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 교수가 들려주는 스승 다산과 제자 황상의 이야기, '삶을 바꾼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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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 교수가 들려주는 스승 다산과 제자 황상의 이야기, '삶을 바꾼 만남'
들어가기에 앞서...
이미 알만한 분은 다 아는 이야기입니다. 정민 한양대 국문학과 교수·정병설 서울대 국문학과 교수·안대회 성균관대 한문학과 교수 등 3분의 인문학자들이 문학동네가 운영하는 네이버카페에서 ‘우리시대 명강의’라는 제목으로 매주 연재를 하고 있습니다. 인문학자들의 인터넷 연재는 사실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언론들도 ‘이례적인 일’이라며 관심을 가졌고요.
인터넷은 단기간에 생활 속 깊숙이 뿌리를 내렸습니다. 그러다 보니 인터넷이 아주 새로운 환경이라는 사실을 종종 잊습니다. 게다가 변화 속도조차 워낙 빨라 새것도 별로 새것 같아 보이지 않는 지경입니다. 하지만 돌이켜 보면 현재의 인터넷이 있기까지는 온라인과 오프라인간의 상징적인 만남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가령 디지털뉴스아카이브에서 ‘인터넷’을 검색하면 이런 기사들이 보입니다. 불과 얼마 전의 풍경입니다.
"CNN 컴퓨터로 본다" 1994년 9월 6일 매일경제
"인터넷에 장편소설 연재" 1995년 2월 28일 매일경제
"생후 4개월 된 최고만물박사 – 브리태니카 온라인" 1995년 7월 6일 경향신문
3분 학자의 전공은 우리나라 고전문학입니다. 이분들이 연구하는 자료는 대부분 漢文으로 기록됐고 한글이라고 해도 古語라 일반인은 한 줄 읽기도 어렵습니다. 하지만 이분들이 그곳에서 끌어낸 이야기는 매우 현대적입니다. 지금도 글 하나 마다 수십 수백 개의 댓글과 답글이 달리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도 온라인과 오프라인간의 상징적인 만남이겠죠.
네이버 다이어리는 NHN의 기업블로그입니다. 기업블로그의 오지랖이 무작정 넓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국내 1위의 인터넷기업 기업블로그라면 ‘우리 회사 이야기’뿐만 아니라 이용자들이 궁금해할 만한 인터넷세상의 이야기도 전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무작정 문학동네측에 메일을 보내서 3분의 교수님들을 만나 뵙고 싶다고 했습니다. 큰 기대는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세 분의 교수님들은 모두 흔쾌히 요청에 응해주셨습니다. 앞으로 이 세 분과의 만남을 블로그를 통해 전달해 드리겠습니다. 아무쪼록 관심을 가진 분들에게 도움이 되는 정보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첫 만남은 ‘삶을 바꾼 만남’을 연재 중인 정민 한양대 교수님입니다.
정민 교수의 '삶을 바꾼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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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 교수님이 연재하는 내용은 다산 정약용과 제자인 황상의 이야기입니다. 다산은 1801년 신유박해로 전남 강진으로 유배됩니다. 그의 나이 39살이었습니다. 그곳 아전의 자식이던 황상은 다산이 소일거리로 연 서당에 문을 두드립니다. 그의 나이 15살이었습니다. 황상은 첫 만남 이후 70노인이 될 때까지 단 하루라도 스승의 가르침을 잊지 않으려 몸부림쳤다고 합니다. 정민 교수님은 그 동안 연구되지 않았던 기록들을 들쳐가며 두텁고 또한 징그러운(교수님 표현입니다) 만남을 입체적으로 복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경험한 그 ‘온몸을 떨게 한 만남의 풍경’을 다른 분들에게도 보여주기 위해 연재를 진행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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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도대체 언제 그렇게 많은 책을 읽고 또 쓰실 수 있으신가요?
[정민] 제가 하는 주제는 일반적으로 많은 분들이 다루는 주제가 아닙니다. 그러다 보니 일상적으로 잘 접하지 않는 정보를 알 뿐, 누구보다 더 많이 안다고 할 수 없습니다. 특성화된 분야를 연구하기 때문에 덕 보는 것일 뿐입니다.
[네이버] 다산이 앉아 공부하다가 복숭아뼈에 3번이나 구멍이 났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책에 소개된 분들을 보면 지금 기준으로는 인간을 초월한 사람이 많아서 오히려 거리감이 느껴집니다.
[정민] 옛날 사람이라고 다 초인간적일리가 있겠습니까? 옛날 사람 중에서도 치열한 사람에 대해서만 글을 썼다고 보시면 됩니다. 지금뿐 아니라 당시의 시각으로도 예외적인 인물들이고 그래서 기록으로 남는 것입니다. 저는 인간이 처한 기본 조건은 쉽게 달라지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가령 수 십 년 전과 비교해 보면 IT 기술은 수 백 배 수 천 배 기술적 발전을 이뤄냈습니다. 하지만 젊은이들의 고민이 단지 수십 배라도 더 빨리 해결됐나요? 그때나 지금이나 젊은이들의 고민은 본질적으로 달라진 것은 없습니다.
[네이버] 연재 하신 글을 보면 다산의 제자 중 일부가 스승의 방을 차고 들어가 난동을 부렸다는 기록도 보이는데요.
[정민] 다산이라고 무결점의 인물은 아닙니다. 상대하기 편하고 만만한 사람도 아니고요. 사실 그 엄격한 기준을 견뎌낼 사람이 많지 않았습니다. 그 눈에 누군들 맘에 들었겠나 싶을 때가 많습니다. 자료 중에는 제자들을 쥐 잡듯 하는 모습이 담긴 글도 많이 있는데, 차차 소개할 예정입니다. 다만 제가 소개한 풍경은 여러 갈등 중 극단의 사태였을 텐데요. 왜 유배지의 다산에게 많은 제자들이 찾아왔을까요? 학문 수련도 하나의 이유였겠지만 ‘과거시험과 입신출세’ 또한 중요한 목적 중 하나였을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다산이 뒷배를 봐 줄 것으로 믿었던 것이고, 요새말로 하면 ‘줄’을 대고 싶었던 거겠죠. 한양에서 큰 벼슬도 했던 사람이니까. 하지만 다산 본인이 떨어진 끈이고 뒷배를 봐 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던 겁니다. 그런 면에서 황상의 묵묵함이 더 크게 다가오기도 하고요.
<인문학자 정민의 서재>
[네이버] 선생님은 어떻게 한문학에 관심을 갖게 되셨나요? 어려서부터 서당을 다니셨나요?
[정민] 전혀요. 대학교 4학년 2학기 때 한문특강을 듣다가 여기까지 왔습니다. 중고등학교 때 한문을 좋아했고 내심 잘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첫 수업 때 교재가 ‘맹자’ 였는데, 선생님이 뭘 물어봐도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얼마나 무식한 지 깨닫게 됐고 그 무식함을 조금이라도 떨쳐보고자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네이버] 인기 없고 최신 유행이 아닌 학문을 하는 데서 오는 초조감을 느낀 적은 없으신가요?
[정민] 단연코 없습니다.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고전하면 고전을 면치 못할 줄 알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연구할 자료와 기회가 무궁무진합니다. 무엇보다 우리 고전이 갖고 있는 콘텐츠의 힘을 매일 느끼고 있습니다. 수업시간에 연암 박지원의 글을 3~4개 읽어줍니다. 그럼 반드시 두 세 명은 눈물을 줄줄 흘립니다. 여기저기 동요하는 분위기를 느낄 수 있습니다. 몰라서 못 느꼈을 뿐 그 뜻과 배경을 알게 되면 여전히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충격을 던지는 살아있는 텍스트들입니다. 또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상당히 현대적이기도 합니다. 핵심은 디코딩(decoding)입니다. 옛날 것이라 지금과 바로 통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약간만 바꾸고 현대화시켜 주면 기가 막히게 통하게 됩니다. 그게 저 같은 고전연구자의 책무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네이버] 그럼 디코딩(decoding)할 때 가장 고민하는 부분은 무엇인가요?
[정민] 학문적 연구와 그 연구 성과를 일반인들과 공유하는 것이 똑같지는 않습니다. 각각의 언어가 있고 규칙이 있습니다. 다만 저를 비롯한 소장 고전학자들은 현대는 대중과의 소통도 매우 중요하며 이전의 방식만으로는 이런 소통을 효율적으로 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지금 제가 연구하는 고전이 예전에 없었던 게 아닙니다. 계속 있어왔던 텍스트들입니다. 그럼에도 이 텍스트들이 외면 받았던 이유는 텍스트를 오늘의 관점에 맞게 끌어 내리지 않고 독자들을 그 수준으로 잡아 끌어 올리려고만 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독자들도 노력해야 합니다. 그냥 밥 먹듯이 되는 공부는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이전에 제가 공부하면서 느끼는 경험들을 일반 독자 여러분도 같이 나눌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과정을 통해 죽어 있던 정신들이 되살아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네이버] 인터넷이 지식을 대중화하는 데 도움을 줬지만 그 때문에 전반적으로 문화의 질이 떨어졌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정민] 흑백논리로 좋다 나쁘다고 말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어느 쪽도 답이 아닐 것입니다. 다만 이런 폭발적인 정보환경에서는 어떻게 활용 하느냐가 중요할 것입니다. 18세기 조선의 상황은 인터넷에 의한 정보화 시대의 도래와 유사한 면이 있습니다. 우선 중국에서 대규모 출판이 이뤄졌고, 갖가지 종류의 정보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는데요. 당시 우리 나라 지배층이던 노론의 자제들이 연행(북경 사절단)에 참여하는 기회가 많았습니다. 이 사람들이 중국에 가서 제일 먼저 하는 게 책방 순례입니다. 그곳에는 사서삼경이 아니라 갖가지 잡문은 물론 새 기르는 법부터 요새말로 하면 우주물리학에 이르는 방대한 책들이 널려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책들은 기존의 책처럼 한 사람이 쓰는 게 아니라 여기서 조금 저기서 조금씩 가져다 붙여 소위 짜깁기로 만든 책이 대부분입니다. 마치 인터넷과 비슷한 것이죠. 거기서 신문물을 수용한 사람들이 후에 북학파가 됩니다.
그런데 당시 이 젊은이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어떻겠습니다. 당시 국시가 북벌론인데 북쪽을 배우자고 하니 요새말로 하면 ‘국가보안법’ 위반범들 아니겠습니까. 게다가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쓰잘 데 없는 잡문만 하고 있으니 역시 요새말로 하면 ‘인터넷 보더니 애들이 개판됐다’고 하는 심정 아니었겠습니까. 한양으로 돌아온 이 젊은이들은 이런 문화 속에서 자기들끼리 의견을 교환하고 책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한 사람이 이런 주제에 대해 글을 쓴다 하고 한 줄 쓰면 다른 친구가 다른 책에서 한 구절 찾아 하나 더 적고, 그러다 다른 친구가 ‘내 의견 좀 달겠다’고 평을 쓰고 그렇게 돌고 돈 책을 묶어 한 권 만들어 발행하는 식이죠. 이런 지적인 물적 토대는 곧바로 문화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고, 같은 것을 하더라도 기존과는 달리 ‘나는 폼나고 예쁘고 세련되게 한다’는 미의식을 각성시키게 됩니다. 물론 기존의 시각으로 보면 말도 안 되는 미의식이겠지만 그게 새로운 시대의 맹아가 됐습니다. 당시 북학파들이 지적 경쟁력을 갖춘 것은 정보의 흐름을 재빨리 간파했고 좌충우돌 하는 가운데서도 그 중에서 핵심이 되는 정보들을 간추리는 능력을 확보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덕무, 박제가 같은 사람들의 직책이 규장각 검서관이었는데요. 정조가 책을 읽다가 ‘야 이 구절에 대한 자료 좀 찾아봐’하면 규장각을 뒤져서 ‘아 그것과 관련해서는 어디어디에 이렇고 저렇고 한 해석이 있습니다’하고 보고하는 것이죠. 국가 정보검색사라고 해야 할까요.
[네이버] 인터넷 시대 일반인이 소화해야 하는 정보량은 엄청나게 늘었습니다. 필요한 정보가 무엇인지 잘 모를 지경입니다.
[정민] 18세기 지식인들도 전례 없는 정보 홍수 속에 빠졌고, 닥치는 대로 섭렵했습니다. 물론 그 중에 상당수는 잘못된 정보도 있었고 쓰레기 같은 정보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을 거치면서 진짜 정보를 가리는 눈을 갖게 됐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다른 사람들을 위한 가이드 역할을 했습니다. 인터넷 시대에도 각 분야에서 전문성을 인정 받는 많은 전문가들이 있습니다. 일단은 그들을 통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것입니다. 강진 여행가서 청자박물관 보고 다산체험관 획 보고 와 봤자 강진이 어떤 곳인지 다산의 삶이 어떤 것인지 돌아와도 남는 게 별로 없습니다. 다녀와서 아 후회되네 해도 이미 늦은 일일 뿐입니다. 하지만 좋은 가이드를 만나 많은 이야기를 듣고 오면 의미 있는 여행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정보를 변별하는 힘은 훈련이 필요하고 안목을 갖추기 위해서는 당분간 신뢰할 만한 안내자의 안내를 받는 게 좋습니다. 혼자서 판단할 수도 있지만 정보의 양이 늘어날 수록 힘든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이런 바탕에는 지식에 대한 욕구가 있어야 합니다. 좋은 가이드의 정보가 항상 편하고 쉬운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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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다산과 황상은 둘다 시대에 버림받고 곤궁하게 살았습니다. 선생님께서 연구하신 많은 선조들의 모습도 다르지 않고요. 혹시 곤궁해 처한 사람만이 의미 있는 작품을 남긴다고 보시나요?
[정민] 부유하다고 해서 좋은 예술작품을 내놓지 못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제가 연구한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느끼는 건 뛰어난 문학작품들은 강한 결핍의 자의식에서 나왔다는 것입니다. 다산 연암 황상 이런 사람들만 불우하고 불운했을까요? 아닙니다. 훨씬 더 많은 지식인들이 그런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 좌절하며 삶을 마감하거나 술독에 빠져 자멸했습니다. 제가 연구한 사람들은 그에 못지 않은 결핍 속에서도 다른 방식의 자기 구제의 길을 발견하고 좌절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이 분들이 후대에 후손들이 자신들을 연구하고 높이 평가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해서 그랬을까요. 아닐 겁니다. 저도 위기 속에서 좌절하지 않고 자신만의 가치를 갖고 나간 이 분들의 정신과 에너지의 원천이 궁금합니다. 그게 제 연구의 주제일지도 모릅니다.
[네이버] 연구하시면서 가장 어려운 부분은 무엇인가요?
[정민] 자료입니다. 저희 집사람이 ‘당신은 어디 가도 당당한 사람이 왜 그렇게 자료 소장자 앞에만 가면 굽신거리냐? 꼴 보기 싫다’고 합니다. 네 저도 왜 그러는지 모르지만 자료를 보기 위해서는 체면 같은 것 차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제가 모은 자료는 항상 100% 공개하고 있습니다. 처음 발견한 자료를 인용한 연구라도 그 자료의 영인본을 논문에 첨부합니다. 학자는 자료가 아니라 관점으로 경쟁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정민 교수님의 홈페이지에 가시면 본인이 쓰신 글은 물론 자료를 모두에게 공개하고 있습니다) 자료를 승부할 생각은 없습니다. 아직 읽어야 하고 배워야 하고 발굴해야 하는 자료가 너무 많습니다.
정민 교수님과의 인터뷰였습니다. 짧은 인터뷰였지만 사회생활 하면서 별로 느껴보지 못했던 묵직한 감정을 느낄 수 있었던 시간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선생님의 글에서 소개된 다산과 황상간의 이야기 한 토막을 소개해 드립니다. 다산은 서당에서 글공부를 하는 고만고만한 학생들 중에 영특해 보이는 황상이 맘에 들었던 것 같습니다. 다산은 수업을 마친 후 돌아가는 황상을 따로 불러 '공부를 더 해 봐라'고 운을 떼었다고 합니다. 정민 선생님의 글을 그대로 옮기겠습니다.
"너는 좀 남거라. 이를 말이 있다." |
정말 두 사람의 대화를 바로 옆에서 보는 것 같은 생생한 느낌이 들지 않나요? 황상은 스승의 이 말을 마음에 새기고 죽을 때까지 삶의 좌우명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부지런하고 부지런하고 부지런하라! 황상에게 그런 힘을 준 건은 '하면 된다'는 일반적인 강론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정민 선생님의 말씀처럼 다산 앞의 황상은 자신에 대해 아무 확신이 없는 시골뜨기 소년이었습니다. 그 소년은 아마 한양에서 유배 온 대학자가 자신에게 관심이나 있을까 하고 두려워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할 수 있겠어요?'라고 고개를 숙였는데 대학자는 '그럼 너가 가장 잘 할거야'라고 최초의 확신과 자각을 심어 주었던 것입니다. 선생님과 제자가 탄생하는 순간이었겠죠.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