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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대회 "인문학, 나는 왜 이 길을 가는가"

굴어당 2015. 6. 14. 02:30

 

안대회 "인문학, 나는 왜 이 길을 가는가"

“옛글을 읽고 옛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것이 내가 하는 일이요, 취미다. 그런 점에서 호고벽(好古癖)에 빠진 사람이라는 평을 들을 만하다… 새로우면서 현재에도 큰 의미를 던져주는 글과 삶은 없을까 늘 찾아다닌다. 그런 생각으로 옛글을 읽다가 선비들 특유의 모습과 흥미로운 사유의 자취를 찾게 되면 메모하고 또 글을 썼다. 한 편 한 편 축적해 놓고 보니 조선시대 선비하면 막연하게 떠오르던 모습과는 적지 않은 차이가 있었다…

낡은 거죽을 벗겨내고 다가가 살펴보면 오히려 더 진지하고 따뜻한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그들이 품은 생각과 마음이 보이는 듯했다. 이 땅에 살았던 선비들의 인생과 글은 수백 년이란 시간을 초월하여 여전히 신선한 감동을 던지고 삶의 의미를 되새기게 만든다.” /‘선비답게 산다는 것’

“진정 우리가 배우고 싶고 알고 싶은 것이 무얼까 생각하고 나아가 세상을 구성하는 다양한 폭을 생각한다면, 우리의 시선을 좀 더 확대해야 한다. 넓어진 그 눈으로 18세기 조선을 다시 들여다보면, 전문 여행가와 원예가를 통해 당대 사회의 생활과 사람들의 취미가 더 잘 보인다. 책장수와 춤꾼을 통해서는 지식사회와 시장의 소란스런 일상이 우리 눈앞에 환하게 드러난다.

역사가 정치나 제도와 같은 공식적이고 중요한 것만 다룬다면 인간의 진실한 삶과 문화는 어디서 찾을까? 거시적 이해로부터 일상의 삶과 인간의 문화로 시각을 넓혀야 한다.” /‘벽광나치오’

“원문에서는 200자 원고지 여섯 장에도 미치지 못하는 시학의 텍스트를 이토록 두툼한 책으로 길게 펼쳐냈으되, 책의 제목처럼 궁극의 시학을 찾아냈다고 확언할 수 있을까? 처음 이 책을 쓰기로 마음먹으면서 꾸었던 꿈은 이를 통해 동아시아 지성인의 미학과 그 궁극적 담론인 인생의 품격을 제시하는 단계까지 나아가는 것이었다.

과연 내가 그것을 이루었을까? 시원한 답을 내리기 어렵다. 목표했던 문제들을 조금씩 건드리기는 했으나 충분하지 못한 느낌이다. 그래도 목표를 향해 걸어가는 첫걸음은 당당히 떼지 않았을까 자부해본다.” /‘궁극의 시학’

“담배는 인문학을 공부하는 내게 문화사적인 면에서 꼭 한번은 제대로 탐구해보고 싶은 유혹이었다. 문화를, 취향을, 문물의 전파와 정착을, 사회상을, 담배를 빼놓고는 실감나게 말하기 어렵다. 자칫 의도치 않은 엉뚱한 논란을 일으키지 않을까 못내 걱정하면서도 담배의 문화사를 파고들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담바고 문화사’

6월 초여름 한가로운 일요일 낮 2시. 서울 도곡동 집 근처 카페에서 만난 안대회 교수는 인사를 하다가 밭은기침을 했다. “아, 메르스가 아니니 안심하세요. 3월부터 얕은 기침이 나기 시작했는데 요즘 일이 많아서 무리해선지 안 떨어지고 계속 이러네요.”

그는 예의 상대의 불편을 먼저 신경 썼다. 만날 일이 있을 때마다 매번 그랬다. 전화 통화를 할 때도, 심지어 문자로 연락을 주고받을 때도 먼저 낮추고 배려하는 기색이 그대로 느껴졌다.

그런 모습을 보며, 제대로 된 학문은 수신(修身)과 이어지는 것이라는 옛말을 다시 한번 수긍하곤 했다.

‘한문학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를 바탕으로 종횡하는 고전 읽기와 탁월한 분석을 통해 풀어내는 그의 글솜씨는 정평이 나 있다. 특히 조선 후기 한문학이 온축해온 감성과 사유의 세계를 대중적인 필치로 풀어냄으로써 역사 속 우리 선조의 삶과 지향을 우리 시대의 보편적 언어로 바꿔 생생하게 보여준다.’

그의 주저 ‘궁극의 시학’ 맨 앞 장에 나오는 저자 소개문이다. 누구의 말인지는 알 수 없지만 과장이 아니다. 진작부터 그런 학문과 인품의 내력에 대해 한번 자세히 들어보고 싶었다. 마침 얼마 전 그의 새 책 ‘담바고 문화사’가 출간됐다. 연락해서 날을 잡았다. 그날이었다.

-한문 공부는 언제부터 하셨습니까?

한문에 대한 관심은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있었습니다. 그때 고전 교육이 지금보다는 훨씬 더 충실한 편이었어요. 개인적으로도 한자 쓰는 걸 좋아하고 고전 외는 것도 좋아하고 그랬지요.

-혹시 집안 내력이 있었나요?

그건 아니고, 시골 촌놈이다 보니 그런 거죠.(웃음) 제 고향이 충남 청양, 광천이라는 곳인데, 거기서 시골 생활을 하다 보니 다른 곳보다 조금 더 전통적인 생활을 하게 된 정도였습니다. 그렇다고 우리 집안이 가학(家學)의 전통이 있거나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시골이라도 어릴 때 한문 공부보다는 소나 몰고 할 수도 있잖아요?

아버님이 학교 선생님이었습니다. 한문 공부를 제대로 한 것은 대학 들어와서였어요. 1학년 때부터 중국어, 한문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독학으로도 하고 서당에도 좀 다녔습니다. 본격적으로는 2학년 때부터였습니다.

-국문과에 입학했는데 처음부터 한문 쪽으로 뜻을 굳힌 겁니까?

처음부터 그쪽은 아니었고. 가만 보면 제가 근원을 찾아 올라가는 성향이 있어요. 그래서 그때 대학 1, 2학년 때 가장 심취한 것 중 하나가 중국 고전이었어요. 논어, 맹자부터 시작해서 사기를 좋아했고, 그다음 그리스 로마, 유럽 비극, 이런 것도 좋아했어요. 고전 번역된 것들 많이 읽고 그랬지요. 그때 유럽 철학을 공부해도 재미있겠다는 생각도 했고.

국문과에 간 것은, 인문학 중에서 사학과를 갈까 철학과를 갈까 고민하던 중에 문학이 그래도 좀 더 무난해 보였어요. 나중에 마음에 안 들면 사학이나 철학을 전공해도 좋겠다고 그런 정도로 생각했지요. 국문과를 다니면서도 사학과, 철학과, 영문과, 중문과 같은 다른 과 강의를 많이 들었어요. 그러다 보니 성적은 안 좋았어요. 아무래도 전공 과 학생보다는 잘 나오기가 어려웠죠. 그래도 무시하고 공부했어요.

안대회 "인문학, 나는 왜 이 길을 가는가"

-학문에 뜻을 두기 시작한 것은 언제였지요?

2학년 때쯤이었어요. 공부에 매력을 느꼈고, 한문 공부도 하니까 잘 되더군요. 그래서 계속 집중해서 했습니다. 3, 4학년 되면서 이걸 해야겠다 싶었고, 학자가 되려면 책을 좀 게걸스럽게 읽어야겠다 싶었어요. 그래서 영문학 책도 읽고, 불문학 책도 읽고, 그리스로마도 읽고 인도 것도 읽고, 중국 것, 이슬람 것 눈에 띄는 대로 다 읽었어요.

물론 한문 공부는 기본으로 했구요. 하루 4시간 이상은 반드시 한문 책을 읽는 것을 목표로 삼았어요. 번역된 것 말고 한문 책. 그때 학부 때 폭넓게 읽은 것들이 지금 저로서는 큰 기반이 되지 않았나 싶어요.

-80년대 초에 입학하셨는데 한창 정치적으로 소란스러웠을 때 아니었나요?

그렇죠. 아마 제일 시끄러웠을 때지요.

-시국 문제로 고민하지는 않았습니까?

왜 아니겠어요. 연세대도 당시 학생운동의 중심 중 하나였으니까. 그런 게 굉장히 고민이 되고, 데모에도 많이는 참가하지 않았지만, 시국에 대해서는 굉장히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지요.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다른 한편으로는 일종의 돌파구 비슷한 것으로 기본이 되는 걸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취직 같은 것 신경 안 쓰고 공부하는 쪽으로 더 깊이 파고 들어갔어요.

-외롭지는 않았습니까?

굉장히 외로웠죠. 학과 내에서도 조금 외톨이 비슷하게 지냈어요. 같은 학부 학생들하고 친하기보다는 학교 밖의 다른 선생님들하고 친했죠. 그때 제가 1년 동안 배운 분이 도올 김용옥 선생님입니다. 당시에 같이 수학하던 무리를 ‘도올 사단’이라고 했는데, 거기 가서 공부했지요. (김용옥의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 각주에 공부 모임 참석자 중 한 명으로 이름이 나온다) 당시에 일본 철학자 책, 한의학의 고전이라는 ‘황제내경’도 읽고 그랬어요.

-그때 동학(同學)은 누구였지요?

주로 고대 철학과 중심이었지요. 그 외에 연세대, 서울대, 서강대, 여러 대학에서 왔어요. 대부분 공부하는 분들이었으니까 거기서 새로운 지적 자극도 많이 받았어요. 도올 선생이 그 후에도 물론 많은 활동을 하셨습니다만, 제가 보기에 가장 왕성하게 지적 열기에 차있었던 시기가 그때 아니었나 싶어요. 굉장한 자극을 받은 기억이 납니다.

-비교적 일찍 공부에 뜻을 두신 셈인데, 그 뒤로 학문의 길에 들어선 것을 후회해 본 적은 없습니까?

왜요. 많았지요. 제일 힘들었던 때는 석사 후 박사 과정 들어갈 때였어요. 결혼도 해야 하고 그랬는데 그때 경제적으로 너무너무 곤란했어요. 집안 사정이 좋은 것도 아니었고. 형제가 넷인데 제가 장남이었어요. 월급을 가지고 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요즘은 그래도 인문학에 대한 지원이 상대적으로 매우 많은 편인데, 당시에는 정부 측 인문학 지원이 일절 없었어요. 박사 학위 받기 전에 생계가 힘드니까 ‘내가 왜 이걸 했나. 나도 그렇게 무능하지는 않았는데’ 그런 생각까지 들더군요.

그 다음 힘들었던 때가 박사 학위 받고 10년 동안 강사 생활을 할 때였어요. 요즘은 그때보다 교수 되기가 더 어려워졌지만, 그래도 그때는 공부만 열심히 하면 30대 중반이나 후반 정도에는 되는 분위기였어요. 그런데 저는 잘 안 됐어요. 처음 영남대 교수로 간 게 마흔두 살이었으니까, 상당히 늦은 편이었지요.

물론 공부를 열심히 하고도 안 된 분도 적지 않았지만, 그래도 제 나름은 열심히 했고 인정도 받았음에도 교수 임용이 잘 안 됐어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얽혀 있었는데, 그때 굉장히 갈등했지요. 이 공부를 계속해야 하나 싶었지요. (그때 안 교수의 임용 불발에 반발해 대학원 박사과정 학생들이 집단 자퇴하는 소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안대회 "인문학, 나는 왜 이 길을 가는가"

-영남대에 가서는 학문에 정진할 수 있었나요?

거기서 3년 동안 서울에서 왔다갔다하면서 직장 생활을 하다가 명지대에서 오라고 해서 갔고, 그러다 2년 반 만에 성균관대 제의를 받아서 오게 됐지요. 한번 전임이 되니까 그 다음부터는 이런저런 제의가 들어와서 지금 성대에 안착하게 됐습니다.

-학문에 대해 그렇게 심각한 회의가 일었을 때는 어떻게 견뎌냈나요?

다른 게 할 게 없더라구요. (웃음) 사실 제가 20-30대를 주변에 한눈팔지 않고 보냈습니다. 한눈을 팔았다고 한다면 기껏해야 다른 분야 책 읽고 지식 쌓고 한 정도였어요. 조금은 무책임하게도 그 어려운 중에 아르바이트 같은 것도 별로 안 했어요. 사실 당시엔 할 것도 많지는 않았지만, 강사 생활한 것 외에는 경제생활이라고는 한 게 별로 없었어요.

하지만 제일 큰 이유는 제가 하던 공부가 다른 무엇보다 재미가 있어서였어요. 공부를 해 나가면서 든 생각이, 지금껏 학계에서 많은 선배분이 공부를 해왔고 연구 성과를 냈다고 하지만, 어쩌면 이렇게 기반이 잘 안 닦인 상태에서 허술하게 돼 있고, 이 중요한 것들을 왜 사람들은 말하지 않는 건지, 그런 생각이 자꾸 드는 거예요.

그러니 외면을 할 수가 없겠더군요. 공부하면서 계속해서 새로 발굴되고 발견되는 부분들에 대한 매력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어요. 이건 내가 아니면 잘할 수 없겠다고 생각되는 부분들이 많이 나오니까, 결국엔 내가 해야겠다 이런 생각이 든 거지요.

-잘 할 수 있겠다 싶었던 것이 구체적으로 뭐지요?

예를 들자면, 제가 초창기에 낸 저작 중에 명종 때 윤춘년(尹春年, 1514-1567)이라는 사람에 관한 것이 있어요. 가끔 정난정 사극 할 때도 나오는데, 그 사람이 당시 이조판서도 하면서 책을 낸 것이 우리나라보다 일본에 더 많이 가 있어요. 그게 사적으로 굉장히 중요한데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연구가 한 편도 나와 있지 않았어요. 이렇게 지적으로도 역사적으로도, 출판역사에서도 중요한 것들이 안 나와 있는 것을 보고, ‘야 이건 안 되겠다’ 싶어서 책을 썼지요. 그때 연구가 그분에 대한 이해의 새로운 계기가 됐어요.

그 뒤에는 소품문(小品文)에 대한 연구를 했습니다. 그전에 학계에서 한두 번 연구가 되긴 했어요. 하지만 대체로 “별 게 있느냐, 이런 건 우리 문학사의 한 현상으로 간주하기 어렵다”고들 봤어요. 하지만 제가 계속 자료를 발굴해서 논문을 쓰고 언론에도 소개되고 하면서 상황이 바뀌었어요. 소품문이라는 것이 조선 후기 문학사에서 굉장히 중요한 현상이라는 것을 밝혀냈지요. 물론 저 혼자서 한 것은 아니지만 나름 역할이 컸다고 자부합니다.

그런 것들이 작다면 작겠지만, 문학사를 바라보고 우리 한문학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제공한 것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 뒤에도 지속적으로 이런 발굴 작업을 한 결과, 저 혼자만의 작업으로 그치지 않고 후속 작업들이 다른 분들에 의해 나오기도 하고, 학계나 문화계 일반에서도 반응해주고 하니까, 공부하는 재미랄까 의의랄까 그런 것들을 느낄 수 있었던 거지요. 그러다 보니 후회하거나 멈추거나 그럴 수 없었습니다.

-이전 선행 학자들과 비교하면 어떤 차이가 있나요?

조선 후기 문학 쪽을 보면 그전까지는 대개 작가론 차원에 머물거나 연암 박지원을 비롯한 유명 인사 중심으로 연구하곤 했어요. 또 그 시기에 유명했던 리얼리즘 논쟁이 있지요. 우리 문학을 볼 때에도 (주로 외국 문예이론을 끌어와) 그게 사회적인 효용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따졌는데, 저는 그런 쪽을 한 적은 있지만, 그보다는 작품의 당대 실상에 맞춰 접근하자는 입장이었지요. 그렇게 해서 문학 연구 방법 자체를 상당한 정도로 바꿨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걸 저 혼자만 한 것은 아닙니다. 결정적으로 몇 분 든다면 정민 선생이나 강명관 선생을 비롯해 우리 세대가 함께한 거지요. 그런 점에서 문학 연구를 문화 전체에 대한 시각으로 봤고, 요즘 개념으로는 일상사 연구의 시각으로 본 셈이지요. 지금 문학 연구에서도 그 점이 크게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전까지는 우리 문학을 지나치게 역사적 가치랄까 문학사적 가치로만 봤다면, 저를 비롯한 학자들이 지금 시대 사람이 읽어도 감동할 수 있는 문학이라는 부분을, 다양한 저술을 통해 드러내는 활동을 많이 했지요. 정민 선생과 ‘태학산문선’을 같이 기획해서 시리즈로 낸 것이라든지, 제 책 ‘선비답게 산다는 것’을 비롯해 독자들 사이에 스테디셀러가 된 몇몇 저작들을 낸 것이 그런 차원이었다고 하겠습니다.

-대중적으로 화제가 된 책 중에 ‘18세기의 맛’이 있지요? 18세기학회 회장으로 있을 때 낸 것으로 압니다만 어떤 학회인가요?

안대회 "인문학, 나는 왜 이 길을 가는가"

18세기학회는 두 그룹으로 돼 있어요. 유럽 쪽은 18세기 불문학이 중심이 돼서 영문학자도 있고. 다른 한쪽은 국학자들 중심으로 돼 있지요. 그 둘이 함께 18세기를 연구하는 모임입니다. 구성원이라고 해봐야 수십 명밖에 안 됩니다. 학회지도 벅차서 안 내는데, 학술 논문을 쓰는 중압감에서 벗어나서 재밌게 같이 공부해 보자는 거지요. ‘18세기의 맛’이 그 결실이었습니다. 18세기를 안의 밖의 시각에서 교차시켜 보려 한 것인데 서로 큰 도움이 됐다는 게 중론입니다.

-정민 선생이나 이종묵 선생 같은 분들이 다 18세기학회 소속이지요? 이 분들과는 언제부터 교분이 있었나요?

정민 교수(한양대)나 이종묵 교수(서울대)나 80년대 후반 석사 시절부터 서로 소문을 듣고 알았습니다. 서울대 누구, 한양대 누구, 고려대 누구가 열심히 한다는 식으로 안 거지요. 논문도 서로 교환하고 학회에서 서로 어울리고 하면서 의기투합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그때부터 서로 거의 30년 지기로 지냅니다.

-세 분이 동년배인가요?

그렇습니다. 학계를 보면 특히 한문학 쪽에 저희 연배를 전후로 3-4년 사이 분들이 대학 교수로 많이 있습니다. 부산대 강명관 교수, 고려대 정우봉 교수, 성균관대 진재교 교수라든지 여러 분 있습니다.

이 분들이 서로서로 자극을 주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이쪽에서 뭔가 연구를 해서 내면, 또 저쪽에서 새로운 것을 볼 수 있는 시각을 열어주는 식으로. 그게 또 다른 학과 쪽으로도 전이되고, 그런 점에서 학문 활동을 활성화시키고 한 성과가 있지 않나 싶군요. 학계 내부뿐만 아니라 출판을 통해 다른 많은 분들도 공감하는 장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문화사적 의미도 있는 것 아닌가 싶기도 하구요.

-특히 정민 선생과는 연구하시는 분야나 내신 책들이 유사하거나 겹치는 부분도 있고 상호보완적인 것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굳이 이야기하자면 저는 18세기 시와 비평으로 들어갔고, 정민 교수는 17세기 초반 산문론으로 들어갔고 그런 차이가 있지만 결국 18세기 쪽에서 만나게 된 거지요.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게 연구 대상이 되는 흥미로운 소재들이 18세기에 많이 있습니다. 서로 많이 겹치거나 관심사가 공유되는 부분들이 있는 거지요. 앞서 말씀드린 몇몇 분들을 보면 18세기, 19세기와 다 연결돼 있지만 18세기 현상에서 파악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혹시 정민 선생과는 어떤 라이벌 의식 같은 것은 느끼지 않나요?

하하, 감당이 안 되지만 왜 없겠어요. (웃음) 서로 저쪽에서 뭘 해서 내면, 나도 ‘야, 이거 안 되겠다’ 하면서 또 분발하고 그러지요. 그래서 저는 학계에서 상당히 더 많은 공부 그룹이 만들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연배마다 말이지요. 지금 젊은 세대는 젊은 세대대로 서로 좋은 의미에서 자극되고 격려도 받고 하면 좋겠어요.

왜 그러냐면, 요즘 드는 생각이 학교에서 논문은 아주 많이 나오는데 거기에 독창성이 적거나 지나치게 전문적일 경우 그걸 보는 사람은 저자하고 몇 명밖에 안 된다고들 합니다. 고생해서 쓰지만, 일반인은 고사하고 연구자도 관심 있는 몇 명만 읽고 마는, 고립된 연구가 참 많아요. 안타깝습니다.

우리 연구가 비단 국문학이나 한문학 하는 사람만 보는 것이 아니라 역사학 하는 사람, 그런 데 관심 있는 사람, 또 그냥 공부하는 일반인도 읽고 감동 받고 하는 것이 좋지요. 우리 독서계에는 외서 번역물이 범람하는 실정이지만 모국의 문화 현상을 다룬 것을 가지고 독자들한테 잘 읽히고 감동을 줄 수 있는 것을 만들어내는 게 중요하다고 봅니다. 앞으로도 이런 부분이 18세기뿐만 아니라 17세기, 19세기, 상고 시대로 더 다양하게 넓어져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언젠가 서양 고전학 하신 이태수 선생도 인문학이란 모국어로 서로 자기 이야기를 하는 대화라고 하시더군요.

맞습니다. 바로 그렇습니다.

-그런 점에서 일반을 위한 책도 많이 내시는 편인데, 다른 분들 이야기로는 대학에서 특히 젊은 교수들의 경우 연구나 다른 업무 부담이 크다고 합니다. 어떻게 극복하셨습니까?

실제로 그렇습니다. 대학 교수 평가에서 연구 업적이 아주 중요한 지표인데 논문이 기준입니다. 하지만 논문 쓰기가 그리 쉽지가 않습니다. 새로운 것이 없거나 일정 형식에 맞지 않으면 통과되기 어렵습니다. 그러다 보니 교수들이 자유롭게 연구할 수 있는 여지가 크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 경우에는 최대한 연구하고 쓰는 시간을 확보하자는 주의로 생활합니다. 최대한 잡스러운 일은 피하는 거지요. 강연은 완전히 안 하는 건 아니지만, 대부분을 거절합니다. 그래도 교수 생활이 생계는 되니까, 연구실에서 조용히 앉아 있을 때가 잦습니다. 강의나 다른 용무가 없는 날은 집에 칩거하기도 합니다. 연구실에는 전화도 결려오고, 다른 일로 방해받을 수 있으니까요.

그렇게 제가 쓸 수 있는 시간을 최대한 확보해 놓고 논문도 쓰고 그렇게 나온 것을 가지고 일반 교양서로도 씁니다. 책을 읽고 연구하는 중에도 늘 머릿속에 가지고 있다가 저술 작업도 하지요. 1년에 적어도 한두 권은 내는 식으로. 논문도 연 3-4편 정도 씁니다. 기본적으로 늘 새로운 자료를 읽으려고 노력합니다. 쓰면 쓸수록 새로운 주제들이 나옵니다. 늘 머릿속에 다음에 논문으로 쓸 것, 저술할 것들이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시간입니다. 그걸 확보하기 위해 최대한 애를 씁니다.

-일과가 정해져 있나요?

안대회 "인문학, 나는 왜 이 길을 가는가"

보통 7시쯤 일어나서 12시쯤 잠자리에 듭니다. 일어나서 학교 강의 있으면 지하철 타고 가서 연구실을 지키다가 강의하고, 일이나 저녁 약속 있으면 나가고 합니다. 강의 없을 때는 주로 집에서 일어나 공부하고 점심 먹고 산책하고 글을 씁니다. 거의 모든 시간을 공부하고 강의하는 데 쓰는 편입니다.

-지금까지 책을 얼마나 내셨지요?

일일이 세보질 않아서... 저서와 번역서 합치면 20종 내외가 될 것 같군요.

-그 중에 주저랄까 가장 애착이 가는 책이 있나요?

아무래도 최근에 낸 책들이 과거에 낸 것보다는 기억에도 더 잘 남고 해서인지 애착이 가지요. 꼽으라고 하면 재작년에 낸 ‘궁극의 시학’ 그리고 최근에 낸 ‘담바고 문화사’, 이 두 저작이 기억에 남고 아끼고 싶은 책입니다. ‘궁극의 시학’은 동아시아 문인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던 시학 텍스트인데, 원문이 겨우 1152자밖에 안 됩니다. 조금 긴 시 한 편에 불과하지요. 하지만 그 속에 그림이나 시, 도장 같은 다양한 분야의 소재를 가지고 독특한 동양의 미학을 설명합니다.

안대회 "인문학, 나는 왜 이 길을 가는가"

제가 원래 시비평이 전공인데 그 텍스트를 당시 문화사적 시각으로 폭넓게 살펴보고 깊이 있게 분석을 시도한 거지요. 여하튼 한 페이지도 안 되는 텍스트를 가지고 700페이지가 넘는, 호흡이 긴 책을 낸 것에 대해 자부심을 느낍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걸 쓰면서 너무너무 고생을 많이 한 탓도 있고요.

-어떤 고생 말이지요?

다양한 분야를 다루고 있는 데다가 텍스트 자체도 읽고 분석하기가 대단히 어렵습니다. 또 그걸 분석하면서 다양한 관련 자료를 읽어야 하는데 그 양이 너무 많았습니다. 또 하나는 그걸 문학동네 카페에서 연재를 했는데, 아주 동양적인 전문적인 내용이지만 문학에 관심 있는 교양인도 널리 읽게 하고 싶다는 목표를 세웠기 때문이었어요.

이런 미학 저서가 일반 사람들한테도 읽히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글을 쓰는 데 노력을 많이 기울였어요. 학술서를 일반인까지 읽게 하려다 보니, 그게 저로서는 굉장히 힘든 작업이었지요. 그래도 책이 나온 후에, 물론 관심 있는 분들 말씀이겠지만, 글이 읽을 만하다는 평도 받고 학계에서는 여러 해석에 있어서 좋은 점도 있었다는 평도 받고 하니까 보람이 있었습니다.

안대회 "인문학, 나는 왜 이 길을 가는가"

‘담바고 문화사’ 경우 사실 이게 문학 저작이라고는 할 수 없고 일종의 문화사 저작입니다. 문학을 연구하는 사람이 뭐 담배를 가지고까지 글을 쓸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18세기 전후를 공부하다 보면 늘 마주치는 게 담배였어요. 자료가 그렇게나 많아요.

그런데 다들 지나쳐버려요. 사실 역사학자나 경제사학자들이 연구해야 할 주제인데, 담배처럼 평범한 물건에 대한 연구는 드물어요. 400년 동안 우리나라 경제사와 문화사에서 그렇게 중요한데도 불구하고 단행 논문조차 10편도 안 됩니다.

제가 보기에 답답하기도 해서 10년간 자료를 모아서 낸 거지요. 선행 연구들이 없다 보니 담배의 어떤 부분을 다룰지 고민도 컸습니다. 결국 30-40가지 주제로 썼는데 하나하나가 대부분 처음 주목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 나름으로는 두고두고 기억할 저작 아닐까 합니다. 내용이 잘 됐든 못 됐든. 그처럼 다양하게 담배의 여러 면을 살펴본 저작은 지금까지 없었다고 개인적으로는 생각합니다.

중국이나 일본에 번역해서 내도 전혀 부끄럽지 않다고 자부해요. 제가 출판사에다 책 표지에다 영어로도 쓰라고 했어요. 이건 미국에다 소개해도 학문적인 자존심에 상처를 입지 않을 자신이 있다고 말이지요. (실제로 책 표지 한글 제목 밑에 ‘The Cultural History of Tobacco Korea 1609-1910’이라고 적혀 있다)

물론 비판도 있을 수 있지만, 집필할 때부터 외국에 번역해도 자신있다는, 오만인지 주제넘은 건지 모르겠지만, 그런 생각으로 썼습니다. 그러다 보니 애착도 많이 갑니다.

-출간 후 반응은 어땠나요?

‘담바고 문화사’도 기대 이상으로 인터넷신문까지 포함한 언론에서도 크게 많이들 다뤄줬어요. 아마 제가 낸 책 중에 가장 많이 환영받은 것 아닌가 싶은데, 독자들 반응은 제 생각보다는 덜했어요. 그 이유가 아마도 지금 사람들이 담배에 대해 가진 생각 때문 아닌가 싶어요. 요즘 같은 때 담배라는 걸 굳이 책으로 읽어야 하나, 차(茶)도 아닌데 싶은 생각이 들 수 있지요.

하지만 제가 담배를 다루려고 한 시각은 담배라는 것이 우리 문화, 경제, 사회에 아주 중요한 소품이었는데 그것이 어떻게 관련돼왔는지 문화사적으로 조명한 거지요. 저도 담배는 안 피웁니다. 예전에 좀 피다가 끊었지요.

그래도 책을 읽어본 분들은 아주 재미있다, 이게 역사다 이런 말씀들을 합니다. 이런 부분에서 어떤 생각이 드느냐면, 우리 독서계에서 인문 저작을 읽는 시야가 생각보다는 폭이 그리 넓지는 않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특히 스마트폰이 나온 후로 책 읽는 독자들이 많이 줄었다고 하는데, 인구도 줄고 읽는 시야도 더 좁아진 것 아닌가 싶은 거지요. 아무튼, 제 판단으로는 독자가 많고 적고와는 상관없이, 그동안 낸 어떤 책보다 교양과 전문성을 함께 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안대회 "인문학, 나는 왜 이 길을 가는가"

-책을 내시면 반응에 마음을 졸이시나요?

예전엔 쓸 때 어느 정도 가늠이 됐습니다. 하지만 요즘은 잘 안 잡힙니다. 저도 이제 나이가 50을 넘어가니까, 지금 주 독서층인 30-40대와는 좀 달라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그런 기대나 반응에 대한 조바심 같은 것은 여전히 있다고 봐야지요. 그래도 늘 이렇게 생각합니다. 마음을 단단히 먹고 독자가 한 명이라도 있고 내 생각에 의의가 있다고 하면 나는 한다.

-책은 계획을 세워 놓고 내시나요?

그렇진 않습니다. 조절할 정도는 아니고. 그렇게 많이 낼 수 있는 게 아니니까. 다만, 적어도 5년에서 10년 정도 미리 고민합니다. ‘궁극의 시학’만 해도 첫 번째 책 ‘윤춘년(尹春年)과 시화문학’(2001)을 낼 때부터 생각이 있었던 것이고 구체화한 것은 한 5년 정도 걸렸지요. 담바고 문화사는 자료 수집까지 생각하면 10년 정도 걸렸어요. 번역서 ‘연경, 담배의 모든 것’(2008)을 낼 때 이건 저작으로까지 가자고 생각했고, 또 몇 년 고민하면서 한 6년 걸렸지요.

이런 책을 쓸 때는 자료도 상당히 많고 검색만으로 되는 것도 아니니까, 계속 찾고 사서 모으기도 하고 그러지요. 그러다 보니 저만 가진 자료도 적지 않습니다. 그렇게 모아서 어떤 주제로 할 것인가 늘 메모를 해놓고 정리를 해뒀다가 저술에 들어가고 하지요. 실제 집필은 1년 정도, 교정에 반년 정도 걸리는 편입니다.

-현재 작업 중인 책도 있습니까?

올해 내야 하는 걸로는 아동 한시가 있습니다. 유치원이나 초등학생 나이 정도 되는 옛날 아이들이 쓴 한시 수백 수를 모아서 풀어 쓴 겁니다.

-아이들 한시라니 특이하군요.

네 이런 책은 처음 내는 겁니다. 원래 제 아이들이 초등학생일 때 출판사에서 책 한 권 내자는 걸 거절하다가 아이들 생각해서 계획했는데 결국 10년이 넘었어요. 지금은 아이들도 다 커버렸는데 지금이라도 미래의 손자들 위해서 내자고 해서. (웃음)

과거의 아이들은 이랬다는 걸 보여주는 표현력에 관한 건데 아이와 어른 모두를 위한 책입니다. 아이들 교육과도 밀접하게 관련이 있고요. 옛날이니까 고리타분했을 거로 생각하시겠지만 절대 그렇지 않아요. 그때 세계도 다른 부분이 있고 똑같은 부분이 있어요. 한자로 썼다 뿐이지. 과거에는 이랬다는 것을 아는 것 자체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15년 정도 자료를 모았는데, 흥미로운 게 많아요. 지금 아이들은 아파트나 건물에 갇혀 있는데 과거 아이들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더 순수한 면도 있고.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고, 요즘 아이보다 더 심하게 주입 교육을 받은 아이도 있어요. 그러다 보니 닥치는 대로 쓰는 아이도 있어요. 그것은 그것대로 중요하지요.

또 다른 책으로는, 성균관대로 간 후로 방학이고 학기 중이고 상관없이 계속해서 일주일에 하루씩 박사 과정을 중심으로 한문 자료를 같이 읽어오는데 함께 한 부분은 번역서로 내는 게 있습니다. 지금까지 번역이 안 된 좋은 자료를 가지고 합니다. 정말 학문적으로 엄정한 텍스트를 만들어내는 작업은 제 개인 공부이기도 하지만 후배 학자를 기르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중요한 텍스트를 정확하면서 빨리 읽는 훈련들을 해야겠다 싶어서 시작한 거지요.

그렇게 해서 곧 나올 책이 ‘주영편(晝永編)’이 있습니다. 정동유(鄭東愈, 1744~1808)라는 18-19세기 대단히 중요한 실학자의 책인데, 제일 유명한 것이 ‘훈민정음론’입니다. 조선 후기 훈민정음 학문에 관한 한 최고 수준인데 그게 이 책 안에 다 담겨 있습니다. 이 책의 이본(異本)이 한 8종 됩니다. 그 전체를 교감(校勘, 같은 책의 여러 이본을 비교해 차이 나는 것을 바로잡는 것)해서 완전한 정본을 만들고 그걸 기준으로 번역한 겁니다. 그동안 딱 한 번 번역된 게 있는데 오류가 너무 많아 믿을 만한 텍스트로 만든 거지요.

안대회 "인문학, 나는 왜 이 길을 가는가"

우리 주요 한문 저작 중에 그런 게 많습니다. 그전에 낸 박제가의 ‘북학의(北學議)’도 정말 중요한 텍스트인데도 원본 교감이 제대로 안 돼 있었어요. 전 세계에 퍼져 있던 십여 종의 필사본을 다 모아서 원본 텍스트로 냈지요. 저희 같은 학자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 중 하나가, 연구실에 앉아서 교양서만 내서 될 일은 아니고, 학문적으로 엄격한 믿을 만한 정본을 내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걸 토대로 또 다른 저술이 나오고 외국으로 번역될 때도 올바르게 될 수 있지요.

제가 그다음으로 학생들과 같이해서 거의 완성 단계에 있는 것이 이중환의 ‘택리지(擇里志)’입니다. 얼마나 중요하냐면, 이쪽 공부를 많이 안 한 사람도 제목은 알잖아요. 이중환 선생이 쓴 우리나라 전체 인문지리에 관한 책인데, 이본이 한 300종 됩니다. 어마어마하게 많지요. 그런데도 지금까지 교감 작업이 딱 한 번 있었어요. 최남선 선생이 조선광문회를 통해 한 게 전부였어요.

택리지를 역사적으로 가장 먼저 간행한 사람은 일본인입니다. 1870년 개항 이듬해인가에 일본인이 일어로 번역해서 냈습니다. 이유는? 조선을 침략하려면 조선 지리를 알아야 한다는 생각에서였지요. 여기에 소중한 정보가 많았으니까요. 그다음에는 중국에서 일본 택리지 보고 중국어로 냈습니다. 그다음 또 일본인이 조선고서간행회에서 냈습니다. 그다음에 나온 것이 조선광문회 최남선 선생이었습니다. 그 후에 일본에서 또 대여섯 종이 번역됐습니다.


안대회 "인문학, 나는 왜 이 길을 가는가"

지금 제가 가지고 있는 이본만 10종 돼요. 제가 하나 가져왔는데, 이건 1809년 경기도 지방에 있는 분이 그때 이 귀한 책을 보고 너무 감격해서 자기가 베낀다는 내용의 필사기가 나와요. 종이질도 굉장히 좋습니다. 여하튼 이런 게 매우 많은데 이런 작업을 누가 하겠습니까.

외국 선진국들이 공학, 의학, 경제학만 발달한 게 아닙니다. 다 이런 기초 작업을 이미 오래전에 해놨고 지금도 하는 겁니다. 우리는 이런 기초 작업이 지금도 잘 이뤄지지 않고 있어요. 가장 많이 읽히는 저자, 예컨대 ‘열하일기’만 해도 이본들은 많은데 텍스트 작업이 안 돼 있어요. 우리가 읽고 있는 열하일기가 잘못 읽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는 얘기지요. 물론 그렇게 오래된 것은 아니어서 그 정도까지는 아니겠지만요.

‘북학의’만 해도 이본이 10종이 넘었어요. 혼자서는 하기 어렵습니다. 함께 공부하는 학생들이 있으니까 할 수 있었던 거지요. 목민심서? 정본 작업이 돼 있을 것 같지만, 그 동안 안 돼있다가 최근에야 되었습니다. 그 중요하다는 퇴계집도 아직 안 되어 있습니다. 이본의 양이 많은 것은 집체 작업을 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누가 하겠습니까. 남한테 맡길 수 없습니다. 지금 아니면 언제 하겠습니까.

담배 문화사? 전 세계에서 담배 문화에 관한 한 조선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그런데도 동아시아 담배 이야기할 때 조선은 빠집니다. 볼 책이 없으니까요. 제대로 된 논문이 다섯 편도 안 됩니다.

-조선의 담배 문화가 왜 그렇게 중요했는지 좀 더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인류 역사에서 기호식품으로 담배만큼 아주 빠르게 전역으로 퍼진 것도 없습니다. 커피? 지금도 안 먹는 지역이 있습니다. 담배만큼 특이한 기호품도 없습니다. 먹고 마시는 게 아니라 연기를 들이마시는 겁니다. 개항의 시대에 신대륙에서 나와서 전 세계로 퍼진 것들이 많았지만, 담배만큼 파급력이 강한 것이 없었지요.

조선 경제에 미친 영향도 엄청났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비중이 큰데 조선 시대에는 주식(主食) 빼고 담배만큼 경제 비중이 큰 작물이 없었습니다. 당시 산업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적어도 20%는 됐을 겁니다. 그게 무려 4세기 동안 계속됐습니다. 문화사에도 매우 큰 영향을 끼칠 수밖에요.

조선 시대 흡연율이 최소 40%는 된다고 봅니다. 남녀노소 불문했습니다. 아이들도 7-8세만 돼도 담배를 피우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조선 후기에 사람들이 거리에 다니면서 담배 피우는 모습이 10명 중 2-3명꼴로 나옵니다. 그 중 40%는 담뱃대를 들고 있습니다. 당시를 이해할 때 굉장히 중요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연구가 제대로 돼 있지 않았던 거지요.

안대회 "인문학, 나는 왜 이 길을 가는가"

-처음부터 오랫동안 18세기에 천착해 왔습니다. 왜 18세기 조선입니까?

우리 역사에서 가장 역동적이고 매력적인 시기였습니다. 여러 가지가 맞아서 가능했지요. 첫째, 당시가 국제적으로 안정돼 있었습니다. 우리는 밖이 불안정하면 곧바로 영향을 받는 위치에 있지 않습니까. 지금도 그렇지요. 18세기는 그런 점에서 혜택받은 시기였습니다.

17세기만 해도 임진왜란 때 참혹한 피해를 보았고 곧바로 여진족에게 패했습니다. 그 후 제대로 안정이 확보된 게 18세기였습니다. 북으로부터도 일본으로부터도, 심지어 서양 세력으로부터도 침략이 없었습니다. 국제적으로 안정되니 사람들이 그 안정을 구가하면서 뭐든 마음대로 할 수 있었습니다.

다음으로, 경제적으로 안정됐습니다. 인구도 늘고 산업 생산력도 있고 도시도 발달했습니다. 빈부 격차도 일어났지만, 소비를 즐길 수 있는 시기였습니다. 정치적으로 많은 정변이 일어나긴 했지만, 영조가 나름 탁월한 정치력을 발휘해 안정을 이뤘습니다. 그 결과 조선 후기에 와서 가장 높은 수준의 문화력을 보이게 됩니다. 개인의 욕망이 표출되고 이것을 기록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졌습니다.

17세기와 19세기에도 기록은 있지만 18세기만큼 다양하게 풍부하지는 않았습니다. 19세기만 해도 1801년 정조가 사망한 후부터 이듬해 신유사옥을 비롯해 사상 탄압이 일어났습니다. 단순히 천주교 신자만 죽인 게 아니라 이단적 사상은 다 문제가 됐습니다. 그 압박감 때문에 18세기 이후에는 글을 봐도 그렇게 다양하지도 자유롭지도 않습니다.

17세기에도 이민족 침략을 받다 보니 안으로 오소독스한 성리학 일변도가 되면서 이단 사상에 대한 탄압이 있었습니다. 윤휴 같은 사람이 사문난적으로 몰려 죽은 게 그때였습니다. 18세기 와서 온갖 다양한 이야기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성적인 문제, 음식 문제, 정치적 반대자에 대한 공격, 인간의 욕망 같은 다양한 것들이 분출됐지요. ‘열하일기’만 해도 19세기 같으면 나오기 어려웠을 겁니다. 그렇게 다양한 만큼 연구할 것도 많은 거지요.

-그 무렵에 외부 문물도 많이 유입됐지요?

청으로부터도 그전보다 훨씬 더 많은 정보와 책들이 들어왔지요. 직접 만나서 교류하는 것도 훨씬 자유로웠습니다. 일본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양쪽으로 굉장히 자유롭게 1대 1로도 만나고 서적으로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 정보를 활용하는 힘도 18세기가 가장 컸습니다.

-지금도 사극이나 영화를 비롯해 우리 역사라고 하면 조선에 관심이 높습니다. 조선은 어떤 나라였나요?

(크게 숨을 내쉰 후) 단정 짓기가 굉장히 힘들지요. 조선의 전기와 후기만 해도 아주 많이 다릅니다. 이런 나라라고 정의하는 순간 그 말은 바로 오류가 될 겁니다. 500년이나 유지된 나라라는 게 한마디로 정의내려질 수 있을까 싶군요. 굳이 조선 후기를 중심으로 이야기한다면 답답한 부분들이 많지요. 요소요소에서 성장할 수 있었는데 못했습니다.

예컨대 임진왜란 전후한 시기라든가, 18세기 경우도 영정조 때 당시 중국이나 일본과 공식 외교 통로가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확대해 서양과도 통할 수 있었는데 그걸 막았어요. 우리 배가 중국과 일본을 넘어 밖으로 가본 적이 없지요. 표류 말고는. 왜 그렇게 닫아 놨는지.

우리 지식인들이 그렇게 폐쇄적인 사람들만 있었던 것은 아닌데, 박제가나 홍대용 같은 사람이 계속 개방하자고 했지만 결국 실천에 못 옮겼습니다. 또 하나가 교육이나 인간관계에서 너무 폐쇄적이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부분도 있겠지만, 주변 중국이나 일본보다 사농공상이 너무 강하게 단절돼 있어서 신분 이동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어요.

사회가 발전하려면 공인과 상인의 활동 범위가 넓어져야 하는데 신분으로 누르고 막아놓으니 좀 더 건강하고 역동적인 사회로 가지 못했습니다. 그게 19세기에 주체적으로 외세에 대처하지 못한 결정적 이유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외침을 받았을 때 이렇게 허망하게 망한 나라가 있을 수 있을까 싶은 거지요.

-그 조선의 주역이 선비였지요? 최근에 선비를 우리 문화의 브랜드로 하자는 목소리도 있습니다. ‘선비답게 산다는 것’이라는 책도 내셨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안대회 "인문학, 나는 왜 이 길을 가는가"

선비도 양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조선의 문제는 선비가 책임져야 합니다. 국왕이 있기는 하지만 국왕조차 선비 중 1인이었지요. 선비가 500년 나라를 이어간 대단한 인텔리 계층이고 문화의 담당자로서 장점도 많지만, 망할 때 그렇게 허망하게 망한 것을 보면 한계도 분명합니다.

그것이 가진 취약성은 뭘까. 가문을 유지하고 사회 체제를 공고히 하는 데는 장점이 많았지만, 전체적으로 나라를 건강하게 유지하고 군사력이나 경제력이 강한 나라로 만드는 데는 실패한 것 아닌가 싶습니다.

-선생님은 전통 사대부와는 다른 ‘벽광나치오(癖狂懶痴傲, 한 가지 일에 미쳐 최고가 된 사람들)’ 같은 비주류에 주목했지요?

안대회 "인문학, 나는 왜 이 길을 가는가"

제 책 ‘선비답게 산다는 것’이나 ‘벽광나치오’에서 소개한 인물들은 전통적인 선비들과는 조금 다른 사람들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누가 뭐라든 상관하지 않고 자기가 좋아하는 것에 인생을 바치는 사람이었습니다. 18세기에 선비들 가운데 그런 좀 현대적인 사람이 많았습니다.

-선생님은 인문학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웃음) 인간의 모든 문제를 주제로 삼아 연구하는 학문일 텐데요. 예컨대 기술에 대해 연구를 한다고 해도 기술 자체나 새로운 작동의 문제를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역사적인 관점 인간학적인 관점에서 연구한다면 인문학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어떤 주제든지 그것이 인간의 보편적인 행복과 인간다운 삶과의 관계에서 연구한다고 하면 인문학적 접근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핵심 학문은 문사철이 중심이 되겠지만.

-요즘 인문학에 대한 관심이나 학습 열기가 높은 것 같습니다. 인문학자로서 어떻게 보시는지요?

저는 좀 다르게 봅니다. 요즘 인문학에 대한 관심이 높다고 하는 것은 그 자체가 경영이나 그런 쪽 관심의 어떤 파생이 아닌가, 경영이나 기술이나 생산성, 취직 이런 문제와 관련지어 수단적으로 보는 것 아닌가 하는 인상을 받습니다. 그것이 진정한 인문학 발전으로 이어지는지는 회의적입니다. 인문학이 가진 본연의 가치를 높이고 살리는 방향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번 정부에서도 인문학을 활성화한다고 했는데 그게 전부 인문학의 대중화에만 초점이 맞춰지고 있습니다. 인문학 연구를 활성화하는 게 아니라, 전파하는 데 경도돼 있습니다. 실제로 인문학이 어떻게 연구되는지에 대한 관심과는 무관합니다. 그러다 보니 인문학 대중화의 손쉬운 방법으로 강연 행사로 가고 있습니다. 인문학 강연조차도 인문학을 제대로 하는 사람이 가서 하느냐. 의문입니다. 대부분 강연을 잘하는 사람 위주입니다.

최근 교육부총리의 발언은 단적인 예입니다. 5월 초쯤인가, 인문학 졸업생들 취직이 안 되니까 인문학과 학생 줄이고 공대를 더 늘인다고 했습니다. 저는 이런 말 한마디가, 정부에서 인문학 쪽에 수천억 원 뿌린 것보다 더 큰 악영향을 미쳤다고 봅니다. 사회에서 말하는 인문학 열기라고 하는 것이 실제로 학교에서 인문학을 하는 것과는 상반된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인문학의 진정한 가치를 잘 모른다는 말씀 같군요.

요즘 인문학 독서만 하면 뭐가 나올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과연 그렇게 해서 나올까, 저는 의구심이 듭니다. 더 큰 문제는 사회 전반에 걸쳐 인간적인 가치에 대한 경시랄까 소중함에 대해 둔감한 것 같다는 거지요. 모든 것을 경제 가치, 기술적 가치에만 두니까 학과도 그런 방향으로 나가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 속담에 굽은 나무가 선산 지킨다는 말이 있지요. 굽은 나무가 당장에는 효용가치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마지막까지 남아 중요한 가치를 갖는다는 거지요. 인문학적 가치는 세월호 사건 같은 것이 터지면 알게 되거나, 인류애가 전체적으로 위기가 닥쳐야 그에 대한 문제의식이 생기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연구를 위한 읽기 이외에 다른 독서는 어떻게 하시는지요?

조금 게걸스럽게 읽는 편인데 요즘 바빠서 덜해졌습니다. 제가 요즘 늘 옆에 두고 보는 책은 사전입니다. 장승욱의 ‘재미나는 우리말 도사리’라고. 흔히 잘 안 쓰이는 우리말을 모아놓은 책인데 정말 괜찮은 책입니다. 글을 쓰다가 우리말을 살려 쓸 수 있는 것이 뭐 있는지 찾아보곤 합니다.

그다음 서양 책으로는 이븐 할둔의 ‘역사 서설’이 있습니다. 이슬람 세계의 경제와 역사와 문화를 한 책에서 다 넣은 것인데 최근 완역이 나왔습니다. 문화를 경제사적 관점에서 다룬 정말 좋은 책이어서 기회가 닿을 때마다 읽습니다.

소설도 들쑥날쑥 읽곤 합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최근 것 빼고 거의 다 읽었습니다. 밀란 쿤데라 소설도 거의 다 읽었는데 작년에 나온 ‘무의미의 축제’는 읽고 좀 실망했습니다.

안대회 "인문학, 나는 왜 이 길을 가는가"

-좋아하는 저자는 누구입니까? 옛날 사람과 요즘 사람을 뽑는다면?

조선 시대로는 역시 이덕무, 박제가, 그리고 다산입니다. 그중에서도 굳이 꼽자면 이덕무가 제일 좋은 것 같습니다. 정보량이 많고 상당히 감성적인 글이 많아서 좋아합니다. 다산 글은 굉장히 명료합니다. 그 시대에도 현대 학자의 글 같습니다. 어떤 일을 분석할 때 다산처럼 하면 요즘 논문을 쓰는 데도 좋지 않나 싶습니다.

요즘 저자로는 김연수 작가 책을 즐겨 봤는데 최근 것은 못 봤습니다. 최승호 시인 시도 많이 읽었습니다. 또 한문학을 하지만 시조집도 가끔 읽고 합니다. 한문학적인 것의 최종 기착지가 시조나 소설 아닌가 싶어요.

가령 춘항전은 이미 여러 번 읽었지만, 한 시간이면 죽 읽는데, 우리말다운 우리말을 어떻게 구사하면 좋은지 알게 해줍니다. 요즘 현대 작가나 서양서 번역들 보면 문체 자체가 많이 바뀌었잖아요. 춘향전은 구수한 옛날 문체가 있어서 가끔 읽어보면 균형 감각을 찾을 수 있게 됩니다.

-죽기 전에 꼭 써야지 하는 책이 있습니까?

현재로서는, 벌써 10년 전부터 다짐해온 게 있는데 박제가 평전을 꼭 한번 써보고 싶습니다.

안대회 "인문학, 나는 왜 이 길을 가는가"

-이유는요? 좋아하는 학자는 이덕무라고 하셨는데.

박제가는 선이 굵고 직선적입니다. 이덕무는 평온하달까, 그런 부분이 있지만, 박제가는 굉장히 역동적인 면이 있습니다. 예전부터 제가 박제가의 ‘북학의’도 번역하고, 산문집도 냈지요. 박제가가 지성사에서 차지하는 큰 부분을, 자료를 모아서 평전을 쓰고 싶습니다. 그건 정년퇴임 한 후에 하고 싶어요.

그전에는 이덕무, 박지원, 박제가, 유득공 같은 그 주변의 문인 그룹인 ‘백탑시파(白塔詩派, 조선 후기 지금 탑골공원 원각사 10층 석탑 주변에 모여 살던 문인들이 결성한 모임)’의 지성사적 위치나 활동, 문학 사상 이런 것을 조명한 단행본을 내고 싶은 생각이 있습니다. 조금 시간이 걸리긴 할 텐데 가능하면 정년 이전에 쓰려고 합니다.

그전에 소품문(小品文, 일상의 소회를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쓴 글) 관련 논문을 그동안 10여 편 썼는데 묶고 보완해서 단행본을 내려고 합니다. 또 내년 봄쯤에는 18세기 도시와 도시 문화에 관련된 논문 15편을 많이 보완해서 단행본으로 낼 계획도 있습니다.

-백탑시파 하니까 ‘백탑파 시리즈’를 소설로 계속 써내고 있는 김탁환 작가가 생각나는군요. 그분도 얼마 전 강연에서 백탑파 인물들에 심취해 있다고 하시더군요.

저와 페친(페이스북 친구)인데, 그분이 그 책 쓸 적에도 제 글 많이 참조하고, 봐준 적도 있습니다. 그분이 그 소설 쓸 적에는 학계에서 연구된 최신 정보를 잘 활용해서 썼기 때문에 세련됐고 정보량이 풍부하고 정확합니다.

백탑시파는 지적으로 대단히 흥미로운 학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럽에 아날학파니 프랑크푸르트학파니 이야기하는데 우리 과거 지식인 그룹 중에도 그런 학자들이 있었다는 부분을 드러낼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학자들의 세계를 여러 차원에서 보여줄 수 있는 저서를 써보려고 요즘 계속 자료도 모으고 있습니다. 저 자신에게도 공부가 많이 됩니다.

-페북도 많이 하시나요?

처음에는 출판사 권유로 시작해 봤는데 조금씩 하다가 어느 순간 접었습니다. 그전에는 신문에 연재하는 ‘가슴으로 읽는 한시’도 올렸는데, 보기에 따라서는 이것도 내 자랑으로 받아들일까 봐 올리지 않습니다.

-글을 쓰고 읽는 문화를 아끼는 사람들로서는 소셜 공간을 어떻게 가꿔 나갈 것인가가 숙제인 것 같습니다.

우리 사회에 책 읽는 사람 수가 많이 줄었다고 하잖아요. 일본도 마찬가지라고 들었어요. 최근에 방송 뉴스를 보니까, 어떤 조사에서 청소년의 장래희망 순위를 내놨어요. 앞으로 되고 싶어하는 직업으로 의사, 변호사 같은 것은 미국이나 우리나 마찬가지이고, 소방관과 경찰관 선호도가 미국에서 유독 높은 점이 우리와 달랐어요. 뉴스 초점은 그것이었는데, 그래픽의 위쪽을 보니까 미국 선호 1위에 작가라고 돼 있는 거예요.

순간 제 눈을 의심했어요. 작가가 상위권에 오른 것 자체가 신기했어요. 조사의 신뢰도가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만약에 사실이라면 미국이라는 나라가 가진 선진성과 미래 전망은 저 부분이 보여주겠다 싶었어요. 거기서 말하는 작가는 소설가 차원이 아니라 어떤 형태로든 저술을 말하는 건데, 저술이라는 작업이 가지고 있는 전체적인 조망력과 창조적 기획력, 완결성이란 게 대단한 거거든요.

일반 논문과는 또 다르게 저술이 갖는 의미지요. 우리 사회도 저술이 더 활성화되고 글을 쓰고 즐길 수 있는 공부가 더 많아졌으면 합니다. 그렇게만 되면 인문학을 일부러 활성화하고 할 필요도 없어요. 자연적으로 그렇게 된다면 그게 진짜 인문학이지요.

공학자가 단행본 저서로 공학의 이야기를 풀어내면 그게 인문학이지 뭐겠습니까. 천체과학자인 칼 세이건이 훌륭한 교양서를 쓰지 않았습니까. 인문학이라고 해서 인문학자들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대학에서 인문학 하는 학자들은 자기 전공에만 집중돼 있기 때문에 보편적인 인간적 가치문제와 연계시켜 생각할 여유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지식을 많은 사람과 공유하고 사람들에게 보다 나은 상상력을 불러일으키고, 인간다운 가치에 대해 희망을 품게 하는 것, 그게 인문학입니다.

안대회 "인문학, 나는 왜 이 길을 가는가"

◆안대회

성균관대 한문학과 교수. 충남 청양에서 태어나 연세대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영남대와 명지대 교수를 지냈다. 한문학에 대한 해박하고 깊이 있는 연구를 토대로 학술서와 교양서 저술 양 면에서 두각을 나타내왔다. 조선후기 한문학의 깊고 넓은 세계를 대중적인 문체로 풀어내는 것으로 정평이 나있다. 저서로 ‘선비답게 산다는 것’ ‘조선후기 시화사 연구’ ‘18세기 한국 한시사 연구’ ‘고전 산문 산책’ ‘윤춘년과 시화문화’ ‘벽광나치오’ ‘궁극의 시학’ ‘담바고 문화사’ 등이 있다. 역서로 ‘소화시평’ ‘궁핍한 날의 벗’ ‘북학의’ ‘연경, 담배의 모든 것’ 등이 있다.