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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 '인문 공동체'

굴어당 2013. 6. 30. 06:16

 

세종 때부터 임진왜란까지 200년 동안 조선과 명나라는 한·중 역사에서 드물게 부드러운 관계였다. 그 바탕에 두 나라 지식인·위정자 사이 '시문(詩文) 외교'가 있었다. 1450년 명나라는 새로운 황제 즉위를 조선에 알릴 사신으로 문필가들이 모여 있는 한림원의 학사 예겸(倪謙)을 보냈다. 그 전까지는 주로 환관이 사신으로 와 거들먹거렸다. 세종은 당대 최고 문사(文士)인 정인지 성삼문 신숙주를 시켜 그를 맞게 했다.

▶두 나라 문사들은 처음엔 서로 미묘한 탐색전을 펼쳤다. 그러나 이내 상대의 교양과 품격을 알아봤다. 예겸은 조선에 와서 받은 느낌을 시에 담아 내비쳤다. 조선의 세 문사도 시로 화답했다. 이때 지은 시가 예겸 열다섯 편, 정인지·신숙주 여섯 편씩, 성삼문 다섯 편이었다. 예겸은 돌아가면서 정인지에게 "그대와 나눈 대화는 10년 책을 읽는 것보다 낫다"고 경의를 표했다. 신숙주·성삼문과는 의형제를 맺었다.


	[만물상] 한·중 '인문 공동체'
▶이후 명나라는 조선에 보내는 사신은 문사들로 가려 뽑았다. 조선에선 이들이 와 우리 관리들과 주고받은 시를 모아 문집을 내는 게 전통이 됐다. 명나라가 끝날 때까지 문집을 발간한 것이 스물네 차례, 쉰 권에 이른다. 중국이 주변 나라와의 관계에서 이처럼 시문을 외교 수단으로 삼은 예는 드물다. 당시는 중국이 동아시아 종주국으로서 온 나라 위에 군림하던 시대였다. 명나라 조정은 "조선은 비록 외국이지만 독서하는 사람이 많고 예의를 안다"고 높이 봤다. "학문하는 사람을 사신으로 보내야 중국 체통을 떨어뜨리지 않고 인심을 잃지 않는다"고 했다.

▶한국과 중국은 서로 싸우고 갈등을 겪은 적도 많다. 그런 한편으로 학문과 사상·예술 같은 문화에서는 꾸준히 공감대를 넓히고 발전시켜 왔다. 한국은 중국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한국식으로 승화시켰다. 때론 중국보다 더 우수하고 세련된 문화를 이뤄내기도 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한·중 정상회담에서 공자의 논어(論語)를 인용해 북한의 변화를 촉구했다. 시진핑 주석은 최치원이 당나라에서 공부하고 돌아갈 때 지은 시구(詩句)를 빌려 한·중 관계의 각별함을 말했다. 두 사람은 '한·중 인문교류공동위원회'를 만들어 해마다 열기로 했다. 개인 사이에서도 '힘세다' '돈 많다'는 평가보다 더 명예로운 것이 상대의 정신적 품격을 알아보고 인정해주는 것이다. 한국과 중국이 문화의 공통분모를 바탕으로 서로 이해하고 존중하는 노력을 기울이면 두 나라 관계가 한 차원 더 높아질 것이다.

[만물상] 한·중 '인문 공동체'

  • 김태익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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