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를 되찾은 것, 정조문의 치열한 ‘독립투쟁’이었다 |
[김상수 칼럼] 下 - ‘일본속의 조선문화’ 교토(京都) ‘고려미술관(高麗美術館)’ |
지난 5월 24일 오후, 일본 교토 시내 북쪽에 있는 ‘고려미술관’을 방문하였다. 미국 뉴욕의 메트로폴리탄박물관(Metropolitan Museum of Art)이나 영국 런던의 대영박물관(The British Museum), 프랑스 파리의 국립기메동양박물관(Musée national des Arts asiatiques-Guimet) 등을 비롯한 세계에 잘 알려진 박물관에서도 우리 전통 미술품이나 문화재 가치가 있는 유물들을 볼 수는 있지만, 1700여점의 ‘우리 유물’을 전문 미술관으로 전시하면서 미술관내에 ‘연구실’을 두고 소장품의 조사연구, 연구 강좌실시, 일본국내외 전시교류, 조선고고학연구, 미술사연구, 민속학도서자료수집 및 연구자료 출간 등, 해외 미술관으로는 일본 교토에 있는 ‘고려미술관’이 ‘조선, 한국의 역사유물 전문전시 미술관으로는 유일하다. 특히 일본의 옛 수도로 6,7세기부터 한반도와 중국 대륙에서 도래인(渡來人)들이 정착하여 8세기에 강력한 불교 신자들이 황실의 직무에 관여하게 되었고, 794년 간무천황(桓武天皇 737년~806년, 재위 781년~806년, 일본의 50대 천황, 백제인의 후손 타카노노 니이가사(高野新笠)의 아들)이 도읍을 나라(奈良)에서 헤이안쿄로 옮겨 헤이안시대(平安時代)를 열었고, 1868년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때 수도를 도쿄(東京)로 이전하기까지, 1000여년에 걸쳐 일본의 수도가 되었던 역사 깊은 도시 교토에 ‘우리의 문화재’를 전시하는 미술관’이 있을 뿐만이 아니라, 미술관 내 모든 소장품이 일본 안에서 수집된 점에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미술관이 바로 교토 ‘고려미술관’이다. |  | | 교토고려미술관 전경. ©김상수 | |
미술관이자 박물관인 ‘고려미술관’은 독립운동가의 아들로 태어났음에도 곡절 끝에 어린 시절 일본으로 건너가, 이루 형언하기 어려운 시련을 겪으면서도 모은 재산을 털어, 일본에 빼앗기고 잃어버린 우리 문화재를 되찾은, 1989년 고인(故人)이 된 재일 조선인 한국인(在日 朝鮮人 韓國人) 정조문(鄭照文 1918년~1989년) 선생의 치열한 인고(忍苦)와 집념으로 설립된 미술관이다. ‘고려미술관’ 방문기를 상,중,하(上中下)로 나누어 세 차례 신는다. 조선왕조(朝鮮王朝)의 멸망(滅亡), 백성들의 이산(離散), 유민(流民), 그리고 기민(飢民) 100년 전의 조선인 대한제국(大韓帝國)은 제국 13년째인 1910년 융희(隆熙) 4년 10월 1일 한일 강제합병조약이 체결되던 날, 경성부와 수원부, 개성부, 대구부, 동래부 등의 대도시들은 조용하였다. 1907년 마지막 의병이 일어나는데 이를 정미의병(丁未義兵)이라 했다. 정미의병은 일제에 의한 고종의 강제 퇴위와 대한제국 군대의 해산령에 반발하여 일어났다. 정미의병은 해산 군인들이 합세하여 일어났으므로, 그 파급력이 컸다. 그러나 정미의병 이후부터 강제병합 1주년이 되는 1911년까지 조국을 독립시키기 위한 무장 항전에 참여한 수효는 전체 인구 1천 312만 명 중에서 14만 명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한일 강제합방 무렵 전체 인구 대비 항일 전투 참전율은 1.1%였다. 조선왕조는 무기력했고 백성들은 침묵했다. 한 민족국가가 멸망하면서 이처럼 지도층이 무기력하고 백성이 침묵한 민족이란 흔치 않다. 일본의 정한론 대두시기, 조선의 지도자들은 무엇을 어떻게 대처했는가1870년대 후반부터 1900년대 초엽에 이르기까지 일본의 개화론자들이 메이지 유신을 전후로 하여 일본 내에서 일어나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의 해결책이나 경제성장의 방법의 일환으로 ‘출구전략’인 정한론(征韓論)을 구체화시키면서 공공연하게 조선을 침공한다는 ‘전쟁’을 논의하기 시작한다.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의 시발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 시기 동안에 조선의 지도자들은 무엇을 어떻게 대처했는가를 우리는 묻지 않고 있다. 당시 대한제국의 지도층과 고위층의 무능함과 안이한 대 일본 대응은 국가와 민족을 질곡에 빠트리고 말았다. 백성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찢겨져 나갔다. 이산(離散)과 유민(流民), 심지어 굶주린 백성의 기민(飢民) 행렬은 이후 수십 년간 이어졌다. 몰락한 정삼품대부(正三品大夫)의 손자, 정조문 이렇듯 식민지의 경험이란 이루 말할 수 없이 혹독하고 처참한 것이다. 조선왕조의 대 일본 패퇴는 곧 국가체제의 멸망(滅亡)이었고, 정조문의 조부 정건모(鄭健模)가 대한제국의 정삼품대부(正三品大夫)의 벼슬이었지만 37살의 낙마로 타계한 이후, 정씨 집안의 몰락과 국가의 운명은 같이하는 상황이었다. 정조문의 아버지 정진국(鄭鎭國)이 6세에 아버지 정건모를 잃고, 이후 줄곧 가시밭길 삶을 살아야 했던 건, 그 시대 수많은 동포들의 처지와도 유사했다. 성년이 된 정진국은 독립운동에 가담하기 위해 중국 상하이(上海)로 건너갔다. 상하이에서 민족지도자 김구선생의 지휘로 정조문의 부친 등 상하이의 애국청년들은 독립운동을 위한 준비에 전념했지만, 젊은 지사들의 독립운동을 지원하고 있는 것은 대부분 당시 조선에 있는 각자 집안의 개인재산이었다. 조선의 본가에서 논밭을 팔아 자금을 댄다는 것은 이내 한계가 있었다. 정진국은 하는 수없이 조선으로 돌아와야 했다. 열차가 압록강 철교를 건너 국경을 지나 신의주역에 도착했을 때 세 명의 일본국 특별고등경찰이 요주의 인물로 정진국을 기다리고 있었다. 경찰과 함께 6년 만에 경상북도 예천 고향에 돌아온 정진국 앞에는 귀족의 칭호까지 받았던 어머니의 쇠락한 모습과 처 유순영과 장남 정귀남, 처음 만나는 차남인 6살의 정조문, 그리고 철저하게 몰락한 가세였다. 재산을 팔아 잡화점을 시작했지만 특별고등경찰의 괴롭힘으로 찾아오는 사람도 없고, 고향에서의 생활은 어찌해볼 도리가 없는 상태로 내몰렸다. 차라리 일본으로 가자 정진국은 1925년 5월 어머니를 모시고 두 명의 아들과 아내 그리고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딸을 데리고 부산에서 배를 타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6살의 정조문은 ‘조국’이란 개념 자체를 아직 느낄 수 없는 나이였다. 교토 다이도쿠지(大德寺) 가까운 곳에 6조와 4조반 2칸의 연립주택을 빌려서 정진국은 아내와 같이 베 짜는 일을 시작했다.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쉬지 않고 베를 짰지만 일본인들은 조선인이 만든 물건은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흠집 있는 물건’으로 취급당하면서 반값 이하의 싼값으로 사려고 했다. 사상범을 단속하는 특별고등경찰은 매일같이 집을 드나들었다. 가족은 비지를 죽으로 끓여 끼니를 이었다. 가족 모두 지쳐갔다. 정조문의 아버지 정진국은 마음은 나라의 독립운동에 가 있었지만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입장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의 속박된 상황과 현실의 생활고를 술로 달랬다. 정조문 소년에게 ‘조국’이란 무엇인가? 일본으로 건너온 지 2년이 지나 8살이 된 정조문은 교토시내 직물점 수습공이 되었지만 가게 일본사람들로부터 받는 냉대와 따돌림과 매질에 집으로 도망쳐왔다. 그 때 할머니는 어린 손주를 아무 말 없이 꼭 껴안아 주었다. “아무리 못 먹더라도 좋다. 어린아이를 고용살이로 내보내는 것은 그만두자”라고 할머니가 말하자 정진국은 “어머니, 알겠습니다”라고 했다. 정조문은 가난해서 학교에 갈 생각은 감히 생각도 못했다. 4학년부터 겨우 소학교에 입학했다. 그리고 소학교 졸업할 때까지 3년 동안만이 정조문이 받았던 학교 교육의 전부였다. 정조문은 공부하는 것을 기뻐했다. 1학년부터 3학년까지의 교과서를 빌려 독학, 1년 동안에 동급생의 학력을 따라 잡았다. 신문배달을 하면서도 공부를 열심히 했다. 그러나 학교에서도 ‘조센징’ 따돌림은 여전했다. 역사 수업이 끝나면 “조선을 징벌하자”며 5,6명의 학생들이 매일 교문 밖에서 기다리다가 정조문이 교문을 나오면 일제히 돌을 던졌다.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1562년~1611년)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7년~1598년)의 조선정벌 이야기가 어린 일본학생들을 우쭐거리게 만들었던 것이다. 휴식시간에는 “이놈, 조선. 양손을 들어 납작 엎드려. 조선 정벌하겠다”라고 하며 정조문을 때렸다. 그것을 본 담임선생은 일본제국이 말한 내선일체(內鮮一體)로 “지금은 조선인도 같은 훌륭한 일본인이다. 조선인이라고 따돌리는 것은 안된다”라고 말했다. 진구(神功) 황후의 삼한(三韓)정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정벌 등, 이러한 역사교육에 기초한 황민화정책(皇民化政策)이란 일본 및 그 식민지에 사는 주민들에게 일본 천황에게 충성할 것을 요구하는 내용을 담은 교육 정책으로, 일본인뿐만 아니라 한국인, 타이완인, 남양 군도 주민 등 식민지 주민들과 제2차 세계 대전 중의 동남아시아 점령지의 원주민들, 그리고 아이누 (오늘날의 일본 홋카이도와 혼슈의 도호쿠 지방(東北地方), 러시아의 쿠릴 열도, 사할린 섬, 캄차카 반도에 정착해 살던 주민이다. 일본 민족과는 다른 북방 몽골리안의 한 민족으로, 역사적으로 개별적인 부족 국가 형태를 지녔으며, 독자적인 언어인 아이누어를 가지고 있다. 이들은 일본의 근대화 이후 대동아정책의 일환으로 일본에 편입되었다)와 류큐인(琉球人)도 (오키나와 현과 가고시마 현 등에 주로 정착해 살아오고 있는 민족을 뜻하는데, 오키나와인이라고도 하며 홋카이도와 마찬가지로 근대 일본의 대동아 정책에 따라 강제적으로 일본에 편입되었으며, 2차 대전에서는 태평양 전진기지로서의 전쟁의 한복판에 놓였다. 전후에는 미국에 의한 강제적인 기지화가 진행되어 한때는 전 국토의 85%까지가 미군기지로 쓰였으나, 현재는 오키나와 주민들의 반발 때문에 점차적으로 미군기지를 축소하고 있다. 약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오키나와 주민들이 일본 본토로 가기 위해서는 비자를 발급받아야 하기도 했다. 소수 류큐인들에 의해 류큐 공화국 성립을 위한 류큐 민족 독립 운동도 진행되고 있다) 강제적인 동화 정책의 일부로서 일본인이 되었다. 일본에 사는 재일동포 1세대 소년 정조문은 이 황민화 역사교육에 의해 문화적인 열들감을 가지게 되었다. 소년 정조문의 후일 한국과 일본에 상관하는 역사에 대한 탐구와 추적은 이때 경험한 따돌림 등, ‘조센징’ 상처에서 기인한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누구이며? 어디서 왔고, 어디에 있는가? 곧 자기정체성(Identity)의 문제에 직면한 것이다. 소년, 마라톤을 완주하다.
몹시 마른 한명의 소년 정조문이 어른들과 같이 마라톤 경기에 참여하기로 결심한다. 거리 30Km 구간이다. 마라톤을 뛰어본 적은 없지만 상품으로 쌀과 채소를 준다고 하니 완주하면 쌀을 집으로 가지고 갈 수 있었다. |  | | 교토고려미술관 정원. 사진=고려미술관 | |
끝까지 뛰어가는 소년은 정조문 밖에 없었고 나머지 주자는 다 어른들이었다. 그 어른들도 하나하나씩 탈락했다. 정조문은 죽을힘을 다해 달렸다. “반드시 쌀을 받아야 한다” 겨우 5명의 어른들만 남은 여섯 번째의 주자로 정조문 소년은 온 힘을 다해 달리자, 마을 사람들이 감동을 받고 소년을 응원하기 시작했다. 어른 중에 한 사람이 탈락하여 정조문이 5위로 들어왔다. 곧 탈수증세로 의식불명이 됐다. 집으로 옮겨진 정조문은 가위에 눌리면서도 “살, 쌀”하고 헛소리를 계속했다. 소년의 가슴속에는 이미 엄청난 집념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이 시기에 생긴 오른쪽 무릎의 통증은 그가 죽을 때까지 고통을 받게 된다. 가족과의 헤어짐, 1945년 아버지의 귀국과 이듬해 1946년 아버지와의 사별
정조문은 소학교 졸업식에서 졸업생 대표로 단상에서 졸업식 답사를 읽는다. 중학교로 진학하여 “좀 더 공부하고 싶다”라는 생각 속에 답사를 읽고 연단을 내려온 정조문은 계단을 내려오면서 그만 울음을 터뜨린다. 이제부터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험난한 인생을 예감하고 있었던 것이다. 1937년 여름, 형 정귀문과 자신 정조문, 누이동생 정청자, 그리고 일본에서 태어난 어린동생 정혜문을 남기고 어머니 류순영이 돌아가셨다. 과로가 원인인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1주기가 지나고 아버지 정진국은 재혼하였다. 그 후 형 정귀문은 집을 나갔다. 아버지 정진국은 도야마현(富山県)의 아는 사람을 따라 교토를 떠났다. 정조문의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정조문은 할머니와 누이동생과 막내를 대리고 오사카로 이주를 했다. 정조문은 항만노동, 토목공사, 인력거꾼, 하천공사를 하며 공사현장을 돌아다녔다. 1940년에는 창씨개명(創氏改名)이 실행되었다. 일상에서도 조선어 사용은 금지됐다. 1941년에는 강제징용으로 도쿄 하네다(羽田) 군수물자 공장으로 정조문은 보내졌다. 고사포(高射砲)를 제조하는 그 공장에서는 1장에 10톤 무게의 철을 녹였다. 위험한 작업이었다. 1945년 3월 10일, 도쿄 대공습 때 정조문은 도쿄에 있었다.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도망친 다음 날 아침, 높은 언덕에 올라가 보니 도쿄는 불에 탄 들판으로 변하고 아무 것도 없었다. 전쟁이 끝난 뒤 오사카에 있었던 이버지 정진국으로부터 전보가 왔다. “빨리 돌아와” 정조문은 오사카로 갔다. 형 정귀문도 도착해 있었지만 할머니는 이미 돌아가셨다. 아버지 정진국은 아들들에게 신문에서 오린 기사를 품에서 꺼내어 펼쳐 보여주었다. “김구 선생, 상하이에서 귀환”, 아버지 정진국은 입을 열었다. “김구선생이 조국으로 돌아오셨다. 나도 조국 재건을 위해 활동하지 않으면 안 된다. 먼저 가서 안정되면 곧 연락할 것이니 너희는 언제라도 귀국할 수 있도록 기다려라”고 말했다. 아버지 정진국은 아내와 후처에서 난 자식 3명과 함께 오사카의 타이쇼오바시(大正橋)에서 어선을 타고 조선으로 귀국했다. 후에 형 정귀문은 그때 아버지의 모습을 동생 정조문과 자주 이야기하였다. “아버지는 우리를 버린 것이 아닐까. 새로운 기족과 살기 위해 우리를 두고 간 것은 아닐까?” 두 형제는 이런 의구심으로 술자리에서 자주 충돌하였다. 아버지가 떠나고 정조문은 짐을 정리하여 형과 함께 아버지가 부르기를 기다렸다. 1년이 지나도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그러다 아버지의 친구로부터 전보가 왔다. 아버지가 대구에서 폭동에 휘말려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대구 10·1 사건(大邱 10·1 事件)은 1946년 10월 1일에 미군정 영역인 대구 지역에서 시작된 대규모 시위, 유혈 사건이다. 비판하는 측에서는 10월 대구 폭동, 10월 폭동, 대구 폭동, 옹호하는 측에서는 10월 인민항쟁, 대구 10월 항쟁 등으로 다양하게 부르고 있다. 광복 이후 재조선미육군사령부군정청(USAMGIK) 시기의 남한 내 민중들의 삶은 굶주리는 처지였다. 미군정의 쌀 배급 정책이 실패했기 때문이었다. 이 시기 콜레라가 창궐한 대구의 굶주림은 특히 더 심했었다. 대구, 경북 일대에 2천여 명의 콜레라 환자가 발생하자 치료를 위한 조치들은 제대로 하지 않은 채 전염을 막는다며 대구를 봉쇄해버린 탓이었다. 차량은 물론 사람조차 시 경계를 넘을 수 없게 되면서, 그 결과 농작물과 생필품 공급이 끊어지고 말았다. 무엇보다도 쌀이 부족했다. 당시 돈이 있다 해도 쌀을 구할 수 없었다. 또한 국립경찰로 채용된 과거 친일파 출신 경찰들이 일제시대 방식 그대로 농민들의 쌀을 강탈하다시피 공출해갔다. 친일출신 경찰들에 대한 시민들의 분노는 매우 커져갔고, 경찰은 이에 대해 보복하는 일이 곳곳에서 벌어졌었다. 이런 가운데 대구, 경북 일대의 민심은 매우 흉흉했다. 1946년 9월에 철도노동자, 운송업노동자들이 주도해 대대적인 파업을 벌였는데, 이것이 9월 총파업이다. 9월 총파업은 부산지역의 철도노동자들의 파업을 시작으로 전국적으로 번져나갔다. 본격적으로 미군정과 정면충돌했다. 미군정은 국립경찰과 반공청년단체를 투입하여 파업에 진압하였으나, 여기서 의외의 사태를 맞게 되는데 대구지역 노동자들의 파업 시위에 경찰이 발포하자 즉흥적인 폭력 사태로 발전되어 버렸다. 대구 10.1 사건 참가자의 시각에서 이 사건은 전국적인 규모로 2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참가한 대중 운동이다. 주도 세력은 조선공산당이며 전국농민회총연맹의 조직이 활용되었으나, 당시 공산당 고참 간부들은 사태를 어떻게 수습을 해야 할지 몰라 뒷전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어다니기만 했다. 이 사건은 대구를 포함한 경상북도 지역에서만 공무원 사망자 63명, 일반인 73명으로 총 136명이 사망한 것으로 발표되었다. 대구 경북지역에서만 관청 건물 4동과 일반 건물 6동이 불에 타 전소되기도 했으며 이 사건으로 인해 체포된 사람은 수천 명에 이르렀다. 박정희의 형 박상희는 선산군 구미 지역에서 경찰과 시위대를 중재하던 중 경찰이 쏜 총에 맞고 사망하였다. 10월 사건의 근본원인은 일제 강점기의 지배 체제가 그대로 유지된 미군정과 군정청의 식량정책 실패, 가혹한 수매, 미군정 경찰과 반공청년단의 좌익 사냥, 친일파와 민족반역자들의 권력 복귀 등으로 인해 민심이 흉흉하게 되면서 민중들의 분노에 그 원인이 있었다.- 정조문은 아버지를 잃은 것으로 조국과 연결되었던 실이 툭하고 끊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형 정귀문과 정조문은 안젠가는 고향으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유녀시절을 보냈던 경북 예천 우망리(憂忘里) 마을이 자신들의 고향이었기 때문이다. 그날이 올 때까지 어떻게든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런 생각으로 일본에서 60년을 보냈다. 정조문은 자신이 끝내 고향에 한 번도 돌아가지 않고, 일본에 뼈를 묻게 될 것이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파친코가게 개업, 조선백자와의 만남 |  | | 교토고려미술관 설립자 고 정조문 선생과 문화재 수집인연이 된 17세기 조선백자. 사진=고려미술관 | |
1951년 33세인 정조문은 교토에서 파친코 가게를 열고 사업을 시작했다. 파친코 사업은 해가 갈수록 잘 되었지만 폭력배의 간섭이나 경찰의 급습이 늘어나면서 운영에 차질을 빚자 정조문은 재일동포의 경영자의 이권을 지키기 위해 ‘교토재일조선인유기업조합(京都在日朝鮮人遊技組合)’을 만들고 일본경찰을 의식해 일본인을 끌어다가 ‘교토부유기업연합회(京都府遊技業聯合會)’를 새롭게 결성하여 파친코사업을 일본경찰에 이해시키는 것에 주력했다. 파친코사업을 기반으로 정조문의 사업은 선술집, 고깃집, 초밥집, 찻집을 개업하면서 사업을 확장시켰다. 사업이 정상화되고 조합활동도 안정되어 가던 어느 날, 정조문은 혼자서 교토 산조(三条) 뒷골목을 산책하다가 고미술 거리로 발걸음이 갔다. 어느 한 상점에 여러 점의 백자 항아리가 진열된 것이 눈에 들어왔다. 이무런 장식이나 채색도 없이 다만 곡선만이 이름답게 강조되어 보였다. 정조문은 그림도 그려지지 않은 순백의 도자기를 보며 묘한 매력을 느꼈다. 도자기 가격에 정조문은 놀랐다. 항아리가 50만엔? “뭐가 그렇게 비쌉니까?" 골동품상 주인의 말이 이어졌다. “이조백자입니다. 이 정도의 것은 좀처럼 없습니다” “이조라면? 조선을 이야기하는 것인가요?” “맞습니다”, 주인은 자신 있는 얼굴로 답했다. “일본사람들이 조선의 항아리를 좋아합니까?” 훗날 1983년 6월 정조문은 오사카 ‘일본 학교에 다니는 조선인 학생의 교육을 생각하는 모임’이 발행하는 ‘재일조선인 학생 교육을 생각하기 위한 자료집 2’권에 다음과 같은 글을 기고하였다. “일본의 지식인은 조선의 문화재를 매우 즐기고, 이름답다고 극찬하는 반면에 그것을 만들거나 전승해 오는 조선이나 조선 사람을 멸시하는 모순에 빠져있다. 이상한 일이다” “나는 왜 조선인으로 태어났는가!” 한탄하던 소년이 만난 ‘조선의 자랑거리’ 정조문은 주인과 협상하여 돈은 일 년간 월부로 갚아나가기로 하고 그 항아리를 손에 넣었다. 소학교-초등학교-에서는 조선정벌을 배웠고, 노동현장에서는 ‘조센징’이라고 하여 임금을 떼이기도 했다. 어디서도 자랑거리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던 ‘조선’이 고미술 상점에서는 가장 높은 가격으로 진열되어 있었다. 어릴 때 동네 마라톤 대회에서 목숨을 걸었던 집념이 다시 살아났다. “나도 문화재를 수집해 보자, 일본 속의 ’조선‘을 모아 자신을 잃었던 동포들에게 조선의 자랑스러움을 보여주자”라고 생각한 정조문은, 이렇게 해서 고려와 조선의 고미술품 수집에 열정을 띠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정조문은 하나의 기억을 떠올렸다. “스스로 언제인가 일본인에게 앙갚음 해야지 하면서 이제까지 살아왔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정말로 앙갚음 한다는 것은, 개인이 금전적으로 성공하는 그런 차원이 아니라, 바로 이런 것이로구나”하며 정조문은 마음속에 ‘정당한 앙갚음’을 되새겼다. “재일동포들에게 조선의 자랑을 보여주자”, 정조문은 재일동포와 자라는 2세 아이들에게 ‘진품’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정조문은 그때부터 고미술을 관계하는 교토 오사카 골동품상은 물론이고 일본 전국의 고미술 상점을 찾아다니기 시작했고, ‘조선의 것’과 ‘조선의 문화재’ 관련 일이라면 어디든 찾아나서기 시작했다. 여기서 정조문은 재일동포 자녀들의 민족교육의 중요성에도 자연스럽게 눈을 떴다. 자신이 가난 때문에 소학교 3년만 다녔던 일, 자신이 받은 3년의 교육기간 동안에는 조선어가 박탈당하고, 조선의 역사가 말살당한 것에 대한 아픔이 있었던 그는 사업을 통해 번 돈을 조선과 고려의 고미술품을 사들이는 일과 ‘민족학교’를 세우는 것에 투자하고 열중하기 시작했다. 16살 조선소년의 죽음 앞에서 정조문은 조선학교설립에 매진하다. 시간을 뒤로 돌려 1948년 4월 26일, 일본정부의 결정으로 재일조선인 민족학교 폐쇄령을 내린 오사카 지사의 처사에 불만을 품은 재일동포 3만 명이 오사카부청 앞 오사카성(大坂城) 광장에 모여 항의 데모를 했다. 정조문도 현장에 있었다. 경찰대와 데모대는 팽팽한 대치상태였다. 그 때 한 발의 총성이 울렸고 한 소년이 정조문 앞에서 쓰러져 그 자리에서 숨졌다. 16살의 김태일 소년이다. 정조문은 충격을 받았다. 소년의 죽음을 가슴깊이 새기는 것과 함께 자신의 아이들을 황국사관으로부터 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민족교육을 실행해야 한다는 집념을 그는 불살랐다. 이후 사업을 해서 번 돈으로 1955년 교토 민족학교 건립에도 거액의 지원을 하고 ‘교토조선중고급학교’와 ‘교토조선제3초급학교’ 건립에 건설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정조문의 2남 3녀는 모두 이 학교를 졸업했다. 1989년 운명할 때까지 정조문의 국적은 ‘대한민국’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도 아닌, 1925년 당시 도일(渡日) 때의 조선적(朝鮮籍) 그대로였다. 정조문은 50년대와 60년대 당시 재일동포들의 일반적인 분위기도 그러했지만 조선인학교를 세우고 민족교육을 일깨운다는 취지를 앞세우는 조총련(在日本朝鮮人總聯合會)에 가담하였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이 하는 일이 교육을 위한 일이라는 생각에서 조총련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는 대신 일체의 정치활동은 삼갔다. 남과 북이 분단된 상황을 서로 정당화하려는 것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오직 민족학교 건립에 많은 수고와 돈을 아끼지 않았다. 학교설립에 간섭을 하는 사람들은 많았지만 정조문과 같이 실질적인 자금을 지원하는 사람이란 그렇게 많지도 않았다. 정조문이 조총련과 관계가 틀어진 결정적인 이유는 1969년부터 발행한 <일본 속의 조선 문화> 잡지를 그만 낼 것을 조총련이 강박하기 시작했을 때였다. 기이한 일이었다. 일본의 왜곡된 역사관을 시정하고 재일동포의 지위향상에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생각으로 무리를 하면서 발간하고 있는 잡지를 그만 내라고 하는 조총련의 압박을 정조문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문제의 적(敵)은 얘기치 못한 것에서 나타난 것이다. 정조문은 조총련의 교토본부에 불려갔다. 이유를 제대로 알 수가 없었다. 조총련의 간부는 “잡지를 발행해서는 안 된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1971년 무렵부터 더 강한 압력이 시작되었다. ‘재일본교토조선인상공회의’ 부의장과 ‘교토조선신용조합’의 이사를 강제사임하게 했다. <일본 속의 조선 문화> 잡지발행에 대한 보복이었다. 당시 이런 일화가 있다. 교토회관 1층에서 조총련 교토부 대회가 열렸던 때의 일이다. 단상에는 조총련당 중앙원장인 한덕수가 앉아있었고 조총련 교토의 직원들은 긴장한 얼굴들이었다. 그중에 정조문도 있었다. 이 대회에서는 우선 김일성 장군을 선창하며 따라하는 것이 통례다. 기립해서 선창하는데 정조문은 팔짱을 낀 채로 앉아 있었다. 단상에서는 교토위원장이 기립할 것을 재촉했으나 단호히 거부했다. 문화사업에 대한 반이성적인 조총련의 압력에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시위행위였다. 이 사건은 일본 전국의 조총련사회에서는 큰 문제가 됐다. 정조문은 북조선으로부터 받았던 공로상인 ‘국기훈장’ 박탈과 조직으로부터의 모든 지위를 빼앗겼다. 정조문의 국적은 죽을 때까지 ‘조선적’이었다. 그것은 북조선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적도 아니었다. 일본과 연합국 사이의 조약인 대일강화조약(對日講和條約)인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1952년에 발효되자 재일동포의 모든 권리를 ‘외국인’으로 규정시켰다. 보험, 연금의 관리, 징병 군인들의 급료는 박탈되었다. 모든 것은 ‘자신들이 스스로 일본에 왔다’는 식이었다. 거기에는 강제노역이나 종군위안부 문제 등을 역사의 뒷그림자로 숨겨버리려는 의도가 짙었다. 그리고 ‘영주권 신청’문제였다. ‘자신들이 스스로 일본이란 외국에 왔으니까 영주권이 필요하다면 한국 국적으로 바꾸라’고 일본 정부는 말했다. 그러나 정조문은 국적변경을 하지 않았다. 1925년 일본에 건너올 때 그대로인 ‘조선적’을 그대로 지켰다. ‘조선적’으로 그대로 있는 것이 잘못된 일본 정부의 처사에 저항하는 수단이었고, 남과 북으로 갈라진 내 나라의 현재를 용인하지 못하겠다는 민족주의적 발로였고, 갈라지지 않았던 하나의 국가이고 민족 공동체였던 ‘조선적’을 놓아서는 안 된다는 일념이었다. 더구나 재일조선인으로 사는 동안에 끊임없이 종내는 남인가? 북인가? 그리고 조총련인가? 재일본대한민국민단(在日本大韓民国民団)인가? 하는 물음 앞에 어느새 정조문은 ‘나의 조국은 분단되지 않은 하나의 조국이다. 분단된 남북 어느 쪽도 나는 가지 않는다’라는 강한 의지를 지니게 됐다. 그리고 이런 의지는 통일된 조국이 되어야 조국을 방문하겠다는 그의 신념에 따라, 정조문은 죽을 때까지 조국 땅을 밟지 않았다. 그래서 누구든 하는 고향 방문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 가려고야 한다면 갈 수 있었지만 타협을 허락하지 않는 그의 성품은 끝내는 통일조국을 보지 못하고 이국땅인 일본에서 눈을 감아야했다. 국외 소재 한국문화재 실태와 ‘교토고려미술관’ 2011년 3월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는 2010년 한해 국외 소재 한국문화재 실태조사결과, 기존의 116,896점에서 23,000여 점이 늘어난 140,560점(20개국 549개 기관, 개인 포함)이 있는 것으로 확인했다. 각국에 흩어져 있는 우리 문화재가 일본이 65,000여 점으로 가장 많고, 그 다음이 미국으로 38,000여 점, 독일 10,000여 점 순으로 나타났다. |  | | 고려미술관을 관람하는 관람객들. 사진=고려미술관 | |
|  | | 교토고려미술관 전시실. 사진=고려미술관 | |
일본 내 한국문화재 현황은 집계된 것만으로도 6만 5천여 점이 된다. 집계되지 않고 민간인이 보관하거나 신고하지 않은 문화재까지 염두에 둔다면 10만점을 훨씬 넘는 숫자일 것이다. 큰 컬렉션만 일람해보자면, ‘일본도쿄국립박물관’에 현재 집계로만 4천 895점, ‘일본국궁내청’에 4천 678점, ‘도쿄국립국회도서관’ 지부 ‘동양문고’에 4천 998점, ‘일본도쿄내각문고’에 2천 434점, ‘도쿄국립박물과’ 내 ‘오쿠라콜렉션’ 1천 856점, ‘일본존경각’ 1천 369점, ‘일본오타니대학’ 5천 605점, ‘일본교토대학문학부박물관’ 2천 254점, ‘일본교토대학부속도서관’ 2천 496점, ‘일본교토남선사’ 1천 830점, ‘일본교토상국사’ 1천 965점, ‘일본덴리대학덴리도서관’ 5천 711점, ‘일본오사카부립도서관’ 4천 746점, ‘일본나고야시교육위원회’ 1천 386점, ‘일본아이치현서미시립도서관’ 1천 859점,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 418점, ‘도쿄국립국회도서관’에 1천 750점, ‘일본도쿄민예관’에 1천 603점, 그리고 정조문이 설립한 ‘교토미술관’에 1천 700점 등이 일본 내 주요 콜렉션이다. 나는 여기서, 재일 조선인 한국인 정조문이 혼자 힘으로만 모은 1천 700여점이라는 ‘교토고려미술관’의 컬렉션 숫자에서 새삼 정조문, 그의 각고(刻苦)의 필사적인 수집노력이 어떠했는가에 주목하게 된다. 한국의 문화재청은 이제부터라도 ‘교토고려미술관’에 어떤 협력과 도움을 보탤 것인가를 심사숙고, 정책으로 집행해야 할 때다. 일개 개인이 눈물 겹게 수집하고 지키고 가꿔온 문화재 지킴이로의 진실한 노력은 국가의 정당한 협력으로 신장(伸張)되어야 옳다. “무지하면 비굴하게 된다”정조문이 ‘조선백자’의 발견으로 조선역사에 눈을 뜨고, 자신의 정체성을 모르면, 즉, ‘무지하면 비굴하게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 일본의 왜곡된 역사관을 시정하는 방법으로 일본식민지시절 강탈당하거나 어리석게도 건네준 일본국내에 산재한 조선 문화재의 발굴에 진력하게 된 이유에는, 특히 재일조선인을 강하게 하여 일본인들에게 이유 없이 경멸당하고 멸시당하지 않고 당당하게 살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자각과 실천에 있었다. 문화나 역사에 대한 이해가 뒷받침되어야 공동체로의 자존이 비로소 세워진다는 것은 그의 일생의 깨달음으로 득(得)한 제일의의 원칙 때문이었다. 우리는 기억하고 기록하며 재일 조선인 한국인 정조문에게 감사해야 할 것이다. 그는 남북으로 갈라진 재일교포사회 어떤 조직의 힘도 빌리지 않았고, 오직 자신만의 힘으로 우리의 유물을 전시하는 미술관 박물관을 세웠다. 그것도 일본의 정신적 수도인 교토에. (중, 하편으로 이어짐) [참고, 인용도서(參考, 引用圖書)] < 정조문과 고려미술관> ‘재일동포의 삶과 조국애’ 정조문 정희두 편저(編著) 최선일, 이수혜, 김희경, 손은미, 강미경 편역(編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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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기 전에] 이 칼럼의 대상이자 주인공인 정조문 선생의 한자 이름을 상편(上篇)에서 잘못 표기했다. ‘정조문’에서 가운데 ‘조’자는 고할 조, 알릴 조 ‘詔’인데, 비출 조 ‘照’로 틀리게 표기하였기에 선생의 한자 이름을 ‘鄭詔文’으로 바로 잡는다. <필자 註>
조선은 일본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나?
한국사학자 조광(趙珖) 고려대학교 명예교수에 의하면, 다산 정약용은 역사에서 변화와 발전을 부분적으로나마 인정하여 ‘야만이 문명으로’ 변할 수 있다고 생각했단다. “다산 정약용은 일본의 문화수준을 대체로 긍정적으로 바라보았다.” 물론 “다산 정약용도 초기에는 일본에 대한 경계심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런데 일본은 임진왜란을 계기로 하여 조선에서 받아들인 성리학을 그 나름대로 재해석하여 가고 있었다. 이때 정약용은 일본의 유학에 접하고 나서 일본에 대한 생각을 달리하기 시작했다. 정약용은 일본 고학파(古學派)의 대표적 학자였던 이토 진사이(伊藤仁齋, 1627-1705) 및 오규 소라이(荻生狙徠, 1666-1728), 다자이 순다이(太宰春台, 1680-1747) 등의 글을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산은 “이들의 글을 읽고서 이제 일본은 군사력에 의존하여 이웃나라를 약탈하던 미개한 나라가 아니라, 유학의 올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여 예의를 알게 된 개명된 나라로 해석하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일본에는 이 계열의 학파 외에도 국수를 지향하는 국학파의 인물들도 유력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불행히도 다산 정약용은 이들의 글까지 철저히 검토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일본의 한 면만을 보고서 그 진면목을 본 듯이 말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다산 정약용이 세상을 떠나고 40년 후, 일본은 조선에 강화도사건을 일으켜 ‘병자수호조약’을 강요했다. 이렇게 조선에 대한 제국주의적 침략이 시작되었고, 그 후의 한일관계는 두 나라의 국민을 불행의 구렁텅이에 빠뜨리는 길로 내달았다. 물론 그 불행은 가해자였던 일본인보다 피해자였던 한국인들에게 더 큰 고통으로 작용했음에 틀림없다.”, “다산 정약용이 살았던 시대에는 모든 정보가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다산 정약용은 일본에 대한 경계심을 늦추어도 된다고 잠시 판단했을 것이다. 그러나 정보화의 시대인 오늘날에는 일본에 관한 정보가 넘쳐난다. 다산 정약용이 살아나서 오늘날의 일본을 바라본다면, 그는 일본에 대해서 과거사의 정리를 강하게 요구할 것이다. 그리고 독도문제가 역사문제임을 밝힐 것이다. 또한 역사문제의 해결에는 소홀하면서도 독도를 방문하는 수미불상통(首尾不相通)한 일을 나무랄 것이다.”라고 썼다. -다산연구소(www.edasan.org) <다산 포럼> 8월 17일자
일본의 19, 20세기는 ‘문명이 야만’으로 변화를 일으킨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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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일본 문부성발행, 일본황국사관을 교본으로 한 '国体の本意' 도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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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부시대(徳川幕府 1603년~1868년)의 몰락이후 2차 세계대전에서 대패하기까지 일본을 77년간이나 지배했던 일본 천황사관인 황국사관(皇國史觀)은 일본의 국학인 ‘고쿠가쿠’, 국학(国学)에 기초한다. 도쿠가와 막부시대 중반에 발생한 일본 국수주의적인 학문인 ‘국학’은 네덜란드를 통해서 들어온 유럽의 학문, 기술, 문화 등을 통칭해서 이르는 ‘란가쿠’, 난학(蘭學)과 함께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가 1603년 3월 에도에 막부(사무라이 왕조체제)를 연 시기인, 지금 도쿄의 옛 이름인 에도 시대(江戸時代)의 양대 학문이었다. 일본 국학은 사서삼경(四書三經)으로 대표되는 중국의 한학(漢學)과 불경(佛經) 등 외래문화중심의 학문구조를 비판하고, 일본의 독자적인 문화, 사상, 정신세계 등을 일본의 고전 및 고대사에서 재발견해 내는 것을 목적으로 했지만 역사적으로는 사실관계보다는 ‘당위’에 ‘사실’을 짜내서 맞춘 ‘각색역사 dramatize history’다. 이후 ‘곳카신토’, 국가신도(國家神道)는 일본제국의 77년간을 상징하면서 일본의 역사를 만세일계((萬世一系)로 주장하는 일본 천황 중심의 국가주의적인 관점에서 보는 역사적 견해, 즉, 일본제국 정부의 황국사관(皇國史觀) 정책에 의해 성립되었던 국가종교로의 국체신도(國體神道), 신사신도(神社神道)와 문제의 황국사관 연결은 일본의 입장에서는 자연스럽게 연결되기까지 한다.
일본제국시대(日本帝國時代 1868년~1945년) 요체가 바로 이것이다.
일본과 이웃국가를 절망의 나락으로 이끈 일본 황국사관
일본제국주의는 일본정부에 의한 일본식 정통역사관으로, 일본의 국정교과서에 황국사관을 전 일본국민에게 보급시켰다. 이 국정교과서는 진무 천황(神武天皇 일본의 초대 천황으로 재위 기원전 660년~기원전 585년)의 ‘진무텐노의 건국 신화’로 역사를 시작하고 천황의 생사에 따라 변경될 ‘연호’로 시대를 구분했다. 초등학교에서는 천황의 사진인 어진영(御真影)이 배포되고 그것에 경례를 강요했다. 이 황국사관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불경죄에 의해 체포됐다. 그리고 1930년대에 일본문부성은 ‘국체의 본의(國體の本義)’ ‘신민(臣民)의 길’이라고 하여 천황에 충성을 강요, 드디어 제2차 세계 대전 말기에는 황국사관의 현실체로 ‘만세돌격’인 자살특공대 ‘카미카제’를 만들어 전투기에 폭탄을 싣고 적함에 충돌하여 자살 공격한 일본 제국의 결사 특공대 이름을 ‘카미’는 일본어로 '신(神)'이라는 뜻이고, ‘카제"는 '바람(風)'이라는 뜻으로 ‘가미가제’까지 실행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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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특공대 '카미가제' 출격을 환송하는 일본제국시대 여학생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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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제국주의로 인해 자국인 포함 한국인 중국인 동남아시아인 등 수천만 명을 죽음의 사지로 내몬 일본의 잔악성(殘惡性)은 ‘문명이 야만’으로 변화를 일으킨 것인가. 아니면? 원래 야만과 살육의 파가 흘렀는데 ‘문명의 외피’를 걸쳤던 것인가?
가혹(苛酷)했던 재일조선인(在日朝鮮人)의 운명에 대한 자각에서부터
재일 조선인 한국인 정조문(鄭詔文 1918년~1989년)의 인생은 부친이 조선독립운동에 좌절한 뒤, 아는 사람을 믿고 일본 교토 ‘니시진(西陣)’까지 건너와서 특별고등경찰(特高警察)의 감시 하에서 일가가 직물을 배우는 일을 시작한 것은 이미 이 칼럼의 상편에서 서술하였다. 당시 정조문은 6살이었다. 이후 머슴으로 일을 한 것을 시작으로 빈곤과 민족적 차별의 일본 생활이 이어지는데, 훗날 정조문은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지금도 기억에 생생한 것은 아침저녁으로 신문을 배달하며 9살부터 다녔던 학교생활의 3년간이다. 「아야어여いろは」도 모르는 나는 갑자기 초등학교 4학년에 편입하였고, 처음에는 학우들을 따라가느라 고생하였다. 겨우 1년이 지나 그 고생은 없어지기 시작했지만, 역사수업만큼 나를 괴롭힌 것은 없었다. ‘진구우코오고오(神功皇后)’의 신라정벌,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 秀吉)의 조선정벌, 그리고 조선병합, 역사에서는 언제나 조선은 약한 입장이었다. 더구나 ‘요와무시 죠오센(弱虫朝鮮)’사관은 현실에서 사는 우리를 센진鮮人, 더러운 ‘여보きたないヨボ’등으로 부르며 업신여겼다. 수업이 끝나자 많은 못된 애들이 “조선 정벌이야!”라고 하면서 나에게 돌을 던지며 세게 때렸다.”, “그 무렵부터 내 가슴에는 일본 역사에 대한 소박한 의문의 뿌리가 생기기 시작하였다. 왜? 우리 조선은 늘 약할까?”
정조문의 이런 생각은 이후 사업을 시작하고 ‘조선도자’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거의 동시에, 일본과 조선의 관계사에 끈질긴 관심의 계기가 됐다. 또한 정조문은 젊은 시절에 ‘왜 조선인은 문화적인 면에서 늦었던가? 어째서 언제나 약한 조선이었던가?’라는 것을 고뇌하였다. 그리고 “무지하면 비굴하게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 보다 냉정하게 자신에게 주어진 처지를 돌파해야 한다고 결심한다.
따라서 재일동포가 차별받는다는 것에 반발심은 강했지만 저항하는 것은 감정적인 소모라고 정조문은 생각하였다. ‘차라리 그런 힘을 더욱 자국의 문화 예술이나 역사를 이해하는 쪽으로 쏟는 것이 낫지 않을까’
‘일본 속의 조선 문화’ 계간지 창간 준비를 위하여
정조문은 조선의 역사와 문화 연구 활동을 시작하였다.
조선지도와 일본지도를 구하여 각 지역에 전하는 고대 역사를 탐구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오사카에 사는 친형인 정귀문(鄭貴文)은 오사카에서 작가로 활동하고 있었다. 형 정귀문은 몇 명의 재일 작가들과 함께 동인지 ‘조양朝陽’을 창간하였다.
형 정귀문과 도쿄에서 활동하는 재일작가 김달수(金達壽)가 교토에 놀러 오게 되었다. 화제는 고대 한일관계사에 집중되는데, 어느덧 이야기만으로는 어딘지 부족해서 함께 교토, 나라(奈良), 시가(滋賀) 등에 있는 조선계 신사(神社)와 사찰(寺刹)을 찾아다녔다. 확실한 자료가 있어서가 아니라 대충 감각으로 찾아다니며 문헌 자료를 조사하는 중에 조선과 깊은 인연이 있다는 역사적 윤곽이 천천히 분명하게 드러나는 식이었다. 유적 답사는 정조문의 마음속에 비뚤어진 한일고대사에 관한 의문을 하나하나 풀어나가면서 보다 확실한 것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정조문, “내 마음속에 비뚤어진 한일고대사에 관한 의문을 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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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문(鄭詔文) 고려미술관 설립자와 전시장 전경. 사진=고려미술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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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정조문 일행인 재일작가 친형 정귀문, 또 다른 재일작가 김달수, 이렇게 세 사람은 큐슈(九州), 아리타(有田)를 찾아갔는데, 아리타의 중심에 있는 작은 산의 가장자리에 도조이삼평비(陶祖李参平碑)가 있었다. 높이 4~5m. 산 아래에서도 볼 수 있고, 또 근처 묘지에서도 볼 수 있었다.
정조문은 ‘역사와 인물’이란 글에서 이렇게 썼다.
“유적 답사는 내 마음속에 비뚤어진 한일고대사에 관한 의문을 확실한 것으로 만들기 시작하였다. 규슈(九州)의 사가현(佐賀県) 아리타(有田)를 방문했을 때 일이었다. 아리타야키의 중심지와 도자 미술관을 찾아간 뒤 작은 언덕 위에 서 있는 도오잔진자(陶山神社)로 향하였다. 아리타야키(有田焼) 이전의 일본 도자기라하면 흙을 반죽하여 저화도로 구워진 도기인데, 이삼평은 백자 원료를 찾아내 1,300도의 온도로 등요(登窯)를 이용하여 제작하였다. 그 아름다운 일상용기가 이마리(伊万里)항구에서 일본 각지로 운반되어 소위 이마리야키(伊万里焼)로서 전국으로 또는 18~19세기의 유럽까지 수출되어 이름을 떨쳤다. 창시자 이삼평의 덕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곳이 도오잔진자이며 「陶祖李参平碑」 라고 새겨진 비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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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문이 친형 정귀문, 재일작가 김달수, 재일사학자 이진희, 소설가 시바료타로 등, 일본 지식인 등과 현지 답사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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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요토미 히데요시 군대에 의해 이삼평을 비롯하여 수많은 장인과 기술자들이 조선에서 납치되었는데, 타국에서 그들의 삶이나 운명을 생각하면 감개무량하였다.
(역사와 인물 152호, 1983)
조선도자(朝鮮陶瓷)의 독특함은 일상성에 있다
정조문이 쓴 글이다.
“조선 도자기에는 중국 도자기처럼 어려운 기술을 요구하는 복잡한 조형미가 많지 않다. 원래 일상 생활에서 사용된 것들이 많아 이렇게 진열대 속에 놓인 모습이 은근히 불편해 보인다. 그래서 생활 속으로 돌려주고 싶은 것이 적지 않다. 거기에 우리 도자만의 독특한 아름다움이 있다. 하얀색을 선호한 조선인의 미의식이 만들어낸 가장 소박한 아름다움의 극치가 존재한다. 그래서 나는 이것을 그리워하고 만나는 즐거움으로 사는 보람을 느낀다“ (나의 고미술 산책, 일본 속의 조선 문화 18호, 1973)
“일본 근세 도자기는 임진왜란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 秀吉)의 조선 침략으로 끌려온 조선인 장인들에 의해 비로소 자기를 만드는 길이 열렸으며, 도기의 역사를 크게 바꾸게 되었는데, 오키나와의 쓰보야야키((壺屋燒)도 예외는 아니다. 사쓰마의 다이묘(大名)인 ‘시마즈 요시히로(島津 善弘)’가 납치한 장인 84명에 의해 ‘나에시로 가와야키(苗代川焼)’나 ‘류우몬지야키(龍門寺焼)’ 일반적으로 말하는 ‘사쓰마야키(薩摩焼)’가 시작되었는데, 그 중 장씨와 안씨 두 사람은 류큐(琉球 오키나와)로 보내졌다. 쓰보야야키는 장헌공(張献功)에 의해 시작되었다. 흙은 까맣고 조금 차이는 있으나 구워서 만드는 방법 등은 옛날 그대로라고 하며, 갈색이나 녹갈색 유약을 입힌 매끄러운 생활품은 ‘사쓰마야키’풍의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나하시(那覇市)는 전쟁 말기에 폐허가 되었으나 쓰보야 일대만은 기적적으로 남았다고 한다”
“쓰보야의 역사는 200년이에요”라고 오키나와 도요관계자는 말하였다. 나에시로가와(苗代川), 그리고 류우몬지(龍門寺)에서 조선식 등요(登窯)의 불이 이어져 오는 것처럼, 산의 경사면을 이용한 쓰보야의 가마에서도 연기가 계속 오르고 있었다. 험한 역사의 흐름 속에 조선의 불은 오키나와 남도의 풍토에 녹아들어 독자적인 문화를 만들어나가고 있다고 생각하니 나는 향수(鄕愁)와 비슷한 그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나의 고미술 산책, 일본 속의 조선 문화 22호, 1974)
“조선 회화와 비교하면 조선 도자기는 세계적으로 이름이 높다. 다인(茶人)들에 있어서 는 다완(茶碗)이, 수집가들에게는 항아리가 애착의 대상이다. 옛 조선인들이 일상 생활의 필수품으로 사용한 것, 막걸리나 밥을 담은 그릇 등이 유리장 안에서 뽐내는 것은 묘하지만, 그 하나하나에 독특한 아름다움과 조선의 마음이 느껴지는 것은 귀한 경험이다. 나는 자주 조선 문화 유적을 찾으러 여행을 다닌다. 우선 목적지의 교육위원회에서 자료를 얻어 민예자료관이나 고고박물관을 찾아간다. 그 지역의 특색이나 고대 문물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어떤 경위로 지금의 자리에 머물고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일본 생활에 과거 조선이 녹아들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우에다 마사아끼(上田 正昭)’ 교토대학 명예교수를 만나다
“우리만 이렇게 찾아봐도 소용없으니, 일본 학자들과 상의하고 관련 책을 한 권이라도 내보자”는 결론을 내면서 처음 찾아간 사람이 교토대학 명예교수 ‘우에다 마사아끼’(현 고려미술관장)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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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 고려미술관 관장, 교토대명예교수 우에다 마사아끼(上田正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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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찾은 이유가 그의 저서 ‘귀화인帰化人’(中公新書, 1965)을 모두 읽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우에다 마사아끼’ 교수는 교토대학에 재직하고 있던 청년 역사학자였다. 일본에서 최고의 대학인 교토대학 교수가 일본과 한국 역사의 근본을 뒤집는 논리를 전개하였던 것이다.
“일본에 호적제도나 나라가 형성되지 않았을 때에 조선반도에 서 온 사람을 귀화인이라고 하는 것은 잘못이다. ‘고지키古事記’에는 도래(渡來)라고 확실히 나와 있지 않은가?”, “무엇이든 귀화인이라 하는 것은 틀렸다, 국가란 무엇인가, 그것은 법적으로 호적을 만들어야하고 국민으로서 세금을 내야한다. 그런 것을 법률로 확실하게 정하지 않는다면 국가가 아니다. 고대 국가의 존재가 분명하지 않은 시기에 귀화하였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귀화하는 자리가 없는데 왜?”
많은 일본의 학자들은 이런 모순을 이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글로 쓰는 것은 대단히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요컨대 학회에서 배척당할 염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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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문의 협력자, 소설가 시바료타로(司馬遼太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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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문과 김달수는 힘 있는 아군을 얻은 것이다. 같은 시기에 조선대학의 교수였던 역사학자 이진희(李進熙)도 비공식적으로 합류하였고, ‘일본 속의 조선 문화’가 드디어 잡지로의 간행계획과 윤곽을 잡았다. ‘우에다’교수와 만난 정조문은 형 정귀문이 살던 동네에서 함께 산책하는 사이인 작가 시바 료타로(司馬 遼太郎)한테도 이 이야기를 꺼냈을 때, 매우 재미있는 일이라고 하면서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같이 나누게 된다. ‘일본 속의 조선 문화’ 잡지 발족을 위한 준비가 그렇게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정조문 발간의 계간잡지, ‘일본 속의 조선 문화’ 편집방침
정조문은 “일본 고대사와 조선과의 관계를 빼고서는 이야기를 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곧 잡지 창간 준비를 시작하였다. “일본의 역사는 일본인의 손으로 바로 잡아야만 한다”는 것이 기본적인 자세가 된다는 것을 정조문은 구성원들과 확인하였다.
“일본인 학자가 5명인데 조선인도 같은 인원수로 진행하면 어떻게 되는가. 이것은 사실 상호 평등한 일이지만, 같은 인원이면 조선인의 소리가 더 커지는 법이다. 그렇게 되면 재미가 없으니 2:8, 3:7로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50호로 휴간할 때까지 그 체제를 유지했다.”
“비뚤어진 고대 한일관계사를 바로 잡는 이 기획에 시바 료타로(司馬 遼太郎) 선생, 우에다 마사아끼 선생이 참여하고 재일작가 김달수와 함께 ‘일본 속의 조선 문화’ 제 1호를 발간하게 되었다. 그것은 1969년 3월의 일이었다. 이후 일본의 수많은 선생으로부터 열의 있는 협력을 얻고, 다른 저명한 학자들을 비롯하여 각지 향토사 연구자의 귀중한 연구논문 등을 실어서 비뚤어진 고대 한일관계사의 수수께끼를 푸는 작업이 계속되었다.
‘일본 속의 조선 문화’는 말하자면 일본인 학자와 조선인 학자의 공동연구 자리이며, 양국 학자들이 교류하면서 한일 역사학은 물론, 조선 고대 불교학, 민속학, 풍속학, 고대 언어학 등 많은 효과가 있기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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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문이 친형 정귀문, 재일작가 김달수, 재일사학자 이진희, 소설가 시바료타로 등, 일본 지식인 등과 회합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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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일관계사를 읽을 때 이런 국제적인 공동 작업이 좋은 결과를 내는 것에 큰 의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일본에 거주하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이런 공동연구의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 아닐까. 가능하면 더 넓은 연구의 자리로서 또는 해외에 사는 동포들이 남북 좌우의 갈림 없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마당으로서 도서자료실이나 고미술연구를 위한 문화강좌, 고려미술자료관과 같은 시설을 어떻게든 실현하고 싶다.
‘일본 속의 조선 문화’를 복간하는 것도 앞으로의 과제지만, 또 망향의 염원에 휩싸이면서 제 2의 삶을 살아온 교토의 모서리에 고려미술관을 세우는 것, 그것도 내 생애의 꿈이다” (‘역사와 인물’ 152호, 1983)
드디어 정조문은 당시의 쟁쟁한 지식인들과 일본학자들을 끌어들여 ‘일본 속의 조선 문화’ 잡지를 만들어낸 것이다. 잡지는 곧 일본 속에 조선의 고대사에 대한 일대 선풍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이후 잡지 발행은 1969년부터 13년간이나 계속되었다.
일본 역사학계에서, 귀화인(歸化人)이란 말을 도래인(渡來人)으로 새로 불리게 하다
정조문의 글을 인용한다.
정조문은 남긴 글에서 “귀화인歸化人이란 말은 도래인渡來人으로 새로 불리게 되어 현재 이것도 정설로 인식되고 있다. 이 두 가지 사연을 봐도 일본 국내에서는 역사에 대해 얼마나 애매하게 인식이 되어왔는가를 알 수 있다. 한일관계사, 고대사를 풀어볼 때 국제적인 공동 작업으로 적절히 여러 성과를 거둘 수 있다는 사실에 큰 의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을 반복하며 재검토해 나감으로써 올바른 관계사, 우호 관계가 점점 더 깊어지지 않을까. 이런 사실에 대해 적당히 넘어가면 침략이거나 대항운동이거나 전혀 다른 방향으로 다음 세대가 오해할 위험이 있지 않을까 한다. 고대사라 하는 것은 거듭 발굴하며 검토를 해야 양국, 양 국민의 우호 증진의 기초가 된다고 믿는다. 나는 앞으로 조건이 마련된다면 다시 선생님들의 지도를 받으면서 그 작업을 해내고 싶다” (동양경제일보, 1982. 9. 24)
“일본 각지에는 훌륭한 공·사립미술관과 박물관이 많다. 전통을 살리며 문화를 키워 꽃피우는 노력을 볼 수 있고, 외국의 문화유산도 소중히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조선 문화는 어떨까? 수 년 전에 우에노(上野)의 도쿄국립박물관(東京国立博物館) 동양관 3층에 조선미술을 상설하는 전시실이 생겼고, 코마바(駒場)의 일본민예관(日本民藝館)에서도 상설되어 있으나 독립된 조선미술관은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다. 회화, 도자기, 불상, 석조물, 목공예품 등 만들어진 유물에 대해서는 자애롭게 존중히 여기면서 그 배경이 된 풍토나 인간이 있었음은 전혀 기억되지 않고 있다.“ “이러한 생각이 축적되면서 ‘일본 속의 조선 문화’라는 작은 계간지가 탄생하였는데, 오늘까지 5년간의 세월은 상상조차 못할 만큼 무거운 시간이었다. 중국이나 유럽의 미술품, 고고유물에 비해 질과 양이 절대 뒤떨어지지 않는 조선의 문화유산에는 정당한 자리가 마련되지 않아서 서운하고 안타까워, 나는 언젠가 그 자리를 만들어내고 싶다는 꿈을 가지게 되었다. 나는 어떤 일을 외곬으로만 생각하면 그 일에 자신을 거는 성질인 것 같아서 개인의 한계를 넘어서라도 매진하지 않을 수 없다.”
“두 나라 학자가 함께 학설을 이룩할 때 어떤 효과가 있는가. 예컨대 30호는 ‘이즈모와 조선(出雲と朝鮮)’이란 제목으로 간담회를 했는데 고대사에서 반드시 나타나는 일본의 도기(陶器)인 ‘수에키(須恵器)’, 그 이름이 어디서 왔는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그런 논의를 펼치면서 김달수는 “철은 조선말로 ‘쇠’라 한다. 이것은 일본말로는 발음을 못한다. 마침 토론 자리에 있던 도지사대학(同志社大学) 명예교수인 고고학자 ‘모리 코이치(森 浩一)’가. ”김달수 씨, 다시 한 번 말해 달라”
모리 교수는 무릎을 치고 “수에키의 유래는 바로 이것이다”고 말했다.
즉, ‘수에키’는 “철과 같이 딱딱하여 두들기면 금속 소리가 나는 의성어(擬聲語)인 것이다. ‘수에키’가 만들어지기 이전에는 이러한 기물이 없었으니 일본 말로 ‘수에키’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었다. 이 설은 현재 학계의 인정을 받고 있다”
조총련의 방해
이 칼럼의 상편에서 얘기했듯이 ‘일본 속의 조선 문화’는 최대 난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조국애의 열정이나 신념만 가지고 해결되지 않는 문제였다. 그 조짐은 이미 있었다.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에서 압력이 왔다. 이미 창간호가 발행된 시점에 정조문은 조총련의 교토본부에 재차 불려 갔다. 친형 정귀문은 1976년 ‘사상과 과학(思想と과학)’ 3월호에 ‘일본 속의 조선 문화 여록’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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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2월 일본 도쿄 중앙공론사 '일본 속의 조선 문화'를 격려하는 모임에서 축사를 하는 소설가 '시바료타로'와 정조문 고려미술관 설립자와 부인 오련순여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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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에 즈음하여 우리는 각각 마음을 정했다. ‘일본 속의 조선 문화’는 외부의 간섭, 압력을 거부하고, 굴하지 않는다는 맹서(盟誓)를 했었다. 예감은 들어맞았다. 조총련의 간섭이 시작된 것이었다. 이전에도 그런 전례가 있었다. 김달수는 저서나 잡지에서 그런 경험을 겪었다. 한번은 김달수에게 이런 일도 있었다. 교토부가 주최한 시민강좌에서 고대 조선과 일본과의 관계에 대해 강연을 의뢰받았다. 그런데 교토 조총련은 교토부에 김달수를 강사에서 제외하라고 압력을 가하였다. 한두 번이 아니고 여러 번 압력을 받고 교토부는 단념하고 말았다. 나도 1963년 도쿄에서 작은 잡지를 발행한 적이 있었다. 역시 창간호 단계에서 압력을 받았고, 2호를 끝으로 폐간한 경험이 있다. 정조문은 때때로 조총련의 교토부 본부에 불려 갔는데 부본부의 간부는 이유는 말하지 않고 “잡지를 발행해서는 안 된다”는 말만을 반복했다고 한다. 또한 잡지의 내용에 대해서도 일체 언급하지 않았다. 정말로 기이한 일이었다. 조선문화사에 모인 우리들은 조총련에 속해 있기 때문에 그것을 근거로 명령했던 것일 것이다. 조총련강령에는 언론, 출판 등의 자유가 옹호되어 있으니 그것을 방패삼은 것도 아니고 도대체 왜 이 잡지를 발행해서는 안 되는 것인가.”
정조문의 ‘민족문화운동’을 위한 정치투쟁은 곧 정치를 외면하는 것이었다
정조문은 어떤 유형의 정치회의든 정치모임이나 집회에는 참여하는 것을 피했다.
“지금 상태로 재일동포가 ‘조국론’을 전개하기에는 아직 사상적 기반인 문화적 성숙도가 부족하다고 그는 생각했다. 반일감정이나 조국애만으로 펼칠 수 없는 많은 일을 정조문은 경험하였기 때문이다”
정조문의 민족의식은 ‘조선백자’에서 고대사를 바로 잡는 것으로부터 눈 떠
친형 정귀문의 ‘일본 속의 조선 문화·여담’을 다시 인용한다.
“‘일본 속의 조선 문화’는 한 개의 조선백자에서 출발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잡지의 편집 발행인 정조문이 어느 분으로부터 백자 항아리를 양도받은 날로부터 이미 시작 된 것이다. 1960년대 초 이전부터 정조문은 작가 김달수, 고고학자 이진희와 교류가 있었다. 조선의 고미술에 일찍부터 관심이 있었던 정조문에게 그 조선시대 백자 항아리와의 만남은 여러 가지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백자 항아리는 곧 조국과의 만남을 상징하였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모이면 그 백자 항아리를 마주하곤 했다. 미술적 감상이라고 하는 관점에서만은 아니었다. 우리는 어릴 적 고국에서의 생활을 체험하고 있었던 것이다. 항아리는 우연히 만난 듯한 친근감을 주었다. 돌고 돌아 지금 여기에 있는 항아리의 운명에 사로잡혔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시기에는 아직 잡지를 만들려고 하는 발상은 없었으나 김달수가 조선 유적을 찾아 간사이(關西)지방에 오던 시기였다. 나와 정조문도 동행하였다. 우리는 김달수에 의해 일본에서 보이는 조선 문화 유적에 눈을 뜨게 된 것이다. 혹은 구할 수 있는 도자기도 일본 속의 조선 문화이지만, 신사나 그 신(神)들, 사찰이나 그 불상도 또한 일본 속의 조선 문화였던 것이다. 일본에서 고려청자라든가 조선백자 등에 대한 가치는 매우 높아 상상 이상의 것이다. 청자와 백자 대부분은 일본이 조선식민지시대에 취득한 것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일본 속의 조선 문화’ 제 2호 좌담회 <속續 일본 속의 조선 문화>에 참석했던 교토대 명예교수 ‘우에다 마사아끼’는 이런 발언을 하였다.
“고대 한일관계를 이야기할 때는 잘못된 선입관을 버리고 자신의 문제로서 사실에 근거하여 그 교류를 바라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쓰이지 않은 역사, 파묻힌 역사를 재발견하는 일, 그것은 지배자 측에서는 불가능하고, 민중 측에서 여러 가지 면에서 다시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정조문은 남긴 글에서, “조선 또는 그 문화는 일본 고대사의 일부분 내지는 미세한 것으로 해서 취급돼 온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을 ‘조선 문화를 축으로 해서 발언 한다’고 하는 것은 일본의 역사학계나 문화계가 손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일본의 고대문화 성립과 발전을 일본 열도 내의 요인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동아시아사의 전개 속에서 일본 고대사를 다시 해석해야 한다. 이것은 화려한 타카마쓰즈카((高松) 벽화고분의 출현으로 강력한 증거가 되었다. 지금까지의 야마토(大和)라는 일본의 야마토 중심주의는 ‘일본서기’가 그리는 역사상에 근거하지만, 메이지 정부의 대륙팽창정책, 식민지주의적 역사관의 중핵에는 진구황후(神功皇后)의 신라정벌 등 비뚤어진 조선관이 있었다”
정조문, 역사의 모순을 역사로 아는 일본인들을 일깨우다.
정조문은 일본의 고대 유적지 순례 중, 지방의 학자, 신자, 사찰의 신관이나 주지 스님들을 정조문은 많이 만나 보았다.
“그들은 역사의 모순을 이야기하였다. 혹은 신들의 유래에 관해 이야기 하곤 했다. 그런데 잡지게재를 위해 글을 의뢰하고, 원고를 받아보면 지금까지의 역사서와 별로 다를 바가 없었다. 오히려 놀라운 일들이 벌어졌다. 일본인의 ‘역사 체질’이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이상한 ‘권위’가 그렇게 시킨 것이다. 그들은 신들의 모습을 생활 속으로 끌어들여 자유롭게 이야기한다. 예를 들면 신들은 원래 인간이었고, 따라서 자신들의 먼 조상이었다고 한다. 거기에서 역사를 보려고 한다. 그러나 역사학자라고 하는 이상한 ‘권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 창간호 원고에서부터 난관이 있었던 것은 당연하다. 생각해보면 열정만으로 발행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창간호 좌담회는 이해를 같이하는 사람뿐만 아니고, 기대하지도 않았던 그 이상의 출석자도 있었다. 우에다 마사아끼, 시바 료타로, 무라이 야스히코, 그리고 김달수였다. 말하자면 미래가 불투명한 잡지에 일본의 유명한 인사가 참가했던 것이다. 행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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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문 발행의 '일본속의 조선문화' 1권/50권 표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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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서 이야기해보면 의기투합할 수 있는 일본의 학자는 많지만, 활자로 남겨야 하는 일이 되면 자신의 책임감으로 지금까지의 학설을 강하게 누르는 학자의 자세에 정조문은 일본과 한반도 역사적 재구축의 벽을 두껍게 느꼈을 것이다.
교토명에교수이자 현 고려미술관 관장인 ‘우에다 마사아끼’는 ‘강좌, 인권 관계의 땅을 찾아서’ (공익재단법인 세계인권문제 연구센터 발행)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였다.
“내가 저술한 1965년 6월에 출판된 ‘귀화인’이라는 책을 시바 료타로, 정조문 형제 그리고 작가 김달수씨가 읽었습니다. 이것은 나중에 들어서 알았지만, 제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였던지 정씨 형제와 김달수씨, 이진희씨가 1965년 8월에 리츠메이칸 대학(立命館 大學)의 하계 강좌에 내 강의를 들으러 왔습니다. 나는 물론 그곳에서 명함을 교환하지도 않았습니다. 나중에 들으니 모두 ‘귀화인’이라는 책을 읽고 제가 리츠메이칸 대학에서 강의를 한다고 하니 찾아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1968년 9월에 시바 료타로와 제가 조선문화사의 고문이 되었습니다”
계간 ‘일본 속의 조선 문화’, 고대의 조선 문화를 축으로 고대 일본을 보고자 했다.
이 계간 잡지는 호황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1973년 2월에 ‘시바 료타로’와 ‘우에다 마사아끼’, 김달수의 요청으로 잡지 ‘일본 속의 조선 문화’를 격려하는 모임이 도쿄에서 개최되었다. 중앙공론사 빌딩 대회장이 모임장소였는데, ‘와카모리 타로(和歌 森太郎)’, ‘다니가 와 데쓰조(谷川 徹三)’, ‘마쓰모토 세이초(松本 清張)’, ‘타케우치 요시미(竹 内好)’, ‘이노우에 미쓰사(井上 光貞)’, ‘나카노 시게하루(中野 重治)’, ‘오카모토 타로(岡本 太郎)’, ‘진순신(陳舜臣)’, ‘아리요시 사와코(有吉 佐和子)’ 등 문인과 학자, 기자들 180여명이 참석하였다. 이날 있었던 격려사나 축사는 의미가 깊었다. 그 중 중국 학자인 ‘타케우치 요시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는 이 잡지가 처음에는 취미잡지인가 생각해서 그저 가볍게 보려고 했습니다만, 점점 그렇지 않고 이것은 일본에서 가장 혁신적인 잡지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이 없습니다. 저 자신이 작은 잡지를 만들고 있는데 실패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정말로 혁명적인 잡지를 만들려면 이런 식으로 해야 한다는 것을 요즈음 깨닫게 되었습니다. 언제까지나 계속해 주시고 한 권, 한 권이 언제 끝나더라도 이 잡지는 영원히 남을 것입니다.”
‘격려회’는 상상 이상으로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초등학교 3년의 학력이 전부인 정조문이 단상에 올라 일본을 대표하는 학자, 작가로부터 축하 메시지를 받았다.
‘일본 속의 조선문화’에는 광고가 단 한 줄도 없어야 한다.
아들 정희두(鄭喜斗, 현 고려미술관 상무이사)의 증언이 있다. 정조문이 가족 앞에서 절대 말하지 않는 이야기가 있다면서 아들은 말했다.
“‘일본 속의 조선문화’에는 광고가 하나도 없다. 단 한 줄도 없다. 물론 타사광고에 실린 적도 없다. 왜냐하면, 광고를 싣게 되면 잡지가 퇴색하게 된다. 북측의 기업 광고가 게재되면 이 잡지는 북측 계통의 읽을거리가 되고, 남측의 기업광고가 실리면 남측의 잡지가 된다. 그리고 일본 기업은 당치도 않은 것이야.”
이런 정조문의 사고방식은 후에 고려미술관 건립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하편으로 이어짐)
[참고, 인용도서(參考, 引用圖書)]
< 정조문과 고려미술관> ‘재일동포의 삶과 조국애’
編著 정조문 (공익재단법인 고려미술관 초대 이사장)
정희두 (공익재단법인 고려미술관 상무이사)
編譯 최선일 (문화재청 문화재감정위원)
이수혜 (공익재단법인 고려미술관 학예연구원)
김희경 (동북아불교미술연구소 연구실장)
손은미 (국립중앙박물관 일본어 해설사
강미정 (동북아불교미술연구소 간사)
펴낸이 이화표
편 집 윤민지
펴낸곳 도서출판 ‘다연’
1988년 10월 25일 교토 고려미술관 개관
드디어 1988년 10월 25일, 정조문이 그렇게 각고(刻苦)의 노력으로 40년 이상 일본 구석구석을 찾아다니면서 개인 재산을 투입해, 잃어버린 ‘우리 문화재’ 1700점을 되찾아 고려미술관은 개관되었다. 소장품은 이미 1950년 한국전쟁 이전이나 한국전쟁 중에 고국인 한국에서 일본으로 넘어온 1,700점의 미술품이다. 고분부장품부터 고려청자와 조선백자 등 도자기, 생활도구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정조문이 조선시대 백자 항아리를 만난 지 40여년 만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정조문은 미술관을 개관하기까지에는 자신의 건강이 썩 좋지 않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자신의 수명(壽命)을 역산(逆算)하여 분투(奮鬪)하면서 미술관 개관을 준비했다. 그야말로 필사적인 고투(苦鬪)였다. 그리고 그의 미술관 개관에 대한 염원은 미술관 개관 15년 전인 1973년 마이니치신문에 “문화재를 보유하는 자의 의무”라는 제목의 글로 표현됐다.
“최근 어느 여자 대학생 두 명이 조선 도자기를 주제로 졸업 논문을 쓰고 싶다고 나를 찾아왔다. 그들은 실제로 조선시대 항아리를 어루만지면서 감동하여 눈이 반짝거렸다. 책이나 사진으로 얻은 지식의 몇 배가 될 느낌을 하나의 항아리를 통해 느꼈던 것이다. 유물을 보면서 눈앞이 밝아지는 기쁨을 조금이라도 많은 사람과 함께 나누고 싶다는 소망은 미력한 내 생각이 지나친 것일 수 있다. 그러나 많은 연구자들이 한정된 사고방식에서 빠져나갈 수 있도록 그것을 사적으로 소장하며 은근히 애호하는 일은 문화재를 보유하는 사람의 의무라고 생각한다. 네 기둥에 지붕이 있는 단순한 건물이라도 상관없다. 나는 어떻게든 조선미술관을 실현하고 싶다” (마이니치신문(毎日新聞) 기사, 1973. 12. 7)
정조문은 왜? 일본 교토에 ‘조선 미술 전문미술관’을 세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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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고려미술관 전경. ©김상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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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문이 ‘조선의 문화재’를 전시하는 전문 미술관을 세운다는 구상은 삽시간에 일본문화계에 퍼져나갔다. 오사카의 히라카타시(枚方市)에서는 세 번이나 미술관 유치 이야기가 있었다. 히라카타시는 한자천자문을 백제로부터 전해주었다는 왕인(王仁)박사와 인연이 깊었다. ‘왕인’은 백제의 외교관, 학자, 화가로 일본에 건너가 천자문과 논어를 전했다고 전해지는 인물이다. 백제의 제13대 국왕인 근초고왕(近肖古王, ?~375년, 재위 346년~375년)의 맏아들인 백제 근구수왕(近仇首王, 322년~384년, 백제의 제 14대 국왕, 재위 375년~384년)의 명을 받아 왕의 손자 진손왕(辰孫王)과 함께 일본으로 ‘왕인’은 건너갔다.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와니'(일본어: 王仁 わに), 고서기 (古書紀)에서는 '와니키시'(일본어: 和邇吉師 わにきし, 화이길사, 吉師는 백제 인명이나 훌륭한 스승에게 붙이는 일본식 존칭)등의 이름으로 등장한다. 히라카타시는 이런 ‘왕인’박사와 관계가 깊고 또 한반도와 관계하고 싶어서 미술관’을 유치하고자 했다.
그러나 정조문은 교토에 미술관을 세우기로 결심한다. 이는 교토가 정조문 자신이 조선에서 일본으로 건너와 생활의 근거지가 됐고, 마치 제2의 고향처럼 각별하기도 했지만, 그것보다는 교토야말로 일본문화의 중심지이고 일본인들의 엄연한 마음의 고향이란 사실이다. 그런 교토에 한국 문화재의 아름다움을 그는 전하고 싶었다. 교토의 땅에서 빛나는 것이야말로 일본인의 마음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전해지는 것이라는 생각을 그는 한 것이다.
남과 북이 같이할 수 있는 공간으로의 미술관이름, ‘고려미술관’
정조문이 미술관 이름을 ‘고려미술관’이라고 정한 이유도 있다. ‘고려’는 한반도 최초의 통일왕조 이름이다. 정조문은 그 이름이 북한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나 남한의 ‘대한민국’을 뛰어넘는 민족공동체를 표상하는 이름의 독특한 공간의 미술관으로서 이상을 실현하고 싶었다. ‘분단된 조국에는 돌아가지 않는다’라는 확고한 의지를 관철한 재일동포 1세대의 단호함을 ‘고려’라는 이름으로 나타낸 것이다.
조선에 대한 편견과 차별을 바로 잡아야 한다.
정조문의 미술관 개관에 대한 집념과 의도는 그의 생전 일본어 메모에서도 잘 드러난다.
“조선의 역사, 민화, 노래 등 편견차별을 바로 잡는 일
일본의 민주주의를 진짜의 것으로 하는 것
1세들은 통일되면 귀국한다고 소망하고
2, 3, 4세들은 일본에 영원히 머물다.
상호 이해, 차별을 없앨 것”
그러나 정조문의 미술관 개관에 이르기까지에는 자신과 같이 고락(苦樂)을 나누던 ‘동지’들과 헤어지는 크나큰 아픔이 있었다. 바로 조국분단의 문제였다. 미술관 개관 8년 전 이전으로 이야기는 돌아간다.
조국 분단의 상처, 동지와 헤어지다.
정조문이 일본의 삐뚤어진 한,일관계 고대역사를 바로잡기 위해 고대의 조선 문화를 축(築)으로 고대 일본을 보고자 했던 취지에서, 1969년부터 13년간 계간지 『일본 속의 조선 문화』를 50권이나 발행하는 동안, 재일조선인 작가로 김달수, 재일조선인 역사학자 이진희와 정조문은 각별한 동지적 관계였음은 앞글 ‘상편’에서 서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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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뉴뢰광문경 多鈕雷光文鏡 청동기시대초기, Mirror with Lighting Design and Knobs. Early Blonze age, D 9.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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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자철화돛단배어문호 鉄砂帆船魚文壺 조선시대 19~20세기, Jar with Sailboat and Fish Design in Underglaze Iron Painting Joseon Dynasty,19th ~20th century. H 3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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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1979년 박정희 대통령 암살사건을 비롯하여 1980년 광주민주화항쟁, 그리고 군사쿠데타로 전두환의 제 5공화국 출범, 그런 속에서 재일동포 세계도 둘로 갈렸다. 재일동포라면 누구라도 한국의 광주에서 있었던 참상을 보면 분노하게 된다. 1세대라면 더욱 그러했다. 이때 한국의 전두환 군사정부는 김달수, 이진희 등 재일동포사회에서의 중요한 지식인 역할을 하는 그들을 초청했다. 그리고 의도에 의해서 이들의 한국 방문은 크게 보도되었고, 마치 친 북한 지식인들이 전향이라도 한 것처럼 언론에 기술(記述)되었다. 전두환 군부의 집권을 지지하는 것처럼 꾸며진 것이다. 그러나 김달수와 이진희 등의 지식인은 반드시 친북인사는 아니었다. 이들은 한국의 민주화 인사들을 지원하는 운동으로 한국의 지식인들과 공조할 생각이었지만, 그러나 한국방문 실상은 한국의 전두환 정권에 이용만 당하는 현실로 나타났다. 급기야는 이들이 한국의 ‘군사독재정부를 인정했다’고 하는 보도까지 나왔다. 재일교포 지식인 사회는 분열되었다.
정조문과 이들이 동지가 되어 일본의 각 지역을 탐방할 때 한국이 잘 보인다는 대마도(対馬島)까지 갔고, 3명이 스크럼을 짜고 ‘이국이 보이는 언덕전망대(異国の見える丘展望台)’인 센표마키야마(千俵蒔山)에서 한 손에 술병을 들고 “바보!”라고 외치던 모습은 이미 안개 낀 바다 저편으로 사라져버렸다.
김달수와 이진희 두 사람은 한국에 다녀온 일을 말하지 않은 채 교토 정조문의 집에서 열린 ‘조선문화사’ 기획 회의에 참석하였다. 그러나 이미 두 사람이 한국에 다녀온 것을 알고 있었던 정조문은 괴로워했다. ‘친구’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한국을 방문한 이유나 변명 따위도 필요 없다. 그도 사실은 가고 싶었다. 다음 해엔 형 정귀문도 드디어 고향을 방문하였다. 양친의 묘를 정비하고 교토에서 전쟁 전에 돌아가신 할머니와 어머니의 유골을 봉납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 모습은 ‘우리 나그네’라는 글에 나와 있다.
“아아, 고향이여, 감개무량하다. 전경이 눈에 들어온 것도 ‘내 고향이여’ 하고 외치기에 어울린다. 역시 감나무는 없어졌다. 그 때문일까, 내 머리에 놓인 것보다 이 평야의 광대함으로 열매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오동나무가 있던 근처였던가, 나와 동생이 묻어둔 물건이 생각났다. 당시 우리들의 놀이를 말하자면 겨울에는 손으로 만든 팽이를 채찍 끝에 끈을 달아 얼음 위에서 치든가 철사로 큰 원을 만들어 V자 형태의 쇠막대기로 굴리면서 달리는 정도였다. 그중에서도 가장 일반적인 것은 일본말로 ‘켄빠’였다. 도기 편을 주워 각자 그것을 돌에 둥글게 갈아 크고 작게 각자의 생각대로 만드는 것이었다. (일본에서 생겼다고 전에 들은 적이 있음) 나와 동생은 몇 개인지 잊었지만, 오동나무 근처를 파고 그것을 묻어두었다”
죽을 때까지 남북 어느 쪽에도 기울지 않고, 분단된 고국에는 돌아가지 않는다.
김달수, 이진희, 그리고 친형 정귀문의 한국 방문은 정조문의 마음을 더욱 확고하게 해 주었다. 확실하게 자신 만은 ‘분단된 고국에는 돌아가지 않는다, 죽을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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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자상감모란문편병 青磁象嵌牡丹文扁壺 고려시대 13世紀, Celadon Flask with Inlaid Peony Design Goryeo Dynasty,13th century. H 28.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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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자호 白磁壺 조선시대 17세기 후반, White Porcelain Jar Joseon Dynasty,latter half of 17th century. H 28.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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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과 북 어느 쪽에도 기울어지지 않고 살아가겠다는 결심이 더 확고해졌다. 그것은 새로운 일을 모색하고 박차를 가하는 계기가 되었다. 바로 미술관을 설립하는 것이었다. 기실 그 무렵, 정조문의 당시 생각에는 조국에 대한 상념에 대해 이런 메모가 남아있다.
“조국으로 돌아갈 기회를 찾는 동안, 분단된 조국은 연합군이란 이름의 외세로 전쟁터가 되어 실망과 낙담, 그리운 망향은 적이냐 우리 편이냐를 선택해야 하는 원망의 조국이 되어버렸다.”
1981년에 ‘일본 속의 조선 문화’가 50회로 휴간된 이후 정조문은 죽을 때까지 김달수, 이진희를 다시는 만나지 않았다. 무서운 결심으로 동지와 헤어진 것이다. 동지와의 결별은 정조문이 그 정도까지 엄격했다. 그리고 무언가에 사로잡힌 듯이 정조문은 혼자서 달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하루바삐 ‘고려미술관’을 설립하는 것이었다. 재일조선인을 강하게 하려면 문화나 역사가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런 결심이 ‘일본 속의 조선 문화’ 계간지 출간과 아울러 미술관 설립의 구체적인 계획으로 하나하나씩 진행해 나가게 된 것이다.
재일 조선인 한국인들에게 남쪽과 북쪽을 가르지 않는 ‘공통의 광장’을 만들고 싶다.
동지의 한국행이 정조문에게는 모든 것의 재출발이었던 것처럼 정조문은 재빨리 행동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그때 까지 결코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일본 속의 조선 문화’ 책 발간에 따르는 재정문제 등, 주로 뒤에서 뒷받침을 담당하며 사람들 앞에서 말이 없던 정조문은 지면상의 대담에 자신의 인생론을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오무라수용소를 폐지하기 위하여’라고 하는 부제를 달은 잡지 ‘조선인’ (1981년 10월호)에 실린 대담에서 정조문은 이렇게 이야기하였다.
“고려미술관을 마련하고 싶습니다. 그렇게 되면 남쪽을 지지하는 일도 북쪽을 지지하는 일도, 그리고 성분으로 구분할 수 없는 공통의 작은 광장을... 미술관이라고 하는 이름을 갖고 싶은 것이 나의 목적입니다. …대다수의 사람이 그렇지 않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딘가 가도 누군가가 보고 있지 않을까 하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느낄 필요가 없는-필자 주)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 공간은 순진무구하고 자신과 선조가 남긴 물건을 일본이라고 하는 이방(異邦)에서 봅니다. 이러한 일은 좋지 않은가요. 소박한 마음으로 자유롭게 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언론에 미술관의 구상을 이야기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김달수와 이진희가 한국을 방문한지 반년 뒤의 일이었다. 그의 생각은 점점 구체화됐고 확대되어 갔다. 교토 ‘잉글리쉬센터’가 발행하는 ‘센터 통신’(1983년 2월)에는 ‘재일 58년, 차별과 투쟁, 조국의 통일을 기원하며’라는 주제 대담이 수록되어 있다.
“지금 일본에는 조선, 한국계 학교가 170개 정도 있습니다. 그런데 조선미술관이라든가 조선도서관이라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한반도 통일을 염원해 정말로 한국학을 공부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고려미술관이든가 고려미술자료관 같은 것을 만들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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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조아미타불삼존불감 木造阿弥陀三尊仏龕 조선시대 1689년, Gilt Lacquer Wooden Alter Housing the amita Triad, Joseon Dynasty,1689. H 47.6 W 33.1 D 28.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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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칠나전장생문바둑판 黒漆塗螺鈿長生文碁盤 조선시대 18~19세기, Black Lacquer GO Board with Mother-of-pearl Decoration of Long Life Design, Joseon Dynasty,19th century. H 29.5 W 45.5×4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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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조선인 차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였다.
“한반도 문화에서 우선 조선이라고 하는 것을 정의하고 싶습니다. 현재만을 아무리 논(論)하여도 조선 멸시라고 하는 뿌리가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현대의 문제도 물론 중요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일본인의 조선 의식이라고 하는 것은, 조선 멸시라고 하는 것은 고대사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 뿌리에서 시작하여 현대로 오지 않으면 그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그 대담에서는 관람객이 되는 재일동포 어린이들에게는 자긍심을, 그리고 일본인에게는 한반도 문화의 아름다움을 전하고 싶다는 그런 마음을 정조문은 피력했다.
왜? 조선의 문화는 찬양하면서 조선인은 경멸하는가?
“어느 일본 지식인이 ‘일본 속의 조선 문화’란 좌담회에서 일본인들의 문제를 지적하였다. “왜 조선인이 만든 찻잔(필자 주- 일본의 국보인 ‘이도다완 (井戶茶碗)’을 말하는 듯하다. 높이 8.8 cm, 16세기 조선시대)은 칭찬하면서 조선인을 경멸하는가. 도대체 일본인은 무엇인가?”
그다지 자신의 말을 나타내는 일이 없던 정조문이 그 시기에는 기고와 의견발표를 계속해 나갔다.
“그래서 미술관이 필요한 것이다” 라고 정조문이 일본에서 미술관 건립 의사를 표명한 것은 일본에서의 정주(定住)를 결심한 순간이었고, 그것은 동지와 결별의 의사 표시, 아니 선전 포고라고도 할 수 있었다. 그것은 그 어떤 조직의 힘에 의지하지 않고, 또한 어떤 다른 동포에게도 의지하지 않고, 자신 개인의 재력과 자신의 소중한 지인들인 일본 지식인들의 성원에 힘입어 고독한 싸움에 도전하겠다는 태도를 천명한 것이다.
정조문의 장남 조희두(고려미술관 상무이사)는 이 무렵의 아버지 정조문을 선명하게 기억하면서 증언하고 있다.
정조문의 큰아들 조희두의 증언
“1987년에 필자는 아버지 정조문과 둘이서 도쿄에 갔다. 관동주재의 재일 경제인들과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중에는 당시 동포 사회에서 금전적이나 문화적으로, 또한 사회적으로도 막대한 영향력을 가진 기업의 회장이 있었다. 그러면 미술관의 취지를 충분히 이해해 줄 것으로 생각하였다. 대담 중에 나는 아버님이 틀림없이 금전적인 지원을 상대에게 부탁할 것으로 생각했으나, 돌연 차남을 돌려달라고 부탁하였다. 차남인 정혜윤은 대학 졸업 후, 그 그룹회사에 취직해 중책을 맡을 정도로 성장해 있었다. 그런 차남을 회장은 맘에 들어 했던 것이다. 도무지 금전적인 지원을 해달라는 말을 꺼내지 못하는 아버지는 갑자기 왜 금전적인 부탁은 하지 않는가 하고, 조바심이 났다. 돌아오는 신칸센에서 아버지는 ‘주간문춘’을 펴고 한 페이지를 뜯어 발밑에 깔았다. 나는 무슨 일인가 해서 그 페이지를 보자, 쇼와천황(昭和天皇) 의 사진이 지면에 실려 있었다. 아버지는 ‘쇼와천황’의 건강 안부를 전해주는 사진에 발을 올려놓고 있는 것이었다. 나를 보고 웃는 그 표정에는 도쿄에서의 분한 마음이 담겨있는 것 같았다. 정말로 차남을 돌려달라는 이야기보다는 본래 목적인 자금 융통 이야기를 꺼내지 못한 것이 분했던 것이다. 아버지는 저를 보고 “재일동포는 말참견은 하지만 돈은 내놓지 않아. 적은 금액이라도 이쪽에서 자금을 받아들인다면 미술관 운영에 이것저것 간섭하기 시작한다. 돈에 색깔은 없지만, 그들의 말 속에는 남북의 문제가 꼭 있다. 역시 사람에게 부탁할 것은 앞에서는 안돼”라고 말했다. 그리고 창밖을 바라보며 멀리 장래를 내다보듯이 말씀하셨다. 아버지는 “내가 가진 미술품은 정말 적다. 수집품이라 해도 민예품 중심이다. 일본에는 나보다 많은 미술품을 가진 동포가 있다. 내가 작은 미술관을 만든다면, 그들도 반드시 지지 않으려고 미술관을 만들 것이다. 혹시 몇 사람은 미술품을 맡아 달라고 할 것이 틀림없다. 한국 문화재는 재일동포 1세대가 많이 수집했고, 그들도 나와 같이 나이가 들었다. 10년이 지나면 일본에는 훌륭한 사립 한국미술관이 많이 생길것이다”라고 추측했다. 이 이야기 뒤에는 아버지는 미술관을 ‘나 혼자 세우겠다’고 하는 결심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로부터 일체 기업인을 만나는 것은 그만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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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문의 장남 정희두, 공익재단법인 '고려미술관'상무이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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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담이지만 그로부터 25년 동안 일본 전역에 있는 동포들의 한국 문화재 수집품이 공개된 적은 없다. 재일동포의 문화적 성숙도는 어느 시기나 변함이 없다.“
필자 주- 쇼와천황(昭和天皇, 1901년 4월 29 ~ 1989년 1월 7)은 일본의 124번째 천황. 본명은 히로히토(裕仁)
1700점의 문화재를 되찾은 것, 이것은 정조문 방식의 치열한 ‘독립투쟁’
개관하고 얼마 되지 않은 1988년 11월 중순 정조문은 쓰러졌다. 정조문은 병상에서도 시간을 아까워하며 장남인 정희두와 차남인 정혜윤에게 조선의 역사에 대해 강의하였다.
미술관을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전할 것인지, 각각의 미술품 앞에서는 어떤 설명을 해야 하는지, 예를 들면 조선시대 목가구를 이야기할 때는 한반도 특유의 삼한사온(三寒四溫)에 대한 기후를 먼저 이해를 시켜야 한다는 것 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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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각삼층장 華角三層欌 조선시대 19세기, Three-Layered HWAGAK Chest,decorated with Ox-horn sheets, Joseon Dynasty,19th century. H 123.0 W 77.0×36.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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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수화조도10푹병풍 부분 刺繍花鳥図十曲屏風 部分 조선시대 18~19세기, Embroidery Diagram of Flowers and Birds, Joseon Dynasty,18~19th century. Each 79.5×3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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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 개관준비는 얼마 남지 않은 자신의 생명과 역투(力鬪)였다. 그것은 정말로 재일동포 1세대의 기백 그 자체였다.
정조문은 마치 자신이 미술관 2층에서 관람객들에게 강의하는 것처럼 두 아들에게 이야기하였다. 개관 이후 입원하기 전까지 1개월 동안 늘 미술관 입구에서 한 사람 한 사람 관람객을 마음으로 맞았다. 관람객이 한 사람일지라도 정성껏 설명을 해주었다. 그것이 정조문의 꿈이었고 이제 현실이었다. 작은 미술관이지만 그 문을 들어서면 틀림없는 ‘한반도’였던 것이다. 석인(石人)들이 문을 지키고 관람객을 맞이한다. 정원에서 시작된 전시품 하나하나는 정조문이 발품을 팔아 손에 넣은 ‘조선’ 그 자체이다. 잃어버린 문화재를 되찾은 것, 이것이야말로 정조문 방식의 치열한 독립투쟁이었다.
1989년 2월 24일 재일조선인(在日朝鮮人) 1세대 정조문의 장례식
정조문은 개관하고 4개월이 채 지나지않은 1989년 2월 22일 오랜동안 앓고 있던 간장병肝腸病으로 결국 유명을 달리했다. 향년 70세였다.
장례 당일은 비가 쏟아졌다. 교토 ‘죠오본렌다이지(上品蓮台寺)’에 2,000명이 넘는 남북의 재일동포와 일본인들이 장례식에 참석하였다. 이곳은 소년 정조문이 뛰어놀던 제2의 고향이라 말할 수 있다. 정조문이 다녔던 ‘라쿠시(楽只)’ 소학교가 지금도 당시의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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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호도 龍虎図 絹本墨画淡彩 李楨 筆, 조선시대 16세기말, Dragon and Tiger by LEE JEONG(1578~1607), Joseon Dynasty,Late of 16th century. Each 116.0×7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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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본(千本)’거리에 늘어선 조문 행렬에는 정조문과 오래 교류하였던 벗과 지인, 재일동포 사업가, 문화 활동의 동지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같은 날 도쿄에서는 쇼와(昭和)천황의 장례식이 거행되고 있었다. 드디어 ‘쇼와(昭和)’시대의 막(幕)이 내리는 날이었다.
‘쇼와’ 시기는 제국주의 전쟁기와 전쟁 후 번영기로 구분된다. 그리고 조선의 근현대사에서는 비운의 식민지 시기와 남북 분단시기로 나눌 수 있다. 이러한 ‘쇼와’ 시대의 역사가 끝나는 날이었다. 일본 전국이 무거운 공기에 휩싸인 이날, 교토 센본거리의 조문객들은 슬픔에 잠겨 눈물과 침묵 속에 고인과 작별을 고하였다. 상주였던 장남 정희두는 참배객에게 그날 이런 인사말을 했다.
“아버지는 64년 동안 재일조선인으로, 한 번도 조선의 땅을 밟지 않았습니다. 남과 북이 우리 조국으로 통일될 때까지 절대 귀국도, 방문도 하지 않겠다고 결심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아버지의 유품 중 하나를 조선에서 가장 가까운 대마도에, 아버지의 조국으로 향한 추억과 함께 가지고 가겠습니다”.
왜 하필 대마도였을까?
대마도는 6살 때 일본으로 건너온 정조문에게 조국과 가장 가까운 곳이었기 때문이다. 큰아들 정희두는 이렇게 얘기한다.
“대학교 2학년 봄에 김달수의 소설책 ‘쓰시마까지’를 들고 현지를 방문하였습니다. 거기에는 아버지와 친구들의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첫 번째 대마도 여행은 친형인 정귀문의 ‘고국을 그리는 여행’이라는 기행문에도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제 여기는 조선해협입니다”라고 누군가 말했다. 센표마키야마(千俵蒔山)에서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그 안타까움은 아직도 없어지지 않았다. 시속 30km의 선박이라면 2시간 이내에 건너편 부산에 도착하겠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두 침묵하고 있었다. 우리들의 행동은 팔색조와 어딘가가 닮은 점이 있지 않은가 생각하였다. 우리는 태어날 때의 소리가 있어서 각각의 소리로 지저귐을 남긴다. 또한, 조국의 소리와 친척들의 지저귐도, 대마도에서는 더욱 가깝게 전해질 거라는 생각에 위로가 되었던 것인가…좀처럼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 대마도의 팔색조를 불러들이기 위해 우는 소리를 녹음해서 불러들이는 이 방법은 조국에 대한 그리움으로 대마도에 모여든 당시의 동지들도 같은 맥락이었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내가, 뭘 어떻게 했다는 거야!”
장남 정희두의 회고가 이어진다.
“아버지는 1972년과 1974년에 대마도를 방문하였습니다. 한번은 ‘우에다 사아끼’ 교토대 명예교수, 김달수 작가, 친형님 정귀문을 비롯하여 재일지식인과 일본의 역사학자들이 단체로 방문했습니다. 그리고 2년 후에는 50대 후반의 중년 남자 3명이 나가사키현(長崎県) 쓰시마(対馬島)의 북단에 있는 센표마키야마에 갔습니다. 서쪽에서 불어오는 세찬 바람에도 3명은 땅에 발을 꽉 딛고 바람에 저항하며 서 있었습니다. 김달수, 이진희, 그리고 아버지였습니다. 그들이 서 있는 곳에서 한반도까지는 약 50km. 맑은 날에는 1년에 한두 번 정도는 눈으로 한국의 섬들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중년 남자 3명의 얼굴은 상기되었으며,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작가 김달수는 그때의 모습을 소설 ‘쓰시마까지’에 이렇게 남겼습니다.”
“우리는 산에서 내려와 승용차를 탔다. 정조문은 말없이 그저 차를 몰며 산길을 내려오고 있었다. 정조문은 급히 차를 멈추더니 핸들에 얼굴을 묻고 울기 시작하였다.
“우리가, 내가, 뭘 어떻게 했다는 거야!” 정조문은 소리를 내며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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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수도 山水図 紙本墨画 権敦仁 金正喜 김정희 筆画 조선시대 19세기, Landscape by GWON DON IN(1783~1859) and GIM JEONG HUI(1786~1856), Joseon Dynasty 19th century. H 92.7×2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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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문은 쥐어짜는 듯이 소리를 내면서 계속 울었다. 뒷자리에 있는 나와 이진희도 눈물이 맺혀 시선을 둘 때가 없어 서로 다른 쪽을 향해 밖을 바라보았다. 정조문의 머리가 유난히 더 하얗게 세어 보였다. 정조문은 드디어 울음을 삼키며 마음을 다잡고 차를 출발시켰다. 그리고 한참을 가다가 정조문은 조용한 목소리로
‘김선생’하고 정색을 하며 나를 불렀다. “나라와 민족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정조문이 나한테 물었다. “모르지. 알 수 있는 것은 당신이 지금 그것 때문에 울었다는 것뿐이야”라고 나는 대답했다. 그러나 왠지 화가 났다. 왜 화가 났는지 알 수 없었으나 어디를 향해 힘껏 외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렇게 가까운데, 우리는 왜 여기까지인가!”
이것은 재일동포 3인이 대마도를 방문했던 소설의 마지막 장면이다. 이후 1970년 후반부터 대마도는 고국으로 돌아가지 않았던 일본 거주 지식인의 고국에 대한 그리움의 성지(聖地)가 되었다.
아버지 ‘정조문’과 고려미술관
큰 아들 정희두의 회고다.
“아버지의 유품을 이곳에서 조선반도로 향해 띄어 보낸다”라고 한 것은 아버지의 유지(遺志)인 고려미술관을 이어받아 계승한다는 생각에서 한 말입니다. 아버지 정조문은 일본에서 조선의 미술품 수집에 집념을 불태우면서 대마도까지 밖에 갈 수 없다는 생각을 ‘고려미술관’이라는 형태로 나타내셨던 것입니다. 대마도에서 3명이 품은 생각은 재일동포 1세대만 느낄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저도 젊은 시절에 대마도에 가 보았지만, 특별한 느낌은 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를 이해하고 재일(在日)의 역사를 배우고, 의지를 계승하기 위해서는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버지의 삶은 재일동포 1세대가 살아온 증거입니다. 아버지는 ‘조선문화사’라는 단체를 설립하여 김달수, 시바 료타로, 우에다 마사아끼와 함께 일본 전역을 돌면서 일본 속의 조선을 발견하는 여행에 많은 시간을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조선에 돌아갈 수 없는 슬픔을 가까이에 있는 대마도를 찾으면서 고국에 대한 향수를 달랬던 것입니다. 이는 많은 일본인에게 조선이 ‘가깝고도 먼 나라’가 아닌 것을 증명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제 아버지 정조문은 죽을 때까지 조국 땅을 밟지 않았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고향 방문도 한 번도 하지 않았습니다. 가려고 하면 갈 수 있었지만, 타협을 허락하지 않는 그의 성품이 그를 일본 땅에 머무르게 했던 것입니다.”
“지금도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 올 것만 같습니다. 아버지는 결코 사람들 앞에서는 눈물을 보이지 않는 과묵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이 소리 없는 울음은 아버지다운 표현으로 생애에는 조국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결의를 다진 마음의 외침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마음으로 조선의 미술관을 세우려고 하는가. 우선 일본에서 처음으로 만드는 조선미술 전문미술관이 정신적으로 얼마나 중요한가를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이 어려운 문제이고, 모든 것의 시작이다.’라고.
2012년 10월에 개관 24주년을 맞아 5층 석탑 앞에서 어머니와 아들은
미술관 안 뜨락에는 높이 6.5m의 5층 석탑이 있다. 이 석탑은 고려시대의 것으로 고베(神戶)의 부농(富農)의 밭에 뿔뿔이 흩어져 방치되어 있던 것을 발견한 정조문이 15년 동안 찾아다니고 설득하여 겨우 손에 넣은 것이다.
“네 아버지는 석탑을 구입하기 위해 매주 고베에 갔었다. 이전 소유주의 선대(先代)에 누군가 선박회사를 운영해서 선박 화물과 함께 한국에서 갖고 왔다고 들었다. 선대가 죽고 나서 상속문제도 있었겠지. 2,000만 엔을 주고 구입했다고 들었다.”
이 석탑은 지금 고려미술관의 상징이 되었다. 방문객은 반드시 여기서 기념 촬영을 한다.
식민지 소년이 본 ‘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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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문의 외손녀 이수혜, 공익재단법인 '고려미술관'학예연구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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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문의 유해는 교토 히에이잔(比叡山) 산기슭으로 모셨다. 정조문은 어린 시절 밤늦게까지 계속되는 베틀 짜는 소리에 잠 못 이룰 때면 자주 밖에서 히에이잔을 바라보았다. 그때 소년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멀리 산 중턱에서 반짝 반짝거리는 반딧불 같은 것이었다. 소년은 산에서 본 반딧불을 상상하면서 꿈을 키웠다. 환상적인 빛의 정체는 실은 히에이잔의 케이블카에서 나는 불빛이었다. 정조문은 후에 자주 아이들을 데리고 그 케이블카를 탔다. 정조문의 묘(墓)는 케블카 타는 곳 바로 옆에 있다. 가족이 성묘를 갈 때면 소년 정조문의 낭만적인 면을 떠올리며 고인을 회상하는 곳이다.
고미술품을 수집한다는 것은 간단하게 미술품을 손에 넣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오래되면 오래될수록, 가치가 높으면 높은 만큼 수리, 보수, 짜 맞추기, 유지, 관리에 돈이 많이 들고, 그 이상의 비용이 든다. 고려미술관의 유지비용은 일본 돈으로 연간 약1,000만 엔 이상이 든다. 지금은 큰 아들 정희두와 차남 정혜윤이 중심이 되어 정조문이 남긴 회사와 함께 미술관을 유지 관리하고 있다.
정조문의 장녀 정령희(鄭玲姬)의 작은 딸 이수혜(李須惠)는 한국에서 공부하여 현재 고려미술관 연구원으로 재직하며 외할아버지의 뜻을 따르고 있다.
고려미술관의 안내 리플렛에 정조문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제가 바라는 것은 온 세계 사람들이 우리 조국의 역사와 문화를 올바르게 이해함으로써 진정한 국제인(國際人)이 되기 위한 한 걸음을 내딛는 것입니다. 조선이나 한국의 풍토 속에서 성숙한 아름다움은 여기 일본에서도 언어, 사상, 이념을 넘어 이야기합니다. 부디 차분히 그 소리를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하편(下篇) 끝-
※일본 교토에서 고려미술관 가는 방법
교토역 버스터미널에서 시영버스 9번 이용, 가모가와 츄가쿠마에(加茂川中學前 정거장에서 하차하여 도보 1분, 개장시간/ 개관 시간 10:00-17:00, 휴관일/ 매주월요일(단 축일과 겹칠 경우에는 다음날 휴관)
■高麗美術館
〒603-8108 京都市北区紫竹上岸町15番地
TEL 075-491-1192 FAX 075-495-3718
홈페이지주소/ http://www.koryomuseum.or.jp/
[참고, 인용도서(參考, 引用圖書)]
< 정조문과 고려미술관> ‘재일동포의 삶과 조국애’
編著 정조문 (공익재단법인 고려미술관 초대 이사장)
정희두 (공익재단법인 고려미술관 상무이사)
編譯 최선일 (문화재청 문화재감정위원)
이수혜 (공익재단법인 고려미술관 학예연구원)
김희경 (동북아불교미술연구소 연구실장)
손은미 (국립중앙박물관 일본어 해설사
강미정 (동북아불교미술연구소 간사)
펴낸이 이화표
편 집 윤민지
펴낸곳 도서출판 ‘다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