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어당
2012. 10. 23. 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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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鲜肖像
목은영정(牧隱影幀) ![]() 종 목 시도유형문화재 제171호 (안동시) 명 칭 목은영정(牧隱影幀) 분 류 유물 / 일반회화/ 인물화/ 초상화 수량/면적 1폭 지 정 일 1983.06.20 소 재 지 경북 안동시 일직면 원리 산9 시 대 소 유 자 이장원 관 리 자 이장원 상 세 문 의 경상북도 안동시 유교문화권개발사업단 054-851-6392 일반설명 | 전문설명 고려 후기의 문신인 목은 이색(1328∼1396) 선생의 초상화이다. 이색은 공민왕 1년(1352) 세금제도의 개혁, 국방계획, 교육장려, 불교억제 등 여러 정책에 대해 건의문을 올렸다. 공양왕 1년(1389) 이성계 일파가 위화도 회군으로 세력을 잡자 장단지역으로 유배되기도 하였다. 이후 이성계가 그를 조정으로 불러 들였으나 이를 거절하고 이듬해 여강지역으로 가던 도중 생을 마치었다. 그림의 작가는 알 수 없으나 조선 전기의 대학자였던 권근의 찬하는 글이 있고, ‘영락갑신9월’이라는 기록이 함께 있어, 조선 태종 4년(1404) 이전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처음에는 은거한 뒤 야인 차림의 초상화가 따로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한편 이 초상화는 임진왜란 당시 분실되었다가 일본에 갔던 사신에 의해 되찾게 되었다는 설도 함께 전해오고 있다. ![]() 上传于2008-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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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일진무공신록권및영정(李守一振武功臣錄券및影幀) ![]() 종 목 시도유형문화재 제178호 (충주시) 명 칭 이수일진무공신록권및영정(李守一振武功臣錄券및影幀) 분 류 기록유산 / 문서류/ 국왕문서/ 교령류 수량/면적 4점 지 정 일 1995.06.30 소 재 지 충북 충주시 가금면 탑평리 47-5 시 대 소 유 자 경주이씨국당공파 관 리 자 충주시 상 세 문 의 충청북도 충주시 문화관광과 043-850-5163 일반설명 | 전문설명 공신록권이란 나라에서 공이 있는 신하에게 공신으로 임명할 때 내리는 임명서를 말한다. 이 녹권은 조선 인조 때의 무신 이수일(1554∼1632)에게 내려진 것으로, 평안도 병마절도사 겸 부원수로 이괄의 난을 평정하고 진무공신 2등 계림부원군에 봉해질 때에 내린 것이다. 이수일은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1583년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 선전관 등의 벼슬을 거쳤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싸웠고, 1624년 이괄의 난 때에는 반란군을 무찌르고 서울을 되찾은 공으로 군에 봉해졌다. 이수일의 영정은 전신상과 오른쪽으로 비스듬히 앉은 상, 정면상 3점으로, 전신상은 구름무늬가 그려진 흑녹색관복에 마치 1장의 천으로 마름질하여 붙여 놓은 듯하여 흉배무늬는 해태상 주위에 모란이 장식되어 있고, 두 손을 모아 마주 잡은 자세의 전신교의 좌상을 갖추고 있다. 오른쪽으로 비스듬히 앉은 상은 붉은 채색으로 엷게 그려진 얼굴과 주름선은 전신상의 선들과 일치해 종이를 대고 베낀 것같이 보이지만 수염이나, 귀, 관모표현이 미흡하고 간략히 윤곽을 그린 후 채색하였다. 이 영정의 표현은 17세기 초의 특징을 고루 표현한 것으로 보여진 것이다. ![]() 上传于2008-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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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정(影幀) ![]() 종 목 시도유형문화재 제178-2호 명 칭 영정(影幀) 분 류 유물 / 일반회화/ 인물화/ 초상화 수량/면적 3첩 지 정 일 1995.06.30 소 재 지 충북 충주시 가금면 탑평리 47-5 시 대 소 유 자 경주이씨국당공파 관 리 자 충주시 상 세 문 의 충청북도 충주시 문화관광과 043-850-5163 일반설명 | 전문설명 현재 준비중입니다. 충무공 이수일 영정은 전신상(99×184㎝)과 좌안 7분면상(32×47㎝) 정면상(34.5×42㎝) 등 3점으로 전신상은 운문이 그려진 흑녹색의 관복에 의습처리가 희미하여 마치 1장의 천으로 마름하여 붙여 놓은 듯이 보이며 흉배무늬는 해태상으로 주위에 모란이 장식되어 있고 공수자세에 흰 소매 끝이 관찰되며 좌안7분면의 전신교의좌상, 세모꼴 단령의 표현 내공과 첩리의 가지런한 나열족좌대에 한껏 벌린 목화놓임등 17세기초엽의 특징을 고루 갖추고 있다. 좌안 7분면상은 지본채색 붉은색으로 엷게 그려진 얼굴 주름 필선은 전신상의 선들과 거의 일치하는 것으로 종이를 대고 베낀 것으로 보이지만 수염이나 귀, 관모의 세부 표현은 미흡하고 의본은 간략히 윤곽을 그린후 채색하였다. 정면상은 좌안 7분면상과 규모와 필치가 거의 일치하며 전면상의 미숙한 표현이 전신상 및 좌안 7분면상과 다른 인물처럼 느끼게 하고 있다. 충무공 이수일「1554(명종 9)∼1632(인조 10)」은 서촌 시곡(현 음성군 감곡면 영산리)출생으로 조선중기의 무장, 자는 계순, 호는 은암, 본관은 경주로 이완 대장의 아버지이다. 1583년(선조 16)에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의 벼슬을 거쳐 1590년 선전관, 1592년 임진왜란때 장기현감으로 의병을 일으켜 예천 용궁에서 패전, 1593년 밀양부사가 되고 이어 경상우도 수군절도사로 승진하여 왜군을 대파, 가선대부에 올랐다. 회령부사, 나주목사를 거쳐 1596년 정유재란때 성주목사로 있으면서 명령을 어겨 결정 종군하였으며, 그후 함경북도 병마절도사를 세 번이나 역임하면서 변방을 침범하는 야인들을 소탕하였다.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으로 평안도 병마절도사겸 부원수로써 난을 평정하여 진무공신 2등, 계림부원군에 봉해진 뒤 형조판서에 이르렀으나 1632년 (인조 10)에 79세로 별세하여 좌의정에 추증되고 시호를 충무라 하였으며 현재 충주시 금가면 오석리에 묘소(충북도 기념물 21호)와 사당, 신도비가 남아 있어 경주 이씨 국당공파 종중에서 관리하고 있다. ![]() 上传于2008-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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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응인영정(韓應寅影幀) ![]() 종 목 시도유형문화재 제153호 (안산시) 명 칭 한응인영정및재실유물일괄(韓應寅影幀및齋室遺物一括) 분 류 유물 / 일반회화/ 인물화/ 초상화 수량/면적 10점 지 정 일 1995.04.24 소 재 지 경기 안산시 사사동 산111 시 대 조선시대 소 유 자 청주한씨충정공파종중 관 리 자 청주한씨충정공파종중 상 세 문 의 경기도 안산시 문화체육과 031-481-2796 일반설명 | 전문설명 조선 선조 때의 문신인 한응인(1554∼1614) 선생의 초상화 1폭과 초상화를 모셔두었던 사당 안에 남아 있는 9점의 목제 제사도구들이다. 한응인은 글씨를 잘 썼으며, 명나라를 오가며 조선과의 화합을 이끌어내었다. 예조판서·우찬성·우의정에 오르고, 네 차례나 공신에 책봉되기도 하였으나, 광해군 5년(1613)에 일어난 계축옥사에 연루되어 관직을 삭탈당하였다. 비단 위에 그린 선생의 초상화는 가로 91.5㎝, 세로 164㎝의 크기이다. 오른쪽을 바라보며 의자에 앉아 있는 전신상으로, 두 손을 소매 안에서 마주잡고 있다. 얼굴은 가는 붓으로 이목구비를 섬세하게 표현하였는데, 눈썹과 수염의 움푹한 곳은 붓질을 계속해 어둡게 하고, 도드라진 부분은 붓질을 적게 하여 밝게 하는 훈염법으로 처리하였다. 머리에는 오사모를 쓰고 정장 관복을 입었으며, 가슴부위에는 파도 위를 나르는 두 마리의 학무늬를 그렸는데 금칠을 하여 매우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가슴에 두른 각대는 1품 이상이 할 수 있는 것으로, 선생이 문관 종1품 때의 모습임을 짐작하게 한다.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에 유행한 그림형식으로, 전형적인 공신도 형식을 따르고 있다. 9점의 목제 제사도구로는 교의(죽은 이의 위패를 모셔두는 의자처럼 생긴 도구) 2점, 주독(죽은 이의 위패를 넣어두는 궤) 1점, 신주(죽은 이의 위패) 1점, 제상 2점, 향로상 1점, 모자상(제사 지낼 때 신이 내리게 하기 위해 술을 부어두고, 띠 묶음과 모래가 담긴 그릇을 올려두는 상) 2점이 남아 있다. 이들은 17세기 중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당시의 목제도구 연구에 기준이 될만한 소중한 자료들이라 할 수 있다. 한응인(1554∼1614)은 조선 선조대(宣祖代)에 활약하던 문신으로, 초서(草書)에 뛰어났고 네 차례나 명나라에 다녀왔다. 자는 춘경(春卿), 호는 백졸재(百拙齋)·유촌(柳村)이고, 본관은 청주, 시호는 충정(忠靖)이다. 영창대군(永昌大君)을 보호하라는 선조유교칠신(宣祖遺敎七臣)의 한 사람으로서 예조판서(禮曹判書)·우찬성(右贊成)·우의정에 오르고 평난공신(平難功臣)을 비롯해 네번이나 공신에 책록되기도 하였지만, 광해군(光海君) 5년(1613)에 일어난 계축옥사(癸丑獄事)에 연루되어 관직을 삭탈당하였다. 견본(絹本)에 그려진 이 초상화는 91.5㎝×164㎝ 크기로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에 유행한 전형적인 공신도 형식의 작품이다. 이와 유사한 작품으로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산해상(李山海像)이나 보물 제487호인 정탁상(鄭琢像)등이 있다. 오사모(烏紗帽)를 쓴 정장 관복으로 얼굴과 몸을 왼쪽으로 향한 전신좌안칠분면의좌상(全身左顔七分面椅坐像)이다. 두 손을 관복 속에 결한 단정한 모습을 보인다. 사모가 높고, 흉배는 파도 위에 쌍학이 나는 형상에 금채(金彩)를 가하여 화려한 분위기를 보이는 것이 특징이며, 각대는 1품 이상만 두르는 서대(犀帶)를 갖추고 있어 문관 종1품인 우찬성때의 모습으로 생각된다. 얼굴은 가는 붓으로 살아 있는 듯이 이목구비를 섬세하게 그렸으며, 눈썹과 수염은 훈염법(움푹한 곳은 붓질을 거듭하여 어두운 느낌을 주고, 도드라진 부분은 붓질을 덜 하여 밝은 느낌을 주는 그림 기법)을 사용하였다. 초상화를 봉안하였던 사당 안에는 17세기 중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목제흑칠제구(木製黑漆祭具)가 여러 점 남아 있는데, 종류는 교의(交椅)(죽은 이의 위패 등을 모셔 두는 의자처럼 생긴 기구) 2점, 주독(主독)(죽은 이의 위패, 즉 신주를 넣어 두는 패)과 신주 1점, 제상 2점, 향로상 1점, 모사상(茅砂床)(제사 지낼 때 신이 내리게 하기 위해 술을 붓는, 띠 묶음과 모래가 담긴 그릇을 올려 두는 상) 2점 등이다. 이는 이성지(李成之)의『재물보(才物譜)』에 소개된 제례용구(祭禮用具)의 내용과도 부합된다. 이들 제구는 조선 후기 목제구 연구에 기준이 될 만한 중요한 자료들이다. ![]() 上传于2008-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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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후재영정(申厚載影幀) ![]() 종 목 시도유형문화재 제154호 (음성군) 명 칭 신후재영정(申厚載影幀) 분 류 유물 / 일반회화/ 인물화/ 초상화 수량/면적 1폭 지 정 일 1986.04.28 소 재 지 충북 음성군 감곡면 오궁리 209 시 대 조선시대 소 유 자 평산신씨종중 관 리 자 신현익 상 세 문 의 충청북도 음성군 문화공보과 043-871-3063 일반설명 | 전문설명 조선 후기의 문신이었던 신후재(1636∼1699) 선생의 초상화이다. 신후재는 현종 원년(1660) 문과에 급제하여 강원도관찰사 등을 지냈으며, 갑술옥사(1694)에 얽혀 옥살이를 한 후에는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초상화는 관복을 의젓하게 차려입고, 홀(笏:신하가 허리띠에 차고 다니는 패)을 두 손으로 받쳐든 채,의자에 앉아 있는 전신상이다. 관복의 차림새가 숙종 대의 양식으로 보이나 초상화 양식이 당시의 기법과 차이를 보이고 있다. 즉, 두 손을 모아 관복의 소매 안에 넣지 않고 홀을 받들어 쥔 점, 손톱을 두드러지게 그린 점, 의복 위로 허리띠를 그리지 않은 점, 의자와 발받침대가 겹쳐진 부위의 어색한 표현 등이 그러하다. 이처럼 독특한 표현양식으로 보아, 선생이 사은사로 청나라에 다녀올 때에 가지고 온 것으로 추정된다. 초상화의 연구에도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신후재(1636∼1699)는 조선조(朝鮮朝)의 문신(文臣)으로 본관(本貫)은 평산(平山), 호(號)는 규정(葵亭)이다. 현종(顯宗) 원년(元年)(1660)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及第)한 후 벼슬길에 올라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 등을 지냈으나,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삭직(削職)되었다가 기사환국(己巳換局)(1689)으로 남인(南人)이 집권하자 우승지(右承旨), 도승지(都承旨) 등을 역임하였다. 그후 사은사겸진주주청부사(謝恩使兼陣奏奏請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강화(江華), 개성부유수(開城府留守)·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등을 지냈으며, 갑술옥사(甲戌獄事)(1694)에 유배되어 숙종(肅宗) 23년(1697)에 석방된 뒤 은퇴하여 충주(忠州) 오갑장(鰲甲莊)에 들어가 학문에만 전념했다. 영정은 좌안8분면(左顔八分面)의 정장관복(正裝官服)을 입고 의자에 앉은 전신상(全身像)이다. 복식(服飾)은 숙종연간(肅宗年間)의 제식(制式)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초상화(肖像畵)의 상용형식(像容形式)에서는 동시대의 다른 초상화와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이릍테면 공수(拱手)를 취하지 않고 양손에 홀(笏)을 받들어 쥔 점, 손톱의 형용(形容), 단령(團領) 위에 각대(角帶)를 나타내지 않은 점, 의자와 족좌대(足座臺)가 겹쳐진 부위의 불합리한 형태표현 등이 특이하다. 따라서 이 초상화는 후손가(後孫家)에 전해오는 바대로 사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을 때의 지래본(持來本)일 것으로 추정되며 이런 점에서 초상화사연구(肖像畵史硏究)의 주목할 만한 자료라고 볼 수 있다. ![]() 上传于2008-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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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한상경영정(信齋韓尙敬影幀) ![]() 종 목 시도유형문화재 제166호 (남양주시) 명 칭 신재한상경영정(信齋韓尙敬影幀) 분 류 유물 / 일반회화/ 인물화/ 초상화 수량/면적 1폭 지 정 일 1998.04.13 소 재 지 경기 남양주시 진접읍 금곡리 785 시 대 조선시대 소 유 자 청주한씨문간공파종회 관 리 자 국립중앙박물관 상 세 문 의 경기도 남양주시 문화관광과 031-590-2064 일반설명 | 전문설명 조선 초기의 문신 한상경(韓尙敬: 1360∼1425)의 영정(影幀)이다. 조선 초기의 문신 한상경(韓尙敬: 1360∼1425)의 영정(影幀)이다. 한상경은 본관은 청주(淸州) 호는 신재(信齋), 호부상서(戶府尙書) 공의(公義)의 손자이며 판후덕부사(判後德府事) 수(修)의 아들이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고려말 1382년(우왕 8)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조선이 건국되자 1392년 이성계를 추대한 공으로 익대개국공신(翊戴開國功臣) 3등에오르고 서원군에 봉해졌다. 중추원 도승지, 경기좌도 관찰사 등을 맡아 보다가 제3대 태종 때 이조판서를 거쳐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으로 승진되었고, 우의정, 영의정에 이르렀다. 글씨를 잘 썼다고 전한다. 비단에 그려진 이 영정은 각이 약간 내려간 사모에 아래로 처진 삽금대(鈒金帶)를 찬 담홍포(淡紅袍)를 입고 공수를 한 채 긴 의좌에 앉아 있는 모습이다. 이러한 형식은 조선 초에 유행하였다. 얼굴은 좌안8분면(左顔八分面)하여 약간 틀고, 상체는 대체로 정면을 향하며, 양 다리는 왼쪽으로 치우친 자세이다. 특히 왼쪽을 향해 각기 방향을 달리하여 놓은 발을 비롯하여 속옷의 색감, 옷자락 등의 표현에서 정연하고 위용있는 공복본 초상화에 자연스러움과 생동감을 더하고 있다. 또한 옷주름선은 양감과 입체감이 잘 나타나 있다. 이 작품은 조선 초기 15세기 초상화를 17세기에 들어와 다시 중모(重模)한 것이지만 이 시기를 대표할 만한 작품성을 지니고 있는 걸작이다. 원래 그의 사당에 봉안되었다가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 上传于2008-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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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행영정(辛景行影幀) ![]() 종 목 시도유형문화재 제155호 (괴산군) 명 칭 신경행영정(辛景行影幀) 분 류 유물 / 일반회화/ 인물화/ 초상화 수량/면적 1폭 지 정 일 1986.04.28 소 재 지 충북 괴산군 청안면 문방리 153 시 대 소 유 자 탄티영산신씨종중 관 리 자 탄티영산신씨종중 상 세 문 의 충청북도 괴산군 문화체육과 043-830-3444 일반설명 | 전문설명 조선 중기의 문신인 신경행(1547∼?)선생의 초상화이다. 신경행은 1577년 문과에 급제하여 한산군수, 충청도순찰사 종사관 등의 벼슬을 하였다. 종사관으로 있을 때 이몽학의 난이 일어나자 난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웠다. 그가 죽은 후 예조판서에 증직되었으며, 청난공신으로 영산군에 봉해졌고, 시호는 ‘충익’이다. 이 초상화는 선생이 선조 37년(1604) 공신이 된 것을 기념하여 왕명으로 그렸던 공신상을 후에 다시 옮겨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얼굴은 약간 오른쪽으로 향한 채 두 손은 옷소매 안에서 마주잡고 있는 관복 차림의 전신좌상이다. 옮겨 그린 이모본이기는 하나, 오른쪽으로 살짝 돌린 얼굴 표현이나 양 어깨의 경사각이 심한 차이를 보이는 점 등은 조선 중기 초상화 기법을 잘 보여준다. 특히 집무복의 트임새로 내비치는 속옷 자락이나 발 받침대 밑에 깔린 화문석 돗자리 등은 공신상의 전형적인 특징을 보여준다. 다만, 신경행이 벼슬로 있던 당시에는 사모가 낮았던데 반하여 이 그림에서는 높게 표현되어 있어 조선 후기 즈음에 옮겨 그린 것으로 추측된다. ![]() 上传于2008-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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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방촌영정(黃방村影幀) ![]() 종 목 시도유형문화재 제129호 (진안군) 명 칭 황방촌영정(黃방村影幀) 분 류 유물 / 일반회화/ 인물화/ 초상화 수량/면적 1점 지 정 일 1987.04.28 소 재 지 전북 진안군 안천면 백화리 905 시 대 소 유 자 화산서원 관 리 자 화산서원 상 세 문 의 전라북도 진안군 문화관광과 063-430-2322 일반설명 | 전문설명 화산서원에 모셔둔 방촌 황희(1363∼1452) 선생의 초상화이다. 황희는 조선 전기의 재상으로 내외 관직을 두루 거치면서 조선 개국 초기의 문물과 제도의 정비에 힘썼다. 이 초상화는 경북 상주의 옥동서원에 소장되어 온 것을 헌종 10년(1844)에 옮겨 그린 것으로, 선생의 온유한 인품과는 다르게 오히려 엄숙하고 근엄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가로 54㎝, 세로 80㎝의 크기로, 비단 바탕에 채색하였으며, 원본 이상으로 우아한 느낌을 주어 국가 표준 영정으로 지정된 바 있다. 상주 옥동서원의 초상화는 선생이 62세 되던 해에 그린 것으로, 이를 옮겨 그린 그림이 5점 정도 있었으나 전란 중에 모두 소실되고, 노덕서원과 파주영당에 모사본이 전해오고 있는데 그 중에도 이 화산서원의 초상화가 가장 우수한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홍여하가 이 초상화를 보고 선생의 인품에 대해 적어 놓은 글이 있는데, 다음과 같다. ‘평소 집에 있을 때는 그저 온화하여 어린 종들이 몰려들어 수염을 잡아당기며 안아달라고 조르거나 먹을 것을 내라고 조르기를 마치 제 부모에게 하듯 해도 내버려두지만 관복 차림에 홀을 꽂고 묘당에 나서면 조정이 숙연하였다. 비유컨대, 용이 못 속에 숨어 있을 때에는 자라나 도마뱀 따위의 업신여김을 받지만 한번 변화하면 비바람과 벼락을 일으켜 천지를 진동시키는 것과 같다.’ 화산서원(華山書院)에 모셔진 방촌 황희(黃喜) 정승의 영정은 옥동서원(玉洞書院) (경북 상주군 모동면 수봉리소재)에 소장되어온 영정을 헌종 10년(1844년)에 모사한 모사본 좌상으로 작자는 미상이나 견본(絹本)(54㎝ x 80㎝)에 진채(眞彩)로 그려졌으며, 진품이상으로 우아한 느낌을 주어 국가표준영정으로 지정된 바 있다. 본래 상주 옥동서원본 영정은 방촌이 62세때 초상이라고 밝혀졌고, 이에 대한 모사본 5∼6본이 산재해 있었으나, 모두 전란중에 소실되었고, 나주 노안면(羅州 老安面) 소재 노덕서원본(老德書院本)과 파주영당본(坡州影堂本)이 모사본으로 전해오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이 화산서원본이 제일 우수한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홍여하(洪汝河)(1621∼1678)가 방촌황공(방村黃公)의 영정에 찬(撰)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평소 집에 있을때는 그저 온화하여 어린 종들이 몰려들어, 수염을 잡아 당기며 안아 달라고 하거나 먹을 것을 내라고 조르기를 마치 아이가 제 부모를 조르듯 해도, 내버려 두다가 궁복(宮服)차림에 홀(笏)을 꽂고 묘당(廟堂)에 나서면 여러 관료가 쩔쩔매고 조정이 숙연해 지기를 마치 명문가의 자제가 그 부형(父兄)을 경외하듯 하였다. 비유하건대 신용(神龍)이 못속에 숨고 수렁에 서려 있을 때에는, 자라나 도마뱀 따위의 업신여김을 받다가도 한 번 변화하면 비바람과 벼락을 일으켜 산곡(山谷)을 진동시키고, 하해(河海)를 뒤집어 도리어 도저히 측량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당시에는 별로 두드러진 바가 없는 듯 하였으나, 지금 300년이 지난 뒤에는 부녀와 어린애까지 그 유풍(遺風)을 그리워하며, 그 성명을 외우고 있다. 이로써 본다면 그 위엄을 목격하며, 그 의논을 듣고도 오히려 그 지닌 바를 다 알지 못하것을, 하물며 이 한 폭의 영정을 보고 그 평생을 어떻게 조금이나마 상상해 낼수 있으랴?」 ![]() 上传于2008-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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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일상영정(田日祥影幀) ![]() 종 목 시도유형문화재 제127호 (예산군) 명 칭 전일상영정및한유도(田日祥影幀및閒遊圖) 분 류 유물 / 일반회화/ 인물화/ 초상화 수량/면적 2점 지 정 일 1987.12.30 소 재 지 충남 예산군 고덕면 호음리 22 시 대 조선시대 소 유 자 전용국 관 리 자 전용국 상 세 문 의 충청남도 예산군 경영관리실 041-330-2314 일반설명 | 전문설명 화가 김희겸이 그린 그림으로, 조선시대의 무신인 석천 전일상(1700∼1753) 선생의 초상화 1점과 선생이 한가로이 더위를 피하고 있는 풍경을 그린 한유도 1점이다. 전일상 선생은 경상좌병사로 종2품의 당상요직을 지낸 인물이다. 비단에 채색하여 그린 선생의 초상화는 가슴의 흉배에 두마리의 학을 수놓은 관복을 차려 입고, 의자에 앉아 있는 전신좌상으로, 가로 90.2㎝, 세로 142.4㎝의 크기이다. 한유도는 가로 87.5㎝, 세로 119.5㎝의 크기로, 선생이 누마루가 있는 정자 위에 앉아 한가로이 더위를 피하고 있는 장면을 그리고 있다. 언덕 위에 기와 정자가 서 있고 언덕 너머로는 담장이 있으며 정자 앞으로는 냇물이 굽이쳐 흐른다. 정자 앞뒤에는 해묵은 버드나무와 오동나무가 한 그루씩 서 있어 운치를 더하고, 편한 옷차림으로 정자에 나와 앉은 선생이 검을 기둥에 기대어 매를 손등에 얹고서 여인네의 시중을 받고 있다. 누마루에 오르는 두 여인은 술병과 과일이 든 쟁반을 들고 있고, 정자 아래로는 두 마리의 개가 장난을 치고 있다. 화폭에 ‘무진유월일제(戊辰流月日製) ’라는 글이 있고 그 끝에 김희겸의 낙관이 찍혀있어 영조 24년(1748)에 그린 것임을 알 수 있다. 풍속도 중에서 매우 오래된 것으로 그림에 나타난 생활상이나 문물의 묘사는 당시의 문화나 생활을 엿볼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 上传于2008-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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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운상영정(田雲祥影幀) ![]() 종 목 시도유형문화재 제147호 (홍성군) 명 칭 전운상영정(田雲祥影幀) 분 류 유물 / 일반회화/ 인물화/ 초상화 수량/면적 1점 지 정 일 1995.10.07 소 재 지 충남 홍성군 홍동면 신기리 822-6 시 대 소 유 자 전병만 관 리 자 전병만 상 세 문 의 충청남도 홍성군 문화공보실 041-630-1227 일반설명 | 전문설명 조선 후기의 무신인 전운상(1694∼1760) 선생의 초상화이다. 전운상은 숙종 43년(1717) 24세의 나이로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함경도 부사로 있을 때 어진 정치를 베풀어 왕의 표창을 받기도 하였다. 비단 바탕에 채색하여 그린 선생의 초상화는 감색 조복을 입고 의자에 앉아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전신좌상으로, 크기는 가로 88.0㎝, 세로 136.5㎝이다. 의자에는 호랑이 가죽이 덮혀 있고, 두손은 옷 소매자락 안에 공손히 모아 두었으며, 가죽신을 신고 있는 발은 팔(八)자 모양으로 벌리고 있다. 관복은 호랑이무늬가 있는 흉배를 가슴에 붙이고 그 위에 허리띠를 둘렀다. 얼굴은 붉은색으로 엷게 칠하고 수염은 작은 붓으로 세밀하게 표현하였는데, 눈이 날카롭고 얼굴에 살이 없어 무인의 특징을 잘 담아내었다. 그린 이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한유도(충청남도지정문화재 제127호)와 그 솜씨가 같아서 한유도를 그렸던 화원 김희겸이 영조 16년(1740)경에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손상이 없고 보관상태도 양호하다. 홍주위 영장(營將) 전시원의 아들로 자는 용백(龍伯), 호는 자천(紫泉)이다. 숙종 갑술년 3월 23일에 출생하였는데 용모가 출중하고 문무를 겸한 인재로서 정유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경자년에 선전관이 되었다. 얼마후 판관에서 훈련어영천총부총관금위중군, 금위별장등 여러직을 역임하고 춘천, 남양, 회령, 평양, 전라좌수사, 경상좌도병사, 삼도풍어사등 여러곳에서 봉직하였다. 임지에서 봉직하고 있을 때 농사에 각별한 관심이 있어 뽕나무 심기를 권장하였으며, 흉년이 들자 비축미를 털어 구휼하여 조정에서 새서(璽書)를 내려 표창하였고 말을 하사하기도 하였으며, 춘천에서 있을때는 보삼고(補參庫)란 제도에 의해서 매년 나라에 조공하던 인삼 때문에 백성이 곤란을 격고있자 이를 면해주기도 하였다. 춘천은 관동의 요새라 연무청을 설립하여 무사를 훈련시켰고, 좌수영에 있을 때는 "해골선이란" 병선을 창안하여 건조하였다. 영정은 영조(1740)때 화사 김희겸이 그린 것으로 추정되며, 손상이 없고 보관상태가 양호한 채색화로써 홍동면 신기리 정병만이 보존하고 있다. ![]() 上传于2008-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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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만선생영정(張晩先生影幀)장만선생유복상 ![]() 종 목 시도유형문화재 제142호 (김포시) 명 칭 장만선생영정및공신록권(張晩先生影幀및功臣錄券) 분 류 유물 / 일반회화/ 인물화/ 초상화 수량/면적 3점 지 정 일 1991.10.19 소 재 지 경기 김포시 하성면 가금리 7 시 대 조선시대 소 유 자 인동장씨태상경파충정종친회 관 리 자 인동장씨태상경파충정종친회 상 세 문 의 경기도 김포시 문화공보담당관실 031-980-2741 일반설명 | 전문설명 조선 중기의 문신인 낙서 장만(1566∼1629) 선생의 영정 2점과 진무공신 1등에 봉함을 명하는 교서이다. 장만은 전라도와 함경도의 관찰사와 형조판서 등의 벼슬을 거쳐 우찬성을 지낸 문신이며, 말년에 이괄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진무공신 1등으로 옥성부원군에 봉해졌다. 시호는 ‘충정’이다. 영정은 공신도(功臣圖) 형식의 초상화 1점과 유학 복식의 초상화 1점이다. 그 중 공신도 초상화는 인조 3년(1625)에 도화서 화원에 의해 그려졌는데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에 걸쳐 보여지는 전형적인 공신도에 속하는 작품이다. 상단부분에 ‘충정’이라는 시호가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그가 죽은 후에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크기는 가로 113㎝, 세로 240㎝이다. 유복(儒服)차림의 초상화는 그린 연도는 알 수 없으나 공신도 초상화와 비슷한 연대에 그려진 것으로 보인다. 크기는 가로 113㎝, 세로 253㎝이다. 초상화와 함께 보관중인 교서는 장만을 진무공신 1등에 봉한다는 내용이며, 여기에는 모두 32명의 공신이 기록되어 있어 당시의 인물을 연구하는데 도움이 되는 자료이다. 크기는 가로 375㎝, 세로 198㎝이다. ![]() 上传于2008-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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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민영정(李好閔影幀) ![]() 종 목 시도유형문화재 제144호 (양평군) 명 칭 이호민영정외일괄유물(李好閔影幀外一括遺物) 분 류 유물 / / / 수량/면적 6점 지 정 일 1992.12.31 소 재 지 경기 양평군 옥천면 신복리 시 대 조선시대 소 유 자 연안이씨종친회 관 리 자 연안이씨종친회 상 세 문 의 경기도 양평군 문화관광과 031-770-2473 일반설명 | 전문설명 조선 중기의 문신인 이호민(1553∼1634) 선생의 초상화와 그것을 담았던 함, 교지와 교지함, 시호족자 등 6점의 유물이다. 이호민은 선조 17년(1584) 문과에 급제한 뒤 예조판서를 거쳐 좌찬성까지 올랐으며, 임진왜란 때 왕을 의주까지 모신 공로로 선조 37년(1604) 호성공신에 올랐다. 선생이 공신으로 책봉될 당시에 그린 것으로 보이는 이 초상화는 가로 91㎝, 세로 163.5㎝의 크기로, 16세기 말·17세기 초의 유행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머리에는 사모를 쓰고, 흰 깃으로 목을 감싼 채 관복을 입고 있으며, 오른쪽을 바라보고 있다. 가슴에는 2마리 학과 모란을 수놓은 흉배가 있고, 1품 이상의 관리만이 두를 수 있는 물소 뿔로 만든 각대를 하고 있어 그의 관직을 짐작케 한다. 눈, 코, 입과 수염은 가는 붓으로 섬세하게 표현하였다. 옷은 굵은 붓으로 윤곽선과 몇 개의 주름만 나타내었고, 구름무늬는 먹의 농담을 조절해 가며 표현하였다. 바닥은 붉은색으로 화려하게 표현하였는데, 모직임을 나타내기 위해 가는 붓으로 작은 흰점들을 찍어 두었다. 시호족자는 선생이 돌아가신 후 인조 13년(1635)에 왕이 ‘문희공’이란 시호를 내린 것으로, 비단천에 증시문희공(贈諡文僖公)이라는 글귀가 가로로 쓰여있다. 교지는 2점으로, 선생의 시호를 내리는 내용을 담은 시호교지와 중국 명나라의 윤씨와 허씨부인에 관한 내용을 적은 교지가 있다. 두 부인에 관한 내용의 교지는 선생이 공신으로 책봉되던 당시에 하사받은 것으로 보인다. 영정함과 교지함은 두 함 모두 배나무에 삼베를 입힌 후 두껍게 옻칠을 한 것으로, 고사리 모양의 경첩과 국화무늬로 장식하고 있어 17세기 초 목공예 연구에 소중한 자료가 되고있다. 이호민(1553∼1634)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이조좌랑(吏曹佐郞)·부제학(副提學)·예조판서(禮曹判書)·좌찬성(左贊成)을 지냈으며, 자는 효언(孝彦), 호는 오봉(五峰)·남곽(南郭)·수와(睡窩), 본관은 연안(延安)이다. 임진왜란 때 조선의 공문서를 모두 작성하고 명(明)의 원군을 출병케 하였고, 왕을 의주까지 호성한 공으로 선조(宣祖) 37년(1604)에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봉해졌다. 현재 연안이씨종친회에는 공신 책록 당시에 그려진 영정과 영정함, 교지와 교지함 등이 보존되어 있다. 그 중 초상화는 91㎝×163.5㎝크기로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에 유행했던 전형적인 공신도 형식의 작품이다. 오사모(烏紗帽)를 쓴 정장 관복 차림으로 얼굴과 몸을 왼쪽으로 향한 전신좌안칠분면의좌상(全身左顔七分面椅坐像)이다. 쌍학과 모란 문양의 흉배와 각대는 1품 이상만 두르는 서대(犀帶)(중국 물소뿔로 만든 장식을 붙인 조선시대 정1품 벼슬의 허리띠)를 갖추고 있어 문관 종1품의 신분을 나타내고 있다. 안면(顔面)은 가는 붓으로 이목구비와 수염을 섬세하게 표현하였으며, 의습 처리는 굵은 묵선을 써서 윤곽선과 몇 개의 주름만 나타냈고, 옷감 무늬인 서운문(瑞雲文)은 먹의 농담으로 세밀히 처리하였다. 바닥에 깔린 붉은 색의 화려한 채전(彩氈)은 세필(細筆)을 세워서 점묘식(點描式)으로 문양을 찍어 첨모직(添毛織)임을 표현해냈다. 시호족자(諡號簇子)는 공의 사후 인조(仁祖) 13년(1635)에 내려진 것이고, 교지는 문희공익호교지((文喜公謚號敎旨)-74㎝×102.5㎝)와 만력(萬曆) 32년(1604년) 명의 윤(尹)부인과 허(許)부인에 관한 내용으로, 두 부인의 교지는 공의 호성공신 책봉과 함께 내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영정함과 교지함은 배나무에 삼베를 입히고 두껍게 옻칠을 한 것이다. 두 점 모두 여의두식 경첩(법회나 설법 때 강사가 갖는, 고사리 모양을 한 여의의 머리 모양을 본떠 만든 경첩)과 팔엽국화문 앞바탕 장식이 붙어있고, 판(板)과 판을 엮은 장식 또한 팔각국화문이다. 이 함들은 17세기 초 목공예사 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 上传于2008-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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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유영정(李萬유影幀) 이만유영정 ![]() 종 목 시도유형문화재 제148호 (담양군) 명 칭 이만유영정(李萬유影幀) 분 류 유물 / 일반회화/ 인물화/ 초상화 수량/면적 1폭 지 정 일 1987.06.01 소 재 지 전남 담양군 담양읍 천변리 80 시 대 조선시대 소 유 자 사유 관 리 자 이재령 상 세 문 의 전라남도 담양군 문화레저관광과 061-380-3253 일반설명 | 전문설명 조선 후기의 무신인 한원군 이만유(?∼1730)의 초상화로, 대·소본(大·小本) 2점이다. 이만유는 숙종 40년(1714) 무과에 오르고, 영조 4년(1728) 이인좌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자헌에 올랐다. 그 후 지중추부사를 거쳐 여러 지방의 목사를 지내었으며, 경상좌수사를 역임하던 중 생을 마치었다. 소본은 주인공이 약간 우측을 바라보고 있는 반신상으로서, 검은 사모를 머리에 쓰고 국가 의식 때에 대신들이 입던 조복을 단정하게 차려 입고 있다. 해태무늬를 수놓은 흉배로 보아 무관 종2품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는 선생이 영조 4년(1728) 이인좌의 난에 출정했을 때의 직위로, 선생이 공신의 서열에 오른 후, 왕명에 의하여 이 그림을 그렸던 것으로 보인다. 대본은 사모를 쓰고 단정하게 관복을 입고 앉아 두 손을 소매 안에 마주 잡고 있는 전신좌상으로, 선생의 말년의 모습을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얼굴은 굴곡이 지는 부위에 갈색을 넣어 표현하고 있어 조선 후기의 초상화 기법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정성들여 세밀하게 그려놓은 수염 표현은 인물의 인격과 개성을 담아내려한 화가의 노력이 엿보인다. ![]() 上传于2008-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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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유선생영정(申景裕先生影幀) ![]() 종 목 시도유형문화재 제118호 (광주시) 명 칭 신경유선생영정및공신녹권(申景裕先生影幀및功臣錄券) 분 류 유물 / 일반회화/ 인물화/ 초상화 수량/면적 1폭1축 지 정 일 1984.09.12 소 재 지 경기 광주시 도척면 진우리 726 시 대 조선시대 소 유 자 신길상 관 리 자 . 상 세 문 의 경기도 광주시 문화공보과 031-760-4821 일반설명 | 전문설명 조선시대의 무신인 신경유(1581∼1633) 선생의 초상화 1폭과 공신녹권 1축(두루마리)이다. 선생의 초상화는 검은 사모를 쓴 채 관복을 단정하게 차려입고 의자에 앉아 있는 전신좌상으로, 가로 90㎝, 세로 169㎝의 크기이다. 사모는 낮고, 마주 잡은 두 손의 아래로는 흰 속옷의 소매가 보인다. 발 받침대 위에 팔(八)자로 벌린 양 발과 바닥에 깔린 화려한 채색의 돗자리 등은 모두 17세기의 공신상의 특색을 보여준다. 금제 허리띠와 관복의 흉배에 있는 해태 무늬는 무관 종 2품의 품계를 말하는 것으로, 이는 공신 책봉 후 바로 그림이 제작되지 못하고 그가 황해도 병마절도사에 오른 뒤에 제작되었음을 알려준다. 이마와 양뺨을 짙은 연지로 물들인 것처럼 표현한 기법이나 위에 입은 겉옷과 관복의 트임새로 내보이는 안쪽의 단이 나란히 배열되어 있는 점 등은 역시 시기가 내려옴을 보여준다. 공신녹권은 선생이 인조 3년(1625) 2등 공신에 올라 왕으로 부터 하사받은 것으로, 두루마리 형태를 하고 있어 이를 펼치면 가로 193㎝, 세로 37㎝ 의 크기가 된다. 여기에다 4개의 선을 그은 후 다시 그 안에 76개의 선을 그어 붓으로 내용을 적어 놓았다. 뒷면에는 ‘유백증제 이후기서(兪伯曾製李厚基書)’라 쓴 다음 녹권을 내려준 날짜를 적고 임금의 도장을 찍어 놓았다. 신경유(1581∼1633)는 인조반정(仁祖反正) 때 공을 세워 정사공신(靖社功臣)2등과 동평군(東平君)으로 책봉되었으며, 이후 황해도병마사(黃海都兵馬使)와 충청도 및 전라도병마사를 지낸 무신이다. 자는 자관(子寬), 본관은 평산(平山)이며 도순변사(都巡邊使)(조선시대 군무를 총괄하기 위해 중앙에서 지방으로 파견한 국왕의 특사로 정2품 벼슬) 입(砬)의 아들이고 영의정 경진(景진)의 아우이다. 초상화의 크기는 169㎝×90㎝로, 오사모(烏紗帽)에 정장 관복을 입은 전신교의좌상(全身交椅坐像)이다. 사모의 높이가 매우 낮고, 공경의 뜻으로 두 손을 마주 잡은 공수(拱手)자세를 하고 있는 양손 사이에 흰 속옷 소매가 보이고, 족좌대(足座臺)위에 한껏 벌린 양 발, 그리고 바닥에 깔린 화려한 채전(彩氈)등은 모두 17세기 공신상의 특색이다. 그러나 초상화에 나타난 학정금대(鶴頂金帶)(가운데에 붉은 장식을 붙인 금제 허리띠로, 조선시대 종2품 벼슬이 착용하였다.)의 해태 문양 흉배는 무관 종2품을 말해 주는 것으로, 이것은 이 초상화가 정사공신 책록 후 곧바로 제작되지 못하고 그가 황해도병마절도사(黃海都兵馬節度使)에 오른 뒤 제작되었음을 알려 준다. 얼굴 처리에서 이마의 중심과 양 뺨을 마치 짙은 연지로 물들인 것처럼 나타내는 표현과 오른쪽 단령의 트임새에 내비치는 내공(內工) 및 첩리(帖裏)(윗도리와 치마 모양의 아랫도리가 이어졌고 허리에 주름이 잡혀 활동하기 편한 조선시대 사대부의 겉옷)가 나란히 배열되어 있는 점 역시 시대가 내려가는 특징이다. 정사공신 녹권은 인조반정 이후 공훈을 세운 신하들에게 주어진 것으로 신경유는 인조 3년(1625)에 2 등에 책록되었다. 193㎝×37㎝ 크기의 두루마리로 사주주선(四周朱線)을 긋고 상하단의 선은 좌우단 주선보다 약간 굵으며 사주 안에 76개의 계선((界線): 책이나 문서의 한 면에서 행과 행 사이를 구분한)을 긋고 그 안에 내용을 묵서(墨書)로 기재하고 있다. 녹권의 뒷면에는 묵서로 '유백증제 이후기서(兪伯曾製 李厚基書)'라고 기록한 다음 녹권내리는 날짜를 쓰고 다음에 '시명지보(施命之寶)'의 어보(御寶)1개를 찍었다. ![]() 上传于2008-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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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운룡장군영정(李雲龍將軍影幀) ![]() 종 목 시도유형문화재 제89호 (청도군) 명 칭 이운룡장군영정(李雲龍將軍影幀) 분 류 유물 / 일반회화/ 인물화/ 초상화 수량/면적 1폭 지 정 일 1975.12.30 소 재 지 경북 청도군 청도읍 원정2리 665-2 시 대 소 유 자 이균회 관 리 자 이균회 상 세 문 의 경상북도 청도군 문화관광과 054-370-6062 일반설명 | 전문설명 조선 중기의 무신인 이운룡(1562∼1610) 장군의 초상화이다. 이운룡은 문무를 겸비한 무신으로, 임진왜란 때에 충무공 이순신의 부장으로서 많은 전공을 세웠고 포도대장과 병마절도사 등을 역임했다. 이 상은 선생이 선조 37년(1604)년 공신으로 봉해졌을 때 임금의 명을 받아 그린 공신상으로 보인다. 관복의 가슴에 호랑이 무늬의 흉배를 두고, 금제 허리띠를 착용하고 있어 공신의 반열에 오를 당시의 벼슬이 종 2품이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조선 중기 공신도상의 전형적인 형식을 보이는 작품 중 하나로, 엄숙하면서도 단아한 분위기를 풍긴다. 장군의 출생지인 매전면 명대리에 상충사를 세우고 이 초상화를 보존하고 있다. 이운룡(1562∼1610)장군은 청도(淸道) 출신(出身)의 문무겸전(文武兼全)한 조선시대(朝鮮時代)의 무신(武臣)이다.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 장군(將軍)의 부장(部將)으로 많는 전공(戰功)을 세웠고 충무공 순국후(殉國後)에는 도총부부총관(都摠府部摠管), 포도대장(捕盜大將), 함경도병마절도사(咸鏡道兵馬節度使) 등을 역임했으며, 광해군(光海君) 2년(1610) 49세로 졸(卒)하였다. 이 영정(影幀)은 선조(宣祖) 37년(1604) 선무공신(宣武功臣) 3등훈(三等勳)을 받고 식성군(息城君)에 봉(封)해졌을 때 나라에서 내린 초상화(肖像畵)로 보이며 단호흉배(單虎胸背), 학정금대(鶴頂金帶)의 착용은 공신호책록(功臣號冊錄) 당시의 이 장군의 품계(品階) 즉 오위도총부부총관(五衛都摠府部摠管)이란 종2품(從二品)이 품계와 부합된다. 엄숙하면서도 단아한 이 초상화는 조선(朝鮮) 중기(中期) 공신도상(功臣圖像)의 전형적인 형식을 예시해 주는 가작(佳作)이다. ![]() 上传于2008-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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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제김유선생영정(儉齊金유先生影幀)검제김유선생영정 ![]() 종 목 시도유형문화재 제117호 (의왕시) 명 칭 검제김유선생영정(儉齊金유先生影幀) 분 류 유물 / 일반회화/ 인물화/ 초상화 수량/면적 1폭 지 정 일 1984.09.12 소 재 지 경기 의왕시 왕곡동40 시 대 조선시대 소 유 자 사유 관 리 자 청풍김씨판서공파종중 상 세 문 의 경기도 의왕시 문화공보과 031-345-2065 일반설명 | 전문설명 조선시대의 문신인 검제 김유(1653∼1719)선생의 초상화이다. 김유는 황해도 관찰사와 대제학을 지낸 문신이자 학자로,『동국여지승람』을 증보하였다. 영정은 검은 사모에 관리의 평소 집무복인 녹색의 관복을 입고 호랑이 가죽이 깔린 의자에 앉아 있는 전신상이다. 사모가 상당히 높고, 마주 잡은 두 손은 허리띠 아래에 놓여 있으며, 발 받침대의 두 발 사이에는 호랑이 얼굴의 일부가 정면으로 나타나 있다. 얼굴의 외곽선은 갈색으로 표현하고 움푹 들어간 부위는 갈색선을 조심스럽게 겹쳐 그려 붓질이 몰리도록 하여 어둡게 표현되었다. 수염은 검은 올과 흰 올을 정성스럽게 그려 넣어 사실적인 효과를 거두었는데, 이같은 사실성의 추구는 얼굴 검버섯 표현이나, 의복의 자연스런 선의 표현에서도 나타난다. 화면의 오른쪽 윗부분에 그림의 내력을 적은 기록이 남아 있어 선생이 64세 때인 숙종 42년(1716)에 그린 것임을 알 수 있다. 18세기 초 공신도상의 양식을 따른 문신상의 전형을 보여주는 좋은 예가 되는 작품이다. 김유(1653∼1719)는 황해도관찰사(觀察使)와 이조참판(吏曹參判) 겸 양관(兩館) 대제학(大提學)을 지낸 문신이자 학자로, 자는 식(埴), 호는 검재(儉齋), 본관은 청풍(淸風)이다.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 남계 박세채(南溪 朴世采)의 문하로 찬수낭관(簒修郎官)(낭관 : 조선시대 육조의 각 관아에서 실무를 담당하던 정랑과 좌랑을 총칭하는 용어)때『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을 증보하였다. 이 초상화는 오사모(烏紗帽)에 녹포단령(綠袍團領)(단령 : 조선시대 관리의 평소 집무복으로, 신랑의 혼례복으로 입기도 했다)의 정장 관복을 입고 호랑이 가죽이 깔린 의자에 앉은 전신좌안칠분교의좌상(全身左顔七分交椅坐像)이다. 화면의 오른쪽 상단에는 '검재김선생화상육십사세시사(儉齋金先生畵像六十四歲時寫)'라고 적혀 있어 그가 64세인 숙종(肅宗) 42년(1716)에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사모의 높이는 당시의 모제(帽制)를 반영하여 상당히 높고, 공수(拱手)(공경하는 뜻으로 두손을 마주 잡는 것)도 각대(角帶)보다 아래쪽에 놓여 있으며, 족좌대(足座臺)위의 두 발 사이에는 호랑이 얼굴이 정면으로 나타나 있다. 얼굴 처리를 살펴보면, 안면의 외곽선을 갈색선으로 그리고, 움푹 들어간 부위에는 갈색선을 조심스럽게 겹쳐 그어 붓질이 몰리는 곳이 어둡게 되었다. 수염은 검은 올과 흰 올을 정성스럽게 그려 넣어 사실적인 효과를 거두었다. 이 같은 사실성의 추구는 안면의 검버섯까지도 살 속에서 우러나온 것처럼 보이는 기법과 단령의 자연스런 의습선에서도 여실히 나타난다. 따라서 이 초상화는 18세기 전기의 공신도상 형식을 따른 문신상의 한 전형을 보여 주는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 上传于2008-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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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회암영당주희영정(江陵晦庵影堂朱喜影幀) ![]() 종 목 시도유형문화재 제107호 (강릉시) 명 칭 강릉회암영당주희영정(江陵晦庵影堂朱喜影幀) 분 류 유물 / 일반회화/ 인물화/ 초상화 수량/면적 1폭 지 정 일 1986.11.19 소 재 지 강원 강릉시 유천동 328 시 대 소 유 자 사유 관 리 자 주흥수 상 세 문 의 강원도 강릉시 문화체육과 033-640-5111 일반설명 | 전문설명 강릉 회암영당에 모시고 있는 회암 주희(주자)의 영정으로, 가로 60㎝, 세로 120㎝ 크기의 족자로 되어 있다. 머리에는 건을 쓰고 사대부들이 평상시에 편하게 입는 옷인 창의를 입고 두 손은 소매 안으로 모아 단정하게 앉아있는 전신좌상으로, 색채화로 되어 있다. 화폭의 상단 오른쪽 부터 세로로‘송태사회암선생진(宋太師晦菴先生眞)’이라는 제목과 7줄의 글이 있고 그 끝에 ‘숙묘어제찬(肅廟御製贊)’이라 적혀 있다. 조선 정조 1년(1777)에 충주 운곡서원에 보존했던 것을 한때 오봉서원으로 옮겼다가 고종 5년(1868)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하여 연천의 임창서원으로 옮긴 것을, 고종 24년(1887) 주씨 문중에서 이곳에 회암영당을 짓고 초상화를 옮겨 보관하고 있다. ![]() 上传于2008-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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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령대군영정(孝寧大君影幀) ![]() 종 목 시도유형문화재 제81호 (과천시) 명 칭 효령대군영정(孝寧大君影幀) 분 류 유물 / 일반회화/ 인물화/ 초상화 수량/면적 1점 지 정 일 1978.11.10 소 재 지 경기 과천시 중앙동 85-1 시 대 조선시대 소 유 자 연주암 관 리 자 연주암 상 세 문 의 경기도 과천시 문화체육과 02-3677-2065 일반설명 | 전문설명 조선 태종의 둘째 아들인 효령대군(1396∼1486)의 초상화로, 가로 70㎝, 세로 90㎝의 작은 규모의 작품이다. 효령대군은 태종의 셋째 아들로, 세종대왕의 형이다.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독실한 불교신자로 불경의 간행과 원각사 창건에 참여했다. 그림은 황색의 관모를 머리에 쓰고, 붉은색 홍포를 차려 입고 의자에 앉아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전신좌상이다. 얼굴은 정면을 향하고 있어 다른 부분의 표현보다 중요한데, 여기서는 약간 도식적이고 미숙하게 처리된 감이 있다. 코와 입술은 윤곽을 묘사하는데에는 신경을 썼으나 수염의 표현은 세밀하지 않으며, 또한 무언가를 잡고 있는 오른손의 형태도 불완전하다. 모자와 허리띠, 옷의 무늬 등에는 금칠을 하였는데 무게감을 실으려 고심한 흔적이 보인다. 화면이 다소 거칠고 정교하지 못한 것은 조선 전기의 초상화에서는 보기 어려운 모습으로 여러 번 옮겨 그린 탓으로 보인다. 이 그림은 몇 번 옮겨 그린 중모본이기는 하지만 조선 전기의 초상화가 거의 전해오지 않는 현 시점에서 소홀히 해서는 안될 작품이다. 현재 그의 초상화는 관악산 연주암에 보존되고 있다. 효령대군(1396∼1486)은 조선 태종(太宗)과 원경왕후(元敬王后)의 둘째 아들로 세종(世宗)의 형이다. 효성이 지극하고 불교에 독실하여 불경을 간행하고 원각사(圓覺寺)를 창건하는 데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이름은 보(補), 초명은 호(祜), 자는 선숙(善叔)이다. 현재 관악산 연주암에 전해 오는 이 초상화는 익선관(翼善冠)형태의 황색 관모에 녹색이 둘려진 홍포(紅袍)(조선시대 왕세자나 정3품 이상의 당상관이 공복으로 입던 붉은색 겉옷인 강사포)를 입고 탑형(榻形)(좁고 긴 평상 모양)의 용봉 의자에 앉아 있는 정면관(正面觀)의 전신좌상(全身坐像)이다. 크기가 90㎝×70㎝인 소폭으로, 여러 번 이모(移模)한 탓에 정교하지 않고 화면도 거칠게 처리되어 있다. 하지만 관모를 비롯하여 각대, 홍포의 문양 등은 금니(金泥)로 처리하였다. 얼굴은 정면을 보는 관계로 얼굴의 각 세부가 다른 초상화보다도 중요한데, 여기서는 도식적이고 미숙하게 처리되었다. 특히 코와 입술 표현에 있어 윤곽 묘사에만 치중하였고, 우리 나라 초상화에서 상당히 공들여 한올한올 표현하는 수염도 세밀하지 못하다. 지물(持物)을 잡은 오른손의 형태 역시 대강 처리하였다. 이와 같은 자세는 조선 전기 초상화에서 보기 어려운 것으로 이 그림이 갖는 특이한 표현이다. 이것이 비록 중모본(重模本)이기는 하지만, 조선 전기의 초상화가 거의 전해 오지 않는 현 실정에서 간과해서는 안 될 작품이다. ![]() 上传于2008-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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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숙이공영정(忠肅李公影幀) ![]() 종 목 시도유형문화재 제69호 (노원구) 명 칭 충숙이공영정(忠肅李公影幀) 분 류 유물 / 일반회화/ 인물화/ 초상화 수량/면적 1폭 지 정 일 1988.04.20 소 재 지 서울 노원구 하계동 산16 시 대 소 유 자 사유 관 리 자 이상원 상 세 문 의 서울특별시 노원구 문화과 02-950-3089 일반설명 | 전문설명 조선 인조 때의 문신인 충숙공 이상길(1556∼1637) 선생의 초상화이다. 이상길 선생은 30세에 문과에 급제한 후 대사간, 대사헌 등을 역임하였다. 인조 15년(1637) 병자호란 때에 청나라 군대의 침략에 대항하여 강화도에서 종묘를 지키다 순절하였으며, 효종 8년(1657)에 충숙공에 봉해졌다. 비단에 채색하여 그린 초상화는 실물과 같은 규모인 가로 93㎝, 세로 186.5㎝의 크기이다. 의자에 앉아 있는 전신상으로, 사모를 쓰고 엷은 홍색의 단령을 입고 있으며, 두 손은 앞으로 모아 소매자락 안에 넣었다. 집무복의 양쪽 트임새로 살짝 내비치는 겉옷의 안자락을 표현하고, 양쪽 어깨의 경사진 각도를 달리 표현함으로써 앉음새를 매우 안정되게 나타냈다. 조선 중기의 전형적인 작품으로, 조선시대 대부분의 초상화가 원작을 옮겨 그린 이모본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초상화로서 가장 오래된 실제본이라는 점이 특기할 만 하다. ![]() 上传于2008-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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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효공과정경부인영정(文孝公과貞敬夫人影幀) ![]() 종 목 시도유형문화재 제81호 (무주군) 명 칭 문효공과정경부인영정(文孝公과貞敬夫人影幀) 분 류 유물 / 일반회화/ 인물화/ 초상화 수량/면적 1점 지 정 일 1977.12.31 소 재 지 전북 무주군 무풍면 현내리 167 시 대 소 유 자 사유 관 리 자 하천수 상 세 문 의 전라북도 무주군 문화관광과 063-320-2544 일반설명 | 전문설명 조선 전기의 문신인 문효공 하연 선생과 그 부인의 초상화이다. 하연은 조선 태조 때에 문과에 급제한 후, 우의정과 좌의정을 거쳐 세종 31년(1449)에는 영의정에 까지 올랐다. 그의 문집인『경재집』에서는 원래 효성이 지극하고 그림에도 뛰어났던 아들 하우명이 이들의 초상화를 직접 그린 적이 있다고 적고 있다. 이로 미루어, 이 그림 역시 하우명이 그린 원본을 보고 옮겨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데, 합천이나 청원의 영당에 보존되고 있는 부부상에 비해 높은 품격을 갖추고 있다. 그림에 보이는 부인의 의복과 모자는 조선 전기 여인의 의복사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맨 윗부분이 뚫리고 좌우의 귀를 덮은 모자의 모양은 조선시대 여인들이 외출할 때에 머리에 쓰고 다니던 조바위의 전신으로 보인다. 조선 전기에는 부부를 함께 그리는 부부초상화가 유행하였던 듯 하여, 하연의 부부상 이외에 박연의 부부상, 조반의 부부상 등이 여러 폭 전해온다. 조선 중기 이후 여인의 초상화가 희귀해진 사실과 비교할 때 이 부부상이 지니는 회화사적 의의는 크다. 경재(敬齋) 하연(河演)(1376∼1453)은 진주인(晋州人)으로 조선(朝鮮) 태조(太祖) 5년(1396)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한 후 벼슬길에 올라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 예조참판(禮曹參判), 평안도관찰사(平安道觀察使)를 거쳐 세종(世宗) 27년(1445) 좌찬성(左贊成)에 오르고 우의정(右議政), 좌의정(左議政)을 거쳐 세종 31년(1449) 영의정(領議政)이 된 인물이다. 『경재집(敬齋集)』을 보면 하연 및 정경부인의 상은 원래 효성이 지극하고 그림에도 뛰어났던 아들 하우명(河友明)이 직접 그린 적이 있다 한다. 무주군(茂朱郡) 소재(所在) 하연부부상(河演夫婦像) 역시 하우명 수사본(手寫本)을 저본(底本)으로하여 이모(移模)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합천군(陜川郡) 및 청원군(淸原郡) 영당(影堂)에 전해오는 하연부부상에 비해 고격(古格)을 갖춘 작품이다. 하연부인의 복식(服飾) 및 두식처리(頭飾處理)는 조선(朝鮮) 초기(初期)의 여인복식사(女人服飾史) 연구(硏究)에 있어 귀중한 자료로서, 하연부인의 여모(女帽)는 정상(頂上)이 뚫리고 좌우 귀를 덮은 모양이 조바위의 전신으로 보인다. 조선 초기에는 이처럼 부부가 함께 초상화를 그리는 풍조가 유행하였던 듯 하연부부상 이외에도 박연부부상(朴堧夫婦像), 조반부부상(趙반夫婦像) 등 수폭이 전래되고 있다. 조선 중기 이후 여인초상화가 희귀해진 사실을 볼 때 이 부부상의 회화사적(繪畵史的) 가치는 주목할 만하다. ![]() 上传于2008-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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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익선생영정(李元翼先生影幀) ![]() 종 목 시도유형문화재 제80호 (광명시) 명 칭 이원익선생영정(李元翼先生影幀) 분 류 유물 / 일반회화/ 인물화/ 초상화 수량/면적 1점 지 정 일 1978.11.10 소 재 지 경기 광명시 소하동 1086 시 대 조선시대 소 유 자 사유 관 리 자 (주) 충현 상 세 문 의 경기도 광명시 문화공보과 02-2680-6142 일반설명 | 전문설명 조선 중기의 문신인 이원익(1547∼1634) 선생의 초상화이다. 선생은 임진왜란 때 왕을 모시고 의주까지 피난시킨 공을 세워 호성공신에 오르기도 하였다. 그림은 머리에 검은 사모를 쓰고, 관복을 차려 입고 호랑이 가죽이 깔린 의자에 앉아 있는 전신상으로, 가로 70㎝, 세로 150㎝의 크기이다. 초상화를 그린 양식이 언뜻 공신에 오른 것을 기념하는 공신도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관복의 가슴에 있는 학무늬의 흉배로 보아 당하관 재직시에 그렸음을 알 수 있다. 주인공은 오른쪽으로 얼굴을 돌리고 오른손에 부채를 쥔 채 왼손에 대를 잡고 있는데 손의 표현이 미숙하다. 얼굴에는 음영효과를 주었으며, 수염·눈썹·뺨 등은 묵으로 엷게 칠한 후 묵선으로 다시 덧칠하였다. 눈은 금가루에 아교를 개어 칠한 것으로 보일 만큼 눈동자 주위에 금니가 남아있다. 선생이 공신의 서열을 받기 전인 선조 13년(1580)에 그린 것으로 추측된다. 조선시대 초상화의 대부분이 왼쪽으로 얼굴을 돌린데 비해 얼굴을 오른쪽으로 돌리고 있어 주목되는 작품이다. ![]() 上传于2008-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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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량영정(鄭羽良影幀) ![]() 종 목 시도유형문화재 제9호 (남구) 명 칭 정우량영정(鄭羽良影幀) 분 류 유물 / 일반회화/ 인물화/ 초상화 수량/면적 1폭 지 정 일 1986.12.18 소 재 지 인천 남구 숭의동 2-82 시 대 조선시대 소 유 자 인언연이 관 리 자 인언연이 상 세 문 의 인천광역시 남구 문화공보실 032-880-4298 일반설명 | 전문설명 조선 후기의 문신인 정유량(1692∼1754) 선생의 초상화이다. 정우량은 조선 경종 3년(1723)에 병과에 급제하고 병조판서를 거쳐 우의정까지 올랐으며 특히 글씨를 잘 썼다. 초상화는 살색의 대나무 발을 배경으로 두고 호랑이 가죽으로 만든 의자에 앉아 있는 전신상이다. 얼굴은 측면을 향하고 있으나 전체적으로 좌우가 대칭을 이룬다. 머리에는 사모를 쓰고 짙은 청색의 관복을 갖춰 입었으며, 가슴에는 문관을 상징하는 학과 구름을 수놓았다. 수용성 물감을 아교액과 혼합하여 진한 색채로 만들어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 초상화의 주인공인 정우량((鄭羽良):1692∼1754))은 조선(朝鮮) 숙종(肅宗)때 판돈영부사(判敦寧府事) 정수기(鄭壽期)의 장남으로 호는 학남(鶴南)이며 본관(本貫)은 영일(迎日)이다. 경종(景宗) 3년(1723) 증광문과(增廣文科)에 합격한 후 대사성(大司成), 좌승지(左承旨), 이조판서(吏曹判書), 우의정(右議政)을 역임했다. ![]() 上传于2008-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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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잡영정(申잡影幀) ![]() 종 목 시도유형문화재 제45호 (진천군) 명 칭 신잡영정(申잡影幀) 분 류 유물 / 일반회화/ 인물화/ 인물화 수량/면적 1폭/1,085 지 정 일 1977.12.06 소 재 지 충북 진천군 시 대 소 유 자 사유 관 리 자 신상철 상 세 문 의 충청북도 진천군 문화체육과 043-539-3600 일반설명 | 전문설명 조선 중기의 문신인 신잡 선생의 영정이다. 신잡(1541∼1609) 선생은 이조참판, 형조참판을 지낸 이로, 임진왜란 때 선조임금을 의주까지 호위한 공을 인정받아 호성공신에 봉해지기도 했다. 비단 위에 그려 놓은 그림은 가로 90㎝, 세로 167㎝의 크기이다. 의자에 앉아 있는 전신상으로, 시선은 오른쪽을 바라보며, 두 손은 소매 안에서 마주잡고 있다. 사모를 쓰고, 중요의식 때 입었던 관복을 입고 있으며, 가슴에는 두 마리의 학이 그려진 흉배가 표현되어 있다. 선생이 57세 되던 선조 40년(1607) 때의 모습을 김이섭이 그린 것으로, 조선 중기의 화풍을 잘 보여주고 있다. 독송재(獨松齋) 신잡((申잡) , 1541∼1609)선생은 1584년 과거에 급제한 후 이조참판(吏曹參判)·형조참판(刑曹參判)을 지냈다. 임진왜란(壬辰倭亂)때 선조(宣祖)를 의주까지 호종(扈從)한 공으로 호성공신(扈聖公臣) 2등과 평천부원군(平川府院君)으로 봉해졌으며 개성유수(開城留守)가 되었다. 영정은 선조 40년(1607)에 신잡의 57세 때 모습을 김이섭이 그린 것으로 견본에 채색으로 그렸으며 크기는 가로 90㎝, 세로 167㎝로 조선중기 원체화풍을 잘 보여주고 있다. ![]() 上传于2008-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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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로영정(李重老影幀) ![]() 종 목 보물 제1174-2호 명 칭 이중로영정(李重老影幀) 분 류 유물 / 일반회화/ 인물화/ 초상화 수량/면적 1폭 지 정 일 2004.05.07 소 재 지 경기 용인시 기흥읍 상갈리 85 경기도박물관 시 대 조선시대 소 유 자 경기도 관 리 자 경기도박물관 일반설명 | 전문설명 이중로영정은 오사모에 단령을 입고 의자에 앉은 전신좌상이다. 흉배는 모란 및 해태문양이 수놓인 것을 착용하고 있으며, 학정금대(鶴頂金帶)를 두르고 있어 이 초상화가 무관 종2품 때의 도상임을 말해준다. 이 상의 특징을 들자면, 사모의 높이가 상당히 낮으며, 양쪽으로 뻗친 사모의 각(角, 뿔)은 넓적하고 둥글며 발색효과 없이 테두리를 굵게 둘렀다. 또한 7분면으로 인한 자세를 강조하기 위해 양 어깨의 형태 및 경사의 차이를 심하게 나타내었으니, 즉 왼편 어깨는 둥글고 두텁게 나타나는데 비하여 오른쪽 어깨선은 상당히 급한 경사를 보이고 있다. 또한 취세(取勢)에서 안면을 비롯하여 상반신은 완전히 7분면인데 반하여 하반신은 거의 8∼9분면으로서, 이 시기보다 앞선 선무(宣武), 호성(扈聖), 청난(淸難) 세 공신상들이 왼쪽 단령의 트임만 표시된 데 비하여 이 상은 오른쪽에도 단령의 트임이 살포시 나타나서 상하반신의 취세에 약간 뒤틀림이 보인다. 안면처리법은 안색의 주조색은 엷고 밝은 살빛인데, 이목구비 등 안면의 구성요소 및 외곽은 갈색 선으로 규정하고 다만 윗 눈꺼풀 부위만 검은 세선으로 처리되어 있다. 그리고 골상학에서 말하는 오악(五岳) 부위, 즉 안면골상에서 튀어 나온 부분에만 홍기(紅氣) 내지 적기(赤氣)를 약간씩 붓의 흔적이 보이지 않도록 살짝 칠하였다. 이것은 피부 밑 골(骨)의 구조에 의해 만면의 고심세(高深勢, 높고 낮은 형세)를 표현하고자 한 것으로 이해된다. 단령은 굵고 검은 선으로 전체의 윤곽을 규정하고, 옷주름은 대강 간략히 그려 넣었는데, 아직 주름진 부위의 음영삽입은 시도되어 있지 않다. 바닥에는 화려한 채전(彩顫, 채색 카페트)이 깔려 있는데 이 채전의 높이가 상당히 높아서 고식을 보여주며, 그림 전체에 장중한 느낌을 더해준다. 이중로 초상화는 17세기 초 조선조 공신상의 가장 전형적인 예를 보여주는 동시에 화법 또한 특히 공교하다. ![]() 上传于2008-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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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정(影幀) ![]() 종 목 중요민속자료 제36-1호 명 칭 영정(影幀) 분 류 유물 / 일반회화/ 인물화/ 초상화 수량/면적 1점 지 정 일 1978.06.21 소 재 지 충남 서산시 지곡면 대요리 740 시 대 시대미상 소 유 자 정종설·정종열 관 리 자 정종설·정종열 일반설명 | 전문설명 조선 중기의 무신인 정충신(1576∼1636) 장군의 초상화로, 다른 유물들과 함께 서산군 지곡면 정충신 장군의 사당에 보관하고 있다. 족자 형태의 초상화로, 머리에는 검은색의 사모를 쓰고 관복을 입고 중국식 의자에 앉아있는 장군의 전신(全身)을 그렸다. 가슴에 두른 흉배에는 구름과 모란이 그려 있으며, 초상화에는 ‘금남군시충무정공유상(錦南君諡忠武鄭公遺像)’이라고 써 있어, 시호가 내려진 1685년 8월 11일 이후에 그려진 것을 알 수 있다. ![]() 上传于2008-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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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암영정후사본(聾巖影幀後寫本) ![]() 종 목 시도유형문화재 제63호 (안동시) 명 칭 농암영정후사본및금서대(聾巖影幀後寫本및金犀帶) 분 류 유물 / 일반회화/ 인물화/ 초상화 수량/면적 일괄 지 정 일 1994.11.02 소 재 지 경북 안동시 옥정동 439-6 시 대 소 유 자 이성원 관 리 자 이성원 상 세 문 의 경상북도 안동시 유교문화권개발사업단 054-851-6392 일반설명 | 전문설명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시조작가인 농암 이현보(1467∼1555) 선생의 초상화로, 가로 105㎝, 세로 126㎝의 크기이다. 선생이 책상 앞에 앉아있는 모습으로, 「영정개모일기」에 그림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이에 의하면, 순조 27년(1827) 선생의 초상화(보물로 지정되어 있음)가 망가질 것을 우려한 후손들이 이를 본 떠 다시 그려놓은 것으로, 추사 김정희의 소개로 소당 이재관이 분강서원에서 그렸다 한다. 유물 가운데 금서대는 농암이 관직에 있을 때에 사용하던 관복 띠로서, 폭 3.5㎝이다. ![]() 上传于2008-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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