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부 5부 52방
오부 (한성부)
오부(五部)는 조선시대 한성부의 행정구역을 말한다. 동부·서부·남부·북부·중부의 오부로 구성되었으며, 이 아래에는 방(坊)과 계(契)·동(洞)을 두었다.
한성부 설치 당시에는 52방을 두었는데, 각 부의 방명은 다음과 같다.[1]
한성부 5부 52방[편집]
52방은 세종 때 서부의 3방을 폐지하여 49방이 되고, 영조 때는 동부 6방, 남부 11방, 서부 9방, 북부 12방, 중부 8방으로 5부 46방이었으며, 그 밑에 328계(契)를 두었다. 그 후 1865년(고종 2) 동부에 경모궁방(景慕宮坊)이 신설되어 47방이 되고, 계도 11개가 증가되어 339계가 되었다.
조선 초기의 한성부 관할구역은 도성으로부터 사방 10리까지로 하였으나(성저십리), 대부분의 인구가 도성 내에 집중되어 1428년(세종 10) 한성부 인구 10만 3328명 가운데 도성 밖 10리까지의 인구는 불과 6,044명 뿐으로, 도성 밖에는 서대문·서소문 밖에 2방, 동대문 밖에 2방, 남부의 2방 등 6방이 있을 정도였다.
동부 12방[편집]
- 연희방(燕喜坊)·숭교방(崇敎坊)·천달방(泉達坊)·창선방(彰善坊)·건덕방(建德坊)·덕성방(德成坊)·서운방(瑞雲坊)·연화방(蓮花坊)·숭신방(崇信坊)·인창방(仁昌坊)·관덕방(觀德坊)·흥성방(興盛坊)
남부 11방[편집]
- 광통방(廣通坊)·호현방(好賢坊)·명례방(明禮坊)·대평방(大平坊)·훈도방(勳陶坊)·성명방(誠明坊)·낙선방(樂善坊)·정심방(貞心坊)·명철방(明哲坊)·성신방(誠身坊)·예성방(禮成坊)
서부 11방[편집]
- 영견방(永堅坊)·인달방(仁達坊)·적선방(積善坊)·여경방(餘慶坊)·인지방(仁智坊)·황화방(皇華坊)·취현방(聚賢坊)·양생방(養生坊)·반석방(盤石坊)·신화방(神化坊)·반송방(盤松坊)
북부 10방[편집]
- 광화방(廣化坊)·양덕방(陽德坊)·가회방(嘉會坊)·안국방(安國坊)·관광방(觀光坊)·진정방(鎭定坊)·순화방(順化坊)·명통방(明通坊)·준수방(俊秀坊)·의통방(義通坊)
중부 8방[편집]
- 정선방(貞善坊)·광행방(廣幸坊)·관인방(寬仁坊)·수진방(壽進坊)·증청방(澄淸坊)·장통방(長通坊)·서린방(瑞麟坊)·견평방(堅平坊)
서부[편집]
현재의 의주로 주변을 제외하고는 전지역이 거의 개발되지 않고 자연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 산악과 구릉으로 점철되어 있었고, 불광천, 모래내(沙川), 봉원천, 만초천 등이 구릉 사이를 흐르고 있어 그 연변에 부분적으로 농경지가 형성되고 있었을 뿐이다. 반송방(盤松坊)은 당시 지방 도시로서는 매우 큰 곳이었던 개성, 평양과 통하는 교통의 길목이었고, 중국으로 내왕하기 위해 출발하던 지점이었기 때문에 일찍부터 다른 성저십리 지역과 달리 인가가 조밀했고, 사람들의 왕래가 분주하였다.[2]
조선 후기 | 현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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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 | 구(區) | 동(洞) |
반송방 | 중구 | 무악동, 행촌동, 홍파동, 송월동, 평동, 교남동, 교북동, 충정로1가. |
서대문구 | 충정로2가, 3가, 천연동, 냉천동, 현저동, 옥천동 | |
연희방 | 서대문구 | 북아현동, 대현동, 대신동, 봉원동, 신촌동, 창천동, 연희동, 북가좌동, 남가좌동. |
마포구 | 성산동, 중동, 노고산동, 망원동, 합정동, 동교동, 서교동, 상암동. | |
은평구 | 수색동, 증산동 | |
연은방 | 서대문구 | 홍제동, 홍은동, 녹번동, 응암동, |
은평구 | 신사동, 구산동, 역촌동, 대조동, 갈현동, 불광동, 진관동, 구파발동 |
주석[편집]
- ↑ 《태조실록》(태조 9권, 5년(1396 병자 / 명 홍무(洪武) 29년) 4월 19일(병오) 1번째기사)
- ↑ 최완기 [1997년 3월 10일]. 《한양: 그곳에서 살고 싶다?》, 초판, 서울: (주)교학사, 26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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