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헌 살롱] [871] 千金勿傳
'돈(千金)을 후손에게 물려주지 마라.' 여주이씨 집안에 대대로 내려오는 가훈이다. 선조대부터 광해군대에 이르기까지 무려 33명의 과거 급제자를 배출한 수재 집안이었다. 그렇다면 이 집안에서는 무엇을 물려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는가. 돈 대신에 학문을 전해 주라는 게 이 집안 선조의 당부였다.
조선 후기에 청나라 연경에 사신으로 갔던 여주이씨 이하진(李夏鎭·1628~1682). 그는 청나라 황제로부터 은 한 궤짝을 선물로 하사받았다고 한다. 이 은 한 궤짝을 들고서 연경의 서점가였던 '유리창'으로 갔다. 은을 몽땅 책으로 바꿨다. 구입한 책이 한 수레 분량이었다고 하는데 아마도 수천권이 되었을 것이다. 그 책 가운데는 명필로 유명한 왕희지의 서첩(書帖)도 많았다. 이하진 본인도 글씨를 잘 쓰는 명필이었기 때문이다. 유리창에서 구입한 이 책들은 '이가장'(李家藏)이라고 불리며 여주이씨 집안의 가보가 되었다.
이때 나온 이야기가 바로 '천금물전'이다. 아버지가 연경에서 사온 책을 가지고 공부한 인물이 이하진의 아들들인 옥동(玉洞) 이서와 성호(星湖) 이익이다. 옥동은 서예로 대성하여 옥동체(玉洞�b)를 만들었다. 기호 남인의 아지트였던 해남 녹우당에 걸려 있는 '예업'(藝業)이라는 글씨도 옥동의 글씨이다. 그런가 하면 이익이 방대한 분량의 '성호사설'을 집필할 수 있는 밑천도 다 선대에 연경에서 구입해온 장서(藏書)에서 나온 것이다.
장서의 효력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택리지'를 쓴 이중환도 여주이씨이다. '택리지'의 서문을 성호 이익이 써 주었다. 이익의 재종손(再從孫·6촌 손자)이 이중환이다. 이중환은 일찍 집안 어른이었던 안산의 성호 이익의 문하에 들어가서 공부했고, 자연스럽게 '이가장'을 섭렵하였을 것이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저술은 '이 정도면 되겠다'는 자신감이 있어야 한다. 그 자신감은 일급 자료들을 접했을 때 생겨난다. '성호사설'이나 '택리지'의 출현도 비슷한 맥락이 아닌가 싶다. 정약용이 '당대 문원(文苑)의 중심'이라고 존중했던 이용휴, 경학과 사학의 이가환이 모두 이 집안 후손이다. 최근 인물로는 벽사 이우성, 이기백, 이성무 교수가 여주이씨이다. '천금물전'의 효과를 그 후손들이 증명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