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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 인문학 메카'의 셋방살이,[태동고전연구소 재정 위기]

굴어당 2015. 3. 10. 11:39

 

'동양 인문학 메카'의 셋방살이

[태동고전연구소 재정 위기]

대학 구조조정으로 지원 끊겨 남양주 보금자리서 종로로 이사
17평 오피스텔, 신입생 10명 수업… 연말엔 모금액마저 바닥날 듯

"다음 주엔 여기까지 외워오도록 하지."

6일 서울 종로구 낙원상가 인근 오피스텔 7층. 유학 경전 '대학(大學)'의 첫 장 강의를 마친 성태용 건국대 철학과 교수가 수강생 10명에게 이렇게 말했다. 한국고전번역원 부설 고전번역교육원, 성균관 한림원과 함께 '국내 3대 한학(漢學) 전문 교육기관'으로 꼽히는 태동고전연구소의 올해 첫 수업 시간이다. 성 교수는 이 연구소의 1기생이고, 수강생들은 36기생이다. 이들은 사제(師弟)인 동시에 선후배인 셈이다.

'돌아앉아서 외운다'는 뜻의 배송(背誦)은 1976년 이 연구소가 첫 연수생을 받은 이후 40년 가까이 간직해온 전통이다. 수업마다 이전 수업 때 배운 부분을 외우는 걸 '단강(單講)'이라고 하고, 학기가 끝날 때마다 '논어'와 '맹자' 같은 경전을 통째로 외우는 걸 '총강(總講)'이라고 부른다. '총강에서 떨어지면 선배 대접도 제대로 못 받는다'고 할 만큼 이 연구소에선 혹독한 '통과의례'가 되어 왔다. 자수(字數)만 3만5000여자에 이르는 '맹자'는 소리 내어 읽는 데만 4시간 가까이 걸린다.


	성태용(가운데) 건국대 교수가 6일 서울 종로구 오피스텔에서 태동고전연구소 36기생들에게 ‘대학’을 강의하고 있다.
성태용(가운데) 건국대 교수가 6일 서울 종로구 오피스텔에서 태동고전연구소 36기생들에게 ‘대학’을 강의하고 있다. /김성현 기자
이 연구소는 한학자인 청명(靑溟) 임창순(任昌淳·1914~1999) 선생이 1963년 설립했다. 선생은 4·19 혁명 당시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는 붓글씨를 직접 쓰고 가두시위에 나섰다가 1962년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직에서 해직되자 이듬해 연구소를 세웠다. 1976년에는 경기도 남양주시에 지곡(芝谷)서당을 세우고 연수생을 받았다. 학생 전원에게 3년간 수업료 없이 기숙사를 제공하는 전통도 이때 만들어졌다. 지금까지 졸업생을 230여명 배출했다. 그 가운데 100여명이 대학 강단에서 후학을 가르친다.

하지만 최근 이 연구소는 경기도 남양주의 '본가'가 아니라 종로 오피스텔의 17평 '셋집'에서 연수생들을 가르친다. 사연인즉슨 이렇다. 1985년 임창순 선생은 경기도 남양주의 연구소 부지 5000여평과 서적 1만여권을 한림대에 기증했다. 연구소는 한림대 부설이 됐고, 대학 측은 연수생 전원에게 매달 장학금을 지급했다. 하지만 최근 전국 대학들이 구조 조정의 '몸살'을 앓는 가운데, 한림대 이사회는 지난해 '태동고전연구소에서 연구 기능만 남기고 한학 교육과정은 폐지하기로 했다'는 문서를 연구소 측에 보냈다. 태동고전연구소는 지난해 신입생을 받지 못했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연구소 졸업생들은 지난해 11월 총회를 열고 "모금 운동을 벌여서 전통을 이어나가자"고 결의했다. 지금까지 모금한 돈은 1억여원. 이름을 밝히지 않은 독지가는 4000만원을 지원했다.

이 돈으로 올해 초 신입생 10명을 다시 받았다. 하지만 오피스텔 임차료를 내고 학생들에게 소정의 장학금을 지급하고 나면 올해 말쯤 모금한 금액은 바닥을 드러낸다. 모두 '인문학의 르네상스'라고 하지만, 정작 동양 인문학의 '메카'는 재정난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역설적 상황이 벌어진 셈이다. 김만일 태동고전연구소장은 "인문학의 수도꼭지에선 물이 철철 흐르는 것 같지만, 정작 그 수원(水源)은 바닥을 드러낸 셈"이라며 "이렇게 되면 학문의 후속 세대는 더 이상 마실 물이 없게 된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