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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황포군관학교' •곽수근 광저우 특파원

굴어당 2013. 8. 17. 14:33

[기자의 시각] 잊혀진 '황포군관학교'

  • 곽수근 광저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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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곽수근 광저우 특파원 사진

    곽수근 광저우 특파원

    중국 광둥성 광저우시에 자리 잡은 위주(魚珠) 선착장. 규모도 작은 데다 조선소들 사이에 숨어있어 처음 온 사람은 찾기 쉽지 않다. 그럼에도 이곳은 광저우 선착장 중에서 외지인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이다. 배를 타고 건너편 창저우(長洲)섬의 황포군관학교로 가려는 관광객이 끊이지 않기 때문이다. 폭우가 쏟아진 16일에도 다른 성(省)에서 온 관광객이 줄을 이었다. 청소년들은 극기 훈련을 받고 있었다.

    1938년 일본군 공습에 잿더미가 된 후 1996년 지금 모습으로 다시 지어진 황포군관학교는 작년 중·일 갈등이 격화되면서 관광 명소로 떴다. 일본 제국주의와 맞서 싸운 영웅들의 자취를 찾아 중국 전역에서 사람들이 몰려왔다. 일제(日帝)와 봉건 군벌에 맞서기 위해 국민당과 공산당이 손을 맞잡았다는 학교 설립 이념은 시진핑 주석의 '중화 민족 부흥' 기치와 들어맞는다며 올 들어 더욱 주목받고 있다. 민족·민권·민생 삼민주의로 유명한 쑨원(孫文)이 1924년에 세운 황포군관학교는 장제스(蔣介石·전 중화민국 총통 및 국민당 대표)가 교장, 저우언라이(周恩來·전 중국 총리 및 공산당 대표)가 정치부를 맡는 등 국민당·공산당 주요 인사들이 참여한 군사·정치학교다. 기념관 사적실은 '황포군관학교 정신을 이어받아 해협 양안의 중화민족 자손(중국과 대만)이 손잡고 통일을 이뤄내야 한다'고 결론 맺고 있다.

    이처럼 황포군관학교가 중국에선 새롭게 조명되는 데 비해 한국에서는 잊혀가고 있지는 않은지 되돌아보게 된다. 1919년 3·1운동 이후 국내의 항일 투쟁이 어려워지자 독립운동가들은 군사훈련의 필요성을 절감해 황포군관학교에 입학했다. 조선총독부 폭탄 투척을 비롯해 요인 암살 및 폭파 활동으로 유명한 의열단의 김원봉을 비롯, 임시정부 내무부 차장을 지낸 권준 등 독립운동가 수백 명이 이곳을 거쳐 항일 투쟁의 기둥으로 섰다. 황포군관학교가 신흥무관학교와 의열단 등 무장 독립 단체의 계보를 잇고, 광복군 창설의 디딤돌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받는 이유다. 그런데 황포군관학교 기념관에선 이러한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전시실에는 '베트남·북한·싱가포르의 혁명적 젊은이들이 황포군관학교로 왔다'는 설명과, '북벌 도중 숨진 황포군관학교의 북한 학생을 기리는 장례식 장면'이라는 사진이 있을 뿐이다. 한국인에 대한 언급은 한 줄도 없다.

    황포군관학교는 대한민국 독립운동사와 한·중 협력의 역사적 사실이 담긴 장소다. 하지만 이에 대한 한·중 양국의 평가를 기념관에선 접할 수 없다. 한국의 외교 공관 홈페이지 자료 중 일부는 황포군관학교를 소개하면서 대한독립운동사를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무지(無知)'인지 '무관심(無關心)'인지 헷갈릴 정도다. 광저우 총영사관은 지난달 중국 현지 매체 인터뷰에 이어 이달 교민 대상 강의를 통해 광저우의 대한독립운동사와 한·중 협력 알리기에 나서고 있다. 하지만 황포군관학교에서 피땀 흘린 우리 독립운동가들이 제대로 평가받고, 그들의 발자취를 기념관에서 만나기 위해선 정부 차원의 더 큰 노력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