 目 次 >
< 目 次 >
Ⅰ. 序 論
杜甫(A.D.712-770)의 詩가 東漸한 이래 수많은 사람들이 杜詩를 典範으로 여기고 이를 學習하여 왔다. 이미 고려 시대에 中土에 간행된 두시 주석집이 覆刻되어 나왔고, 朝鮮朝에 들어와서는 儒學思想의 興隆에 힘입어 杜詩熱이 더욱 高潮되더니 마침내 방대한 분량의 杜詩 全文을 諺解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學宋의 詩風이 風靡하던 시기에도 學杜의 傾向은 綿綿히 이어져 왔고, 學宋이 衰微하고 復古의 시풍으로 轉換되면서 穆陵盛世를 맞이하여 三唐派 詩人이 掘起하는 등 詩學이 최고의 전성기에 이르게 되었다. 이 시기를 즈음하여 芝峰 李 光(1568-1629)이 내놓은 {芝峰類說}(1614년)은 類書의 형식을 채용하고 있으나 <文章部>의 기록은 詩批評書로서 조금도 遜色이 없을 정도이다. 사실 芝峰 이전에도 널리 알려진 {破閑集}, {補閑集}, {東人詩話}, {鶴山樵談} 등과 같은 몇몇 詩話批評書가 있기는 하다. 하지만 杜詩와 관련해서는 그 양으로나 전문성을 따질 때 {芝峰類說}을 능가할 비평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대부분 學杜의 사실을 언급하거나, 그 原流 내지 한 두 句의 어휘에 대한 釋義가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은 詩聖 杜甫의 위치가 워낙 鞏固한데다 先賢의 學問에 대한 批判을 한다는 것 자체가 累가 된다는 의식이 당시 文壇의 지배적인 風潮이어서 감히 聖域에 대한 批判을 忌諱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러나 實學 精神의 先驅者인 芝峰은 固着된 사상의 틀을 깨고, 그 오류에 批判을 가함으로써 잘못된 文壇의 風潮를 革新하고자 했다. 그의 이러한 비평가적 전문의식은 {芝峰類說} 도처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에 본고에서는 그의 批評內容과 그 精神을 하나하나 檢討해 보고 아울러 그것이 가지는 의미를 자세히 考究해보고자 한다.
Ⅱ. 本 論
1. 資料의 檢證
{芝峰類說}은 <天文部>, <時令部>에서 시작하여 <卉木部>, <禽蟲部>에 이르기까지 10책 20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凡例에 따르면 그 기사수만도 3,435조목이며, 인용된 문집이 348종이고, 기록된 인명도 2,265인에 이르는 방대한 저서이다. 그 중 <文章部>는 卷八∼卷十四로 전체 三分之一을 차지하고 있으며, 거의 대부분이 시에 대한 批評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芝峰類說}에서 두보와 두시에 관련된 항목은 전체 134조목이며, 인용된 시구는 130首나 된다. 인용 방법은 제목에 대한 언급없이 '杜詩' 내지 '杜詩曰'이 가장 많고, 때에 따라서는 老杜云, 杜子美라 하기도 하고, 간혹 詩題를 붙인 예도 있다. 이 가운데는 두보를 언급하고 있으나 시와 관련이 없는 것도 있고, 단순히 詩題만 언급하고 다른 이야기를 하는 예도 있다.
한편 두보의 시가 아닌 것을 편자가 착각하고 두시라 한 경우도 있으며, 또 엄연히 杜詩인데도 唐詩, 古詩라고 한 경우가 있다. 이는 지봉의 두시 비평에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 있는 소지가 있으므로 바로 잡을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에 먼저 두보의 시가 아닌 것을 杜詩로 착각한 예를 들어보기로 한다.
{芝峰類說}은 <天文部>, <時令部>에서 시작하여 <卉木部>, <禽蟲部>에 이르기까지 10책 20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凡例에 따르면 그 기사수만도 3,435조목이며, 인용된 문집이 348종이고, 기록된 인명도 2,265인에 이르는 방대한 저서이다. 그 중 <文章部>는 卷八∼卷十四로 전체 三分之一을 차지하고 있으며, 거의 대부분이 시에 대한 批評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芝峰類說}에서 두보와 두시에 관련된 항목은 전체 134조목이며, 인용된 시구는 130首나 된다. 인용 방법은 제목에 대한 언급없이 '杜詩' 내지 '杜詩曰'이 가장 많고, 때에 따라서는 老杜云, 杜子美라 하기도 하고, 간혹 詩題를 붙인 예도 있다. 이 가운데는 두보를 언급하고 있으나 시와 관련이 없는 것도 있고, 단순히 詩題만 언급하고 다른 이야기를 하는 예도 있다.
한편 두보의 시가 아닌 것을 편자가 착각하고 두시라 한 경우도 있으며, 또 엄연히 杜詩인데도 唐詩, 古詩라고 한 경우가 있다. 이는 지봉의 두시 비평에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 있는 소지가 있으므로 바로 잡을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에 먼저 두보의 시가 아닌 것을 杜詩로 착각한 예를 들어보기로 한다.
# 杜詩云 '江流天地外 山色有無中' 古人以爲絶唱(두시에 말하기를 '강의 흐름은 천지 밖이요, 산빛은 있는 듯 없는 듯한 중간이네'라고 하였다. 옛사람들이 이 시를 절창이라고 하였다.)
지봉이 두시라고 인용한 '江流天地外 山色有無中'는 王維가 지은 [漢江臨眺]의 3,4구이다. 王維의 詩를 杜詩로 착각한 것이다.
또 지봉은 '江流靜猶湧'(*[晩登 上堂]-8) '薄雲巖際宿 孤月浪中 '(*[宿江邊閣]-3,4), '中流聞棹謳'(?), '雲逐度溪風'(*[秦州雜詩二十首(二)]-6)의 詩句들이 陰 의 시를 祖襲했다고 열거하고 있는데, 그 중 '中流聞棹謳'는 杜詩에 보이지 않아 필자가 확인을 해보니 南北朝 時代의 시인인 何遜의 詩句('日暮江風靜 ∼')임이 밝혀졌다. 두시에서 '中流聞' 따위는 없고 '鳧 散亂棹謳發'(*[渼陂行]-11)만 보일 뿐이다.
다음으로 지봉이 唐詩, 古詩로 인용한 많은 시 가운데 杜詩로 판명되는 것은 '使君五馬一馬 '(*[冬狩行]-16), '有客有客字子美'(*[乾元中寓居同谷縣作歌七首(一)]-1), '不盡長江滾滾來'(*[九日五首(五)登高]-4), '雨稀雲葉斷'(*[夏夜李尙書筵送宇文石首赴縣聯句]-7), '萬里秋風吹錦水'(*[黃草]-5)의 5수이다. 아마 필요에 따라 기억 속에서 꺼내다 보니 작자를 확실히 밝히지 못했을 것이다. 이상은 작자에 대한 자료의 오류를 검증한 것이고, 다음은 편차에 대한 의문점을 밝혀 보고자 한다.
{芝峰類說}은 天文, 地理, 歷史, 文學 등 각 부문에 따라 매우 체계적으로 편찬되어 있다. <文章部>를 보더라도 크게는 文과 詩로 나누고, 세부 항목의 배열도 일관성있게 배열하고 있다. 이에 따라 卷十二 <文章部五>의 唐詩條도 처음부터 두보의 시로 시작하여 61조목을 연이어 쓰고 다른 시인으로 넘기고 있다. 그런데 중간에 杜詩가 아닌 것이 끼어 있어 열람자를 의아하게 만드는 것이 있으니 '松 酒云云'이 그것이다.
또 지봉은 '江流靜猶湧'(*[晩登 上堂]-8) '薄雲巖際宿 孤月浪中 '(*[宿江邊閣]-3,4), '中流聞棹謳'(?), '雲逐度溪風'(*[秦州雜詩二十首(二)]-6)의 詩句들이 陰 의 시를 祖襲했다고 열거하고 있는데, 그 중 '中流聞棹謳'는 杜詩에 보이지 않아 필자가 확인을 해보니 南北朝 時代의 시인인 何遜의 詩句('日暮江風靜 ∼')임이 밝혀졌다. 두시에서 '中流聞' 따위는 없고 '鳧 散亂棹謳發'(*[渼陂行]-11)만 보일 뿐이다.
다음으로 지봉이 唐詩, 古詩로 인용한 많은 시 가운데 杜詩로 판명되는 것은 '使君五馬一馬 '(*[冬狩行]-16), '有客有客字子美'(*[乾元中寓居同谷縣作歌七首(一)]-1), '不盡長江滾滾來'(*[九日五首(五)登高]-4), '雨稀雲葉斷'(*[夏夜李尙書筵送宇文石首赴縣聯句]-7), '萬里秋風吹錦水'(*[黃草]-5)의 5수이다. 아마 필요에 따라 기억 속에서 꺼내다 보니 작자를 확실히 밝히지 못했을 것이다. 이상은 작자에 대한 자료의 오류를 검증한 것이고, 다음은 편차에 대한 의문점을 밝혀 보고자 한다.
{芝峰類說}은 天文, 地理, 歷史, 文學 등 각 부문에 따라 매우 체계적으로 편찬되어 있다. <文章部>를 보더라도 크게는 文과 詩로 나누고, 세부 항목의 배열도 일관성있게 배열하고 있다. 이에 따라 卷十二 <文章部五>의 唐詩條도 처음부터 두보의 시로 시작하여 61조목을 연이어 쓰고 다른 시인으로 넘기고 있다. 그런데 중간에 杜詩가 아닌 것이 끼어 있어 열람자를 의아하게 만드는 것이 있으니 '松 酒云云'이 그것이다.
# 唐詩 '松 酒熟旁看醉' 按酒不去滓曰 亦酒也 松 酒熟云 則恐未免語疊也(당시에 '송료주가 익으니 곁에서 보기만 해도 취하네'라고 하였다. 상고하여 보니 술의 찌꺼기를 걸러 버리지 않은 것을 라고 하며, 도 또한 술인데 '송료가 익으니'라고 하였으니 아마 말이 겹치는 것을 면치 못할 것이다.)
어휘 선택의 잘못을 비판한 것이다. 지봉은 당시라 했지만 이 시를 두시로 착각할 수도 있다. 실제로 {佩文韻府} <卷九十上 一屋>에는 '松 酒熟旁看醉 蓮葉舟輕自學操'라 하여 두보의 시로 명기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 같은 책 <卷一百五 十六葉>에는 '松 '가 '松花'로 고쳐져 있고 郭受의 詩로 되어 있어 혼란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위 시가 두보의 시가 아님은 쉽게 판정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시는 두보의 [酬郭十五判官受]詩에 답하여 부친 [寄杜員外]란 시의 頸聯이기 때문이다. 지봉이 杜詩 條目에 郭受의 시를 넣은 것은 {杜工部集}을 검토해 나가다가 이 시의 흠을 발견하고 두보와 관련이 있는 데다 비평가로서 그냥 지나치기 어려워 여기에 붙여 넣은 것으로 보인다. 차라리 두시 말미에 붙였더라면 좀더 체계적인 두시 비평이 되었을 것이다.
이상에서 밝혀진 몇몇 記寫上의 誤謬는 지봉의 杜詩批評에 혹 잘못된 판단을 일으킬 수 있는 소지가 있기에 檢證을 해본 것이다. 위에서 130수라고 한 것도 이러한 검증을 토대로 하여 나온 결과이다. 이제 이를 바탕으로 구체적으로 杜詩에 대한 지봉의 논평을 살펴보기로 한다.
2. 杜詩의 缺點
지봉은 같이 글하는 사람으로서 두보를 세대를 달리한 知音으로 여기며 一唱三嘆을 할만큼 두시를 누구보다도 아끼고 사랑했다. 그러나 두시의 결점에 대해서는 비판하기를 주저하지 않았고, 심지어 수정까지 가하는 등 비평가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그 一例로 萬古의 絶唱으로 불리는 [登岳陽樓]에 대한 지적을 들 수 있다.
이상에서 밝혀진 몇몇 記寫上의 誤謬는 지봉의 杜詩批評에 혹 잘못된 판단을 일으킬 수 있는 소지가 있기에 檢證을 해본 것이다. 위에서 130수라고 한 것도 이러한 검증을 토대로 하여 나온 결과이다. 이제 이를 바탕으로 구체적으로 杜詩에 대한 지봉의 논평을 살펴보기로 한다.
2. 杜詩의 缺點
지봉은 같이 글하는 사람으로서 두보를 세대를 달리한 知音으로 여기며 一唱三嘆을 할만큼 두시를 누구보다도 아끼고 사랑했다. 그러나 두시의 결점에 대해서는 비판하기를 주저하지 않았고, 심지어 수정까지 가하는 등 비평가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그 一例로 萬古의 絶唱으로 불리는 [登岳陽樓]에 대한 지적을 들 수 있다.
# 杜子美岳陽樓詩 古今絶唱而 '親朋無一字 老病有孤舟'(*[登岳陽樓]-5,6) 與上句不屬 且於岳陽樓 不相稱(두자미의 악양루시는 고금에 뛰어나다. '친한 벗에게선 한 자의 서신도 없고, 늙고 병든 몸에 외로운 배가 있네'라고 한 글귀는 윗글귀와 서로 연속이 되지 않고, 또 악양루와는 글이 서로 걸맞지 않는다.)
수많은 騷人墨客들이 오백리나 되는 넓은 동정호의 악양루에 올라 그 장관을 읊어댔지만 두보의 [登岳陽樓] 四十字에는 미치지 못한다. 특히 聯의 對偶에 대한 수많은 찬사는 차치하고라도 지봉이 '上句不屬'이라고 지적한 頸聯에 대해서도 劉克莊 같은 비평가는 '千古의 獨步'라고 하고 있다. 그런데 지봉은 '吳楚東南坼 乾坤日夜浮'라는 글귀와 연속되지 못하고, 또한 詩題와도 서로 어울리지 않는다고 비평하였다. 그 이유를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아 지봉의 뜻을 헤아릴 수 없지만 그래도 한시의 대표격이라 일컬어지는 시에 대한 평치고는 지나친 면도 없잖아 있다. 그러나 전인이 모두 아름답다고 해서 무조건 수용할 것이 아니라 잘못된 것은 고필 줄 아는 비평적 안목을 가지고 비평을 해야 함을 보여준 좋은 예라 하겠다.
지봉은 이러한 비평적 안목으로 두시의 결점을 여러 곳에서 지적하고 있다.
지봉은 이러한 비평적 안목으로 두시의 결점을 여러 곳에서 지적하고 있다.
# 杜詩 '莫笑田家老瓦盆 自從盛酒長兒孫 傾銀注玉驚人眼 共醉終同臥竹根'(*[少年行二首(一)]-3,4) 註者以爲瓦盆中喫飮 與傾銀玉之少年同醉 臥於竹根之傍 鶴林玉露 亦言如此 酒譜曰 醉倒終同臥竹根 盖以竹根爲杯 見江淹集云 余按庾信詩 '野爐燃樹葉 山杯捧竹根' 此亦 以竹根爲飮器 而但臥字未穩 竊意以古詩 '銀杯同色試一傾' 觀之 傾銀注玉 皆謂酒色 而結句乃言醉倒 則與瓦盆 同臥于竹根也 從酒譜 作醉倒似是(두시에 '전가의 늙은 질그릇 단지를 웃지 말라. 전부터 술을 담아 아들과 손자를 길러 온다. 은옥의 잔을 기울여 남의 눈을 놀라게 하나 함께 취하여 마침내 같이 대나무 뿌리에 눕네' 주석가는 "질그릇 단지 속에 있는 술을 즐기어 마시고 은옥을 기울이던 소년과 함께 취하여 대나무의 뿌리 곁에 눕는다는 뜻이다"라고 했다. {학림옥로}에도 또한 이같이 말했다. 그런데 {주보}에는 "취해 쓰러져서 마침내 대나무 뿌리에 함께 누웠다 라고 한 것은, 대체로 대나무 뿌리로 술잔을 만들었던 것이다"고 하였다. {강엄집}을 보니 "내가 유신의 시를 보니 '들 화로에는 나뭇잎을 때고 산의 술잔은 대나무 뿌리를 받들었네'라고 하였으니 이것도 또한 대나무 뿌리로 술마시는 그릇을 만든 때문이다. 다만 臥竹根이라고 한 臥라는 글자는 온당치 않다."고 했다. 내 생각으로는 옛시에 '술빛과 은잔의 빛이 같으므로 시험삼아 한 번 기울여 본다'라고 한 것을 가지고 본다면 '傾銀注玉'은 모두 술빛을 말한 것이고, 끝귀에서 취해 쓰러져서 질그릇 단지와 함께 대나무 뿌리에 누웠다고 말한 것이다. 그러니 {酒譜}에 따라서 共醉를 醉倒로 하는 것이 옳을 것 같다.
지봉이 기존의 설과 달리 내세운 것은 세 가지이다. 첫째는 죽근을 대나무 뿌리로 만든 酒器로 보고 있다는 것이고, 둘째는 '傾銀注玉'을 酒色으로 본 것, 또 하나는 共醉를 醉倒로 고치는 것이 옳다고 했다. 지봉이 인용한 주석은 {草堂詩箋}의 저자로 유명한 蔡夢弼의 설로 {纂註分類杜詩}에도 인용되어 있다. '竹根'에 대해 지봉의 지적처럼 羅大經의 {鶴林玉露}는 말할 것도 없고 두시 주석의 대부분이 '竹林中'으로 해석하고 있다. 즉 瓦盆의 가난한 자나 玉杯의 부귀한 자가 함께 취하여 대나무 숲속에 누웠으니 貴賤의 분별이 없다는 뜻이다. 지봉 이전에 竹根을 飮器로 제기한 사람은 杜田(字 時可, {老杜補遺})인데 그 역시 庾信의 [報趙王謝酒詩]를 예로 들고 있으나 城南 杜修可({續注子美詩})에게서 비판을 받고 있다. 지봉도 {纂註分類杜詩}를 보지 않았을 리가 없으나 오히려 杜田의 說과 宋의 杜 이 撰한 {酒譜}의 기록을 근거로 竹根을 대나무 뿌리로 만든 술잔이라 확신하고 있는 것이다. 섣불리 지봉이 옳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고 다만 다른 시에 '霜埋翠竹根'(*[建都十二韻]-20), '鳥下竹根行'(*[屛跡三首(一)]-3), '開渠斷竹根'(*[絶句六首]-10)와 같이 竹根에 대한 다른 기록이 보이는데, 옛말에 '두시로 두시를 풀어야 된다(以杜釋杜)'고 하였으니 이들과 병행하여 설명하였더라면 좀더 설득력이 있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있다. 또 지봉이 '銀杯同色試一傾'이라는 黃山谷의 詩를 근거로 귀인의 銀壺玉杯로 풀이되는 '傾銀注玉'을 酒色으로 풀이한 점은 다른 데서 찾아보기 어려운 독창적인 해석으로 보인다. 마지막으로 {酒譜}에 따라 제시한 '醉倒'의 수정은 原典에 따른 철저한 고증 의식에 기인한 것이며 역시 지봉의 독창적 견해가 아닌가 생각된다.
이밖에도 지봉은 '黃羊旣不 蘆酒多還醉'(*[送從弟亞赴河西判官]-31,32)의 '黃羊'을 노루라고 구체적으로 풀이하고 있고, 또 '蘆酒'를 高適의 '虜酒千種不醉人'(*[營州歌]-3)이라는 시에 근거하여 '虜酒'로 고쳤으면 더욱 맛이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여 두시 자체의 수정을 주저하지 않고 있다. 그런데 후자의 주장은 蔡肇가 高適 시를 예로 이미 제시한 바 있다. 지봉의 주장에 독창적인 것도 있긴 하지만 이처럼 전인이 발한 바를 재론한 것도 많다. [北征]이 [長恨歌] 보다 표현이 좋지만 말미의 '夏商'은 褒 에 따라 '商周'로 고치는 것이 옳다고 한 주장도 조사해 보면 일찍이 胡仔가 언급한 것이다. 그러나 전인이 외롭게 발한 주장을 인용한 지봉의 견해를 부정적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일반적 通念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는 당시 문단의 경향에 대한 일침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文壇을 改造해 보려는 지봉의 노력이 도처에 엿보이기 때문이다.
지봉이 이렇게 杜詩의 결점을 과감하게 지적하고 수정할 수 있었던 것은 "문장은 본래부터 값이 붙어 있지 않으니, 진실로 눈을 갖춘 사람이 아니면 누가 그것을 분별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면서도 비평을 敢行하고 있음을 볼 때 자신의 鑑識眼에 강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세상의 몽매한 사람들이 제멋대로 함부로 비평을 하여 金玉을 보배라 하지 않고 하찮은 돌을 보배라 하는 자가 많다. 그러므로 문장을 알기 어려움은 金玉을 감별하기보다 어렵다. 슬프다"라며 개탄하고 있음도 자부심의 발로이며, 具眼者인 자신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인식한 토로이다. 그러한 면모는 다음과 같은 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 藝苑 言曰 杜詩 '淮王門有客 終不愧孫登'(*[贈特進汝陽王二十韻]-끝) 頗無關涉爲韻所强耳 余謂世間一種人 不解利病 槪謂古作皆善 幷其不好處好之 率以爲法 惑矣 此等疵病 今人指摘之 則必無信之者矣({예원치언}에 말하기를 "두시에 '회왕의 문하에 객이 있으니, 마침내 손등에게 부끄럽지 않다'라고 한 것이 있는데, 아무런 關涉도 없는 것을 韻字로 달기 위하여 억지로 갖다 붙였을 뿐이다"라고 하였다. 나는 말한다. 세상의 한 종류의 사람들은 잘된 것과 병된 것을 알지 못하고 대체로 옛작품이면 모두 좋다고 하여 그 좋지 못한 곳도 아울러 좋게 여겨 거의 그것을 법으로 삼는 사람들이 있으니 의혹스런 일이다. 이 시의 흠을 지금 사람이 지적했다면 반드시 믿는 자가 없을 것이다.)
이밖에도 지봉은 '黃羊旣不 蘆酒多還醉'(*[送從弟亞赴河西判官]-31,32)의 '黃羊'을 노루라고 구체적으로 풀이하고 있고, 또 '蘆酒'를 高適의 '虜酒千種不醉人'(*[營州歌]-3)이라는 시에 근거하여 '虜酒'로 고쳤으면 더욱 맛이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여 두시 자체의 수정을 주저하지 않고 있다. 그런데 후자의 주장은 蔡肇가 高適 시를 예로 이미 제시한 바 있다. 지봉의 주장에 독창적인 것도 있긴 하지만 이처럼 전인이 발한 바를 재론한 것도 많다. [北征]이 [長恨歌] 보다 표현이 좋지만 말미의 '夏商'은 褒 에 따라 '商周'로 고치는 것이 옳다고 한 주장도 조사해 보면 일찍이 胡仔가 언급한 것이다. 그러나 전인이 외롭게 발한 주장을 인용한 지봉의 견해를 부정적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일반적 通念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는 당시 문단의 경향에 대한 일침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文壇을 改造해 보려는 지봉의 노력이 도처에 엿보이기 때문이다.
지봉이 이렇게 杜詩의 결점을 과감하게 지적하고 수정할 수 있었던 것은 "문장은 본래부터 값이 붙어 있지 않으니, 진실로 눈을 갖춘 사람이 아니면 누가 그것을 분별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면서도 비평을 敢行하고 있음을 볼 때 자신의 鑑識眼에 강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세상의 몽매한 사람들이 제멋대로 함부로 비평을 하여 金玉을 보배라 하지 않고 하찮은 돌을 보배라 하는 자가 많다. 그러므로 문장을 알기 어려움은 金玉을 감별하기보다 어렵다. 슬프다"라며 개탄하고 있음도 자부심의 발로이며, 具眼者인 자신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인식한 토로이다. 그러한 면모는 다음과 같은 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 藝苑 言曰 杜詩 '淮王門有客 終不愧孫登'(*[贈特進汝陽王二十韻]-끝) 頗無關涉爲韻所强耳 余謂世間一種人 不解利病 槪謂古作皆善 幷其不好處好之 率以爲法 惑矣 此等疵病 今人指摘之 則必無信之者矣({예원치언}에 말하기를 "두시에 '회왕의 문하에 객이 있으니, 마침내 손등에게 부끄럽지 않다'라고 한 것이 있는데, 아무런 關涉도 없는 것을 韻字로 달기 위하여 억지로 갖다 붙였을 뿐이다"라고 하였다. 나는 말한다. 세상의 한 종류의 사람들은 잘된 것과 병된 것을 알지 못하고 대체로 옛작품이면 모두 좋다고 하여 그 좋지 못한 곳도 아울러 좋게 여겨 거의 그것을 법으로 삼는 사람들이 있으니 의혹스런 일이다. 이 시의 흠을 지금 사람이 지적했다면 반드시 믿는 자가 없을 것이다.)
'淮王門有客 終不愧孫登'에 대해 주석가들 대부분이 淮南王을 汝陽王에 비유한 것으로 보고, 汝陽王 또한 淮南王 못지않게 선비를 사랑하므로 孫等같은 은사에 부끄럽지 않은 것으로 풀이하며 별다른 이의를 달고 있지 않다. 그런데 王 州나 지봉은 운자를 맞추기 위해 관련도 없는 고사를 억지로 끌여 들인 것으로 이해한 것이다. 漢의 淮南王 安은 선비를 사랑하여 빈객을 불러들여 소위 '八公'의 무리가 있었는데 '左吳, 李尙, 蘇飛, 田由, 毛披, 雷被, 晉昌, 伍被' 등이 그들이다. 그리고 孫等은 晉의 隱士로 康이 따른 인물이다. 두시에서 끌어들인 '愧孫登'은 康의 [幽憤詩] '昔 柳下 今愧孫等'(33,34)에서 비롯된 것인데 淮王을 汝陽王에 비유한 것으로 갖다 붙이면 몰라도 淮王과 孫等 두 사람은 하등 관련이 없다. 그러므로 감주는 운자를 달기 위해 억지로 갖다 붙인 것으로 혹평하고 지봉도 이에 동조한 것이다. 이에 지봉은 고인의 작품이면 무조건 좋아하는 당시 문단의 풍조에 대해 叱咤를 하고 있다. 고인의 말이면 利病을 떠나서 맹종하는 당시 풍조를 '왕감주 또한 고인이기에 이 말을 믿으려 들지 아마 지금 사람이었더라면 믿지 않았을 것이라'며 문단의 심각성을 비판하고 있다. 이러한 의식 속에서 두시 결점에 대한 지봉의 비판은 계속 이어진다.
# 杜詩曰 '莫令鞭血地 再濕漢臣衣'(*[遣憤]-7,8) 註漢書云 禁中 非刑人鞭血之地 鞭血地 指禁中也 余謂以漢書 非鞭血之地 爲用事 則似不成語 杜詩中如此 强造處多矣(두시에 말하기를 '채찍에 피묻게 한 땅으로 하여금 두 번 다시 한나라 신하의 옷을 젖게 하지 말라'고 했다. 주에 "{漢書}에 '禁中은 형벌을 집행하는 사람이 채찍에 피를 묻히는 곳은 아니다'라고 한 것이 있다. 그래서 여기에 鞭血地라고 한 것은 금중을 가리킨 것이다"라고 하였다. 나는 말한다. {漢書}에서 鞭血之地가 아니라고 한 것을 고사를 인용하여 禁中을 도리어 鞭血地라고 일컬은 것은 말이 되지 않은 것같다. 두시 가운데는 이와 같은 억지로 조작한 곳이 많다.)
孫等의 예는 서로 관련없는 고사를 붙였지만 여기서는 고사를 오용한 예이다. 원래 {漢書}에서는 天子가 御居하는 禁中은 神聖한 곳이므로 '채찍을 쳐서 피를 보게 하는 땅'이 아니라고 하였는데, 杜詩에서는 '채찍을 쳐서 피를 보는 땅'을 禁中으로 활용하였으니, 시를 만들기 위해 억지로 조작한 것으로 비판받은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纂註分類杜詩}, {杜詩諺解} 등 많은 주석서에는 이에 대한 언급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필자가 조사해 보니 {漢書}云云은 西蜀의 師古({詳說}二十八卷)가 주석한 이래 대부분의 주석자들이 아무런 비판없이 마구 인용하여 왔던 것이다.
두시에 대한 비판은 고사의 誤用 뿐만 아니라 표현상의 문제에도 나타난다. 두시의 표현 가운데 속어를 사용하거나 어조사, 혹은 경전의 말을 그대로 사용하는 것에 대해 시를 배우는 자들은 이를 본받을 것이 못됨을 지적하였다.
즉 羅大經은 杜詩 全篇에 俗語를 사용한 것이 있는데 뛰어나고 묘함을 해치지 않는다며 '一夜水高二尺强 數日不可更禁當 南市津頭有船賣 無錢卽買繫籬旁'(*[春水生二絶(二)]-全), '江上被花惱不徹 無處告訴只顚狂'(*[江畔獨步尋花七絶句(一)]-1,2), '白頭老罷舞復歌 杖藜不睡誰能那'(*[夜歸]-7,8)를 예로 들며 통쾌하고 즐길 만하다고 한데 대해 지봉은 무엇이 뛰어나고 묘하며 통쾌한지 그 이유를 알지 못하겠다고 반문하고 있다. 또 두보가 '有底, 遮莫, 生憎, 不分' 등과 같은 時俗語를 사용하고 있음도 지적했다.
두보의 속어 사용에 대해 비평가들 대부분은 '點化'니, '放蕩自然'이니 하는 찬사를 보내고 있음에 반해 지봉은 오히려 의문을 제기한 것이다. 실제 詩作法에 있어 俗語를 사용하는 것은 권장할 만한 방법이 못된다. 그러므로 두보가 사용했다고 무조건 좋다고만 하여 이를 따르려는 풍조는 혁신되어야 한다는 것이 지봉의 생각이다.
이외에도 지봉은 '靑靑竹 迎船出 白白江魚入饌來'(*[送王十五判官扶侍還黔中得開字]-3,4)의 '白白'이나, '南邨群童欺我老無力 忍能對面爲盜賊'(*[茅屋爲秋風所破歌]-6,7)의 표현이 속된 것같다고 지적하고 있다. 전자의 경우 孟宗과 姜詩의 故事를 활용한 것인데 河南의 邵氏(名 朴)는 오히려 '俗字雅用 是大家數'라며 大家의 手法으로 극찬하고 있음에 반해 지봉은 속되다고 貶評했다. 후대에 淸의 朱瀚({杜詩解意})도 '用事 또한 속되다'고 지적하고 있지만 지봉 이전에는 이러한 貶評을 한 사람은 없는 것같다.
두시의 결점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어휘 선택에도 큰 문제가 있음을 결코 간과하지 않고 있다.
두시에 대한 비판은 고사의 誤用 뿐만 아니라 표현상의 문제에도 나타난다. 두시의 표현 가운데 속어를 사용하거나 어조사, 혹은 경전의 말을 그대로 사용하는 것에 대해 시를 배우는 자들은 이를 본받을 것이 못됨을 지적하였다.
즉 羅大經은 杜詩 全篇에 俗語를 사용한 것이 있는데 뛰어나고 묘함을 해치지 않는다며 '一夜水高二尺强 數日不可更禁當 南市津頭有船賣 無錢卽買繫籬旁'(*[春水生二絶(二)]-全), '江上被花惱不徹 無處告訴只顚狂'(*[江畔獨步尋花七絶句(一)]-1,2), '白頭老罷舞復歌 杖藜不睡誰能那'(*[夜歸]-7,8)를 예로 들며 통쾌하고 즐길 만하다고 한데 대해 지봉은 무엇이 뛰어나고 묘하며 통쾌한지 그 이유를 알지 못하겠다고 반문하고 있다. 또 두보가 '有底, 遮莫, 生憎, 不分' 등과 같은 時俗語를 사용하고 있음도 지적했다.
두보의 속어 사용에 대해 비평가들 대부분은 '點化'니, '放蕩自然'이니 하는 찬사를 보내고 있음에 반해 지봉은 오히려 의문을 제기한 것이다. 실제 詩作法에 있어 俗語를 사용하는 것은 권장할 만한 방법이 못된다. 그러므로 두보가 사용했다고 무조건 좋다고만 하여 이를 따르려는 풍조는 혁신되어야 한다는 것이 지봉의 생각이다.
이외에도 지봉은 '靑靑竹 迎船出 白白江魚入饌來'(*[送王十五判官扶侍還黔中得開字]-3,4)의 '白白'이나, '南邨群童欺我老無力 忍能對面爲盜賊'(*[茅屋爲秋風所破歌]-6,7)의 표현이 속된 것같다고 지적하고 있다. 전자의 경우 孟宗과 姜詩의 故事를 활용한 것인데 河南의 邵氏(名 朴)는 오히려 '俗字雅用 是大家數'라며 大家의 手法으로 극찬하고 있음에 반해 지봉은 속되다고 貶評했다. 후대에 淸의 朱瀚({杜詩解意})도 '用事 또한 속되다'고 지적하고 있지만 지봉 이전에는 이러한 貶評을 한 사람은 없는 것같다.
두시의 결점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어휘 선택에도 큰 문제가 있음을 결코 간과하지 않고 있다.
# 杜詩 '生憎柳絮白於綿'(*[送路六侍御入朝]-6) 又 ' 徑楊花鋪白氈'(*[絶句漫興九首(七)]-1) 按宋楊巖曰 柳花與柳絮不同 生於葉間 作鵝黃色者 花也 結實已熟亂飛 如綿者 絮也 然則古今詩人 以絮爲花 以花爲絮者 多矣 杜詩下句 亦未免誤耳(두시에 '버들개지가 솜보다 흰 게 밉살스럽다'라 하고 '지름길에 점착한 버들꽃이 흰 방석을 편 것 같다'라고도 하였다. 상고하여 보니 송나라의 양암이 말하기를 "버들꽃과 버들개지는 같지 않다. 잎 사이에 나서 아황색을 띤 것이 꽃이고, 열매를 맺은 것이 이미 익어서 어지럽게 날리는 솜과 같은 것이 버들개지이다"라 하였다. 그렇다면 고금의 시인들은 버들개지를 버들꽃이라고 하고 버들꽃을 버들개지라고 한 것이 많다. 두시의 아랫글귀도 또한 잘못되었음을 면할 수 없다).
楊巖이 지은 {臆乘}을 보고 지적한 내용임을 알 수 있는데, 두보가 柳絮와 楊花의 의미 파악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柳絮를 써야 할 자리에 楊花를 써 문제가 된 것이다. 두시에서 柳絮와 楊花가 쓰인 용례는 '輕輕柳絮點人衣'(*[十二月一日三首(三)]-4), '顚狂柳絮隨風舞'(*[絶句漫興九首(五)]-3). '楊花雪落覆白 '(*[麗人行]-23) 등을 들 수 있는데 楊巖의 설로 본다면 마지막 구에서도 아황색의 楊花를 雪落으로 표현하였으니 잘못이다. 그런데 두보는 '雀啄江頭黃柳花'(*[曲江部鄭八丈南史飮]-1)에서는 黃柳花라 표현하고 있어 둘을 분별하지 않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지봉의 지적대로 두보 뿐만 아니라 고금의 많은 시인들이 이를 통용하고 있음은 庾信의 '新年鳥聲千種 二月楊花滿路飛'(*[春賦])를 봐도 충분히 헤아릴 수 있다. 시인들이 통용해서 대부분 쓰고 있지만 지봉은 {臆乘}의 기록에 따라 문제로 삼은 것이다. 그 可否야 어떻든 일단 문제로 제기한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다. 다른 사람은 두시라고 하여 무조건 흉내만 낼 뿐인데 지봉은 그것이 결점임을 분명히 인식하고 '오류를 면할 수 없다'고 혹평을 하였다. 이러한 태도는 그만큼 비평가로서 자신의 감식안에 자부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생각된다.
다음은 실제로 두시를 흉내낸 예를 들어 보고 이에 대한 지봉의 비평을 살펴보기로 한다.
다음은 실제로 두시를 흉내낸 예를 들어 보고 이에 대한 지봉의 비평을 살펴보기로 한다.
# 杜詩 '桃花細逐楊花落 黃鳥時兼白鳥飛'(*[曲江對酒]-3,4) 楊愼以爲此句法 不雅而後人多效之 按梅聖兪詩 '南 鳥過北 叫 高田水入低田流' 盖出於杜 而似村童俗語 恐不必效也(두시에 '복숭아꽃은 고요히 버드나무꽃을 쫓아서 떨어지고, 황조는 때로 백조와 함께 나네'라 한 것이 있다. 양신이 말하기를 "이 시는 구법이 아존하지 못한 것인데, 후인들이 이를 본받는 이가 많다"고 하였다. 고찰하여 보니 매성유의 시에 '남쪽 언덕을 새가 지나가서 북쪽 언덕에 울고, 높은 논에 물이 들어가니 낮은 논으로 흐른다'라고 하였다. 아마 착상이 두시에서 나온 것일 것이다. 그러나 촌아이들의 속된 말같다. 아마 반드시 본받을 것이 못된다).
인용된 두시는 桃와 楊, 白과 黃이 對가 되어 自對格이라 하여 후인들의 모범으로 여겨져 많은 사람들이 이를 모방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로 매성유의 시를 들고 있는데 두시와 똑같은 수법으로 南과 北, 高와 低가 自對를 이루고 있다. 지봉이 예로 든 梅詩 말고도 黃山谷의 '野水自添田水滿 晴鳩却喚雨鳩來(*[自巴陵略平江臨湘入通城無日不雨]-3,4)', 李若水의 '近邨得雨遠邨 同上 波流下 ' 등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다들 시인으로 이름을 떨친 이들이다. 그러나 지봉은 모방작이 오히려 촌아이들의 속된 말과 같으므로 본받을 것이 못된다고 혹평을 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楊用修({升菴詩話})의 언급처럼 두시의 句法이 모범이 될만큼 아름답지 못하다는 것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두시라고 다 모범이 되는 것은 아닌만큼 두시를 제대로 볼 줄 아는 비평안을 갖추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공연히 따라서 흉내만 내다가는 성공하면 다행이지만 잘못하면 고니를 새기다가 따오기가 되버렸다는 조롱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지봉은 말했다.
끝으로 형식적인 면에 있어서도 잘못이 있음을 지적하였다. 물론 扇對格, 假借格, 妙對와 같은 조목에서는 그 비범성을 인정하면서도 간혹 평측의 誤用에 대해서는 一言을 붙이고 있다.
그러므로 두시라고 다 모범이 되는 것은 아닌만큼 두시를 제대로 볼 줄 아는 비평안을 갖추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공연히 따라서 흉내만 내다가는 성공하면 다행이지만 잘못하면 고니를 새기다가 따오기가 되버렸다는 조롱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지봉은 말했다.
끝으로 형식적인 면에 있어서도 잘못이 있음을 지적하였다. 물론 扇對格, 假借格, 妙對와 같은 조목에서는 그 비범성을 인정하면서도 간혹 평측의 誤用에 대해서는 一言을 붙이고 있다.
# 王子安詩曰 海內存知己 天涯若比隣 比作去聲 而杜詩云 '不敎鵝鴨惱比隣'(*[將赴成都草堂途中有作先寄嚴鄭公五首(二)]-6) 後人因此多作平聲用 然按周禮五家爲比乃去聲(王子安의 시에 말하기를 '海內에 知己가 있으니 天涯도 가까운 이웃과 같다'라 하였다. 比隣의 比는 去聲이다. 그런데 杜詩에 '거위와 오리로 하여금 가까운 이웃을 괴롭히지 않는다'라고 하여, 比를 平聲으로 썼기 때문에 후인들이 그것에 따라 平聲으로 쓴 이가 많다. 그러나 상고하여 보니 {周禮}에 '다섯 집을 比로 한다'라고 한 比는 去聲이었다).
위에 인용된 王勃詩(*[杜少府之任蜀州]-5,6)의 高低를 보면 ' '으로 去聲으로 쓰여졌음을 알 수 있다. 두시에서 比자는 40여회 나오는데 그 중에 比較의 뜻인 '上聲(紙韻)'으로 쓰인 예는 ' 旁人錯比揚雄宅'([堂成]7), ' 許身 比雙南金'([題省中院壁]8) 등이고, 近, 及의 뜻인 '去聲( 韻)'으로 쓰인 예는 ' 比年病酒開涓滴'([舍弟觀赴藍田...(三)]7), ' 比來相國兼安蜀'([季夏送鄕弟韶...]3)이다. 그런데 比隣의 경우만은 ' 不敎鵝鴨惱比 ([將赴成都草堂...(二)]6)', ' 暫往比隣去'(*[范二員外邈吳十侍御郁特枉駕闕展待聊寄此作]-1)와 같이 모두 평성으로 쓰고 있다. 후대의 蘇東坡도 ' '五方祭 請比隣'(*[初到杭州寄子由二絶(二)]-3,4)이라 하여 역시 지봉의 지적대로 평성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周禮}의 '令 五家爲比 使之相保 五比爲閭 使之相受'의 比字는 近隣을 稱하는 뜻으로 去聲에 속한다. 그렇다면 두보는 '比'字 高低를 잘못 쓴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측성의 比字가 두보로 인해 평성으로 둔갑하여 후인들이 마냥 따라서 쓴 것이다. 역시 두시의 誤謬와 이에 대한 비판 없이 추종한 후인들의 잘못을 동시에 비판한 것이다.
이외에도 지봉은 '已老尙書郞'(*[暮春題 西新賃草屋五首(五)]-2)의 尙은 去聲, '炙手可熱勢絶倫'(*[麗人行]-25)의 炙은 入聲, '畵工如山貌不同'(*[丹靑引]-18), '屢貌尋常行路人'(*[丹靑引]-36), '貌得山僧及童子'(*[奉先劉少府新 山水障歌]-32)의 貌은 入聲이고 음은 莫으로 읽을 것을 주장하여 두시의 字音과 平仄에 지대한 관심을 표명하여 문단의 오류를 교정하고자 노력했다.
이상에서 살핀 바와 같이 지봉은 시 내용 뿐만 아니라 형식면에 있어서도 두시의 결점을 일일이 지적하였다. 이러한 비평적 태도는 기존 문단에 대한 과감한 도전으로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당시 풍조가 옛사람의 작품에 대하여 그 흠이나 병을 조금이라도 지적하는 일이 있으면 당장에 그를 어리석고 망령된 행동이라고 꾸짖는 풍조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기있게 두시의 결점을 하나하나 지적한 것은 자신의 감식안에 대한 자부심과 문단을 바로잡아 보겠다는 비평가로서의 사명의식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우리 나라의 경우 지봉 이전에 몇몇 비평서가 나오긴 했지만 어느 곳에도 두시를 구체적으로 비판한 일이 없었음을 감안해 본다면 지봉의 두시 비평이 가지는 의미는 매우 크다고 하겠다.
이외에도 지봉은 '已老尙書郞'(*[暮春題 西新賃草屋五首(五)]-2)의 尙은 去聲, '炙手可熱勢絶倫'(*[麗人行]-25)의 炙은 入聲, '畵工如山貌不同'(*[丹靑引]-18), '屢貌尋常行路人'(*[丹靑引]-36), '貌得山僧及童子'(*[奉先劉少府新 山水障歌]-32)의 貌은 入聲이고 음은 莫으로 읽을 것을 주장하여 두시의 字音과 平仄에 지대한 관심을 표명하여 문단의 오류를 교정하고자 노력했다.
이상에서 살핀 바와 같이 지봉은 시 내용 뿐만 아니라 형식면에 있어서도 두시의 결점을 일일이 지적하였다. 이러한 비평적 태도는 기존 문단에 대한 과감한 도전으로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당시 풍조가 옛사람의 작품에 대하여 그 흠이나 병을 조금이라도 지적하는 일이 있으면 당장에 그를 어리석고 망령된 행동이라고 꾸짖는 풍조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기있게 두시의 결점을 하나하나 지적한 것은 자신의 감식안에 대한 자부심과 문단을 바로잡아 보겠다는 비평가로서의 사명의식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우리 나라의 경우 지봉 이전에 몇몇 비평서가 나오긴 했지만 어느 곳에도 두시를 구체적으로 비판한 일이 없었음을 감안해 본다면 지봉의 두시 비평이 가지는 의미는 매우 크다고 하겠다.
3. 註釋의 誤謬
고금 이래로 두시에 대한 註釋과 寸評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宋代에 나온 {分門集注杜工部詩}(25권,王洙, 趙次公 等注), {杜工部草堂詩箋}(50권 외집1권,蔡夢弼), {集千家注分類杜工部集}(25권 연보1권 문집 2권,徐居仁編次 黃鶴補注), {集千家注批點杜工部集}(20권 문집 2권,黃鶴補注 劉辰翁評點 (元)高楚芳編), {須溪批點杜工部詩注}(22권,劉辰翁批點)와 明代의 {刻杜少陵先生詩分類集註}(23권,邵寶注), {杜工部詩集輯注}(20권, 附集外詩, 문집, 연보 각1권,朱鶴齡注), 청대의 {杜詩詳注}(25권,仇兆鼇輯注), {杜工部箋注}(20권,錢謙益箋注), 杜詩鏡銓(20권,楊倫箋注)와 같은 專門 註解書에서 시작하여 각종 시화의 寸評에 이르기까지 고인들의 두시에 대한 관심은 지속적이고도 열정적이었다. 우리 나라에서도 이들에 못지않은 주석서가 세종 26년(1444) 甲寅字本 {纂註分類杜詩}(25권, 安平大君, 辛碩祖 등)가 나왔고, 두 차례에 걸친 언해는 후인들의 學杜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이는 국가적 사업이었고, 개인이 편찬한 두시 주해서로는 李植의 {纂註杜詩澤風堂批解}(26권, 1640년 탈고, 1739년 간행)만 있을 뿐이다. 批解은 {芝峰類說} 이후이므로 지봉이 주로 참조한 것은 역시 諸說이 새겨져 있는 {纂註分類杜詩}이다. 물론 지봉이 밝혀놓은 것은 아니지만 {지봉유설}에 언급된 비평을 자세히 검토해보면 대략 알 수 있다.
지봉은 {纂註分類杜詩}에 인용된 註解의 지나친 牽强附會나 故事를 잘못 예로 들은 경우, 어휘에 대한 잘못된 풀이 등을 주로 지적하고 있다.
먼저 눈앞에 펼쳐진 卽景을 읊은 순수한 시인데도 작자의 빈한한 생활과 관련시켜 해석하려 한 예나 굳이 고사를 이끌어 들이고자 한 주해에 대해 지봉은 졸렬하다며 혹평을 가하고 있다.
고금 이래로 두시에 대한 註釋과 寸評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宋代에 나온 {分門集注杜工部詩}(25권,王洙, 趙次公 等注), {杜工部草堂詩箋}(50권 외집1권,蔡夢弼), {集千家注分類杜工部集}(25권 연보1권 문집 2권,徐居仁編次 黃鶴補注), {集千家注批點杜工部集}(20권 문집 2권,黃鶴補注 劉辰翁評點 (元)高楚芳編), {須溪批點杜工部詩注}(22권,劉辰翁批點)와 明代의 {刻杜少陵先生詩分類集註}(23권,邵寶注), {杜工部詩集輯注}(20권, 附集外詩, 문집, 연보 각1권,朱鶴齡注), 청대의 {杜詩詳注}(25권,仇兆鼇輯注), {杜工部箋注}(20권,錢謙益箋注), 杜詩鏡銓(20권,楊倫箋注)와 같은 專門 註解書에서 시작하여 각종 시화의 寸評에 이르기까지 고인들의 두시에 대한 관심은 지속적이고도 열정적이었다. 우리 나라에서도 이들에 못지않은 주석서가 세종 26년(1444) 甲寅字本 {纂註分類杜詩}(25권, 安平大君, 辛碩祖 등)가 나왔고, 두 차례에 걸친 언해는 후인들의 學杜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이는 국가적 사업이었고, 개인이 편찬한 두시 주해서로는 李植의 {纂註杜詩澤風堂批解}(26권, 1640년 탈고, 1739년 간행)만 있을 뿐이다. 批解은 {芝峰類說} 이후이므로 지봉이 주로 참조한 것은 역시 諸說이 새겨져 있는 {纂註分類杜詩}이다. 물론 지봉이 밝혀놓은 것은 아니지만 {지봉유설}에 언급된 비평을 자세히 검토해보면 대략 알 수 있다.
지봉은 {纂註分類杜詩}에 인용된 註解의 지나친 牽强附會나 故事를 잘못 예로 들은 경우, 어휘에 대한 잘못된 풀이 등을 주로 지적하고 있다.
먼저 눈앞에 펼쳐진 卽景을 읊은 순수한 시인데도 작자의 빈한한 생활과 관련시켜 해석하려 한 예나 굳이 고사를 이끌어 들이고자 한 주해에 대해 지봉은 졸렬하다며 혹평을 가하고 있다.
# 杜詩 '震雷 幕燕 驟雨落河魚(*[對雨書懷走邀許主簿]-3,4)' 盖以震雷 故幕上之燕驚而 翅 驟雨故河魚隨之而落也 以目前所見記之而已 註者謂幕燕幕上爲燕形以係飾者 河魚乃水面之塵所結成者 其見拙矣 尾句 '相邀愧泥 騎馬到 除(7,8)' 盖以泥 故欲其直到階除而下馬也 不必引沈遜事矣(두시에 '번개와 우뢰가 막사의 제비를 뛰쳐놓고, 소나기에 하수의 물고기 떨어진다'라고 한 글귀가 있다. 아마 천둥 번개가 막사를 뒤흔드니 그 위에 있던 제비가 놀라서 뛰쳐 날아가고, 소나기가 쏟아지기 때문에 물고기가 따라 떨어진 것을 눈앞에 보는 대로 기술하였을 뿐일 것이다. 그런데 주해하는 자가 "막연이라고 한 것은 막 위에 제비 형체를 만들어 장식한 것이고, 물고기라고 한 것은 곧 수면의 띠끌이 뭉쳐서 물고기 모양을 이룬 것이다"라고 했다. 그 견해가 졸렬하다. 끝귀에 '서로 맞이하는데 진흙 수렁이 부끄러우니 말을 탄 채로 섬돌에 이르네'라고 한 것은 아마 진흙 수렁 때문에 바로 섬돌까지 와서 말을 내리려고 한 것이다. 반드시 심손의 일을 인용해야 할 것은 아니다).
芝峰이 인용한 註解는 {纂註分類杜詩}에 '鶴'의 설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는 두시 주석의 대가인 朱鶴齡({杜工部詩注})을 이른다. '幕燕'의 의미를 살펴보면 '沙漠(北方)의 제비'라는 뜻도 있고, 또 '장막 위에 집을 지은 제비(巢幕燕)'로 매우 위급함(至危)을 의미하기도 한다. 후자는 {左傳}에 근거를 둔 것으로 杜詩에서는 이 뜻을 원용한 것으로 풀이된다. '河魚'도 실제 江村에서 경험할 수 있는 현상으로 '비가 많이 와 물고기가 퍼덕이며 위로 솟구쳤다가 떨어지는 형상' 혹은 '비를 타고 올라가다 마당에 떨어지는 물고기'를 말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주학령은 幕燕을 '檣烏'나 '門龜'와 같은 류의 장식품으로 해석하고, '河魚'도 굳이 지극히 가난하여 솥 안에 물고기가 생긴다는 식의 '釜生魚'와 같은 뜻으로 풀이하며, 공의 문장인 [秋述]에 나오는 '杜子臥病長安旅次 多雨生魚 靑苔及榻'에서 그 의미를 찾으려 하고 있다. 그러나 明 邵傅의 지적이 아니더라도 천둥 번개에 놀란 제비의 모습이나 大雨에 물고기가 떨어지는 형상을 읊은 '眼前의 實景'임은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다. 그래서 지봉도 지나치게 억지로 주석을 풀이하려 한 주억령의 설을 오히려 졸렬하다고까지 批評한 것이다. 마지막구의 해석도 주석자가 蘇氏인데 그는 '沈遜이 徐陵을 뵙는데 말을 타고 섬뜰까지 와서 내리자 모인 손님과 서릉이 이를 싫어했으나 그는 태연자약했고, 잠시 뒤 拂子를 휘두르며 고담준론을 늘어놓자 모두가 傾伏했다'는 故事를 들어 '공이 이 典故를 사용하여 許政丞이 공의 집에 와 함께 회포를 풀기를 바란다'는 뜻으로 풀었다. 그러나 이것도 지봉은 비가 많이 와 마당이 질어 부득이 섬뜰까지 와 말을 내린 광경 그 자체를 읊은 것이지 굳이 고사까지 이끌 이유가 없다고 하였다. 시 해석에 지나치게 전고를 이끌어 견강부회하여 자신의 학문적 성과를 과시하려는 문단의 풍토를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또 지봉은 [麗人行]의 '楊花雪落覆白 靑鳥飛去銜紅巾'(23,24)에 대해 주석자들이 곡해하여 성급하게 해석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前句는 즉경을 읊은 것이고, 後句의 '靑鳥飛去'는 宮使가 연달아 왕래한다는 뜻으로, '紅巾'은 당나라에서 물건을 내릴 때 싸는 붉은 명주 보자기로 해석하였다.
먼저 이 시의 시대적 배경을 보면 天寶 십이년(753년) 당시 양귀비의 專寵으로 양씨 일가 친척들은 온갖 세도를 누리고 있었으니, 언니는 韓國夫人, 두 동생은 國夫人, 秦國夫人이 되었고, 사촌 오라비 양국충은 우승이 되어 炙手可熱의 권세를 누리며 괵국부인과 姦淫을 하여 만인의 빈축을 샀다. 이에 두보는 그들의 荒淫無道한 생활의 일면을 예리하게 비판한 것이다.
주석자들이 곡해하고 있다는 말은 곧 인용된 구에 대해 대부분 楊國忠과 國夫人과의 姦淫을 풍자한 것으로 풀이하고 있음을 이른다. 그리고 후구는 하늘의 사자인 파랑새가 날아와 부인의 붉은 수건을 입에 물고 희롱한다는 뜻으로 둘의 密通을 암시한 것으로 본다. 모두가 時事와 관련시켜 해석하려 하고 있다.
그러나 지봉은 이러한 주석자들의 해석을 지나치게 곡해한 것으로 보고 그냥 눈앞에 보이는 실제의 풍경을 그린 것이라 했다. 후구도 靑鳥에 비유된 수많은 시종들이 붉은 보자기에 뭔가를 싸 가지고 오고가는 것으로 해석하여 어떤 暗喩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시를 지은 上巳節에 曲江 부근의 놀이 풍경을 단순히 읊은 것으로 보고자 했다.
[初月]이란 시에 대해서도 주석자는 각종 역사적 사실을 이끌어들여 전팔구를 전부 時史의 비유로 가득찬 시로 해석하고 있지만 지봉은 "이 시는 초승달을 형용하여 그가 본 바를 기술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인데, 주석하는 이가 억지로 갖다 붙이기를 좋아한 것이다"라며 지나친 주석에 비판을 가하고 있다. 이와같이 지봉은 억지로 고사를 끌어들여 가면서 두시를 詩史로 몰고가려는 주석의 오류를 비판하며, 두시에도 어떤 목적성을 띠고 있지 않은 순수시가 있음을 보여주고자 했다. 이러한 태도는 다음 시 해석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또 지봉은 [麗人行]의 '楊花雪落覆白 靑鳥飛去銜紅巾'(23,24)에 대해 주석자들이 곡해하여 성급하게 해석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前句는 즉경을 읊은 것이고, 後句의 '靑鳥飛去'는 宮使가 연달아 왕래한다는 뜻으로, '紅巾'은 당나라에서 물건을 내릴 때 싸는 붉은 명주 보자기로 해석하였다.
먼저 이 시의 시대적 배경을 보면 天寶 십이년(753년) 당시 양귀비의 專寵으로 양씨 일가 친척들은 온갖 세도를 누리고 있었으니, 언니는 韓國夫人, 두 동생은 國夫人, 秦國夫人이 되었고, 사촌 오라비 양국충은 우승이 되어 炙手可熱의 권세를 누리며 괵국부인과 姦淫을 하여 만인의 빈축을 샀다. 이에 두보는 그들의 荒淫無道한 생활의 일면을 예리하게 비판한 것이다.
주석자들이 곡해하고 있다는 말은 곧 인용된 구에 대해 대부분 楊國忠과 國夫人과의 姦淫을 풍자한 것으로 풀이하고 있음을 이른다. 그리고 후구는 하늘의 사자인 파랑새가 날아와 부인의 붉은 수건을 입에 물고 희롱한다는 뜻으로 둘의 密通을 암시한 것으로 본다. 모두가 時事와 관련시켜 해석하려 하고 있다.
그러나 지봉은 이러한 주석자들의 해석을 지나치게 곡해한 것으로 보고 그냥 눈앞에 보이는 실제의 풍경을 그린 것이라 했다. 후구도 靑鳥에 비유된 수많은 시종들이 붉은 보자기에 뭔가를 싸 가지고 오고가는 것으로 해석하여 어떤 暗喩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시를 지은 上巳節에 曲江 부근의 놀이 풍경을 단순히 읊은 것으로 보고자 했다.
[初月]이란 시에 대해서도 주석자는 각종 역사적 사실을 이끌어들여 전팔구를 전부 時史의 비유로 가득찬 시로 해석하고 있지만 지봉은 "이 시는 초승달을 형용하여 그가 본 바를 기술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인데, 주석하는 이가 억지로 갖다 붙이기를 좋아한 것이다"라며 지나친 주석에 비판을 가하고 있다. 이와같이 지봉은 억지로 고사를 끌어들여 가면서 두시를 詩史로 몰고가려는 주석의 오류를 비판하며, 두시에도 어떤 목적성을 띠고 있지 않은 순수시가 있음을 보여주고자 했다. 이러한 태도는 다음 시 해석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 杜詩 '兎應疑鶴髮 蟾亦戀貂 '(*[月]-5,6) 註上句自言其老 下句自言其貧 余意以其月白故兎疑鶴髮 天寒故蟾戀貂 結句云 '斟酌姮娥寡 天寒奈九秋' 亦承上之意也(두시에 '토끼가 응당 학발을 의심할 것이고, 두꺼비도 또한 초구를 아쉬워 할 것이다'라 하였다. 주에 "윗글귀는 공이 스스로 그 늙음을 말한 것이고, 아랫글귀는 스스로 그 가난함을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나의 의견으로는 달은 희기 때문에 토끼가 학발을 의심하고, 하늘이 차기 때문에 두꺼비가 초구를 아쉬워한 것이다. 끝 귀에 "항아의 외로움을 짐작하니 하늘은 차가운데 이 가을을 어이할꼬?"라고 한 것도 또한 위의 뜻을 이은 것이다.
역시 순수하게 달을 읊은 시인데도 불구하고 {趙註杜律}을 비롯한 대부분의 주석서에서 한결같이 두보의 늙음과 가난함을 끌여들여 시를 해석하고 있다. 두보의 신세와 관련시켜 해석한 기존의 주석과 '鶴髮'을 '月色'으로, '戀貂 '를 '天寒'과 관련시켜 순수하게 달을 읊조린 것으로 풀이한 지봉의 해석은 매우 대조적이다. 그러나 어느 해석이 옳은지는 판단할 수 없지만 일단 지봉의 해석이 독창적인 것만은 사실이다. 이러한 독창적 해석은 자신의 비평적 안목에 대한 강한 자부심의 발로에서 기인한 것이다. 그 자부심도 단순한 지식이 아닌 수많은 전적을 읽고 이를 통한 철저한 고증에서 비롯된 것이다. [江梅]에 대한 주석의 오류를 지적하고 있음이 그 대표적인 한 예라 하겠다.
# 老杜 [江梅]詩註 江梅江邊梅也 如在嶺曰嶺梅 在野曰野梅 官中所種曰官梅 按范至能梅譜云 遺核野生 不經栽接者 爲江梅 冬至前開者爲早梅 其枝 曲蒼蘚麟皺者爲古梅花 比江梅色微淡 似杏者爲杏梅 老杜註似誤(노두의 [강매]시 주에 보면 '강매는 강변에 있는 매화이다. 만일 고개에 있다면 영매라 했을 것이고, 들에 있다면 야매라 했을 것이며, 관중에 뿌려진 것은 관매라고 했을 것이다'라고 했다. 상고하건대 범지능의 {매보}에 "매화 씨가 떨어져 들에 나서 한 번도 옮겨 심거나 접붙이지 않은 것을 강매라고 한다"라 했다. 또 "동지 전에 피는 것을 조매라 하고, 그 가지가 구부러지고 푸른 이끼가 끼고 비늘같은 껍질이 생겨 파리한 것을 고매라 한다. 꽃이 강매에 비해서 빛이 연하여 살구꽃과 같은 것을 행매라 한다"라 했다. 그렇다면 노두의 주는 잘못인 듯싶다).
두보는 成都 草堂을 꾸미며 萬花百草를 손수 심는 등 花卉에도 造詣가 깊어 그의 시에는 온갖 꽃이름이 등장한다. 매화를 읊은 시구만도 30여개나 되며, 그 가운데 '巡 索共梅花笑 冷蘂疎枝半不禁'(*[舍弟觀赴藍田取妻子到江陵喜寄三首(二)]-7,8)은 梅詩의 제일로 人口에 널리 膾炙되기도 한다. 또 두시에는 주석에 인용된 '欲發照江梅'(*[徐九少尹見過]-8), '江路野梅香'(*[西郊]-4), '陰風過嶺梅'(*[秋日荊南述懷三十韻]-24) '東閣官梅動詩興'(*[和裵迪登蜀州東亭送客逢早梅相憶見寄]), 이외에도 '*和裵迪登蜀州東亭送客逢早梅相憶見寄', '四月熟黃梅'(*[梅雨]-2), '江縣紅梅已放春'(*[留別公安太易沙門]-6) 등 각종 매화가 등장한다. 이처럼 매화는 두시의 중요한 소재가 되고 있으므로 이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필요하다고 본다. 지봉이 인용한 주석은 {纂註分類杜詩}에 趙註(趙 :{趙註杜律})로 되어 있는데 {杜詩諺解}(권18-장4b)에도 그대로 인용하고 있다. 趙 의 주는 단순히 피는 장소에 따라 이름을 붙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지봉은 宋의 范成大(字:至能)가 지은 {范村梅譜}(1권)에 의거하여 그 의미를 명확히 밝히려 하고 있다. {范村梅譜}는 지능이 12종의 매화를 손수 기르며 기록한 것이기에 매화에는 전문가로 볼 수 있다. 또 그는 36종이나 되는 국화에 대한 기록을 적은 {范村菊譜}(1권)가 있는 것으로 봐서 원예에 대한 박식함을 인정할 수 있다. 따라서 지봉의 '江梅'에 대한 고증은 매우 타당성이 있는 것이다.
이외에도 지봉은 '煖老思燕玉'(*[獨坐二首(一)-5), '早時金 出人間'(*[諸將五首(一)]-4), '上有蔚藍天'(*[冬到金華山觀因得故拾遺陳公學堂遺跡]-3), '江湖多白鳥 天地有靑蠅'(*[寄劉峽州伯華使君四十韻]-79,80), '走置錦屠蘇'(*[槐葉冷淘]-12), '御氣雲樓敞 含風帳殿高'(*[千秋節有感二首(二)]-1,2), '爲君沽酒滿眼 '(*[入秦行贈西山檢察使竇侍御]-28)에 대한 주석의 오류를 지적하고 있다. 하나같이 여러 典籍을 끌어들인 철저한 고증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凡例에서 밝힌 348종이나 되는 많은 參考書籍이 이를 立證해준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지봉은 도처에서 철저한 문헌의 고증을 통하여 주석에 대한 오류를 지적함으로써 그동안 비판없이 수용해 온 기존의 諸學說에 수정을 가하고 있다. 이 역시 두시의 결점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문단의 만연된 풍조를 개조해 보려는 일단의 노력으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앞에서도 지적했지만 이러한 비평이 우리 나라에서 지봉 이전에는 찾아볼 수 없기에 더욱 소중하고 값어치가 있는 것이다.
이외에도 지봉은 '煖老思燕玉'(*[獨坐二首(一)-5), '早時金 出人間'(*[諸將五首(一)]-4), '上有蔚藍天'(*[冬到金華山觀因得故拾遺陳公學堂遺跡]-3), '江湖多白鳥 天地有靑蠅'(*[寄劉峽州伯華使君四十韻]-79,80), '走置錦屠蘇'(*[槐葉冷淘]-12), '御氣雲樓敞 含風帳殿高'(*[千秋節有感二首(二)]-1,2), '爲君沽酒滿眼 '(*[入秦行贈西山檢察使竇侍御]-28)에 대한 주석의 오류를 지적하고 있다. 하나같이 여러 典籍을 끌어들인 철저한 고증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凡例에서 밝힌 348종이나 되는 많은 參考書籍이 이를 立證해준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지봉은 도처에서 철저한 문헌의 고증을 통하여 주석에 대한 오류를 지적함으로써 그동안 비판없이 수용해 온 기존의 諸學說에 수정을 가하고 있다. 이 역시 두시의 결점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문단의 만연된 풍조를 개조해 보려는 일단의 노력으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앞에서도 지적했지만 이러한 비평이 우리 나라에서 지봉 이전에는 찾아볼 수 없기에 더욱 소중하고 값어치가 있는 것이다.
4. 語彙의 辨證
{芝峰類說} 가운데 語彙나 語句에 대한 釋義가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두시를 읽고 難澁하거나 論難이 있어 온 어휘나 어구를 각종 문헌을 근거로 두시를 새로이 해석하고자 했다. 이들 하나 하나를 살펴보면 지봉의 고증과 해석이 얼마나 독창성을 지니는지 알 수 있겠으나 이미 주석의 오류를 통해서 그 대강은 짐작할 수 있으므로 重論을 피하기 위해 한 두개만 언급하기로 한다.
먼저 우리 나라에서 가장 논란 많은 '業工'에 대한 풀이부터 보기로 한다.
{芝峰類說} 가운데 語彙나 語句에 대한 釋義가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두시를 읽고 難澁하거나 論難이 있어 온 어휘나 어구를 각종 문헌을 근거로 두시를 새로이 해석하고자 했다. 이들 하나 하나를 살펴보면 지봉의 고증과 해석이 얼마나 독창성을 지니는지 알 수 있겠으나 이미 주석의 오류를 통해서 그 대강은 짐작할 수 있으므로 重論을 피하기 위해 한 두개만 언급하기로 한다.
먼저 우리 나라에서 가장 논란 많은 '業工'에 대한 풀이부터 보기로 한다.
# 杜詩 杜鵑行曰 '業工竄伏深樹裏'(*[杜鵑行]-7) 車天輅嘗言 杜鵑雛曰 業工出雜書云 而余意業工猶言能工 謂杜鵑善竄伏於深樹間也(두시의 [두견행]에 말하기를 '業工竄伏深樹裏'라고 하였다. 차천로가 일찍이 말하기를 "두견의 새끼를 업공이라 한다고 잡서에 나온다"라 하였다. 그러나 나의 생각에는 업공은 '能工'과 같은 것이니 "두견은 깊이 나무 사이에 숨어 엎드리기를 잘한다"고 말한 것이다).
'業工'에 대해서 중국의 주석서에는 물론 {纂註分類杜詩}에서도 아무런 언급이 없다. {杜詩諺解}에도 '제 搭 이리 기픈 나못 소배 수머 굽스러슈믈 바지로이 鐸〈'(초17-05a)라고만 풀이되어 있고 별다른 주를 달지 않고 있다. 이에 대한 최초의 언급은 車五山에서 비롯된 것 같다. 오산이 {五山說林草藁}에서 "소시에 어떤 책을 보니 두견 새끼를 업공이라 하였는데 무슨 책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기록을 남긴 뒤 霽湖, 芝峰, 澤堂, 星湖, 五洲 등이 모두 이에 대한 주석을 달고 있다. 오산과 지봉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業業'의 訛傳으로 뒷글자를 중복하여 쓸 때 찍은 점(業 )이 잘못되어 '業工'으로 전해진 것이라 풀이하고, 그 뜻은 恐懼라고 했다. 五洲는 여기에다 '業已'의 業과 '工夫'의 工이 합친 뜻으로 보는 설도 있음을 제시해 놓고 있다.
그러나 {事文類聚}에 '業業竄伏深樹裏'의 '業業'이 보이긴 하지만 거의 모든 주석서들이 '業工'으로 쓰고 있고, 또 '業工竄伏 言昔爲天子身 臨萬方 今日之事 乃以竄伏深樹爲工'라는 주석에서도 '工'字를 그대로 쓰고 있는 것으로 봐서도 굳이 '業業'의 중복자로 볼 필요는 없다. 또한 그 의미도 숨기를 工巧히 잘하는 두견의 습성을 그린 것으로 본다면 지봉의 설은 매우 설득력이 있는 것이다.
다음에는 글자 한 字에 따라 작품의 문학성이 달라짐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事文類聚}에 '業業竄伏深樹裏'의 '業業'이 보이긴 하지만 거의 모든 주석서들이 '業工'으로 쓰고 있고, 또 '業工竄伏 言昔爲天子身 臨萬方 今日之事 乃以竄伏深樹爲工'라는 주석에서도 '工'字를 그대로 쓰고 있는 것으로 봐서도 굳이 '業業'의 중복자로 볼 필요는 없다. 또한 그 의미도 숨기를 工巧히 잘하는 두견의 습성을 그린 것으로 본다면 지봉의 설은 매우 설득력이 있는 것이다.
다음에는 글자 한 字에 따라 작품의 문학성이 달라짐도 보여주고 있다.
# 杜詩曰 '隣人有美酒 稚子也能 '(*[遣意二首(二)]-7,8) 註放翁以也字作夜 最得村意云 余謂詩意 以爲隣家有酒 故稚子亦能 來 此尤有味 作夜字未穩(두시에 '이웃집에 좋은 술이 있으니 어린 아들이 외상으로 사올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주에 방옹이 '也라는 글자를 夜자로 한다면 시골이란 뜻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나는 말한다. 이 시의 뜻은 이웃집에 술이 있으니 어린아이라도 또한 능히 외상으로 사올 수 있을 것이라고 한 것이다. 이것이 더욱 맛이 있다. 也를 夜로 하다는 것은 적당하지 않다)
이본에 따라 '也'와 '夜'로 가지각색이다. 심지어 {纂註分類杜詩}와 이를 언해한 {杜詩諺解}와도 서로 다르다. 언해에서는 '이웃 지븨 사 미 됴 수를 두시니 져믄 아 리 바 도 能히 사오놋다'(중03권-26b)라 하여 '夜'로 되어 있다. 반면 {찬주}에서는 '也'라 했고, 須溪의 批點에 陸放翁의 설이 인용되어 있다. 또 蘇氏설에서는 馬擧의 일을 원용하여 '늙은이가 술 마시기를 좋아할 뿐만 아니라 어린아이가 술 사오는 것을 또한 기뻐한다'는 뜻으로 풀고 있다. 일설에는 '民心이 淳厚하여 비록 어린아이를 시켜도 또한 술을 사 올 수 있다'라고 하였다. 본문만으로는 지봉의 뜻을 자세히 헤아릴 수 없지만 시 해석에 있어 卽景을 중시한 점을 감안한다면 아마 이 시도 어린아이를 시켜서 술을 사오게 하는 것 또한 즐기는 村老의 실제 모습을 읊은 시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夜'가 아닌 亦과 같은 '也'字가 더욱 문학적인 맛이 있다고 한 것이 아닐까 한다.
지봉은 이밖에도 수십처에서 語彙나 語句의 辨證 作業을 통하여 杜詩의 재해석을 시도하고 있다. 그러나 아쉬운 것은 좀더 綜合的이거나 分析的이지 못하다는 점이다. 자세한 考究도 더러 있지만 대개가 일반 詩話에서나 볼 수 있는 短評에 머무르고 있다. 이러한 점이 지봉이 보여준 두시 비평의 한계인 것 같다. 그러나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詩文의 辨證 作業은 작품의 문학성을 판단하는데 중요한 관건이 된다는 점을 고려할 때 비록 短評이라 할지라도 결코 소홀하게 취급해서는 안 될 것이다.
지봉은 이밖에도 수십처에서 語彙나 語句의 辨證 作業을 통하여 杜詩의 재해석을 시도하고 있다. 그러나 아쉬운 것은 좀더 綜合的이거나 分析的이지 못하다는 점이다. 자세한 考究도 더러 있지만 대개가 일반 詩話에서나 볼 수 있는 短評에 머무르고 있다. 이러한 점이 지봉이 보여준 두시 비평의 한계인 것 같다. 그러나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詩文의 辨證 作業은 작품의 문학성을 판단하는데 중요한 관건이 된다는 점을 고려할 때 비록 短評이라 할지라도 결코 소홀하게 취급해서는 안 될 것이다.
Ⅲ. 結 論
이상에서 {芝峰類說}을 중심으로 芝峰의 杜詩 批評에 대해 살펴보았다. 각장을 요약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1. 먼저 資料의 檢證을 통하여 杜詩批評에 誤解의 소지가 될 수 있는 몇 가지 사실을 바로 잡았다. 芝峰이 杜詩로 잘못 인용한 시의 原作者를 밝혔고, 唐詩나 古詩로 引用한 詩句 가운데서 杜詩 5수를 찾아내었다. 그리고 編次上의 의문도 아울러 穿鑿하였다.
2. 芝峰의 杜詩批評을 考究하기 위해 杜詩의 缺點을 비판하는 것부터 살펴보았다. 芝峰은 杜詩에 나타나는 語句의 不連續, 題目과의 不相稱, 語彙 選擇의 誤謬, 故事의 不適合과 같은 시 내용과 직접 관련된 결점을 비판하고, 가끔 修正案도 提示하는 등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비평을 하였다. 형식면에도 지대한 관심을 갖고 杜詩의 誤謬를 지적하고 있는데 이는 당시 문인들이 杜詩를 盲從하여 무조건 模倣만 하려는 風潮에 一針을 가한 것으로 풀이된다.
3. 杜詩 註釋에도 誤謬가 많음을 지적하였다. 註解의 지나친 牽强附會나 故事를 잘못 예로 든 경우, 語彙에 대한 잘못된 풀이 등 폭넓은 문헌을 참고하여 이를 고증하고 있다. 물론 그의 비평은 일반적 통념과 다소 異見을 보이고 있지만 그것은 그동안 비판없이 수용해 온 기존의 諸學說을 수정해보려는 의지로 보여진다. 주석 誤謬에 대한 비판 역시 杜詩의 缺點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매너리즘에 빠진 文壇의 風潮를 改革해 보려는 일단의 노력으로 파악할 수 있다.
4. 芝峰은 數十處에서 語彙나 語句의 辨證 作業을 통하여 杜詩의 再解釋을 시도하고 있다. 주로 短評에 머물고 만 것이 많아 분석적이거나 종합적이지 못하다는 것이 한계이긴 하지만 詩文의 辨證 作業이 작품의 문학성을 판단하는데 중요한 관건이 된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短評이나마 소중한 자료가 아닐 수 없다. 게다가 지봉 이전에 우리 나라에서 杜詩에 대한 비평이 구체적으로 전개된 곳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으므로 그의 批評은 상당한 의의가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先賢의 學問에 대한 批判을 가한다는 것 자체가 망령된 짓이라는 의식이 당시 문단의 지배적인 風潮임에도 불구하고 聖域이나 다름없는 詩聖 杜甫의 시를 批判 修正하고, 선배들의 註釋을 교정한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의 批判的 力量에 自負心이 있었기 때문이며, 또한 實學의 先驅者답게 現實批判 意識이 남들보다 앞서 있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이러한 의식은 나중에 澤堂과 星湖로 이어져 杜詩에 새로운 局面을 맞게 된다.
1. 먼저 資料의 檢證을 통하여 杜詩批評에 誤解의 소지가 될 수 있는 몇 가지 사실을 바로 잡았다. 芝峰이 杜詩로 잘못 인용한 시의 原作者를 밝혔고, 唐詩나 古詩로 引用한 詩句 가운데서 杜詩 5수를 찾아내었다. 그리고 編次上의 의문도 아울러 穿鑿하였다.
2. 芝峰의 杜詩批評을 考究하기 위해 杜詩의 缺點을 비판하는 것부터 살펴보았다. 芝峰은 杜詩에 나타나는 語句의 不連續, 題目과의 不相稱, 語彙 選擇의 誤謬, 故事의 不適合과 같은 시 내용과 직접 관련된 결점을 비판하고, 가끔 修正案도 提示하는 등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비평을 하였다. 형식면에도 지대한 관심을 갖고 杜詩의 誤謬를 지적하고 있는데 이는 당시 문인들이 杜詩를 盲從하여 무조건 模倣만 하려는 風潮에 一針을 가한 것으로 풀이된다.
3. 杜詩 註釋에도 誤謬가 많음을 지적하였다. 註解의 지나친 牽强附會나 故事를 잘못 예로 든 경우, 語彙에 대한 잘못된 풀이 등 폭넓은 문헌을 참고하여 이를 고증하고 있다. 물론 그의 비평은 일반적 통념과 다소 異見을 보이고 있지만 그것은 그동안 비판없이 수용해 온 기존의 諸學說을 수정해보려는 의지로 보여진다. 주석 誤謬에 대한 비판 역시 杜詩의 缺點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매너리즘에 빠진 文壇의 風潮를 改革해 보려는 일단의 노력으로 파악할 수 있다.
4. 芝峰은 數十處에서 語彙나 語句의 辨證 作業을 통하여 杜詩의 再解釋을 시도하고 있다. 주로 短評에 머물고 만 것이 많아 분석적이거나 종합적이지 못하다는 것이 한계이긴 하지만 詩文의 辨證 作業이 작품의 문학성을 판단하는데 중요한 관건이 된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短評이나마 소중한 자료가 아닐 수 없다. 게다가 지봉 이전에 우리 나라에서 杜詩에 대한 비평이 구체적으로 전개된 곳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으므로 그의 批評은 상당한 의의가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先賢의 學問에 대한 批判을 가한다는 것 자체가 망령된 짓이라는 의식이 당시 문단의 지배적인 風潮임에도 불구하고 聖域이나 다름없는 詩聖 杜甫의 시를 批判 修正하고, 선배들의 註釋을 교정한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의 批判的 力量에 自負心이 있었기 때문이며, 또한 實學의 先驅者답게 現實批判 意識이 남들보다 앞서 있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이러한 의식은 나중에 澤堂과 星湖로 이어져 杜詩에 새로운 局面을 맞게 된다.
# by | 2005/04/18 10:32 | 고전문학 | 트랙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